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 속에 숨기
2025년 9월 24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18:1-6
18:1 많은 날을 지내고 제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18:2 엘리야가 아합에게 보이려고 가니 그 때에 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하였더라
18:3 아합이 궁내 대신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크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
18:4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일백 인을 가져 오십 인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었더라
18:5 아합이 오바댜에게 이르되 이 땅의 모든 물 근원과 모든 내로 가자 혹시 꼴을 얻으리라 그러면 말과 노새를 살리리니 짐승을 다 잃지 않게 되리라 하고
18:6 두 사람이 두루 다닐 땅을 나누어 아합은 홀로 이 길로 가고 오바댜는 홀로 저 길로 가니라
열왕기상 17:3에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숨겼습니다. “너는 여기서 떠나 동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리고 오늘 본문 18:4에서 오바댜는 선지자 100명을 숨겼습니다.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일백 인을 가져 오십 인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었더라”
오바댜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육적인 아합왕의 통치에서는 몰래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숨어 있을 수 있었지만 막상 아합의 자리에 엘리야가 등장하니 오바댜는 자신의 육적인 한계를 드러내었습니다. 즉 그는 자기 자신 안에 자기를 숨기면서 살아온 겁니다.
이는 아합도 육적인 힘이고 그 아래 모든 이들이 육적인 이 힘에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물론 오바댜 자신도 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증거가 열왕기상 18:9에 나옵니다. “가로되 내가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 당신이 당신의 종을 아합의 손에 붙여 죽이게 하려 하시나이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숨기시는 것과 오바댜가 선지자를 숨기는 것과는 어떤 차이점이 있다는 점을 오바댜가 엘리야를 만나면서 고백합니다. 그것은 엘리야의 하나님에 의해서 본인이 죽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엘리야의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입장 난처하지 만들게 하지 말라 달라는 겁니다.
자신이 만약에 들켜서 죽게 되면 자신이 돌보는 선지자 100명도 목숨이 위태롭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엘리야 보기에는 오바댜의 이러한 신앙은 육의 통치를 벗어나지 못하는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오바댜가 비록 100명의 선지자를 그동안 보호한 것은 맞지만 그로 인하여 하늘의 비가 내리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비를 가져오는 기적은 엘리야를 하나님께서 숨기신 취지와 관련 있습니다.
즉 육의 통치 아래서 제한적으로 이루어지는 신앙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신앙이 영적인 신앙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인간은 우선적으로 자신이 죽음의 위세에 눌려서 살고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겉으로 보면, 인간에게 자율성이 갖추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에 속한 인물이 등장하게 되면 자신이 여전히 육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신앙이란 종교 생활의 일종이 되면 안 됩니다. 육을 지닌 사람들이 자신을 자신이 관리합니다. 때로는 직장 생활, 때로는 가정 생활, 때로는 취미 생활, 때로는 건강 생활, 때로는 종교 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모든 생활의 바탕을 지배하는 것은 자아가 아니라 자아의 죽음입니다.
오바댜는 아합의 통치 속에 지나면서 나름대로 이 육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종들을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100명 씩이나 지켜내는 것이 자신의 신앙을 지켜내는데 있어 하나님의 돌보심이 지속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아합을 만나는 자리에 엘리야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랬더니만 오바댜의 자신의 육적인 신앙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게 됩니다. 즉 선지자 100명을 살리는 그 행위로 인하여 자신의 신상이 이 육의 통치 안에서는 건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어쨌든 자신은 안 다쳐야 하고 현 상태로 유지되어야 자신의 신앙이 지장을 없을 것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인간이 자신의 육으로부터 벗어나 영의 통치를 받으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이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숨겨놓으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육의 생각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숨김입니다.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 25:22) 천사에 의해서 숨겨놓은 이 언약궤는 그 어떤 육이나 인간도 이 영역을 침범하면 죽게 됩니다. 천사에 의해서 이 언약궤는 보호받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직접 보호받는 이곳에서만 하나님께서 만나십니다. 다른 곳에는 만나주지 않습니다. 엘리야 시대 이전에 이 땅에는 이 언약궤 원칙이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사시 시대 때, 이스라엘은 미디안 민족으로부터 혹독한 육의 통치를 받았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관여하셨습니다.
무서워하는 기드온에게 하나님의 천사가 찾아오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 또 우리 열조가 일찍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나이다”(삿 6:12-13)
육을 능가하는 이적의 힘은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에서 비롯되고 그것을 언약궤로 고정시켜놓았습니다. 엘리야 시대에는 엘리야를 통해서 이 이적의 힘이 발산됩니다. 즉 약속의 땅에 비가 오고, 비가 오지 않는 것은 출애굽을 감행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됨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즉 내가 육으로 믿는 하나님 사이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우리 육의 한계를 드러내십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4:19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마 4:19)
하지만 실제로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난 뒤에 고기를 낚으로 갔습니다. 즉 인간들의 자력으로 온전한 통치나 교육이나 치료를 해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예수님 말씀대로 살려고 해도 죽음의 위세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즉 잠간 죽을거냐 영원히 죽을 거냐를 물으시는 것은 예수님 죽음의 찾아오심이 곧 육으로부터 벗어나 영원한 생명인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육의 한계가 십자가 앞에서 여지없이 드러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9강-열왕기상 18장 1-6절(영(靈)속에 숨기) 250924-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18장 1-6절입니다.
열왕기상 18:1-6
“많은 날을 지내고 제 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엘리야가 아합에게 보이려고 가니 그 때에 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하였더라 아합이 궁내대신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크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일백 인을 가져 오십 인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었더라 아합이 오바댜에게 이르되 이 땅의 모든 물 근원과 모든 내로 가자 혹시 꼴을 얻으리라 그러면 말과 노새를 살리리니 짐승을 다 잃지 않게 되리라 하고 두 사람이 두루 다닐 땅을 나누어 아합은 홀로 이 길로 가고 오바댜는 홀로 저 길로 가니라.”
엘리야가 3년 동안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함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지시가 또 주어졌습니다.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그냥 비를 내려주시면 “고맙습니다!” 그 단비에 감사하고 살면 될 텐데 엘리야에게 어떤 지시가 왔느냐? “너는 아합을 만나야 한다”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열왕기상 18장 1절에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런 점에 있어서 하나님이 생각하는 것과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판이합니다. 인간은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만 받아들여서 편하게 살면 그만인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장기알을 움직인다면 장기알 자체는 뭐가 뭔지 몰라요. ‘하나님이 나를 왜 이쪽으로 움직이는지?’ 하지만 다른 장기알과 연계시켜 보면 다른 장기알의 의미와 나의 의미가 어우러져서 전체적으로 하나님이 말씀하고자 하는 뜻을 드러내는 겁니다.
따라서 엘리야, 그리고 엘리야가 아합을 만나는 것, 그다음에 비 내리는 것, 이 세 가지가 어떤 의미성을 가지고 만나야 하는지? 이게 하나님의 뜻이거든요. 비 내리는 것과, 엘리야와 아합,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난다. 그 뜻을 나타내는 데 있어서 비가 온다는 기별이 없었을 때는 엘리야는 어디에 있었는가?
열왕기상 17장 3절에 “너는 여기서 떠나 동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을 명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여기에 숨는다는 말이 나와요. ‘숨고’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숨겨놨습니다. 또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숨겨놓는 것과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겁니다.
무슨 관련성이 있다는 거예요. 숨겼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궁지로 몰아넣은 겁니다. 엘리야를 궁지로 직접 몰아넣는 그 작자는 누구냐? 열왕기상 18장 4절에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 여기 ‘이세벨’이 나와요. 엘리야 나오고, 아합 나오고, 이세벨 나오고, ‘비 오지 않음’이 나오고, 그 뒤에 ‘비가 옴’ 이런 요소들이 계속해서 연이어 연결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 연결을 다 알아야 합니다.
지금 뭘 모르느냐 하면요, 왜 엘리야가 숨어야 하느냐? 그 점부터 알아야 하거든요. 4절부터 ‘오바댜’가 나와요. 궁내 대신 오바댜라는 인물이 또 등장합니다. 주께서 연극무대를 꾸몄는데 역할 맡은 등장인물들이 무대 중앙으로 집결하고 있습니다. 자, 엘리야가 왜 숨어야 하느냐? 그 이유에 대해서 오바댜가 등장해서 알려줍니다.
4절에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일백 인을 가져 오십 인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었더라.”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에 숨긴다는 말이 또 나오지요. 엘리야는 하나님이 숨기고, 오바댜는 본인이 선지자를 숨기고요. 숨김이 또 하나 더 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이 숨기고, 궁내 대신 오바댜는 선지자들을 숨기고.
그렇다면 오바댜는 누가 숨겨줍니까? 하나님이 선지자 숨겨주고, 나는 다른 선지자들 백 명을 숨겼는데 나중에 그 오바댜가 엘리야 선지자를 만났습니다. 그때 하는 말이 “선지자님! 나는 누가 숨겨줍니까?”라고 해요. 오늘 초점이 ‘숨긴다’, 숨어서 지내야 한다는 거예요. 비가 오지 않는 것과 숨어서 지내는 그런 사람들과의 관련성이 있습니다.
도대체 오바댜는 왜 선지자를 백 명씩이나 숨겨야 하고, 또 오바댜 본인은 숨겨줄 자가 없어서 걱정하고 있고요, 그리고 하나님은 왜 엘리야를 찾지 못하는 곳에 따로 숨겼는가? 숨긴 이유가 뭐냐?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의 육은 인간의 육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다.’ 그 세상이 인간세계입니다. 인간에 의해서 인간이 통치를 받고 지배를 받아요.
그 통치자가 누구냐? 아합이에요. 아합인데 통치받는 자가 누구냐? 아합왕의 궁내 대신 오바댜입니다. 오바댜 이 사람은 어떤 점을 보여 주는가? 인간에게 지배를 받으면서 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이 오바댜는 크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왕상 18:3)라고 되어 있어요.
인간에게 지배를 받으면서도 그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종 선지자 백 명을 50씩 따로 구분해서 동굴에 숨겨두고 떡과 물을 제공해 왔었습니다. 오바댜는 북이스라엘 아합왕의 2인 자죠. 소위 김정은이 제일 신뢰할 만한 2인 자라는 거예요. 얼마나 신뢰했는지 아합이 오바댜에게 “말과 노새를 먹일 물과 꼴을 찾기가 어려우니 각자 가축 떼를 데리고 흩어져서 물과 꼴을 찾아보자.”(왕상 18:5-6) 한 겁니다.
잠시 헤어지면서 궁내 대신 오바댜가 아합왕과 함께 있던 그 자리에 불쑥 누가 들어왔느냐 하면, 엘리야가 들어온 거예요. 7절에 “오바댜가 길에 있을 때에 엘리야가 저를 만난지라 저가 알아보고 엎드려 말하되 내 주 엘리야여 당신이시니이까” ‘엘리야 선지자님, 이제는 나를 지켜주시겠지요?’ 이런 식이예요.
그러니까 오바댜의 신앙의 상태가요, 좀 이상해요. 이상한 그것이 어디에 나오는가? 9-12절에 보면 “대답하되 그러하다 가서 네 주에게 고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가로되 내가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 당신이 당신의 종을 아합의 손에 붙여 죽이게 하려 하시나이까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주께서 사람을 보내어 당신을 찾지 아니한 족속이나 나라가 없었는데 저희가 말하기를 엘리야가 없다 하면 그 나라와 그 족속으로 당신을 보지 못하였다는 맹세를 하게 하였거늘 이제 당신의 말씀이 가서 네 주에게 고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하시나 내가 당신을 떠나간 후에 여호와의 신이 나의 알지 못하는 곳으로 당신을 이끌어 가시리니 내가 가서 아합에게 고하였다가 저가 당신을 찾지 못하면 내가 죽임을 당하리이다.”
무슨 말이 이렇게 복잡하고, 얼른 봐서는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겠지요? 오바댜 입장에서 ‘나의 통치자는 아합입니다. 조금 전에 일 때문에 아합과 헤어졌는데 당신이 지금 이렇게 제 앞에 갑자기 등장해 버리면 나는 이제 죽었다, 가 된다.’라는 거예요. 왜 그런가 하면, 북이스라엘이 수배령을 내렸어요.
“누구든지 엘리야가 어디 있는지 알거나 만나고서도 신고하지 않는 자는 누구를 불문하고 죽인다”라는 조건의 수배령을 내린 거예요. 그래서 엘리야를 만나면 만난 본인이 죽어요. “저 엘리야를 만났습니다. 지금 어디에 은신하고 있으니 경찰 보내서 체포하세요” 해서 엘리야가 체포되면 오바댜는 안 죽겠지요.
하지만 문제가 있어요. 소문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숨겨놓았기 때문에 경찰이 와서 “엘리야 숨었다는 그 장소에 가니 엘리야가 없는데? 없는 데도 왜 있다고 했는가?” 하면 또 오바댜 자기가 죽을 수 있다는 거예요. 이 이야기가 성경에 왜 나옵니까?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교회 나올 때 제가 묻는다고 합시다. “집사님은 집사님의 통치자가 누굽니까?” 또는 “집사님은 어느 나라에 살고 있습니까?” “아, 대한민국!” 대한민국에 살고 있지요. 대한민국의 통치지가 누굽니까? “이재명 대통령님!” 이렇게 되지요. 그러면 아들이 지금 군대 안 가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가야지요. 왜? 통치지가 군대 가라고 하면 가야 하니까요. 서민들 돈 쓰라고 10만 원씩 주면 받아먹어야 하고요.
세상 모든 것은 통치자의 법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거예요. 만약 집사님 댁에 간첩이 와 있다. 신고해야 합니까, 안 해도 됩니까? 신고 안 하고 나중에 법에 걸리면 나란히 교도소에 다 갑니다. 지금 이런 뜻이에요. 지금 오바댜가 여호와를 경외한다고 하잖아요. 이 경외한다는 그 수준이 어느 수준이냐? 육에 의해서 육이 통치받는 그 가운데서 자기는 지금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엘리야는 어떠냐? 엘리야는 육의 통치를 안 받아요. 신약적 용어로 한다면 엘리야는 영의 통치를 받아요. 엘리야를 숨겨준 것은 영이고, 오바댜가 선지자들을 숨겨준 것은 육이 육을 몰래 숨겨준 거예요. 그러니까 오바댜는 육의 한계를 못 벗어나고 있습니다. 오바댜만 그래요?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은 뭘 이야기하는가?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하나님을 좋아합니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백날 이야기해도 내가 하나님을 믿고 경외한 그것이 실효성이 없다는 거예요. 아무 소용도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오바댜는 자기가 자기한테 갇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가 자기 안에 갇혀 있어요.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숨겨 줬잖아요. 그러면 나는 오바댜에게 묻고 싶어요. “당신은 지금 어디에 숨어 있습니까?” 권력 안에 숨어 있잖아요. 당신은 육의 권력 안에 숨고 있으면서 몰래몰래 하나님을 경외하는 티를 내면서 선지자 백 명을 나눠서 숨겨놓고 떡과 물을 제공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라도 하나님께 대한 신앙생활, 종교생활을 유지할 줄 알았지요. 그동안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숨겼잖아요. 지금 북이스라엘에는 엘리야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엘리야를 숨겨놨기 때문에 없는 겁니다. 없는데 왜 갑자기 숨어 있던 엘리야가 나에게 등장합니까? 이것은 자기에게 화가 되지요.
그래서 오바댜가 엘리야에게 하는 말이 “가로되 내가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 당신이 당신의 종을 아합의 손에 붙여 죽이게 하려 하시나이까”(왕상 18:9).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당신이 내 앞에 등장합니까?’라고 한 거예요. 참, 말이 재미있지요? 아, 이게 모든 인간의 속내, 속마음을 대표해서 오바댜가 터트리고 있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 하늘에 계신 것을 잘 압니다. 내가 세상 살면서 성심성의껏 하나님이 기뻐하고 좋아하는 일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세상 권력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나름대로 하나님 섬기는 데 최선을 다해서 바른 신앙생활 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게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전부 아닙니까? ‘마리아 섬기는 것은 우상숭배다. 그러면 안 되지요, 수녀님!’ 이런 식으로.
얼마나 뿌듯하고 자부심 있습니까? “하나님, 보고 계시지요? 드론으로 보고 계시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집사님에게 뭐라고 하느냐? “너는 지금 네 육안에 너를 숨기고 있다. 꼬깃꼬깃 숨기고 있다. 안 들키는 식으로, 들통나지 않는 식으로. 무엇이 무서운가? 너는 무엇이 무섭지?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것이 아니냐?”
육적으로도 밥 먹고 살고, 하나님 안 섬겼다는 소리도 듣기 싫고, 그렇게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집사님 앞에 예수님이 등장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저리 가세요! 저리 가라고요! 지금 주님이 나올 타이밍이 아닙니다. 나는 내 나름대로 하나님 잘 섬기고 있으니 괜히 내 입장 난처하게 만들지 마세요.”
북한에 지하교회가 있답니다. 지하교회에서 하나님 잘 섬기고 있어요. 암호는 ‘고구마 맛있다’로 해서 모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어떤 목사가 와서 싱글벙글 웃으며 “여기가 지하교회라면서 지하도 아니네요?” “쉿, 쉿, 쉿! 혹시 미행하는 사람 없었습니까? 공안이나 그런 사람들 없었지요? 지금 당신이 여기 오면 안 돼요. 우리끼리 신앙생활 잘하고 있고 지하교회 잘 운영하고 있는데 당신이 불쑥 나타나게 되면 당신을 통해서 우리 다 아오지 탄광으로 잡혀갑니다. 왜 이 타이밍에 와서 우리를 죽게 합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왜 공안에 다 잡혀서 죽게 합니까?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 나이에, 이 청춘에, 애도 있는데 더 살지 못하고 죽게 합니까? 하나님이여, 너무 심합니다. 왜 내 입장을 난처하게 만드십니까?” 오늘 본문으로 가보면 “저 사람이 오기 전까지는 내가 신앙생활 잘했습니다. ‘선지자들 50명씩 나누어서 숨겨주고 살렸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어떻습니까? 이 어려운 가운데서의 저희의 희생을 받아주소서.’ 이렇게 얼마든지 할 말이 많이 있는데, 하나님 앞에 내놓을 만한 자기 의가 있는데 이렇게 엘리야가, 수배 걸린 사람이 이렇게 와버리면 나는 이제 죽었습니다.”
오바댜가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오바댜 입장에서는 개인적으로 도저히 풀 수 없는, 해결할 수 없는 난처한 상황이 하나님에 의해 조성됐습니다. 10절에서 오바댜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당신의 하나님’이에요.
자기 하나님이 아니고, 엘리야의 하나님이 따로 엘리야 쪽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내 쪽에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역량대로 따로 하면 된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오바댜가 결정적입니다. 무엇에서 자기가 못 빠져나오는가? 자기의 죽음으로부터 빠져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죽기가 무서워서 자기 무덤 안에, 자기 죽음 안에, 자기 생명, 자기 목숨 안에 빠져있어요.
다시 말해서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섬기는 하나님, 그게 오바댜의 하나님이었어요. 그게 육적인 하나님입니다. 열왕기상 18장 12-14절에 보면 “…당신의 종은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일 때에 내가 여호와의 선지자 중에 일백인을 오십인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로 먹인 일이 내 주께 들리지 아니하였나이까 이제 당신의 말씀이 가서 네 주에게 고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하시니 그리하면 저가 나를 죽이리이다.”
아무리 하나님 섬기고 선지자를 보호하는, 자기 보기에 이건 의로운 일이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라고 해도 그 오바댜는 어디에 묶여 있는가? 육이 통치하는, 아합의 육적 권력 안에서 본인이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헤어 나오지 못하니까 지금 당신을 안 만난 걸로 해달라는 거예요. 만나지 않은 걸로 해달라는 거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서기관들 또 오늘날 교인들이 바로 이런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을 나름대로 섬긴다고 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친숙한, 내가 상상할 수 있는 하나님을 극진히 섬길 테니까 십자가에 죽기 위해 오신 분, 하나님과 나 사이에 십자가에 죽으신 분이 끼어들지 않도록 해 달라’라는 거죠.
그래서 십자가 지신 그분이 나한테 ‘지금까지 있던 하나님과 나의 관계는 다 헛방이고, 그거 다 허물어 버리고 내 아버지가 나한테 이야기한 그 관계로 네가 교체되어야 한다’라는 걸 요구할 때 그걸 용납하고 받아들일 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없어요.
왜? 육이기 때문에요. 육은 영의 이야기를 밀어내요. 배척한다고요. 육은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면, 일종의 포트폴리오에요. 분산 투자에요. 여러분, 국민학교 때 통지표 받죠? 통지표 받으면 국어, 산수, 사회, 과학, 뭐 체육, 음악, 미술, 이렇게 칸이 지어져 있잖아요, 칸이 지어져 있다고요.
적는 칸이 따로 있어요. 그래서 수, 우, 우, 우, 수 이렇게 가는 거죠. 어떤 사람은 가, 나, 양, 가 이렇게 되어 있지만요. 이렇게 쭉 되어 있다고요. 이 세상의 육 적인 사람들이 교회 나올 때 어떻게 하는가? 종교란이 따로 있어요. 직장 생활, 애 돌보기, 살림하기, 취미 생활하기, 운동하기, 이렇게 쭉 있는데 끝에 ‘교회 나와서 예배드리기’가 포함되어 있어요. 주인공이 누구냐 하면, 본인이 주인공이에요. 이걸 하나씩 섞는 거예요.
여러분 민화투 있죠, 민화투. 민화투에 보면 화투를 손에 여러 장 쥐잖아요. 8월 공산, 10월 단풍, 11월 똥, 12월 비, 3월은 벚꽃, 5월 난초, 할 때 이걸 한꺼번에 내지 않아요. 그 현장 그때그때 따라서 가서 5월 난초 냈다가, 6월 목단 냈다가, 7월 싸리 내고, 이런 식으로 따로 구분하듯이 미사일 출격시키듯이 하는데 출격시킬 때 출격시키는 주인공이 누구냐?
나예요. 내 육이라고요. 내 육의 이익과 손실을 생각하면서 육이 육을 지키고 관리하는 방식으로서 신앙생활이 그중에 하나로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신앙생활을 보통 그렇게 하거든요. 그게 예수님 앞에서는 완전히 육이에요. 육으로 통치받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서 이 육을 영으로 바꾸려고 해요. 내가 신앙생활도 하고, 살림살이도 내가 하고 뭐든지 내가 다 하는 그 ‘나’를 주님께서 바꾸려고 합니다. 어떻게? 영적 세계로, ‘나의 하나님에서 엘리야의 하나님’으로 바꾸려고 하나님께서는 아합을 만났던 그 자리에 엘리야를…, 지금 오바댜는 아합하고 잠시 헤어졌잖아요.
아합을 다시 만나기 전에 그 아합 자리에 엘리야를 집어넣습니다. 집어넣으니까 오바댜는 비로소 자신의 한계, 자신의 사이즈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드디어 발견하게 돼요.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어요. 인간에게 도저히 불가능한 직업이 세 가지 있다는 거예요. 하나는 통치하는 직업, 두 번째는 교육하는 직업, 세 번째는 치료하는 직업이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이냐? 인간이 대통령이나 왕이 아무리 통치해도 그 앞에서는 “예, 예.” 해도 집에 가면 그 통치자 욕한다는 거예요. 온전한 통치가 안 돼요.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교육하고, ‘수학을 이렇게 하고 국어는 이렇게 하라’라고 해도 조금만 지나면 딴짓해요.
사람이 사람을 교육 못 합니다. 할 수가 없어요. 사람이 사람을 만들어 내지를 못해요. 치료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종기가 났다고 해서 종기 고쳤다고 치료가 아니에요. 온몸이 다 관련성이 있기 때문에 온몸이 항상 아픈 데가 없어야 치료가 돼요.
이거 나으면 다른 데가 아프고, 이거 괜찮으면 머리가 빠지고, 눈 고치면 발가락에 무좀 걸리고요, 어떤 경우에도 인간은 치료 자체가 안 돼요. 그 이유를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어요. ‘죽음의 힘은 인간의 육으로 다스릴 수가 없다’라는 거예요. 죽음의 힘은 다스릴 수 없어요.
오늘 본문의 엘리야를 보낼 때는 통치 면에서든, 교육면에서든, 치료 면에서 인간을 육에서 영으로 완전하게 치료가 가능하기에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보내셨단 말이죠. 인간의 육은 스스로 관리해서 자기가 자기로부터 영적으로 가지를 못 해요. 자체적인 방어를 한다고요. ‘당신 만나서 내 신세 조져 놨다.’ 이런 식으로요.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마태복음 4장 19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한다. 아까 이야기한 게 일종의 교육이잖아요.
“네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한다.” 그 말을 들었던 베드로가 그 당시에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까? 예수님 십자가 지는 것 보고 도망쳐서 고기 낚는 어부가 됐죠. 안 돼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우리에게 찾아올 때 엘리야가 오바댜 찾아가는 것과 똑같은 원리에요.
찾아와야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 섬기고 신앙생활 잘해도 우리는 우리의 육에 갇혀 있다.’라는 것, 내 육안에 ‘들키지 말아야지. 내 목숨 여기서 유지해야지.’ 발발 떨면서 내 자아라는 곳에, 내 목숨 속에 안 죽으려고 숨어 있는 그런 꼴을 하나님의 말씀이 와서 들통 내는 겁니다. 오바댜도 마찬가지죠.
얼마나 무서웠으면 “제가 선지자 백 명을 이렇게 돌봤습니다.” 그걸 마지막 카드로 사용했겠습니까? “하나님, 살아계신다면 제발…” 이렇게 착한 일을 했다는 말을 왜 하느냐? “하나님이요, 저를 안 죽게 하옵소서. 지금까지 나는 내 식으로 안 죽고 버텨왔는데 엘리야가 와서 이제는 나 완전히 갔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당신의 하나님께 기도해서 나 안 죽게 해 달라, 당신 온 거 무효로 해 달라, 쉽게 말해서 우리 안 만난 걸로 해 달라, “어, 어! 그냥 가세요. 오지 마세요.” 부담스러워서 안 왔으면 좋겠다고 밀어내는 겁니다.
자, 엘리야를 보냈던 하나님의 원칙은 뭐냐? 하나님이 인간들 몰래, 인간들 아이디어에서 나오지 않는 숨겨놓은 것이 있어요. 출애굽기 25장에 나옵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20-22절에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 몰래 오직 제사장만 1년에 한 번씩 만날 수 있는 언약궤라는 특정 물체를 만들어놨습니다. 그 물체는 두 천사 아래 숨어 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요. 천사는 언약궤를 보호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언약궤에 함부로 오게 되면 천사가 가만두지 않고 죽여 버립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객관식 문제를 던집니다. “너 육의 통치에 맞아 죽을래, 아니면 나한테 맞아 죽을래? 어느 쪽 할래?”
이 이야기는 마태복음 10장에도 나와요. 28절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이 말씀을 설명하려면 우리의 육, 우리의 몸이 바로 몸을 두렵게 하는 같은 육의 나라에 이 땅에 출생해야 해요. 인간들이 지배하는 이 악한 세상, 우리가 여기에 태어나야 해요. 태어나서 인간들의 육의 통치가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지를 평생토록 우리는 절감해야 합니다. 바들바들 무서워 떨어야 돼요.
집에 경찰 오게 되면 무섭지 않겠습니까? 밤중에 경찰이 와보세요. 얼마나 무섭다고요. “혹시 여기 우 영순 할머니 댁입니까?” 이렇게 와보세요. 우 영순은 치매 걸린 우리 어머니예요. 경찰이 밤중에 8시 넘어서 와보세요. ‘큰일 났다. 무슨 사고 났다.’ 안 하겠습니까?
왜 그러냐 하면, 우리 몸이 이야기해요. 우리가 정신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님 믿습니다, 백날 해도 소용없어요. 우리의 몸이 철저하게 육의 통치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무서워요. 못 빠져나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너 사람한테 맞아 죽을래, 아니면 나한테 맞아 죽을래?” ‘일시적으로 죽을래, 영원히 죽을래?’ 마태복음 10장의 이 말씀을 하기 위해서 열왕기상 18장에 미리 오바댜에게 말씀이 되어 있는 겁니다. 똑같은 원칙이죠.
자, 그러면 이제 남은 문제는 뭐냐? ‘이 언약궤의 원리가 어떻게 엘리야 속에 담기느냐?’ 이것만 풀면 돼요. 언약궤는 상자거든요. 엘리야는 움직이는 인물이잖아요, 인격 아닙니까? 어떻게 언약궤의 그 취지가 움직이는 엘리야의 몸속에 들어가서 발휘되느냐?
사사기 6장 13절 14절에 보면 그 힌트가 나와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열왕기상이거든요. 이것은 엘리야 선지자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열왕기상 이전에 사사 시대가 있었어요. 사사 시대 때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찾아와요. 찾아올 때 기드온이 말립니다. “하나님, 저 일 못 합니다. 전 그냥 농사짓는 사람입니다.”
기드온이 어떤 사람이냐 하면, 사사기 6장 11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밀을 드러내놓고 타작하지 않고 포도주 틀에서 남들 못 보도록 몰래 숨어서 했다는 것은 이미 사사 시대 때 이스라엘이 그 당시 육의 통치자, 미디안이라는 강력한 나라 앞에서 숨어 지냈다는 거예요. 육을 가졌습니까? 그러면 어떤 인간도 육적인, 악마의 권세에서 숨어 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 지금 숨어 있어요. 바들바들 떨면서 숨어 있습니다. 이게 우리 육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하느냐? 숨어 있는 걸 알아요. 아시면서 찾아와서 “기드온아, 힘내라. 너는 용사가 되고 나와 함께 이스라엘을 구원하자”(삿 6:12). 이렇게 하니까 “저 못 합니다.”(삿 6:15) 당연하죠. 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여, 절 죽이려고 작정을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 놔두고 왜 저보고 ‘큰 용사여’라는 말을 하십니까? 저한테 어울리지 않습니다.”
사사기 6장 12절에서 ‘큰 용사’라고 했고 13절에서 중요한 말을 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애굽에서 출애굽 할 때 유월절 어린 양의 능력으로 벌써 이스라엘은 육의 통치, 육의 나라에서 벗어난 경험이 그들 속에 동행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 사사 시대 때 와서 다른 이웃 나라를 본받아서 하나님의 언약궤에서 나오는, 육으로부터 영으로 옮겨주는 막강한 기적과 이적을 안 믿고 그냥 ‘힘센 쪽에 붙어 밥이나 빌어먹고 산다.’ 이쪽으로 정리가 된 거예요. 하나님은 고집이 있어요. 하나님은 출애굽의 원칙이 담겨있는 율법을, 언약을 성취하려는 집착 집념이 있어요.
그 집념으로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찾아와서 하나님의 그 어린 양의 피의 능력으로 기드온이 미디안 13만 5천 명의 군대를 작살내고, 끝까지 따라가서 왕까지 체포해 죽이고 이스라엘을 잠시 육의 나라에서 영의 나라로 회복했습니다. 구원해 내는 거예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게 뭐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은,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너 잠시 죽을래, 영원히 죽을래?” 그 말씀을 하시는 것은 육으로부터 우리가 할 수 없는 영의 세계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에요.
그래서 말씀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 우리는 나를 숨기는 방식이 곧 나를 억지로 살리는 방식인데 주님께서는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유일하게 숨어 있는 언약궤, 하나님의 율법이 마지막 도달하는 그 취지와 하나님의 언약궤의 능력을 품은 그 당시 말씀으로 또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 어린 양의 희생의 능력이 우리에게 덮였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엘리야로 하여금 찾아오게 하는 것, 비가 오지 않는다는 이것은 “오바댜야 네가 육에게, 아합한테, 이세벨에게 잡혀서 죽을래, 물 없이 죽을래?” 이걸 묻는 겁니다.
지금 비가 온다는 소식을 갖고 엘리야가 등장했잖아요. 그러면 그동안 ‘비가 오고, 안 오고’가 인간들 통치자의 손에 있었던 게 아니었습니다. 이 대자연에 비 오는 것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언약과 연계된 ‘하나님의 비 내리심과 비 오지 않게 하심’과 관련되어 있어요.
그래서 숨어 있는 엘리야가 움직인다는 말은, 드디어 인간은 못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대로 실현할 타이밍이 엘리야의 등장과 함께 떴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가 오바댜에게 위로가 됐겠습니까, 안 됐겠습니까? 전혀 위로가 안 돼요. 왜냐하면 오바댜는 아직까지 비 내림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열왕기상 18장 뒤는 뭐냐? 오바댜를 벌벌 떨게 만들었던 아합왕을 엘리야가 만납니다. 직접 만나서 어떻게 하는가? 비가 오는지 안 오는지를, ‘이게 엘리야의 하나님이 진짜 결정한 것인지, 아니면 네가 믿는 너희들이 믿는 우상 바알이 한 것인지?’ 온 백성이 보는 앞에서 배틀이 시작되는 겁니다.
이 말씀을 하고 마치겠습니다. 구약에서 오바댜 같은 경우하고 우리하고 달라요. 오바댜 경우에는 비가 내리기 전에 엘리야가 자기한테 먼저 치고 들어왔잖아요. 그런데 우리 같은 경우에는 ‘십자가에서 너는 죽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라고 결정된 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통치, 육의 통치를 경험하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약의 우리 성도는 이미 영에 속하면서 뒤늦게 ‘도대체 나는 무엇에 부들부들 떨고 있는가?’를, 그 육을 뒤늦게 사후적으로 경험하는 여유 있는, 넉넉한, 안심해도 괜찮은, 아무 염려 없는, 감사와 기쁨이 있는 그런 삶을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가 무엇에 갇혀 있고 무엇에 벌벌 떨고 있는가를 찾아오셔서 지적해 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우리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육의 힘 속에 주께서 이미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에 죄 사함을 해주셨기에, 더 이상 세상 목숨에 연연하지 말라는 것이 우리에게 자유의 기쁨의 복음으로 다가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