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원수가 보이는 곳

아빠와 함께 2025. 9. 15. 08:01

원수가 보이는 곳 

2025년 9월 14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2:2-3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12: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믿음이란 우리 인간 안에 참으로 ‘믿음 없음’을 들추어주면서 나타납니다. 유일하게 믿음이 계신 분은 우리 예수님 뿐입니다. 믿음 없는 인간들이 추구하는 것은 자체 내의 부끄러움을 덮으려고 시도하는 식으로 모든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많이 알면 그 아는 지식으로 부끄러움이 가시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바로 ‘자기 위주의 믿음’이며 이 믿음과 참으로 대조적으로 나타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다는 말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얼굴과 다른 얼굴로 세상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이사야 53:1-3에 보면,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람들의 얼굴들은 처음 보는 얼굴들이 아닙니다. 모두 애써 부끄러움을 자기 내부로 깊숙이 감추기 위해 용쓰는 시도가 얼굴을 드러나는 얼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얼굴은 인간들이 덮는 그 수치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얼굴이라면 모든 사람들로부터 싫어버린 바 된 얼굴입니다.

즉 예수님이 하실 일은 모든 인간들이 행한 모든 일의 보편성을 근원부터 뒤엎는 일이 됩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을 싣고 있는 얼굴입니다.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시도하는 모든 것을 일거에 부정하는 얼굴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은 자기가 하기 나름이라고 믿습니다.

자기 자리를 보존하기 위해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계시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복음, 하나님의 법칙이 우리의 존재보다 먼저 있습니다. 사사기 19:13-17에 보면, “그 남편이 그 여자에게 다정히 말하고 그를 데려오고자 하여 하인 하나와 나귀 두 필을 데리고 그에게로 가매 여자가 그를 인도하여 아비의 집에 들어가니 그 여자의 아비가 그를 보고 환영하니라 그 첩장인 곧 여자의 아비가 그를 머물리매 그가 삼 일을 그와 함께 거하며 먹고 마시며 거기서 유숙하다가

나흘 만에 일찍이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 여자의 아비가 그 사위에게 이르되 떡을 조금 먹어 그대의 기력을 도운 후에 그대의 길을 행하라 두 사람이 앉아서 함께 먹고 마시매 여자의 아비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청하노니 이 밤을 여기서 유숙하여 그대의 마음을 즐겁게 하라 그 사람이 일어나서 가고자 하되 첩장인의 간청으로 다시 유숙하더니 다섯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 여자의 아비가 이르되 청하노니 그대의 기력을 돕고 해가 기울도록 머물라 하므로 두 사람이 함께 먹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은 출발이 자꾸 지연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 지연으로 인해 첩이 베냐민 지역 기브아 깡패들에게 잡혀서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즉 인간은 자기 주변에서 신경쓰면서 그것으로 자기가 원하는 자기 운명을 만들어질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개인적인 운명이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 한 분만의 운명 설계에 종속된 물결이요 가지들이요 파생된 흐름에 해당됩니다. 인간들이 마귀를 만나고 난 뒤, 마귀를 닮아 독자적인 자기 운명을 개척합니다. 그 개척을 성사시키기 위해 인간들은 자기를 위한 자기 공로를 자기에게 집어넣고 누적시킵니다.

하지만 이처럼 ‘자기 공로’가 담겨 있으면 이들은 ‘하나님의 원수’가 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의 최종착점은 인간들이 기대하는 천국이 아니라 ‘하나님 우편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먼저 가 계십니다. ‘하나님 우편의 자리’란 ‘하나님의 원수가 보이는 전망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시 110:1) 즉 인간들은 자아를 잘 관리해서 죽어서라도 천국에 들어가고 싶어하지만 인간이 생각하는 천국은 곧 지옥입니다. 진짜 천국은 ‘하나님 우편’입니다.

거기서 우리 예수님께서 어떤 공로와 능력으로 ‘하나님 원수’를 부셨는지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우편’ 자리는 성령에 의해서 가능했고, 그래서 그 성령의 능력이 예수님을 증인해야 될 자들에게 내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 전체 흐름의 최종 마감자리가 바로 ‘하나님 우편’입니다.

그 과정을 열 가지로 나열이하면 이러합니다.
⓵자연의 일부로서 신체를 부여받아 인간이 됨
⓶선악체계 정신을 갖고 뱀이 인간 내부에 들어옴
⓷자아가 발생하여 부끄러움을 느끼게 됨
⓸인간 대 인간 관계에서 인간은 폭력성을 드러냄. 악마의 협박을 받는 대상이 됨
⓹하나님쪽 사람을 건드려서 하나님쪽에 심판을 실시하는 빌미가 생김
⓺‘주의 이름’이 동행하는 민족 이스라엘의 출현으로 ‘하나님의 원수’개념이 성립함
⓻이스라엘 내부마저 ‘하나님 원수’와 한패가 됨-그래서 전면적인 심판이 감행될 태세가 되었음
⓼예수님께서 구체적인 존재인 악마와 만남으로서 ‘하나님의 원수’가 누군지 구체적으로 나타남. 그리고 모든 인류가 이 ‘하나님 원수’에게 사로잡혀 있음
⓽예수님만이 그 악마의 권세에서 탈출 성공하심
⓾탈출하신 그 능력(성령)을 받게 된 자들이 주님의 증인으로 각자 역할을 배정받음

이 열 번째 내용이 고린도전서 1:26-27에 나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따라서 성도는 더는 자기 사적인 인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유월절 어린양의 취지가 성도의 내부를 휘젖으면 육신에게 올라오는 자기 공로성을 다 파괴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주님 나라의 개라도 좋소’가 되는 겁니다.(마 15:27) 따라서 자랑하는 자는 ‘예수님 공로 안’에서만 자랑하게 됩니다.(고전 1:31) 

기도 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나를 살리려는 모든 시도는 주님의 죽음에 합류된 것으로 정리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84강-히브리서 12장 2-3절(원수가 보이는 곳) 250914-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2장 2-3절입니다.

히브리서 12:2-3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지금 ‘믿음’에 관해서 ‘믿는 자들은 이런 체험을 했습니다. 믿는 사람은 이렇게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그 이야기를 11장부터 쭉 해오고 있습니다. 그 믿는 자들을 이렇게 진열하고 우리에게 제시하는 이유는, 우리 내부에 믿음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믿는 자들도 믿음이 없어요. 믿는 자들도 믿음이 왜 없느냐 하면, 믿음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지 자기 내부에서 자기가 제조하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믿는 자들의 특징은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안 믿었습니다. 나는 나 말고는 아무것도 믿지 않았습니다.”라는 고백을 계속 토해놓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 남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존재가 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인간이 결연한 자세로서 마지막 승부를 거는 곳이 어디냐? ‘죽어서 난 천국 갈래.’ 모든 종교적인 집념을 거기다가 몰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믿음의 원형 되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어떻게 오셨느냐 하면, 부끄러움을 자처하시는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보면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라고 했습니다. 부끄러움이 없는 게 아니고 부끄러움을 옴팍 뒤집어썼는데 전혀 개의치 아니하셨다고 되어 있어요.

그분이 누구냐? “속에도 믿음이고 겉도 믿음이고, 믿음 없는 인간들 말고 진짜 믿음을 가진 분이 이 땅에서 이렇게 사셨습니다.”를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어떻게 사셨는가?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면서 사셨다, 이 말이에요. 왜 여기서 부끄러움이라는 것을 거론 하느냐 하면,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생긴 것이 바로 부끄러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는 부끄러워서 자기 하체를 가리기 위해 치마를 만들었죠(7절). 그렇게 보게 되면 모든 인간이 부끄러움을 전수받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들의 모든 얼굴은 처음 보는 얼굴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의 복제판이기 때문에요. 사람들의 모든 얼굴은 그 안에 ‘나는 부끄러움을 가리는 모습으로 살아갑니다.’라는 내용을 담고 그 낯짝으로 살아가고 있고 서로 만나고 있어요.

그래서 ‘사람과 서로 엮이지 말라’라고 한 이유는 인간과 인간 모든 관계 속에는 폭력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서로서로 만날 때는 좋다고 하다가 “만나면 좋은 친구 MBC 문화방송~” 뭐 이렇게 좋다고 만났는데 그 만남이 지속되지 못하고 헤어지게 되면 거기에 잠재되어 있던 폭력성이 폭발해 버리죠. 그게 바로 창세기 4장 아닙니까?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은 이미 그 안에 폭력이 담겨있었던 겁니다. 폭력이라는 것은 살인 충동인데 그 살인 의지가 모든 인간과 인간을 엮고 있습니다. 바로 그 세계에 주님께서 오셨는데 주님의 얼굴은 이렇게 부끄러움을 자처한 얼굴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에게는 예수님의 얼굴이 그렇게 친숙한 얼굴이 아니고 굉장히 특이한 얼굴이에요. 특이한 얼굴인데 좋은 인상이 아니라 외면하고 싶은 그러한 얼굴로 다가왔습니다.

이사야 53장 1-3절에 보면,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주님은 그 얼굴 자체가 인간들의 폭력성, 죄성으로 찌든 모습을 여과 없이 그대로 노출시킨 겁니다. 그 정도로 약하게 오신 거예요. 약한 모습으로 오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무장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지키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주님은 부끄러운 게 없기 때문에요. 반면에 모든 인간은 철판 깔고 만납니다. 철판 깔고 인간과 인간이 사귀고 대화하죠.

그래서 인간들이 부끄러움에 대해 철판을 까는 그 이유는, 자기의 동질성과 동일 주체를 계속 억지로 고수하려는 데서 비롯되는 겁니다. ‘나는 계속 나이고 싶다.’ 그러한 대표적인 교회에서의 모습이 뭐냐?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 하라고 하면 “나는 죽을 뻔했는데 살아났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죽을 뻔했는데.

죽고 살아난 게 아니에요. 죽고 살아나면 단절 때문에 동질성이 깨져버려요. “죽을 뻔했는데 살아났기 때문에 천국 가는 나와 천국 가기 전의 나와 동일 주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해요. 이건 누가 가르친 게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에요.

‘나는 어떤 경우라도, 심지어 죄지을 경우라도, 심지어 지옥 가는 경우라도 나는 나를 포기 못 한다.’ 이거에요. ‘내가 없어진다는 것은 용납 못 하겠다. 끝까지 나는 나를 사수하겠다. 나에게 충성하겠다.’ 이 일념으로 다른 사람과 만나고, 만날 때 철판 깔고 부끄러움이 나타나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애를 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느냐? 주님께서는 인간 자기의 동질성 속에 본인이 본인에게 기여한 바가 가득 들어있다고 보는 거예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내 안에는 내가 나한테 한 공로가 가득 차 있는 겁니다. 내가 나에 대한 이 기여도, 공로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거기 주님의 공로가 들어올 수 없어요. 심지어 십자가 믿는 것도 내 공로고, 부활 믿는 것도 내 공로고, 재림 믿는 것도 내 공로로 여겨서 이걸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자기가 너무 아까운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서 주님께서 하는 것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나올 때 유월절 어린 양을 제시했습니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현재 애굽에서 살았던 너희의 모든 세월, 모든 문화와 그 전체에 그게 실제로 있어요. 오늘날 한국이 실제로 있는 것처럼 실제로 있는 애굽나라 전체와 실제로 있는 어린 양의 피, 둘 중 어느 실재가 널 살리느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주께서는 어린 양의 피를 바르라고 했습니다.

어린 양의 피가 없는 실재와 어린 양의 피가 묻혀있는 실재가 어떤 엄청난 결과를 야기하는지를 너희가 한번 보라는 거예요. 그 어린 양이 뭘 했느냐? 애굽인들 그리고 히브리인들이 갖고 있던 모든 동질성을 내부적으로 파고 들어가서 그 전체를 다 파괴시켰습니다. 인간의 자기 공로성이 파탄 나버렸어요. 자기의 동질성이 파탄 나는 것, 이게 바로 하나님의 어린 양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이고 이것은 성령께서 오늘날 일찌감치 앞당겨서 우리의 최후를 우리 안에 집어넣는 거예요.

우리의 몸은 있어요. 키 얼마고 몸무게가 얼마고, 그런 몸이 있죠. 그 몸 안에 우리의 최후가 실제적으로 들어있는 자만이 하나님의 공로가 살아있는 걸로 여겨서 하나님의 공로의 나라에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이건 하나님께서 구원받으라고 해서 기다리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거절이 먼저 있어요. 인간보다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먼저 있었거든요.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먼저 있다는 말은 ‘인간아, 너의 위치를 바꾸지 말라’라는 거예요.

“나 인생 힘들어 못 살겠다. 나 어떻게 살지?” 평소에 화내고 불편해하죠. 그걸 차라리 바꾸란 말이죠. “내가 법을 어떻게 살리지? 하나님 복음을 어떻게 살리지?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살리지?” 지금 본인이 말씀보다 앞선다고 착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 자리는 율법, 그 하나님의 말씀 뒤에, 후에 있어요.

교회를 아무리 오래 다녀도 여기서 혼선이 있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나를 위해서 복음이 있고,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있는 게 아니에요. 자꾸 자리가 바뀌니까 우리가 인생 살아가면서 발작을 하는 겁니다. ‘법이냐, 나냐? 말씀이냐, 나냐?’

주님께서는 벌써 인간 자체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선악과의 존재 이유보다도 자기 존재 이유를 선악과보다, 말씀 보다 앞장세웠기 때문에 모든 인간을 거부합니다. 거부하고 난 뒤에 성령을 보내서 수용해요. 거부하고 수용하는 겁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선악에 기초해서 만들어낸 게 있어요. 그게 바로 모든 인간이 가고자 하는 천국입니다. 모든 인간이 천국에 가고자 했어요. 특히 바리새인 사두개인들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성도는 인간이 생각하는 천국에 안 가요. 주께서 거기로 보내질 않습니다. 어디로 보내느냐 하면, 오늘 본문 히브리서 12장 2절에 나옵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보내요. 하나님의 보좌 우편의 자리가 인간의 천국을 밀어냅니다. 인간의 천국에 대한 염원을 밀어내요.

하나님 우편의 자리와 천국의 차이점은, 하나님 보좌 우편의 자리는 하나님의 원수를 발견하고 주시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거기가 하나님 우편의 자리에요. 그런데 인간의 천국은 자기 혼자 나중에 호강하는데 미쳐서 환장하는 동네가 천국입니다. ‘땅에서 고생했으니 죽어서 호강하자’ 생각하는 게 자기 마음대로예요.

하나님 우편의 자리가, 내 원수 말고요, 하나님의 원수가 보이는 전망대 그 자리란 말이죠. 시편 110편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하나님 우편의 자리가 어느 인간들에게도 눈에 띄지 않고 오직 주에게만 눈에 띄는 그 전망대, 원수가 다 보이는 그리고 원수가 만든 세상이 다 보이는 그 자리가 주의 우편의 자리에요.

주의 우편의 자리에는 오직 예수님만 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만 갈 수 있는 자리에 자기 백성들을 끌어당기는 거예요. 인간은 동질성으로 자기의 부끄러움을 애써 감추면서 ‘나는 나니까 어떻게 나를, 교회 가든지 예수 믿든지 해서 천국까지 올려보내는 그런 동일한 나이고 싶다.’라고 자꾸 그렇게 억지를 쓰지요.

그런데 사도행전 2장 29절에서 베드로가 설교하면서 다윗과 예수님을 비교해요. 다윗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맞지만 그 동질성은 무덤에서 썩었다는 거예요.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러니까 “그 묘를 한번 파헤쳐 봐라.” 그겁니다. 썩어 있잖아요.

그런데 그것과 비교해서 예수님은 어떠냐? 31절에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라고 하시고 어딜 가느냐 하면 천국에 간 게 아니고 하나님 우편에 가셨어요. 34-35절에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우편의 자리는, ‘도대체 누가 예수님을 힘들게 하고 누가 예수님을 죽였느냐, 어떤 세력이 죽였느냐?’가 다 훤하게 보이는 자리에요. 아까 시편 110편 1절을 제가 거론했죠? 설교 다시 하겠습니다. 사람들의 소원은 뭐냐? 지금 동일 주체의 내가 이 땅에서는 고생하지만 죽어서는 편안히 행복을 누리는 내가 천국 가는 그 나이기를 소원해서 살아가고 있어요.

‘고생에 대한 보상이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좀 살려 주이소.’ 이렇게 하는데 뭐가 누락됐느냐? ‘하나님의 원수’, 원래 아담에게 붙어먹었던 하나님의 원수 뱀, “그 뱀의 생각이 어떤 생각인지 네가 알기는 아느냐?” 물어보면 몰라요. 그걸 모른다고요. “그딴 건 모르겠고 나는 내가 천국 가면 끝납니다.” 지금 이걸 고집하고 있다고요.

그러니까 인간들이 교회 나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몰라요. 맨날 자기 원수만 생각하거든요. ‘내 돈 떼먹고 도망친 인간!’ “자기 원수 말고 하나님의 원수에 대해서 아십니까?” 하면 사람들은 “난 관심 없어요.” 난 관심이 없대요. “그러면 어디를 가십니까?” “예수님 믿었으니까 천국 간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 천국이 지옥인데요?” “왜 지옥입니까?” 예수님의 안목과 동일한 안목이 아니잖아요. 예수님은 자기 원수, 하나님의 원수와 관련해서 이 땅에 살았고 그 결과로서, 그 성과로서 하나님의 우편의 자리에 앉았던 것이 예수님의 안목이잖아요, 예수님의 시선이란 말이죠. 그런데 거기에 합류할 생각을 안 해요, 인간들은. 자기 행복만 생각한다고요.

왜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가? 정답은 딱 나와 있어요. 본인이 하나님의 원수거든요. 본인이 하나님의 원수예요. 그래서 무슨 이야기가 잘 들어오느냐 하면, “바르게 사세요. 그러면 천국 갑니다.” 그 이야기가 부담 없이 잘 들려와요. 교회에서 듣고 싶은 것도 “바르게 사세요. 구원받습니다.” 이거만 잘 들려와요.

바르게 산다고 할 때 그 바르게 사는 당사자가 누구입니까? 당연히 본인이죠.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니까. 본인이 바르게 사는 그 주인공 중 한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싶은 거예요. 이게 바로 선악의 논리입니다. 그게 바로 먹지 말라고 했는데 따먹은, 악마가 부추겨서 먹게 된 선악 체계에요.

그 선악 체계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의 사고방식인 것을 어떤 철학이나 어떤 과학이나 윤리에서도 언급을 안 하고 있어요. 교회 와서 바르게 사는 것이 마귀 주장이라는 사실을 어느 교회에서 누가 이야기해요, 그걸? 아주 지옥을 보내요, 사람들을 집단으로! 바르게 살면 살수록 누구의 공로가 높아지느냐 하면 내 공로가 안 죽고 계속 살아있어요, 내 공로가 내 잘남이!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이 유대인 보고 “너희 아비는 악마다.”(44절) 다시 말해서 너를 지옥 보내기 위해서 마귀가 참 좋은 일을 해요. 자기 새끼는 알아서 지옥으로 데려가요. 우리가 혼내지 않더라도, 나무라지 않더라도 마귀가 “이것은 내 사람이다.”하고 그냥 지옥으로 골라, 골라, 골라 딱 데려가요. 얼마나 편리한지 몰라요.

그렇게 지옥으로 데려가지는 인간들, 그 선대가 바로 바리새인 사두개인 유대인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 서기관들은 자기의 모든 일과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몰빵한 사람들이에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영광 돌리는데 모든 것을 헌신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본인이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은 상상도 못 했어요.

요한복음 8장 7절에서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을 딱 데려오면서 하나님의 원수가 어떤 작자들인지를, 어떤 본질인지 들춰내는 일을 해요. 왜냐하면 주님 지금 가시는 길이 하나님 우편의 자리에 앉아야 하거든요. 시편 110편 1절에 예언되어 있기 때문에 그 예언된 말씀을 예수님이 자기한테 적용을 시켜야 되니까 하나님의 원수를 노출시키는 작업을 해야 된다는 그 말이죠. 인간은 그 하나님의 원수에 발목 잡히고 협박 대상이 된 거예요?

인간이 매일 같이 협박받는 이유가, 말씀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생각을 못 하고 자리가 바뀌어서 그래요. “나 힘들어 못 살겠다. 하나님, 저 힘들어서 못 살겠습니다. 너무 괴롭습니다.” 주님은 “누구세요? 누가 힘들다고 했어요?” “내가요!” “네가 누구세요? 나는 너 죽은 걸로 아는데? 또 꼼지락거리면서 살아있네?”

주님이 관심 두는 것은 말씀입니다, 말씀. 주님이 말씀에 의해서 너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의 문제지 나 힘들지 않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시고 성령 주시고 한 게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땅에 글을 씁니다. 요한복음 8장 7절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 소리 듣고 늙은 사람부터 젊은 사람까지 전부다 짱돌 놓고 다 가버리자 그만 시비가 종결됐어요. 데모가 종결됐습니다. 그 현장에 아무도 없어요. 간음한 여인 빼놓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간음한 여인이 간음을 잘했다는 말이 아니에요. 지금 예수님께서 사용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로 넘쳐나고 있음을 간음한 여인을 통해 보여주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이 사는 게 힘들고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하는 이유는, 자기 운명은 자기가 알아서 개척하는 것처럼 그렇게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운명은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얼마나 바르게 사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따라서 나는 평소에 조심해야 된다. 조심 안 하면 내 운명 조진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것도 성경에 위반되고 어긋나는 거예요.

사사기 19장 5-9절에 보면, 어떤 레위인에게 어떤 첩이 있습니다. 그 레위인이 오랜만에 장인 집에 갔어요. 좀 길더라도 제가 읽어 드릴게요. “나흘만에 일찌기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 여자의 아비가 그 사위에게 이르되 떡을 조금 먹어 그대의 기력을 도운 후에 그대의 길을 행하라 두 사람이 앉아서 함께 먹고 마시매 여자의 아비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청하노니 이 밤을 여기서 유숙하여 그대의 마음을 즐겁게 하라 그 사람이 일어나서 가고자 하되 첩장인의 간청으로 다시 유숙하더니 다섯째날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 여자의 아비가 이르되 청하노니 그대의 기력을 돕고 해가 기울도록 머물라 하므로 두 사람이 함께 먹고 그 사람이 첩과 하인으로 더불어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 그 첩장인 곧 여자의 아비가 그에게 이르되 보라 이제 해가 저물어가니 청컨대 이 밤도 유숙하라 보라 해가 기울었느니라 그대는 여기서 유숙하여 그대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내일 일찌기 그대의 길을 행하여 그대의 집으로 돌아가라.”

장인은 자꾸 ‘하루 더 있다가 가라, 하루 더 있다가라’라고 했단 말이죠. 이 대목을 보면서 ‘이 대목이 성경에 왜 나오지?’ 하는 생각을 수십 년 동안 했거든요. 도대체 이게 성경 전체의 주의 뜻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개인의 운명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거예요. 그때 레위인이 일찍 떠났으면요, 첩이 죽는 그런 사달이 벌어지지 않았어요.

개인의 운명은 없습니다. 개인의 운명이라는 것은 없어요. 집단적인 운명 안에 하나의 물결로서만 존재하는 거예요. 내 운명을 내가 개척한다? 내 운명을 천국 가는 운명으로 전환시킨다?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의 운명은 오직 하나의 운명,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원수를 부수고 유일하게 홀로 탈출했다는 그 경로, 그 경로를 보여주는 데 종속된 운명이에요. 내 운명은 없어요. 개인 구원 없습니다. 합류되는 거예요.

지난주 목요일에 서울 강의하면서 가슴이 굉장히 아팠어요. 첫 번째 시간에 이런 이야기 했습니다. “탕탕탕!” 자식이 방에 들어가서 놀다가 엄마 아빠 보고 싶으니까 문 열어달라고 두드리는 거예요. 탕탕, 이게 총 쏘는 소리가 아니고 두드리는 소리입니다, “탕탕탕! 아빠 문 열어줘.” 갇혀 있다, 이 말입니다.

“문 열어줘.” 할 때 아빠가 하는 말이 “네가 안에서 열어. 밖에서 열 문이 없어. 안에서 열어.” 자식이 하는 말이 “아빠 여기 문이 없어요.” 문이 없습니다. 천국 가는 문이 없어요. 인간에게 애초부터 없어요. “정녕 죽으리라”(창 2:17) 했기 때문에 문이 없는 거예요.

문이 있으면 자기가 착하게 살아서 문 열고 나오죠. 문이 없다고요. “유월절 피가 문이 되잖아요.” 유월절 피는요, 문인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인 걸 알고 우리의 동질성을 파괴시킵니다. 왜냐하면 유월절 어린 양에는 하나님의 공로가 들어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공로를 누가 방해하느냐? 같은 하나님의 원수인 우리가 마귀로부터 받았던 자기 공로를, 선악 체계에서 나오는 그 자기 공로를 꼭 쥐고 있으니까 그걸 파괴하지 아니하면 속속들이 어린 양의 주님의 공로가 거기 파급이 안 돼요, 속속들이!

주님의 공로가 한 50퍼센트고 내 공로 50퍼센트, 이래가지고는 안 돼요. 주님의 공로 80퍼센트 내 공로 20퍼센트, 이것도 안 돼요. 왜냐하면 우리가 갈 자리는 하나님의 원수가 누군지를 명확하게 그걸 뽑아보고 규정해서 ‘주의 공로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만 다 이루었다’라는 그 세계가 바로 진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 공로를 거기다가 집어넣으면 나는 하나님의 원수가 아닌 사람이 되고, 이러면 백 퍼센트 주의 공로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주님의 공로+알파’로 구원받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이단이잖아요, 이단! 악마가 인간에게 무슨 짓을 했는가? 악마는요, 아담에게 선악 지식을 알려주고 그 후손들을 퍼뜨리면서 인간들에게 어떤 생각을 하게 했느냐 하면, 자기 주변부터 살피고 챙기는 그런 본성을 집어넣었어요. 사실은 악마의 볼모예요. 미끼였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이상화(1901-1943)의 시에 이런 게 있어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조선 들녘에 이렇게 봄은 오는데 왜 우리 민족은 일본의 압제에 빼앗겨 버렸는가? 산천은 봄이지만 내 마음은 봄이 아니구나’라는 뜻에서 이렇게 썼지요. 보세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여기서 ‘봄’이라는 규정을 누가 합니까? 본인이 하잖아요. 본인 주변을 살피잖아요. 자기 생계 살피잖아요.

그래서 인간들은 선악과 따먹고 자기만의 소박한 우주선을 만들어요. 우주선을 만들어서 자기 가정이라는 우주선, 국가라는 우주선, 교회라는 우주선, 그 우주선 안에서 자기 동질성으로 결속을 다져요. ‘세상은 다 망해도 넌 절대로 파괴되면 안 돼.’ 내가 나한테 자꾸 세뇌를 줘요. 이런 말이 있어요. “영웅은 배신당할지언정 쓰러지지 않는다.” 이게 자기 우주선 아닙니까? 자기 우주선이거든요. 얼마나 독합니까?

그러니까 아이가 문 열어달라고 하는데 본인은 자기를 버리고 빠져나갈 문이, 애당초 악마가 인간에게 그걸 허락한 적이 없어요. “넌 그냥 네 안에서 살아. 너 좋으면 다 좋은 거야. 네가 구원받을 수 있는 그런 모든 정보와 요소는 네가 챙겨. 네 안에 가득 담아놔. 그게 너의 부끄러움을 이길 거야.” 이렇게 나와요.

그런데 레위인의 첩 같은 경우는 어떻게 됩니까? 본인 주변만 챙기면서 살았는데 그 첩을 탐내는 벤야민 지파의 깡패들한테 걸린다는 것이 자기 머릿속에 없었어요. 그런 사건을 예측 못 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그게 왜 기록되어 있는가? 주님께서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바르게 함으로써 지금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서 그 공로를 가로막는 자기 백성을 유월절 양이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파괴시킵니다. 자기의 기억, 공로,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파괴시킬 때 그게 주님의 죽음에 합류되는 거예요.

구원받는다는 것은 주님이 앞당겨서 나의 최후를 그 안에 담게 된 것을 말합니다. 모든 인간은 순간순간이 자기의 마지막이고 최후에요. 인간의 모든 행동은 자기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움직입니다. 그냥 최선을 다한다, 이것뿐이죠. 최선을 다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파괴되지 않겠다는 고집인데, 그 고집으로 인하여 발작이 일어나죠. 그 발작이 히브리서 2장에 나옵니다.

2장 14절 15절에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여기에서 사람들이 납득을 잘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혈육에 속했다고 할 때 ‘혈육’은 알아요. 몸무게 아침마다 재고, 거울 보면 비치는 혈육이 있고, 아프면 주사 맞는 혈육이 있으니까요. 혈육의 실제성은 내가 믿고 인정하겠는데 뭘 인정 못 하느냐 하면, 여기 마귀의 존재에 대해서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죠.

‘혈육은 내가 믿겠는데 마귀는 못 믿겠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열 두 제자 중에 한 제자 가룟 유다, 인간이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영적 세력에 유일하게 접근을 가능케 한 그 제자 가룟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도록 허락했어요. 가장 시건 있는 제자는 가룟 유다밖에 없었어요.

왜냐하면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 홀로 가버리니까 “우린 고기나 잡으러 간다.”(요 21:3) 해서 다시 육에서 육으로 가버려요. 다시 말해서 가룟 유다는 인간이 아무리 연구해도 미처 모르는 자기 자신의 내부를 유일하게 들여다본 자입니다. ‘아, 내가 마귀 자식이구나. 마귀의 자식이 나구나. 하나님 원수의 자식이 나구나.’ 유일하게 가룟 유다가 그걸 알아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가룟 유다로 하여금 자살로 몰아넣습니다. 왜? 제자인 가룟 유다를 통해서 모든 인간의 실정, 그 현실이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 영적 세력자 악마한테 볼모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함이에요. 그런데 악마가 뭘 했는가? 물론 가룟유다도 악마에게 당했지만 인간에게 늘 다가오는 게 뭐냐? 무섭다는 거예요. 두렵다는 겁니다. 공포스럽다는 거예요. 불안하다는 거예요. 살면 살수록 내 내부가 불안정하게 흔들려서 못 살겠다는 거예요. 막 구토가 일어날 정도로요.

세상의 어떤 부귀영화를 가진다고 할지라도 자기 내부는 늘 지진이 일어나고 있어요. 지진 7.2, 8.5, 그래서 터져 나오는 게 “못 살겠다.”에요. “도대체 힘들어서 못 살겠다!” 원인을 몰라요. 원인을 모르는데 무조건 못 살겠다는 거예요. 주께서는 “내가 그렇게 했다”라는 거예요, 살지 말라고!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한 방에 갑니다. 10개의 절차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자연의 일부로서 신체가 만들어진다. 인간이 본인을 만든 게 아닙니다. 그냥 만들어진 거예요.
두 번째, 뱀이 선악 체계를 들고 와서 인간 속에 집어넣습니다.
세 번째, 여기서 자아가 발생해서 인간이 부끄러움을 느껴요.
네 번째, 그 부끄러움을 안 부끄러워하기 위해서 악마로부터 협박을 당하면서 형은 동생을 죽여요(창 4장).
다섯 번째, 역시 창세기 4장입니다. 하나님 쪽 사람을 건드렸다는 이유때문에 땅과 하나님이 합세해서 이 세상을 노아 홍수로 심판합니다.
여섯 번째, 그 심판에서 하나님이 함께한 자를 자꾸 건드림으로 말미암아 그 주변에 하나님의 원수가 자기 정체를 교묘하게 감추지 못하고 가는 곳마다 그 정체를 노출시켜요. 특히 이스라엘의 경우입니다. 그래서 여섯 번째 하나님의 원수가 출애굽기 15장에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출애굽기 15장입니다.
일곱 번째,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원수에 대한 하나님의 정당한 심판이 보장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원수에 대한 심판!
여덟 번째, 드디어 신약에 들어와서 마태복음 4장에서 악마가 예수님을 시험하는 가운데서 악마가 자기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그 원수가 악마라는 실체적이고 구체적인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죠. 악마가 평소에 세상을 경영하는 방침까지 다 드러냈어요.
아홉 번째, 그 속에서 예수님이 홀로 탈출했습니다. 십자가입니다.
열 번째, 탈출하고 난 뒤에 탈출한 그 능력으로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게 새로운 자리를 배정해 버렸어요. 새로운 자리 배정입니다. 이 배정은 ‘나는 누구냐?’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누구냐?’를 드러내기 위한,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한 자리 배정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절에 보면,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불러내는 거예요. 성령으로 불러내는 겁니다.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왜 그런가? 왜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다고 하는가?

불러낼 때는 부름 받은 자기의 동질성, 자기의 의사, 자기가 되고 싶은 것, 이런 것이 다 묵살당하고 난 채로 주께서 일방적으로 지정한 자에게 주거든요. 그렇게 지정한 자에게 줘버리면 그 자리는 나 위주가 아니라, 주님이 나보다 먼저 나에게 자리를 지정해 줬다는 거예요. 따라서 나보다 앞선 것은 주님밖에 없고, 나는 그 주님을 뒤따르는 배정된 자리에 속함으로 말미암아 나는 없고 주님에 합류, 다수(多數)로서 합류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15장 27절에 그 대목이 나옵니다. 22절에 보면 딸이 귀신 들려서 예수님을 찾아온 여자가 있습니다. 25절에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절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예수님께서 ‘자녀’라고 해서 다수(多數)를 이야기해요. 집단을 이야기한다고요.

어떤 집합체, 개인이 아니고 집합체 되는 자녀들입니다. “나에게서 떨어지는 떡, 각자 개인의 떡이 아니고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그 떡으로 나의 자녀들을 먹여 살린다. 그런데 너는 거기에 네 자리가 없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니까 그 여자가 하는 말이 “자리는 없지만 떡 먹으면 그 자리에 넣어줍니까?” 이렇게 나온 거예요.
TO는 찼는데 자녀들이 버린 떡이 있잖아요. “개를 주려고, 개 주려고 버린 떡이 있는데 내가 개가 되어서 그 떡을 먹으면 그 자리에 합류할 수 있습니까?”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 말씀이나 이 여자가 한 말이나 개인 구원이라는 것은 일체 없어요. 전체에 합류되는 거예요. 개인으로 태어나서 개인만 생각하는 인간에게 단체에 합류한다는 생각이 사실은 뒷전이거든요.

그러면 어떤 경우냐? 나 위주의 개인, 동일 주체에 의한 내 공로가 주의 공로에 의해서 파괴될 경우에만 이런 결과가 나와요. 내가 내세울 것이 일체 없을 때, 그때 나는 개가 되고 고양이가 되는 거지요. 내 것 내세워서 내가 사는 길은 완전히 차단되었어요. 없습니다. 내가 살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내가 살 수 있는 길은 없어요.

‘주께서 우리를 살리는 그 능력은 있지 않느냐?’ 주님이 살리는 능력은…, 이것은 진짜 중요한데요. 오늘 마지막으로 중요한데 그게 뭐냐? 주님에서 나오는 능력은 주의 능력이 아니고 주님을 죽였다가 살리는 아버지의 능력입니다. 성령의 능력이에요. 주님도 본인이 못살아요. 그런데 건방지게 우리가 왜 살려고 하지요?

“못 살겠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사는데 지장이 되어서 힘들다는 그 말이거든요. 그러니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주님도 죽는 마당에 네가 뭔데, 네가 뭔데 살려고 하느냐는 그 말이지요. 하나님이 이야기하십니다. “네가 굳이 살려고 하는 이유를 내가 알려줘? 네 인생 망하면 부끄럽지, 그치?” 그 부끄러움에 발목 잡힌 거예요.

악마한테 발목 잡힌 거예요. ‘내가 뭐가 못나서 남들만큼 못사느냐?’ 그게 발목 잡힌 거라는 그 말이지요. 교회 와서 기도하는 것이 그거잖아요. 부끄럽지 않은 인간 되게 해달라고 새벽마다 기도하잖아요. 아, 이게 하나님의 원수 아닙니까! 때려죽여도 나의 희망을 내가 포기 못 하겠다는 겁니다. 내가 앞으로 잘 될 일을 미쳤다고 포기하느냐는 그 말이거든요.

동학(東學) 정신, 최제우가 만든 종교가 있어요. 나중에 천도교(天道敎)가 되지요. 경주에 가면 동학운동의 기념물들이 있어요. 동학 정신이 뭐냐?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이에요. “하늘을 경배하고, 인간을 경배하고, 물건을 경배한다.” 이 종교입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원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빠져 있잖아요. 빠져있어요.

예수님이 성경 해석하는 것하고, 악마의 앞잡이가 된 인간의 성경해석 차이가 거기에 있습니다. 해석이 달라요. 내가 성경 보게 되면 자꾸 빠트려요. 내가 하나님의 원수라는 사실을 자꾸 누락을 시킨다고요. 아까 1번부터 10번까지 한 것을 다시 하겠습니다. 제가 빨리 지나가서요.

첫 번째, 자연의 일부로 신체가 만들어졌기에 인간은 없습니다. 자연의 일부가 인간입니다.
두 번째, 선악 체계를 가지고 뱀이 개입하고 거기서 인간이 발생했어요. 내가 인간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된 겁니다. 벌써 사달이 났어요. 우리는 이미 죽는 게 마땅해요. 그런데 인간은 장례식장에 수십 번 들락거리면서 자기 죽는다는 것만 알지 아버지가 죽이는 그 죽음을 인간은 몰라요. 악마가 그걸 가로막아 놨어요. 아버지가 죽이는 저주의 죽음은 예수님만 알아요. 그게 영원한 저주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은 ‘살다가 죽지 뭐. 살기도 힘든데.’ 이러고 맙니다. ‘사는 데까지는 내 몸 하나 챙기면 남는 장사잖아.’ 이 생각이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의 전부에요.
세 번째, 자아가 발생해서 거기서 인간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네 번째, 그렇게 해서 자아가 발생했고 주께서는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의 그 운명을 위해서 인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지요. 여기서 악을 독촉받은 가인이 아벨을 죽입니다. ‘너 때문에 내 인생이 부끄러워졌다’라는 탓을 동생 아벨에게 해요.

다섯 번째, 역시 창세기 4장에서 하나님께서 그 장면의 CCTV를 다 깠어요. 그래서 내 사람 아벨을 건드린 죄로 주께서 노아 홍수를 가지고 다 죽여버렸습니다.

여섯 번째, 이스라엘 나라를 실제로 만들어서 주의 이름이 합류한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원수가 어떤 식으로 살아가는지, 왜 그리고 어떤 것으로 이스라엘을 노리는지를 들추기 위해서 원수의 집단을 이스라엘 주변에 발생시켰습니다.

일곱 번째, 하나님의 원수에 이스라엘이 물들어 그 내부까지 오염되자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온 세계를 심판하기 위해서 주께서 이 지상에 찾아오십니다.

여덟 번째, 심판받을 주체, 어떤 특정 인물, ‘이 세상 대충 멸망한다.’ 그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 악마라는 존재가 있었다는 것을 창세 전의 원초적인 데까지 소급해서 신약에서 알려줍니다. 예수님이 시험받을 때(마 4장) 그것을 드러냈지요.

아홉 번째, 그 악마의 힘에서 예수님 혼자 탈출했습니다. 아무도 탈출 못 해요. 그 과정 속에서 가룟 유다는 ‘아, 내가 붙잡을 분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지요. ‘아, 이게 인간의 일이 아니고 영적인 일이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지요.

열 번째, 주님이 탈출한 그 능력을 가지고 자기 백성에게 그 개인적 운명을 창세 전부터 지정해 줬어요. 그렇게 지정함으로써 더이상 자기 공로의 증인, 자기 잘남의 증인 ‘나 이렇게 힘들게 인생 살았다’라는 증인 되지 못하고 ‘그것마저 주의 십자가의 필연성 속에 포함된 일이었습니다’라고 증거하는 겁니다.

자, 여러분에게 이제 묻습니다. 여러분, 어디쯤 가고 있습니까? 이 열 가지 과정 중에 지금 어디쯤 가고 있어요? 여러분이 다 열 번째에 속했다고 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는 것은 개인카드가 아닙니다. ‘법카’입니다, 법카, 법인카드에요. 이 땅에 사는 것은 여러분이 사는 것이 아니고 회사 일이에요. 출장 온 겁니다.

개인 휴가 아니에요. 여러분이 출장 온 식으로 인생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혼자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같은 비행기에 300여 명이 타고 왔어요. 316명인가 되지요. 미국에서 같은 비행기 타고 온 거예요. 그걸 가지고 고린도전서 1장 31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 안’이라는 비행기 같이 타고 가는 거예요. 따라서 고린도전서 1장에서 말씀하는 것은 누구를, 누구 인생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거예요. “네가 그 사람을 알아? 그 사람이 좀 잘 산다고 하는데 그 사람이 얼마나 고민이 많은지 그 집구석에 가 봤어?” 인간들이 갖고 있는 것, 인간들이 가졌기 때문에 짐이 되는 게 얼마나 많은지 남의 인생이라고 함부로 좋게 보지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각자의 인생 내부에, 그 사람 속에 들어가서 그 사람의 자기동일성을, 자기 공로를 일일이 다 쪼개고 파괴하는 과정속에 있습니다. 그렇게 파괴하면서 “너는 이미 내 죽음에 합류했기 때문에 너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인생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자꾸 이게 육체적인 마귀 생각이 올라오네!” 하고 말씀으로 그때그때 마다 콕콕 집어주는 거예요.

그래서 만약에 여러분이 말씀을 멀리하면요, 자리가 바뀌어요. “하나님은 뭐 하십니까, 날 안 살려주고?” 이렇게 되고, 말씀이 오게 되면 “참, 말씀 때문에 내가 있지.” 자리가 다시 바뀌면 감사와 고마움과 기쁨의 연속으로 바뀝니다. 얼마나 갈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럴 때마다 ‘어디쯤 가고 있을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고민하고 걱정할 일이 내게 없는데, 없는데도 두려움과 공포와 걱정과 불안감이 왜 찾아오는지? 자리가 바뀐 줄 이제 알았습니다. 내 자리가 아니고 주님 자리를 위해서 주께서 일으킨 일들을 하루하루 만나고 있을 때, 주님의 공로보다 내 공로가 앞장세웠던 나의 잘못과 실수를 주께서 친히 부수어주시는 그곳에서 기쁨과 감사가 터져 나오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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