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골 골짜기 같은 세상에 죽은 시체들의 바짝 마른 뼈들이 즐비한데,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말씀이 바람처럼 그 위에 부니, 뼈가 서로 연락되면서, 뼈들이 하나의 뼈를 이루고, 말씀의 살이 붙어서 하나님의 병기가 되어 움직인다. 이 병기에 피가 공급되지 아니하면, 그 무기는 하나님에게 쓰임을 받았다 한들, 단 하나의 뼈에 속한 것이 아니라(창2:21), 그저 뼈들에 하나이다. 천사의 말을 하고, 예언의 능력이 있고,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피가 없으면,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사랑은 내 몸이 아닌 다른 몸이 아플 때, 함께 고통 하는 한 몸의 현상이다. 다른 몸이 울 때, 나도 울게 되는, 다른 몸이 웃을 때, 나도 웃게 되는 한 몸의 현상이다. 마음이 연락되는 것은 내가 나를 챙길 수 없는, 내가 아무짝에 필요 없는, 나보다 더 중요한 한 분의 몸이 발견되는 현상이다. 이로써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아무것도 나를 위해 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드시는 능력에 덮여, 고린도전서 13장이 스스로 작동하는 것이다.
사랑은 더 이상 참을 게 남아있지 않고, 시기할 것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고, 자랑할 것이, 교만할 것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은 상태가 되도록 일하신다. 철저히 주제 파악을 시키시기에, 악인과 선인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도 무례히 행할 자격이 없고, 성낼 자격이 없어진다. 유익을 구할 ‘나를 위하여’가 성립이 되지 않기에, 아무것도 참을 것이 없어진다. 그렇기에 사랑은 막장이다. 모든 불순물이 말씀으로 태워진 마지막 형태이기에, 사랑이 행하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내가 남아있지 않고, 나를 모두 태우신 말씀이, 내 안에 심어진 주님의 뼈에 덮여서, 온전히 주님의 희생의 피로만 살아서 움직이는 것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6:54)
사랑의 막장을 드러나게 하시려고 말씀은 부지런히 인간을 막장으로 밀어붙이신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막장이 드러나는 현상을 주님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을 위해 내 목숨을 버리려고 맘먹어도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할 수밖에 없는 자리로, 그를 버리고 도망하는 자리로, 결국 예수님을 믿을 수 없는 자리로 이끄시는 주님의 일하심이 사랑이라고 하신다.
성령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시는 분이 아니라, 형제를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의 본질, 미움만 가득한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시면서 인간은 결코 받을 수 없는 그것, 사랑을 등장시키신다. 그렇게 갈라져서 나는 나로 환원될 수 없는 영원한 분리가 안에 담긴다. 형제를 미워할 수밖에 없는 자아와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자아가 공존한다. 사랑은 우리가 뭘 하는 게 아니라, 가만히 있는 것이다. 그래야 약속의 완성이 스스로 일하시며, 택한 자들을 죽여주시려고 공격하시는 하나님의 전쟁이 나타난다.
보는바,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은 결단코 사랑할 수 없다. 보이는 것은 보는 나로 인해 반드시 미움을 받는다. 처음에 사랑처럼 보이는 것도 보류된 미움의 전조 증상이다. 성령이 이끄시는 사랑의 길은 먼저 찌질한 모습으로 형제에게 분을 유발하고 나서야 분 냄을 받아주게 만드시고, 원망을 일으키고 나서야 그 원망을 들어주게 하신다. 원망하는 자도 없고 원망을 받는 자도 없다. 위쪽에서 아래쪽을 공격하시는 주님의 전쟁만 있다.
그렇게 형제 안에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때까지, 쏟아내게 하시고 받아내게 하신다. 그 둘의 마음에서 벌어지는 현상은 갈 때까지 막장으로 치달아서야 잠잠히 기도가 나온다. ‘주님, 제발 저 좀 치워주세요. 미친 듯이 인생의 주인공 되려고 발광하면서, 진짜 주인공 가리는 저 좀 치워주세요’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한 분에게 연결되게 되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때까지 모든 것을 받아내신, 십자가에 죽기까지 다 받아내신 예수님의 죽음이, 연결시키시는 형제에게 전달된다.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러, 사람이 아닌 단에 말씀을 선포했다. 네 위에서 진짜 뼈가 아닌 가짜 뼈들이 불살라질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 옆에 서 있던 왕복을 입은 뼈, 신하와 군사의 복장을 한 뼈들은 말씀 앞에서 자동 개무시되었다. 왕은 권위를 살리기 위해 말했고, 자기 몸을 살리기 위해 말했다. 그리고 자기의 유익을 위해 선지자에게 말을 걸었다. 선지자 주변에서 몰아치는 이 관계성의 공격이 선지자 주위를 돌고 있는 말씀 검으로 완벽 차단되었다. 말씀이 말씀을 지킨 것이지,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것이 아니었다.
벧엘의 한 선지자가 이 남쪽 선지자의 소식을 듣고, 급히 와서 그를 자신의 거처로 데려와 물과 떡을 제공하며 쉬게 해주었다. 벧엘의 선지자는 남쪽 선지자가 참 선지자임을 알았고, 그를 극진히 대해주려고 했다. 남쪽의 선지자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그의 호의를 차단했을 때, 벧엘의 선지자는 천사가 자기에게 와서 너를 대접하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마음에 주었다고 했다. 벧엘의 늙은 선지자는 그것을 속임수로 조금도 생각지 못했다.
자신이 이미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 안에서 말씀이 차단되고, 자기 안에 커다란 공백을 품고 있는 존재인 것을 알지 못했다. 자신이 그 공백을 채우고자 미친 듯이 무언가를 해야 하고, 그 공백이 하나님에 의해 말씀으로 채워졌던 경험이 있는 선지자는 말씀이 끊긴 순간, 엄청난 공허를 느꼈을 것이다. 그때 아들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남쪽 선지자의 소식을 듣게 되었고, 너무도 기뻐서 한걸음에 달려간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되는데 애써 남쪽 선지자를 만나러 가려 했던 마음 또한, 천사가 전해준 여호와의 메시지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채워주신 말씀이 아닌, 인간이 자기 쪽에서 공허를 채우려고 넣는 말씀을 속임이라고 거짓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사람 안에 말씀으로 채워져야 할 그 공백을 아래쪽 세상에 있는 것으로 채우게 하는 마귀를 거짓의 아비라고 하셨다. 아버지가 거짓이고 속임수이니, 자녀는 두말하면 잔소리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속임은, ‘남을 기만하거나, 무언가를 은폐해 두고 자신에겐 이익을, 남에겐 해를 주기 위한 행동 그 자체’를 의미한다. 상대가 잘 알지 못한 상태에서, 어떤 의도성을 내포한 말 또는 행동을 해서, 상대에게는 해를 끼치게 되더라고 자신에게는 유익이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내 쪽에서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상대가 그 건넨 정보에 따라 부적절한 반응을 했다면, 이것조차 속임의 범주에 들어간다.
성경의 말씀을 아래쪽 세계에서 설정된 의미로 파악하고 재구성한다면, 한 번도 성경에 접근한 적이 없는 자가 되고, 말씀 세계로 들어간 적이 없는 자이다. 내가 열어서 들어가는 말씀의 문 안에는 오직 거짓과 속임수와 악독만 있다. 주께서 천사를 통해서 열어주시는 말씀의 문 안에 들어가더라도 역시 똑같은 결과를 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보여준다. 인간이라는 매개체가 연결된 이상, 하나님 편에서 내리시는 결론은 속임이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가치과 유익을 내려놓는다는 것이 자신을 스스로 속일 수 있는 속임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 안에 주인으로 자리 잡은 속임에게 먼저 속아주시는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세상 무지하고 주제 파악 안 되는 자에게 말씀을 담으시고, 그리고 보내시고, 내뱉게 하신다. 그리고 그 내뱉은 말씀이 증거되는 증거물이 되게 이끄신다. 믿음이 먼저 주어지고, 나중에 주어진 할례의 법이 믿음이 담긴 몸에 흔적을 남기듯이, 말씀을 먼저 담으시고 하나님의 죽음으로써 말씀을 확증하시며 일하신다.
남쪽 선지자는 죽음으로 자신 안에 담긴 말씀의 효력을 증거했고, 그와 난데없이 연루된 벧엘의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 안에 담으신 말씀을 내뱉으면서, 남쪽 선지자의 대신 죽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이미 죽었음을 확인했다.(열상13:29~32) 세상 골짜기에 가득한 뼈들 중, 뼈 중의 뼈가 되어 그 뼈의 주인께 연결되어 한 뼈, 한 몸이 되는 것은 철저히 예수님의 공허를 맛보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살 소망이 모두 끊어지고 세상의 어떤 것도 채워 줄 수 없는 예수님의 공허함이 마음에 박혀서 작동되는 현상을 보이게 된다.
나를 허무하게 하고, 공허하게 하고, 소멸하게 만들기에, 싫어했고, 미워했고, 그래서 버렸던 분의 시체를 다시 나귀에 싣듯이 몸에 짊어지게 하시고, 무덤으로 돌아와서 나의 죄로 인해 슬피 울게 하시고,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말씀의 성취 앞에 담대히 주의 공로를 증거하게 하시는 일에 잘 놀아나게 성령께서 도우신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수많은 주의 백성이 주의 속아주심에 은혜를 먼저 받았기에, 언약 앞에 그들의 단절됨을 주의 뜻으로 여기게 되고(슥11:11), 자신의 뜻과 어긋나게 하심을 마음으로 감사하게 된다.
양을 키우는 목장에 개들 중에는 성숙하고 노련하게 양무리 주위를 맴돌며, 경계선을 벗어나지 않고 침입자들(잘못된 복음)을 발견하면 경고하고 주인에게 알리는 개들이 있는 반면에, 경계선을 이탈해서 철딱서니 없이 중앙으로 달려 들어가 양무리를 놀라게 하는 개들도 있다. 부적을 못 읽는 귀신이든지, 팻말에 글자를 못 읽어서 시멘트 바닥에 호작질하는 강아지든지, 각자에게 맡겨진 역할이 있고, 그 모든 것이 한 분의 손안에서 합력하여 선이 되는 것을 감지하게 되고, 그분의 뜻대로 길을 닫으시고 여시는 주의 손길을 이미 맛보았다면, 더 이상 할까, 말까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느끼게 된다.
물론 여전히 육체가 생생하기에 부끄러움이 발생하며 주저함을 만드는 작동은 일어나지만, 나의 주저함을 능가하면서 주저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활동이 간음한 여인을 현장으로 끌고 가듯이 당기고, ‘믿음이 없나이다’를 ‘없나이다’로 바꿔 치기 하시는 주님 한 분의 믿음이 혼자 움직이고 계시는 그 발견만으로, 그냥 패스, 그냥 오케이다.
어떤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차라리 복음을 안 들으면 될 텐데, 결국 들으니, 모든 불편함을 몸으로 겪게 되는 게 아닐까. 안 믿어지면 안 들으면 그만인데...’ 그렇다. 아예 들었던 적이 없다면 사회 부적응자,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 이상한 거 믿는 사람, 이런 기타 등등의 시선과 말에서 해방될 것이다. 정말 귓구멍 두 개만 막으면 끝날 일인데, 그렇게 쉬운 일을 왜 안 하지. 과연 안 해봤을까. 해보면 알게 될 것이다. 귓구멍 두 개를 막는 것 보다 콧구멍 두 개를 막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복음을 한 번도 안 들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들은 사람은 있을 수 없다. 복음을 듣는 순간, 주인이 교체되기에, 내 맘과 내 뜻은 그저 허공에 울리는 메아리일 뿐이지, 진짜 마음과 뜻은 소리 없이 조용히 일하신다. 이미 찜하신 주의 몸을 통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