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택한 백성

아빠와 함께 2025. 9. 7. 18:23

택한 백성

2025년 9월 7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49:7-13

49:7 에돔에 대한 말씀이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데만에 다시는 지혜가 없게 되었느냐 명철한 자에게 모략이 끊어졌느냐 그들의 지혜가 없어졌느냐

49:8 드단 거민아 돌이켜 도망할지어다 깊은 데 숨을지어다 내가 에서의 재난을 그에게 임하게 하여 그를 벌할 때가 이르게 하리로다

49:9 포도를 거두는 자들이 네게 이르면 약간의 열매도 남기지 아니하겠고 밤에 도적이 오면 그 욕심이 차기까지 멸하느니라

49:10 대저 내가 에서로 적신이 되게 하여 그 비밀한 곳들이 드러나게 하였나니 그가 그 몸을 숨길 수 없을 것이라 그 자손과 형제와 이웃이 멸망하였은즉 그가 없어졌느니라

49:11 네 고아들을 남겨 두라 내가 그들을 살려 두리라 네 과부들은 나를 의지할 것이니라

49:12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이 잔을 마시지 않을 자도 마시지 않지 못하겠거늘 네가 형벌을 온전히 면하겠느냐 면하지 못하고 반드시 마시리라

49:1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로 맹세하노니 보스라가 놀램과 수욕거리와 황폐함과 저줏거리가 될 것이요 그 모든 성읍이 영영히 황폐하리라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모든 말씀, “너희 인간들은 너희들은 나에게 철저하게 당했어. 너는 나의 포기나 계획? 그런 것 소용없어”라는 내용입니다. 그 이유는 “내가 택한 이스라엘이 나에게 어떻게 철저하게 당했는지 너희들은 그것부터 유념하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자기 일이 급선무입니다.

남 걱정하는 일단 자기 안위에 여유로울 때나 가능합니다. 느긋한 마음이 들어야 타인에게 관심둡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돔 나라는 이스라엘 이웃에 속한 나라입니다. 족보로 따지면 이스라엘과 같은 시조에서 비롯된 민족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동이가 있었는데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갖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이었더라”(창 25:23-26) 일단 인간들의 관심사는 가족입니다.

혈통과 가까운 친척에 대해서 결속이 우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기존의 나라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이는 가족단위에 의해서 구성되는 국가말고 일방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지목한 새로운 왕에 의해서 성립되는 나라입니다. 여기서 일반적으로 가족 단위의 결집에 의해 점차 커져서 국가 단위로 번지는 나라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나라를 원하신 겁니다.

이렇게 되면 내부적으로 개인의 기대함과 소원 달성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기대와 뜻을 실현하는 나라가 등장하게 됩니다. 과연 이스라엘 내부를 장식하는 소규모 가족 단위가 하나님의 율법을 충족시킬 수 있을까요? 결국 실패했습니다. 그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서 와해되었습니다.

호세아 2:16-17에서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단언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저의 입에서 제하여 다시는 그 이름을 기억하여 일컬음이 없게 하리라”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꾸준히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지만 실은 바알 신을 불렀다는 겁니다.

이 역시 가족의 번영과 안녕을 위해서 신을 가족의 일원으로 간주했다는데 이런 것이 바로 바알 신 섬기는 방식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법보다는 자신의 생존에 유리하고 필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얻어내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성‘을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감안하지도 않는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유다 나라를 처벌하고 그 다음 조치로서 에돔 나라에게 심판과 저주를 내리시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조치는 이런 안목이 필요합니다. 마치 밤이 달이 뜨면 달 주위에 환(고리)가 생기게 됩니다. 불랙홀이라는 그 근처에 그 흔적을 보이게 됩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유다나라 폭삭 망했다면 다른 주위 나라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눈치채야 했습니다.

즉 야곱과 에서가 형제인 것처럼 에돔 나라가 이스라엘과 붙어 있는 나라로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나타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변화에 관심을 두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에돔은 반대로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을 고소해하고 도리어 노예로 팔아먹고 불쌍히 여기지 아니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에돔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가 칼로 그 형제를 쫓아가며 긍휼을 버리며 노가 항상 맹렬하며 분을 끝없이 품었음이라”(암 1:11)

그리고 오바댜 1:10-12에 보면, “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을 인하여 수욕을 입고 영원히 멸절되리라 네가 멀리 섰던 날 곧 이방인이 그의 재물을 늑탈하며 외국인이 그의 성문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하여 제비뽑던 날에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었느니라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 유다 자손의 패망하는 날에 기뻐할 것이 아니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로마서 9:13에 나오는 말씀을 대하면서 주의해야 합니다.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과연 어느 누가 감히 “나는 야곱이다”고 나설 위인이 누가 있습니까? 예를 들면, 학급에 단짝이 어느 날부터 학교에 나오지 않을 때, 누구나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걔는 왜 학교에 안 나오지?” 그러나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이 바꿔야 합니다. “걔가 늘 내 옆에 꼭 붙어있어야 한다고 고집할 권한이 내게 있는가?”라고 말입니다.

즉 모든 말씀을 내 위주로, 혹은 내 가족의 행복 위주로 적용할 권한 우리에게 아예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대로, 에돔은 애돔대로 여호와 하나님의 활동에 대해서 개인적 입장에서 이해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해해야 바른 이해가 되는 걸까요? 하나님의 언약 적용은 모든 있음을 없음으로, 모든 살아 있음을 죽음으로 전환된 것을 전제로 해서 그 위에 싹을 피우게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41:9-10에 보면,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종된 이스라엘(야곱)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왕을 준비하셨는데 그 왕되신 분 자체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분이십니다. “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6) 따라서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창세 전부터 택함받은 야곱이라고 우길 것이 아니라 택함받은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 증거가 바로 고린도전서 6:20에 나옵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값’, 곧 ‘대속의 핏값’(롬 3:24)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새로 만들었습니다. 바로 이들은 로마서 11장에 나온 ‘온 이스라엘’입니다.(롬 11:26) 십자가 죽으신 분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는 분이니 새롭게 이스라엘이 된 자는 더는 사람의 종이 되면 안 됩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 7:23)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는 자기 가족을 지키는 중심으로 살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70강-예레미야 49장 7~13절(택한 백성)250907-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49장 7~13절입니다. 구약성경 1130페이지입니다.

“에돔에 대한 말씀이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데만에 다시는 지혜가 없게 되었느냐 명철한 자에게 모략이 끊어졌느냐 그들의 지혜가 없어졌느냐, 드단 거민아 돌이켜 도망할지어다 깊은데 숨을지어다 내가 에서의 재난을 그에게 임하게 하여 그를 벌할 때가 이르게 하리로다, 포도를 거두는 자들이 네게 이르면 약간의 열매도 남기지 아니하겠고 밤에 도적이 오면 그 욕심이 차기까지 멸하느니라, 대저 내가 에서로 적신이 되게 하여 그 비밀한 곳들이 드러나게 하였나니 그가 그 몸을 숨길 수 없을 것이라 그 자손과 형제와 이웃이 멸망하였은즉 그가 없어졌느니라, 네 고아들을 남겨 두라 내가 그들을 살려 두리라 네 과부들은 나를 의지할 것이니라,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이 잔을 마시지 않을 자도 마시지 않지 못하겠거늘 네가 형벌을 온전히 면하겠느냐 면하지 못하고 반드시 마시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로 맹세하노니 보스라가 놀램과 수욕거리와 황폐함과 저줏거리가 될 것이요 그 모든 성읍이 영영히 황폐하리라”

이용당했다는 거죠. 에돔이라는 나라가 철저하게 이스라엘이 믿는 여호와 앞에서 놀아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네가 무엇을 원하든, 어떤 것을 기대하든, 어떤 것을 희망으로 품고 살아갔든, 그것은 나, 여호와와 상관없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너의 인생은 작살났다는 겁니다. 그래서 에돔에게 이런 저주가 퍼부어지는데, 저주라고 하는데, 저주라는 것은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이 저주예요.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이 저주인 이유가, 인간은 존재하는 한 자기 뜻을 가만히 둘 위인이 없어요. 전부 다 자기 뜻을 위하여 애쓰고 힘쓰게 되어있습니다. 내 포부, 오늘 하루 스케줄, 그런 거 없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다 있잖아요. 그런데, 그 내가 하고 싶은 거, 내가 되고 싶은 거, 내가 원하는 것을 풀풀 나오도록 하시면서, 결국은 뭐냐? ‘너 나에게 농락당했어. 너 나에게 완전히 당한 거야’라는 쪽으로 이미 결론이 나와 있습니다.

인간들의 한계가 이거예요. 자기 뜻만 신경 쓰는데, 그 뜻마저 하나님 앞에 물거품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아예 아무런 뜻도, 아무런 계획도 안 세우면 된다고 그렇게 생각하는데,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이미 자기가 신이기 때문에, 나름의 인생 계획이라는 것이 누구나 있습니다. 있고, 나중에 하나님에 의해서 그것이 완전히 무산되고 깨어지지요.

이런 말씀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기쁜 소식이라고 합니다. 내 뜻이 무산되고 박살 나는 게 기쁨과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이건 슬픈 소식 아니에요? 에돔에 대해서 이렇게 저주를 퍼부었을 때, 이 에돔에 대한 이야기를 에돔 사람에게 전한다고 생각해봅시다. ‘여기 잠깐 와봐. 내가 너의 운명에 대해서 점쳐줄게. 이건 반드시 그렇게 될 거야. 너의 가정이 지금 어때?’

‘우리 가정 아주 화목하지. 자식은 나를 존경하고 아내는 나를 사랑해’, ‘그래? 그러면 너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의 자식은 고아가 될 거야’ 이 내용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바로 오늘 본문 11절에 나옵니다. ‘너의 아들은 고아가 된다’라는 식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네 자식 고아 된 거, 내가 살려줄게’라는 이거는 ‘고아 된다’라는 말보다 더 심한 모욕감을 안기죠.

‘네 집안 망하거든. 근데, 걱정하지 마. 네 자식 고아 되어도 내가 키워 줄게. 안 죽일게. 네 아내가 과부 되더라도, 그 과부가 하나님을 의지하게 될 거야’라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요, 네가 어떤 생각을 하든, 나는 반드시 너를 노리고 너를 저격하겠다. 너의 모든 뜻은 내가 짓밟고 또 짓밟을 것이다. 내가 너에게 일방적으로 준 이 잔은 네가 마시지 않으면 못 견디게 하겠고, 12절에 보면 이 형벌이 반드시 너에게 돌아가게 하겠다는 겁니다.

보스라나 대만이 전부다 지역 이름인데, 전부다 에돔 나라가 살던 지역의 이름, 지역 사람들을 하나하나 거론하시면서, 저주 거리가 된다는, 저주를 퍼붓는 대목입니다. 자, 이 대목을 보면서, 즐거워하고 기뻐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 하면, 나는 멀쩡한데, 저쪽을 저주하면 기쁘죠.

그런데 이 에돔에 대한 저주를 어떤 시기에 주셨느냐 하면, 이스라엘, 라이벌 관계에 있는 유다, 이스라엘이 철저하게 망하고 난 뒤에, 그다음에 이스라엘 혈통으로, 족보로 따져보면 형제 관계거든요. 그 형제 관계에 있는 에돔에게 저주를 퍼부을 때, 나는 시원하고 너까지 저주받으니까 내가 속이 시원하다고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나를 당하게 하신 하나님이 이제는 너까지 당하게 하시는구나. 그래, 인간들은 결국 하나님의 일에 놀아날 뿐이고, 자기 뜻이나 포부는 하나님 앞에 절대로 용납받지 못하는 그런 신세야’라고 하면서 어디로 가느냐, 제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에돔도 저주받았다. 이스라엘도 저주받았다. 그러면 인간 세계에 남는 건 뭐가 남느냐.

남는 것은 없지요. 아무것도 인간이 이룬 것은 없게 하는 것부터 하나님의 말씀은 성취가 되고, 싹이 나고, 실현되기 시작합니다.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하나님의 신기가 솜씨가 드디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건 결과적으로 뭐냐. 기쁜 소식이죠. 에돔이라 하는 것은 조상이 야곱의 형입니다. 창세기 25장 23절에 보면 이삭이 아기를 낳을 때 쌍둥이를 낳아요.

형은 에서가 되고 동생은 야곱이 되죠. 그 형 에서를 시조로 하는 나라가 에돔인데, 위치가 이스라엘 남쪽이에요. 이스라엘에서 이집트로 내려가는, 이집트와 이스라엘과의 경계선에 에돔이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식이 태어날 때, ‘그래, 너희들이 이제 태어났으니까 열심히 인생 잘 살아라’라는 이런 것이 아니고, 자식을 주면서 자식의 운명까지 그 자식에게 보태져서 주어집니다.

그러면 이삭에게 자식이 태어났다는 라고 이야기해도 되지만, 달리 이야기하면, 자식이 태어난 것이 아니고, 이삭의 언약이 태어났다고 보면 됩니다. 이삭의 언약이 사람 몸을 가지고 그 몸을 통해서 지금 펼쳐지기 위해서 서로 대조가 되는 운명, 완전히 차이가 나는 운명으로, 두 갈래로 나뉘어서 하나님의 언약은 계시가 되었다고 이렇게 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 하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라고 이렇게 종이 된다고 이미 확정되었고 결정되었습니다. 요즘,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 결정하는 회사, 결정사라고 하거든요. 결정사가 뭐의 줄임말이냐 하면, 결혼정보회사의 줄임말입니다.

결혼정보회사에서 미리 결정을 잘 지어버리면 팔자가 피는 겁니다. 미리 이렇게 운명에 대해서 정보가 이렇게 내려왔거든요. 내려왔는데, 신약에 로마서 9장에 보면, 그걸 아주 명쾌하게 “창세전부터” 운명이 이렇게 결정되어있다고 로마서 9장에 나와있습니다. 13절에 보면,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끝!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야곱이 들을 경우와 에서가 들을 경우가, 이건 완전히 반응에 차이가 나겠죠. 그러면 이걸 한번 생각해보세요. 학교에 다닐 때,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을 건데, 학교 학급에 단짝이 있는데, 어느 날 단짝이 학교에 안 나와요. 저도 그런 경험이 있는데, 국민학교 5학년 때, 정말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어느 날 나오질 않았습니다.

이름도 하정이라고 너무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기억이 나는데, 어느 날 내 짝이 학교에 안 나와서 내가 섭섭하다고 생각했는데, 여러분, 말씀을 보면서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된 질문일 수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 짝이 학교에 나와야 합니까? 이렇게 질문을 바꿔보자는 말이죠. 나는 여기 있는데, 내가 학교 다닐 재미와 흥미를 주고, 학교 다닐 보람을 주는 내 짝은 반드시 내 옆에 있어야 해.

이게 우리의 일방적인 고집 아닙니까. 잘못된 생각 아닙니까? 지금 창세 전부터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할 때, 제 말은, 이 말씀을 내 위주로 받아들이는 것은 곤란하다는 말씀입니다. 마치 내가 마땅히 야곱이라고 우기는 그 근거는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 ‘내가 야곱이어야 해. 내가 야곱 되어서 구원받아야 해’라는 나를 주께서 없애버려요.

없어져야 비로소 말씀은 그때부터 계시가 되니까요. ‘내가 여기 있으니까, 하나님이 저를 야곱으로 간주해서 창세 전부터 사랑한 사람이라고 제발 그런 이야기 해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더욱더 주를 사랑하겠습니다’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란 말이죠. 그 생각이 어디서 잘못되었느냐 하면, 바로 야곱과 에서의 관계를 통해서 그게 성립이 됩니다.

첫 번째 예인데요, 이게 약간 복잡하더라도 여러분이 참아내시길 바랍니다. 호세아 2장 16절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라고 되어있어요. “그 날에 네(이스라엘)가 나(여호와)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장차 그렇게 된다는 호세아 예언입니다.

이 말이 뭔 뜻이냐 하면,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를 섬기고 여호와에게 제사 드리고 집에 왔다고 칩시다. 그러면 본인 생각하기에, ‘나는 오늘도 여호와를 불렀다’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선지자 같은 경우에는 ‘너 오늘 뭐 했어?’라고 하면, ‘나는 오늘 교회 나와서 여호와를 불렀어’, ‘그래? 그건 여호와를 부른 것이 아니고 바알 신을 부른 거야’라고 하죠.

너는 지금 너의 행함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변명하고 정당화하는 그걸 너의 마음에 출발점으로 시작하는데, 그 자체를 하나님께서 인정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인간은 항상 하나님께 놀아나요. 놀아나기 때문에, 결과를 가지고 다시 나를 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한 거예요. 결과라는 것이 뭐냐.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섬긴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여호와 섬긴 것이 아니고, 바알을 섬긴 거예요.

바알은 여러분이 아시죠? 이방의 우상을 섬긴 거죠. 인간치고 여호와의 이름이 되었든 예수 이름이 되었든, 출발 자체가 우상 섬기는 인간이 아닌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그걸 전제로 해서,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는 이 말씀을 주신 거예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입니까. 그것 못지않게 어려운 것이 역시, 야곱과 에서와 관련해서 주어진 말씀이, 말라기 1장 3절에 나옵니다.

2절부터 보면,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라고 나오거든요. 여기서도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라고 할 때, 이 말씀을 본인이 야곱이라 생각하고 흐뭇해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자기가 야곱이라고 착각했던 그 야곱을, 하나님이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라는 말씀을 가지고 아예 폭격을 해버린 거예요. 박살 낸 거예요. 네가 어디를 봐서 야곱이야? 네가 무슨 근거에 의해서 야곱이라고 우기느냐? ‘혈통? 진짜 혈통 같은 소리 하고 있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인간의 혈통은 자연에 속합니다.

제가 울산강의에서 한 거 잠깐 언급할게요. 울산강의에서 제가 스트레스의 강도에 대한 순위를 1번에서 10번까지 나열하면서 했던 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여러분이 제일 스트레스 받는 것이, 자식이 죽는 것부터 해서 스트레스를 쭉 받는데, 이 스트레스 10가지 중에서 전체 내용이 뭐냐 하면, 자기 혈통과 가족에 대해서 잃어버릴 때 스트레스를 강하게 받아요.

그건 뭐냐 하면, 가족 중심이에요. 가족 중심주의, 혈통 중심주의입니다. 이건 누가 가르친 것이 아니에요. 대대로 타고난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서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라고 할 때, 사람들은 뭘로 이해하느냐 하면, 내 혈통은 어디지? 이걸 따지는 것부터 먼저 시작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교회 나와서 이야기하고 할 때, 모든 이야기의 대부분은 어디서 나옵니까?

자기 가족과 혈통에서 나오잖아요. 그 말은 어떤 이야기를 할 때, 그 마음속에 내 가족과 혈통만큼은 목숨 걸고 지키고 싶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때 뭘 놓치느냐 하면, ‘예수님은 어떻게 돌아가셨는가’를 놓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46절에 말씀, 시편 22편 1절에 말씀, 다윗 경우도 그렇고, 예수님 경우도 그렇고, 공통점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질문 자체가 다르죠. 질문 자체가.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지금 나의 모든 것을 이렇게 만드는 사태가 일어났는데, 그 사태가 일어나는 그 일어남과 하나님이 나에게 찾아오는 그 이유와 관련성이 있다는데, 그 관련성이 무엇인지를 묻는 거예요. 관련성을. 하나님이 나를 잃어버리시게 하는 그건 오케이, 그건 좋은데, 이유는 알고 잃어버리겠다는 뜻이에요. 이유는 알고.

예수님은 아시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 되기 위해 잃어버려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걸 아는데, 다윗 같은 경우에는 그걸 몰라요. 그냥 궁지에 몰린 겁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목숨이 위태롭게 됩니다. 당연히 가족들은 다 떠나고요. 그래서 울산강의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가족 중심인데, 가족의 소박한 행복을 사람들은 소원하고 있지요.

‘큰 거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 가족이 그냥 화목하고, 우리 아이들 남산 위에 노루 새끼처럼 그냥 열심히 뛰어노는 거, 열심히 뛰고 잘 사는 거, 그거 하나 소원입니다’라고 하거든요. 저는 옛날부터 우리 할머니에게 많이 들어서 그냥 구경하고 싶어요. 동물원에서 뛰어노는 노루 말고, 남산 위에서 노루가 어떻게 뛰는지, 부담 없이 잘 뛰어다니는지, 그걸 아직까지 내가 못 봤어요.

죽을 때까지 못 볼까 싶어요. 그냥 맨날 빌면, 그게 남산 위에 노루 새끼처럼 건강하게, 활기 있게, 잘 뛰어노는 거, 울산강의에서 했습니다. 그게 바로 국가권력 앞에 아무짝도 쓸모없다고 했습니다. 국가권력 앞에. 그러니까 인간은 얼마나 코 앞에 있는 것만 바라지, 지금이라도 국가에서 남자 60세 이하, 전부다 강제 징병한다고 하면, 지금 미국이랑 전쟁하고 있는 콜롬비아 보세요.

콜롬비아 전 국민 징병했잖아요. 미국이랑 전쟁한다고요. 우크라이나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가 뭔데 내 행복을 빼앗아 갑니까? 그냥 자식들이랑 소박하게 사는 게, 이게 뭐가 그렇게 시기 나서, 대통령 자기가 뭔 데, 네 맘대로 전쟁 벌여서, ‘너 나이 몇 살이야? 35세? 그럼 군에 와!’라고 강제로 군에 가서 총알받이나 하고, 이게 무슨 난리입니까?

세상을, 국가 밑에 세상, 국가 밑에 세상으로 우리가 살면서,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얼마나 개인주의적, 이기주의적인 좁은 소견에 불과한 거예요. 그렇다면 이건 뭐냐. 국가 자체를 바꿔야 하겠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만드신 거예요. 국가를 만든 겁니다. 개인이 국가 되는 것이 아니고, 국가를 만들어 놓고 개인이 거기에 소속되게 만드는 거예요.

그 이스라엘의 왕이 오시는데, 그 왕이 누구냐.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국가 자체를 바꿔버려요. 그게 이사야에 41장에 보면 그걸 어떻게 하느냐 하면, 모든 걸 없애고, 모든 걸 죽여놓고, 어떤 말씀이 들어가느냐 하면, 8~9절에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기존의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기존 이스라엘을 치워버려요. 기존 이스라엘을 치워 버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하나님의 왕이 자기 백성을 이렇게 말씀에 근거해서 택해버려요. ‘그럼 목사님, 택한 지 아닌지, 뭐 자기가 혼자서 택했다고 하면 선택받은 겁니까? 택했는지 아닌지 뭐가 증거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근거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 증거가 고린도전서 6장 20절과, 7장 23절에 나와요. 고린도전서 6장 20절을 먼저 보면,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여기에 값이 나와요. 7장 23절에도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그 값이 뭐냐. 로마서 3장, 4장, 5장에 보면 나옵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의 피예요.

십자가로 말미암아 값 주고 너희를 나의 택한 종으로 부를 때, 그게 바로 야곱이에요. 구약부터 내려왔던 진짜 야곱이 되고, 아무리 야곱이라고 할지라도 이것을 모르면, 에돔이 되어버려요. 혈통적으로 하나님의 지정된 그 혈통이 아니라서 버림받는 에돔이 되는 겁니다. 오바댜 1장이라든지 아모스도 그런 말씀 나옵니다만, 에돔에 관한 예언인데요, 아까는 에돔에 대한 예언을 그냥 미움으로 설명했지요.

아모스 1장 11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에돔의 서너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가 칼로 그 형제를 쫓아가며 긍휼을 버리며” 이게 뭐냐 하면, 유다가 멸망하는 것을 아주 고소하게 본 거죠. 그걸 잘 됐다고 한 그게 벌이 되어서, 에돔은 여호와 하나님께 심하게 당합니다.

그러니까 에서가 멸망하는 이유는 단지 이스라엘과 형제였고 붙어살았다는 거예요. 붙어사는데, 한쪽이 망해버리니까, 그 망한 것을 그들은 고소하고 잘 되었다고 신나 했던 겁니다. 불쌍히 여기지 아니했던 거예요. 그런데 이 블랙홀이나 달무리, 달무리는 달이 있는데 주변에 어떤 띠 같은 것은 형성 되어있지요, 그게 달무리 아닙니까.

뭔가 완전히 망해버렸는데, 그 망한 것이 근처에 망한 흔적이 남아있듯이, 이스라엘이 폭파되고 난 뒤에, 유다 나라가 망하고 난 뒤에 고소할 것이 아니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유다 나라가 멸망했을 때, 다른 이방 민족은 유다 나라가 멸망한 것을 고소해 하지 말고, 자기 나라인데 자기 나라를 언약 위반했다고 망하게 해버린 그 여호와 하나님을 나는 기쁜 소식으로 맞아드리겠습니다.

이게 바로 로마서 11장에 나오는 온 이스라엘에 접붙임을 당하는 구원받은 진짜 이스라엘, 이방 민족입니다. 이스라엘 망한 것을 좋아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좋아할 것이 아니라, ‘나는 이제 예수님 믿을 거야’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예수님을 미워했듯이 그 미움이 나에게도 있다는 것을 이제야 발견하는 거예요.

내가 얼마나 내 혈통 위주, 내 가족 위주, 예수님이 왕인데 내가 왕처럼 살았던 그것이 정말 망해야 마땅한 인간들과 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발견할 때, 이게 바로 택함을 받은 진짜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 망했다고 좋아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예수님 하신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항상 잊어버리지 말고 생각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이, 죽으신 그분이 우리의 왕이고 임금이고, 우리는 그의 백성인 것을 우리는 평소에 얼마나 기뻐하고 좋아했는지, 돌아보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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