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란 선행적으로 ‘죄악됨’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용서가 뽑아져 나오려면 죄악된 행위가 먼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죄악된 것이냐 옳은 것이냐를 놓고서 그것을 구분짓는 경계선 설정에 있어 그 기준을 눈에 보이는 본인이 내린다는 점에서, ‘그 설정행위’는 그 어떤 경우라도 옳은 것이 되어버립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선과 악을 가름하는 행동 속에는 ‘눈에 보이는 나는 무조건 구원되어야 돼’라는 의도가 기반으로 깔리게 마련입니다. 이런 정신으로서는 그리스도 앞에서 용서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잘남과 내 결정의 옳았음’이 도출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그리스도 앞’이란 바로 사단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겁니다.
사단의 궤계란 곧 ‘사단의 계획’입니다. 이 ‘사단의 계획’에 대해서 우리 인간들이 제 3의 입장에서 쳐다보는 식이 아니라 아예 그 계획 안에 자신들의 주체들이 들어가 있는 상황입니다. 태어나기를 사단의 권세 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보고 듣고 행하고 양육받은 모든 것들이 다 사단이 의도한 것들입니다.
이는 창세기 3장에서, 영체인 사단이 자신을 나타낼 물질체를 얻기 위해 아담의 몸을 가졌다는 점에서부터 출발한 현상입니다. 사단의 반복적 분신들로서 찍어내듯이 인류가 번식하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육에 대한 집착과 근원성은 이미 사단의 앞잡이로서 생각하고, 움직이고 활동하는 바가 됩니다.
그것이 바로 ‘눈에 보이는 가치’부터 모든 것을 출발시키는 성향이 그러합니다. 이것이 바로 ‘대상 보호’입니다. 이미 보호할 대상을 궁극적으로 확보되어 있어 모든 생각과 움직임이 한곳으로 모아져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죽였던 이스라엘은 그 자체적으로 오로지 한 목적으로 움직인 그 결과를 십자가 사건으로 보여준 바가 됩니다.
이러한 ‘대상 보호’는 오로지 연출의 힘으로 버텨나갑니다. 자기를 위장하는 힘 말입니다. 자기를 꾸미는 힘입니다. “내가 누구지?”를 묻지를 않습니다. 그 대신 “나를 어떻게 구성하면 돼지?”만 신경쓸 뿐입니다. 자기 자신을 보호하되 끝까지 보호하기 위한 방안이 바로 똑같이 생긴 타인들과 결합에 나서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대상 공간’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깨지기 쉬은 물건을 택배로 받게 되면 그 물건을 주변에서 보호하기 위한 보조자재들이 종이 박스 안에서 채워지게 됩니다. 이처럼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유일한 보호 대상’인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요청하게 되고 권세를 요청하게 됩니다.
보다 괜찮은 나라, 보다 괜찮은 정부를 요청하게 됩니다. 고귀한 자기 자신을 다치지 않기 위해 온갖 방안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교회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보이는 물체, 곧 악마의 가현체에 불과한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온갖 종교적 행함들을 동원하게 되고 부지런 떨면서 실천에 옮기게 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실패는 이미 구약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온 인류를 대표해서 다 해본 것들입니다. 그 구약의 역사 흐름과 동반하는 낯설고 이질적인 흐름이 있습니다. 것은 바로 순교당하는 선지자 노선입니다. 열왕기하 2장에서 엘리야 선지자는 죽을 때 자기 시신이 없었습니다.
불수레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선지생도 50명은 자신을 지켜줄 능력의 가현체를 얻기 위해 3일 동안이나 찾아도 찾지 못했습니다. 즉 엘리야는 그들이 요구한 그런 타인이 아니었던 겁니다. 엘리야가 신체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그 기능은 장차 오실 하늘의 능력이었습니다.
이 능력이 이 지상에서 마감되는 것이 열왕기하 13장에 나오는 엘리사의 죽음을 통해서 보여집니다. “엘리사가 죽으매 장사하였더니 해가 바뀌매 모압 적당이 지경을 범한지라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적당을 보고 그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섰더라”(왕하 13:20-21)
곧 성도가 하늘에서 하늘에 속한 새로운 몸을 입는 여부는 이 지상에서 엘리사처럼 ‘낯선 죽음’에 참여하는 겁니다. 자신의 죽음을 말씀에 입각해서 ‘죄로 인한 당연한 저주’로 간주하고 그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참여하는 겁니다. 이 참여를 위해 성령께서 계속해서 성도의 자존심과 자존감과 ‘대상 보호’와 ‘대상 공간’을 공격합니다.
주님의 용서 행위는 나 자신의 존재보다 더 귀합니다.
매사에 “세상에 이런 큰 용서가 저에게 주어지다니 감사합니다.” 이것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삶의 방향과 목표를 정하라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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