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심 없는 탐욕
2025년 9월 21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49:34-39
49:34 유다 왕 시드기야의 즉위한지 오래지 아니하여서 엘람에 대한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49:35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엘람의 힘의 으뜸되는 활을 꺾을 것이요
49:36 하늘의 사방에서부터 사방 바람을 엘람에 이르게 하여 그들을 사방으로 흩으리니 엘람에서 쫓겨난 자의 이르지 아니하는 나라가 없으리라
49:37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엘람으로 그 원수의 앞, 그 생명을 찾는 자의 앞에서 놀라게 할 것이며 내가 재앙 곧 나의 진노를 그 위에 내릴 것이며 내가 또 그 뒤로 칼을 보내어 그를 진멸하기까지 할 것이라
49:38 내가 나의 위를 엘림에 베풀고 왕과 족장들을 그곳에서 멸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49:39 그러나 끝날에 이르러는 내가 엘람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방민족의 결말과 운명에 대해서 이스라엘 선지자를 통해서 언급되어진다는 것은 이스라엘과의 차이성을 부각하기 위함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이방민족에게 포위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형편도 이와 같습니다. 그들은 각자 자기 살 길이 우선입니다. 기어이 ‘나 안 다치기’에 몰두합니다.
자신이 멀쩡하게 살아 있는 게 진리인양 여깁니다. 그런데 어디에 살아 있지요? 땅 위에 살아 있기를 원합니다. 어떤 땅 말입니까? 살기 좋은 땅에서 말입니다. 살기 좋은 땅이나 경작지는 한정되어 있는 반면에 그것을 노리는 자들은 무한정입니다. 자연적으로 전쟁이 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방민족이 추구하는 바는 바로 이것입니다. 좋은 땅 차지해서 여유롭고 평화롭게 사는 겁니다. 이를 위하여 이방민족들은 나름 힘을 비축해서 대비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할 것 같으면 이 엘람 민족마저 자신의 뜻이 좌절됩니다. 더 센 힘을 가진 이웃 이방민족에 의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이들과 다른 차이점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이방민족이 멸망할 때는 그들은 한결같이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힘이 없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런 식으로 고백해서는 아니됩니다.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어겨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의해서 멸망당했다”고 말입니다.
망하고 아니 망하고를 떠나서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이방민족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생존에 뜻을 두고 살아갑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인간이 살아있음’이 아니라 ‘말씀이 살아 있음’이 우선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진 것은 이런 차이점을 드러내는 식으로 계시를 스스로 성취한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 3:17에 보면, 성경에 인간 뿐만 아니라 땅에 대해서도 아울러 관심 두고 계십니다. “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 자체가 너를 힘들게 할 것이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땅 없이는 못 살고 땅의 범주 밖으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는 겁니다. 땅이 이런 운명 속에서 이방민족들과 이스라엘은 어떤 식으로 대처방식을 보여주는 겁니까? 좋은 땅과 멋진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런 땅을 추구하므로서 인간들은 타고난 정신적 하자를 잊고자 합니다.
‘좋은 사람이 좋은 땅을 차지하는 복을 누린다’는 의식이 어느새 ‘좋은 땅에 사니까 좋은 사람이다’으로 의식으로 변질되기 마련입니다. 어쨌거나 그 사람이 사는 땅이 그 사람의 본질을 입혀주는 식으로 정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37절에서 엘람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 저주받아 멸망당합니다.
따라서 자신이 살던 땅에서 이방민족이 나름대로 믿었던 신이 있을 겁니다. 당연히 이방신이지요. 이 이방신을 섬길 때의 그들의 마음 가짐이 어떤 지를 알아서 이스라엘 여호와를 섬기는 것과 어떤 차이점이 나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이방민족은 하나님의 율법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여호와의 율법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의식하며 그들의 신을 섬기는 마음가짐은 어떠합니까? 즉 복음을 모르고 말씀을 모르는 입장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그들은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 겁니까? 이 질문은 대단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이 있다고 자부한 유대인들은 율법 없이 망하는 자들과 다를 바 없이 망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차이점은 출발점을 놓고 말해야 합니다. 인간의 의식은 과연 하나님을 섬기는 출발점으로 타당한가 하는 겁니다. 일단 이방종교에서 그들의 신을 섬기는 방식을 봅시다. 그들은 순결하고 순수한 마음, 혹은 정결한 마음을 강조합니다. 마치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말입니다.
예레미야 9:17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잘 생각하고 곡하는 부녀를 불러오며 또 보내어 지혜로운 부녀를 불러오되” 여기서 ‘곡하는 부녀’가 나옵니다. 장례식장에서 조문객들이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고인과 남은 가족들 사이에 얼마나 끈끈한 정으로 이어졌는지가 궁금한 겁니다.
그럴 때 고인의 가족 입장에서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곡하는 부녀’로서 아르바이트 씁니다. 너무 아플 때는 곡소리까지 안 나오니 대신 곡하는 사람을 써봤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방종교에서는 기도하는 것까지 그럴사한 내용과 분위기를 갖고 싶은 겁니다. 즉 신 앞에서 기도같은 기도를 원한 겁니다.
이를 위해 이방종교에서는 ‘대신 기도해주는 자’를 고용하게 됩니다. 멋있고 내용상 하자없는 기도문을 돌아가면서 활용하는 겁니다. 티벳 불교 같은 경우에는 기도문이 촘좀하게 써있는 통을 돌리면서 한꺼번에 많은 기도가 신에게 상달되게 아이디어를 끄집어냅니다. 이게 바로 ‘사심없는 탐욕’입니다.
본인의 마음은 순수하게 사심은 없지만 그것은 내부적으로 갖추어져 있는 탐욕이 그런 것으로 터져나오는 겁니다. 그렇다면 복음에서는 말씀이 어떻게 활용됩니까? 그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한도를 말씀이 지정해줍니다. 인간들은 본인들이 안 다치는 방향으로 살기에 그 선을 넘어서면 인간들의 의식으로는 더 이상 관여하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7:12-14에 보면,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말씀을 지정해주시고 그 너머에 인간이 관여할 수 없는 영역에 대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이제 이 청년은 예수님의 새로운 땅의 주민으로 살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땅이 아니요 내가 안 다치고 싶은 땅이 아닙니다. 그 누구도 원하거나 행함으로 올 수 없는 땅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 땅을 버리고 주님의 땅을 먼저 생각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72강-예레미야 49장 34~36절(사심 없는 탐욕)250921-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49장 34~36절입니다. 구약성경 1133페이지입니다.
“유다 왕 시드기야의 즉위한지 오래지 아니하여서 엘람에 대한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엘람의 힘의 으뜸 되는 활을 꺾을 것이요, 하늘의 사방에서부터 사방 바람을 엘람에 이르게 하여 그들을 사방으로 흩으리니 엘람에서 쫓겨난 자의 이르지 아니하는 나라가 없으리라”
여기에 엘람이라는 나라가 나오는데, 그 엘람이라는 나라까지 굳이 우리가 알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 거예요. 우리는 이스라엘에 집중하고 싶고,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다는 그 조건이, 우리 자신의 조건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드기야 왕이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엘람에 대한 예언이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주어졌습니다.
선지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곧, 우리가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뜻으로 말씀, 계시를 주신 거예요. 그러면 이 엘람이라는 나라와 오늘날 우리가 관련성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 엘람이라는 나라는 도대체 어떤 나라냐. 창세기 10장 22절에 보면 그 엘람이라는 민족이 나옵니다. “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라고 나오지요.
함과 셈과 야벳 가운데, 셈의 아들들에서 엘람 족속입니다. 위치는 어디쯤 되느냐 하면, 현재 이란입니다. 이란의 수도 테헤란 근처에 나라가 엘람입니다. 그러면 엘람의 어떤 무리가 거기에 살고 있다. 그래, 살고 있는데 뭘 어쩌라고? 살고 있으면 ‘그냥 사세요’라고 하면 끝날 문제가 아니냐. 성경은 계시를 줌으로써, 우리와 우리 말고 또 살고 있는 민족 가운데서의 관계를 하나님의 계시로 연결시킵니다.
‘너는 거기에 있고, 나는 여기에 있다’ 맞지요. 여기에 대해서, 왜? 왜 너는 거기에 있고, 왜 나는 여기에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면, 답은 딱 둘 중 하나입니다. 보통 답은 이렇습니다. ‘나는 여기 있고 싶어서 있고, 너는 거기에 있고 싶어서 있다’라는 이게 사람들이 내놓을 수 있는 답변이에요. 그건 엘람 민족이 할 수 있는 답변이죠.
이스라엘은 그렇게 답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조성했다. 하나님께서 너는 거기에 있고 나는 여기에 있게 하셨다’라고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왜냐 하면, 사람과 사람 관계에서 하나님이 설정한 관계, 조성한 관계를 빼버리면, 그 사람과 그 사람의 만남에서 나오는 모든 대화는 일방적인 나의 주장일 뿐이에요.
개인과 개인이 만나서 국가를 이루었다고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가 뭐냐? ‘개인과 개인의 집합에서 만들어진 것이 국가다’ 아닙니다. 그건 성경적 답변이 아니에요. 성경적 답변은 ‘하나님께서 국가를 만드시면서, 국가 입장에서, 그 국가 안에서, 국가라는 통일된 운명 안에서, 너의 운명과 나의 운명이 빠져나갈 수 없다’라는 이게 국가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국가의 의미가 두 종류가 있어요. 하나는 이스라엘의 의미가 있고 또 하나는 이스라엘 외에 이방 나라인데, 이스라엘의 의미는 이스라엘이 아무리 사적이고 개인적인 의지가 있다고 할지라도 이스라엘을 만드시는 원리원칙에서 못 빠져나온다는 겁니다. 이게 이스라엘 국가의 취지입니다.
‘개인의 의지가 세냐 아니면 하나님의 법이 우선이냐’ 하는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묻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망했다. 이스라엘은 생긴것은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지심인데 망했다 왜 망했는가. 왜 망했는가’라는 말에, 세상 나라들 같으면, ‘우리가 노력 안 해서 망했다. 우리가 힘이 모자라서 망했다’라고 이렇게 되잖아요. 이스라엘은 그렇게 답변하면 안 돼요.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위반했기 때문에 망했다’라고 이렇게 되어야 해요.
항상 어떤 질문을 하면, 답이 어느 쪽으로 귀속되어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뜻은 분명히 이렇다고 드러나는 쪽으로 답이 나와야 해요.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와 관련성이 있는 겁니다. ‘내가 왜 죽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죽는다’라고 이렇게 관련성을 지어야 돼요. 하나님을 빼버리면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엘람 국가에 대해서, 민족의 운명에 대해서, 왜 엘람 사람이 아닌 예레미야, 이스라엘 사람인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이 계시가 왜 주어졌는가. 그것은 오늘 본문 37절에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엘람으로부터 그 원수의 앞 그 생명을 찾는 자 앞에서 놀라게 할 것이며 내가 재앙 곧 진노를 그 위에 내릴 것이다”라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것을 알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놀랄 일이 무엇이냐. 인생을 살면서 가장 놀랄 일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변해 보라고 하면, 이방 민족에서는 ‘내가 몸이 아픈 것, 내가 죽는 것, 내가 사기당하는 것, 내가 우리 집에 불이 나는 것’ 이런 여러 가지의 안 좋은 일들을 이야기하겠죠.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서 고갈되는 거, 하나님의 말씀이 어느 날부터 들리지 않는 거’ 이게 가장 놀랄 일이에요.
엘람 민족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때 엘람 민족은 여호와의 말씀이 없어요. 그래서 그 나라가 망하면서도 ‘아 재수 없네. 내 운명은 이것이 끝인 모양이다. 다음에 힘을 길러서 다시 이 망한 나라를 회복해 볼래’라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엘람을 망하게 한 것은 BC640년경에 앗수르에 의해서, 앗수르라는 더 큰 깡패가 있어서, 소소한 이 양아치들은, 그 지역의 더 큰 깡패한테 밀리면 그냥 작살나게 되어 있습니다. 영토가 흡수되니깐요.
그러면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자. 그때 잘해보자’라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나 여호와의 말씀은 무엇이냐. “그들이 망한 것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이다”라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진노하냐, 하나님의 사랑받느냐 하는 그 결정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들어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나오고 하나님의 사랑도 같이 거기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예레미야의 선지자를 통해서 다시 한번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이방 민족 안에서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것은, 이스라엘만 있는 것이 아니고, 너 거기 있고 나 여기 있듯이, 거기 있는 너의 민족과 여기 있는 이스라엘 민족은 그냥 있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다른 원칙을 가지고 있다고 선지자는 설명하거든요. 그렇다면 ‘내가 누구냐’라고 하는 것은 그 다른 원칙이 무엇인지, ‘다른 원칙과 내 원칙과의 차이’ 그 차이를 앎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알 수 있는 겁니다.
엘람 나라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다고 한다면, ‘그 엘람 나라의 계시를, 그것을 왜 유독 이스라엘이 그걸 알아야 되는가’ 그것은 그들에게 포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방 나라 민족 안에 포위된 채 갇혀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 성도의 모습의 삶과 똑같아요. 안 믿는 사람들에게 포위된 채 살아가는 성도의 모습. 여기서 성도의 그 특이한 차이점은 무엇인지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논리로 따지면 복잡하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이 붙들고 있는 땅. 그 땅과 이스라엘이 함께 가야 할 땅, 그 땅에서 차이가 나는 거예요. 이 세상에 나라들이 이렇게 많이 있잖아요. 뭐 미국이 있고 조지아도 있고, 거기서 우리나라 300명 쫓겨나왔고 한국에 왔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야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싸운다. 이 모든 것을 딱 하나로 설명을 해보면 어떤 설명이 되느냐.
이 모든 복잡한 국제 정세를 하나로 딱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땅 없이는 못 산다’ 이것이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내 땅 없이는 못 산다. 3장 16절에 ‘추방되고 난 뒤에 땅 없이는 못 산다’라고 시작해서 17절까지 이야기가 쭉 나와요. 그러면 ‘땅 없이는 못 산다’라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서울의 강남 아파트가 집값이 비싸다’라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시골에 있다가 서울에서 취직하러 간 사람은, 아, 서울 살려고 갔는데 서울에서 튕겨 나옵니다. 튕겨 나와서 어디로 가느냐 하면 저 경기도 변두리에 가요. 왜? 집값이 헐기 때문에. 그러면 나는 서울 생활을 사모했는데 출퇴근이 2시간 걸려요. 이거 뭐 청주에 있으나, 경기도에 있으나 걸리는 시간이 똑같아요.
제가 강의 마치고 대구로 밤 기차 타고 오면서 늘 느끼는 점이 있어요. 서울에서 광명이나 서울에서 기차를 타게 되면 어디서 제일 많이 내리느냐 하면 오송에서 제일 많이 내려요. 이 말은 오송에서 서울까지 출퇴근한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평일에요. 평일에 우르르 다 내려요. 빈자리가 많습니다. 그럴 때 그 출퇴근하는 젊은 사람들이 ‘하나님 내 인생은 왜 이렇습니까?’라고 질문을 하면서도 답은 없어요.
인간은 간단해요. ‘내 땅 없이는 못 산다’ 근데 땅 없이는 못 사는데 하나님께서 노아 홍수 때, 땅을 완전히 없애버렸죠. 그다음에 나오는 문제는, 같은 땅이라도 경작해서 쓸모가 있는 땅이 부족하고, 그것을 노리는 인간들은 많은 것, 이것이 또 문제예요. 옥토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좋은 땅을 두고 경쟁하는 것. 그 좋은 땅 중에 좋은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그 약속의 땅을 강대국들이 놓치지 않고 침범해서 공격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방 민족들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이제 이스라엘도 그 뜻에 의해서 이제 망했거든요. 그러면 이제 남아있는 것은 무엇이냐. ‘차이’입니다. 이방 민족은 좋은 땅, 쓸모 있는 땅 살기 좋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그들이 어떤 하나님을 믿었느냐, 이것을 잠깐 생각해야 해요. 왜냐하면 ‘차이’니까.
그들이 믿는 하나님, 그 신을 믿고 하나님께 어떤 방법으로 매달렸는가. 그러면 차이니까, 이스라엘은 그들이 원하는 방법과 전혀 다른 방법이어야 마땅하잖아요. 오늘날 우리가 성도라면, 성도 아닌 사람이 하나님께 교회 와서 매달릴 때, 어떻게 매달리느냐. 성도라는 말을 못 하고, 차마 교인이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데, 교인들이 교회에 와서 매달릴 때, 그들은 어떻게 했는가.
그리고 성도는 교회에 와서 어떤 식으로 기도하고 어떤 식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가. 이것이 나와야 한다는 말이죠. 이방 민족의 특징은, 그들이 신을 믿을 때 사심 없는 탐욕을 나타냅니다. 사심 없는 탐욕이에요. 본의 아니게 안에 잠복 되어 있는 욕심이, 자기는 전혀 욕심 없는데 그것이 스물스물 올라와서 탐욕적으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방 민족 종교들의 공통점은 이렇습니다. ‘욕심 없이 신을 섬기면 복을 받는다. 욕심 없이 사심 없이 하나님만 섬기면 복을 받는다’ 어디에서 많이 듣던, 기독교나 천주교에서 많이 하던 이야기 아니에요? 그것이 특히 천주교에서 그렇습니다. 기독교도 예외가 아닙니다만. 천주교의 특징은 말씀이 없어요. 그냥 정성을 바치면 돼요. 정성을 바치면 복 받는 것이 천주교입니다.
말씀 같은 것은 아예 없어요. 그냥 빌미로 하는 거예요. 인간은, 그 이방 민족의 특징은 무엇이냐? 내가 살려고, 좋은 땅에 살려고 의식하는 그것이 전부라는 거예요. 그 마음 말고 다른 마음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율법은 그걸 파고 들어가요. 파고 들어가서 ‘네가 미처 모르는 탐욕이 네 안에 있고, 그 탐욕을 모르는 채 나는 순수한 마음으로 섬기면 된다’라는 그런 생각이 바로 이방 민족의 특징입니다.
6.25 때 미군이 다리 하나 부술 때, 옛날에 폭탄은 크게 발달하지 못해서 폭탄을 다리에 터뜨리면요, 이 폭탄의 위력이 위로 솟구쳐 올라가서 다리 하나 부수는 데 그렇게 힘들었어요. 터져봐야 ‘팡’ 하고 위로 터진다고요. 그런데 요즘 폭탄은 아래로 내려가 가지고 한 번만 때려도 안에 다리가 완전히 박살 나게 되어 있습니다. 화력이 아래쪽으로 속하기 때문에.
주의 말씀은 위쪽이 아니고 아래쪽을, ‘우리가 사심 없고 욕심 없고 나는 순수하고 순결하다’라고 하는 그 내부를 폭탄으로 터뜨려 버린 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누가복음 7장 11~14절을 보면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성에 가실 때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라, 성문이 가까이 오실 때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중에 많은 사람도 이와 같이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겨서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오사, 그 관을 손을 대시니 맨 자들이 섰는지라”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에 많은 사람이, 그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이미 죽었다고 했어요. 지금 여기에서 초점이,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 초점이 아니고, 인간의 인식이 의식의 한계가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죽으면 끝났네’라는 거기에 머물러 있다는 거예요. 이 말은, 조금 어렵게 이야기해서, 인간이 자기의 미래에 대해서 해결할 것은, 살아 있는 내가 어떤 조치를 하면 미래까지 해결이 된다는 의식입니다.
말로 하니까 너무 어려운데 쉬운 말로 해서 티벳 불교에 가보면 그 티벳 불교는 대신 기도해 주는 게 있어요. 예레미야 9장 17절에도 그게 나오는데요. 9장 17절에 보게 되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잘 생각하라, 곡하는 부녀를 불러다가”라고 나오는데, 여기서 곡하는 부녀가 나오는데, 곡하는 부녀가 무엇이냐 하면 장례식장에 갈 때, 누가 죽었잖아요.
그러면 조문 손님들이 올 게 아니겠습니까? 손님들이 와서 무엇을 보느냐 하면, 저 죽은 고인과 살아 있는 가족들이 그동안 정으로 얼마나 끈끈하게 이어져서 하나같이 진짜 아름다운 결속된 가정으로 보이느냐는 그것이 궁금해서, ‘저 사람이 죽었으니까, 사람들이 얼마나 가슴 아파서 울겠느냐’라는 그것을 이제 구경하러 온다고요.
요새는 돈을 10만 원 내면 욕 얻어먹고, 요새는 밥값이 하도 올라서 10만 원보다 좀 더 쭉 내고 밥 한 그릇 먹으면서 ‘얼마나 맘이 아프겠느냐’라고 이렇게 하는데, 유족 당사자 가족들은 죽은 고인에 대하여 지금 얼마나 슬프냐와는 관계없이, 조의금 나오면 지금 몇 대 몇으로 나눌 것인가, 그리고 아버지 유산 문제가 지금 주 관심사가 돼 있어요.
땅이 있는데, 땅 처리 어떻게 하고, 집은 누가 갖고, 맏이는 많이 가져갔으니까 조금 양보해서 동생들 주라고 하고, 또 맏이는 ‘제사는 내가 드리잖아’라고 양보 없고, 지금 그 문제가 있다고요. 그러니까 장례식 분위기가, 요새는 욕을 안 하지만, 그런 욕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일당 주고 아르바이트에게 곡하게 해서, 이게 이렇게 해석하는 거예요.
‘우리는 너무 슬퍼서 지금 곡소리도 안 나올 정도로 너무 슬프다. 따라서 너무 슬퍼서 우리는 울고 싶은데 아파서 못 우니까 대신 울어주는 사람이 와서 울어주는 거다. 우리는 너무 가슴이 아파서 못 운다’라는 식으로 위장하는 거예요. 하여튼 아르바이트 종류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이 말이죠. 예레미야 때 벌써 시작한 거예요.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라고 울어서 분위기가 확 뜨잖아요.
그런데 인간이 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려고 하니까, 기도 문장, 어휘력, 단어, 그리고 감동적인 기도, 이것이 잘 안되고, 기도하면서 본인도 킥킥 웃어요. 웃는다고요. ‘참 나도 쓸데없는 짓 하고 있다. 해도, 되지도 않는 걸 왜 하지?’ 그럴 때는 어떻게 하느냐. 대신 기도해 주는 자가 성직자들이에요. ‘목사님 이리로 좀 와 보이소. 대신 기도해 주세요. 갈 때 차비 좀 넣어 드릴 테니 기도해 주세요’ 이렇게 대신 기도해 주는 거예요. 다른 사람 앞에서 기도 못 한다는 것을 모르게 하기 위해서. 깜짝 놀라죠.
그다음에 어떻게 하느냐 하면, 티벳 불교는요. 이 기도문을 써요. 써서 그걸 돌려요. 여러분이 TV에 보면, ‘걸어서 세계 속으로’라는 이런 프로 보면 나오거든. 티벳 불교에서는 신에게 하는 기도문을 써놓고 그걸 돌린다고요. 돌리면, 돌리는 그 통 안에 기도문이 있는데, 기도문 전체를 돌리게 되면, 신에게 빠른 속도로 나 대신 기도문이 다 응답이 돼요.
팔만대장경 있죠. 팔만대장경이 뭐냐 하면요, 주문들이에요. 감기 걸렸을 때 부처한테 어떤 기도 하면 되고, 엉덩이 아플 때, 종기 날 때는 어떻게 하면 되고, 그것들이 모여서 팔만대장경이에요. 그걸 해인사에서 머리에 이고 다니며 행사하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그것을 기복 신앙이라 하죠? 그 기복 신앙을 천주교에서는 바로 마리아가 대신해 주고요, 신부가 대신해 주고, 또 교인들이 위에서 내려온 그 기도문이 있는데, 그 기도문대로 그대로 해요. 우리 기독교도 교독문 있죠.
이건 뭐냐 하면 나를 안 다치게 한다는 거예요. 어떤 경우라도 내가 다치는 일은 내가 사전에 방비해야 하겠다는 이게 바로 이방 종교입니다. 그러면 끝으로, 그게 이방 종교라면, 오늘날 기독교, 천주교의 실정이라면, 그러면 복음의 세계는 무엇이냐. 복음의 세계는 누가복음 7장에 있는 것처럼, 죽여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죽여버립니다. 죽여 놓고 이미 그들의 내부, 그게 폭탄을 아래쪽으로 터뜨리면, ‘인간은 뭐 살다 죽으면 그만이지. 그다음에 죽고 안 죽고는 우리가 뭘 아나’라는 것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분명히 선을 그어 버려요.
끊고 그다음에 예수그리스도가 그 틈 사이에 끼어서 들어갑니다. 예수님의 틈이 끼어들게 되면, 첫 번째 예수님 앞에서 우리의 한계가 그대로 발각당합니다. 노출됩니다. 그동안 내가 열심히 하려고 하는 것은 나 안 다치기 위해서, 미리 사전에 내 방비하는 것, 기도할 때도 기도문 이렇게 하든지, 이렇게 성경 보고 하든지 하면서, 하여튼 뭐 어떤 행위든 간에, ‘나는 내가 안 다쳐야 하겠다. 나는 내가 필요한 곳에 내가 가야 하겠다’라는 는 그 고집, 그게 한도입니다.
그 한도를 예수님의 영이 오게 되면 그걸 노출시키고 그걸 발각시킵니다. 너의 노림수는 그게 다다. 티벳 불교에서 돌리는 그것을 ‘마니차’라고 하는 데, 그 마니차를 돌릴 때 요새는 돌리면 또 힘들잖아요. 그래서 요새는 그 티벳 불교의 참관인들이 돌리는 이것도 힘드니까, 그 불교 주최 측에서 바람을 불게 해서, 보기만 하면 바람이 알아서 동력으로 에너지원이 되어서, 알아서 돌아가도록 아주 편리하게 해놓았습니다. 그저 편리한 거예요.
그런데 말씀이 오게 되면 바로 ‘편리한 대로 안 다치고 구원은 챙기고 이 땅에 복 받는 것, 그것이 바로 지금 너의 죽음에 대해서 네가 해석하지 못하는 이유다’가 되고, ‘내 죽음에 대해서 내가 해석하지 못하는 이유다’가 됩니다. ‘아 우리는 나만, 나만 챙기고 사는구나’
말씀이 와서 폭탄이 되어, 우리가 감추고 우리가 몰랐던 것을 되새기는 것, 그것은 ‘죽은 자에 의해 살리시는, 죽음 가운데서 우리를 살리는’ 그것이죠. 그래서 누가복음 7장을 다시 돌아보게 되면 이렇습니다. 7장 14절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그들이 섰다는 말은,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요. 딱 스톱했어요. 그 후 예수께서 뭐라고 하시냐 하면 이 부분이 재미있어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주님은 죽은 자와 산 자의 세계 속에 다 걸쳐 있기 때문에, 이미 죽은 자에게도 말을 걸 수가 있어요. 그러면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 살아 있는데 어느 좋은 땅에 있느냐, 어느 아파트냐 생각하지 말고, 나를 이미 죽은 자의 땅에다가 자신을 두게 하는 것.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살아 있고 나는 말씀 때문에 일단 죽은 자의 위치에 있어야 된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예레미야의 말씀에 의해서, 이스라엘에서는 망하는 것이, 이것이 복이 되는 거예요. 끝으로 한 말씀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아가서 5장 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며 내 마음이 동하여 일어나서”라고 나옵니다.
유대인의 문에 자물쇠가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면, 우리나라처럼 이렇게 자물쇠가 딱 있는 게 아니고, 동그란 구멍, 작은 손만 들어가는 구멍이 나 있어요. 문을 열 때 그 구멍 사이로,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어서 안쪽에 있는 자물쇠를 손으로 이렇게 조정하면 철커덕하면서 문이 열리게 돼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여자의 경계선 안으로 들어와요. 자기 집도 아닌데. 솔로몬 왕이 그 술람미 여인의 사적인 개인의 영역에 손을 내밀고 들이밀매. 그것을 할 때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문을 열 때, 5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듣는구나”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문 열어달라고 할때 아파서 못 나간다고 하는 거죠. 감기 걸릴 때 이렇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거기서 돌아가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내가 설정한, 내 자존심이 유지되는 그 경계를 넘어서, 내가 옷 벗어서 못 나오는, 옷 벗는 자리까지, 내가 부끄러운 그 자리까지 내 허락도 없이 함부로, 그 사랑하는 자의 손이 넘어와서 내 영역을 침범해서 문을 열 때, 그때 비로소 내가 준비한 몰약, 내가 그분께 드리고자 하는 몰약으로, 그 경계선 너머에서 그 손과 내 선물이 서로 만나는 거, 조인(JOIN)할 때, 그때 이 문이 열립니다. 지옥과 천국의 문이 열리죠.
주께서 먼저 우리 영역 속에 들어오면서 말씀을 하십니다. “청년아 일어나라, 나사로야 거기서 나오너라” 모두 다 죽은 자를 향한 살아있는 주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 말씀을 대할 때, 우리가 살아서 지킨다는 태도를 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나의 의식 안에서만 머물러 있는 상태가 곧 죽은 상태인 것을 이제는 알았사오니 우리가 정리할 수 없는, 내가 미처 접근할 수 없는 죽음의 자리까지 말씀이 침투해 주는 이 복이, 얼마나 큰 능력이고 사랑인지를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