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질이 다른 죽음

아빠와 함께 2025. 9. 18. 10:32

질이 다른 죽음

2025년 9월 17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17:8-10

17:8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17:9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
17:10 저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곳에서 나무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가로되 청컨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

엘리야 선지자는 가뭄 가운데서도 하나님과의 특별과 관계로 인해 목숨이 연명되도록 보호받게 됩니다. 하지만 드디어 그릿 시내의 물도 말랐습니다. 그리고 까마귀로부터 공급받는 식으로 제공되던 떡과 고기도 더는 없습니다. 선지자는 목숨을 부지되기 위해 특별이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도록 조치됩니다.

그 사람이 바로 사르밧 과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여인으로 하여금 선지자를 도와주도록 사전에 조치해 놓으셨다고 합니다.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17:9) 그런데 막상 그 과부를 만나고 보니 기꺼이 선지자를 반길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과부에서는 떡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과부에게 있는 것은 ‘마지막 밀가루’였습니다. 양식이 다 떨어진 겁니다. 그 양식은 선지자를 돕기 위해 양식이 아니었습니다. 순전히 자신과 아들을 위해 줄곧 소비해 왔던 양식이었습니다. 이게 그 양식은 마지막 한 줌만 남기고 그 외는 없습니다. 이와 더불어 모자의 목숨도 끝납니다.

선지자는 그 마지막 남은 밀가루로 만든 떡으로 자신에게 돌리라고 합니다. 이는 곧 과부와 그 아들의 죽음을 선지자가 떠 안겠다는 겁니다. 마지막 남은 밀가루로 만든 떡은 과부에게 가서도 마지막 떡이요 엘리야에게 와도 마지막 떡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제 그 떡만 누가 먹든 먹게 되면 과부 가정도 죽고 엘리야도 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선지자의 관계는 그 어떤 가뭄 속에서도 선지자는 죽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선지자가 과부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떠안게 되면, 이는 선지자의 삶이 곧 그 안에 들어와 버린 과부 가정의 삶이 보장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되면 가뭄에 쫓긴 자들 중에서 선지자의 합류된 가정은 이 과부의 가정 뿐입니다.

즉 선지자와 하나님과의 맺은 관계가 과부의 가정의 변화를 통해서 나타난다는 겁니다. 과연 과부 가정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가뭄이 끝날 때까지 과부 가정에서는 밀가루와 기름이 동이 나지 않았습니다.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왕상 17: 15-16)

그런데 일반인인 사르밧 과부 가정이 하나님의 내리시는 저주, 곧 가뭄 속에서 지키려는 죽음의 질과 선지자가 지니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죽음의 질이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과부는 그저 죽을 뻔했다가 선지자를 만나 다시 예전처럼 살게 되었다고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과부와 선지자의 만남은 선지자가 과부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과부가 선지자가 품고 있는 낯선 죽음의 질을 드러내는데 상대역이 되어 주고 있습니다.

가뭄이 주는 죽음에 둘 다 쫓기면서 서로 이질적인 죽음이 선지자 죽음 안에서 통합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단순히 목숨 연명으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최종적인 생명의 상태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사태를 발생시킵니다. 그것은 바로 멀쩡했던 과부의 아들이 갑자가 죽어버린 일입니다.

이 일을 통해서 사르밧 과부는 자신의 본색을 여과없이 드러냅니다. 즉 그동안 줄곧 과부는 ‘자신이 자신을 살리는 식’으로 세상을 살아온 겁니다. 내가 나를 살려내는 식으로 살아도 그그것을 ‘살았다’ 혹은 ‘생명’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고 여겼던 겁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아들이 죽게 된 이 사단이 선지자가 자기 집을 방문했을 때부터 예견된 사실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과부는 자기 아들이 죽는 것과 자신의 죄와 관련성이 있다고 짐작합니다. 내가 평생 지은 죄에 대한 죄책감이 자기 내부에 엉어리져서 깊숙한 감추어져 있었던 것이 아들의 죽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들통났다는 식으로 아들의 죽음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합니다. 과부는 자기 견해를 선지자 앞에 분노 가운데 털어놓으므로서 평소에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산다’는 일관된 습성을 감추지 않습니다.

즉 가뭄이 아니라 더 혹독한 환경이 찾아와도 인간은 그 자연의 압박으로도 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은 지옥에 가서도 하나님을 원망하는 존재입니다. 과부가 선지자 앞에서 분노를 터뜨리는 것은 자신과 아들이 마지막 떡을 먹고 생을 마감하겠다는 자기 결정마저 하나님께서 개입해서 허락하지 않다가 자신의 죄를 들추어내면서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아들을 죽이시는 조치로 인하여 과부 자신의 존엄성과 그동안 자기 삶의 의미가 한꺼번에 굴욕을 당하게 되었다는 점에 참을 수 없었던 겁니다.

과부는 죽어가면서까지 끝까지 안 버리려고 한 것이 바로 ‘나의 나됨의 신성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개입은 그것마저 허락하지 않으신 겁니다. 그 이유는 과부의 아들의 죽음이나 과부의 죽음이 하나님의 언약의 핵심이 아니라 선지자의 죽음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 자신의 죽음의 언약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과부는 자신의 아들 죽음에서 손을 떼야 합니다. 아들의 죽음은 엘리야 선지자가 가져갑니다. 그것은 선지자의 죽음 안에는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죽음과 질이 다른 요소로서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절망감’이 성격으로 나타나는 죽음입니다. 마태복음 27:46에 보면,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자기에게 인수된 과부 아들의 죽음을 품고 선지자는 ‘죽음 앞에서의 절망감’을 느끼게 됩니다. 자신이 아들을 살릴 수 있는 그 어떤 능력과 재주가 없습니다. 이게 선지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들을 자신 죽음에서 하나님 죽음으로 넘기는 일입니다. 선지자가 아들을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 안으로 넘길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엘리야 자신을 가뭄 속에서 기어이 살려내려는 의도를 알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에게서 내려온 1인용 불수레 타고 승천합니다.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왕하 2:11)

이로서 아들의 죽음은 어머니 과부 속에 있는 ‘하나님의 원수된 본성’까지 하나님께서 친히 받으시고 그것마저 해결하시기 위해 필수적 절차였던 겁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 6:5)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죽음말고 주님의 죽음을 늘 생각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8강-열왕기상 17장 8-10절(질이 다른 죽음) 250917-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17장 8-10절입니다.

열왕기상 17:8-10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 저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곳에서 나무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가로되 청컨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

열왕기상 17장에서, 하나님께서 가뭄을 예고해 주시고 그 속에서 엘리야를 살려내는 겁니다. 엘리야를 살려낸다는 것은, ‘엘리야가 가뭄에 쫓겼다. 그 쫓기는 삶을 통해서 엘리야 본인이 가뭄 가운데서도 어떻게 사느냐?’에 대한 새로운 경로를 엘리야를 통해서 만들어내십니다.

그 경로에 누가 동승하게 되는데, 바로 사르밧 과부입니다. 그릿시냇가에 물이 있을 때는 사르밧 과부의 도움이 필요치 않았지만 더 이상 비가 내리지 않아서 시내가 말랐어요. 7절에 나옵니다.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

엘리야를 도와서 그의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것은 없어졌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가뭄 속에서도 엘리야와 더불어 있는 그 말씀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도록 엘리야를 시돈으로 내려보냅니다. 거기에 누가 대기하고 있느냐? 사르밧 과부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9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돌볼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다 준비되어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엘리야가 하나님이 지목한 사르밧 과부를 만났는데 그 과부는 엘리야를 공궤할 마음 자세가 전혀 없어요. 없고 오히려 정반대 상황이 일어납니다. 사르밧 과부를 만나기는 만났어요. 그 과부가 나뭇가지를 주우러 간 그때 만났어요. 그래서 엘리야 선지자가 나뭇가지 주우러 온 그 과부에게 “저에게 물 좀 주시겠습니까?”라고 이야기했어요.

그 전에 엘리야가 그릿시냇가에서 물을 제공받았지요. 그리고 까마귀를 통해서 떡과 고기를 제공받던, 그래서 목숨을 연명했던 선지자 엘리야가 이제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사르밧과부를 통해서 물도 얻고 떡도 얻겠다는 의도로서 하나님이 준비했다고 하니 그냥 “주세요!”라고 일방적으로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에게 말하기를 “나에게는 떡이 없습니다.” 한 거예요. 하나님의 지시하고, 막상 그 지시대로 현장에 갔던 엘리야가 맞닥뜨린 상황과 달랐어요. 떡을 받게 되어 있다는데 사르밧 과부는 줄 떡이 없대요. 예를 들면 제가 배가 고파서 ‘어디 뭘 좀 먹을 데가 없을까?’ 했는데 하나님께서 지시해요.

“○○○중국집에 가거라. 그 사람이 너에게 짬뽕을 대접할 것이다.” 그 집에 가서 “짬뽕 주세요!”라고 하니까 주인이 하는 말이 “오늘 가게 문 닫는 날인데요?” 하나님의 뜻에 대한 해석이 과부 쪽 잘못인지 아니면 엘리야 쪽에서 잘못인지, 엘리야는 당황스럽지요.

과부는 선지자를 속일 맘은 전혀 없고 이렇게 말합니다. 열왕기상 17장 11-12절에 “저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저를 불러 가로되 청컨대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저가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뿐이라.”

즉 ‘짬뽕은 없고 밀가루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밀가루로 마지막 짬뽕, 마지막 짜장면을 해 먹고, 폐업 정도가 아니고 이참에 아예 인생을 끝장내기 위해서 밀가루 반죽하고, 기름치고, 그다음에 불쏘시개 하려고 나뭇가지 주우러 가다가 선지자를 만난 거예요.

그러면 지금 엘리야는 가뭄 가운데서 살려고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그 과부를 만났는데, 그 과부 역시 가뭄 속에서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생각으로서 그 과부가 내린 결정은 ‘마지막 떡을 먹고 아들과 더불어 죽겠다’라는 거예요. 가뭄에 쫓기는 두 사람, 한 사람은 선지자 엘리야, 또 한 사람은 사르밧 과부, 가뭄에 쫓기던 그 두 사람이 가뭄을 통해서 우연히 만났어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이렇게 만났습니다.

만났는데 그 가뭄의 여파, 효과에 의해서 과부와 그의 아들은 인생의 마지막, 끝을 맞이했습니다. 그 끝을 맞이하면서 거기에 엘리야가 합류하게 됩니다. 이렇게 돼요. 그 과부가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으로 주워 온 나뭇가지의 화력으로 떡을 만들어서 먹어버리면 그것으로 과부와 그의 아들은 죽고 또 누가 죽느냐 하면, 엘리야도 죽어요.

떡이 있어야지요. 떡 제공자가 죽어버리는데, 마지막 떡은 홀라당 자기가 먹고 죽어버렸는데 엘리야에게 넘어올 마지막 떡은 없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엘리야와 과부를 가뭄 속에서 만나게 하시는 것은 세 종류의 죽음이 하나로 뭉치기 위함입니다.

첫 번째 죽음은 ■자연의 죽음이에요. 하나님의 압박에 의해서 자연의 원칙과 규칙을 지키지 않고, 그래서 비가 와야 하는데 안 오고 자연의 기능이 말라 죽고 있습니다. 자연체계가 죽으니까 자연을 믿고 살던 북이스라엘의 일반 백성들도 죽고, 그 일반백성의 참혹한 삶을 사르밧 과부가 보여 줍니다.

그 과부는 남편이 없어요. 살아갈 능력이 없어요. 좌절할 수밖에 없지요. 자연 세계의 죽음과 ■일반백성이라 할 수 있는 과부의 죽음, 그 과부가 죽어버리면 누구도 죽느냐? ■엘리야 선지자도 죽는 거예요. 선지자가 죽어버리면 그 공간의 말씀도 죽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일단은 하나님과 연락이 되는 사람은 엘리야, 곧 선지자거든요. 선지자를, 가뭄이라는 저주스러운 환경 가운데서 그 엘리야를 살림으로써 그 여파로 과부도 살고 그 여파로 자연도 함께 살고, 그 여파로 하나님의 말씀도 안 죽고 사는 겁니다. 즉 계속 스스로 성취를 보여 주고 있다는 그 말씀이 사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가뭄이라는 죽음의 상황을 개시한 이유는, 인간이 범죄하여 이룰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 언약을 하나님이 스스로 죽음의 환경 속에서 성취하는 과정을 보여 주는데요, 그 성취하는 경로 자체가 죽음과 죽음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방식 외에는 다른 방식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성취하는 그 경로에 펄떡펄떡 활어(活魚)처럼 살아서 말씀이 완성되는 그런 일은 애당초 없습니다. 죽은 자를 통해서 생명이 나오는 방식 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가뭄이라는 죽음 상황을 당하는 것은 마땅히 당해야 하고, 인간에게 가뭄이라는 저주와 심판을 내리는 하나님의 정당성을 인간은 마땅히 감수해야 해요. 죄지은 인간이 더 살려고 하는 것은 말씀에 입각해 볼 때 옳은 권리가 될 수가 없어요. 말씀대로 못살면 마땅히 죽어야 되니까.

첫 번째 중요한 것은 사르밧 과부가 그 가뭄 속에서 본인이 본인을 다루고 있다는 그게 첫 번째 중요한 겁니다. 사르밧 과부는 가뭄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떻고, 말씀이 어떻고…’ 관심이 없어요. 지금 자기가 견디다 견디다 내가 내 인생을 보살피고 꾸역꾸역 한평생 살아온 그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볼 때 ‘내가 죽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한도다, 끝이다. 왜? 내 인생은 내가 다루기 때문에.’

이게 얼마나 실제적인 이야기입니까? 우리가 매일 같이 만나는 현실을 뚝 잘라보면 이거예요. ‘내 인생은 내가 다룬다.’ 그게 사르밧 과부의 태도고 행동입니다. 가뭄에 대해서 무슨 대책이 없잖아요. 기름도 다 떨어지고 양식도 다 떨어졌는데 뭘 어떻게 목숨을 이어갈 수 있습니까? 없지요.

그런데 그 과부에게 역시 죽음에 쫓기는 선지자의 죽음과 합류하게 되었다는 거예요. 두 개의 죽음이 합류될 때 과부 입장에서는 ‘선지자 너나 나나 똑같아. 가뭄 들어서 양식 없으니 마찬가지 신세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 있는, ‘내가 가뭄을 이겨낼 수 없듯이 너도 마찬가지야. 너도 별 수 있어?’라고 생각하는 그 두 사람이 만나는 거예요.

그런데 사르밧 과부가 평소에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꾸려간다’라는 거기서 나오는 죽음이라는 개념과 하나님과 통하는 선지자 엘리야가 가뭄에 쫓기고 죽음에 쫓겨서, 그릿 시냇가 물도 말랐고 까마귀도 오지 않으니까 같은 사람에게 보살핌을 받아야 하겠다고 온 그 엘리야의 죽음은 과부가 생각하는 그 죽음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있는 자의 죽음에는 일반인들이 모르는 다른 질, 다른 차원의 죽음이 거기에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과부는 엘리야를 만남으로써 ‘아, 가뭄 들고 양식 떨어졌으니 이제 나는 끝이야’라고 할 때 그 ‘끝’이라는 개념이 엘리야를 만남으로써 ‘아직 아니지. 아니야, 아니야. 그거 끝 아니야.’ 선지자 내가 당신의 죽음을 흡수 통합했습니다.

엘리야는 이렇게 나옵니다. “당신의 죽음을 내가 가져가겠습니다. 당신 죽음을 내가 대신 책임질게요.” 그러니까 ‘당신이 마지막으로 먹고 죽겠다는 그 떡을 선지자인 나에게 줌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죽음은 내 안으로 쑥 들어온 거’예요. 선지자 안으로 들어온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선지자가 일반인의 죽음과 동일한 죽음이라면 그 과부의 마지막 떡을 선지자가 강탈하고 빼앗은 거지요. 마지막 떡을 과부에게서 빼앗아버리면 마지막 떡을 먹고 죽으려고 했던 과부와 그의 아들도 죽고…, 떡은 없어요, 마지막 떡이었으니까요. last bread? 그 마지막 떡을 선지자가 먹었으니까 어떻게 돼요? 죽지요. 너도 죽고 나도 죽고.

과부가 어떻게 생각했겠어요? ‘네가 뭔데? 내 마지막 떡을 당신이 함부로 빼앗아서 나도 죽고 내 아들도 죽고, 그리고 당신도 죽고, 꼴이 무슨 이런 꼴이 있느냐?’ 여기서 준비된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집니다. “가뭄이 끝날 때까지 당신의 밀가루와 기름이 끝이 없어라.” 열왕기상 17장 14절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과부의 믿음도 아니에요. 과부의 믿음이 아니고, 강제로 선지자가 과부의 목숨을 자기 안으로 자기 목숨과 통합시킨 효과입니다. 강제로 과부의 그 죽음을 대신해서 가져갔던 엘리야에게 넘겼기 때문에 이제 과부는 선지자 앞에서 이미 죽은 거예요. 이미 죽었기 때문에 과부는 이런 생각을 해야 해요. 저 선지자가 살아 있으면 나는 살아 있고, 저 선지자가 죽으면 나는 죽는다.

다시 말해서 내 인생은 그동안 단독 인생이었는데 이제는 선지자 안에 있는 인생, 선지자 안에 통합된 인생으로 결속되어 있고 결합 되어 있는 겁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로마서에 있는 예수님과 더불어 세례받는 것이 기억나지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3-4).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 그런데 엘리야는 말씀의 완성자는 아닙니다. 엘리야는 메시아가 아니고 예수님은 완성자기 때문에 예수님에 의해서 완성되는 것을 앞당겨서 엘리야 시대에 장차 올 메시아의 역할 기능이 무엇인가를 미리 엘리야를 통해 보여 주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 엘리야가 과부를 도와주는구나.’ 그렇게 생각하기 쉬워요. 그러나 정반대입니다. 엘리야의 엘리야 됨이 초점이에요. 하나님의 계시의 초점은 엘리야에게 있습니다. 과부에게 카메라가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에요. 주연은 엘리야에요. 왜? 하나님의 계약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러면 사르밧 과부는 뭐냐? 엘리야가 품고 있는 그 말씀의 완성을 위해서 사르밧 과부가 상대역을 해주는 겁니다.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를 도와주는 거예요. 그런데 과부는 이 사실을 몰랐어요. 밀가루가 통에서 마르지 않고 기름이 기름병에 있으니까 그때는 ‘아,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서 내가 죽지 않고 계속 살도록 은혜를 주셨구나.’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왜 과부는 그렇게 생각할까요? 평소에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꾸려나갔다는 그 버릇은 계속해서 가뭄 속에서, 심지어 선지자를 만나도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그게 달라지지 않았어요. ‘야, 하나님 덕분에 덕을 보는구나. 아이고 선지자 덕을 보네. 고맙습니다.’ 그 사르밧 과부는 그렇게만 생각했어요. 과부는 아직도 엘리야를 엘리야답게, 선지자를 선지자답게 하는 그 작용에 자기가 조연급으로, 엑스트라로 말려들었다는 생각을 못 하고 여전히 자기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 증거가 어딨느냐? 그다음에 나와요. 엘리야가 와서 밀가루 통에 계속해서 밀가루가 넘쳐나고 기름통에 기름이 넘쳐나는 그 대목만 생각한다면 이 성경 구절을 보는 모든 사람은 이런 욕심이 또 생길 거예요. ‘이왕이면 통을 좀 크게 키우지. 작은 통 말고 넉넉하게 드럼통보다 더 큰 통으로 했으면 평생 먹고 살 텐데.’ 이런 생각이 드는데 아마 사르밧 과부도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어요.

어쨌든 간에 엘리야 덕분에 그들은 굶어 죽기 직전에 구사일생 되었다. 그게 1막이라면 2막은 열왕기상 17장 17절에 나옵니다. “이 일 후에 그 집 주모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숨이 끊어졌어요.

이럴 때 사르밧 과부의 엘리야에 대한 태도, 자기 안에 자기도 미처 몰랐던 잠복되어 있던 본심이 여기서 튀어나옵니다. 그 본심이 18절에 나옵니다.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이걸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당신의 하나님이 이 가뭄 속에서 조기에 내 생명 뺏어갈 때 당신의 하나님 입장에서 볼 때 ‘이 여인아, 넌 죄가 많아서 진작 죽었어야 해.’ 그렇게 해서 남편 죽고 난 뒤에 아들하고 살려는 나를 기어이 못 살도록 가뭄까지 보내고, 아, 난 살 자격이 없어. 그러니까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서 날 죽이려고, 이런 식으로 욕을 보이려고, ‘넌 밀가루 먹고 기름 있어 봤자야. 네 죄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죽어 마땅해. 그것은 너도 인정하는 바지? 너도 각오하고 있지?’ 그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당신을 나에게 보냈군요. 그렇죠, 선지자님?” 지금 감사가 아니고 성질이 나서 달려드는 거예요.

이 사르밧 과부의 태도 중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될 것은, 과부가 자기 아들이 죽는 마당에 ‘내 아들이 죽는 것은 엄마가 죽은 죗값으로 저주받아서 엄마가 살아 있는 채 자식을 죄의 값으로, 희생물로 그렇게 하도록 하나님이 조치했다.’라는 이 논리에 대해서, 이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 사르밧 과부는 “나는 그걸 하나님의 진리로 수긍하고 인정합니다. 됐습니까!” 성질이 나 가지고.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진리와 복음에 대해서 정답을 입으로 말한다고 해서 그게 감사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성질나니까. ‘내 그럴 줄 알았어. 그럴 줄 알았어. 하나님이 내 인생 조져놓을 줄 알았어.’ 그런데 어느 날 선지자가 자기 집에 왔잖아요. 자기가 초청했습니까? 아니에요. 내가 부르지도 않았단 말이죠.

내가 상관하지도 않았는데 당신이 와서 결국 그 결과가 뭐냐? 밀가루 줄 때, 기름줄 때 감사했죠. 그러나 마지막 결과가 뭐냐? 내 아들이 죽잖아요, 내 아들이! 사르밧 과부는 지금 혼돈에 빠진 거예요. 선지자가 오기 전까지는 무슨 짓을 했습니까? ‘너 죽고 나 죽자.’ 죽겠다고 본인이 결심했잖아요.

본인이 결심했는데 지금 과부가 화를 내는 것은 “내 아들 죽고 내가 죽는 건 내 자율권에 의한 내 결정권에 의해서 죽도록 놔두지, 나를 완전히 쪼다 만들어서 죽는 것도 내 마음대로 못 죽게 하고, 이제 와서 그냥 죽이지도 않고 ‘넌 죽을 만해. 네 아들도 죽을 만해.’ 내 죄를 생각하게 만드는 것과 겸해서 굳이 내 아들을 죽일 정도로 그렇게 되어버리면 나의 체면, 나의 위신, 나의 존재감, 나의 의미, 죽을 때도 비참하게 이렇게 처참하게 망가질 대로 망가지면서 죽게 하느냐?” 그 말이죠.

“선지자 당신 역할이 바로 그 역할이잖아. 내가 화가 나겠어요, 안 나겠어요? 우리 모자가 알아서 죽도록 그냥 놔둬. 그런데 이제 와서 살려놓고 다시 죽이는 것은 무슨 잔인한 짓이냐?” 이 말이죠. 이걸 줄여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여, 선지자여! 내 일에 끼어들지 마세요. 내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죽든지 말든지 뭐가 되든 끝까지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삽니다. 안녕히 가세요.” 그 이야기죠. “안녕히 가세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합니다.”

아, 가뭄이 와도 고치지 못하는 인간의 죄 성, 그 어떠한 저주스러운 지옥 불에 들어가도 고쳐지지 않는 끈질긴 인간의 이 죄악성, 못 고칩니다. 고칠 수가 없어요. 사르밧 과부는 그걸 고치는 게 아니고 폭로 당했죠. 누구 앞에서? 엘리야 앞에서.

자, 거기에 대해서 엘리야의 대책은 어떤 대책이냐? 당황스러움? 난처함? 그리고 절망감이었어요.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가 아들 죽은 것에 대해 인간 자아성의 근원까지 다 끄집어 토해내 가면서 극렬하게 반대하는 것에 대해서 엘리야는 군소리 없어요, 아무 할 말이 없어요. 왜? 거기에 대해 대처할 수 있는 기술? 재주? 능력? 자기에게는 하나도 없기 때문에. 자기에게는 하나도 없어요, 없습니다.

이 선지자의 무능함, 무력감, 좌절감, 절망감, 어떤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재주가 전혀 없다는 데서 오는 바로 이 선지자의 좌절감은 과부가 느꼈던 죽음과 질이 다른, 차원이 다른 차원의 자기 죽음, 선지자의 죽음이에요. 더 깊이 있는 죽음이에요. 이 죽음은 나중에 하나님 자신의 죽음까지 이어집니다.

그 모든 사태의 마무리는 가뭄이 내림으로서 뭔가 개시하고 의도를 갖고 있는 하나님에 의해서 마감돼야 해요. 마무리돼야 해요. 하나님에 의해서 마무리가 되기까지 사르밧 과부도 손을 댈 수 없고, 그리고 그걸 바라보고 같이 절망감을 느끼는 선지자도 자기의 재주나 선지자라는 자기의 사명감으로도, 어떤 것도 거기에 끼어들 수 없다는…, 사명감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게 뭐가 도움이 돼요? 사명감조차도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막다른 그 길에 엘리야가 서있습니다.

여기서 요한복음 5장 39절의 말씀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즉 ‘인간들아, 손 떼라.’ 이 말이에요. “뭐 사명감? 뭐 선지자? 목사? 손 다 떼.”

너희들이 손을 떼고 싶어도 너희는 손을 안 떼요. 안 떼는데 떼게 만드는 방법은 뭐냐? 어떤 사태가 일어나게 되면 목사로서, 선지자로서, 또는 성도로서 어떤 난처한 일을 해결하고 남을 도와주려는 그 모든 일에서 자신의 죽음을 체험토록 주께서 조치를 합니다.

아내는 믿는데 남편은 안 믿는다. 그럴 때 아내가 어떻게 합니까? 빡세게 중보기도 하죠? 하나님 뜻은 뭐냐? “하지 마.”에요. 해도 소용없어요. 네가 살아서 죽어가는 사람을 도와준다? 이건 없어요. 그들의 죄 성,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저항감, 반항감, 악에 받친 하나님에 대한 분노를 네가 거둬야 해요. 거둬서 악에 받친 그 악마성을 선지자도 그대로 같이 품어줘야 해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그대로 내게로 가져와야 해요. 그대로 다 품어야 해요.

품고 그다음에 하는 것은 뭐냐? 그 사람을 대신해서 아버지의 저주를 받는 거예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7). 다시 열왕기상 17장에 봅니다. 17장 18절에서 사르밧 과부의 악에 받쳐서 나오는 그 본심 가운데 단어가 하나 나와요.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여기서 몇 가지 중요한 사항이 나옵니다. “나는 당신을 부르지 않았고 당신이 찾아왔는데, 나는 믿습니다.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당신을 보내서 나를 찾도록, 만나도록 조치한 것을 내가 믿습니다.” 기분 좋아서 하는 말이 아니에요. 지금 성질나서 하는 거예요.

“기어이 네 죄를 알게 하니 네 죄값으로 네 아들 죽는 것에 대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그것으로 날 압박하려고 찾아온 거 맞죠?”라고 한 거예요. 이건 뭐냐 하면요, 인간이 ‘인생이라는 것은 내가 알아서 산다. 하나님 믿으라고 하면 잘 믿고, 예수님도 잘 믿고, 이웃과 좋게 지내는 등등 다 내가 알아서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망상인지를 사르밧 과부를 통해 다 들통 내는 거예요.

제대로 안 건드리니까 종교적인 모습으로 허세를 떨고 믿는다고 신앙생활을 하는데 진짜 건들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려 버리면 악에 받친 모든 하나님의 원수의 본성이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거기에 대해서 선지자는 아무 대책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그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를 듣고 엘리야가 19절에 “엘리야가 저에게 그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취하여 안고 자기의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 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그다음에 20절에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로 죽게 하셨나이까”라고 이야기해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엘리야가 이런 생각을 가진적이 없다는 거예요. ‘나는 알지. 어떻게 하면 사는지.’ 지금 이런 생각이 전혀 없어요.

선지자에게 해답이 없어요. 그냥 짐을 떠안아 버렸어요. 그 여인의 절망이 본인의 절망으로 전환된 겁니다. 아무 대책이 없어요. 대책이 없으니까 선지자는 누구한테 하소연합니까? 하나님 앞에 하소연합니다. 지금 답지가 없잖아요. 수학 정석 뒤에 뭐가 나와요? 답지 나오잖아요. 선지자 뒤에는 답지가 없어요.

여인의 죽음이 이제는 자신의 죽음으로 바뀐 상황을 선지자는 고스란히 수용하고, 이제는 죽고자 하는 여인의 자식이 아니라 이 아들을 누구의 아들로, 여인의 아들이 아니고 선지자 자신의 아들로, 자기 자식으로 받아들여서 하나님 앞에 하소연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면 삽니까?”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 아들을 죽이는 것이 정녕 주의 뜻 맞습니까?”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아들은 그냥 각본대로 시나리오대로 죽어야 되는 게 맞는 이야기입니까?”라고 한 거예요.

하나님이 아들을 굳이 죽이는 이유에 대해서 선지자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전혀 몰라요. 선지자가 무지해요. 21절에 보면,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이렇게 했어요.

본인이 하나님과 통하는 엘리야로서 자기 쪽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어요. 아들과 자기 몸을 일치시킵니다. 과부의 사정을 자기가 받아들였고, 그 가운데서 밀가루와 기름을 넉넉하게 해서 과부의 집을 살려냈잖아요? 그런데 중간에 누가 개입했습니까? 하나님이 예상도 못 한 아들 죽이는 각본이, 그런 사태가 연출됐잖아요.

그 아들 죽이는 사태도 이제 선지자가 자기 인생으로 인수인계합니다. 인수인계하고, 그다음에 아들 몸에다가 밀착시켰어요. 완전히 5초 본드, 순간접착제에요. 딱 갖다 붙었어요. 안 떨어집니다. 세 번씩이나 아이에게 누웠다는 말은, ‘한 번 해보자. 되나 안 되나? 나는 치료자요, 넌 치료 받아야 될 환자다.’ 이러한 나와 너의 관계가 아니고, 합류된 관계예요.

“이 아이가 죽는 이유를 알 때까지 딱 붙어서 한 몸 되도록 나는 그런 조치를 하겠습니다. 나와 이 아이를 한 몸으로 결속시키겠습니다.” 그렇게 딱 붙었어요. 그리고 아들은 죽었으니 아무 소리 못 하죠. 아들과 함께 말할 수 있는 것은, 기도하는 입은 아직까지 안 죽고 있는 엘리야입니다. 엘리야가 죽은 아들 대신 기도하는 거예요. 하나님이여, 이 아이를 살려달라고 합니다.

아이를 살려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권한을 엘리야가 왜 행사하느냐? 그것은 17절 초반에, 하나님께서 가뭄 속에서 다른 이스라엘 백성은 다 죽여도 하나님의 언약을 죽이지 않고 살리기 위해서 누구를 보호한다는 의중을 나타냅니다. “엘리야는 어떤 경우라도 이 저주 가운데라도 지켜줄게. 넌 죽으면 안 돼.” 이렇게 죽으면 안 된다는 언질을 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 언질이 얼마나 특이한지요.

어떤 다른 사람이 아니고, 부정한 짐승 까마귀가 와서 아침저녁으로 먹였다는 말은, ‘하나님과 나 엘리야 사이에는 가뭄이 아니라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죽이지 않는다는 지속적인 언약 관계가 여전하다.’라는 것을 엘리야가 알고 있어요. 심지어 엘리야가 마지막 죽을 때, 안 죽습니다. 엘리야가 나중에 엘리사 만나잖아요? 하늘에서 마차가 두 대 온 게 아니에요. 콜택시 두 대가 온 게 아니고 한 대 왔어요, 한 대.

엘리야만 죽음을 보지 않고, 불 수레를 타고 올라가게 되어 있어요. 끝까지 가뭄 속에도 살리고, 또 죽은 자리에서 살림으로써 사르밧 과부가 아는 그러한 죽음의 질 말고,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로 하여금 결속된 그 상태에서의 죽음 말고, 장차 오실 주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 그 죽음의 질에 엘리야로 하여금 거기에 합류된, 그 공간, 그 영역과 하나가 된 그러한 선지자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해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말라기 4장에 보면 장차 엘리야가 온다고 했고, 마태복음 27장에서 예수님이 십자가 달릴 때 사람들은 “엘리야가 와서 구원하나 보자.” 이 말은, 엘리야라는 존재는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느냐? 하나님이 친히 보호하기에 절대로 죽지 않는 인물.

그런데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것은 ‘죽을 일이 없다.’가 아니라, 죽을 일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놓고 ‘그 죽을 일에서도 엘리야는 죽지 않았다’라는 것을 말해주고, 엘리야가 기도했던 대상, 엘리야가 의도적으로 자기 한 몸 되게 했던 그 대상인 과부의 아들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 죽었다가 부활한 것은, 예수님의 죽음의 차원, 그 죽음의 질에 합류되기 위해서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이 개입해서 얼마나 자기 안이 악마의 소리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폭로 당하는, 사르밧 과부처럼 폭로 당하는, 나는 기껏 이런 인간밖에 안 된다는 것을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폭로 당하는 자는 이미 예수님의 죽었다가 부활한 그 생명에 합류되어야 될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걸 위해서 성도들은 세상에서 경험하는 그런 안일한 죽음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라는 특이한 죽음에 성령이 와서 합류시킬 때 그 사람이 바로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모든 계획과 시나리오가 일방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추진되어 왔음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 살기 위해서 내가 알아서 산다는 그 고집이 끝에 가서는 하나님께 대드는 악마의 소리인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해주시고, 분노하고 화내고 있는 이 마음을 종교로 감출 길이 없음을 깨닫게 해주시고, 그러나 정작 십자가 앞에서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는 자만이 죽었다가 영생 얻는 천국 백성인 것을 또다시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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