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징계의 내막

아빠와 함께 2025. 9. 28. 20:27

징계의 내막 

2025년 9월 28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2:5-10

12: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12: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이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12: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12:9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12:10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성도는 누구나 징계의 대상입니다. 징계 대상조차 안 된다면 아예 그 사람의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따라서 징계란 아들의 위치에서 아들이 아들다움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 조치가 됩니다. 그렇다면 아들될 자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은 없습니다. 모조리 마귀의 종들 뿐입니다.

종과 주인의 관계에 대해서 누가복음 17:7-10에 보면,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고 나와 있습니다. 인간들은 스스로 종이 아니라 자율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유인이라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오해로 인해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과 마귀 사이에 내기를 일어나게 된 겁니다.

악마는 인간의 정체에 대해서 너무나도 자신 만만합니다. 인간의 삶이란 배고플 때 밥먹으면 되고 목 마을 때 물 마시고자 하고, 피곤하면 눕고자 하고 추우면 옷입고자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이런 본성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채 평생을 삽니다. 이점에 대해서 마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무엇보다 가장 시급하게 사수해야 된다고 여깁니다. 자신의 존엄성이 고귀하다고 자부합니다. 그것이 자존감으로 굳어집니다. 이런 정신으로 신에게 나아가서 다음과 같이 호소합니다. “하나님, 나를 괴롭히는 저 원수를 나 대신 처단해 달라고”입니다.

그런데 그런 나가 곧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원수에게 내려질 저주와 심판이 나에게 먼저 주어집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 자리에 들어오려면 먼저 ‘하나님의 종’의 자리를 경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런 경로를 밟으셔서 아들다운 아들이 되겼던 겁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까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종이 되셔야 했습니다. 모든 것을 아버지에게 일임하셔야 했습니다. 이런 아들을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아들, 곧 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종’의 자리 그 다음의 자리는 ‘아들’의 자리입니다. ‘아들’이 된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어야만 성립합니다.

그것은 그동안 인간들의 악마의 형상을 입고 살아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마의 형상이란 자신을 절대화하기 위해 스스로 자기를 승인하고 인정하기를 다지고 다지면서 외부적으로 타인으로부터 확인받고자 합니다. “나 어때? 괜찮지?”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이 이 마귀 형상을 지닌 자에게 찾아들면서 징계가 시작됩니다.

갈라디아서 3:26-27에 보면,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천국 교복을 입은 겁니다. 유니폼을 입은 겁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징계는 ‘복장 검사’에 들어가는 겁니다.

왜 아들답지 못하고 죄에 종노릇하느냐 하시면서 징계하십니다. 인간들은 타인으로부터,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자꾸만 법에 호소하게 됩니다. 하지만 징계는 바로 그 법을 붙잡지 말라고 하십니다. 법을 놔버려라는 겁니다. 율법 사건은 십자가 사건에 덮히게 되어 있습니다.

징계란 그 사람은 교정하거나 수리하거나 개선시키는 것이 아니라 심화시키는 일입니다. 심화란 속에 들어있는 본질을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작업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악마의 형상을 덮고 극복했음을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징계를 내리십니다. 이유는 이러합니다.

성도의 몸과 마음 자체가 나쁜 환경의 일부이기에 인간의 의사를 철저하게 배제시키십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씨뿌리는 비유’가 그런 겁니다. 거기에 무슨 인간이 나옵니까? 씨가 나오고 환경이 나오지요. 바로 인간 자체가 나쁜 환경의 일부로 사용되어지는 겁니다. 씨는 복음의 말씀입니다.

복음이 복음대로 열매를 맺기 위해 ‘그리스도의 형상’이라는 새로운 환경이 확장되는 겁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속에 있는 그리스도 형상을 바깥으로 끄집어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약해지면’됩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또한 고린도후서 13:3-4에 보면,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저가 너희를 향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지키면 삶이 무거워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을 버리면 삶이 가벼워집니다. 징계란 우리 안에 갇히 나를 우리 밖으로 끄집어내기 위함입니다. 강함 논리와 시합과 게임에서 이탈합시다. 십자가 현장에서의 구원받은 강도처럼 자신이 지은 죄 이외는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나를 위해 살기 않기 위해서는 말씀의 세계에 몸을 바치면 됩니다. 자신이 자신을 철저하게 관리하려고 하지 마세요. 우리는 이미 우리 소유가 아닙니다. 종에서 아들이 되었다는 말은 우리가 주님 공로를 위한 기능인이 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천국 갈 사람과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자를 구분하는 경계막 기능에 충실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징계 이전에 주님이 하나님께서 받은 고난이 있음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86강-히브리서 12장 5-10절(징계의 내막) 250928-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2장 5-10절입니다.

히브리서 12:5-10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여기 ‘징계’가 나오는데요. “징계 없는 것은 하나님의 성도가 아니다. 모든 성도는 징계 대상이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대목이 히브리서 12장 8절에 나옵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이겁니다. ‘나’라는 것 그리고 나의 몸, 육신, 그리고 나의 정신, 마음 이건 결국 다 떨어지고 우리 안에 징계만 남아 있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입니다. 징계만 남아 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시기 때문에요.

징계가 주님 쪽에서는 능동적으로 우리에게 오고, 우리는 그걸 피동적으로, 수동적으로 받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피동적, 수동적’인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은 자신의 주체를 하나님 앞에서 들춰낼 자격이 없습니다. “내가 너에게 징계를 준다. 고마운 줄 알아라.” 이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그런데 징계에 대해서 운운하면서 “내가 왜 이런 징계를 받아야 됩니까?”라는 반응을 보인다면 아직도 그 사람은 자기를 놔버리지 않은 사람이에요. 징계하심에 대해서 자기를 놓아주지 아니하면 그다음부터는 내 쪽에서 ‘하나님의 징계가 지금 있는지 없는지, 징계를 받을 만한지 아닌지’의 결정을 누가 하는가 하면, 내가 엄연히 살아있으니까, 내가 나를 놔주지 않았으니까 내가 결정을 해버려요.

그렇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을 상대로 내기하는 셈이 되는 겁니다. 징계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는 사람의 특징이 어떤 것이 있느냐 하면, ‘감히’라는 말을 써요, 영어로 dare, ‘감히.’ “감히 누가 나를 징계해?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착실하게 관리하고 있는 중인데 왜 남이 내 인생에 끼어들어서 ‘넌 징계 대상이야.’라고 나에게, 내 인생에 함부로 끼어들기 있기, 없기?” 뭐 이런 식이다, 이 말이죠.

구약에서 그런 요소들이 많이 나와요. 구약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육적 인간들이거든요. 영적인 하나님이 육적 인간들을 상대하면서 그들의 육적 요소가 유감없이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 두 사람만 예를 들어보면 이렇습니다.

욥 같은 경우에 하늘나라의 내기가 있었죠. 마귀하고 하나님하고 내기를 한 거예요. 왜 그 상대자에 내가, 인간이 끼어들지 못하고 마귀가 끼어드는가? 마귀는 영적 존재거든요. 영적 존재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은 밥입니다. 인간은 뭣도 모르고, 영적 존재가 실제로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본인이 모든 것을 결정 내리려고 하는 그 자체가 마귀 보기에 같잖은 거예요. 물론 주님도 그걸 아시죠.

그래서 인간은 일단 마귀의 종인데, 인간들은 그걸 모르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는 인간이다. 나는 자율권이 있다. 나에게 자유가 있다.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꾸려 나간다.” 지상에서는 그런 식으로 인간들이 모습을 보이죠. 거기에 대해서 악마는 굉장히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 하나님과 내기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욥을 봐라.”(욥 1:8) 하니까 마귀가 대뜸 나오기를, 쉽게 말해서 이런 거예요. “하나님 하나님은 인간에 대해서 잘 몰라요. 인간이라는 것은,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니에요. 배고프면 밥 먹고요. 목마르면 마시고요. 몸 피곤하면 자고, 추우면 옷 입고요. 하나님, 그게 인간의 삶 전부입니다. 그거 외에는 없습니다. 내가 잘 알아요. 이 마귀가 잘 안다고요”(욥 1:9-10). 마귀는 인간에 대해서 완전히 자신만만합니다.

다시 말씀드릴게요. 배고프면 밥 먹고요, 목마르면 물 마시고, 아프거나 피곤하면 누워있고, 추우면 옷 입고, 집 장만하고, 옷을 장만하고, 먹을 거 장만하고, 의식주 끝. 여기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자신이 거기서 벗어난 삶을 사신 적이 있어요?

“욥은 하나님께 받은 게 있기 때문에 지금 하나님께 고맙다고 하고 있는 겁니다. 그걸 거둬 가시면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하고 마귀가 하나님에게 한 수 가르치려고 하는 거죠. 그래서 인간의 삶에 있어서는 자기의 육신 몸이 우선이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일단 인간은 교회 나와서 하나님의 지식에 대해서는 배우겠지만 삶 자체가, 몸 자체가 뭐냐? 일상생활에 하나님은 없습니다.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하나님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 있음’ 대신에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요. 여기 있는 내가 제일 우선순위에요. 하나님은 나중 순위입니다. 내가 여기 있어요. 내가 있기 때문에 누가 나에게 징계를 내린다는 자체가 웃기는 이야기라니까요 이게?

하나님이 없으니까 하나님의 징계도 없는 거예요. 감히 누가 나를 징계해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여태껏 살아왔는데 누가 나를 징계해요? 한 번 시험해 볼까요? “집사님, 내가 징계합니다.” 하면 기분 좋습니까? 기분 나쁘죠. 하나님의 뜻은 딱 이거에요.

“하나님, 저 사람 때문에 못 살겠습니다. 저 사람 때문에 내 인생 조졌습니다. 하나님, 저 사람이 내 원수입니다. 하나님께서 저 사람을 저주하든지, 지옥 보내든지, 안 그러면 아주 집안 말아먹게 해달라”라고 하나님께 요청하면 하나님은 저 나의 원수를 치는 게 아니고 나를 쳐버려요. 나를 친다고요. “이게 징계를 덜 받았구나.”

우리는 간곡하게 부탁해서 나를 힘들게 한 그쪽을 하나님 살아계심의 증거로 보여 달라고 저주의 폭격을, 퍼부으려고 했지만 그 폭격이 나한테 주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누가 원수야, 누가? 그런 소리하는 네가 내 원수야.”

인간은 자기 삶을 자기 지키는 데에 몰빵하죠. 자기 지키는 거만 중요하니까, 자기가 소중하니까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살다가 어려울 때는 누굴 찾느냐? 하나님 찾아요. 그런데 하나님과 나 사이에 누가 끼어드냐면 하나님의 독생자가 끼어들었습니다. 끼어드시면서 하나님의 모든 뜻, 하나님의 징계, 저주, 심판, 이 모든 것이 나에게 와야 될 그 징계가, 저주가 사랑하는 독생자에게 퍼부어졌습니다.

이게 하나님 징계의 원칙입니다. 이거 어느 인간이 수용합니까? “남들이 너 보고 인생 힘들게 한다고? 네가 나를 힘들게 해. 네가 내 아들 독생자의 영광을 뺏어갔잖아, 네가! 네가 뺏어가 놓고 지금 누구한테 화풀이하고 있는 거야?”

“하나님 왜 내 인생을 지켜주지 않습니까?”하고 달려들면 “내가 왜 너를 지켜줘야 돼? 나는 마귀의 종을 지켜준다고 약속한 바가 없다.” 하나님은 마귀의 종을 지켜준 적이 없어요. 마귀는 팔짱 끼고 좋~다고 보고 있는 거예요, 지금. 인간 뻔하거든요. 인간은 뻔해요. 자기 지키는 것에 평생을, 모든 시간을 투자하고 정신과 능력을 거기다가 팔았던 그 자아, 뭐 어렵지도 않아요. 뻔한 거잖아요.

오늘 본문 히브리서 12장 5-6절에 나오는 이 말씀이 잠언서 3장 11-12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

누가 누구 보고 이야기하느냐? 아버지가 아들보고 이야기해요. 다윗 왕 계열에 속한, 곧 다윗은 솔로몬보고 이야기하고, 솔로몬은 또 아들들 보고 이야기하고요, 그 계열에 이 교훈을 준 겁니다. “내 아들아.” 이 징계를 받게 되면 어느 자리에 가야 하느냐? 하나님의 아들 자리에 갈 때 이 말씀이 유효해요. 효과를 발휘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하나님 말씀의 자리에, 노선에 들어설 자격도 없어요. 마귀 종이 어딜 들어섭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작전은 이렇습니다. 악마는, 자기가 마치 신처럼 행세해도 될 권리가 있다고 자부하는 인간을 만들어놨어요. 마귀가 그렇게 한 겁니다. 어떤 사람은 궁금해서 저한테 물어봐요. “목사님, 마귀의 이름은 뭡니까?” 묻는 이유가 ‘마귀의 이름을 부르면서 마귀를 쫓아낼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아이디어 때문에 우선 마귀 이름부터 알아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마귀의 이름이 뭡니까?” 하고 묻기에 “마귀의 이름은 인간의 이름입니다. 당신 이름이 마귀의 이름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아담의 형상이에요, 인간의 형상입니다. 인간의 형상이 곧 마귀의 형상이에요. 인간이라는 말은, 그 형상 안에 인간의 자존감과 자신감과 존엄성이 들어있어요. 그게 자아를 형성하거든요?

그래서 징계라는 말이 굉장히 거슬리는 이유가, 나는 존엄성을 가지고 있어요. 김정은입니다, 내가. 여러분도 마찬가지예요. 김정은의 복사판이에요. 그런데 이 존엄한 나에게 징계를 한다? ‘누가 그렇게 건방져? 나는 내가 지켜.’ 이게 있기 때문에 인간이 마귀의 형상을 쥐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이 마귀의 종, 일단 종이라는 것, 종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알려주시고, 현재 네가 누구의 종으로 살아가는지를 확인케 하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누가복음 17장에 나옵니다. 제가 누가복음 17장 7-10절까지 한번 읽어 드릴 테니까요, 여러분에게 어떤 기분이 드는지, 여러분의 존엄성과 자존감이 어떻게 되는지 스스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 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7절). 이렇게 물어요. 없다는 말이지요.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8-9절).

주인이 밥 먹을 때 종이 수건 들고 딱 서 있다고 해서 “아이고, 수고했어. 내가 너한테 사례할게.” 이런 주인은 있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종은 그냥 주인 좋은 쪽으로 하면 되지 종이 무슨 존엄성을 가지고, 종이 무슨 자존심을 가지고, 무슨 종이 자존감을 가져야 하느냐? 이건 종으로 있을 수 없다.”라고 한 거예요.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것 뿐이라 할찌니라”(10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하루 계획하고 일과를 사시면서 이런 종의 느낌 가지고 사십니까?

‘나는 나에게 영원한 주인이야.’ 뭐 이런 느낌이 있잖아요. ‘두고 봐라. 내가 얼마나 잘되는지.’ 그런 느낌이라고요. 종의 감각이 전혀 없어요. 누가 그렇게 만들어 놨어요? 주인도 아니면서 주인 행세 하도록 배후에서 마귀가 그렇게 한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주께서 하시는가? 징계가 되기 위해서, 징계의 자리까지 옮기기 위해서 일단은 자기가 존엄한 인간이라는 것을 묵사발 내고 그걸 종으로 바꿔요. 종으로 바꾸는데 인간이 쉽게 종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강력하게 내부에서 거부가 일어나는 거예요. “내가 뭐가 못나서 이렇게 종 대우 받아야 됩니까?” 이렇게 반발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 반발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일단 주께서 종으로 만들어 놓고, “아이고,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종 대우만 받아도 고맙습니다.” 하는 그런 경유를 거쳐서 그다음에 뭘 하느냐? 아들로 대우하는 거예요. 종을 거쳐서 아들로 대우하는 거예요.

왜 그래야 하느냐, 그 근거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와서 철저하게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여호와의 종의 그 모든 말씀을 자기에게 적용시켰던 분이 그 길을, 경로를 밟아서 온전한 하나님 아들의 영광을 차지했잖아요. 주께서 아버지의 종이 되셔서 아들 되는 그 경로.

그다음에 하나님의 아들 되시고 난 뒤에 그 경로가 성령에 의해서 유효하게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되는 겁니다. 어떻게 되느냐? 성경에서는 그걸 어떻게 묘사하느냐? “네가 전에는 마귀의 형상이었지만 이제부터는 네가 그리스도의 형상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라고 하니까 확 와닿습니까? 쉽게 말씀드리면 옷을 입힌 거예요. 예수님의 복장을 입힌 겁니다. 여러분, 고등학교 때 선도부 선배들이 남보다 일찍 등교해서 교문 앞에 서 있는 이유가 뭡니까? 뭐 하려고 서 있는 거예요? 학생부장과 더불어 서서 복장 검사하잖아요.

복장 검사한다는 말은 기준이 있다는 거예요. 기준이 뭐냐? 하나님의 형상에 부합되는지 탈락인지, 복장을 가지고 설명하는 거예요. 복장, 옷, 유니폼 가지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 된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법을 놔버리는 거예요. 법을 놔버리면 나를 놓아줄 수가 있어요.

창세 전에는 법이 없었어요.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율법을 준 겁니다. 따라서 사람들의 자아는요, 인간들은, 마귀의 종들은…, 마귀의 종이라 하니 그것도 네 자니까 길다. 그냥 인간은 어떻게 사느냐? 일단은 본인이 본인을 승인하고 인정해요. 본인이 승인하고 인정하면서, 그다음에 다른 사람이, 내가 스스로 나는 인간답다는 것을 남들이 확인 해줄 때 그 ‘나는 인간답다.’가 효력을 발휘하게 되는 그게 바로 사회라는 거예요.

이 머리에 들어있는 게 뭐냐 하면, ‘내가 승인한 나가 타인에게 인정받을까?’를 하루 종일 생각하고, 누굴 만나도 생각하는 게 그것밖에 없어요. ‘가족들에게 인정받는 아버지냐, 엄마냐, 자식이냐, 회사에서 직원으로 인정받느냐?’ 온통 그 생각밖에 없어요.

본인이 본인을 승인하려고 하면 지리산에 들어가서 자연인 생활하세요. 그러나 사회생활 하려면 남들이 내가 생각한 만큼이나 동일하게 인정을 해줄 때 우리는 이 사회 속에서 인정받는 재미로, 인생의 활력소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남이 승인해 준다는 것은 뭐냐?

이 사회에 깔려있는 법 있잖아요. 교회 나오면 교회법, 사회 나오면 헌법과 모든 법, 그 법이 나의 의로움을 보장해 준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 뜻은 이거에요. ‘그 법을 없애버려야 된다.’ 그 말이에요. ‘그 법에서 손을 놔버려라.’ 그 말이죠.

법에서 손을 놔야 네가 너 자신에서 너를 놓을 수가 있는 거예요. 안 놓으면 내 삶이 무거워져요. 놓으면 가벼워져요. 법이 없으면 가볍다고요, 법이 없으면요. 지금 원인이 어딨느냐 하면, 내가 여기 있음이 원인이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법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아예 거기서 우리를 빼버렸어요.

그 대표적인 예가 씨 뿌리는 비유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씨 뿌리는 비유가 나와요. 3-8절에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쌔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그 비유를 한번 보세요. 거기에 내가 있는가, 자아가 있는가? 거기는 씨와 환경 두 요소밖에 없습니다. 씨와 환경, 뿌리는 복음 곧 말씀과 그리고 이미 조성된 환경, 두 요소밖에 없습니다. 나는 거기서 빠져있습니다. 왜 빠져있는가? 나 자체도 환경의 일부이기 때문에. 이 더러운 내가 오직 나만 생각하는 이것도 더러운 환경의 일부가 되어서 마땅히 열매는 맺지를 못하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환경 안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그 열매가 30배, 60배, 백배가 되기 위한 옥토, 새로운 환경을 마련하는데 그 환경이 뭐냐?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 마귀의 형상밖에 없는 이 동네에 예수님의 형상이 작업을 개시한 거예요.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4장 19절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이게 무슨 뜻입니까? ‘너는 마귀가 만든 이 악한 지옥 같은 환경의 일부야. 따라서 나는 너를 믿지 않는다. 너의 믿음도 안 믿고, 너의 소망도 안 믿고, 너의 사랑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네 안에 너도 예상치 못한, 기대하지 못한, 이해하지 못한 새로운 것을 집어넣었다’라는 거예요.

그게 뭐냐? 바로 말씀의 완성을 집어넣은 거예요. 말씀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우리 안에, 곧 껍데기는 악마의 껍데기인데 그 안에 뭐가 들어왔느냐? 그리스도의 형상이 들어온 거예요. 그리스도의 형상은 뭐냐? 아들의 형상이에요. 아들 같지도 않은 것 속에 진짜 아들의 형상이 개시한 겁니다. 작업 개시한 거예요.

조건이 있어요. 너는 존재가 아니고 기능이 되는 거예요. 조건이 존재가 아니고 기능이에요. 이게 무슨 뜻이냐면요, 이런 뜻입니다. 일찍 어머니 돌아가시고 아버지와 함께 사는데 아버지가 열심히 일하시고 딸은 스스로 자립해야 하기에 아버지가 늘 신경이 쓰이죠.

국민학교 1학년 입학을 하게 됐어요. 입학할 때 딸을 불러서 선물을 줍니다. 선물 주면서 “아버지의 특별한 선물이니까 잘 간직해라.” 보통 가정에서는 선물을 뭐 하겠어요? 크레파스나 혹은 공부 잘하라고 책받침이나 뭐 여러 가지 학용품을 주겠죠.

아버지가 그 딸에게 준 것은 앞치마였습니다. “이제부터는 알아서 네가 설거지해라.” 참한 앞치마, 그것도 예쁘게 생긴 앞치마. 이거 무슨 뜻입니까? ‘넌 이 가정의 기능인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된다’라는 그런 것은 용납될 수 없어요. 네가 이 그리스도의 형상의 일부가 되는 데 필요한 기능을 주는 겁니다.

그 기능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하고 주는 게 아니라 뭘 거치는가? “넌 전에 마귀의 기능자였다.” 마귀의 종부터 해서 종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를…, 제가 아까 누가복음 17장을 이야기했지요. 종이라는 것은 실컷 일하고도 말하기를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왜, 뭐 짜증 나?”

“아닙니다. 저는 반드시 그렇게 돼야 하죠. 너무 기쁩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는 것만 해도 영광입니다. 종은 노동의 대가를 탈취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주인의 몫으로 되돌리는 것에 대해 종으로서 무한한 영광을 느낍니다.” 이럴 때 그 사람은 합격이에요. 패스, 꽝! 하고 천국 합격 도장을 받은 거예요.

“나 구원받았다.” 그거 합격 아닙니다. 도로 내 것이 되지 못하는 것들을 부여받는 거예요, 도로 내 것이 되지 못하는 것. 여자들 립스틱 짙게 바르잖아요. 립스틱 짙게 바르는 그것이 입술이 안 돼요. 아무리 짙게 발라도 피부 세포로 변하지 않습니다. 그냥 메이크업이에요. 화장이에요. 내가 나한테 하는 신앙은 메이크업이고 그냥 흉내 내기입니다. 내 본질이 아니에요. 내 본질은 내가 집어넣을 수도 없고 변형시킬 수도 없어요.

징계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오해하느냐? 주석들 봐도 그렇고, 모든 걸 봐도 ‘징계한다’라고 하면 ‘수리한다, 개선한다, 더 좋아지도록 한다.’ 그런 식으로 오해해요. ‘교정한다, 수리한다, 개선한다.’ 이런 식으로 점점 더 내가 나아진다는 걸 가지고 ‘징계한다.’의 의미로 생각합니다.

그게 아닙니다. 징계는 심화하는 거예요. 나의 숨어있는 본질을 바깥으로 드러내는 게 바로 징계입니다. 징계란 ‘네가 아무리 죄지어도 나는 널 버리지 않겠다’라는 선언에 대한 강화, 심화입니다. “네가 무슨 짓을 해봐라. 내가 너를 버리는가? 징계해서라도 때려 패서라도 난 너를 버리지 않겠다.”

이게 바로 하나님 약속인데 왜? 우리가 귀해서요? 아니, 네 속에 있는 게 귀해서, 네 속에 들어있는 유니폼이 귀해서, 그리스도의 옷, 하나님의 형상이 귀해서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6장 39-40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오죠.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약속을 줄 때 과연 남들 보기에 “이 인간은 끝났습니다. 지옥 갑니다.”라고 할지라도 그 인간들의 판단을 극복하고 반드시 그 인간을 천국으로 집어넣는 몫이 바로 예수님 형상의 몫이에요. 예수님 형상의 몫입니다. 그런데 흉내 내기 있잖아요. 지금 그리스도의 형상에 대해서 자꾸…, 이미 우리 안에는 마귀 형상이 들어있어요.

마귀 형상이 뭐냐 하면 ‘나는 신이다.’ 이 말이죠. ‘나는 존엄성이 있고, 자존감이 있고, 자존심이 있다.’ 그게 마귀 형상이에요. 그게 원래 창조할 때 있어서는 안 될 게 우리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나도 인간이다. 인간 대우해 주세요.’ 이런 거. 원래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그런 요소가 없었는데 마귀하고 아담하고 결탁되어서 이게 들어와서 대물림되고 있는 겁니다.

유전적인 형질이고, 유전적인 동질성이에요. 주님께서 이 유전적인 동질성을 극복하고 이질적인 것을 우리 안에 집어넣습니다. 들어오면 그래서 드디어 징계가 시작되게 되면, 우리 안에 있는 원래 하나님이 집어넣지 않은 마귀가 집어넣은 것이 발작을 일으키면서 강력하게 여기서 저항하게 됩니다.

그게 뭐냐? 아까는 욥 이야기를 했고요, 구약 사사기 6장에 기드온 이야기가 하나의 예가 돼요. 사사기 6장 36-41절인데 얼마 전에 한 느낌이 나는데요, 그 대목에 기드온이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아요. 하나님의 종으로서 기능하게 하려는데 갑자기 여기서 기드온의 자아가 발동한 거예요. 마귀 형상이 발동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기드온은 하나님의 찾아오심을 하나의 내기로 보는 겁니다. 무슨 내기냐? “하나님이 찾아오셨으니 하나님이 있는 것은 인정하겠습니다.” 그다음에 “하나님의 일을 내가 할 만한 사람인지 못할만한 사람인지의 확인은 제가 하겠습니다.” 확인은 또 자기가 하겠대요.

그러니까 보세요. 이 기드온 고집이 보통 고집이 아니죠. “하나님 살아계심을 내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진짜 하나님의 일에 흡수 통합됐는지 아닌지 그 결정은 내가 하도록 허락해 주세요. 양털 뭉치를 마당에 놓을 때 새벽이슬이 양털 뭉치에만 촉촉하게 내리고 마당은 바짝 마르게 해주신다면 하나님이 특별히 나를 사용한 줄로 확인토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했어요.

확인을 본인이 하겠다는 거예요. 본인이 하게 되면 본인은 어떤 입장이 되느냐? ‘내가 나한테 속아넘어 가지 않을 수 있도록, 이 자아의 효능에 대해서 계속 붙들고 믿을 만하다고 유지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허락해 달라’고 하는 거예요. 말은 복잡하지만 간단하죠. 내가 하나님 안 믿는지를 내가 확인토록 허락해 달라는 그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자살하는 사람이 왜 자살하는지 알아요? 자기한테 속아서 자살해요. 자기한테 속으니까 자살하는 거예요. 자살하는 사람만 자살이 아니에요. 이 세상 불신자 모두가 지연된 자살자입니다. 계속 자기 확인하면서 90세까지 끌고 가요. ‘나 괜찮게 살았지? 이 정도하면 괜찮은 사람이지? 이 신앙 같으면 오늘 주님이 구름 타고 와도 천국 가겠지?’

왜 본인이 확인해요? 왜 본인이 확인합니까? 가룟 유다도 마찬가지죠. 그 사람은 뭘 모르느냐? 기드온이 그렇게 해주니까 또 뭐라고 하느냐? “죄송합니다만 한 번만 더, 이번에는 새벽에 양털 뭉치는 바짝 말라서 이슬이 없고 마당에만 촉촉하게 이슬 내려 주세요.” 주께서 다 들어줬어요.

자, 이게 뭘 모르는 것인가? 구약 사람이니까 그런데 신약에서 그래선 안 되겠죠. 하나님의 내기는 누구하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끼리 해요. 하나님의 징계는 하나님 것을 지키기 위한 징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나님 것에 대해서 징계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끼어들면 안 돼요. 나는 손을 놔버려야 해요. 자꾸 내가 확인하려고 끼어들면 안 돼요.

아까 우리 속에 들어온 하나님 형상의 기능에 대해서 말씀드렸는데, 옛날에 이런 광고가 있었어요. 이덕화가 나온 광고인데요. 제가 지금 생각해 보니까 인간의 그 흉내 내기…, 신앙이라고 하고 싶지도 않아요. 인간의 그 신앙 흉내 내기의 막장, 마지막은 아마도 그 광고에 잘 나와 있어요.

이덕화가 여자 쪽에서 원하는 속옷을 입지 않고 들어가려고 할 때 안에 있는 여자가 문을 안 열어줘요. 그럴 때 문을 딱 치면서 “트라이!” 트라이가 뭐냐 하면, 남자 속옷 이름입니다. 아, 여자가 원하지 않는 속옷을 입고 오는 통에 문밖에서, 그냥 탄식하면서 천국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이게 끝인가 보오!’ 끝이에요.

마태복음 8장 12절에 아브라함 자손이라는 그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에서 울면서 통곡하고 있습니다.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내가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은 ‘트라이’를 안 입어서 그래요. 하나님이 원하는 속옷을 안 입어서 그래요.

“넌 내 사람이 아닌데 혼자 천국이라고 그동안 얼마나 자기 자신을 속여 왔느냐?” 그 말입니다. 가짜면서도! 교회에서 시킨 대로 다 했다고 그게 진짜입니까? 인간이 행할 수 있는 행함에 불과하죠. 그래서 뭐가 문제인지, 도대체 누가 나를 속였는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누가 나의 이 존엄성과 자존감, 자존심을 계속 유지하라고…, 마귀는 없으니까, 마귀는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이 없는 상태에서 누가 나를 이렇게 계속 잘난 나로 유지하도록 부추기는지를 알 필요가 있어요. 노래 가사를, 부르지는 못하고 읽어 드릴 테니까요, 그 가사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어쩜 우린 복잡한 인연에서로 엉켜 있는 사람인가 봐
나는 매일 네게 갚지도 못할 만큼 많은 빚을 지고 있어
연인처럼 때론 남남처럼
계속 살아가도 괜찮은 걸까

이게 뭐냐? 히브리서 12장의 징계를 생각하면서 일반사람들이 징계를 이렇게 봐요.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바르게 사는데 가끔은 내가 남남처럼 살아가는데, 때론 뭐 주님 사랑할 때도 있고 그러면서도 늘 주님을 사랑하지는 못하고 때론 주님을 잊고 남남처럼 계속 살아가도 괜찮은 걸까?’ 노래(임재범, 너를 위해, 2000) 가사에 딱 들어맞잖아요. 주님에 대해서 뭔가 캥기는 것이 있는 모양이지요?

그렇게도 많은 잘못과 잦은 이별에도
항상 거기 있는 너

‘주님이 항상 거기 있는 것을 믿습니다. 물론 제 죄가 많지만, 날 세상에서 제대로 살게 해줄 유일한 분은 주님이십니다!’ 이런 거요.

날 세상에서 제대로 살게 해줄
유일한 사람이 너란 걸 알아
나 후회 없이 살아가기 위해
너를 붙잡아야 할 테지만

‘징계받으면 짜증 나니까 징계를 안 받고 싶지만 네 거친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불안, 왜 자꾸 불안한지 몰라.

그다음에 잘못된 것이 ‘그걸 지켜보는 너’라고 하는데 이게 잘못된 거예요. 이게 문밖에 서서 천국에 못 들어가는 이유입니다. ‘그걸 지켜보는 나’ 인간은 내가 나를 조작하면서 평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상상한 예수, 상상한 하나님 섬기면서. ‘하나님 이렇게 해요? 아니면 저렇게요? 이게 신앙생활 잘하는 거지요? 이쯤 되면 내가 죽어도 천국 가겠지요?’


계속해서 본인이 본인이 믿는 메시아를 조작하고 갖고 노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13장에 잘 나와 있어요. 이게 게임, 내기와도 관련되어 있어요. 13장 보기 전에 고린도후서 12장 9절을 먼저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징계가 어떤 식인가가 나옵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여기 ‘약했다’라는 말이 나와요, 약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방식은 뭐냐? 이미 우리가 마귀의 형상, 인간의 형상들이 타인과 비교해서 내가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내가 사람 대우받으려고 하는 것이, 내가 나에게 스스로 승인하고 싶고 인정하고 싶은 내용인 거예요. 그것은 뭐냐? 강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는가? 약해지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징계의 방식이라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13장 3절에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저가 너희를 향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그러니까 뭐냐? ‘제발 좀 약해줘. 왜? 네 속에 계신 주님이 좀 강하도록. 그런데 네가 강해버리면 주님은 있으나 마나가 되잖아.’ 그래서 주님의 방법은 껍데기에 속한 이 악마의 형상이 보잘것없는, 내놓을 것도 없는, 진짜 십자가의 강도같이 평생 나쁜 짓만 하고 자랑할 것이 없는 약한 자가 될 때 주님의 일방적인 구원이 빛이 나는 거예요. 주님의 공로가 빛이 나는 거예요.

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 주님의 공로를 실어 나르는 하나의 관(管)이고 하나의 매개 물질이기 때문에 그래요, 매개 물질, 운반체기 때문에. 고린도후서 13장 4절을 보면 더 구체적이지요.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반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 저도 전에 그런 것 많이 했습니다만 교회끼리 배구대회 해보세요. “대한예수교 괄호 열고 ‘합동’ 괄호 닫고, 장로회 대구동노회 배구대회가 ○○중학교에서 있습니다.” 학교를 왜 빌려주는가? 그 학교 교장선생님이 우리 교회 집사라서 빌려준다.

그래서 배구대회 하는 데 거기에 가짜선수들이 왜 그리 많은지? 교회 다니지도 않는 친구 불러다 우승해 버려요. 응원가는 “여호수아…” 그런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승리한다고. 교회 행사 모든 것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지면 안 된다는 거예요. 너희 교회 교인 몇 명이야, 헌금 얼마 나와, 목사 월급 얼마야…, 그 모든 게 세상에서 말하는 ‘강한 자가 사는 보람을 획득한 자’라는 그 분위기가 교회 안까지 다 퍼져 버렸어요.

이건 ‘메이크업’이지요, 흉내 내기지요. 교단은 교단끼리 싸우고, 종교끼리 싸우고요. 신천지하고 통일교하고 싸우고, 여호와의 증인하고 신천지하고 싸우면 기성 교단에서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모든 게 내기고 모든 것이 게임이고 모든 것이 시합이고요, 내 인생을 담보로 해서 내 자존심을 판돈으로 걸고 벌이는 시합하다가 시합했던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요양병원 침대에 같이 누워 있어요. 평생 뭐 하다 요양병원에 다 모여있는지요.

징계의 확실한 근거, 최종적인 근거는 요한복음 10장 17-18절에 나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자, 아버지가 나를 사랑합니다. 취소되지 않았어요. 계속 사랑해요.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게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맞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모든 일이 바로 여기에서 출발해서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튄다는 것, 사이즈가 확장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 나를 죽이는 것이 사랑이라는 뜻이에요.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내가 스스로 버린다. 그다음에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무슨 뜻이냐? ‘예수님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 우리는 보통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방금 봤던 이 본문과 로마서 8장 29-30절과 연계하면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아들의 형상입니다.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 말을 들으면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해야 돼요. 징계고, 구원이고, 재림이고, 십자가고, 부활이고 이게 몽땅 나의 일이 아니었던 겁니다. 내 일이 아니었던 거예요. 지금 성경에 나오는, 히브리서 12장 5절에 나오는 ‘징계’도 마찬가지로 나의 일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아들의 일을 확장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기 외피를 찾다 보니까 여기서 엄선하는 거예요, 엄선.

엄선, 그냥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엄하게 선택하는 거예요. “너, 너, 너, 너 나와!” 일부러 이렇게 뽑습니다. 우리를 통해서 주님의 형상을 바깥으로 비추도록 우리를 활용해 주시는 그러한 존재로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채택된 거예요. 그렇게 채택당한 겁니다.

간택하는 방법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일단 율법을 통해서 우리의 숨을 죽여줘야 해요. 산상설교의 경우에 마태복음 10장과 연관해서 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라 할지라도 너무나 매일 같이 들어오는 생각이 뭐냐? 부자 청년이 예수님한테 달려드는 것하고 똑같아요.

‘제가 십계명 하나는 진짜 신경 쓰고 지킵니다. 십계명에 대해서 제가 진지하게 생각하고요, 직장이나 가정생활에서도 십계명의 말씀이 내가 보기에도 납득이 되어서 잘 지킵니다. 제가 간음도 아니하고, 살인도 아니하고, 거짓 증거 아니하고, 안식일 지키고, 부모 공경했습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에게 털어놓는 자기 고백이 오늘날 우리 안에서도 쉴 틈이 없이 계속 나와요. ‘이렇게 내가 의로우니까 주님께서 제 인생을 너무 힘들게 하기 있기, 없기? 없기!’ 이렇게 성의 있게 말씀을 지키니까.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마태복음 10장 37-38절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이 말씀 지켰습니까? 살인하지 않고, 거짓말 안 하고, 바르게 살려고, 빛과 소금이 되려고, 남들 앞에 기독교 신자의 아름다운 자태를 유지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그래요?

그러면 이 말씀 지켰습니까? 마태복음 10장 37-38절의 이 말씀 어떻게 했습니까? 제가 그렇게 들이대면 여러 가지 반응이 나올 수 있겠지요. 첫째는, “그것은 조금 있다가, 신앙이 깊어지면 지키겠습니다.” 이렇게 나올 수가 있어요. 또 하나는 뭐냐? 반발이 일어나요.

“인간의 본성이 자기 집안 식구부터 먼저 챙기게 되어 있는데 이걸 부정해 버린다면 우리는 인간도 아니고 기계가 되는데 이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반발이 나오게 됩니다.그러면 제가 끝으로 말씀드리는 것은, 징계가 뭐냐? 자기 육안에, 자기 안에 갇혀 있는 것을 자기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그것이 징계예요, 끄집어 내는 것.

끄집어내는 방법은, 주님께서 십계명부터 해서 모든 성경 말씀을 통해서 “너 자식 사랑해, 사랑 안 해?” 이걸 가지고 그냥 밀어붙이는 겁니다. 밀어붙이면, 지난 광주강의에서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그 하나님의 요구에 빚을 졌어요. 아까 본 노래 가사에도 나왔지요. “나는 매일 네게 갚지도 못할 만큼 많은 빚을 지고 있어”

그 무한한 빚을 우리가 감당을 못합니다. 감당할 수가 없어요. 졸지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채무자가 되는 겁니다. 주께서 요구하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갚을 길이 없어요. 그러면 우리는 자빠집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고 난 뒤에 사도바울의 편지로 넘어가요. 사도바울의 편지로 넘어가게 되면 이렇습니다.

“십자가로 인하여 네가 율법을 못 지켜서 그 빚진 많은 것을 내가 갚았고 덮어버렸다”라는 거예요. “그런데 너는 덮인 십자가 사건은 모르고 ‘제가 어릴 때부터 신앙인답게 바르게 살았습니다.’ 하고 아직도 법을 쥐고 있는 거”예요. “살인하지 않았습니다. 거짓말하지 않았습니다. 될 수 있는 한 바르게 살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면 십자가는 어디 갔습니까? 십자가에서 구원받은 강도보다 더 못하잖아요. 이걸 한마디로 하면 이렇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살려거든 차라리 죽어라.” 죽는 것이 낫다는 겁니다. 소용없어요, 자기를 위해서 살면. 성도라 하는 것은 더이상 자기를 위해서 살게 남아 있지 않은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햇빛과 공기 그 모든 것이 주께서 거저 주신 주님의 소유된 거예요.

이 말씀을 하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오셔서 그리스도의 형상이라는 말씀의 세계를 위해서 격앙, 들뜨게 만들어요. 들뜨게 만들고 그다음에 뭐냐? “네가 그 성경 말씀 공부해서 실천에 옮기라는 말이 아니고 네 몸을 주께 바쳐버려라.” 네가 갖고 있지 말고 그 몸을 주께 드리면 돼요.

주께 드리면 그다음부터 주께서 우리를 징계받는 아들로 이 땅에 남겨두면서 어떤 기능을 하게 되느냐? 경계선을 형성해요. 천국에 들어올 자와 천국에 들어와서는 안 될 자를 구분하는 경계막으로 우리를 활용해 주십니다. 만약 불신자가 와서 “성도는 어떻게 삽니까?” “나는 나에게서 손 놨어요. 나는 나에 대해서 모르겠습니다.” 이러면 끝나는 거예요.

여덟 살 먹은 애가 만약 성령을 받았다 칩시다. 그런데 엄마가 그 딸애 보고 “나 바람나서 너하고 안 살 거다. 너는 아버지하고 살아라. 나는 나간다.” 그 딸이 성령 받은 딸이에요. 예가 좀 억지스럽다만 그 딸이 하는 말이 “엄마가 가든 말든 나는 모르겠고 내 몸은 내 몸이 아니고 주의 몸입니다.”

이것이 백 세 인생 살면서 언젠가는 이런 딸의 고백이 나와야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그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합니까? 그냥 애초부터 주의 것인데 왜 그리 말을 듣지 않고 내 것이라고 우기면서 착실하게 살려고 애를 쓰는지, 그게 마귀의 시험이고 하나님에 대한 원수의 모습인 것을 이제는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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