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의 본 모습
2025년 9월 10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17: 1-7
17:1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17:2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17:3 너는 여기서 떠나 동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17:4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을 명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17:5 저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17:6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저가 시내를 마셨더니
17:7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
그동안 북이스라엘의 통치자들은 정치 권력가들의 투쟁과 게임을 통해서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 여로보암 →나답 →바아사→-엘라 →시므리 →디브니 →오모리 →아합. 게임은 승자와 패배자를 가리기 위함입니다. 인간 존재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폭력성은 타인을 만나 발휘됩니다. 자기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인간의 삶이란 지속적인 게임의 연속입니다. 최초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는 가인은 자신의 존재성을 동생 아벨을 통해서 재정립했습니다. 동생의 제사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자신은 하나님으로 인정받지 못할 때, 그는 분노가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폭력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자기에게 지킬 것이 있다고 여기면서 삶의 동력을 얻게 됩니다. 누구에게 지기기 싫고 늘 이기는 자아상을 삶의 본질로 유지하고 싶은 겁니다. 그렇다고 보니 한 순간도 게임이 아닌 경우는 없이 보냅니다. 모든 면에 있어 승부 기질로 다가서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가인이 빠트린 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자연을 상대로도 게임에 빠져 있는 상태임을 알지 못했던 겁니다. 가인은 그저 동생을 이기면 자신을 ‘승자’로 포장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땅을 통해서 가인을 다루셨습니다.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창 4:10-11)
즉 인간만 살아있는 게 아니라 땅도 살아있습니다. 인간들은 땅을 명사(名詞)로 다루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자연세계를 동사(動詞)로 사용하셨습니다. 이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善)이 나오시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의 악(惡)을 들추어내는 수단을 활용하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처럼 심한 가뭄이 들면 모든 사람들이 죽게 됩니다. 인간의 악함으로 인하여 인간들은 자연의 재앙을 자처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세 가지 요소인 가뭄, 엘리야, 까마귀에서 가뭄과 까마귀는 하나님 의도에 충실하게 따르게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가 엘리야를 통해서도 충실하게 나타납니다.
자연 아래서의 여느 인간들처럼 엘리야도 물 없이는 못살고 가뭄 아래서 죽음을 경험해야 합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도 또한 주어지게 됩니다. 즉 말씀이 이 세상에서 어떤 식으로 구현체를 보여주는가를 엘리야의 삶을 통해서 나타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 속에서 생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그릿 시내가로 보냅니다. 가뭄 속에서도 물을 먹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물만 먹고는 못살지요.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떡과 고기까지 차질없이 배달시켜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양식을 배달하는 짐승이 까마귀입니다. 까마귀는 레위기 11:15에 보면, 부정한 짐승으로 나옵니다.
이는 ‘가뭄과 이스라엘의 부정함’과 관련성이 있다는 겁니다. 가뭄이란 대규모 자연재앙은 모든 인간들이 죽어 마땅함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주시려는 계시의 내용이 이것과 관련있습니다. 엘리야는 아무 것도 한 것도 없이 일방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먹여집니다. 이것은 인간의 평생토록 빠져나올 수 없는 굴레, 즉 ‘게임하는 존재’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시는 일이 나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실시하는 원칙은 ‘덜어낼수록 더 많아지는’겁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입니다. 보통 인간들은 남에게 주게되면 점점 모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방식은 모든 인간의 예상을 빗나가게 일하시므로 서 인간은 자신의 가진 것으로 타인에게 이기려는 게임의 본능을 무산시키려 하십니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능력으로 자기를 지켜내려고 합니다. 사람은 지킬 게 있다는 것 자체가 자신이 살아 남아야 될 이유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주목하시는 것은 5000명을 먹이시는 것이 아니라 먹고 남은 것에 두십니다. 그것을 버리지 말고 다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 남은 광주리가 12광주리였습니다. 곧 예수님을 먹이시는 진정한 대상인 이스라엘은 인간들의 자신의 예상과 능력으로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인간이 전혀 알지 못하는 양식으로 성사된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예수님으로 얻어먹고자 한다면 이는 자꾸만 결핍 의식으로 연속될 겁니다. 모세의 만나를 먹고서도 그들은 여전히 죽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근원적으로 살리려고 하십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두 번 다시 타인과 게임이나 경쟁이나 시합할 근거를 없게 하시는 겁니다.
마치 그릿 시내가의 엘리야 신세처럼 말입니다. 엘리야는 지금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도피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35장에 보면 도피성이 나옵니다. 본의 아니게 우발적인 사고에 의해서 타인을 죽게 한 자는 제사장이 기거하는 도피성에 가서 그 시대의 대제사장이 생존할 동안만 그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는 살해한 자는 삶은 이미 타인, 곧 대제사장에게 넘겨졌기에 더는 자기가 챙기는 자아는 없고, 이 자아가 없음은 굳이 타인과 비교하고 경쟁하는 게 의미가 없게 되는 겁니다. 만약에 도피성에서 사는 게 답답하다고 그 도피성에서 나오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피해자에게 금전으로 보상하고 합의를 봐서 그곳에서 나온다면 그는 누구에게도 맞아 죽어도 싸다는 겁니다. (민 35:27,32)
반면에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은 이 자연 안에서 이리저리 도망치는 삶을 보내고 있습니다. 보다 편한 곳, 보다 자신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공간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는 곳이든지 거기에 힘과 힘의 겨룸과 경쟁과 게임이 성립됩니다. 유능하고 잘나고 착하고 후륭함으로 이 게임에서 최종 승자가 되기 위해 쉴새없이 노력하고 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자연세계는 이미 추락하는 비행기와 같습니다. 그 안에서 서로 잘났다고 인간끼리 견주어봤자 다 허망하고 소용없는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생명 얻는데 있어 참으로 무능함을 알게 된 자가 바로 최종 근거가 자기가 아님을 알게 된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 것도 이겨낼 것은 없이 거저 감사할 것밖에 없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7강-열왕기상 17장 1-7절(게임의 본모습) 250910-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17장 1-7절입니다.
열왕기상 17:1-7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여기서 떠나 동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을 명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저가 시내를 마셨더니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
오늘 본문에서 세 가지 요소를 끄집어내야 합니다. 하나는 가뭄, 비가 오지 않는 가뭄. 또 하나는 엘리야, 또 하나는 까마귀. 오늘 본문에서 뭐가 빠지느냐 하면, 북이스라엘의 왕들은 빠집니다. 열왕기상에서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남쪽 왕은 르호보암, 북쪽은 여로보암인데요, 그 여로보암의 아들들이 순탄하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힘 가진 부하들이 군사정권을 만들어서 힘과 힘의 부딪힘으로 정권을 탈취하는 이야기가 계속되었습니다.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 바아사, 엘라, 시므리, 디브니, 오므리, 오므리 다음에는 아합왕이지요. 이들의 힘겨루기에 꼭 등장하는 것이 뭐냐?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고 여로보암의 길을 따라갔다’(왕하 10:29, 13:2, 11, 14:24, 15:9, 14, 24, 28).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 아버지의 그 자식들이라는 말이지요. 아버지 자리의 제일 우두머리가 여로보암인데 그는 어떤 정통성이 없습니다. 정통성이 없어도 사람들이 자기를 추앙하고,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 10지파가 자기를 밀어준다는 그 힘을 믿고 그는 약속의 땅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창세기부터 죽 보게 되면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법으로 다스려야 할 텐데 법은 치워버리고 “우샤! 우샤!” 해서 ‘내 편의 내 사람이 많으면 나는 왕이 될 수 있다. 그것을 실제로 한번 보여 줘?’ 그것을 죽 해 온 것이 북쪽 이스라엘이에요. 북쪽 이스라엘은 일종의 인간들의 힘겨루기, 또는 힘자랑, 힘과 힘의 부딪힘, 한마디로 말해서 게임이지요.
북이스라엘을 통해서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인간이라는 것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게임만 하다가 볼일 다 본다는 겁니다. 게임이 뭐냐? ‘나 너한테 지기 싫어. 나는 너를 이기고 싶어.’ 사람들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24시간 생각하는 것이 뭐냐 하면, 게임입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나를 지키고, 어떻게 하면 나를 공격하는 사람을 이길 수 있느냐?’ 그 생각 지워버리면 인간에게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지요. 북이스라엘 왕들이 했던 그 모든 행동은, 힘겨루기에서 밀리지 않아야 내 몸 하나 산다는 것, 그 정신이 계속 북이스라엘을 투쟁의 장으로 이끌어 온 겁니다.
이기면 기분 좋고 지면 기분 나쁘고, 들쑥날쑥하는 그 기분. 여러분은 언제 기분이 좋던가요? 이겼을 때 기분 좋지요. 언제 기분이 나쁘던가요? 졌을 때 기분이 나쁘지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몸이 아프다. 기분 나빠요. 왜냐하면 몸이 아프면 마치 멀쩡하고 건강한 사람 앞에서 내가 패배자라는 인식을 갖게 됩니다.
몸이 아프면 남한테 돌봄을 당하잖아요. 보호를 받아야 하잖아요. 몸이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마음적으로 ‘이 잘난 내가 너한테 돌봄을 받는 것이 참 수치스럽다’ 하는 그 수치감이 더욱더 나를 힘들게 하는 거예요. ‘언젠가는 나도 다시 건강해져서 사람답게 한 번 살아보련다.’ 이게 아픈 사람의 소박한 포부지요.
‘하여튼 어쨌든 간에 남에게 지고는 못 산다. 나는 이겨야 속이 풀린다.’ 인간의 염원이 딱 그거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염원을 가지고 어디에 가는가? 교회에 가요. 교회 나가서 누굴 찾는가? 하나님을 찾아요. “하나님, 이기게 하옵소서.” 그거 가지고는 성이 안차잖아요. 그러면 새벽기도까지 나갑니다. 새벽기도 나가서 자기 가슴을 치고, 예배당 바닥을 치고요, 간곡하게 간곡하게 ‘지는 인생 말고 승리하는 인생 되게 해달라’고 요청하지요.
지난 낮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간절하게 구하면 귀신이 씌인다.’라고요. 인간 본인의 본성이 바뀌지를 않아요. 본성은 안 바뀌고 오기만 남아서 하나님 앞에 땡깡부리듯이, 따지듯이 기도하는 이유가 있어요. ‘나는 기도해서 응답받았다’ 해서 응답받은 것 가지고 남에게 안 지고 이겼다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니까 ‘나도 지기는 싫고 응답받겠다’라는 식이지요.
인간이 남에게 지기 싫다는 이것이 인간 최초의 본심입니다. 그것이 창세기 4장에 나옵니다. 거기에 가인이 나오는데 가인이 동생을 때려죽여요. 동생의 제사는 하나님께 열납되었는데 본인의 제사는 하나님 앞에 거부당했을 때 ‘지고는 못 산다’ 해서 성질내면서 동생을 죽였습니다.
창세기 4장에서 형제밖에 없는데 형이 동생을 죽였어요. 동생은 죽어버렸으니까 형 본인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본인만 남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10-11절에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살아있는 것이 인간만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어요. 땅도 살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열왕기상 17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1절) 있는데 그 엘리야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어요. 그 지시란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1절).
이 말이 무슨 뜻인지가 참 모호하잖아요. “내 말이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계속 가뭄이 계속 들 것이다. 그 뜻이 무슨 뜻인지가 분명치 않은데 야고보서 5장 17절에 분명하게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주어지는데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기도를 하게 됩니다. ‘지기는 싫다’라는 이런 식으로 엘리야가 기도한 것은 아니고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기도하는데 그 기도 내용이 나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라고 되어 있어요. 3년 6개월 동안입니다. 그러니까 엘리야가 하는 일은 “하나님이여, 강릉에 제발 비 오지 않게 하옵소서.” 강릉에 가서 그 기도를 한 거예요.
강릉 사람들이 들었다면 때려죽이려고 했을 거예요. 이것은 연계를 시키는 거예요. 선지자는 지금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이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이 있다는 겁니다. 어떤 관련성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가인은 본인이 살아 있어서 본인 게임을 하는 거예요. ‘나는 주변의 누구한테도 지기 싫다. 가까운 사람한테도 지기 싫다. 나는 꼭 이겨야 해.’
어떤 게임의 주체자로서 살아가는 것이 가인이라면 가인은 뭘 놓쳤는가 하면, 자기 게임의 대상이 동생뿐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도대체 게임의 대상조차 되지도 않는 자연 세계, 땅 자체가 가인을 가만두지 않습니다. 저주를 퍼부어 버리지요. 하나님이 자연을 가지고 사용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인간을 가지고 사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로 하나님은 자연을 사용합니다.
자연에는 보는 눈이 많아요. 에스겔 1장에 천사가 나와요. 그 천사의 모습에 개성이 있어요. 어떤 특징이 있는데 천사의 날갯죽지에 두드러기 난 것처럼 무엇이 박혀 있느냐 하면, 눈(eye)들이 박혀 있어요(겔 1:18, 10:12). 온 천지에 눈이에요. 도대체 CCTV가 몇 개인지 모르겠어요.
천사의 기능은 보고, 그 보이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지시로 심판하는 기능을 합니다. 천사도 피조물이고 자연도 피조물이에요. 자연의 기능은 뭐냐 하면, ‘인간만 살아 있다’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연도 살아 있어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자연을 살아 있는 식으로 동사(動詞)로 만든다는 겁니다.
문법에 동사(動詞)도 있고 명사(名詞)도 있잖아요. 이름을 명사(名詞)라 하고 그 이름을 가진 물체가 움직이는 것을 동사(動詞)라 하잖아요. ‘내가’라고 하면 이것은 명사고, ‘내가 밥을 먹는다’ 할 때 ‘먹는다’ 이것은 움직임이니까 동사가 되지요.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동사로 만들었어요. 그런데 이 자연을 명사로 만든 존재는 누구냐? 인간이 자연을 명사로 만들었어요.
‘저것은 해다, 달이다, 별이다.’ 자연을 명사로 만들어 놓고서 자연은 인간 관찰자의 대상이 되고 말았어요. 그런데 인간이 생각하는 해와 달이 아니라 해와 달과 별들, 그리고 바람, 구름 등을 동사로 바꾸어서 활동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이미 악해졌거든요. 마귀와 더불어 악해졌다는 말이지요.
인간이 악해졌으니까 하나님은 그 악한 인간 대신 자연을 선하게 만들었어요. 자연이 선하다는 말은 뭐냐? 악한 인간을 죽이는 그 기능이 참 선하다는 그 말입니다. 자연을 통해서 인간을 죽이는 기능이 참 선해요.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서 자연이 인간이 생각하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가 되어서 인간을 죽여주는 선한 기능을 하게 되면 그 선한 기능에 의해서 인간은 악함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자연의 선함은 인간을 죽이는 것으로 드러나는 반면에 인간의 악함은 오히려 자연을 선하게 드러내는 일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드러내게 만들어요. 제가 아까 인간은 게임한다 했지요. 가인부터 시작해서 게임을 하잖아요. 게임을 하는데 인간은 인간하고 게임을 해요. 가인이 아벨을 의식하는 것처럼 인간은 인간과 게임을 해서 승리자가 되면 자기는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인간은 자연을 고려해야 해요. 인간은 자연마저 이겨야 하는데 인간은 자연마저 이겨낼 수가 없어요. 이겨낼 수가 없으니까 인간은 자연물 하나하나에 다 이름을 붙여요. 명사로 이름을 붙여서 그 이름을 붙인 자연을 자기 손으로 장악해서 기어이 자연마저 게임에서 승자가 되려고 시도한 겁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너무 잘 알고 있어요. 가인의 후손들이 국가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뭐냐? 가인의 후손들 특징이 폭력적이잖아요. 가인의 후손이 폭력적이라는 말은 달리 말해서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폭력배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유치원 고학년이나 초등학교 4학년이나 전부 다 일종의 폭력의 변형체들입니다. 항상 잠재적인 폭력성을 인간들은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폭력성이 있어야 게임에 나설 수가 있어요. ‘폭력성으로 치면 남자가 이기잖아.’ 폭력성에서 남자가 이긴다고만 볼 수가 없어요. 여자에게는 어떤 폭력이 있느냐 하면, 울어요. 울면 갑자기 남자가 약해지지요. “뭘 해줄까?” 이렇게 나오지요. 어쨌든 간에 인간의 잠재적인 폭력성의 목적은 오직 자연에게도 밀리지 않고 내 소중한 나를 내가 살려내는 것에 목적을 두고 인간은 살아갑니다. 그래서 살기 위해서는 인간의 지속적인 게임이 연속됩니다.
그 증거를 세상에서 많이 찾을 수가 있는데요, 만약에 여러분에게 지킬 것이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지킬 것이 없다면 그 사람은 싸움을 멈출 거예요. 그러나 지킬 것이 있으면 그 사람은 끝까지 살아남습니다. 독일의 광부로 간 남편이 먼저 죽고 난 뒤에 여자 혼자서 유복자 애를 낳았어요. 남편도 없는데 애를 낳은 그 여자가 나약해질 수 있겠어요?
아닙니다. 남편보다 더 소중한 자식이 있는 한 그 여자는 죽지 않고 식당 부엌에서 설거지를 해서라도 기어이 그 자식을 끝까지 키워냅니다. 힘들 때마다 ‘하얀 나비’ 노래를 부르면서. <수상한 그녀> 그 영화에 나오지요. 자식 봐서라도 내가 여기서 무너지면 안 된다는 거예요. 왜? 소중한 것이 있으니까요.
내가 지킬 것이 있으면 사람은 무너지지 않아요. 악착같이 살아요. 어떤 굴욕적인 상황이 있더라도 소중한 것이 있다면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뭐냐? 자기자신이지요. 따라서 인간의 내부에는 타인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서 힘을 키우는 바로 북이스라엘 왕들이 해왔던 그것이 있는데, 그것을 모든 인간이 재탕하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뭐가 문제 될까요? 자기가 자기 지키기 위해서 산다는 이게 뭐가 흠이 되고, 이게 뭐가 하자 거리가 되는지, ‘그렇지 않은 사람을 오히려 비난해야지 지킬 소중한 것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장한 일인지, 그것은 칭찬받을 일이 아니겠느냐?’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은 이거예요. 왜 그 범주를 인간과 인간만이 싸운다고 생각하고 자연과의 경쟁 관계를 왜 몰랐느냐 그 말입니다. 자연과 싸우는 것을 왜 몰랐느냐 그 말입니다. 사람들은 ‘인간과 인간을 생각한다면 자연이 뭐 싸움의 대상이 될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자연이 살아있다는 것은 인간의 악함을 들춰내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연은 배후에서 누가 갖고 있느냐? 주님이 쥐고 있어서 자연을 가지고 인간을 상대해버리면 인간이 자기를 지키겠다는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위배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오늘 본문 열왕기상 17장 1절에 보면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가뭄이 주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약속의 땅에 젖과 꿀이 흐른다고 그렇게 약속했지만 그 약속을 철회하고 오히려 자연을 통해서 가뭄이 들고 기근을 만들어서 기어이 저 북이스라엘을 죽음에 몰아세우는 이유가 뭐냐?’하는 거예요.
그렇게 그들은 살고 싶어 해요. 살고 싶어도 인간과 인간이 경쟁해 자기들끼리 싸운다면 ‘네가 이기면 내가 살고 내가 지면 네가 이긴다.’ 이렇게 되는데 자연 자체가 모든 인간을 다 죽여 버리면 거기서 인간과 인간의 게임 겨루기는 공허하죠. 허망하기 짝이 없는 쓸데없는 짓을 그동안 인간들이 한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봅시다. 비행기 안에서 어떤 사람이 좌석을 끝까지 뒤로 제쳐서 뒷사람이 불편하게 만들었다. 뒷사람이 앞에 있는 아저씨 보고 “내가 힘드니까 좌석을 약간 당겨 주시겠습니까?” “내가 돈 내고 비행기 탔는데 내 자리인데 그건 비행기회사 보고 이야기해야지. 왜 나보고 이야기합니까?” 이래가지고 시비가 붙죠.
같이 가는 공간인데 조금만 줄이면 될 텐데 ‘나는 나 편한 대로 산다.’ 이런 식으로 싸우고 실제로 주먹질까지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하필 그때 스튜어디스가 안내 방송하기를 “지금 비행기 왼쪽 엔진에 불이 붙어 급강하하고 있습니다. 산소호흡기 끼고 충돌에 대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기도하고 있고요.
그렇다면 인간 대 인간이 ‘너 잘났다, 나 잘났다. 누가 선하냐, 악하냐?’ 그것이 같이 추락하는 비행기 안 그 공간에서는 다 무의미한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지금 추락시킵니다. 농사가 될 수가 없어요. 비가 3개월 4개월 안 오는 게 아니라 3년 6개월 동안 안 와요. 이건 다 죽은 겁니다. 어떻게 뭐 다른 사람 멱살 붙들거나 데모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잖아요.
여기서 하나님께서 가르치는 교훈은 이렇습니다. “인간은,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는 상황 안에서 패배했다.” 이거 중요합니다. 인간은 남을 이기면 승자가 될 여지를 자꾸 생각하는데 인간이십니까? 그러면 처음부터 패배한 거예요. 이 자연 안에서 패배한 겁니다. 이거 아는 사람 별로 없어요.
인간은 남을 이겨보고 누굴 이겨도 그것은 의미 없어요. 자연 안에서 도망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연에게 지시한 그 지시에 따르면 어떤 인간도 자연과 함께 몰락하게 돼 있습니다. 끝! 그게 인간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가뭄이 들었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가뭄이 들었다는 말은, 사람은 각자 붙들고 싸워서 승자 된다고 살아있고 성공한 인생이 아니라 말씀이 없다면 그 인간은 죽은 거예요. 따라서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연을 통해 상당히 의도적으로 노리고 이스라엘에게 말씀의 위력을 보여 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그 말씀의 위력 가운데서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3-4절에 “너는 여기서 떠나 동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가뭄이 끝날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물이 흐르는 시냇가로 피신을 시켰어요. 가뭄 시대에 물만 마시고는 못 살잖아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엘리야라면 “하나님, 물 주시는 것은 참 고마운데요. 물만 먹고 어떻게 삽니까?” 이렇게 나올 거예요. 여기에 누가 등장하느냐 하면, 까마귀가 등장합니다. 레위기 11장에 보면 까마귀는요, 불길한 부정한 짐승이에요.
레위기 11장 13-19절에 “새 중에 너희가 가증히 여길 것은 이것이라 이것들이 가증한즉 먹지 말찌니 곧 독수리와 솔개와 어응과 매와 매 종류와 까마귀 종류와 타조와 다호마스와 갈매기와 새매 종류와 올빼미와 노자와 부엉이와 따오기와 당아와 올응과 학과 황새 종류와 대승과 박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15절에 나오는 까마귀는 더러운 거예요. 불길하고 부정한 거예요. 근처도 가면 안 돼요.
그런데 그 까마귀가 엘리야에게 양식을 준다는 말은,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점에서 선함이고, 인간이라는 쪽에 섰다는 점에서는 더러운 쪽이고, 그러니까 선함과 악함이 중첩된, 같이 겹쳐진 존재가 엘리야입니다. 엘리야에게 벌어지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인간 세계 북이스라엘에 3년 6개월 동안 비가 안 와 모조리 굶어 죽게 만드는 그 취지를 나타내는데요, 부정하고 더러운 까마귀를 통해서 죽어야 될 엘리야에게 아침저녁으로 떡과 고기를 배달, 배달의 민족이죠, 음식을 배달시키도록 하는 거예요.
떡만 먹으면 반찬 타령할까 봐 떡도 주고 고기도 주고요. 하루 두 번씩 옵니다. 뭐 빈틈이 없어요. 열왕기상 17장 5-6절에 한번 읽어보면 “저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저가 시내를 마셨더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까마귀도 하나님의 자연물에 속합니다. 지금 자연에 대해서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노리고 자연을 다루고 있어요. 구름, 비구름도 다루고 있고, 까마귀도 다루고 있고, 그리고 뭘 다루느냐? 자연과 인간이 중첩되어 있는 엘리야도 다루면서 그 틈새 사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중점적으로 주목해야 될 지점이 뭐냐? 엘리야에게 부정한, 더러운 까마귀가 왔는데 양식을 주더라. 그러면 이렇게 보면 되죠. 엘리야는 북이스라엘 선지자니까 죄 많은 인간 속에서 같이 죽어야 마땅한데 악한 인간에게도 하나님께서 떡과 고기를 줌으로써 생명을 제공한다는 주님의 자기 취지를 엘리야를 통해 포개진, 중첩된 상태로 보여주시는 거예요.
이 경우가 요한복음 6장에도 나옵니다. 요한복음 6장에 여러분, 오병이어라는 말 들어 봤죠? 보리떡 5개 물고기 2마리.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지고 오천 명을 먹일 때 주님의 방식은 이렇습니다. 덜어낼수록 더 많아지는 원칙을 사용했어요. 보통 인간 생각에는 덜어내면, 탈탈 털어내면 “이제 없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덜어내면 덜어낼수록 점점 더 많아지는, 이건 인간 세계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인간에게 결핍이 있다는 것은 ‘넌 죽어 마땅하다’라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충분하게, 넉넉하게 준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기어이 내가 너를 살리고야 말리라. 생명이 너에게 가도록, 생명이 넘치도록 나는 너를 노리고 너에게 제공한다.’ 이 두 가지의 의미로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말씀을 행했던 거예요.
광야 때 모세가 새벽에 주는 만나는 그다음은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주는 오병이어는 없다고 여기는데 점점 더 많이 나와요. 그 더 많이 나오는, 풍성하게 나온다는 그 표현이 오병이어 때 뭐냐?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요 6:12).
‘남은 것을 버리지 말고 다 모아라.’라는 이 말은, 지금 너희들이 떡을 먹고 배부른 그것에 의미의 초점이 있는 게 아니고, 너희의 배부름과 전혀 상관없이 먹고 남아있는 그것이 열두 광주리가 되는 거예요. 열두 광주리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말하잖아요?
‘내가 원하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은 너희들이 원하는 건 빼고 너희가 원하지 않은, 너희가 예상도 못 한 여분의 것이 생명 덩어리가 되는 이스라엘을 내가 창조하겠다.’ 이 뜻을 오병이어에 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뜻을 오병이어에 참석했던 그 당시 유대인들은 몰랐어요. 몰라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떡 주셨잖아요. 예수님이 우리 임금 되셔서 날마다 떡을 주세요.”라고 나온 겁니다. “예수님, 모세처럼 날마다 우리에게 그 날치의 떡을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32-3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또 요한복음 6장 58절에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모세가 주는 떡을 먹고 그들은 죽었다는 거예요. 잘 들어보세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만나 주셔서 그들이 양식으로 먹고 살았다.’ 여기서 ‘살았다.’에 줄 쫙 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떡을 먹었는데 너희는 죽었다, ‘죽었다.’에 줄 쫙 치시는 거예요.
너희들은 만나를 먹을 때 변화되지 않았다. 만나를 먹으면서 ‘나는 죽어 마땅해.’ 이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고 오히려 반대로 만나를 주시니까,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살만한 사람이니까 계속 주시고, 주시고 또 주세요. 계속 살려주세요.’ 이런 식으로 나온 거예요. 자기 자신이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는 생명은 어제부로 끝나야 돼요. 그런데 오늘 사는 것은 ‘네가 생각하지 못한 여분의 것, 예수님이 생명인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오늘 또 하루를 사는 거야.’ 이게 남아있는 열두 광주리에 해당되는 거예요. 예상도 못 했는데 여분의 것이 생명이지 내가 원하는 것은 생명이 아니에요. 그건 게임에서 지지 않으려는 가인의 오기와 동일하기 때문에요.
다시 열왕기상으로 와서 여러분들이 속으로 묻고 싶은 것은 ‘저 엘리야처럼 매일 직장 생활할 필요도 없고, 집에 갈 필요도 없고, 아침저녁마다 까마귀가 택배로 밥 주고 고기 주고, 그랬으면 좋겠다.’ 할 수 있는데 그렇게 살고 싶어요? 그거 비참한 거 아닙니까? 교도소에서 사료 주듯이 “316호 식사!” 인간이 얼마나 초라하고, 이러면 존엄성이 박살 나잖아요.
엘리야에게 까마귀가 양식 물어다 줬다고 해서 이거 부러워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까마귀가 얼마나 더러운데요, 자기 먹던 걸 뱉어내서 고기도 준다면…, 참 맨날 같은 거 먹으면 맛도 없고 그래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엘리야가 가뭄 가운데서도 피신해서 살았다.’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특히 엘리야를 보호했다는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이냐? 엘리야 말고 모든 인간은 이 가뭄이라는 자연 밑에서 도망할 곳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인간은 날마다 도망치는 존재에요. 보다 더 나은 환경, 괴롭힘 없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어도 하나님께서는 자연으로 “꼼짝 마라. 넌 갇혔다.” 인간은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할 수 없는 절망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자기 하나 살기 위해서 남에게 폭력을 행사해요. 내가 사는 게 선이기 때문에 내 손에 누가 맞아 죽는 그것도 악이라고 보지 않아요. 내가 사는 게 우선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살면 난 최선, 선을 행했다고 자부하면서 살아오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살면 나중에 뭔가 되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통해서 인간의 악함을 드러냅니다. 인간은 말씀에 관심이 없고 자기 밥 먹고 살면서 그걸로 승리자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엘리야한테는 그게 아니에요. 엘리야에게는 말씀이 있기 때문에, 말씀을 보호하기 때문에 특별히 따로 지켜줬습니다.
엘리야를 지켜준다는 것의 의미를 민수기 35장에 나오는 도피성을 통해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잃어버린 그 원형, 본질, 진짜 하나님이 벌이고 싶은 그 게임, 하나님이 하시고 싶은 그 게임의 원형은 그 도피성에서 찾아볼 수 있어요.
도피성이라고 하는 것은 본의 아니게 사람을 죽인 사람이 그 피해를 본 일가친척으로부터 보호를 해주는 제도로서 제사장이 있는 성으로 도피를 하게 되면 제사장과 더불어, 함께 살면서 본의 아니게 사람 죽인 사람을 누구도 못 죽이게 만드는 제도, 그렇게 해서 생명을 보호하는 제도가 도피성입니다.
그런데 그 도피성에서 혼자 ‘나는 도피했다. 그래서 나는 성공했다.’ 이러면 안 돼요. ‘나는 이미 죽어야 될 몸인데 제사장이 갖고 있는 하나님과 제사장의 관계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주는 것.’ 이것이 도피성의 의미입니다. 내가 예뻐서, 잘나서, 훌륭해서 지켜주는 게 아니고 나를 지킬 만한 근거를 내가 아니라 나 말고 따로 갖고 있는 제도가 도피성이에요. 그게 제사장입니다.
그런데 우연히 살인한 그 사람이 도피성에 왔는데 재미가 하나도 없어요. 뭐 인터넷도 안 되고, SNS도 안 되는데 데모할 수도 없고요. “아, 나 심심해서 못 살아!” 하고 밖에 나왔다 하면 어떻게 되는가? 민수기 35장 26-27절에 “그러나 살인자가 어느 때든지 그 피하였던 도피성 지경 밖에 나갔다 하자 피를 보수하는 자가 도피성 지경 밖에서 그 살인자를 만나 죽일찌라도 위하여 피 흘린 죄가 없나니.”
도피성에서 나가면 죽여 버려요. 그래도 괜찮아요. 심심해서 진짜 못 살겠다. 그래서 돈 좀 주는 거예요. “도피성에서 사는 게 너무 재미없는데 내 죗값으로 돈 드리고 대신 밖에서 친구 만나 살겠습니다.” 하고 나온다면 민수기 35장 31-33절에 “살인죄를 범한 고살자의 생명의 속전을 받지 말고 반드시 죽일 것이며 또 도피성에 피한 자를 대제사장의 죽기 전에는 속전을 받고 그의 땅으로 돌아가 거하게 하지 말 것이니라 너희는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 흘림을 받은 땅은 이를 흘리게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할 수 없느니라.”
특히 32절에 “또 도피성에 피한 자를 대제사장의 죽기 전에는 속전을 받고 그의 땅으로 돌아가 거하게 하지 말 것이니라.” 피해자 가족에게 “내가 돈 2억 줄 테니까 그걸로 퉁 칩시다. 이제 복수 안 할 거죠? 나도 바깥에서 자유롭게 옛날 생활 합시다.” 이러지 말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사람을 죽게 한 사건은 하나님에 의해 일으켜진 사건이고, 그 사건은 남에게 지기 싫다는 게임의 속성을 근원적으로 쏙 빼버린 거예요. 내가 나를 지킬 수 있는 근거가 되는 나의 윤리와 도덕적인 착함과 의로움을, 하나님이 나서서 그런 근거 자체를 마치 사마귀 티눈 뽑듯이 쭉 뽑아버린 거예요.
인간이 게임에 빠져서 평생토록 하는 게 가인의 저주거든요? 그 저주에서 인간을 빼는 방법은, 그 게임을 하지 않으면 되는 거예요. 남한테 이겼다는 걸로 사는 보람을 안 찾으면 돼요. 안 찾는 방법은 뭐냐? 무능함입니다. ‘공부도 안 하고 나는 취직도 안 한다.’ 그런 무능함이 아니고, 주님에 의해서 내가 내 인생을 따로 개척하려는 모든 근거는 이미 삭제되었고 박탈당했다는 그 가벼움, 그 존재의 가벼움.
아까 이야기했죠. 사람이 지킬 게 있으면 살아남지만 만약에 지킬 게 없으면 안 살아도 되잖아요. 내가 나를 지킬 이유가 없으면 그다음에 남과 붙을 때 ‘네가 잘났어, 내가 잘났어?’ 속으로 그런 비교나 경쟁을 안 하게 되니까 남는 것은 뭐냐? 감사 밖에 남지 않죠.
“하나님, 내가 유능했으면 하나님의 십자가의 용서와 영생의 살과 피, 그게 안 보일 텐데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근원적으로 남을 이길 수 있는 모든 자질을 무의미하게 만들었으니 이제 나한테 보이는 것은 예상 못 한, 하나님께서 덤으로 주신 거저 주신 그 용서하심, 사랑 그것만 눈에 보입니다.” 그렇게 되겠죠. 그게 바로 진짜 이스라엘이고 그게 지금 엘리야가 처해 있는 상황입니다.
일부러 우리가 일도 안 하고 공부도 안 하는 식으로 스스로 조작하지 마세요. 그건 예상하고 있는 거예요. 분명히 돈도 있고 능력 있고 취직할 수 있고 다 하지만, 내가 갖고 있다고 여기는 이딴 게임이 하나님 눈에 보기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그런 건 추락하는 비행기 안에서 서로 멱살 쥐고 “비행기에서 내리면 보자. 내가 본때를 보여 준다.”
비행기에서 내릴 것도 없어요. 지금 추락하는데 뭘 내려요? 지금 다 같이 죽어가고 있는데요. 이 가뭄으로 나타난 자연의 선함, 사실은 자연의 선함이 아니죠,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가 감춰놨던 우리의 악함을 그대로 노출시켜서 엘리야처럼 모든 게 거저 주시는 은혜인 것을 깨닫는 그러한 중첩된 인식, 그게 바로 가벼운 말씀의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연중에 남을 이기는 쾌감으로 살아보려는 그러한 우리의 악한 의도, 그 의도를 주께서 다 꿰뚫어 보고 있음을 저희가 깨닫게 해주옵소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이 나를 자랑하고 내가 지킬 게 있다는 것을 나타나게 해주는 환경이 아니라, 애초부터 우리는 무능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이런 자를 위해 주께서 거저 주시는 생명으로 가득 차기를 원하는 그 하나님의 사랑, 이제는 그 사랑만을 나타내고 증거하는 성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수요설교(250910)요약 열왕기상 17장 1-7절(게임의 본 모습)
수요 설교 간단히 요약하겠습니다. 처음 제목이‘가뭄’이었습니다. 자연이 이스라엘 속에 개입한다는 것은 말씀이 끊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릿 시냇가에서 엘리야가 물을 먹게 되거든요. 물론 까마귀가 양식을 물어다 주지만. 어제는 안했던 이야기인데, 가뭄과 더불어 말씀이 안 와요. 가뭄과 더불어 말씀이 오지를 않습니다.
그러다가 언제 말씀이 주어지느냐? 그릿 시냇가에 시냇물이 마를 때, 그 때부터 주의 말씀이 주어지는 겁니다.“이스라엘이 바알을 섬겼다. 하나님 보시기에 더럽다.”그 일을 하기 까지 엘리야 선지자는 가뭄 들었던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도록 기도를 했어야 돼요. 그런데 비가 오지 않도록 기도하는 당사자도 물이 없는 고통을 같이 감수해야 되겠죠.
그러면 이것은 뭐냐? 엘리야의 운명은 중첩이 됩니다. 이스라엘 선지자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받는 고통을 같이 겪어야 되고,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대로 전해야 되기 때문에 이렇게 2중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2중 구조로 있다고 해서 구원이 되는 건 아니에요.
아니고, 2중 구조 자체 내에서 뭔가 제3의 것을 끄집어내는 작업을 해줘야 되는데, 그 끄집어내는 작업이, 어제 설교 시간에 제일 어려운 대목인 까마귀에게서 도움을 받는다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멀리 해야 될, 배척해야 될 그 불길한 짐승으로부터 오히려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는다고요.
그렇게 도움을 받아버리면 그 가뭄 가운데서 엘리야는 물을 마시고, 아침, 저녁으로 떡과 고기를 먹는데, 그 도움에 무슨 요소가 끼어들었어요? 더러운 요소가 끼어들었죠. 더러운 요소가 끼어들었는데, 이것은 엘리야를 살리기 위함입니까, 아니면 엘리야가 전해야 할 말씀을 살리기 위함입니까?
말씀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연물인 까마귀조차도 이용해서 엘리야를 살립니다. 엘리야는 말씀을 전해야할 선지자니까 살리는 겁니다. 그런데 왜 이왕이면 비둘기 같은 짐승이 아니고, 까마귀를 동원해서 엘리야를 살리는가? 그 해답을 오병이어에서 찾은 거예요.
오병이어 이야기에서 보면, 떡을 먹는 당사자가 떡만 찾는 자들이에요. 더러운 자들이에요. ‘떡이 있으면 우리는 살 수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 못하는 자들이에요. 떡 줄 때만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들이에요. 부자 되게 할 때 감사하듯이.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떡 받는 자들에게 떡을 먹여놓고, 다시 그들을 부정한 자로 규정 시켜 놓고, 그들이 떡을 배불리 먹고 다 먹지 못하고 남아 있는 여분의 열 두 광주리를 새로운 이스라엘로 규정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제 나온 문장이 뭐냐 하면,‘덜어낼수록 더욱 더 많아진다.’입니다.
이게 바로 바꿔치기거든요. 더러운 것을 덜어낼수록 생명은 더욱 더 많아지죠. 죄인 중에 괴수가 되면 더욱 더 감사가 깊어지죠. 그러면 내가 없어질수록 감사가 되려면, 나로 하여금 떡만 찾는 더러운 인간의 그 자리로 내가 옮겨가야 되는 거예요.
“떡만 주시면 하나님 잘 섬기겠습니다.”이렇게 말하는 고상한 인간 말고, 어제 언급했습니다만, 모세 때 만나를 줬는데, 주님의 강조점은 뭐냐? ‘떡을 먹었는데 (그 다음에 뭐냐?) 죽었다.’죽었다는 것. “너희들이 딱 그 부류야. 떡 달라 해서 줬는데 죽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뭐냐? 준 떡을 먹고‘죽었다’가 아니라‘살리는’거예요. 그러면 죽었다가 살리려면 살려질 자가 어떤 자이어야 하는가? 죽어 마땅한 자이어야 하겠죠. 거기에 필요한 것이 예수님의 자리, 다시 말해서, 내가 죄인도 아니면서 죄인으로 죽음을 당하는 예수님의 살과 피의 자리로 그들을 끌어당기는 말씀을 그들에게 던지죠.
오병이어는 떡을 주는 게 아니라 주께서 자기의 말씀과 살과 피를 주시는 겁니다. 그럴 때, 아무도 안 먹죠. 아무도 안 먹어요. 아무도 안 먹는다는 그 대목은 오늘 강의에서 나오죠. 제 3의 요소. “나 예수님 살 먹고, 피 먹고 살래.”탈락입니다. 그럴 위인도 없을뿐더러 그런 입에 발린 소리 하지마세요.
그래서 요한복음 6장 44절“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오늘 강의에서 나왔던 것과 같이 매치시켜 보세요.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한다.”(요14장3절-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우리로 하여금 “더러운 곳에서 오래 살 생각하지 마라.”“깨끗이 잊어버리고 떠날 생각이나 해라. 제3의 요소로 떠나라.” 그것이 어제 수요설교의 핵심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