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매질
2025년 8월 31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49:1-6
49:1 암몬 자손에 대한 말씀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이 무자하냐 상속자가 없느냐 말감이 갓을 점령하며 그 백성이 그 성읍들에 거함은 어찜이뇨
49:2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전쟁소리로 암몬 자손의 랍바에 들리게 할 것이라 랍바는 거친 무더기가 되겠고 그 촌락들은 불에 탈 것이며 그 때에 이스라엘은 자기를 점령하였던 자를 점령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49:3 헤스본아 애곡할지어다 아이가 황폐하였도다 너희 랍바의 딸들아 부르짖을지어다 굵은 베를 감고 애통하며 울타리 가운데서 앞뒤로 달릴지어다 말감과 그 제사장들과 그 방백들이 다 사로잡혀 가리로다
49:4 타락한 딸아 어찌하여 골짜기 곧 네 흐르는 골짜기로 자랑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재물을 의뢰하여 말하기를 누가 내게 오리요 하느냐
49:5 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두려움을 네 사방에서 네게 오게 하리니 너희 각 사람이 쫓겨서 바로 나갈 것이요 도망하는 자들을 모을 자가 없으리라
49:6 그러나 그 후에 내가 암몬 자손의 포로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스라엘 주변 나라에 해당되는 암몬은 수시로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침략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블레셋 사람의 손과 암몬 자손의 손에 파시매”(삿 10:7) “얼마 후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하니라”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암몬 나라가 성가신 나라이지만 암몬 입장에서는 국가의 규모를 키우는 것을 정상적인 국가 운영의 해당됩니다.
두 나라의 전쟁에서 누가 옳고 그르고 성립되지 않습니다. 누가 국력을 키우는데 성공하고 어느 나라가 실패했느냐가 사람들의 관심사입니다. 혹은 어느 나라가 백성들의 삶이 여유가 있느냐 없느냐로 판정내립니다. 이게 바로 ‘행복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복주의’는 이미 목표가 정해져 있습니다. ‘나의 행복, 우리 가족의 행복’으로 말입니다.
따라서 암몬 족속도 예외가 아닙니다. 자기 민족 백성들이 행복하고 잘 살겠다는데 누가 감히 ‘그것은 잘못이다’고 험담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하십니다. 즉 “왜 너희 암몬 족속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 돌아오지 않느냐”는 겁니다. 마치 점치는데 빠져 있는 사람보고 “왜 너는 십자가를 안 믿느냐”고 나무라는 것은 많이 이상한 경우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남이사 무슨 종교를 믿든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핀잔 듣게 될 게 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암몬 자손의 나라가 멸망하는 것이 여호와께서 직접 심판하시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런 사실을 전할만한 입장에 서 있는 자들이 과연 누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암몬을 칠 때도 있었습니다.
다윗 때입니다. “해가 돌아와서 왕들의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 신복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저희가 암몬 자손을 멸하고”(삼하 11:1) 그리고 여호사밧 때입니다. “ 옛적에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에 암몬 자손과 모압 자손과 세일 산 사람을 침노하기를 주께서 용납하지 아니하시므로 이에 치우쳐 저희를 떠나고 멸하지 아니하였거늘
이제 저희가 우리에게 갚는 것을 보옵소서 저희가 와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주의 기업에서 우리를 쫓아내고자 하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 유다 모든 사람은 그 아내와 자녀와 어린 자로 더불어 여호와 앞에 섰더라”(대하 20:10)
이것을 볼 때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주변 국가로서 붙어 있는 이유는, 이스라엘을 괴롭히면 하나님께서 가만두지 않는다는 차원에서 존재의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암몬 자손을 치는데 있어 옛날 다윗 때처럼 이스라엘을 통해서 치지 않는 겁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이미 자기보다 더 강한 나라를 선망하게 된 형편에 치우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편이다’라는 생각이 근원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경우라도 자동적으로 그 민족에 편들은 적이 없습니다. 성경의 대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다. 둘째, 말씀을 매개로 해서 일하신다. 셋째는 인간들은 일체 그 일에 관여할 수 없다 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셋째부터 보겠습니다. “나는 관여 안해”라는 식으로 관여를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앞에서 ‘관여 안 하는 친 백성은 다음과 같은 고백을 쏟아내는 사람입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
즉 하나님 말씀 작용에 감히 인간이 끼어들지 못하는 이유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 말씀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암몬 자손을 징벌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 말고 다른데 관심돌리지 않을 경우입니다. 오늘날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 믿지 않는 자들을 다 망했으면 좋겠다고 마음먹기 위해서는 자기만큼은 멀쩡하다고 여기면 안됩니다. 본인조차 감히 하나님 말씀 활동에 끼어들 입장이 못됨을 철저하게 자인하고 있을 경우입니다. 쉽게 정리하면 이러합니다. 성도는 진리를 세상에 권하지 말아야 합니다, 도리어 거짓을 권해야 합니다.
거짓을 권하는 방법은 진리를 전하는 겁니다. ’권하는 것‘과 ’전하는 것‘을 구분해주세요. ’권하지‘는 않지만 ’전하는 것‘은 해야합니다. 전하는 방식은 성도 자신이 말씀의 매질이 되는 겁니다. 말씀의 매개자가 되는 겁니다. 매질, 혹은 매개자란, 마치 소리 파동이 공기라는 매질이 없으면 전달되지 않는 이치와 같습니다.
신약 성도에게 있어 매질 기능에 대해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눅 19:40) 즉 자신에 돌에 불과한 것을 인식 못하는 경우라면 매질 기능을 할 수 없다는 겁니다.
남들에게 복음 전하면서 그 사람이 자기에게 말려 들어오는 성과를 기대하는 것은 사기꾼입니다. 복음을 잘 전하든 못하든 자신은 아무런 별 볼일없는 돌멩이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매질의 특징입니다. 누가복음 2:35에 보면,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제 다시 사무엘하 11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다윗은 암몬 간의 전쟁에서 자신이 이스라엘 왕이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렇다면 암몬 전쟁에서 헌신적인 우리아 장군을 누가 죽였습니까? 바로 이스라엘의 전쟁 총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 다윗왕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벌리시는 전쟁에 기껏 돌멩이에 해당됨을 잊었습니다.
다윗은 암몬 나라가 이스라엘의 적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하나님과 같은 편에 서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암몬과의 전쟁은 이스라엘 내부에 적이 또 있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원칙에 준해서, 이스라엘 주변나라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멸망시키지만 극도의 혹독한 참변은 바로 이스라엘에게 떨어집니다.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질러 내려 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질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마 24:16-21)
예수님의 십자가는 아버지로부터 언약을 이루기 위해 궁극적인 저주 말씀의 매질 기능을 완료하셨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의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늘 말씀의 매질로 다루어짐을 영광스럽게 여겨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행복주의가 하나님의 적이됨을 명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69강-예레미야 49장 1~6절(사랑의 매질)250831-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49장 1~6절절입니다. 구약성경 1130페이지입니다.
“암몬 자손에 대한 말씀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이 무자하냐 상속자가 없느냐 말감이 갓을 점령하며 그 백성이 그 성읍들에 거함은 어찜이뇨,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전쟁 소리로 암몬 자손의 랍바에 들리게 할 것이라 랍바는 거친 무더기가 되겠고 그 촌락들은 불에 탈 것이며 그 때에 이스라엘은 자기를 점령하였던 자를 점령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헤스본아 애곡할지어다 아이가 황폐하였도다 너희 랍바의 딸들아 부르짖을지어다 굵은 베를 감고 애통하며 울타리 가운데서 앞뒤로 달릴지어다 말감과 그 제사장들과 그 방백들이 다 사로잡혀 가리로다, 타락한 딸아 어찌하여 골짜기 곧 네 흐르는 골짜기로 자랑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재물을 의뢰하여 말하기를 누가 내게 오리요 하느냐, 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두려움을 네 사방에서 네게 오게 하리니 너희 각 사람이 쫓겨서 바로 나갈 것이요 도망하는 자들을 모을 자가 없으리라, 그러나 그 후에 내가 암몬 자손의 포로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
본문에 두려움이 마을에 찾아왔다고 나오거든요. 여러 가지, 하나님께서 그 지경을 사로잡혀 가게 하고 전쟁의 패배자로 만들 것이라는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는데요, 우리가 이것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암몬이라는 나라가 망한 것이 자연현상 때문에 망했는가, 아니면 사람 때문에 망했는가’라는 그 점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사는 게 힘든 것이 자연 때문에 날씨가 더워서 힘듭니까, 아니면 사람 때문에 힘듭니까. 그것에 대한 정답은 우리가 내릴 것이 아니고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죽은 것이 자연현상이었습니까, 아니면 사람 때문에 죽었어요? 그 질문을 통해서 명확하게 정답이 나와 있습니다. ‘사람이 자연보다 더 악하다. 악한 것은 사람 속에 들어가 있다’라는 이것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일관되게 하나님이 이야기하시는 겁니다.
천하보다 악한 것이 바로, 짐승도 아니고 바퀴벌레도 아니에요. 코로나도 아닙니다. 바로 인간 맘속에 들어있는 것이 가장 악하다고 되어있어요. 우리는 그 악함의 자손이에요. 악함이 악함 보고 서로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서로 정의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악하다는 것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그 악함을 끄집어낼 필요가 있겠지요.
하나님께서 끄집어내는 방법이 뭐냐 하면, 악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로운 나라를 악한 민족들 속에 집어넣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이방 나라가 있는데, 이스라엘이 비집고 들어왔다고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나라가 있는데, 그들은 자기 나라가 악한 줄도 모르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보는 것도 모르고, 관심도 없어요.
그저 옆 나라보다 더 잘 먹고 잘살면 그만이에요. 지금 인도네시아에서 하원 국회의원들이 서민들의 10배가 넘는 주택수당 연금을 받았다고 지금 인도네시아에 불나고, 시위하고 난리 중이거든요. 그러면 인도네시아 관리들의 부패 정도가, 아시아에서는 중국 그다음으로 가장 부패한 나라가 인도네시아입니다. 그러면 인도네시아 백성들 입장에서는 뭐냐 하면, ‘저 태국만큼만 되어라. 저 베트남만큼만 되어라’라는 이게 그들의 목표예요.
그들이 고만고만해요. 저쪽보다 부패 덜 하면 자기는 선한 줄 알고 있어요. 그런데 만약 그들 가운데서 이스라엘이 있다고 칩시다.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그 동네들이 있거든요. 그 속에 이스라엘이 그 옆 동네에 섬 하나 잡고 이스라엘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은 어떻게 되느냐. 이스라엘과 비교 대조에 들어갑니다.
왜 너희들은 이스라엘만큼 못 되느냐고 따짐을 당하면서, 그 주변에 인도네시아, 태국, 말레이시아, 이들 나라 다 죽습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너희들이 뭔데 여호와를 안 믿느냐. 저기 봐. 이스라엘은 여호와 믿잖아. 너희들은 왜 여호와 하나님 믿는 백성이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은 여호와를 믿지 않느냐”
단지 그게 시비가 되고 그 나라가 망해야 마땅한 이유가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게 오늘 본문에 뭐냐 하면, 1절에 보면 “말감이 갓을 점령하며 그 백성이 그 성읍들에 거함은 어찜이뇨” 여기서 말감이라고 하는 것은 감이나 상주 곶감 종류가 아니고요, 그들은 우상입니다. 밀곰, 말감, 몰렉이라는 것이 전부 다 같은 말인데, 그들은 말하기를 이 신이 우리의 왕이 된다는 취지에서 말감이라는 우상을 섬겼던 거예요.
어느 민족이든 자기가 원하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조상부터 섬겼던 그 신을 섬기는 것이 그 나라 입장에서는 전혀 잘못된 것이 없어요. 인도도 잘못된 것이 없고, 중국도 잘못된 것이 없고, 미국도 잘못된 것이 없고, 그들이 아무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때문에 망합니다. 바로 그 이야기를 성경에서 하는 거예요.
우리는 우리 신이 있다고 그거 믿으면 된다고 여기는데, 여호와 하나님이 “왜 너는 여호와 안 믿고, 다른 신 믿어? 죽어라”라고 해서 그들이 멸망 당하는 여호와의 일방적인 선언이 이 성경에 담겨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이제 알 것은, 그다음 이야기, 그들은 왜 이스라엘의 여호와를 안 믿느냐. 그것만 따지면 되겠죠. 왜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을 그들은 왜 안 믿는가.
안 믿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이 말감신을 부러워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호와에게 몰입해야 할 그 이스라엘이 여호와에 관심이 없어요. 그 대신, 인간의 힘으로 잘 먹고 잘사는 데, 온통 정신이 다 빠져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 이야기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저 암몬, 지난번에 모압을 하나님께서 멸망시키면서 그 심판의 손가락, 심판의 지적하는 방향이 주변을 치면서 서서히 어느 쪽으로 가느냐 하면, 이스라엘 쪽으로 옮겨 가는 거예요.
여호와를 믿지 않는 백성들을 작살내면서, 마지막 남아있는 작살 대상은 이스라엘로 옮겨갑니다. 보이지 않는 심판 주가 암몬 치고, 모압 치고, 지난번에 블레셋도 치고, 다 치면서, 심판 주가 진짜 치려고 하는 것은 바로 내 백성 이스라엘을 공격하려고 하는 겁니다. 베드로전서에 보면 그게 나오죠.(벧전4:17) 마지막 때, 하나님의 집이 심판받는다. 누구에게? 하나님께 심판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우리의 생각은 뭐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우리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이런 생각 자체를 성경에서는 용납하지 않습니다. 대처하지 마세요. 이 성경에 세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 모든 일은 하나님이 일으키신다.
둘째, 모든 일은 말씀 중심으로 일으킨다.
셋째, 인간은 관여하지 말라.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관여하는 데 있어서, 인간은 관여하지 말라. 이사야 6장 5절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여호와를 직접 보니까, 모든 일은 여호와께서 알아서 하셨다는 겁니다.
두 번째,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말씀을 자기가 알아서 지키고, 세 번째, 우리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기에 관여할 것이 없이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그걸로 끝나는 겁니다. 들어보면 굉장히 쉬워요. 천국 가는 것이 굉장히 쉬운데, 어디서 걸리느냐 하면 세 번째가 안 돼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가 안 되는 이유가 뭐냐. 세상의 즐거움에 푹 탐욕을 해서 그래요.
내가 뭐가 못 나서 남들 누르는 거 못 누리느냐. 지금 정신이 어디 있느냐 하면, 말씀 중심인데, 말씀 중심에서 관심 돌려서, 남들은, 하나님 안 믿는 남들은, 예수님 복음 모르는 남들은, 얼마나 떵떵거리며 잘 먹고 잘사느냐에 관심 두는 거예요. 제가 김건희라는 사람 구속당하는 거 보고, 마음속에 생각한 게 이겁니다.
그 점쟁이 믿지 말고, 십자가 믿으면 될 건데. 이게 말은 굉장히 쉬워요. 점쟁이 말 믿고,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옮기고 그런 짓 하지 말고, 그냥 예수님 십자가 믿으면 되잖아요. 그런데, 안 되지요. 어디 친구에게 해보니까 되던가요? 여러분, 남들에게 진리를 권하지 마세요. 거짓을 권하세요. 거짓을 권하는 방법은 진리를 전하면 됩니다. 이건 뭐, 말장난도 아니고.
한번 들어보세요. 진리를 권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진리를 믿으세요’라고 하지 마세요. 이건 인간의 능력이 안 됩니다. 진리를 권하지 말고 진리를 전하면 됩니다. 진리를 전하는 방법은 그들 앞에서 이 말씀은 관심도 없는 거짓이에요. 그 거짓을 전하면 됩니다. 그러면 실제 예를 들면 어떻게 되느냐. 성당을 다니고 있는 사람에게 하면 됩니다.
성당에 다니는 사람은 십자가를 믿는 사람들이 아니고, 마리아를 믿는 사람이에요. 마리아가 거짓되거든요. 우상이란 말이죠. 그럼, 마리아를 그들이 왜 믿느냐. 그들은 행복주의예요. 성당에 다니는 이유가 자기 인생이 행복해지고 싶어 하는 거예요. 관심사가 자기 행복에 있어요. 진리에 관심 없습니다. 자기가 진리이기 때문에.
자기가 진리라는 자체가 거짓되거든요. 거짓된 자에게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그건 개돼지에게 전하는 것과 똑같아요. 그냥 진리를 전하면 됩니다. ‘내가 망한 것처럼 당신도 망합니다’ 내가 망한 것처럼. 주님께서 말씀으로 움직인다는 말을 약간 어렵게 해보겠습니다. 이게 매질이라고 해서, 물리학에서는 매개자, 또는 매질입니다. 파동의 소리가 들리는 것은 공기가 매질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공기가 없는 곳에는 백날 고함을 질러봐야 입 모양만 보이지 소리가 안 들려요. 공기가 없으면요. 소리는 공기가 스스로 움직이는 파동에 의해서 소리가 귀까지 들리게 되어있어요. 매질이 없으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빛은 매질이 뭐냐. 빛도 파동인데, 매질은 뭐냐. 없어요. 이것이 과학자들에게는 빛이 이상한 거예요.
그래서 과학자들은 빛에 대해서 모르겠다고 결론 내립니다. 아무 매질도 없는데 파동으로 움직이는 거예요. 그래서 내린 결론이 뭐냐, 빛이라 하는 것은 전자기파가 알아서 입자 노릇을 하면서 전해진다고 이야기하는데, 이 세상에 매질이 없는 것은 없어요. 그래서 성경은 뭐냐. 말씀이 매질입니다. 말씀이라는 물결이 스스로 움직여서, 복음이 우리에게 전달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 심판의 말씀이에요. 심판이 우리에게 전달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그걸 어떻게 아느냐. 아버지와 아들 사이 관계에서 말씀, 언약이 매질이 되어서 아버지가 준비한 심판이 아들에게 저주로 임했습니다. 신명기 21장 23절에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라고 되어있거든요.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 점을,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은 나무에 달렸어요. 십자가라는 나무에 달렸다고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받기 때문에, 저주의 자리가 어디지? 그 저주의 자리로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저주받도록, 말씀이 매질이 되어서 예수님은 그 매질 따라, 파동 따라서 기어이 십자가에 저주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가 뭐냐 하면, 모호하고, 애매하고, 깊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십자가만 알면 다 풀린 거예요. 십자가만 알면. ‘아, 예수님을 자기 아들인데도 불구하고 저주받게 한다는 것은, 나머지 인간들은 이 말씀의 매질 안에서 모두, 저주를 안 받을 인간은 한 명도 없구나’라는 식으로 저주하는데, 방법이 뭐냐. 말씀으로, ‘너 말씀 지켰어?’라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저주가 임하는 거예요.
그래서 모압, 암몬, 이런 자들을 조지고, 마지막에 이스라엘 박살내는데, 그거는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 예언했어요. 차라리 아이 없는 자가 복될 정도로 너무나 처참하게 이스라엘이 망가진다고. 이방 나라 망가지는 것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이스라엘이 망가지는 것은 가장 지독하게 망가집니다. 이것은 바로 죄의 구심점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자연현상 때문에 죽은 게 아니에요. 죄 때문에 죽은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씀이 죄를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 자기 백성을 통해서 들춰내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런 원칙이 과연 구약에 없는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고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사무엘하 11장 1절에 보면, 여기에 암몬이 개입합니다.
암몬이라는 나라는 지금 위치가 어디쯤 되느냐 하면, 위치가 요르단이에요. 이스라엘과 요단강 쪽으로 바로 붙은 나라는 모압이고, 그 모압과 사우디아라비아 쪽으로 붙은 나라가 암몬이에요. 이스라엘에 붙어 있긴 붙어 있는데, 약간 떨어져서 동쪽으로 붙어 있는 나라가 암몬입니다. 그러면 그 붙어 있는 나라가 가만히 붙어 있으면 되는데, 이스라엘을 굉장히 괴롭혔어요.
성경에 보면 무지무지하게 많이 나옵니다. 모압과 암몬이 합세해서 괴롭히는 경우도 있고, 암몬에서 단독으로 괴롭히는 경우도 있는데, 사무엘하 11장 1절에 보면, “해가 돌아와서 왕들의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 신복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저희가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으니라”라고 되어있습니다.
전쟁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의도적으로 전쟁하게 했습니다. 여호와를 안 믿는 이방 나라 전쟁하게 하는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신기한 전쟁을 하나님께서 아직까지 허락하신 거예요. 내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말씀, 약속이라는 매질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말씀이 안고 있는 심판의 능력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방 나라를 심판하도록 다윗을 이용한 거예요.
그러니까 다윗은 뭐냐. 말씀에 입각한 하나의 매질이 되는 겁니다. 매질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네가 나를 건드린 것은 하나님을 건드린 것이다’라는 이게 매질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성도들끼리 주의할 것은요, 하나님에 의해서 자기 생각을 하지 않고, 자기 생각보다도 주의 마음으로 주의 생각으로 자기를 보는 사람은 그 누구도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자기가 자기 관리하고 자기 믿음 좋다고 할 때는 함부로 하세요. 그건 의미 없어요. 그러나 내 인생은 이상하게 주님께서 자꾸 관여한다는 그 사람은 왜 건드리면 안 되냐 하면, 그 사람 자체가 하나님의 매질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본인은 잘난척하느냐. 잘난척할 수가 없어요. 말씀이 왔다는 말은, 나는 죽어 마땅함을 알고 있는데, 어떻게 자기가 자기를 관리합니까.
그것을 세 자로 뭐라고 하느냐. 선지자라고 합니다. 누가복음 2장 35절에 시므온이라는 선지자가 나오는데, 27절에 보면 성령을 받았어요. “성령의 감동으로” 그런데 35절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선지자가 매질로써, 매체로써, 매개자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연결할 때, 어떤 원칙으로 합니까? 한마디로 하라면 이겁니다.
그 사람의 말은 사람의 마음을 칼로 찌르듯이 찔러버립니다. 책임집니까? 책임 안 집니다. 그냥 찔러버립니다. 내 마음은 나도 몰라. 그냥 주신 말씀으로 찔러버려요. 앞뒤 안 가립니다. 체면 같은 거 없어요. 칼로써 사람을 도려내듯이 찔러버립니다. 그 사람을 성도 만들려고?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런 거 없어요. 진리로 권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진리를 전하지, 권하지 않습니다.
저 사람 신자였으면 좋겠다. 그런 거 없습니다. 그러면 선지자의 기능을 예수님께서 이미 매질로 성령을 보내서 그런 일을 하겠다는데, 그럼 어떻게 되느냐. 누가복음 19장 40절입니다. 어떤 바리새인들이 사람들이 “호산나”라고 외치니까 뭐라고 욕할 것이 아닙니까. 그 앞 절에 보면,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그리고 40절에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 자, 여기서 나왔지요. 나에서, 나라는 주체가 있었는데, 성령이 오고 난 뒤에는 나는 성령에 의해서 십자가에 같이 죽게 되고, 죽고 난 뒤에는 뭐가 된다. 돌이 된다. 그러니까 부르짖는 것을 취미로 하시면 안 됩니다. 본인이 돌이어야 해요. 본인이 아무 가치 없는 돌이 될 때만, 말씀으로 찌르듯이 찌를 수가 있어요. 왜? 자체가 하나님 말씀의 매개자가 되기 때문에.
자꾸 말씀이 시키니까, 안 찌를 수가 없어요. 그렇다고 시도 때도 없이 찌르는 게 아니에요. 돌이 될 경우만. 내가 이거 해서 어떤 효과를 얻고, 저 사람이 나에게 감동받고, 이런 건 자아지 돌이 아닙니다. 돌은 그냥 그 존재 자체뿐이에요. 돌이 될 경우만, 주께서 “너 돌이야? 그럼 내가 쓰겠다” 돌 될 경우만 쓰시니, 외치게 하실 때, 외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이건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고, 그런 사람을 함부로 할 수가 없어요. 뭘 어떻게 시비를 겁니까. 그러면 이거 다음에도 또 써먹어야지. 그런 것도 없어요. 써먹기는 뭘 써먹어요. 그냥 소나기 오듯이 비 올 때, 남의 동네가 비온다고 우리 동네도 비와야 합니까? 그런 거 없어요. 내가 뭔데 비를 오게 안 오게 해요? 나는 말씀을 전하는 매개자일 뿐이지, 내가 주도적으로 내 인생을 관리할 권한은 박탈당한 그런 상태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17장 5절에 말씀을 하고 마치겠습니다. 마태복음 17장 5절 말씀은 강의 시간 같으면, 다 같이 찾고, 다 같이 제창하고 같이 하고 싶어요. 만약에 내가 자식에게 유언을 남긴다면 딱 하나, 이 말씀 유언으로 남기고 싶습니다.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하나님께서 구름 속에서 우리에게 당부한 것은 딱 하나예요. “너희는 예수의 말만 들으라” 끝!
“너는 나의 매질, 매개자라 되어라” 이걸로 끝났습니다. 그러면 사무엘하 11장 짧게 하고 마치겠습니다. 암몬이 공격할 때, 이스라엘이 전쟁할 때, 이 가운데서 다윗 언약이 나타납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것이 남편 우리아를 죽였던 그 일이, 암몬이 이스라엘을 건드릴 때, 그때 다윗은 자기가 매개자, 매질이라는 사실에서 자신은 이탈했습니다.
이스라엘 왕이니까 당연히 하나님이 우리나라 이스라엘을 승리하도록 하면, 임금으로서의 자기 일이 끝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전쟁에 누가 등장하느냐 하면, 우리아 장군이 참전했어요. 여기서 문제 나갑니다. 우리아 장군을 누가 죽였습니까? 그러니까 이 성경이요, 너무나 신기한 것이, 도대체 어느 인간치고 하나님의 적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인간은 하나님 매개자의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써 메시아가 된 것처럼, 마찬가지로 날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지킬 위인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전하는 겁니다. 그냥 하나의 돌로써,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주께서는 우리를, 주님이 다 이루었다는 것을 증거하는 증인으로서 그냥 살아가는 거예요. 뭐 쥐뿔도 없어요. 내세울 만한 어떤 것도 없어요. 그냥 말씀이 떠오르면 전할 뿐이죠.
그것이 바로 다윗 언약입니다.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 남편을 암몬 자손에 의해서 죽게 만들어서, 도대체 우리의 적, 나의 적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내가 바로 죄인 중에 괴수”라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라는 이 말씀이 기초가 되어서 우리는 모든 말씀을 거침없이 전할 수 있습니다. 당당하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된 이스라엘은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라는 그것부터 출발한다는 사실을 저희들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사용하시되, 기초는 십자가인 것을 이제는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매질 媒質 어떤 파동 또는 물리적 작용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주는 매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