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신체의 이중성

아빠와 함께 2025. 9. 7. 18:22

신체의 이중성 

2025년 9월 7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2:1

 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달리기가 될려면 출발지점이 있어야 하고 도착지점이 있어야 합니다. 먼저 이 세상을 실상의 세계 증인으로 달렸던 많은 증인들이 후배들이 도착하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스스로 달린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이끌림’을 받았던 자입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요 12:32)

그들이 스스로 알아서 천국으로 갈 수 없었던 이유는, 그들에게 타고난 육신성, 신체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신체는 이미 죽음의 증거입니다. 에덴동산 안에 있으면 무조건 산 것이요, 에덴동산 안에 있지 못하고 밖에 있으면 무조건 죽은 겁니다. 따라서 인간들의 신체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죽은 자로 규정됨’의 증거일 뿐입니다.

따라서 어떤 목적을 향해 달린 자들이 아니라 차라리 자기 몸뚱아리 먹이고 입히는데 전력을 다 쏟는 그런 본성을 지닌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신체의 본성에 정직함을 유지한 자들입니다. 즉 신체가 배고프다면 먹을 것을 준비해서 먹이고, 신체가 아프다고 하면 약으로 치료하려고 한 자들이요 신체가 피곤하다면 잠을 자아야만 했던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가장 확실한 믿음은 오로지 자신의 신체 간수하기 뿐입니다. 그 외에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습니다. 자신들의 신체 보호에 평생을 걸쳐 전력을 쏟는 이유는 자신들도 알지 못했던 다른 힘에 눌려서 벌어지는 일인 것을 말입니다. 누가복음 4:28-3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예수님을 붙잡아서 죽이려는 시도나 혹은 현장에서 예수님을 살해하는 시도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결국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 하는 이유는, 인간들의 이해 범주에서 벗어난 생각이 자기 백성들에게만 주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신체와 그 신체의 유지와 평안이 전부다 고 여기면서 세상을 살고 있는 모든 이들 중에서 실상의 나라의 존재를 알려줄 수 있는 방법은 기존의 신체말고 다른 신체도 있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마태복음 9:20-22에 보면,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병든 여인은 자기 신체성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신체에 접촉을 시도합니다. ‘죽어 마땅한 신체’와 ‘살아 마땅한 신체’를 구분하는 겁니다. 여인은 자신의 신체가 예수님의 신체의 일부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여인의 마음은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 하실 일의 취지에 해당됩니다.

하지만 십자가 지기 전까지 성신이 일하시는 시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부활 승천한 다음에 나타나시는 영은 성령이십니다. 즉 성령은 모든 경주가 마감이 된 이후에 주어지는 것이라고 인간쪽에서 더는 할 게 없게 만드십니다. 성신은 여전히 도착지점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를 보여준다면 성령의 오심은 이미 예수님의 신체성으로 전환된 신체로 다루어짐을 말해주는 겁니다.

기존의 인간들의 신체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 난 뒤에, 선악체계로 집중 양육 받게 됩니다. 오로지 자기 신체만 챙기면 된다는 마음으로 살아가지면, 왜 내가 굳이 살아야 하는지 이유에 대해서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은 선악체계, 즉 선을 알고 악을 알고 있는 점으로 말임암아 자신이 ‘죽어 마땅함’을 받아주지 못하게 됩니다.

잘나고 소중한 나는 당연히 이 세상에 살 권한과 자격이 된다고 갖고 있다고 우기게 됩니다. 내가 잘 알고 있는 선에 대한 지식과 악에 대한 지식은 버리기에 너무 아깝다고 여깁니다. 그 지식이 고이 간직하기 위해서 필히 자신을 계속 생존해야 마땅하다고 여기게 됩니다.

이게 인간들의 신체성이 안고 있는 범주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구약 성도에게 있어 이런 자기 선악체계로서 도저히 예상 못할 일이 일어나 이들 성도들로 하여금 실상의 세계를 증거토록 했습니다.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안정적인 신체를 보존할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이 주신 믿음은 그 자기 신체성이라는 범주를 벗어난 상태로 모세를 인도했습니다.

노아의 경우는 결코 개인적인 자기 가족의 신변보호의 범위보다 훨씬 더 큰 내용이 주어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방주 중심으로 일어난 세상 심판에 관한 일입니다. “ 땅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육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육지에 있어 코로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은 다 죽었더라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 물이 일백오십 일을 땅에 창일하였더라”(창 7:21-24) 방주의 존재는 노아 당시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이후 모든 세상이 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놓여 있음을 나타내어 줍니다.

소위 ‘기다란 방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존의 시간과 공간 전부를 덮고서 그 안에서 ‘정결한 희생제물’의 피의 노선만이 생명에 이르게 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생명집중치료실’로서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들을 동원해서 그들의 신체성을 활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체성이 마감이 되지 아니하면 주님의 신체에 합류될 수 없기에 주님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구원을 시도하려는 신체성을 예수님의 못자국과 창자국을 통해서 마감시키려고 하십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이제 새로운 시공간이 성도에게 주어집니다. 자신의 신체를 어떻게든 지키는 것이 성도의 관심사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신 생명의 방향성이 자신의 죄악된 신체성을 사용하며 관통하는 진행사항을 증거하면 되는 겁니다. 나의 신체의 고정성에서 성령에 의해 방향성이 뚫고 나오는 겁니다.

베드로가 언급한 것처럼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가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3)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잘남과 선악체계 한가운데를 십자가로 뚫고 나가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83강-히브리서 12장 1절(신체의 이중성) 250907-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2장 1절입니다.

히브리서 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우리보다 먼저 달리기한 선배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들은 이 땅에 살면서 자신들의 육신을 가지고 무거운 것과 얽매인 것을 짊어지면서, 죄를 짊어지면서 죄의 힘든 무게, 그것을 통과하면서 인내로서 갔는데 그들이 하는 일은 ‘증인’이라는 거예요, 증인. 본인이 잘났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으로 사는 게 아니고, 본인 말고 다른 분의 증인으로서 살았던 허다한 사람들이 구름같이 둘러싼 그런 세상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은 일종의 경주니까 출발점이 있었고 도착점이 있었겠죠? 출발점과 그들이 도착했던 도착점, 그 사이에 뭐가 있느냐? 그들의 신체성이 있었습니다, 신체가 있었어요. 그들이 도착점을 향하여 갔는데, 갔던 그곳은 현재 우리의 신체로서는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보이는 신체를 가지고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해서 뭔가 증거한다, 알려준다, ‘그 세계가 따로 존재한다’라고 했던 자들이 허다한 증인의 이름으로 지금 하나님의 계시 히브리서 12장 1절의 그 안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이라고 해서 여기 ‘우리’라는 말을 했는데 아직 죽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지 못한 ‘우리’와 미리 이 세상을 통과했던 저들과 ‘우리’라는 그러한 명칭으로 같이 동일한 운명으로 묶여 있는 그런 입장에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서 이미 천국에 도착한 그 사람들과 ‘우리’라는 명칭으로 서로 통하지 않을 경우에는 이 성경을 볼 필요가 없다, 그 말이에요.

이걸 왜 봐요? 그들은 그들의 인생 살면 되고 난 내 인생 살면 되는데 무슨 공통점이 있어서 ‘우리’라는 말을 한꺼번에 그들이나 우리에게 똑같이 적용이 가능하냐, 이 말이죠. 공통점이 있는데 그들이 신체를 가지고 살았다는 거예요. 우리도 신체를 가지고 살죠.

그런데 어떤 사람은 지옥 쪽으로 갔고, 어떤 사람은 천국으로 주님 계신 쪽으로 갔다면 이것은 무슨 문제를 풀어야 하느냐? 똑같이 보이는 신체를 가지고 어떤 신체는 지옥 가는 신체, 어떤 신체는 천국 가는 신체인지를 어떤 식으로 이걸 구분할 수 있느냐 하는 거예요.

이건 나에 대한 나의 구분일 수도 있어요. 지금 내가 가는 길이 천국으로 정상적으로 가고 있는지 아닌지 그것은 누구한테 물어야 하느냐 하면, 우리보다 선배 격인, 우리보다 먼저 우리하고 똑같은 아담의 신체를 가지고 살았던 그들의 신체 안에서 또는 신체를 통해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느냐를, 그리고 오늘날 우리 신체 가지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느냐를 따져서 동일한 일이 벌어진다면 우리는 동일한 천국 백성이 되는 겁니다. 논리적으로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들의 신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그것은 히브리서 11장에서 줄곧 해왔었습니다. 11장 1절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이렇게 이야기해서, 그 보이는 것들은 실상을 보여주는 증거일 뿐이지 보이는 것을 실상이라고 말하지 말라는 거예요.

보이는 것은 그냥 실상 쪽에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니까 ‘나타난 것을 시작으로 실상을 찾아가는 하나의 매개로서 우리의 모든 보이는 자연 세계와 우리의 신체가 작용하게 된다’라는 그런 말입니다. 그 말을 하면서 우리가 보이는 것을 가지고 나타난 것이 전부라고 여길 때 뭐가 빠져있느냐?

‘믿음’이 빠질 때 그런 현상이 일어나요. 믿음이 빠질 때 그런 고백이 나온다는 말이지요. “보이는 것이 다다.” 그래서 이 히브리서 11장에서 출발해서 12장까지 오면서 우리는 우리에게 뭘 물어야 하느냐? 우리가 갖고 있는 이 신체에 대해서 그 실제성을 강조해야 돼요.

신체의 실제성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우리가 아무리 교회 다니고 성경을 보고 은혜를 받고자 애를 써도 몸이 아플 때는 병원에 가고 싶어요. 약을 먹고 싶습니다. 그리고 배가 고플 때는 밥을 먹어요. 피곤하면 잠자야 됩니다. 그거 외에 뭐 또 있습니까? 없잖아요.

우리 신체를 가지고 확실한 것만 뽑아내라면 ‘뽑아내지, 뭐.’ 확실한 걸 뽑아내는 거예요. 거울 앞에 내가 있고, 내 모습은 저 모습이고, 확실하죠. 확실하니까 믿을 만합니다. 그리고 배고프면 밥 먹고, 누가 가시로 찌르면 아프고, 손톱이 찢어지면 통증 생기고, 잠이 오면 잠 자고, 결혼하면 애 낳고, 또 애 키우고, 애가 젖 달라고 하면 젖 줘야 하고, 돈 달라고 하면 돈 벌어서 용돈 보태줘야 하고… 뭐, 그게 전부 아닙니까? 이것보다 더 확실한 게 있어요? 없잖아요.

울산 강의에서 그런 질문을 던졌어요. “나 혼자 살아도 살 수 있는데 왜 자꾸 하나님을 거론하십니까? 왜 의식합니까?” 그 현장에서 “여러분, 누가 답변해 보세요.” 했어요. 나 혼자도 얼마든지 살 수 있어요. 그런데 왜 하나님을 자꾸 의식해야 하느냐, 하나님을 떼고 하나님을 생각 안 하고 살면 그건 사는 게 아닙니까?

그게 우리 신체가 말해주는 우리의 본성 그대로 아닙니까? 액세서리 달듯이 수십 년 교회 다니면서 하나님, 하나님, 백날 계속해서 말로 설득하고 또 설득하고, 설득해 봐야 어디까지나 설득은 설득일 뿐이고 내 신체가 아플 때는 그런 것 다 떨어져 나가잖아요. 정확하게, 정직하게 이야기해야 해요.

우리가 확실하게 믿는 것은, 내 신체의 실제성 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습니다. 돈이 있어야 내 몸이 사니까. 따라서 돈 버는 것이 우선이지 하나님 믿는 것은 절대로 우선이 아니에요. 스스로 자기를 자꾸 억지 부려 속일 생각 하지 마세요. 우리의 신체는 어디까지나 우리 신체로 되돌아오고, 이 신체가 요구하는 범주, 범위, 그 범위가 우리 전체의 범위입니다.

그 범위 안에 우리가 배부르면 교회 다닐 수도 있고, 여유 있으면 교회 왔다 갔다 할 수 있지만 돈이 떨어졌다든지 내 신체가 급할 때는 ‘붙어있는 짐스러운 건 다 털어내고 우선 내 몸부터 살아보자.’ 이것보다 더 정직한 고백이 어디 있어요? 이 정직한 고백을 애써 감추려고 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건 조작이죠. 천국 있다니까 억지로 믿음을 조작해 내는 것 그거 나중에 몸 피곤하면요, 치매 걸리면 다 떨어져 나가요. 그 소용없는 수십 년 세월을 교회에서 보내는 겁니다. 나는 내 신체의 확실성을 믿는데, 다른 것은 안 믿는데 괜히 뭐 콩고물 묻히듯이 자꾸 “믿습니다!” 해봐야 결국 몸 아프고 나이 들면 언젠가는 다 없어질 거다, 이 말이죠.

연세 많은 부모가 교회 나간다고 하면 젊은 사람들은 픽픽 웃죠. 젊은 사람들이 얼마나 똑똑한데요. 결국 시간 때우기 위해서 교회 가는 거고 남는 것은 내 몸 밖에 남지 않습니다. ‘왜 어른들은 이렇게 솔직하게 살지를 못하는지, 내 몸 하나 위해서 살고, 내 몸 편리하고, 내 몸 편하면 최고라고 솔직하게 이런 믿음, 이런 종교, 이런 신앙을 왜 고백하지 못하느냐?’ 젊은 사람들은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비아냥거립니다.

이것부터 분명히 해야 돼요. 이걸 분명히 했다고 치고 확실하게 내 믿음 가장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 믿을 것이 내 몸뚱아리밖에 없다는 걸 분명히 깔고 누가복음 4장 28-30절을 보겠습니다.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와~, 이거, 바리새인과 유대인들, 예수님에 대해서 공격하는 인사들에게 분명히 건장한 신체가 있잖아요? 그 신체가 우르르 몰려와서 예수님의 조그만 신체를 낭떠러지까지 밀어붙였습니다. 밀어붙일 때 예수님을 해코지하는 자들은 분명히 확신했어요. ‘예수 당신 이제 죽었어. 낭떠러지에서 떨어져서 죽었어. 당신은 중력을 이길 수 없을 거야.’

그렇게 밀었는데 예수님께서 자기를 밀쳐 내리치고자 하는 신체를 뚫고 통과해 버리는 거예요. 무슨 그런 신체가 다 있어요? 신기하지 않습니까? 아담의 똑같은 신체인데 신체가 신체를 뚫고 지나갈 수 있겠어요? 요한복음 7장 30절,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잡고자 해도 잡지를 못했어요. 요한복음 8장 59절에 보면,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예수님께서 뭔가…, 10장 39절에 보면, “저희가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손을 잡았는데, 예수님의 몸을 체포하려는데 잡히질 않는 거예요.

주의 몸에서 어떤 괴력이 나오는 건가요? 이것은 뭘 보여주느냐 하면,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신체를 갖고 왔지만 예수님은 믿음이 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 실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의 몸으로 보여줘요. 인간은 나타난 게 전부예요. 눈에 보이는 게 전부예요. 거울에 비친 신체, 그 신체를 가진 내 쪽에서 내가 해석하는 이해 그게 전부에요.

그러나 주님은 실상의 나라에서 왔기 때문에 예수님의 자기 신체에 대해서 실상 쪽에서 오는 믿음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내 신체를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그런 이해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주님을 낭떠러지로 밀어붙였는데 주님은 “좀 밀어보려고 네가 용쓰고 있다. 날 밀어보려는 육체 사이로 내가 지나갈게.” 그들의 미는 것이 실패로 끝났습니다.

똑같은 신체인데 다른 신체처럼 왜 그렇게 연결되는가? 예수님의 신체는 특수한 신체인데요, 나중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할 수 있는 신체입니다. 그래서 부활하고 난 뒤에 요한복음 20장 17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 신체를 자기와 동일한 신체인 줄 알고 만지려고 했어요.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만지지 마라. 네가 만질 수 있는 신체가 아니다.” 예수님의 신체는 바로 실상을 모르고 나타난 것이 전부라고 여기는 인간에게는 이중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성령을 받을 때 성령에 의해서 그 이중성이 예수님의 신체 안에서 계속 유지되고 있었던 거예요. 왜 유지시키는가? 예수님은 스타트라인, 믿음이 있는 실상에 들어가야 될 신체의 시작을 예수님이 보여주시고, 실상에서 받아들이는 신체의 도착점임을 예수님의 도착 지점으로 마감시켰어요.

그러면 믿음의 증인들은 뭐냐? 믿음의 증인들은 우리와 똑같은 신체를 가지고 있는데 똑같은 신체에 예수님의 생명이 통과하는 그 통과 과정을 구약의 증인들이 미리 앞당겨서 자기 신체로 보여줬던 겁니다. 오늘날 성도의 신체는 뭐냐? 이미 도착된 우리의 신체가 이중성을 가지고 ‘도대체 우리는 어떤 신체에서 빠져나와서 천국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신체로 마감되었는가? 이미 하나님의 구원 작업이 이 신체를 가지고 어떻게 종결되었는가?’ 그걸 보여주는 증인인 거예요.

구약에서 이어진 하나님의 신체의 사용은 구약에서는 성신이 하고, 신약에서는 성령이 하십니다. 차이가 있어요. 성신이 하는 일과 성령이 하는 일이 차이가 있습니다. 성신이 하는 일은 구약의 증인들, 선배 신앙인들 그들의 신체를 사용하시되 증인으로서 마지막 예수님과의 만남까지만 성신께서 계속 이끌어 주신 거예요.

성신께서 이끌어 줄 때에 그들의 육체적인 활용법은…, 아까 제가 말한대로 인간의 신체성이라고 하는 것의 출발점이 뭐냐? 내 신체만 믿을만해요. 내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야 되고요, 하여튼 내 신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고 그게 전부에요. 구약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중성이 아니고 내 신체는 내 신체로 끝! 그게 전부, 단일성이에요.

그 단일성에 하나님의 믿음이 오니까 그 단일성만 있는 신체에 하나님의 성신의 작업에 의해서 이중성적인 요소가 파급돼요. 구약의 성도들도 원래 내 신체의 모습은 밥 먹고 사는 게 전부예요. 이 땅에서 편안하게 사는 게 전부고. 그걸 어렵게 이야기해서 내 신체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 속의 내 신체, 끝! 그게 전부에요.

그게 전부인데 이 시간과 공간에서 내 몸 하나만 살면 된다고 하는 나를 성신께서 어떻게 인도하느냐, 믿음께서 어떻게 하느냐? 그걸 못 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걸 틀어지게 만든 겁니다. 그들의 신체가 있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모세는 애굽에서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살면 돼요. 자기 몸 편하다고요.

그런데 하나님의 믿음이 그걸 못 하게 했어요. 바로의 공주의 아들 됨을 거절하고 광야에서 고생고생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로 이끌기 위해서 한 거예요. 장차 예수님한테 이끌기 위해서. 결국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앞당겨 증인 노릇하도록 주께서는 그들의 신체성을 사용하신 거예요.

그 이유는 뭐냐? 예수님의 신체성인데요, 인간은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음을 보여주는 신체와,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신체가 예수님의 신체 이중성 속에 둘 다 들어있거든요. 내 몸밖에 모르는 인간이 자기 몸을 버리고 자기 몸을 어떻게 조작하든지, 어떻게 노력하든지 실상의 나라에 못 들어갑니다. 갈 수가 없어요.

그게 누가복음 4장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4장 4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이 떡이 필요합니다. 인간이 기존에 아는 내 신체는 떡으로 사는 거예요. 이건 믿고 자시고 할 거 없이 당연한 겁니다. 지극히 당연한 거예요. 배고프면 먹어야 될 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사는 게 아니에요. 그게 사는 게 아니랍니다. 그건 죽음이랍니다. 무슨 근거에서 그렇게 하는가? 에덴동산 안에 있으면 그것은 사는 거고요. 에덴동산 밖에 나가면 자기가 아무리 떵떵거리며 배부르게 살아도 그건 죽은 거예요. 이게 실상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미 에덴동산을 떠난 신체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이 대지, 이 자연 세계가 전부인 줄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 자연 세계가 전부인 상태에서 중요한 것은 내 신체가 중요하니까 ‘내 신체를 위해서 열심히 농사짓고 사는 거 그게 뭐가 나쁘냐? 이게 뭐가 잘못됐냐?’ 하는 거예요.

아담도 마찬가지고 가인, 아벨도 다 마찬가지예요. 모든 인간이 출발을 다 그렇게 하는 거예요. 내 몸 하나 살기 위해서만 챙기면 인생 성공한 것이라고 여기는 내가 만든 이 범주, 범위, 프레임, 이 프레임 안에 내가 요청하지 않은 소식이 구약의 성도들 속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음이라는 관계로서 그들에게 스며들어온 거예요. 이게 구약성경의 전부 다입니다, 구약 성경 전부 다예요.

모세가 그냥 양치고 있으면 돼요. 양치면 돈 생기죠? 돈 생기면 신체 하나 밥 먹고 살죠.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네 인생, 그게 인생 아닙니까? 양치는 이유가 뭡니까? 양하고 놀기 위해서 합니까? 내 몸뚱아리 밥 먹고 살기 위해서 하잖아요. 그런데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게 아니다. 말씀으로 산다.’ 그래서 말씀 듣죠. 말씀 들으면 그게 생명입니까? 아니죠. 지금 기존의 단일적인 신체 가지고 말씀을 먹는다고 해서 그게 사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생각하는 ‘나’라는 범주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갇혀 있기 때문에 말씀이 오게 되면 말씀은 내가 예상 못한 다른 범주에서 내 신체의 모든 챙기는 것 자체가 무색할 정도로, ‘내 신체를 내가 왜 자꾸 챙기지?’ 챙기는 그것이 이상할 정도로 낯선 게 들어와야 해요. 그게 떨기나무였잖아요. “모세야, 신발 벗어라.”(출 3:4-5)

이게 모세 아이디어에서 나온 게 아닙니다, 이 사태가. 모세는 그냥 양치고 있었어요. “신발 벗어. 여기는 거룩한 곳이야”(출 3:5). 모세는 신발을 벗을 생각도 못 하고 ‘뭐지? 떨기나무가 타는데, 불은 붙었는데 왜 재가 안 되지?’ 이런 당황스러움이 있죠. 이게 뭐냐 하면 내가 평소에 내 몸뚱아리 지키겠다는 그 범위, 그 범위 바깥의 요소가 차고 들어옴으로써 내가 내 육신을 위한 범위 자체가 무너지고 붕괴되는 순간입니다. 그게 바로 믿음의 사람들이었어요.

말씀으로 산다고 해서, 성경 공부한다고 해서 사는 게 아닙니다. 성신과 성령의 차이점은요, 성령은 예수님한테 나오고 성신은 아버지로부터 나온 거예요. 더 정확하게 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에 오는 게 성령이고, 예수님도 복종해야 될 하나님의 언약에서 나온 신이 성신이에요. 성신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활동하시는 하나님이 성신의 하나님이고,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효력을 주는 하나님이 성령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성신에 의해서 오는데 그 이유가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나옵니다. 요한복음 12장 32절에, “내가 땅에서 들리면…” 그다음에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나님이 택한 백성을 내게로 이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이야기합니다.

최초의 성령 받은 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예수님에 의해서 이제 도착, 스스로 달리기 경주를 예수님이 마감 짓고 결정지은 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도 자기의 신앙생활이 마감되려면 성신을 받으면 안 되고 성령을 받아야 돼요. 성신은 예수님이 오기 전까지 하나님의 활동 방식이라면 예수님이 오시고 다 이루고 난 뒤에, 도착하고 난 뒤에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3) 하는 점에서 성령이 오시는 겁니다.

요한복음 13장 36절에서 베드로가 예수님 보고 이런 질문을 했어요.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이 질문이 대단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뭐로 보느냐? 어떤 방향, 베드로가 그때 그걸 느꼈는지 안 느꼈는지 나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질문 자체가 중요한 이유가, 예수님에 대해서 ‘같이 삽시다.’ 쪽으로 강조한 것이었을까?

그게 아니면 예수님이 떠난다고 하니까 ‘어디로 떠나든지 주와 함께 있으면 저는 족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어디로 떠나는지 저한테 말씀해 주시면 저도 예수님과 떠날 준비에 합세하겠습니다.’ 그런 뜻에서 베드로가 아마 그런 이야기를 했을 거예요.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거기에 답변이 요한복음 14장에 있습니다.

14장 3절에 보면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그다음에 있는 말씀이 중요하죠.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그렇다면 베드로부터 해서 모든 앞에 있는 구약 성도들은 달리기를 하고 있었던 거예요.

어떤 달리기? 기존의 내 몸만 편하면 된다는 이 육체에 이질적인 것, 내가 생각하는 육체 바깥의 다른 요소가 나에게 쳐들어와서 ‘내 몸만 편하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나를 가만두지 아니하고 성신께서, 믿음께서 오셔가지고 나로 하여금 예수님과 상봉하게 만드는 그 지점까지 달리기를 시킨 거예요. 그게 신체의 이중성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제부터 알아야 될 것은 ‘그 이중성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가?’ 그걸 이제 알면 되겠죠. 제가 아까 ‘우리의 몸은 그냥 밥만 축내고 내 몸만 편하면 된다.’ 이렇게 간단하게 이야기했지만 성경 말씀에 의하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요. ‘왜 사느냐?’ 하는 그 이유에 대해서 마태복음 4장에도 나오고,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아요.

누가복음 4장 1-2절에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라고 했어요. 인간들은 본인을 생각할 때 ‘나는 내 육체만 편안하고 배만 부르고 돈만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는데 뭘 빠뜨렸느냐? 그게 자기중심주의거든요.

자기 안에 내가 들어있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들어있는 게 아니고 귀신이 들어있었던 거예요. 마귀가 들어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의 육신에 대해서, 신체성에 대해서 제대로 몰라요. 신체성을 누가 부여잡고 있다는 사실을 마귀 때문에 모르고 내 신체는 내 것이라고 여기면서 ‘그냥 밥해 먹고 살지. 나 편하면 최고다.’ 이런 식으로 왔던 겁니다. 그걸 그동안 몰랐죠.

왜 몰랐느냐 하면, 예수님이 오셔서 악령한테 시험을 받기 전까지는 이 세상이 악령에 의해 지배받는다는 사실을 어느 누구도 몰랐습니다. 알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서 다시 처음부터, 창세기부터로 돌아가는 겁니다. 선악 체계에 준해서 우리의 신체가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이 늘 유지되어야 된다는 것을 강요당한 채 활용되는 신체로 살아왔던 겁니다.

제가 병원에 가니까 어떤 특별한 방이 하나 있어요. 그 방이 ‘집중치료실’이라고 되어 있어요. 뭐 하는 방인지 이름 보면 딱 알죠? 집중해서 치료하는 방, 아마 비싼 장비들이 설치되어 있는 방, 소아과에 보면 그런 게 많잖아요, 어린아이를 집중으로 치료하는 것.

하나님 보시기에 이 세상은, 악마가 인간을 선악 체계로 굳히기 위해서 인간의 신체를 집중 강화하는 그곳, 그 방입니다. 선악 체계에 완전히 강화시켜 몰입하게 만드는 거예요. 우리는 선악 체계고 뭐고 관심 없어요. 내 몸만 편하면 되고 배부르면 그만이니까, 잠 오면 자면 그만이니까 그게 전부에요.

그런데 이걸 어떻게 아느냐? 선악 체계를 무산시키고 생명 집중치료실을 만든 분이 누구냐? 예수님이에요. 악마는 선악 체계를 가지고 ‘선하면 천국 간다.’ 이렇게 집중적으로 가르쳤어요. ‘착하면 천국 가고 악하면 지옥 간다.’라고 가르쳤어요, 집중적으로. 집중적으로 그렇게 가르쳤어요.

그러니까 인간의 신체들은 분명히 돈 있고, 몸도 건강한데 걱정 근심이 떠날 날이 없어요. 그리고 ‘왜 샘솟듯이 걱정이 내 육체에서 올라오는지’ 이유도 몰라요. 그래서 조금만 우리 몸이 아프다, 이러면 막 하나님께 대놓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이게 뭐냐? 우리가 신체를 가지고 사는 것을 어떤 특권 권리처럼 알도록 마귀가 양육시켜 왔어요.

마땅히 살아야 될 게 나인 줄 알고 있어요. 마귀가 그렇게 시켰어요. 나는 아프면 안 되고요, 죽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프면 안 되고 죽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하는 거예요. 아프면 안 되고 죽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 자연의 현상이 우리를 덥게 만들고, 오늘은 비가 왔지만, 또 춥게도 만들고 하니까 짜증이 훅 올라오는 겁니다.

‘하나님이면 하나님이지 나를 왜 이렇게 불쾌하게 만드는가, 내 컨디션을 안 좋게 만드는가?’ 그래서 사람들 편하게 만들면 제일 먼저 나오는 대화가 뭔지 알아요? “오늘 날씨 어떻습니까?” 이런 거죠. 날씨를 왜 물어요? 날씨를 묻는 것은 자연에 대해서 묻는 거고, 자연에 대해 묻는다는 것은 관심사가 ‘적절한 자연은 내 신체를 적절히 편하게 해준다.’라는 그것이 우리 마음 안에 굳어져 있다는 뜻이지요.

그렇게 ‘내 몸이 편해야 된다는 것, 내가 이 땅에 사는 것은 누구한테도 빼앗길 필요 없는 내 고유의 권리고 자격이고 권한’이라고 마귀가 그렇게 단단히 교육을 잘 시켜놨어요. 그런데 마태복음 9장 20-21절에 보면 이런 말이 나와요.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12년 동안 피 흘리고 있는 여자가, 그 병든 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옷 가를 만진다는 것은 예수님의 신체성에 접촉이 된 거예요. 접촉을 하니까 그 여자가 병이 나았어요. 12년 동안 낫지 않았던 병이 예수님의 옷 가를 만지고서 나았습니다.

몸도 아니에요, 그냥 옷이에요. 예수님의 옷도 아니고 옷 가, 옷 끄트머리를 잡았더니만 병이 나았습니다. 그것은 뭐냐? 이 여인에게 어떤 믿음이 있었느냐? 자기 신체를 포기하고 예수님의 신체로 옮김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겁니다. 내 신체를 포기했다는 말은, 내가 나를 이해하는 그 범주 자체를 예수님이 등장함으로써 기꺼이 파괴시켰다는 거예요.

내 신체를 포기하고 주님의 신체에 합류하는 것, 이것을 주님께서는 의미 있게 봤어요.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성령이 없는 신체고, 예수님 본인은 성령이 있는 신체에요. 달리 이야기해서 인간은 아직 도착 지점에 도달을 안 하고, 영원한 천국의 도착 지점이라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신체는 예수님 신체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본인을 포기하지 아니하면 주님의 신체에 접목이 안 돼요. 같이 결합이 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 신체를 사람마다 다 만져야 하느냐? 구약도 마찬가지고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지만, 예수님 십자가 이전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옷을 만지고 몸을 만짐으로써 자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그 시대에 속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고자 하는 신체는 선악 체계를 돌파하고 뚫고 가는 거예요.

그러나 어떤 인간도 마귀로부터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스스로 악해지려는 위인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총으로 자기 몸을 쏘는 거예요. 어떤 인간이, 내 신체가 유일한 현실이고 믿음의 대상인데 내 신체를 왜 내가 총으로 쏩니까? 살아온 것이 다 허사가 되는데요. 그런 바보 같은 짓을 누가 하겠어요. 살려고 사는 것이지 죽으려고 사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죽으려고 왔던 그 몸의 이중성을 예수님 본인은 받아들여요. 그게 아버지의 계획이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시려면 그냥 몸을 만지는 거 가지고 안 되고요, 다 떨어내고 예수님 자신의 몸으로 인간이 돌파할 수 없는 선악 체계의 마지막 지점, 바로 죄인인데도 불구하고 천국 가는 그 유일한 통로에 예수님께서 먼저 거기에 터치를 하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모든 죄를 짊어지고 저주받아요. 저주로 유일하게 나서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고, 아버지의 저주를 옴팍 받음으로써 그게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문이 되는 겁니다. 거기에 베드로가 따라옵니까, 누가 따라옵니까? 인간은 남이 저주받는 게 고소하지만 본인이 저주받는 것은 기겁할 일이에요.

왜? 본인은 선악 체계기 때문에 아무리 자기가 실수한 게 많아도 근본적으로 나는 착해요. 인간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이 땅에서 살 권리가 있고 살 필요가 있는 이유는 착해요. 누가? 내가, 내가 착해요. 깡패들치고 나 못됐다는 사람들 아무도 없어요. 나 어릴 때부터 양심은 착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깡패들이에요. 그래서 변명들이 늘어지잖아요.

인간은 자기의 착함을 지옥에 가도 못 버려요. 지옥 가도 자기 착함을 못 버립니다. 이건 자기 신체를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거예요. 선악 체계와 더불어 있는 자기 신체, 선악 체계의 집중 치료 대상이 되었던 그 신체를, 그걸 포기할 수가 없어요.

왜? 선악 체계에서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기 때문에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면 죽음인데 그 죽음의 개념을 어떤 인간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나도 이만큼 살았으면 장하잖아요. 왜 이걸 죽이려고 하십니까? 그건 하나님 잘못입니다. 살려고 애쓰는 걸 좀 봐주지.’

에덴동산에 살지도 않으면서 자기가 살았다고 우기는 이 고집, 이것은 바로 악마의 집중 치료 때문에 생긴 효과예요. 구약 성도도 그렇고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똑같아요. 똑같은데 구약 성도들에게 본인의 예상 밖 다른 요소가 끼어드니까 그들은 선악 체계로 버티다 버티다 버티지를 못해서 결국은 이끌림을 당하는데 그 이끌림을 당한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내 모든 백성을 내 쪽으로 이끌어내겠다.’라는 그 이끌림입니다. 그러니까 구약 성도들은 ‘내가 얼마나 부자냐, 착하냐, 겸손하냐?’가 문제가 아니고 방향만 보여주는 겁니다. 나는 주님께로만 간다는 방향만 보여줬던 그들을 구약성경에서 ‘증인’이라고 하는 겁니다, 증인. 방향만 보여주는 거예요.

방향도 보여주고 부자도 되고? 아니에요! 부자 같은 것은 다 떼고, 인간성 좋다는 그런 것도 다 떼고 방향만 보여주는 겁니다. 화살표만 되어서 보여줍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창세기 7장 21-24절에 노아 홍수 이야기가 나오지요.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육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육지에 있어 코로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은 다 죽었더라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 물이 일백 오십일을 땅에 창일하였더라.”

노아 홍수를 묘사하는 대목입니다. 이 말은 뭐냐? 여러분, 방주가 어떻게 생겼습니까? 방주는 그저 동그란 햄버거 빵처럼 생겼겠지요. 물에 뜨는 햄버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방주의 그 출발점, 시작점부터 이 세상 끝 날까지 길쭉한 소시지로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시간과 공간에 예수님 오셔서 십자가 질 때까지 방주의 원칙을 그대로 밀어붙이는 겁니다. 모든 인간을 죽은 인간으로 보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생각하는 시간과 공간은 자기 육체를 살리기 위한 시간과 공간이라면 거기에 침투하는 하나님의 실상, 하나님의 말씀의 실상은 ‘이미 너는 심판 아래 있다’라는 것을 알려줘 버리지요. ‘모든 것은 물에 잠겼다’라는 말은 ‘모든 사람이 저주 아래 잠겼다’라는 사실인데 마귀는 그걸 인간에게 안 가르쳐 줘요.

“네가 착하면 나중에 천국 가는 거야. 무조건 착해. 악한 일 했어? 그러면 빨리 헌금을 더 하든지 해서 보상하고 빨리 반성하면 되는 거야. 너는 계속 착해야 하고 끝까지 착해야 해.” 선악 체계의 집중치료실처럼 되어 있는 마귀로 덮인 세상, 여기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생명이 그냥 ‘피’라는 모습으로 침투합니다.

생명은 그 짐승의 피, 그 피만 주어지는데 거기서 노아로부터 시작하는 그 생명 노선이 아브라함으로 이어지고 결국 마지막에 신약의 예수님까지 이어집니다. 그게 언약노선이지요. 시공간 자체가 예수님이 미리 설정한 약속의 시공간과 내 몸뚱이가 밥 먹고 살아야 하는 그 시공간이 완전히 달라요.

구약 성도들이 약속이 왔을 때 그들의 선악 체계를 가지고 그냥 곱게 약속을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버틸 대로 버텨요. 버틸 대로 버팁니다. 노아도 그렇고, 모세도 그렇고요. 우리가 히브리서 11장을 죽 봤잖아요. 착해서 구원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그 착하다는 것을 기본으로 해서 버티기에 들어갑니다.

‘하나님, 저 착하잖아요. 이런 고생은 저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제가 착한데 왜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 이런 버티기가 먼저 나옵니다. 그리고 버티다 못해 간절함이 나오지요. 간절함이 있어요. ‘하나님, 좀 살려주세요. 너무 힘듭니다.’ 여러분, 간절히 구하면 귀신이 씌입니다.

왜 그런가? 간절함은 내 육신만 챙기면 그만이라는 것, 마귀로부터 집중치료된 그 성깔이 연속해서 간절함이 돼요. ‘남은 모르겠지만 저는 살려주세요. 남들은 모르겠고 우리 집구석은 제발 평안하게 해주세요.’ 이게 간절함입니다. 귀신이 좋~다고 ‘내가 도와줄게!’ 귀신이 에프터서비스 잘합니다.

‘내가 치료 해줄까? 아하, 3년 전에 네가 문제가 있었네. 나쁜 짓을 했네? 그거 회개해라. 그리고 헌금 듬뿍하고, 봉사하면 치유된다.’ 이게 집중 치료에요. 선악에 의한 것, 악을 선으로 집중치료하는 그 방법인데 귀신이 씌이면 그렇게 돼요. 그런데 신약에는 다 마감이 되었잖아요. 마감이 되고 난 뒤에 이제 신약의 성도한테는 성령이 와요. 성신은 안 와요. 성령이 오신다고요.

성령이 오시면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너는 너밖에 모르지?” “어떻게 알았어요?” “너는 네 몸만 편하고 네 몸만 챙기면 그만이지?” “어떻게 아셨어요?” “내가 그거 이용해서 내가 통과한 생명을 네 인생을 가지고 반복해서 통과시킬 거야.”

나만 챙기는 이것이 누가 보기에도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그것을 성령이 와서 뚫어버려요. 생명이 와서 뚫어버린다고요. 뚫어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이제는 마귀가 만든 죄의 육체만 쥐고 있는 내 모습이 노골적으로 다 들춰지지요. 들춰지면서 다른 신체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이 신체를 활용해 주시는 주님께 감사가 됩니다.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드러내는 데 활용해 주시고 재료로 사용해 주시는 데 대해서 무한한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아, 이 더러운 것도 다 쓸모가 있구나. 이 더러운 것도 다 쓰실 데가 있구나.’ 성경을 통해서 그 결과를 성경 본문과 맞춰보라고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거예요. 성경은 그거 보고 믿고 구원받으라는 것이 아니고, 이미 구원은 받았는데 네가 어디서 구원을 받았는지 확인해 보라고 이 성경을 주신 겁니다.

그러면 이 시간에 확인해 보지요 뭐. 요한일서 4장 12절입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이 본문, 이거 응용해 보는 거예요.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이 본문입니다. 옛날이라 합시다. 성령 받기 전의 옛날 육신. “나 하나님 보면 믿을게” 요거, 내가 하나님을 직접 만나면 “하나님, 착하게 살겠습니다.” 한다는 거예요. 선악 체계밖에 없으니까요.

내가 하나님을 만나면 착하게 살겠다고 각오해서 천국 가고 싶은데 하나님 쪽에서 잘못이라는 거예요. 왜? ‘하나님 쪽에서 자기를 안 보여줬잖아. 안 보여줬으니까 나는 하나님이 없는 줄 알고 내 맘대로 살았잖아. 하나님을 보여주셨으면 내가 하나님을 잘 믿을 것인데 안 보여주셨으니까 내가 신앙생활을 소홀히 했지.’ 이런 핑계, 이런 핑계를 입 싹 다물게 하는 것이 뭐냐? 요한일서 4장 12절이에요.

“안 보여줘!”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는데 내가 왜 하나님을 믿느냐? 그것은 성령께서 내 육신의 끝자락, 그 마감을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분명히 내 맘속에 알려줬거든요. 말을 이렇게 하니 어려운데 실제로 성경에 나오는대로 하면 이렇습니다.

요한복음 21장 27절에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도마는 “내가 보여주면 믿겠습니다” 할 때 ‘그 보는 것이 너로 하여금 천국을 못 가게 만들기 위해서 네가 보고 만지는 그것으로 악마의 집중 치료는 끝났다.’라는 거예요.

네가 봄으로 인하여 내 손에 못이 박히고 창에 찔리고 피를 흘린 거예요. 이것은 보고 믿겠다는 모든 인간을 거기서 중지시키고 그걸 다시 지옥으로 돌려보내는 그 마지막 경계선을 주께서 십자가로 막아놨다는 말이지요, 십자가로!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진 이유가 뭐냐? 유대인들이 이방 민족을 보면서 ‘너희와 우리가 다르다’라는 그 경계선을 주께서 동일한 육체로 보고 허물어버리니까 거기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거예요.

“육체는 다 똑같아. 보고 믿는 것은 다 똑같아. 모조리 선악 체계, 자기 몸뚱이나 챙기는 것은 어떤 인간도 똑같아. 그 똑같은 경계 너머에서 생명이 찾아오지 않으면 너는 구원 없다.”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요 13:36). “네가 갈 수 없는 곳으로 간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다시 올게”(요 14:3).

그 말은 성령이 오셔서, 우리는 거기에 갈 권리도 없고 능력도 안 되고, 그럴 필요도 없는 곳에 주께서 데려가시는 거예요. 왜, 왜 그래야 합니까? 나에게 먼저 찾아오신 분이 거기서 기다리기 때문에 그래요. 거기서 기다리거든요. 무엇으로 기다리십니까? ‘죄 사함’으로 기다리지요, 죄 사함으로!

그게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지금 선배들은 싱글벙글 다 도착했어요. 뒤따라오는 우리보고 이렇게 합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이게 뭐냐? 죄 사함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얽매인 것이 없지요. 그 죄 사함의 내용이 뭐냐? 내 육체를 위해서 내가 사는 그것은 육체 안에 생명이 있다는 이 육체의 이중성 때문에 기존의 육체는 탈락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는 것이요 생명 작업이에요. 섭섭하게 여기지 마세요. 우리 육신이 날아가는 것을 섭섭하게 여기면 안 된다고요. 눈에 보이는 것이 떨어지면서 예수님의 육체에 합류가 되는 겁니다. 주님은 바빠요, 지금. 우리 육신 떨어내기 위해서. 우리는 매일 같이 얼굴에 찍어 바르면서 화장하지만 찍어 바른 그것 주께서 다 소용없게 만들어요.

이 더러운 고정성에서 생명의 방향성을 끄집어내는, 그걸 뚫고 나가는 작업, 우리는 이것을 못 합니다. 그러나 성신이 아니고, 성령이 오게 되면 육신의 이 고정에서 “너는 방향이야. 너는 천국을 보여주는 하나의 나침반이야.” 그것을 끄집어내 주시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여러분 속에 이미 들어온 성령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이루심의 증인 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람이 하는 일과 우리 주님이 하는 일이 이처럼 큰 차이가 있음을 이제는 알았습니다. ‘열심히 하겠다, 하겠다…’라고 하지만 그것은 마귀가 집중 다루고 있는 대상이 될 뿐이었음을 이제는 알았사오니 주여, 마귀에게 붙잡힌 우리를 주께서 놀랍게도 생명을 끄집어내는 재료로 사용해 주시는 이 은혜에 모든 일에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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