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이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생각할 필요가 없었던 때가 있었다. 신천지보다 독한 이단에 빠져서 지옥 간다는 주변의 우려에도 이 말씀에 계속 끌리는 것에 근심하고 두려워할 겨를도 없이 그냥 들었다. 이단에 빠진 것을 인정하고 들었던 말씀이라, 애초에 지옥행은 받아들이며 들었고, 들으면 들을수록 마음에 착 달라붙는 것이, 이전 교회 목사님의 책망에 저절로 동의가 되었다.
‘모두들 당신이 듣는 말씀이 이단이라는 것을 분별하는데, 당신은 이미 이단적 요소가 마음에 자리 잡고 있어서 분별이 안 된다. 에덴동산에서 여자가 선악과를 보고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해서 끌린 것처럼, 그냥 끌려가는 것이다’ 어차피 스스로 빠져나갈 수 없다면, 무슨 말씀인지 더 깊숙이, 더 잘 들어보자는 마음이 생겼다.
들어도 들어도 반박할 것은커녕 혼잣말이 절로 나온다. ‘맞잖아! 맞잖아!’ 그렇게 복음과의 첫 만남은 말씀만 집중되었고, 말씀이면 충분했는데, 시간이 개입되면서 서서히 그 안에서 사람과의 관계성이 생기기 시작했다. 형제와의 사귐을 사단의 모임으로 바꾸는 세상 권세가 내 안에서 작동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어느새 나는 내가 이단에 빠졌다는 사실을 잊었고, ‘여기만 진짜구나’라는 환상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 상상의 세계 안에서 나의 마땅한 자리는 어느새 지옥이 아니라 천국으로 구원의 자리로 변질되고 있었다. 그렇게 처음 사랑을 버렸다.
사람과의 관계가 마치 복음 안, 예수 안이라고 믿으려는 힘, 거기에서 낙오되지 않으려는 힘이 구축되고 있었고, 사람들의 행동과 말과 반응 그 자체가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조성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 압박을 가해왔다. ‘당신은 말씀과 상관없다’라는 버려짐이 이 정도로 무서운 공포로 자리잡혀 있는지 몰랐다.
베드로가 바다 위를 걸을 때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말씀의 주인공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그 첫 만남은 오간 데 없고, 풍랑처럼 여기저기서 들썩들썩 등장하는 인간관계로 휘리릭 눈 돌아가며, 발은 점점 바닷속으로 빠져들고 있었고, 완전히 침몰해서 예수님이 보이지 않을 때,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면서 뒤늦게 예수님을 향해 외친다.
‘주님, 저 좀 살려주세요’ 베드로에게 손을 내미신 예수님이 내 손도 잡아주시는 줄 알았다. “죽어라. 죽는 것이 기적이다” 개인을 집단으로 바꾸시는 주님의 작업에 선행은 죽이시는 것이다. 모두 침몰! ‘나는 어떻게 되지’라는 개개인은 돼지 떼처럼 모두 몰살되고 배제된다. 원치 않게 반복되는 이러한 환경이 말씀으로 계속 조성되고 있는데, 이건 어찌 된 건지 익숙해지는 맛이 없고 늘 새롭게 두려움이 생생하다.
그러나 그 새로움은 도리어 나를 잃어버리고 성경의 모든 인물의 역할을 주저없이 제대로 연기하게 만드는 윤활제가 된다. 사울, 신접한 여인, 다윗, 미갈, 기생라합, 유다, 다말, 베드로, 가롯유다,... 말씀이 말씀 되도록 대본 대로 역할을 한다는 것은 혼자를 버리고 팀으로, 집단으로 움직이게 하시기에, ‘나 혼자 이러이러했다’라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니 사건의 마무리 후에 찾게 되는 것은 진짜 누가 움직이고 계시는지 그 보이지 않는 분만 바라보게 된다. 사건이 한창 진행 중일 때, 역할에 집중되면 마귀의 꾀임에 영혼이라도 팔 듯이 나에게 열중한다. 막이 내려가고 나서야 어둠 속에서 주님의 말씀이 울린다.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널 꾀드냐” 예수님의 이 말씀을 살리시려고, 모든 주의 들러리에게 꾀임을 허락하셨다.
죄란 죄는 몽땅 다 짓고 염치도 없이 어기적어기적 그 자리가 어디라고 주님 발 앞에 나아가는데, 눈물이 안대처럼 앞을 가려주니 손가락질하는 주변 사람이 보이질 않는다. 그간 고이고이 자기를 위해 모아둔 가치, 의로움을 사정없이 주의 발 앞에 깨뜨린다. ‘밟아주소서’ 그 여자는 깨진 병처럼 산산이 조각나고, 그 죄가 주님의 발에 닿으며 향기로 변한다. 주의 백성의 모든 죄를 끄집어 당겨 향기로 바꾸시며, 예수님은 사랑을 설명하신다.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7:47) 이 말씀만이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 바리새인의 집이 무대가 되었고 몇몇 손가락질하며 째려보는 출연진들이 있어야 하고 행실이 좋지 않은 여자도 등장해야 하고,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 칠판 역할을 할 시몬도 있어야 한다.
고린도전서라는 사도바울의 편지는 주와 주님의 백성과의 하나 됨을 말한다. ‘누구누구와 하나 됨’이라는 것은 힘을 빼지 않으면 불가능한데, 인간에게 힘을 빼는 건 곧 죽음과 직결되고, 그렇기에 죽기가 무서워 사망의 종노릇 하는 본성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힘을 나 스스로 뺄 수 없는 한계를 복음은 무기력 또는 무능력함이라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기대하지 않으신단다. 주님 쪽에서 먼저 움직이시고 친히 자기 백성과 하나 되는 계획을 추진하셨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그 관계를 연결하시는 성령의 작업 안에는 아버지의 모든 율법을 이루어 내시는 아들의 사명만 있었다. 아버지의 뜻을 담당하시기 위해 주의 이름이 육신에 임하시는 것이 사랑이었다.
그 사랑은 힘을 빼지 못하는 주의 백성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힘을 대신 빼시는 희생이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힘이 조금도 남지 않는 그곳, 십자가로 이끌려 가셨다. 예수님과 아버지가 하나 되는 약속이 먼저 이루어지고서야, 아들이 원하시는 그분의 백성이 주와 한 몸이 될 수 있다. 아버지가 아들을 살려내신 그 생명의 영으로 아들이 자기 백성에게 찾아오신다.
성령이 예수님을 도우시며 하나님의 뜻이 응하는 방향으로 친히 이끄셨고, 예수님은 아버지가 사랑 이심을 믿으셨기에 십자가의 완성 지점에서 완전히 쪼그라드셨다. 십자가, 그 끝 지점에서 이루어진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사랑, 그 끝 사랑을 담고 예수그리스도의 영이 힘을 빼는 것이 불가능한 세상 속에 사로잡힌 백성에게 찾아오신다.
주님의 의를 빛나게 하시려고 주께서 사랑이 임한 백성을 죄인의 모습 그대로 빛 가운데로 이끄신다. 인간의 모든 행함은 죄가 되나, 빛 가운데서 행한 죄를 주님은 ‘사귐’으로 바꿔주신다. 사귐은 혼자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주님의 말씀 성취의 증거는 언제나 ‘우리’ 안에서만 이루어지고, 그때 발동되는 믿음은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이다. 어린양의 피는 ‘우리’만을 상대하신다.
주의 각본대로 사건이 잘 진행되고 있는데, 개인 대 개인이 등장해서 ‘그건 오해야. 그건 그게 아니야’라는 잡음은 꼴불견을 유발한다. 그렇게 수시로 추잡스러운 방해 작용이 일어날 때마다, 말씀이 날아와 책망하심이 고맙다. “누가 너를 꾀어내 드냐, 도대체 왜 십자가에서 모가지를 돌리고 난리냐. 쓸모없는 모가지 저거 잘라내든가 해야지”
말씀이 훼방 되고 있다면 차라리 잘라내 주시는 것이 주님께 감사하다. 나는 내가 아닌 것을 먼저 알려주시고, 나를 포함한 사람에 대한 기대를 소멸하게 하신다. 시키는 대로 하는 피조물에게 시키시는 분이 기대하거나 더 나아가 책임을 물을 하등의 가치를 두지 않으신다.
수련회라는 무대가 셋팅되고, 출연진들이 자리를 채우며, 각자의 맡은 역할을 하는 사건이 어느새 저 멀리 과거로 사라졌다. 웃을 때인 자는 활짝 웃는 역할로, 울 때인 자는 찌질하게 우는 역할로, 분노할 때인 자는 화내는 역할로, 말씀의 들러리들이 파도치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는 아무런 소리가 없다.
‘누구누구가 나에게 이러이러했는데’라는 잡소리는 소거되고, 이미 짜인 말씀의 관계망에서 성령에 의해 건들어지는 대로 움직임을 그려내면서 주의 말씀만 드러내고 모두 퇴장했다. 주님의 대본에 충실하게 역할을 하는 불꽃 튀는 만남은 그 역할의 경중에 상관없이 참 귀하다. 세월의 무게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육체가 고되실 텐데도 몸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전하신 목사님께도 감사의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댓글
공은주 "형제와의 사귐을 사단의 모임으로 바꾸는 세상 권세가 내 안에서 작동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에 대하여 느끼는 바입니다.
수련회의 모임, 형제와의 사귐을 통해서 주님에 대한 영광만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더욱 더 죄인되게 하심으로서 오직 피만을 드러내시고, 십자가 중심으로 돌아감으로서 십자가 공로에 감사와 감격과 기쁨입니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1:7)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한일서1:9)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
공은주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한1서1:10)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한1서2:2)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요한1서2:22)
임청일 말씀을 깨닫고 난 후 어떻게 살아야 되나 라는 생각이 다시금 떠오른다. 막 사세요라는 의미가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분이 주님이시라는 의미일진데 같은 짓을 되풀이하는 자신인데도 또 뭔가 모르게 달라져 가는 자신을 보며 과연 주님이 하셨군요! 라는 게 의식적으로 난 이제 해결된 사람이야 하고 다르게 행동하려는 것보다 정답 아닌가? 하는 속삭임은 과연 누구의 음성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