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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아빠와 함께 2025. 10. 6. 20:56
No와 와 Yes의 차이 

2016년 10월 16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1:18-19 

(1:18)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1:19)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예’나 ‘아니오’는 인간들의 선택 성향을 알게 하는 대화 방식입니다. 즉 누가 나에게 묻게 될 때에, 동의가 되면 ‘예’이고 동의되지 아니하면 ‘아니오’가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 빼놓고서는 모두가 ‘아니오’에 합당하다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에게만 모든 것이 ‘예’가 되기 위해서 예수님 이외의 모든 것은 ‘아니오’로 드러나야 한다는 뉘앙스를 유발합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인간에게서부터 시작되는 의미성을 사전에 차단시키기 위함입니다. 천지창조에는 하나님께서는 인간 창조를 맨 나중에 돌려놓았습니다. 인간을 결코 창조 이전의 자리로 개입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악마는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 이전의 자리에 서게 끌어당깁니다.  

이 작업으로 인해 인간들은 악마와 한통속이 되었고, 그렇게 되면 인간들은 모든 가치와 의미를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도 불만, 저것도 불만입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당연히 나타내게 됩니다. 즉 왜 신은 내 마음에 드는 식으로 내 인생을 끌고 가지 않으냐는 겁니다. 

이와 같은 양상은 인간들이 자기에게는 무조건 자신이 ‘예’가 되어야 된다고 우기는 바입니다. 즉 인간들도 나름대로 ‘예’와 ‘아니오’를 나누면서 살아온 겁니다.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결정하고 선택한 그 결과라는 겁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여 살아온 나의 인생을 한꺼번에 그 그릇을 비우지는 못하겠다고 버티는 이유가 마음 속에 담겨 있습니다. 

아까워서라도 나의 것을 내 속에서 못 비우겠다고 버티게 됩니다. 이러한 성향은 하나님에게까지 이릅니다. 어릴 때부터 인간은 본의 아니게 본인이 아닌 타인의 존재로 둘러싸여서 성장하게 됩니다. 여기서 인간의 마음은 “남들로부터 인정받을 때만 살아남는다”는 원칙을 익히게 됩니다. 

‘남으로부터 인정’은 점차 ‘나로부터의 인정’까지 확대가 됩니다. 즉 아무리 남을 나를 인정해준다 할지라도 내가 나를 못마땅할 경우에는 자신마저 제거할 용의가 갖게 됩니다. 그래서 해서 끝까지 ‘나는 나에게 예’가 되게 말겠다는 겁니다. ‘예’라는 것은 ‘하자 없는 경우’를 뜻하고 ‘아니오’는 하자가 발생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무조건 자신을 하자없는 ‘예’로 가득채워질 존재로 간주하게 됩니다. 이 자기 긍정으로 인하여 그때부터 인간은 자신이 밀어낼 대상을 생산하게 됩니다. 즉 “저 사람을 내가 알고 있으면서도 사귀고 싶지는 않는 자”라는 식으로 분류가 하게 됩니다. 이 분류작업에 인간의 선택과 의지가 개입하게 됩니다. 

타인이 생기고 남이 생깁니다. 이들을 바라보면서 인간들은 스스로 이렇게 주장합니다. “내가 ‘예’가 되고 내가 밀어낸 저 자들은 ‘아니오’에 해당된다”고 말입니다. 인간들은 신마저 이 자기 놀이에 끄집어당깁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가 되기 전에 이랬던 사람입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착한 일을 해서 그 업보로 예수님을 뵈올 수 있었을까요? 

착한 일이기는 커녕 하나님에게 충실하고 봉사하고 영광되는 일이라고 자부하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잡아 죽인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자기가 아는 그 신과 예수님의 일이 화합되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이런 표현을 듣게 됩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말입니다.(행 9:5) 

이제 사도 바울이 믿는 예수는 그냥 전에 믿는 신이 아닙니다. ‘자기로부터 핍박받으신 분’으로서 믿는 예수님이십니다. 이 ‘핍박’ 요소의 개입으로 인하여 사울은 더 이상 신(큰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겠다는 모든 의도가 죄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즉 사울은 기존의 자기 정체성에 합류되는 그런 하나님은 애초부터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겁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사울에게는 신은 없었습니다. 예수님, 그리고 자기로부터 핍박을 받은 예수님이 자기에게 오시고부터 그는 스스로 ‘예’의 자리에 있으면 아니되고 예수님 앞에서 ‘아니오’의 자리에 예수님의 ‘예’만이 숭상해야 될 임부가 있어 지금껏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천지창조된 세상은 실은 인간을 위한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위한 세상이었습니다. 천지창조 할 때 하나님 곁에 누가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영광과 기쁨의 대상으로 자기 아들 예수님에게 인계하시고자 천지창조를 하셨던 겁니다. 골로새서 1:15-17의 말씀입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요한복음 1장에서 ‘말씀’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분이 없이 생겨난 생명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 분이 이 세상을 찾아왔습니다. 그로 인해 이 세상의 모든 자들이 보편적으로 ‘어두움’으로 표기됩니다. 모두가 어둡다는 말은 서로가 서로끼리 비교할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남들로부터 인정받아야 사람답게 산다’는 잔소리를 계속 들어왔지만 복음 앞에서 그 주장이 인간들이 제 자리를 떠났기에 나타나는 소리라는 것이 밝혀집니다. 세상은 어둡고, 예수님만이 빛입니다. 이 빛이 어두움 세계 속에 파고들어옵니다. 그랬더니만 이 어두움 세상에서 대단한 복잡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자기네들 끼리 잘났다고 비교하는 일이었습니다. 

자기 행함으로 마일리지를 쌓는 일에 열중하고들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결국 십자가에서 죽으시는데 이는 십자가 사건이 육의 세계와 영적 세계의 유일한 접점 지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모든 육체가 다 예수님에 대해서 핍박을 한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서 똑똑하고 바른 판단만 내린다고 자부합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배후에 악마가 있음을 기어이 자백하지 않으려합니다. 그러나 악마의 생각은 이런 겁니다. 유일한 적은 바로 예수님 뿐입니다. 이것이 창세기 3:15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고 말았습니다. 


인간들은 자기네들 세계에 별 변동사항이 없음을 보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일종의 어리석고 미련한 해프닝 정도로 간주했습니다. 즉 모든 인간들은 자신이 내린 조치가 기어이 현명하고 지혜로운 판단이기를 고대합니다. 따라서 인간들로부터 배척받은 예수님은 배척받을 만한 인물이었다는 겁니다. 

바로 이 사실에 입각해서 하나님께서는 오로지 ‘어리석고 미련한’ 그 십자가를 구원의 능력으로 앞장세우십니다.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외톨이가 되지 않는 상황을 ‘하자 없는 Yes'로 여기고 싶어하는 인간들 배후에 악마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예수님을 핍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왜 하나님은 나를 힘들게 하는지 늘 대드는 태도를 보이면서 살아가지만 정작 우리 성도가 하나님에게 물을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왜 저를 아직 죽이지 않습니까? 어서 주와 함께 거하고 싶습니다”라는 것 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 잘난 재미로 사는 이런 상황을 ‘아니오’에 해당되고, 이 ‘아니오’와 예수님의 ‘예’와 관련있음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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