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역의 분량
2025년 9월 21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2:4
12: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죄에 대한 언급도 또한 ‘믿음’이 있는 자에게만 해당됩니다. ‘믿음’이란 허상인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실상 되시는 주님으로 인해 허상인 인간의 육을 통해 나타나는 겁니다. 즉 ‘믿음’이 있는 자가 이해하는 ‘죄’와 ‘믿음’이 없는 자의 ‘죄’가 다르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은 이미 ‘죄’를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죄’개념을 가지고 자신을 온전한 자아로 만들어 건져내겠다는 겁니다. 이 사회에서는 남들로부터 싫은 소리 안 듣고 하나님에게도 인정받아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살겠다는 노림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8:9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모든 인간이 죄 아래에 있다는 점은 이미 실제로 확정된 현실입니다. ‘선언’이 바로 그 뜻입니다. 결정나 버린 사실입니다.
따라서 죄 아래 눌려 있으면서 ‘죄와 피 터지게 싸워서 구원을 얻겠다는 것’도 또한 죄의실질적인 모습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종교적으로 안정성을 얻고자 노력해도 결국 실패로 끝납니다. 인간이 살아 있는 게 아닙니다. 인간 안에 죄가 살아있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평생 ‘인간’이 아니라 ‘육’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입니다. 이는 결코 하늘로 도약될 수 있는 대상이다는 말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6-8)
즉 육은 육 자체에서 도약이 될 수 없습니다. 영적 세계로 이동이 될 수 없습니다. 육에서 육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말씀이나 약속도 다 허사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효력을 나타내는 자리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 저주받은 바로 그 자리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지심은 ‘복역의 기간’을 완료하셨다는 말입니다. “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사 40:2)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죄를 굳이 묻지 아니하시고 대신 복역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감당하신 복역의 값 치르심의 분량이 얼마나 엄청나고 대단한지에 관심과 초점을 모아져야 합니다. 싸움이란 이 싸움을 말합니다. 내가 세운 기준으로 나를 구원할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께서 복역하신 그 분량으로 구원이 되는 방식을 두고 싸우게 되는 싸움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만들어낸 기준을 끝내 놓지 못합니다. 이게 죄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처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 6:9-10)
만약에 이런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어떤 사람들이 살아 생전에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과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다고 칩시다. 그런데 죽어보니 자신이 지옥에 와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서 따진다고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을 순수하게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으로 요구하는 것에 신뢰성 있게 따랐습니다. 그런 저를 지옥에서 영원히 살게 하십니까”라고 말입니다.
어느 회사에 남자 상사가 신입으로 들어온 여자 직원에 스토킹합니다. 제발 만나 달라고 요청합니다. 하루는 직장 상사가 여자 직원에서 묻습니다. “이번 토요일날 집에 있습니까?” 여자 직원은 그 남자 상사가 싫어서 변명합니다. “집안 성묘 때문에 집에 없고 출타합니다.”
그런데 그날 상사가 직접 여 직원집에 와서 여자가 그냥 집안에 하루 종일 있는 것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따집니다. “왜 집에 있으면서 집에 없다고 나에게 거짓말했습니까? 나에게 사과하세요!‘라고 말입니다. 과연 이것이 사과할 문제입니까? 자신이 지옥에 왔다고 해서 하나님에게 따지고 사과를 요청할 문제입니까? 나는 하나님을 신뢰했지만 하나님쪽에서 나에게 거짓말했다고 문제삼을 일일까요?
핵심은 이것입니다. 인간에게 자신이 자기를 관리할 기준을 따로 갖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인간은 그저 ’말씀의 외피‘일 뿐입니다. 지나가는 관광객이 요리집 고기 냄새 맡았다고 돈을 달라는 요리사에게, 자신의 주머니 안에 있는 동전 딸그락 소리를 들려주는 것으로 돈을 지불하듯이, 인간은 실체가 아니라 허상입니다.
인간은 자기 고유의 기준이 없어야 될 이유는 인간은 처음부터 죽어서 태어나서 살아 있을 동안에 내내 죽어있다가 죽을 때 비로소 말씀의 본때를 맛보게 됩니다. 그런 인간이 자신이 살아있음을 고집부리기 위해 도리어 하나님을 개패듯이 죽여서 그 ‘죽은 하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게 됩니다.
그래야 본인이 여전히 산 사람으로 행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은 육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이 세상에 말씀으로 촘촘히 지뢰를 묻어놓았습니다. 성도는 복음으로 인도받으면서 수시로 세상 살이 동안에 지뢰를 밟아 육의 가치나 의미가 작살나게 합니다.
왜냐하면 육은 도약될 수 없고 성령 안에서만 이미 도약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 1:13) 이처럼 죄와 싸운다는 것은 우리 안에서 말씀이 친히 우리를 외피(컵데기)로 사용하여 말씀이 말씀대로 드러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저 명랑하게 하나님께서 시킨대로 사세요.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는 인간이 살아난 것이 아니라 말씀이 살아난 겁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은 본인이 구원된 것이 아니라 본인 안에 영원한 우물이 실제화된 겁니다.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드러나는 이 모든 일에 대해서 늘 감사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죽음이 더는 부담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85강-히브리서 12장 4절(복역의 분량) 250921-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2장 4절입니다.
히브리서 12: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한 절만 봤습니다. 여기 싸운다는 말이 나오죠.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라고 해서 다그치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우리입장에서는, 싸운다고 하니까 마음의 짐이 되죠. ‘싸우지 않고 구원받을 길은 없는가?’ 이런 계산이 막 올라오죠.
그런데 ‘죄와 싸워야 된다’라고 하니까 ‘왜 싸워야 하는데?’ 또는 ‘싸운다면 어떻게 싸워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먼저 아셔야 할 것은, 죄와 싸운다고 할 때 그 ‘죄’ 죄가 뭐냐? “너희가 죄와 싸우되” 할 때 그 적을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 죄가 뭐냐, 하는 겁니다.
죄라는 것, 우리가 이 땅에 있으면서 죄라는 것은 알 길이 없습니다. 죄를 알 길이 없는 이유는 로마서 3장 9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선언’이라고 하는 것은 손 쓸 수 있다는 뜻이 아니에요. 선언했다는 말은 ‘네가 어떻게 수정하거나 변경할 입장이 안 된다’라는 겁니다. ‘죄 아래 있다’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네가 평소에 생각하는 그 고정관념 전체가 다 죄’라는 겁니다.
그래서 죄 아래 있으면서 죄가 무엇인지 끄집어내는 자체가 또 죄가 돼요. 죄 아래에 있는 것도 모르고 자기가 좀 안다고 ‘하나님, 이게 죄입니다, 저게 죄입니다…’ 그것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는 엉터리입니다. 그건 죄가 아니에요. 우리는 죄에 대해서 모릅니다. 그냥 하나님의 말씀에 ‘너는 무조건 손댈 수도 없이 죄 아래에 있’는 거예요.
이게 고정관념인데 이 고정관념이 자기가 살아가는 우리의 기준이 된 겁니다. 그래서 초반부터 죄와 싸운다고 할 때 ‘죄가 무엇이냐?’의 개념부터 규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하나의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스토커 이야기입니다. 직장에서 어떤 상사가 신입으로 들어온 아가씨가 마음에 들어서 자꾸 관심을 보입니다.
“김 양, 이번 토요일 시간 있나?” 여자는 관심이 없어요. 없는데 자꾸 치근대는 거예요. “이번 토요일에 성묘하러 가서 집에 없을 겁니다.” 이렇게 했어요. 그러니까 그 상사가 아가씨 집에 가서 확인하는 거예요. 확인해 보니까 집구석에 그냥 있었어요.
그러니까 그 상사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집 앞인데 잠깐 나오세요.” 불러내서 “나는 아가씨가 천사 같아서, 순수하고 순결한 마음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가씨, 그렇게 안 봤는데 나한테 거짓말했잖아. 난 아가씨가 거짓말할 줄 몰랐어. 나한테 사과해요. 당신이 지금 나한테 죄지었잖아. 집에 있을 거면서 왜 집에 없을 것이라고 거짓말했어? 사과하세요.”라고 했을 때 이게 사과 거리입니까? 이게 사과할 일이에요?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우리나라 최초 강해 설교했던 목사님의 테이프를 3년 동안 300개 정도를 들었어요. ‘설교는 이렇게 해야 돼.’ 해서 다들 그 설교를 들었던 그런 목사님이 계세요. 어느 교회의 어느 목사라고 노골적으로 말을 못 해요. ‘남○○○ 박○○ 목사’ 이렇게 누구라고 말은 못 하겠는데 그분이 그런 설교를 했어요.
“한국 교회가 하나님께 뭘 바치고, 하나님께 뭔가 업적과 실적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응답한다고 그렇게 가르치는데요, 여러분,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것을 일체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인으로 만드시고,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여, 구원하소서.’라고 전적으로 매달리고 ‘나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지 우리가 하나님께 봉사하고 섬긴다고 해서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라는 설교를 그 사람이 했어요.
그 설교가 맞습니까? 여러분, 그 설교가 엉터리 설교에요.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 성경대로, 복음이 시킨 대로 예수 피 믿고, 하나님 믿고, 예수 십자가 믿고, 다 했어요. 다 했는데 결국 지옥에 와있어요. 지옥에 와 있을 때 하나님 앞에 우리가 이렇게 따질 수 있느냔 말이죠. “나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었는데 하나님 쪽에서 제게 거짓말하셨잖아요. 하나님, 제게 사과하세요. 나는 하나님을 신뢰했는데 하나님 쪽에서 신뢰를 주지 않았잖아요. 하나님이 제게 거짓말했어요. 제게 사과하세요.”
이게 성립됩니까? 우리 교회 한 40년 다녔는데 죽고 보니 지옥에 와있어요. 그럴 때 “하나님, 성경대로 목사가 시킨 대로 다 했어요. 오직 피만 믿고 죄 사함받으려고 다 했는데 저 지옥에 왜 보내십니까? 나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신뢰했는데 하나님은 날 신뢰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저는 잘못한 게 없는데 하나님 쪽에서 제게 거짓말했어요.” 즉 “아가씨, 분명히 아가씨는 그때 집에 있는데 나보고 거짓말했어요. 나한테 사과하세요.” 그게 성립이 됩니까?
우리가 매달리면 구원해 주십니까? ‘남 무슨 교회, 박 아무개 목사’ 아, 이야기하고 싶어요.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라고 막 이야기하고 싶은데 차마 말은 못 하겠고요, 우리가 간절히 구하면 구원해 주십니까? 그게 우리가 죄 안에 갇혔다는 것을 안 믿는 거예요.
죄 안에 갇힌 인간이 말씀대로, 시키는 대로 믿는다고 해서 구원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에게 있는 죄가 얼마나 지독한지 인간은 본인도 잘 모르고, 그냥 교회 나와서 종교적인 안정성 작업을 하면 내 구원이 얼추 보장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거 실패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성경대로 다 지키고 성경대로 다 믿어봤자 우리 인생은 도약이 안 돼요. 도약이라고 하는 것은 이쪽에 살다가 풀쩍 점프해서 다른 세계에 속하는 건데, 아무리 우리 쪽에서 교회 나와서 찬송을 부르고 뭘 해봐야 점프, 도약 자체가 안 됩니다.
도약이 안 되면 구원은 없어요. 우리 코앞에 다가오는 이 성경 말씀을 달달 외워도 구원이 안 된다는 그 말이죠. 주께서 이미 선언한 것을 우리가 뒤늦게 열심히 행동한다고 해서 그게 바뀌질 않아요. ‘죄 안에 가두어졌느니라, 이미 선언했느니라.’ 선언이 끝난 문제예요. 죄 안에 가둬졌어요.
오늘 본문에서 ‘죄와 싸우라’라고 하는데 지금 죄가 뭔질 우리가 모릅니다. 그리고 당연히 몰라야 되고요. 아까 기도하신 집사님이 “이해 안 된다”라는 말을 했어요. 정확한 말이에요.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이해 안 되어야 해요. 이해가 되면 안 돼요. 이해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자꾸 열심을 내려고 해요. 열심히 믿고, 순결하게 믿고.
지금 직장 남자 상사가 오해한 게 뭐냐? 직장의 신입 아가씨가 자기 보기엔 천사 같고, 순결하고, 마음이 아름답고, 영롱하고, 거짓말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저 아가씨 정도면 집적댈 만하다.’ 싶었는데, 그리고 ‘그 아가씨 입에서 설마 거짓말이 나올까?’ 했는데 집에 있으면서도 성묘 갈 것이라는 그런 말을 했단 말이죠.
그래서 그 상사가 아가씨한테 “당신 나한테 거짓말했잖아. 사과하세요. 당신이 그렇게 음흉한 여자인 줄 몰랐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과하세요. 당신 거짓말했어요.’가 뭐냐? 마치 본인은 거짓과 진리를 구분할 수 있는 그런 안목이 있다고 자부한 것, 그게 바로 자기 죄 아닙니까? 자기 기준이 있었잖아요, 자기 기준이! 자기 기준이 죄인 거예요, 자기 기준이.
하나님의 구원 방식은 이미 처리한 방식이에요. 처리한 방식인데 인간은 자기 기준이 있어서 ‘이 죄인을 구원했기 때문에 내가 바르게 살아서 하나님의 그 처리한 방식에 대해 갚아보겠다’라는 거예요. 이 싸움이에요, 이 싸움. 이 싸움이라고요!
도약이라는 것이 안 되는 이유가, 인간이 자기 쪽에서 자기 방식이 안 죽고 그대로 살아있어요. 살아있으니까 ‘하나님 쪽에서 나에게 이렇게 혜택을 주고 은혜를 줬으니까 내가 가만히 있으면 안 되지. 뭐라도 해야겠지.’ 하고 내세우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행함으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죄인을 원하신다. 그런데 내가 교회 와서 뭐든지 봉사하고 성과 내고 전도하고 하면서, ‘하나님이 이거 받으시고 날 구원하시리라’라고 생각했는데 성경 보니까 그런 건 안 받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사랑을 해서 죄인을 받아 구원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그냥 구원하는 걸 알았으니까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하나님, 전 죄인입니다. 그냥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매달리면 하나님이 구원한다”라는 것이 그 박 목사의 주장이에요.
그건 사기입니다. 엉터리에요. 그건 성령 안 받은 사람의 고백이에요. 매달려도 구원 안 됩니다. 안 매달려도 구원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고요. ‘내 쪽에서 어떻게 하면 됩니까?’가 여전히 자기 안에 살아있는 거예요. 그 이유가 이사야 40장 2절에 보면 나옵니다. 이사야 40장 2절에 보면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찌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복역의 때가 끝났고.” 이 ‘복역(服役)’이라는 것은 교도소 안에 갇혀있는 걸 복역이라고 하잖아요. 죄의 값을 치르는 그 기간이 복역의 기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서 죄짓지도 않았는데 자기 백성의 죄를 위해 예수님이 대신 복역을 하게 했어요. 예수님이 이 세상이라는 감옥에서 교도소 생활을 하신 거예요. 복역의 때.
그러면 누가 지금 죄의 처벌을 받느냐 하면, 예수님이 죄의 처벌을 받는 거예요. 다른 사람은 자기가 죄 안에 있다는 것을 몰라요.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렇게 해도 죄가 되고, 저렇게 해도 죄가 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아요. 나쁜 짓을 할 때만 죄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나쁜 생각, 나쁜 짓 이거 할 때만 죄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모든 인간이 죄 안에 이미 가둬졌다고 선언된 입장에서는, 인간이 자기 죄를 알고 죄를 안 상태에서 죄 사함받겠다고 나올 수 있는 그 자체가, 그런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어요. ‘나는 죄인이니까 이제부터 매달리고 부르짖으면 된다.’ 이런 생각 자체가 죄에요. 인간에겐 가능성이 일체 없습니다. 인간은 이해하는 대로만 행동하지, 이해되지 않는 행동은 인간에게 나오지 않아요.
그런데 주님께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의논도 없이 일방적으로 복역을 했잖아요. 복역을 하고 난 뒤 그다음에 성령을 통해서 “내가 너 대신 복역을 했다. 그래서 죗값을 치렀다.” 이렇게 나오면 내 죄가 얼마나 지독한지 여기에 관심 두지 말고, 주님이 치렀던 그 복역의 값, 죗값 치른 그 죄 사함의 값이 얼마나 깊으냐, 얼마나 넓으냐, 그 분량이 얼마나 되느냐의 거기에만 관심 두면 되는 거예요.
도대체 주님께서 복역한 것이, 그 분량이 어느 정도로 어마어마하냐는 거예요. 관심사가 예수님이 복역한 데에 관심을 두는 거예요. ‘나 죄 안 지을래.’ 지금 이런 데 관심 두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아까 제가 예를 들었던 것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다 하고 믿으라는 대로 다 믿었는데 지옥에 와 있다’라는 말이에요.
지옥에 와 있으면서 한번 따져보는 거예요. “나는 예수님을 믿었는데, 십자가 피를 믿으라고 해서 믿었는데 왜 저를 지옥에 보내십니까? 나는 순수한데 주님이 나한테 신뢰를 주지 않았잖아요. 주님이 거짓말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지옥 가 있는 나에게 ‘아, 내가 일을 잘못했네. 미안하다. 뭐 행정 착오인가?’ 하고 나한테 사과하세요.”라고 그런 말을 한다는 자체가 예수님께서 복역을 했다는 이 사실을 완전히 누락한 거예요.
인간들이 지옥 가서 하나님께 따질 줄 아시고 이사야 6장 9-10절 이미 하나님께서 이런 예언을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어요.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예수님만 복역을 하고, 그 복역의 값으로 자기 백성을 건진다’라는 이 진리를 위해 먼저 하는 이야기가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하는 그 작전에 나서신 거예요. 그게 바로 말씀이라는 겁니다. 말씀을 전함으로써 그들이 말씀을 들을 때 막히는 사태, 보기는 보아도 막히는 사태에 직면하도록 하라는 겁니다. 주의 말씀을 통해서요.
그들이 성경을 보기는 보는데 볼 때마다 막히고 들을 때마다 이게 안 들려요.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분명히 막혔고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을 듣고 설교를 들으면 그다음부터는 듣는 사람이 설명을 합니다. 마치 뚫린 것처럼, 안 막힌 것처럼 설명을 해요.
그런데 설명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유가, 설명할 때마다 거기서 죄가 솔솔 나옵니다. 그동안 몰랐던 죄가 나와요.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죄는 용납해 주십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인생은 용납을 안 해요. 인간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죄 사함받고 난 뒤에 다시금 내 인생 내가 관리하려고 나섭니다. 죄 사함받고 내 인생 건사하려고 하고,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고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죄는 용서하되 네 인생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왜? 내 인생은 그게 죄기 때문에요.
또 하나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이게 쉬운지 어려운 예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사람이 유럽에 여행을 갔어요. 유럽 식당은 바깥에 테이블 빼놓고 영업하니까 음식 냄새가 바깥으로 막 나와요. 고기 굽는 냄새가 너무 좋아서 관광객이 고기 굽는 셰프 앞에서 냄새를 맡았어요.
그럴 때 셰프가 하는 말이 “방금 고기 굽는 냄새 맡았죠?” “예 맡았습니다.” “돈 내세요. 고기 굽는 냄새 맡은 값 내세요.” 그러니까 관광객이 아주 센스가 있어요. “드려야죠.” 하고 자기 주머니에 동전을 가지고 짤랑짤랑, 흔들면서 “방금 내 돈이 내는 소리 들었죠? 됐죠?”
인간은 말씀의 외피(外皮)입니다, 껍데기입니다. 그냥 소리예요, 그냥 냄새입니다. 말씀이 피워내는 냄새에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라’라는 말씀의 외피가 오늘날 우리입니다. 실체가 없어요. 그런데 인간에게 실체가 있어 버리면 그다음부터는 내가 내 인생을 구원시키고자 하는 관리자입장에서 기준이 생겨요.
‘나는 성경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고, 성경 말씀을 어떻게 지켜야 되는지’의 내 기준이 생긴다고요. ‘부르짖을까? 부족합니다, 부족합니다, 이렇게 할까?’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자기 자아가 살아있으면 ‘사람의 행동은 일단 머리로 이해가 되어야 되고, 이해가 된 것은 행동으로 옮긴다.’ 이게 바로 인간의 행동 방식이에요. 내 방식이라니까요, 내 방식!
그런데 하나님의 방식은 예수님의 복역이에요. 이스라엘이 복역한 그것은 취소시키고, 이스라엘이 복역해야 하는 그 말씀을 예수님 자신이 가져와요. 이스라엘 복역으로도 실효성이 없는 그것을 자기가 복역함으로써, 인간은 실효성이 없었는데 예수님이 인간을 대신함으로써 말씀의 실효성이, 그 효과가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약속은 예수님이 아버지께 저주받은 그 자리에 가야 효력이 발생돼요. 예수님의 재림, 우리의 부활, 영원한 천국 생활, 그건 그 자리가 내 자리가 아니고 예수님이 저주받은 자리에 가 있어야 해요.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 복음 진리를 누가 막는지 잘 나온 대목이 열왕기하 5장 7절입니다.
나아만 장군, 지금의 시리아인데 아람 나라의 대단한 장군인데 암 정도가 아니고 문둥병에 걸렸어요. 진물이 나고요, 이건 대책도 없다고 고민하고 있는데 잘 아시다시피 포로 잡혀 왔던 소녀 노예가 조언합니다. “우리나라 가면 용한 선지자가 계시는데 장군님 병은 병도 아닙니다. 고민할 거 뭐 있어요, 그분에게 가서 고치면 되는데”(왕하 5:3)라고 아주 가볍게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이 소녀를 보면서, 2절에 “작은 계집아이”라고 되어 있는데 뭘 느끼느냐 하면요, 신앙생활은 명랑해야 된다는 거예요. 아주 밝고 굉장히 명랑해야 해요. 사실을 사실대로 이야기 하는데 인상 그려가면서 억지로 꾸밀 필요가 없잖아요. 억지, 억지, 그거 짜증 나지요. 그냥 있는 대로 “우리 선지자한테 가면 그거 병도 아니고 다 낫는데?” 아주 싱글벙글 웃으면서 명랑하게 이야기해요, 명랑하게.
“도대체 내 죄를 언제까지 알아야 구원받는 거야?” 이렇게 골치 아프지 않아요. 죽는다는 것이 부담되면 그건 신앙생활 아닙니다. 죄인이, 죄 아래 있는 게 죽어야 마땅한 건데 그게 왜 부담이 되어야 하죠? 부담될 필요 없잖아요. 계집아이가 명랑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계집아이만 명랑하고 다른 사람들은 완전히 우울증에 빠져있어요, 어른들이! 나아만 장군이 채비를 차리고 은 10달란트와 금 6000개를 가지고 이스라엘로 옵니다. 어디로 가느냐 하면, 엘리사가 어디 있는지 모르니까, 또 알았더라도 이스라엘 왕의 허락을 받아야 하니까 이스라엘 왕에게 편지를 먼저 보냈죠.
“엘리사라는 용한 사람이 있다는데, 내 문둥병이 나을 수 있다는데…” 이렇게 이야기 하니 이스라엘 왕이 자기 옷을 찢으면서…, 7절을 그대로 한 번 읽어볼게요.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내가 어찌 하나님이관대 능히 사람을 죽이며 살릴 수 있으랴 저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 보내어 그 문둥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로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
이게 뭐냐 하면, 성경의 복음을 대하는, 예수님의 복음을 대하는 그 인간들의 본심이에요. 나의 구원을 누가 방해하느냐 하면 내가 방해해요. 나의 기준이 있기 때문에, 내가 살아온 패턴이 있기 때문에 이게 방해한다고요. 예수님이 복역해서 복역의 양이 너무나 엄청나기 때문에 그 복역의 죗값을 치른 그것이 내 어떠한 죄도 상관없이, 나의 어떤 행위도 문제 삼지 않고 다 이루었다는 그 사실을 누가 방해하느냐? 내가 방해한다고요, 내가!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명랑해지지 않아요. 갑자기 심각해지는 거예요. ‘이런 은혜를 받았으니 나는 앞으로 어떻게 바르게 살까?’ 이런 생각을 한다고요, 이런 생각을.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들이 이것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물론 주의 말씀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들어도 막히고 봐도 모르고 그렇지만, 주님께서 그걸 의도해서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제가 두 구절을 읽어볼 테니까 여러분들이 잠시 한번 이게 무슨 뜻인지를 해석해 보세요. 과연 막히는지 뚫리는지 한번 보세요. 누가복음 16장 8-9절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이게 무슨 뜻입니까? 이 8절, 9절 말씀에 ‘불의하다’는 말이 나오고요. ‘옳지 않은 청지기’라는 말이 나와요. ‘옳지 않은, 나쁜 짓을 한 청지기가 이 세대의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당부하노니 더러운 돈으로 친구를 사귀어라. 그러면 네가 천국에 간다.’ 이런 말씀이거든요. 무슨 뜻입니까? 성경에 이게 있어요. 성경에 이게 있다고요.
이 말씀을 누락시키고, 빠뜨리고 신앙생활 할 생각 하지 마세요. 인간이 어느 정도로 나쁜 인간이냐 하면, 될 수 있는 대로 죄를 안 지으려고 하는 그 정도로 나쁜 인간이에요.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하는 그 정도로 악한 인간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기준이 있는데 그 기준은 선악 체계에 의해 될 수 있으면 바르게 살라는 기준이거든요.
바르게 살라는 기준으로 볼 때 자기보다 악하게 사는 사람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않는 거예요. “네가 인간이냐, 짐승이냐?” 이런 식으로. 왜? 내 기준으로 봐서 너는 악하기 때문에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인간은 본인이 수습할 수 없는, 수습이 안 되는 그런 상태에 놓여있다는 겁니다.
수습이 안 되니까 하나님을 찾으면서 ‘하나님, 저 하나님 찾는 거 보이시지요? 다른 사람은 안 찾는데 저는 하나님을 믿잖아요. 저 어떻게 보여요? 괜찮게 보이죠? 바르게 보이고 착하게 보이죠? 그러니까 하나님, 저 잊지 마세요. 주께서 재림할 때 잊지 마세요.’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인간이 하나님을 섬길 때 뭘 모르고, 뭘 빠뜨리고 있느냐? 제가 어릴 때 동네에서 무슨 잔치가 있으면 “개 한 마리 잡자.” 이렇게 나와요. 저 어릴 때 국민학교 2학년이나 3학년 때 비산동에, 대구시 서구 비산동 141번지 거기 공터가 있었는데 그 공터에서 개를 잡았어요.
개를 잡을 때 또 가봤어요. 몽둥이로 진짜 개 패듯이 잡아버렸습니다. 고기 삶아 먹으려면 개를 패서 잡아야 하니까요. 우악스럽게 때렸어요. 인간이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을 개 패듯이 잡습니다. 죽은 인간이 죽은 하나님을 믿어요. 하나님을 죽여놓고 믿어요. 왜냐하면 내가 살아있어야 하니까. 내 믿음, 내 소망, 내 사랑, 내 정성이 살아있어야 하니까.
살아있는 하나님을 안 믿어요. 하나님을 몽둥이로 패고, 납작한 포 있지요, 소고기 포나 쥐포를 만들어놓고 그다음에 믿어요. 그래 놓고 하나님께 속삭입니다. “하나님, 잘해봅시다. 응? 하나님, 십일조 드립니다. 이번에 중요한 사업이 있으니까 십일조 받으시고 이번 일만 잘되면 제가 헌금 더 하겠습니다. 알아들었어요, 하나님? 알아들었냐고! 내가 요근래 고구마 전도해서 한 열댓 명이 교회 나오는데, 그러니까 우리 애 곧 결혼하는데 좋은 색시감, 어! 하나님 아셨죠? 다 꿰뚫어 보시니까 모를 리 없겠지만 하나님 명예를 생각해서라도 잘 해보세요!”
그동안 우리가 믿은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 믿은 거예요. 증거가 뭐냐? 내가 살았거든요. 내 기도 살고, 내 헌금 살고, 내 전도 살고, 내 예배 참석 살고, 그렇게 내가 살아야 하니까요. 이게 종교적 안정성이에요.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우리를 도약시켜야 하거든요. 지금 도약이라는 말이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아무리 해도 이 수평적인 세상에서 열심히 교회 다니고 집에 가고, 또 교회 가고 집에 가고, 그렇게 열심히 해봐도 점프가 안 돼요. 내 생활의 일부가 될 뿐이지 나의 일부지 뛰어넘는 건 없거든요.
그런데 골로새서 1장 1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옮기셨다는 말이 이동이에요, 이동. 이게 점프, 도약이란 말이죠.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이미 옮겼다.’ 이미 옮겼다는 말입니다, 이미 옮겼다.
예수님께서 복역하셔서 이미 저주를 받았어요. 그 저주의 효과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요한복음 16장에 의해서 우리의 기준에 대해 책망을 받게 되어 있어요. “그것도 기준이냐, 어?” 하면서 의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그리고 심판에 대해서 우리가 책망을 받아요.
죄에 대해서 우리에게 책망하시는 거예요. 내가 아는 죄는 죄가 아니었고, 내가 죄를 안다고 하는 그 자체가 바로 그게 죄였다는 거예요. “미스김! 나한테 왜 거짓말해?” 이게 그 직장 스토커의 죄에요. 누가 누구보고 거짓말했냐고 따집니까? 그럴 권리가 자기에게 있어요? 그건 당신 기준이잖아, 당신 기준이라고요!
“내가 집에 있으면서 집에 없다고 했다고 해서 왜 당신한테 사과해야 하느냐?” 그 말이에요. “직장 생활하는 나는 순수하거든. 순수한 내가 순수한 당신을 순수하게 봐준 값을 해야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 감히 내게 거짓말을 하다니!” 이게 인간과 인간관계에서 굉장히 많습니다.
지금 오늘 설교의 핵심은 ‘싸운다.’잖아요, 싸운다. 죽기까지 싸운다고 하잖아요. 이게 논리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또 나오는 방식이 있어요.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게 뭐냐? 그냥 주님이 시킨 대로 사세요, 편하게 명랑하게. 그게 죄와 싸우는 방법이에요.
지금 안 명랑한 게 문제에요. 내가 하루하루 감사하지 않는다는 게, 명랑하지 않다는 게 뭔가 내 기준이 살아있는 거예요. 내 고집이 살아있어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어서 태어나고요, 죽을 때까지 죽어 있다가 죽은 다음에 비로소 말씀의 본때를 맞보게 되는 겁니다.
십자가 마을의 어떤 분이 질문했어요. 참 중요한 질문인데 오랜만에 대표로 그런 질문을 해줘서 얼마나 감사한지요. 이 질문은 다른 사람도 다 하고 싶었을 텐데 그동안 질문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 보면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라고 되어 있어요.
질문이 뭐냐 하면, “진짜 모든 사람이 심판대 앞에 서는 거 맞습니까?”라는 질문을 한 거예요. 그래서 답변을 해드렸죠. 【‘모든 사람’이라고 이해하는 것보다 ‘육’으로 이해하면 쉽습니다. 모든 ‘육’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선악에 따라 심판받습니다. 그게 ‘육’으로 태어난 ‘육’의 운명입니다. 그 ‘육’의 심판을 통해 ‘영’에 속한 사람은 구원이 됩니다. 따라서 성령을 통해서 ‘육의 자아’에서 ‘영의 자아’로 미리 옮겨놓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다시 설명하면 여기서 ‘모든 사람’이 심판대 선다고 이해하면 복잡해지는데 인간은 육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육은 육이기 때문에 자체가 죄에요. 육은 육 값을 한다고 마지막 심판 때 ‘너 육이야.’하고 평가 내리는 것은 어떤 인간도 다 받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5장 24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라고 되어 있거든요. 옮겼다는 말은 뭐냐? 육을 버리고 주님의 육, 주님의 몸의 좌소로 미리 주께서 성령을 통해 빼돌린 거예요.
그렇게 빼돌릴 때 그 상황이, 히브리서 11장에 나오지만 그게 믿음 상황이에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내 믿음은 안 받아요. 무슨 죄인의 믿음을 받습니까? 주님의 믿음이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오게 되면 이미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거예요. 옮겼으면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의 육에 대해서 미련을 안 가져요. 죄 덩어리인데 왜 거기에 미련을 갖습니까? 육에 대한 미련을 안 갖다 보니까 그냥 감사와 감사가 계속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육의 본성도 만만치 않거든요. 그래서 주님께서 지뢰를 깔아놔요. 우리의 하루하루 생활, 지난 19일, 20일, 21일, 그리고 내일 되면 22일이 되잖아요. 백날 살아봐야 도약 안 돼요. 또 22일 살고 23, 24, 25일이 되면 불로동 장날입니다. 장날에 뭐 사러 또 갈 거예요. 도약은 없어요. 도약이 없는데 왜 24일, 25일이 되고 장날은 왜 있는가? 지뢰 밟으라고 하는 거예요, 터져버리라고. 결론은 뭐냐? 주께서 싸우십니다.
이 말씀대로 이 말씀을 우리가 지키려고 한다면 또 내 기준이 동원돼요. 네 기준 말고 ‘죄와 죽기까지 싸우라’라는 그 말은, 내가 너를 말씀의 외피(外皮)…, 껍데기, 돼지껍데기 알지요? 속은 말씀이고 겉은 껍데기, 우리로 하여금 히브리서 12장 4절의 말씀을 가지고 싸우도록 해주시는 거예요.
‘아, 이 말씀이 그 이야기구나. 살려고 하면 안 되겠구나.’ ‘네가 왜 안 죽어, 인간아! 죄에 대해서 이미 너는 죽고 주님 안에서 생명을 얻었다.’라는 그 사실을 다시 이 말씀을 가지고 드러내기 위해서 나를 외피로 사용한다는 사실을 명랑하고 기쁘게 보면 되잖아요.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을 가지고 ‘옳다구나. 이제 내 신앙의 솜씨를 보여야겠다. 내가 이제 죄와 싸우되 그냥 싸우지 않고 야무지게 싸우리라.’ 야무지게 싸우면요, 그게 죄입니다. 자기 몸만 피곤하고 그게 자기의 자랑거리가 되면서, 자기의 기준으로 누적되면서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질책하게 돼요.
‘나는 죄와 싸우는데 너희는 뭐 하고 있나? 나 빼고 다 죽어라, 지옥이나 가라! 두두두두두두!’ 이것은 하나의 게임을 벌이는 수단이 되는 겁니다. 그냥 시키는 대로 명랑하고 감사하게 살면 되는 겁니다. 이 작업을 위해서 주님께서 ‘죄가 무엇이냐?’를 마태복음 16장에서 알려주십니다.
마태복음 16장을 볼 때 이미 성령을 받아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긴 사람, 도약을 해버린 사람 입장에서 보라는 거예요. 이미 도약을 해버린 거예요. 도약했지만 우리 육은 그대로 남아 있잖아요. 우리 육은 매일 같이, 도약한 상태에서도 이 몸은 또 안 죽으려고 발악을 하니까 주께서는 그 발악하는 것을 죽이려고 또 애를 써요.
그러니까 이미 구원받은 사람으로서는 사는 게 힘든 거예요. 이 육 때문에, 그 육이 발목을 잡으니까. 마태복음 16장 11-12절에 이 말씀이 나옵니다. 이제부터 조금 어렵습니다. 제가 일부러 어렵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6절을 먼저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예수님께서 함축적으로 이렇게 딱 던져놨어요. 그러니까 제자들이 하는 말이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7절). 지금 제자들에게 기준이 있어요. 자아가 있으니까 그 자아 기준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들어서, 그걸 이해함으로써 내가 그 이해에 맞는 합당한 행동을 함으로써 주님이 가는 나라에 자기들을 합류시키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어요.
그래서 주의 말씀을 그냥 무심하게 듣지 않고 귀담아들으려고 애를 씁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제자들은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떡은 곰팡이가 잘 피는 경향이 있어서 그걸 먹으면 너희 육신에 해롭다. 그들의 떡을 먹지 말아서 너희 몸을 이롭게 하라.’는 식으로 이해해서 “우리는 그들의 떡을 아예 가져온 적도 없습니다.”라고 한 거예요.
제자들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떡을 가져와서 우리 나중에 먹자’라고 했으면 예수님 말씀이 말이 되지요. 그래서 제자들이 “아예 우리는 떡 자체가 없습니다”라고 하니까 8절에 “예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그러니까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려면, 행정적인 문제, 관리 차원에서라도 같이 활동하려면 기본 양식은 늘 챙기고 있어야 된다.’ 하는 거기에 관심을 뒀던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화를 내시면서 이렇게 하십니다.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사천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지 못하느냐”(9-10).
그리고 11절,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내가 말한 것은 떡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하거든요. 여기서 뭐가 어려우냐 하면, 예수님께서는 떡에 관함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떡을 먼저 언급하신 것은 예수님 쪽이었다고요, 예수님 쪽에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하실 때도 ‘이 성전을 헐라’ 여기서 그 성전은 건축물 성전이에요. “이 건축물 성전을 헐어라. 46년 동안 지었다고? 나는 사흘 만에 짓겠다.” 이것은 제자들 아니라 누가 들어도 이것은 예수님께서 건축물에 대해서 이야기한 거예요.
그래서 제자들이나 사람들은 ‘46년이나 지어도 다 못 지은 성전을 어떻게 짓지?’ 이렇게 생각하니까 나중에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고 난 뒤에는 ‘그 성전이 건물 성전이 아니었다.’라는 사실을 그제야 아는 거예요. 주님께서 왜 이런 식으로 말씀을 하시는가? 왜 이렇게 납득이 안 되도록, 막히도록 하시는가 하면, 인간이 자기가 주의 말씀을 이해한다고 해서 도약이 안 돼요.
도약이 안 되면 그냥 죄의 권세 아래 갇혀있는 꼴이 돼요. 지옥이죠, 그냥 지옥이에요. 천국 가려면 훌쩍 점프가 되어야 하는데 도약이 될 수가 없습니다. 왜? 죄의 권세가 그걸 누르고 있으니까.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은 죄의 권세 아래 눌려 있어서 빠져나올 수가 없기에 지옥에서 천국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6장 11-12절에서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라고 이야기했어요.
교훈, 이제 죄에 대해서 주께서 언급하는 거예요. 죄에 대해서 그렇게 언급하신 이유가 그다음에 나옵니다. 21-22절에,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게 바로 도약되는 사람의 견해고 그걸 이해 못 하고, 도약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 한 제자들과 일반인들은 “내가 안 죽고 사는 방법은 없습니까?”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내가 안 죽고 죽은 척을 하고 사는 것은 없습니다. 내가 죽고 난 뒤에 사는 거예요.
내가 죽는다는 것은, 내 안에 뭐가 있다는 것인가? 내 안에 그동안 세상 살아왔던 기준이 있어요. 그 기준, ‘나는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대하고 나는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기준이 있는데 그 기준을 두고 주께서는 “좀 죽어줘. 그게 바로 죄야. 그게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훈”이라고 했어요.
왜냐하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인간 세상의 대표적인 모든 사상체계를 갖고 있었던 겁니다. 자신의 기준을 버릴 수가 없었다. 내 기준을 버리지 못할 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개 잡듯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내 기준과 연결되어 있는 하나님이 따로 있는 거예요.
따로 있는데 그 앞에 툭 튀어나와서 “내가 하나님”이라고 하니까 진짜 몽둥이로 패듯이 예수님을 잡아 죽일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우리의 대표자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도 예수 믿을 때 살아 계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몽둥이로 개패듯이 패놓고, 예수님을 죽여놓고 “예수님, 믿습니다” 이렇게 나와요. 우리가, 오늘날 우리가! 그래 놓고 “하나님! 저 어때요?” 이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여러분이 마태복음 16장 23절을 다 아시지요?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 사이가 막혀 있고 도약이 안된다는 것을 이야기하시고, 그다음에 24절, “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하지 못한 사람은 주님과 동행하지 못하고, 주님과 동행하지 못하는 사람은 천국에 못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천국에 못 가요. 여러분, 이 이야기를 제발 명랑하게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아, 천국에 못 가는구나. 그리고 그 조치가 합당한 조치구나. 그게 주께서 제대로 일하시는 방식이구나. 나는 오해했다.’
뭘 오해했어요? 마태복음 16장 24절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면 주님을 따라갈 것같이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이제는 주님 쪽에서 성령으로 그런 나를 몽둥이로 개 패듯이 패버리는 거예요. ‘내가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면 주님 따를 수 있지요?’라는 그 사고방식을 개 패듯이 패는 게 그게 바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내가 그동안 곡해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만큼 내가, 이 육이 안 뒈지고 살아 있다는 뜻이었어요. 실제로 주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했는데 우리는 산채로 부활하기를 원했던 거예요. 그런 식으로 수십 년 동안 교회 다니고 복음 이해했던 겁니다. 이쯤 되면 여러분에게서 불만 나와야 해요. “목사님, 그러면 우리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나와야 돼요.
그냥 사세요, 그냥! 명랑하게! 어떻게? 시키는 대로. 하루하루 이 스케줄이요, 우리가 계획한 게 아닙니다. 해와 달이 자기 계획대로 움직입니까? 아니지요. 우리도 해와 달만큼만 되세요. 추석날 보름달처럼만 되세요. 그냥 시키는 대로 그냥…, 내가 죽는 것이 우리 소관도 아닌데요. 내가 죽는 것조차 남의 일로 여기시고요, 내가 죽는 것은 관심도 없어야 하고요.
어쨌든 간에 나는 죽어 있고, 살아있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 살아있고 그 살아 있는 주님의 외피, 그 돼지껍데기가 오늘날 우리예요.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바리새인의 교훈과 죄, 그걸로 총 무장되어 있어서 “어쨌든 간에 그 ‘나’라는 것을 안 죽이고 살려서 예수 잘 믿어서 천국까지 보내는가?” 그것만 연구하는 그것, 주께서 성령의 몽둥이로 매일 같이 패고 지뢰 터트립니다.
믿음대로 살려고 하는데 하루하루 주어지는 일과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불평과 불만을 해댔습니까? 그거 지뢰 밟은 거예요. 말씀 들을 때는 ‘감사합니다. 나는 원망할 자격도 없습니다’ 이렇게 해놓고는 막상 세상 나가서 같은 인간들 만나고서는 ‘어찌하여 나에게 이런 힘든 일을 시킵니까?’ 불만과 불평이 막 나오는 것은 또 지뢰 밟았어요, 지뢰!
‘아, 이게 바로 주께서 하신 복역의 깊이를 알려주시기 위해서 내 육이라는 것을 아직도 쓰시는구나. 말씀 안에 있는 대로 주께서 대신 복역함으로써 죄 사함을 다 이루었다는 그 사실을 새삼스럽게 어설픈 우리 육을 통해서 또 밝혀주시는 주님의 여정이구나.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는구나.’
주어진 일과, 스케줄이 다 주께서 주신 겁니다. 놀 생각 하지 마세요. 직사하게 눈물 나도록 고생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는 어쩔 수 없어요. 누가 아파요? ‘주께서 아프게 했네.’ ‘어떻게 나았지?’ 나을 생각하지 마세요. 나사로 보세요. 죽었다가 부활했잖아요. 유대인들은 “나사로가 살았다.” 아닙니다. 나사로는 껍데기고 그 안에 예수님이 살아 있지요.
사마리아 여인은 물길러 갔다가 빈손으로 와서 “항아리는 어디 두고?” “항아리요? 내 안에 목마르지 않은 샘이 살아 있습니다”(요 4:14). 모든 구원받은 사람은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주님이 살아 있어서 내 육을 계속 살려서 내가 얼마나 죄와 싸우는 데 실패하고 있는가를 드러내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와 싸우는데 말씀대로 승리케 하는 것은 살아계신 주님의 몫인 것을 우리를 통해서 증거케 하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이걸 우리가 해낼 줄 알았습니다. 해낼 줄 안 그 자체가 죄인 것을 성령을 통해서 주님의 마음을 받으니 비로소 눈이 열렸습니다. 이제는 눈이 열린 채로 모든 것이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