주일오후설교

최종 계시

아빠와 함께 2025. 9. 28. 20:29

최종 계시 

2025년 9월 28일                    본문 말씀: 50:1-3

50:1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레미야로 바벨론과 갈대아인의 땅에 대하여 하신 말씀이라

50:2 너희는 열방 중에 광고하라 공포하라 기를 세우라 숨김이 없이 공포하여 이르라 바벨론이 함락되고 벨이 수치를 당하며 므로닥이 부스러지며 그 신상들은 수치를 당하며 우상들은 부스러진다 하라

50:3 이는 한 나라가 북방에서 나와서 그를 쳐서 그 땅으로 황폐케하여 그 중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함이라 사람이나 짐승이 다 도망하여 가느니라

바벨론에 대한 계시가 최종 계시로 들어오는 이유는, 모든 인간세계가 바벨론이라는 제국으로 집결되기 때문입니다. 즉 결국은 하나로 모아집니다. 전에 애굽에서 탈출했다는 이스라엘 마저 바벨론에 흡수 통합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접수하면서 바벨론 내부에 어두운 저주가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이에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가로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계 18:21) 이미 바벨론으로 단일화 이 인간 세계는 그 안에 스며든 말씀에 의해서 저주의 운명을 맞이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 단일화된 이 인간 세계에 거처를 두고서는 안심하고 있는 인간성 자체는 어떻게 되느냐입니다.

같이 폭삭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어쩔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탄식은 결코 대책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나름대로 새로운 삶의 맛을 느끼기 위해서 이리저리 옮겨 다녀보지만 결국에는 이 지구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누구나 바벨론 제국의 시민으로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늘 하루를 재미나게 살고 싶어하지만 조금만 시간을 갖게 되면 지루하고 답답하고 탈출로를 찾지 못한 힘겨운 인생이 됩니다. 쉽게 말해서 색다르고 새로운 기쁨이 되는 경우를 갈수록 소진되어 버린다는 뜻입니다. 과연 이대로 말씀의 저주에 덮어 이 지구와 더불어 멸망할까요? 아무런 대책이 없이 말입니다.

이 지구가 대책없이 파괴되고 결국은 불바다가 되는 판국에 하나님께서 지구가 바벨론화된 그 내력을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이 지구를 비롯해서 자연세계가 말씀을 머금고 있다는데 주목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안에 살고 있는 인간이 덩달아 말씀과 관련있습니다. 지구가 그냥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화’된 채 멸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능력 발휘에 어떤 씨앗이 있음을 알리시는 방식입니다.

즉 구원되는 새로운 사람들은 이사야 7:14 준해서 나타납니다. “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누구든지 처녀에서 태어나지 아니하면 임마누엘, 곧 ‘하나님과 함께 살 권한 자’가 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미 육신의 부모로부터 태어난 인간들의 입장에서 무슨 수로 다시 처녀의 몸에 새 아기로 출발할 수있습니까? ‘인간이 해내지 못한다’고 해서 주님께서 이점을 감안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쨌거나 하나님께서는 기존 인간을 구원할 마음이 없습니다. 기존 인간을 잘 구슬리는 식으로 구원해주시지 않습니다.

단호하십니다. 명백하십니다. 기존의 육에서 출생한 자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서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멸망하는 바벨론 제국 안에서 한 통속으로 같이 묶어서 멸망시키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물음이 이러해야 합니다. “처녀는 어디서 출현하면 그 처녀에서 어떻게 새로운 자식이 나오느냐”고 말입니다.

이 새로운 방식은 기존 방식을 부정하면서 출현합니다. 예레미야 50:4-5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오며 그와 함께 유다 자손이 돌아오되 그들이 울며 그 길을 행하며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할 것이며 그들이 그 얼굴을 시온으로 향하여 그 길을 물으며 말하기를 너희는 오라 잊어 버리지 아니할 영영한 언약으로 여호와와 연합하자 하리라

여기에 ‘언약’이 나옵니다. 언약은 인간이 기존 인간들이 관여할 수 없습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자식을 낳는’ 원칙은 언약이 품고 있는 내용이 저주를 퍼붓는 상황에서 병행해서 성취되고 있습니다. 처녀가 자식을 낳는 것은 기존의 창조 세계서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들의 육신으로는 ‘다시 태어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기존의 창조 세계가 한계를 맞이해야 합니다. ‘나를 구원해 줄 능력’은 애당초 성립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심판에서 살아남은 노아가 어떻게 노아의 죽음 이후에 자식들 대에서 적용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노아는 물론 방주로 인하여 홍수 속에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그 후의 사정은 창세기 9:20-29에 나와 있습니다.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 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지내었고 향년이 구백오십 세에 죽었더라”
 
즉 구원받은 노아의 자식이라고 할지라도 그 자식들이 자동적으로 방주의 효력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구원받은 아버지와 함께 구원받았기에 당연히 천국 백성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육을 끊어주는 요소가 언약으로부터 나옵니다. 육이 끊어진다는 것은 새로운 천국에서 살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점이 언약 안에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하체를 덮어주는 것으로 과연 구원이 되는 걸까요? 언약은 자체적으로 계속 숨겨진 사실이 역사에 흘러보냅니다. 마치 강물이 바다를 향해 멈추지 않고 질주하듯이 말입니다. 이러한 언약의 원천은 신약에 가서 나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창세 전의 계획이란 창조를 능가하는 능력이 잠복되어 있는 내용이 있었다는 겁니다. 즉 시간과 공간을 뚫고, 해체하면서까지 작용하는 힘이 창세 전부터 있었다는 말입니다. 출애굽기 때에 나타난 능력은 죽음에 직면했지만 뭔가 행하므로서 살게 되는 능력입니다. 어린양의 잡아 그 피를 문지방과 문설주에 바르는 것으로 구원되는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능력이 다가 아닙니다. 신약에 오면 아예 인간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죽는다 할지라도 그 죽음에 예수님의 부활한 능력이 성령을 통해서 전달되면 그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처녀에서 잉태하신 유일한 예수님의 능력이 시공간을 뚫고 미리 주어지게 되면 그 사람은 곧 말씀으로 인해 규정된 천국의 시민권을 획득한 사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 자신을 지키기보다는 주님의 언약을 지키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73강-예레미야 50장 1~3절(최종 계시)250928-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50장 1~3절입니다. 구약성경 1134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레미야로 바벨론과 갈대아인의 땅에 대하여 하신 말씀이라, 너희는 열방 중에 광고하라 공포하라 기를 세우라 숨김이 없이 공포하여 이르라 바벨론이 함락되고 벨이 수치를 당하며 므로닥이 부스러지며 그 신상들은 수치를 당하며 우상들은 부스러진다 하라, 이는 한 나라가 북방에서 나와서 그를 쳐서 그 땅으로 황폐케 하여 그중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함이라 사람이나 짐승이 다 도망하여 가느니라”

오늘 말씀 가운데 바벨론이 나옵니다. 바벨론이 나오고, 다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4~5절에 보면, 시온이 나옵니다. 바벨론 나오고 시온 나오는데, 지금 예레미야가 계시할 때는, 지금 바벨론이 뜨고 시온, 이스라엘은 완전히 박살 나는, 패망하는 그러한 시점에서 예레미야가 이런 계시를 주신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이같이 물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질문할 수 있는가. 세상이 ‘안전빵입니까, 말씀이 안전빵입니까?’라고 물을 수 있어요. 세상은 말씀에 의해서 해체됩니다. 해체된다는 말은 세상이 떠돌아다닌다고 하거나, 또는 어디서 어디로 산사태처럼, 홍수처럼, 또는 탁류처럼 그 마지막 목적지를 향하여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의 계시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마지막 계시다’

마지막 계시가 바벨론의 운명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계시가 다 끝나버립니다. 바벨론에서 계시가 다 끝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여기 예레미야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데, 요한계시록 18장 21절에 보면, 그 내막이 나옵니다. “ 이에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가로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큰 성 바벨론이 나오고 이 바벨론은 마지막에 이 세상이 꺼질 때, 전 세계를 통합한 나라를 대표하는 이름이 바벨론입니다. 모든 나라, 현재 200국 이상이 있지만 그걸 하나의 나라로 뭉치면 무슨 이름으로 나타날 수 있느냐. 성경에는 바벨론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또다시 제가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사는 현재 거처가 어디입니까.

시온입니까, 바벨론입니까? 제가 이렇게 질문하는 이유가 있어요. 사람은 안정적인 거처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정적인 거처를 원하지만, 그것이 답답하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나는 이곳에 산다. 이제 평안하다. 어제도 편안했다. 오늘도 편안하다. 그럼 내일도 편안하다’라는 이 말을 달리하면, 결국 여길 떠나서 더 나아갈 것은 없다는 이야기거든요.

크루즈(유람선) 여행, 배 타고 여행하는 것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만, 거기에 대한 동영상은 많이 본 적이 있어요. 그런데 돈 500만 원, 천만 원 주고 그걸 탈 때, 만약 크루즈 배가 고장이 나서 부산항에 출발도 못 하고 정박해 있다면, 뷔페 먹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집에 있는 것과 차이가 없잖아요. 차라리 집에서 라면 끓여 먹는 게 낫지, 여기서 떠나지도 못할 배에 왜 타고 있느냐.

주께서는 자기의 거처를 떠나게 함으로써 새로움을 제공해 주십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지구 외에는 다른 떠날 데가 없어서, 구차하게 ‘아이고, 뭐 살다 죽을 때까지 여기 아파트에 그냥 살지’라고 자기가 고정된 거처에 있는 것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마치 어느 영화 제목처럼. 어쩔 수가 없어요. 박찬욱 감독의 영화처럼. 스스로 갇혀있는 꼴이 되는 거예요.

어쩔 수가 없으니까 거기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사는 게 답답해요. ‘누가 서울로 불러주는 사람 없나? 밀양에서 사는 것도 한 해 두 해지. 어디 미국에서 안 불러주나?’ 또는 ‘넓은 서울에서 안 불러주나, 부산에서 안 불러주나?’라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단 말이죠. 그런데, 서울로 갔다고 칩시다. 또는 부산으로 갔다고 칩시다. 거기 가서 1~2년 살면, 어디 큰 데서 또 나를 안 불러주나?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인간은 이 세상에서 갈 곳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사고방식이 바벨론 사고방식이 되어서, ‘내 거처만 든든하면 나는 행복하다. 인생 뭐 이만하면 되었지’라는 의식 때문에, 전혀 새로움이 없습니다. 새로움이 없을 때는 즐거움이 없어요. 그냥 참지요. ‘뭐 가봤자, 그렇고 그런 생활인데, 뭐 있겠어?’라는 식으로 새로움이 없고 ‘이 땅에 태어났으니까, 이 땅과 더불어서 살다 죽으면 어찌어찌 되겠지’

죽으면 어찌 되는데요? 죽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어떤 분이 자기 죽을 것을 알고, 죽기 전에 이런 이야기를 했답니다. 시도 그런 시가 있어요. ‘이 세상 한평생 잘 놀다가 갑니다’라고 이야기해요. 전유성(개그맨)이 이야기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한평생 잘 놀다가 갑니다’라고 했을 때, 제가 그 사람에게 묻고 싶은 건 그거예요. ‘어디로 가시는데요? 어디로 가십니까?’

그 사람은 이 세상에 즐거움이 전부였어요. 오는 세상, 갈 곳에 즐거움을 미리 앞당겨서 맛본 적이 없어요. ‘어쩔 수 없이 살다가 가는 거지’라는 이런 식이지,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어서 가고 싶습니다’라는 마음이 전혀 없어요. 뭔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해체되지 않고, 이 세상이 침몰 되지 않고, 이 세상이 계속 든든하다는 그 생각 자체가 이미 바벨론화 된 생각입니다.

성경에서는 놀랍게도 이 바벨론적인 사고방식을 미리 앞당겨서 다른 나라로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애굽 나라입니다. 애굽 나라. BC 15세기 당시(1440년), 그때 세계 최고의 제국이었고, 모든 나라가 부러워했어요. ‘아, 나도 애굽나라 시민권이 있으면, 얼마나 든든하겠느냐’라고 생각을 했지요. 여기 시민권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시민권이라는 말을 살짝 바꿔 봅시다. ‘통행증’으로 한번 바꿔 봅시다.

그러면 그 좋은 나라의 통행증을 가지고, 왔다가 갔다가 이렇게 자기 맘대로 살면, 그게 얼마나 즐겁다고 생각하겠습니까. 북한 평양은 아무나 못 가요. 통행증이 있어야 가지, 북한의 지방 사람들은 평양 못 들어갑니다. 마치 한국이 미국에 취직하려고 하면, 1억 5천만 원 내야 하는 것처럼. 이건 함부로 못 들어가요. 시민권, 통행증, 그것을 사도바울이 어떤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사도바울이 빌립보서 3장 20절에서, 우리에게는 하늘나라 시민권이, 통행증이 있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그걸 확보했느냐고 묻습니다. ‘너 천국 통행증 확보했어?’라고. 와~~~ 그거 대단한 권리입니다. 그런데 미국 시민권, 애굽 시민권 있어 봤자, 큰 나라에 들어가 봤자, 물론 좋지요. 좋은데, 그 나라 말고, 그 나라 살았다가 어디를 갑니까? 그 나라 살 때까지 한 80세 살았다. 그다음에 어디 가는데요? 답이 없어요. 답이 없습니다.

지금 이 세상 사람들은 부지런히 살아요. 뭐 추석 대목이다, 어떻다, 뭐 이제 추석 하면 그다음에 또 설 대목 오지죠. 그런데 부지런하기는 부지런한 데 갈 데가 없어요. 갈 데가. 이 세상 말고 갈 데가 없습니다. ‘갈 데 없네’라고 하면 ‘아 세상이 다 그렇지 뭐. 세상 원래 갈 데 없어. 태어나 살다가, 이리저리 살다가, 이 지구 속에 살다가, 지구는 안 변하고 든든하니까 짧게 살다 죽으면 그만이지’라고 이러고 끝나는 겁니다.

근데 성경 말합니다. “지구가 폭파하는데요. 지구가 불바다 되는데요” 중요한 것은 불바다 되고 지구가 폭파하는 이 참에서 우리는 지구 사람, 지구인, 지구인 말고 다른 인간으로 바뀌어 질 필요가 있죠. 어떻게 바뀌는지 성경에서 나오는 대로 말씀드릴 테니까 여러분들이 바뀔 수 있거든 한번 바꿔 보세요. 어떻게 바뀌는지 이사야 7장 14절에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에게 주실 것이고,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바뀔 재주 있거나 한번 바뀌어 보세요. 처녀가 잉태해야 그 나라 갑니다. 처녀가 잉태해야 이름이 바뀌어요. 아무개, 권 아무개 이 아무개에서 이름이 뭐로 바뀌느냐. ‘임’ 씨로 바뀝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함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통행증 물 건너갔어요. 하늘나라 시민권 없습니다. ‘너는 세상에서 너 잘난 척했잖아. 그럼, 세상과 더불어서 같이 침몰해’

아까 바벨론이 침몰한다고 했어요. 천사가 이제 그걸 바다에다가 집어넣어 버려요. 전체 나라를, 이 세상 지구를 집어넣었으니까 침몰하는 겁니다. 지금 크루즈, 큰 배가 침몰해요. 침몰한 배에 그 크루즈 여행 가서 215호가 중요하고, 216호가 더 좋고, 지금 뭐 오션 뷰(ocean view)가 어떻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배 자체가 침몰해요. 배 자체가.

이미 그 노아 때 이야기했잖아요. 그래서 노아 홍수 이야기, 창세기 7장 8장 9장에서 노아 홍수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물론 노아가 방주로 인하여 홍수에서 살았다는 그걸 주목하지만 정작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게 따로 있습니다. 그거는 뭐냐 하면 노아의 아들들 가운데서 노아처럼 구원받은 아들이 있을까 하는 점에 주목해야 해요.

노아는 이미 홍수에서 건너 온 거 맞습니다. 이제 그다음 문제는 노아에게 주어졌던 그 법칙이 노아 죽고 난 뒤에 노아 아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때, 과연 아들들 가운데서 노아의 받은 혜택과 동일한 혜택을 아들 가운데 다 받느냐, 일부만 받느냐는 그걸 주목해야 해요. 다 받질 못합니다. 함은 저주받습니다. 그러면 함은 분명히 방주에서 살아남았잖아요. 아버지 덕분에.

그런데 함은 뭘 몰랐느냐 하면, 아버지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언약, 약속이 자기에게는 저주의 운명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함이 알지를 못했어요. 저는 이 말씀을 뭐라고 비유하고 싶으냐 하면은 바퀴벌레로 비유하고 싶어요. 바퀴벌레의 특징이 뭐냐 하면 사람들이 기겁합니다. ‘어어~저리가’ 그런데 사람들이 기겁하고 싫어한다고 바퀴벌레가, 집 안에 있는 바퀴벌레가 안 기어다닙니까?

기어 오잖아요. 사람 있다, 없다 상관없이 바퀴벌레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자기의 계획대로, 목적과 목표대로 기어다니죠.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저주받을 땅을 저주의 운명을 실어 나르기 위해서 말씀이 우리에게 기어 옵니다. ‘저리 가. 나 말씀 안 들을 거야. 나 이제부터 교회 안 나가’라고 백날 해도 이 말씀은 이 세상을 덮고 또 덮어 옵니다.

보통 해질 때를 어떤 시인은 이렇게 표현했어요. ‘저녁의 장막’이라고 했어요. 저녁의 장막, 저녁 어두움의 장막, 저녁노을의 장막. 노을이 이렇거든요. 해가 질 때 좀 밝다 싶은데, 돌아서면 벌써 깜깜하잖아요. 어두움이 이 지구를, 우리 사는 동네를 덮을 때, 사람 말 듣고, ‘저리가’라고 한다고 안 덮이는 게 아니고, 이거는 사람이 말릴 수도 없이 그 어두움의 장막이 우리 마을을 덮잖아요.

마을을 덮으면서, 그때부터 아파트에 한 둘씩 실내등이 켜지기 시작합니다. 그걸 우리는 밤이라고 해요. 밤이라고. 맞죠? 밤 되면 불 켜잖아요. 밤 되면 불 켜지죠. 밤이 왜 있습니까? 밤이 왜 있느냐 성경은 이렇게 합니다. 그거는 하나님의 계시가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대로 실효적으로 지배하기 때문에 밤이 온다고 돼 있어요. 그러면 밤 오면 자면 되고, 아침 되면 깨면 되고, 이렇게 하잖아요.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애굽이 있다. 있으면 있어라 해. 바벨론이 있다. 바벨론 망한다. 망하라고 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어?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애굽이 있음으로써 출애굽이 생겨요. 바벨론이 있음으로써 바벨론으로부터 탈출이 성립합니다. 그러면 밤이 있다는 말은 뭐냐? 네가 언제까지 밤의 지배에서 살래?

밤을 벗어나서, 이 말씀이 주는 저주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인간 다른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처녀가 아들을 낳는다는 말은, 그거는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이 어두운 권세 안에 놓여있다는 것을 그렇게 설명하는 거예요. 부모로부터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저주 아래에 놓여있고, 결국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그것이 인간에게 말씀이 주어진 확실한 현상이고 현실이다.

그러면 모든 인간은 이 땅에서, 망하는 세상에서 같이 망하게 돼 있어요. 이거는 뭐 예외가 없습니다. 명확한 사실이에요. 그런데 그 명확한 사실을 뚫고 하나님께서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게 해요. 그리고 그 사람에게만 유일하게, “임마누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있다”라는 것이 거기에서 그 요건으로 자리 잡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다. 천국 백성이죠.

천국에서 영원히 산다는 것은 처녀가 잉태하여 낳은 자식들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에요. 그 외에는 해당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명확한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죠. 이렇게 이야기면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어 놓고, 인간을 이제 내치고 버린다는 뜻입니까?’라고 이런 이야기를 해요. 그런 식으로 언급한 사람도 있고, 전에부터 제가 언급했는데, 이런 이야기를 제가 했어요.

어떤 법칙을 제가 소개했는데, 창조의 원리가 대단합니다. 대단하죠. 해를 만들고 달을 만들고. 하지만 창조의 원리보다 더 센 원리가 있는데 그게 뭐냐. 출애굽 원리입니다. 출애굽의 힘이 창조보다 더 세요. 창조는 없는 데서 만들어 냈잖아요. 출애굽은 뭐냐? 죽어 마땅한 것을 살려내는 거예요. 창조보다 더 센 힘이 이 세상 안에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언약이에요. 하나님의 언약. 그런데 출애굽보다 더 센 게 있어요. 출애굽은 ‘아이고, 뭐 천사가 온다고? 오늘 밤에? 안 되지, 안 되지. 그렇다면 뭐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양을 잡아라” ‘예, 양 잡겠습니다’ “그 피를 천사가 찾아오는 그 문지방과 문설주에다가, 옆에와 밑에 발라라” ‘예, 바르지요’ 바르니까 세상에 이런 기적이, 다른 집은 다 맏이가 죽었는데, 우리 집에는 맏이가 안 죽었어요.

‘놀라운 능력이다. 이거는 뭐 창조 능력보다 더 세다’ 맞아요. 창조보다 더 센 능력 맞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센 능력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출애굽 능력은 미리 대비가 돼요. ‘양을 잡자. 야, 빨리 양의 피를 내. 온대. 발라야지’라는 식으로 이게 대비가 되는데, 십자가는 뭐냐 하면, “너 그런 짓도 하지 마. 그냥 죽어. 내가 그냥 살려줄게. 그냥 죽어. 그냥 살려줄게”

한 것이 없이 그냥 죽었는데, 한 것이 없이 그냥 부활이 돼요. 이게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사전에 우리가 미리 예측할 수는 없고 그 능력이, 능력을 행하신 분의 영이, 성령이 미리, 멸망하기 전에, 지구와 바벨론이 멸망하기 전에, 미리 찾아와서 우리에게 그 신선함과 새로움을 맛보게 해줍니다. 처녀가 잉태하지 아니하면 임마누엘 될 수 없고, 천국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성령이 오게 되면, 이미 우리는 우리가 뭘 하든 이미 죽을 수밖에 없음을 분명히 말씀으로 운명적으로 땅!땅!땅! 확정을 시켜요. ‘네가 평생 한 것이 너를 구원하지 못한다. 어찌 기쁘지 아니하냐. 그게 마음 편하지 아니하냐’ 이거는 세상에 이런 복이 어디 있어요? 에베소서 1장 4절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복을 언제 준비했느냐가 나옵니다.

구약에서는 인간은 있다. 그리고 출애굽은 역사적으로 있다. 역사가 있고 지리적으로 우리가 몸이 있죠. 그런데 지리적으로 나도 없고 아예 시간도 없을 때 있는 계획이 에베소서 1장 4절에, 3절부터 보면,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신령한 복, 성령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신약은요, 이거는 충격적이에요. 역사적 공간과 시간이 아니라, 시간도 없었고 공간도 없었던, 창세 이후에 만들어진 적도 없었던, 창세기의 능력 이전의 능력이 바로 오늘날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미리 소식을 전해줍니다. 그 소식이 십자가 소식이고 새 언약이에요. 약속입니다.

그 약속이 우리 안에 박혀있을 때 그거는 통행증입니다. 온난화든, 뭐 기후가 어떠해서 불바다 되든, 산불 나든, 그거 몰라도 돼요. 그건 몰라도 됩니다. 구원받는 데 아무 지장 없습니다. 보이스피싱 당해서 한 2천만 원 날아가도, 내 목에 갑상선암 걸려도 아무 상관 없어요. 뭐 건강하다고 구원 더 받는 건 아니니까. 안 아프다고 천국 가는 거 아니니까.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혹독하게 이 세상에 대해서 우리는 거기서 안전빵을 얻으려고 하는 이 육신의 잘못된 비역사적인, 이 저주받은 내 몸에 대해서 아직도 미련 갖고 있는, 이 저주받은, 임마누엘 되지 못하는, 육신에서 태어난 이 몸에 얼마나 우리는 믿음과 애착을 갖는지를, 남은 생에 살면서 혹독하게 경험하는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다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이렇게 집어넣어 준 거예요. 결국 우리는 바벨론 사람이며, 바벨론을 못 버리고 있는 그러한 안타까운 처지에 있죠. 끝으로, 이 말씀을 하고 마치겠습니다. 이사야 55장 8~9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그저 인간들과 인간들의 말, 그저 뉴스에 나오는 거, TV에 나오는 이야기, 유튜브에 나오는 이야기, 그게 전부인 줄 알고 있는데,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인간들의 생각 많이 들었나?” ‘많이 들었습니다’ “평생 들었어?” ‘평생 들었습니다’ “그 생각하고 나의 생각하고 다르거든. 너는 어는 거 믿을래?” 어느 거 믿을래? 성령을 통해서 주의 말씀이 우리 속까지 들어오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멸망하는 것도 모르고 어떤 세상적인 쾌감과 즐거움을 찾지만, 답답하기 그저 없고 따분하고 지루하고 그렇다고 대책은 없고. 주여, 이것이 바로 바벨론을 좋아하는 우리의 썩어진 육신의 본모습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역시 예수님의 성령을 통해서 처녀로 태어나듯이 새로운 자아로 성령을 통해서 죽은 데서 다시 사는 그러한 주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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