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0장 9절의 말씀입니다.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첫 것을 찢어버린다, 폐한다’라는 말, 여기서 첫 것이 뭐냐하면 율법입니다. 율법은 인간의 몸이 있는 곳을 다 노리고 쳐들어오는 게 율법이에요. 율법은 ‘하라, 하지 말라.’라는 지시와 명령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들의 마음이 있고, 의지가 있고, 감정이 있고, 몸이 있는 인간에게 요구를 하는 거예요. “너 십계명 지켰어? 부모를 공경했어? 도둑질했어, 안 했어?”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주시는 이유는, 율법이 우리한테 달라붙어요. 달라붙는데 히브리서 10장 9절에 보면 달라붙으면서 “너 제대로 못 했잖아. 저주나 받아라, 이것아!” 하고 율법에 우리를 붙여서 같이 떼어내는 거예요. 붙여서 떼 낸다고요. 떼어내면 율법이 떨어져 나가면서 그동안 우리를 통제하고 총괄했던 자아라는 것도 죄인의 모습으로 율법과 더불어서 떨어져 나가요. 우리 몸에서 떨어져 나간다고요.
떨어져 나가는 것을 히브리서 10장 9절에서는 ‘첫 것을 폐한다.’라고 해요. ‘찢어버린다.’에요. 율법을 찢어버린다, 이 말은요 골로새서 2장에도 나와 있어요. 골로새서 2장의 말씀은 이 말씀보다 훨씬 더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골로새서 2장 14절에 보면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이 ‘도말한다’라는 것은 찢어버린다는 거예요. 어떤 자에게 그렇게 되느냐? 골래서서 2장 11절에 보면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입니까? 단순히 하나의 문자로 들리잖아요. 이게 문자가 아니고 십자가를 통해서 실제로 현실화시켰다는 겁니다.
분명히 성경에 나와 있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이야기가 일상의 언어에 속하지 않는 외계어,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차라리 불경처럼 이슬람의 코란처럼 ‘이거 해라, 복 받는다. 그리고 이것은 하지 마라’ 이게 얼마나 수월합니까?
성경은 전혀 수월하지 않아요.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이 엉뚱한 이야기를 가지고 이걸 믿는다? 이것은 믿지 말라는 이야기랑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네가 이걸 믿을 재간이 있어?” 뭐 이런 식이란 말이죠.
같이 탑승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은 ‘목자는 이러이러해야 되고, 양은 이러이러해야 된다는 것’으로 기존의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주님이 그들의 인생 속에 낯선 목자로 탑승하면서 그들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 점은 국가가 되고 난 뒤에 이스라엘에게도 마찬가지거든요.
목자가 보면 양 같은 양은 아무도 없어요. 목자를 이해하는 양은 없다 이 말이죠.
그럴 때 주께서의 조치는 에스겔 34장 23절에 보면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찌라.” 다윗입니다, 다윗. 좀 복잡하죠. 그냥 저쪽으로 갈 수 없습니다. 먼저 다윗이 와야 돼요.
다윗이 온다고 했는데 실제로 오신 분은 다윗의 자손이 오셨어요. 메시아가 온 거예요. 죽은 다윗이 온 건 아니고요. 메시아가 왔는데 ‘그들의 목자가 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목자가 와서 우리를 건지면 되지 않느냐?’ 이렇게 하거든요. 그런데 에스겔 36장 26-27절에 보면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다윗이 오시면서 흩어진 양이니까 그냥 데려가는 것이 아니고 그들에게 무슨 새로운, 그들의 마음 말고, 내 중심으로 사는 마음 말고, ‘예수님 중심으로 모든 게 돌아간다, 모든 것은 예수님 일하심의 하나의 부속품’이라는 인식을 하는 그러한 새로운 마음을 우리 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집어넣는 이것을 저는 두자로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납치’, 납치예요. 알아서 주님께 오질 않아요. 주님이 납치를 해야 돼요. 강제 납치예요. 말씀으로 살살 꼬인다고 교회 나오고 뭐 예수 믿고, 인간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요. 그런 것은 이미 사기꾼 목자들이 지금 하고 있어요.
“당신이 이렇게 하시면 구원받고, 이러면 복 받습니다.” 그 이야기는 사기꾼들이 지금 교회라는 이름으로 다 하고 있어요. 그렇지 않아요. 진짜 목자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성령을 안 받은 상태와 성령 받은 상태의 차이는 뭐냐? 성령을 안 받은 상태는 ‘불신자가 교회 와서 구원받겠다고 노력하는 거’ 그게 바로 그게 성령 안 받은 상태예요.
계속해서 자기가 자기에게 입힌 그 옷을 자꾸 내세우게 됩니다. ‘내가 교회 와서 이렇게 충성하고 봉사합니다.’ 자기가 만든 옷 있잖아요, 자기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입은 옷. 애완견 옷 말고요, 택배로 온 그 옷 말고 자기가 입은 옷을 자꾸 주장하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의 새 영은 주문하지도 않는데 우리에게 택배가 날아와 버렸어요. 그 영은 뭐냐? ‘십자가 앞에서 내가 뭘 해도 죄인 중에 괴수’라는 그 마음입니다. 죄인 중에 괴수에요. 다만 ‘내가 예상도 못 하는 죄의 깊이와 넓이를 죽을 때까지 계속 끄집어내는 그 모습’이 우리 일평생 할 일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이라는 그 이사야 53장 6절의 말씀이 우리를 통해서 그대로 재현되기 때문이에요. 복잡한 말로 할 것도 없이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벌써부터 우리는 말씀이 기록된 대로 보여주는, 말씀이 기록된 대로 표현해야 할 도구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거예요.
내 인생 속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말씀 속에서, 말씀에서 하지 말라고 지적된 그 죄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러한 관계속에 들어간 거예요. 목자께서 없는 양을 새로 만들어내시는 거예요. 목자가 오셔서 성령으로 “너는 양이야”라고 만들어내는 겁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말씀에 기록된 대로 ‘roll’ 말씀에 기록된 대로, 나중에 죽어보니까 이 땅에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고, 그것이 전부 다 말씀에 기록된 대로 그렇게 되어야 할 수밖에 없는 긴긴 세월을 살아온 거예요.
죽고 난 뒤에 십자가 안에 들어가 보니까, 성령을 받고 보니까 이 모든 것이 나의 인생이 아니고 주의 인생이라는 것을 그제야 발견을 하는 겁니다. 나는 철저하게 그릇 행하여 제 갈 길로 가야 하는 그것조차도 목자가 목자 되기 위한, 주님을 위한 하나의 배경이었다, 배치였고 무대 장치였다는 사실. 그게 말씀의 세계고, 히브리서에 의하면 그게 허상의 세계가 아니라 실상의 세계입니다.
그 실상의 세계 그 공간 전체가 뭐다? 거룩이고, 히브리서 10장 10절에서는 우리가 거룩한 게 아니고,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거룩 안에 놓여서 지금 벌써 살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 말씀이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고, 도리어 성경 말씀이 우리를 덮쳐서 우리가 어린 양과 더불어서 동행하고 있음을, 나는 죽고 주 안에 새로 살고 있음을, 우리가 살아있는 생애를 통해서 온몸으로 느끼면서 주께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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