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몸에서 몸으로

아빠와 함께 2025. 8. 31. 21:42

몸에서 몸으로 

2025년 8월 31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1:39-40

11:39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11: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다수의 사람들이 구약 성경에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 다수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가는 식이 아니라 반대로 예수님께서 그들을 강제로 자기 쪽으로 잡아 당겼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재림 때와 같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

구약의 성도들이 알아서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삶은 하나님에 대해서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찼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을 ‘신앙인’되게 하신 것은 그들의 성실함이나 신뢰가 아니라 ‘약속’이라는 분이 그들을 자기쪽으로 강하게 잡아당겼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당기시는 힘은, 최후의 원수인 사망마저 이기신 그 힘 때문입니다. 원래 인간이 살았던 에덴은 굳이 시간이 흐를 이유가 없던 세계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범죄로 인하여 생명나무가 있던 그곳에서 강제로 추방되고 난 뒤, 이 인간의 근본된 토지에 ‘시간’이라는 것이 흐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끝은 누구도 예외에서 사망으로 마감되기에 고린도전서 15:26에서, ‘최후의 원수는 사망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왜 마귀를 최후의 원수로 여기지 않고 ‘사망’이라고 했을까요? 그 이유는 그 어느 누구도 사망의 위세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사망의 위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언명에 대해서(창 2:17) 다른 대안을 마련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직도 살만한 가치가 있기에 죽으면 안돼’라는 정당성을 나름대로 마련코자 했습니다. 이게 ‘자기 의’입니다. 범죄하고 난 뒤에 자기 몸에 발생된 게 있는게 그게 바로 수치입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창 3:7) 즉 인간들은 자체적으로 의를 생산해서 몸에서 일어나는 부끄러움을 봉합하려고 하면서 살아가기 시작한 겁니다. 즉 살아있기는 살아있지만 부끄러움이 문제이니까 이 부끄러움을 가리는 연출을 해서라도 기어이 살아야겠다는 정신을 갖게 된 겁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공식이 주님에 의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주님에 의해 살아있다=나는 죽었다+믿음’입니다. 이 공식을 다음과 같은 변형해도 괜찮습니다. ‘주님에 의해서 살아있다-믿음=나는 죽었다’ 또한 이 공식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도 상관없습니다. ‘주님에 의해서 살아 있다-내가 죽었다=믿음’

믿음이란 주님 앞에 내가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몸과 마음이 분리되는 겁니다. 따라서 성도에게 있어 자신의 마음을 기존의 육신에서 분리되어야 합니다. 기존의 육신은 인간의 마음으로 하여금 ‘자기 의’를 무장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수치스러운 것을 마저 메울 수가 없어 인간들이 될 수 있는대로 법들을 끌어당깁니다.

사람들의 심보가, 법을 준수하게 되면 뿌듯해집니다. 당당해집니다. 갑자기 자기에게 수치가 없어져 완전하게 누구에게도 굴리지 않을 것같이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 18:10-13) 당연이 주님께서는 바리새인을 천국에게 탈락인물로 지목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육신에서 떠날 새로운 안목과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인간의 마음으로 사망을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인간들은 자꾸 법을 동원해서 자기 정당성을 나름대로 확보하려 하지만 고린도전서 15:55-56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따라서 허다한 증인들을 한 분의 약속으로 끌어당기는 방법은 기존의 시간 흐름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미 “다 이루신” 상황으로 거꾸로 그들에게 적용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모세가 이런 혜택을 입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니 하는 동시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2-5)

즉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친히 나타나시어 자신과 대조하십니다. 타면서도 사라지지 않는 본재로 등장시키시는 겁니다. 이것은 곧 십자가 이후에 부활이 아니라 핵심을 십자가 사건이며 이 십자가 중심을 위해 부수적인 결과로 부활이 이미 마련되어 있었던 겁니다. 인간들이 해결할 수 없는 것은 ‘사망을 이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친히 아담이 되셔서 사망을 이기시어 그 안목과 마음으로 기존의 육신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강제로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십니다. 그러면 그들 예수님의 신부는 모두 예수님의 단일 짝이 되시는 겁니다. 그들에게 ‘죄 사함’을 주시므로서 그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 의로서 자신을 수치를 가리는 짓을 못하게 하십니다.

죄사함을 받았으며 이제 이 세상에 그만 살아도 상관없습니다. 그럼에도 성도가 계속 이 세상을 보내는 것은 주님의 주신 안목이 얼마나 대단히 큰 사랑인지를 알아서 천사처럼 성도의 모든 일을 짝이 되시는 주님의 일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인간이 그동안 무엇 때문에 고만하고 걱정했는지를 새로운 안목으로 보게 하시는 겁니다.

성도의 일은 이제 없습니다. 모든 일은 다 주의 일입니다. 천국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는 곳입니다. 나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가죽옷으로 우리의 수치를 덮혀주시니 저희들은 복음으로 부끄러워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82강-히브리서 11장 39-40절(몸에서 몸으로)250831-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1장 39-40절입니다.

히브리서 11:39-40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나오고 ‘저희’가 나오죠. 먼저 믿었던 구약의 신앙인들을 ‘저희’라고 하고요, 사도의 편지를 보고 그 편지의 내용이 곧 실제 현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신약의 믿는 사람들을 ‘우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우리’라고 하는 오늘날 성도나 ‘저희’라고 하는 구약의 신앙인 사이에 단 한 분이 존재해요, 단 한분입니다.

‘저희’들은 뭔가 증거는 받았으나 약속은 받지 못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증거는 약속으로부터 미리 뻗어져 나간 거예요. 미리 깔려 나간 거예요. 그러니까 신약의 예수님이 하신 그것이 약속의 완성인데 그 약속의 완성이 시간을 거꾸로 돌려서 구약 성경, 옛날 예수님 오시기 이전에 이 약속의 부분들과 그림자와 흔적들이 뻗어져 나가 있었던 겁니다.

<헨델과 그레텔> 그 동화처럼 아이가 자기 집을 찾아오는데 조약돌을 툭툭 던져놨단 말이죠. 그 조약돌을 주우면서 가게 되면 그 방향이 처음에 출발했던 자기 집으로 돌아오듯이 그 ‘구약 사람들이 증거, 증거, 증거…, 축적된 그 증거를 따라오게 되면 최종적으로 그 증거가 도출되었던 원천, 약속이 나온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구약의 증거 따라가면 약속 나옵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고 약속이 증거를 잡아당깁니다. 약속이 증거를 잡아당겨요. 데살로니가전서에 보면 4장 16-17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잡아당기는 거예요. 공중에서 땅에 있는 ‘우리’를 잡아당기는 겁니다. 당길 때는 겨드랑이에 밧줄이 있겠죠? 이 겨드랑이의 밧줄처럼 우리를 꼼짝 못 하게 묶어서 강제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두레박 건지듯이 또는 낚싯대 돌리듯이 잡아당기는 거예요. 그 당기는 힘에 발악해서 저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초반에 오늘 본문을 단출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다수는 한 분, 단수, 단 한 사람에게 강제로 끌려가게 되어 있다, 끌려간다.” 신약에 있는 많은 다수의 성도도 한 분에게 끌려가는 겁니다. 그 많은 다수의 성도가 결국 한 분에게 끌려간다면 결국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말씀과 기적은 아주 간단하게 정리될 수가 있어요.

“나는 한 사람만 보고 설교하고 기적을 베풀었다.” 딱 한 사람, 딱 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허다한 사람들이 천군 천사와 더불어 하늘나라에 들어가더라도 숫자가 14만 4천만이 아니라 그 이상이 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여럿이 천국 간다고 생각하는데, 주님의 생각엔 여럿이라는 개념이 없고 나와 짝이 되는 단 한 사람 보고 설교하고, 한 사람 보고 기적을 베풀었던 겁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4절에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곧 ‘백 마리의 양 중에서 99마리를 제끼고, 99마리의 다수 말고 내가 찾는 것은 단 한 마리가 양이다.’ 돌아올 수 있는 단 한 마리의 양을 보고 말씀을 하셨던 겁니다. 이 이야기가 사도 바울의 편지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그 누구와도 이야기 한 적이 없고 아담하고만 이야기한다. 마지막 아담, 두 번째 아담인 나는 딱 한 사람의 아담하고만 이야기하고 있다.”

지난 금요일에 목사님들과 멀리 포항 쪽에서 늦여름에 억지 피서를 갔습니다만, 거기서 자식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 자리에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자식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잃어버린 아담이다.” 우리는 아담을 모르기 때문에 나 자신도 알 길이 없어요. 평생 살아도 내가 누군지를 몰라요.

그런데 성경은 아담 이야기만 하고 있단 말이죠. 왜냐하면 예수님은 아담 보고 이야기하거든요. 아담의 자식들이 많더라도 주께서는 계속 줄곧 아담만 상대하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아담 언약이기 때문이에요. 아담에게 주신 그 안에 들어있는 아담의 원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담이 비록 수천수만, 수억의 자손을 퍼뜨리더라도 그건 껍데기고요, 동질의 아담의 반복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악마한테 물들어서 ‘아담은 아담이고 난 모르겠다. 나는 절대적이다, 나는 나다.’ 이렇게 나오니까 아담을 모르니 자기가 누군지를 모르고, 자기를 모르니까 아담이 누군지를 모르고, 하나님 말씀은 아담보고만 이야기하고, 그러니까 나와 동떨어진 거예요.

“하나님이여, 저는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습니까?” 이러고 교회 나온단 말이죠. 지금 우리 속에 있는 아담의 형상 보고 “넌 죽었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우리는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어요. 교회 나와서 “하나님이여,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고 어떻게 하면 내 인생이 편해집니까?” “누구세요? 뭐야, 너? 넌 널 알아? 너 자신을 알고 지금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찾고 있는 거야?”

넌 그냥 아담에 복속된 거예요. 우리보고 이야기를 안 해요. 아담보고 이야기하고 그래서 아담을 알아야 하는데 아담을 알 길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흔적을 우리의 자식을 통해서 알려줍니다. 자식은 아버지의 부정성이에요. 아버지가 애써 감추고 싶었던 것, 더러운 것들이 자식을 통해서 나오는 겁니다.

하여튼 독하게 말 안 들어요. 지독하게 말을 안 들어요. 그렇다고 내칠 수도 없고. 분명히 나는 아닌데 끌리는 것, 내가 아니기에 버려야 되는데 평생 가도 못 버리는 것 그게 자식입니다. 유월절 날 살아있는 아버지 앞에서 자식을 죽게 만들죠. 살아있는 부모 앞에서 자식을 죽게 만듭니다.

자식이 죽는다는 것은 바로 ‘너는 죽어 마땅한, 그냥 아담의 연속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식의 죽음으로써 분명히 한 거예요. 그게 바로 유월절 때 일어난 현상이잖아요. 그래서 인간은 자기가 죽는 것은 인간이 겁 안 나요. ‘이만큼 살았는데 죽어버리지 뭐.’ 자기 죽을 때는 오기나 객기 같은 게 있는데 아버지는 멀쩡히 살아있을 때 자식이 일찍 죽었을 때 부모는 못 참습니다. 참을 수가 없어요.

“저를 데려가지 자식을 왜 죽입니까!” 내가 죽는 고통보다 자식 죽는 고통이 더 아프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한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인간은 자기를 몰라요. 그런데 자기 자식에게 일을 벌임으로써 자식을 통해 내가 생각한 나와 진짜 내가 너무 차이가 난다는 거예요. 나는 엉뚱한 나를 상정하고 상상하면서 평생 살아가고 있었던 겁니다, 자기의 부정성을 감춘 채.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아담에게 준 언약을 전제로 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아담으로 보낸 거예요. 마지막 아담, 두 번째 아담이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옵니다. 인간들은 때려죽여도 본인이 누군지를 몰라요. 밥 먹고 사는 것 외에 자기가 누구냐 하는 것은 몰라요. 자기가 누구냐 하는 그때그때 달라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부정성을 알지 못하는 것을 두고 우리 자신이 얼마나 가짜고 엉터리인지 예수님을 대신 보내서 진짜 우리의 모습으로 오신 분이 사람들로 하여금 맞아 죽게 했어요. 진짜 아담이 더럽혀진 엉터리 아담으로부터 맞아 죽는 십자가사건을 일으켜서 그 사건을 도로 우리에게 딱 내밀죠. “너는 엉터리였어. 가짜였어. 그런데 넌 너 자신이 누군지 조차도 관심이 없었어.” 그렇게 만드신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구약 성경에 신앙의 증인들이 있는데 그 신앙의 증인들이 진짜 아담이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예수님에 대한 증거를 부분부분 가지고 있었어요. 그 말은 뭐냐? 그 신앙인들이 살아가면서 자기 뜻대로 원대로 안 되게 만들었어요. 모세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고요.

출애굽기 3장에 진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났습니다. 2절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모세가 떨기나무를 보니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모세는 떨기나무만 보고 있는 거예요. 출애굽기 3장 4절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것은 부딪힘입니다. 모세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과 모세의 부딪힘, 그리고 그다음에는 대조시키는 겁니다. “원래의 네가 누군지 아느냐?” 이것은 하나님 쪽에서 오셔야 돼요. 부딪힘이라고 하는 것은 방향이 서로 맞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찻길에 횡단보도가 있잖아요. 사람이 횡단보도 건널 때 차는 수직 방향으로 진행하지요. 신호를 지켜야 부딪히지 않는데 신호를 지키지 않으면 한쪽은 가로질러 가고 한쪽은 똑바로 가니까 차와 사람이 부딪히게 되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찾아올 때 의도적으로 주님의 부딪침과 망가짐으로 우리 자신과 접촉을 시도하는 겁니다.

네가 가는 방향과 내가 가는 방향이 일치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듯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찾아올 때 그렇게 찾아온 거예요. 모세는 자기가 누군지를 몰라요. 그런 것은 몰라도 된다고 여겼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구원하기 위해 떨기나무로 해서 의도적으로 툭 치면서 부딪쳐오는 거예요. 인생을 가로막고 오는 거예요.

‘어? 불이 붙었는데 왜 사라지지 아니하지?’ 바로 그게 네가 합류해야 할 네 모습이라는 거예요. 아주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와서 모세를 쪼개요. 여러분, 수박이 비쌀 때는 마트에서 통으로 된 수박 말고 반 조각으로 쪼개서 팔잖아요.

쪼개면 벌건 내막이 다 드러나죠. 주님께서 오셔서 모세에 부딪쳐서 모세를 쪼개서 내막을 드러냅니다. 모세를 쪼개면 모세의 내막은 죽어 마땅한 인간인데 모세 아들이 할례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죽은 데서 살아요. 이 말은 뭐냐? “하나님의 약속이 오지 않으면 넌 벌써 죽었어. 쓸모없는 인간이야.”

그러니까 모세는 주님이 가공한 가공식품이에요. 주님의 가공식품. “돼지고기 먹을래, 베이컨 먹을래?” 그것과 똑같은 거예요. 돼지고기 먹을 수도 있지만 주님께서 베이컨으로 가공시키면 식빵 속에 들어갈 수 있잖아요. 주께서 친히 자기 증거를 인간 속에 남기기 위해서 예수님 자기도 쪼개지고 만났던 그 인간도 같이 쪼개집니다.

왜? 쪼개지라고 부딪치니까요. 부딪치면서 주님도 다치고 그 인간도 다치고. 그렇게 되면 겉모습으로 만나는 게 아니고 속 알맹이 가지고 만나거든요? 만나게 되면 뭘 알 수 있느냐? ‘예수님의 짝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아무리 성도가 다수라도 모두가 주님 보시기엔 내 짝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단수, 단일한 짝이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 부딪쳐서 자기의 짝을 만나는 것, 그러면 자기 짝을 만나는 이것이 성도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자유입니다. 자기 짝을 만났으니까요. 모세는 자기 짝을 만났어요. 그럼 됐잖아요. 뭘 더 원합니까?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13장 12-13절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이 대목에서 모든 성도는 일가친척 보고 싶은 게 아니고 자기 짝 되시는 한 분만 보고 싶은 거예요. 단 한 분만 보고 싶은 거예요. 장례식 때 “너희 아버지 돌아가셨다고 걱정하지 마. 너희 아버지 곧 만난다.” 하는데요, 지금 돌아가신 자기 아버지 만나라고 천국 가는 게 아니고 예수님 만나기 위해서 가는 거예요.

그때는 천사와 같이 장가도 안 가고 시집도 안 가니까요(마 22:30). 마치 천사와 같으니까. 천사는 그 얼굴을 맨날 누구한테 들이대느냐? 주님의 얼굴만 쳐다보고 사는 게 천사입니다. 성도의 영원한 삶을 천사가 미리 보여주는 거예요. 같은 인간들 만나는 곳이 아닙니다. 미팅할 일 있습니까? 통 수박을 잘라서 나의 속을 보여줬던 주님의 반쪽, 그래서 하나가 되는 그 주님만 만나보면 돼요. 주님만 만나보면 된다고요.

제가 계속 이야기 하는 데 오늘 본문은 뭐냐? 구약에 많은 성도들이 있고 많은 신앙인이 있더라도 그걸 다수로 보지 말고 단수입니다. 왜? 한 분이 빨아 당기니까요. 쫙 빨아 당기니까 숫자가 몇백 명이 되든 몇천 명이 되든 주님이 단일화시킨 단 하나 주님의 짝인 겁니다. 주님의 단 하나의 신부예요. 단 하나의 신부뿐입니다. 주님은 아담만 상대했지 아담의 여럿과 상대할 필요도 없고 이유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만나는 방법, 어떻게 만나는가? 이제부터 상당히 난해한데 정신만 약간 차리면 난해한 것도 잘 풀릴 수 있겠습니다.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히 11:39)라고 하고 있는데 이걸 함축해서 이야기하게 되면 이렇습니다.

‘과거의 사건이 먼저 있고, 현재 사건 나중에 올 미래의 사건이 남아있다.’ 이것은 다수인간들이 사는 세계에서는 통하지만 약속에서는 나중에 나오는 약속이 앞에 있는 시간보다 먼저 있습니다. 먼저 있게 돼요. 그 이유가 뭐냐? 아담에게 있어서 시간과 공간은 근본된 토지를 갈면서 거기 있는 환경이 기존의 시간과 공간이에요.

창세기 3장 27절에 나오는 근본된 토지, 그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에덴동산은 생명나무의 시간과 공간에 저촉 받지만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에서 쫓겨난 인간들 나름대로의 시간과 공간은 생명나무와 다른 세계이기 때문에 다른 시간과 공간에 적용받게 됩니다. 그 시간과 공간은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앞의 일이 먼저고 미래 있는 일은 나중이다.’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런데 생명이 오게 되면 시간이 역으로 갑니다. 물리학자는 이걸 ‘음시간’이라고 하는데, 원인이 나중에 오는 것을 ‘음시간’이라고 해요. 양자 이론에서 실험해 보면 원인이 나중에 나타나는 그런 현상이 일어나서 과학자들이 깜짝 놀라면서 ‘마이너스(-) 시간’이라고 이렇게 표현했어요.

아주 세밀한 세계에서의 마이너스 시간입니다. 마이너스 시간이 되면 어떻게 되느냐? 십자가 먼저 있고 그다음에 부활이 있는 걸로 보이지만, 주님의 나라 새로운 시공간에서는 부활이 먼저 있고 십자가 시간은 나중에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은 먼저와 나중이 아니고 ‘어느 것이 기본이냐, 어느 것이 부수적이냐?’를 나누는 거예요.

부활은 부수적이기 때문에 먼저 깔아놓고, 그다음에 부활에 이르기 위해서는 뭘 해결해야 하는가? 기존의 아담 세계에서 해결 못 한 게 있어요. 그게 사망입니다. 사망은 약속에 속하고 그다음에 부활의 흔적은 증거에 해당되는 거예요. 에녹 같은 경우에 하늘로 딸려 올라갔거든요. 안 죽었잖아요. 그건 증거라니까요?

에녹이 딸려 갔다고 그게 부활의 세계가 아니에요. 그걸 가지고 ‘살았다’ 이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에녹이 딸려 가고 또 엘리야가 딸려가더라도 그건 아담이에요, 아담! 두 번째 아담이 아니고 마지막 아담도 아니고 그냥 아담이 딸려 올라가는데 그건 약속이 아니고 그냥 증거에요.

뭔가 예수님이 와서 약속에서 일어나는 그 일이 벌어져서 거기서 파생된 그러한 효과로서 그들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올라갔고, 엘리야는 불 수레 타고 올라갔습니다.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 시간이 역전되는 거예요. 뒤집어지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이, 아담이 아무리 해도 해결되지 못한 것을 마지막으로 남겨뒀기 때문에 그래요.

마지막에 남겨둔 것이 뭐냐 하면 사망이었습니다. 보통 최후의 원수라고 하면 사람들은 뭐 백발백중으로 나오는 게 “마귀!” 이러잖아요. 그런데 고린도전서에서는 최후의 원수를 마귀로 보지 않습니다. 15장 26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이게 무슨 말이냐는 말이죠. 마귀라고 하면 우리가 납득이 되는데 “마지막 원수는 사망이다.” 이것은 무슨 말이냐? “너희들 다 죽잖아. 너희들 다 죽으니까 죽는 것한테 너희들은 졌다.” 이 말이에요. 원수라는 말은 전쟁에서 적이라는 의미에요. 인간은 자기의 적을 알아야 되는데 자기의 적이 뭐냐?

사망이 우리의 적인데 적을 알면 뭐합니까? 이기지를 못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육으로 신체를 가지고 태어난 것은 적과 한패가 되어서 태어난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의 육체라고 하는 것은 육체가 있는 이상 어느 인간도 사망을 이길 수 없기 때문에 그래요. 기존의 시간과 공간내에서는 이길 수가 없습니다.

한 번 사고 실험을 해보는 거예요. 신체가 있습니다. 신체가 있으면 이렇게 물렁물렁하고, 만지면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죠. ‘신체가 살아있네?’ 이러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이게 살아있는 게 아니고 죽어 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결국 이 물렁한 근육이 다 빠지면 죽게 되니까요.

그런데 인간은 자기를 몰라요. 내가 살아있는 게 죽음이라는 사실을 어느 누구도, 어느 과학자도 증명해 낸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 공식을 하나 말씀드릴 테니까요, 이 공식에 대해서 여러분 이해해 보세요. ‘주님에 의해 살아있다=내가 죽어 있다+믿음’

‘주님에 의해 살아 있다’는 것은 ‘내가 죽어 있다’에 더하기 ‘믿음’이라는 겁니다. A=B+C다, 이런 뜻이란 말이죠. 그러면 C를 이항해서 반대편으로 당기는 거예요. 등식에서 항을 옮길 때는 플러스(+)부호가 마이너스(-)로 변해요. ‘주님에 의해서 살아있다-믿음=나는 죽었다’가 돼요.

그래서 신앙인의 특징은, 고마워하는 것은 ‘자기가 죽어 있다’는 걸 아는 거예요. 이 공식이 그 안에 살아있으니까요. 그래서 여러분이 죄 사함받았거든요, 그만 사세요. 설교 여기서 끝내야 돼요. 죄 사함받았거든요, 더 이상 주께서 우리한테 줄 게 없어요. 어떤 짓을 해도 죄 사함 받았기 때문에 굳이 더 이상 살 이유가 없다니까요?

이번에는 그 등식에서 ‘내가 죽어 있다’를 이쪽 등식으로 옮기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에 의해 살아있다-내가 죽어 있다=믿음’이 되는 겁니다. 믿음은 뭐냐? 주님이 살아있기에 나는 반드시 죽어 있어야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산을 옮기든, 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빠지든 그건 내 소관이 아니잖아요. 그것은 살아계신 주님이 할 일이지 죽어 있는 내가 왜 굳이 그 일을 해야 됩니까?

지난 수요일 기도 제목을 그날 오신 분은 기억하시죠? 기도 제목이 간단했어요. ‘모든 것은 내 소관이 아니다.’ 이게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내 소관 아니에요. 자꾸 내 소관을 끌어당기는 것은 본인이 죽어 있다는 것을 인정 안 해서 그래요. 본인이 본인을 모르고 있으니까 ‘아주 갈 데까지 가보지 뭐. 살 때까지 살아보지.’

그거는요, 사망을 이기지 못한 데서 나오는 망상에 불과한 겁니다. 허상이에요. ‘속았어, 속았어! 고추를 잘 못 받았어.’ 고추를 잘못 받든 뭐가 됐든…, 예를 들면 그렇다는 겁니다. 뭐가 되었든 그게 내 소관이 아니고 주님 소관 아닙니까, 주님 소관! 안 살면 되는걸 괜히 살아서 걱정 근심을, 분란을 일으켜요, 분란을.

사망은 우리 힘으로 해결이 안 됩니다. 사망은 우리 힘으로 안 되고 우리는 사망에 눌려 살 뿐이에요. 그게 우리 인생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마지막에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않는 이 사망을 주님께서 해결합니다. 해결하는데 어떻게 해결하느냐?

구약에 있는 성도를 미리 살려놔요. 어떻게? 수박을 반쪽으로 만들어서 살려놔요. 자, 너는 수박 한 통, 그대로가 아니고 반쪽이에요. 반쪽이니까 나의 나머지 반쪽이 올 때까지 너는 증거만 받았어요. 나머지 반쪽이 뭐냐? 약속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성도들이요, “나 구원받았다.”를 믿은 적이 없어요. “내 반쪽은 언제쯤 오십니까?” 그걸 믿은 거예요. “내가 해결할 수 없는데 그 반쪽은 언제 오십니까?” 하고 그걸 기다렸던 겁니다. 심지어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예요. 세례 요한이 대단하지만 그건 반쪽입니다.

신약의 어린아이가 세례 요한보다 더 대단하다고 마태복음 11장 11절에 나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그래서 이 사망을 어떻게 하는가? 주께서 어떻게 했는지 사망을 해결하는 방법을 지금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피봇(Pivot) 현상이라고 하는데 축구에서 공 하나 놓고 방향을 반대로 바꾸는 게 피봇 모션이거든요. 이쪽으로 죽 가는가 싶다가 갑자기 공 잡고 가던 방향에서 반대로 돌리는 거예요. 주께서 사는 쪽이 아니고 반대로 죽는 쪽으로 홱 가는 이유가 이미 주님 안에서는 다 이뤘기 때문에 죽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거예요.

인간은 ‘어떻게 살까?’만 생각하고 사는 쪽으로 가는데 주께서는 방향을 반대로 바꿉니다. “너희들은 이미 사망 안에서 죽었다.” 죽은 자를 향하여 이미 죽음이 해결된 나머지 반쪽이 그 죽어버린 자기 사람의 제대로 된 반쪽이 되기 위해서 주님의 사망 효과를 그들에게 집어넣는 작업을 이제 시작하는 겁니다.

그 작업을 어떻게 하는지 지금 말씀드리겠어요. 창세기 3장 7절에 보면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 따먹는 날에 정녕 죽으리라’ 했는데 여전히 살아있었어요.

이게 참 어렵죠? ‘선악과 먹는 날엔 정녕 죽으리라’ 했는데 멀쩡하게 살아있단 말이죠. 살아있는데 살아있는 게 아님을 보여주는 게 뭐냐? 부끄러움을 내포한 채 살아 있어요. 수치스러움을 내포한 채.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 했느냐? 자기의 부끄러운 요소를 감췄어요. 수치를 감췄다고요.

이게 봉합입니다. 지난 광주 강의 때 했죠? 비어있는 것, 그 구멍 뚫린 것의 허함을 메꾸기 위해서 인간은 온갖 노력을 다한다고요. 학식, 재산, 능력, 재주,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동원해서 자기의 부끄러움이 노출되지 않도록 그걸 꽁꽁, 숨기는 짓을 하는 거예요.

그 부끄러움을 숨기는 방법이 뭐냐? 이건 악마가 인간에게 집어넣었어요. ‘자기의’입니다. 자기의를 계속 만들어서 부끄러움을 꽁꽁 틀어막으려고 했던 거예요. 자기 의를 만드는 인간들의 방법은 뭐냐, 마귀가 시키는 대로 하는 그 방법이 뭐냐? 법을 동원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법을 지키면 기분이 좋죠? 법을 지키면 기분이 좋은 이유가요, 자기 의가, 이 잘남이 자기의 허함을 계속 지켜준다고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바리새인이 나와요. 바리새인이 세리를 보고 상당히 측은해하면서 하나님 앞에 따로 나와서 기도합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8:11-12).

그렇게 이야기하고 옆에 있는 세리는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 18:13) 하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했어요.

순회재판장 되시는 예수님께서 보시고 “너 합격, 넌 불합격!” 바리새인 보고 “넌 지옥에나 가라.” 자기 의가 우리의 수치를, 그 허함을 봉합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부끄러워하는 대목을 교회 나와서 말씀 지켜서 땜질하듯 때우는데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 율법으로 말미암아 자기 의가 누적이 되니까 그 수치는 그대로 있고 거기에 덮개만 덕지덕지 두껍게 계속 쌓이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55-56절에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네가 율법에 대해서 의식하고 법대로 살려는 그 자체가 주님 보시기에 나의 의를 계속 만들어내는 죄를 더욱더 키울 뿐이다’라는 그 말이죠.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하는 것, 그게 바로 인간이 자기에게 행할 수 있는 행함의 절정이에요. 그러면 십자가는 어딜 겨냥하는가? 주님이 의가 되어서 인간의 의를 뜯어내요. 뜯어내면 인간이 감당 못 할 수치스러움이 나와요. 그 수치스러움, 주께서는 그 자리에 무엇을 붙이는가? 파스를 붙이죠. 뭐냐? 그게 바로 가죽옷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옷으로 다루어서 “내 피 묻은 옷으로 네 수치를 막아야 네가 사망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왜? 나의 죽음만이 사망에서 벗어나는 부활의 권세를 제공하기 때문에.”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십자가가 뭐냐? 예수님의 죽으심이에요.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예수님의 죽음을 두고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50절)라고 합니다.

영혼이 떠나셨다. 몸과 영혼이 분리가 되는 것, 유체이탈, 분리가 되는 것이 사망이거든요. 유체이탈되어서 떠나간다는 것은 그동안 내 몸을 내가 간수한다고 했던 내 마음을 사망과 더불어서 수치 속에 하나로 그냥 놔두면 되는 거예요. 놔두고, 주님의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은 예수님의 마음이잖아요?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로 하여금 그동안 내가 스스로 수치를 감추던 내 모든 수작, 나의 의를 유지하려고 하는 그 모든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 헤어지게 만들어요. 이별하게 만드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육신은 내 마음의 집인데 이제 집에서 이사 나가는 거예요.

아담의 몸에서 주님의 몸으로 이사를 가게 만들려면 성령을 통해서 주의 마음이 우리의 수치를 수치 그대로 들춰내는 작업과 더불어 우리는 나와 헤어지고, 나와 이별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주와 함께 거하는 겁니다.

말은 참 쉬운데요. 로마서 1장 16절에 보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고 했어요. 이미 복음으로 이사를 했을 경우에는 복음 안에서는 부끄러운 게 없고, 만약에 복음 오기 전에 있었던 내 육신을, 내 부끄러움을 내 의로 커버할 때는 전체가 부끄러움의 덩어리였던 겁니다.

이사해야 돼요. 주님에 의해서 이사해야 됩니다. 내가 내 인생을 관리하거나 다루려고 해서는 안 돼요. 헤어져야 돼요. “그러면 목사님, 헤어졌을 경우에 어떤 안목으로 내 몸을 바라보게 됩니까?” 내 몸 자체가 옛날에 ‘죽으면 안 돼.’라고 발발 떨던, 사망의 노예가 되어 바들바들 떨던 그 몸과 더불어 헤어지지 못하는 그것을 내 새로운 안목으로 보면 애처롭기 짝이 없어요.

‘저 병신 저거, 시건없는 저거. 그냥 네 몸을 떠나면 되잖아.’ 새로운 몸에 들어왔는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왔으면 그리스도 몸 안에 있으면 내 몸에 대해서는 신경을 끊으면 될 텐데 혹시 남한테 내 부끄러움이 노출될까 발발 떨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열심히 하겠다는 그 시간과 공간은 아담 쪽에 속한 시간과 공간이에요. ‘지금 열심히 하면 나중에 좋은 결과 나올 것이다’ 이건 뭘 부정하는가? 주의 새로운 시간과 공간이, 부활의 능력이 우리를 진공청소기처럼 빨아 당긴다는 주님이 하는 일을 완전히 무시하고 내 쪽에서 열심히 해야 천국 간다는 너무나 마귀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고요? 책임 왜 지려고 하는데요. ‘그래야 안 수치스럽지.’ 그게 사망을 이길 수 있습니까? 우리는 법을 당기는데 법을 당길 때 이미 우리는 사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망의 노예가 된 거예요. 사망의 노예가 되니까 자꾸 ‘난 법 지켰다, 말씀 지켰다.’ 이래서 버티려고 하는 겁니다. 자기 의를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자기 의가 있으면 거기서 뭐가 생기는가? 퇴임식이 있어요. 교사하다가, 또 경찰 하다가 이제 퇴임하는 거예요. 퇴임할 때 황금 열쇠도 받고 하는데…, 퇴임하면서 아카이브(archive), 다시 말해서 지나온 인생은 기념물이 돼요. 나의 한평생은 나를 기념하는 박물관이 된다고요. ‘나 이렇게 애 잘 키웠다. 아이 셋 다 의대 보냈다.’ 이런 거요.

온갖 것들, 내가 이렇게 목회했다, 복음 전했다, 뭘 했다…, 이게 지금 자기의 수치를 그런 식으로 이렇게 커버하려고, 봉합하려고 아주 몸부림을 치고 있는 거예요. 떠나면 되는데, 죽은 시체는 그냥 폐기물로 남겨두고 이사 가면 되는 거예요. 도저히 못 참겠다, 여기서 노래 가사를 해야겠어요.

이사 가던 날(산이슬, 1976)

뒷집 아이 돌이는
각시 되어 놀던 나와 헤어지기 싫어서
장독 뒤에 숨어서 하루를 울었고
탱자나무 꽃잎만 흔들었다네
지나버린 어린 시절 그 어릴 적 추억은
탱자나무 울타리에 피어오른다
이사 가던 날 뒷집 아이 돌이는
각시 되어 놀던 나와 헤어지기 싫어서

산 이슬이 불렀던 “이사 가던 날” 가사에요. 이사 가던 날 어릴 때 친구와 헤어지기 싫어서 탱자나무 흔들면서 시위하는 거예요. 가지 말라고. “넌 내 친구잖아.” 지금도 사망이, 다시 말해서 원수가, 마지막 원수 사망이, 또는 마귀가 “너 그동안 신앙생활 잘했잖아. 십일조 하고, 금식하고, 구제도 하고, 말씀도 잘 지키고, 교인들과 사이도 좋고 너 얼추 신앙인 같잖아. 모범적이잖아, 청교도잖아, 청교도! 그런데 그렇게 우수하고 훌륭한 너를 방치하고 왜 이제 그걸 떠나려고 해?” 이게 바로 시험든 거죠. 이게 시험 든 겁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덜 수치스러우냐? 이게 아직도…, 사망을 거치고 난 뒤에 우리를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해서 “내 피로, 가죽옷이죠, 내 피로 네 부끄러운 것을 처리했다.”라는, 죄 사했다는 그 안목을 안 받아버리면 아직도 나는 뭘 생각하느냐 하면, ‘내가 어떤 행동을 하면 욕을 덜 얻어먹을까?’ 거기에 몰두하고 그거 연구하고 있어요.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이미 시험당한 상태의 결과는 예수님께서 수박 쪼개서 짝이 되게 마련해 놓고 이제는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주님 가신 길을 따라오도록 주께서 계속 우리에게 이 지옥 같은 세상을 허락하신 거예요.

그러면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우리는 말씀을 들었다고 하면서도 들은 건 단박에 다 잊어버리고, ‘어떻게 하면 내가 이 세상에서 욕 안 얻어먹고 살고 창피 안 당하고 살고, 그 인간 망했대, 그 소리 안 듣고 살고 자신의 수치스러움과 허함을 어떻게 내 힘으로 봉합할까?’ 열심히, 열심히 착하고 바르게 사는 이런 짓거리를 하는 그 부담, 그 부담을 겪게 하시는 거예요.

백날 해보세요. 그게 자기 의죠. 그게 구원이 안 됩니다. 히브리서에 나오는 신앙인들 여러분이 보기엔 그냥 칭찬받은 걸로 알죠? 실제로 구약 보세요. 그들은 저항하고 반항했습니다. “하나님이 찾아와서 내 인생 조져놨습니다.” 그런 식으로 반항했던 사람들이에요.

야곱의 꿈이 그랬고 요셉의 꿈이 그랬어요. 그런데 요셉의 꿈, 야곱의 꿈의 실현에서 예수님이 그 꿈의 주인공이었어요. “절대로 네 인생이 네 마음대로 의가 일 수 없도록 내가 네 인생을 작살내 줄게.” 그게 바로 신앙이었어요. 주님 살아있고 나는 죽을 때 그것이 뭐냐,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에요.

더 살 이유도 없어요. 그런데 왜 더 살아야 되는가? 우리를 죽여 놨는데 내가 미처 모르는 그 일이 남아있으니까 죽어 있는 나를 살려서 내가 예상도 못 한 일을 감당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죽은 나를 또 살려내요. 참 희한한 이론이에요. ‘살아있는 내가 어떻게 주의 일을 할까?’ 이게 보통 상식이잖아요.

그게 아니고 죄 사함받았으면 이제 인생 끝냅시다. 끝냈는데 내일 아침에 해 뜨고 또 눈 뜨잖아요. 왜 눈 떴는가? 내가 미처 예상도 못 한 내 할 일이 남아있기 때문에 주께서 안 죽이고 또 살려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인식이 새로운 시간이에요.

이미 다 이루어졌는데 뒤늦게 그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내가 사는 것은 주의 일에 해당되기 때문에 살지 더 이상 내 일은 아무리 살아도 마감됐어. 끝났어.’ 아예 없어요. 내 일은 없다고요. 남아있는 것은 주의 일밖에 없습니다. 자꾸 성과를 내서 자기 자존심 유지할 그럴 필요는 없어요.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이 ‘말씀 맺고자 한다’는 말이 그렇게 어떤 사람들은 듣기 좋다고 한다는 평을 들었어요. 천국은 소유하는 데가 아닙니다. 천국은 일하는 데에요. 무슨 일을 하느냐? 내 일은 없어요. 천국은 주의 일밖에 없습니다. 꼭 천사 같아요. 천사는 주의 일을 하지 자기 일이 일체 없어요.

감히 우리가 천사와 같은 사람이 됩니다. 이제는 뭘 해도 내 일은 없고 주의 일밖에 없어요. 애를 키우든지 직장에 다니든지 다 주의 일입니다. 그 주의 일을 통해서 우리가 나타내야 되는 것은 ‘이미 나의 수치는 물 건너갔다. 나에게 이제 수치라는 것은 남아있지 않다.’

왜? 모든 일에 나의 육신이 있는 한 죄만 나오는데 주께서는 이 모든 죄를 다 사해줬기 때문에, 주께서 용서했다는, 사해줬다는 공간 속에, 예수 안속에, 십자가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서는 죄만 나오는데 그 모든 죄가 사함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우리한테는 감사와 기쁨 외에 고백할 게 남아있지 않습니다.

일도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고, 우리한테는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아니하고, 어떤 책임도 묻지 아니하고, 살아도 내 소관 아니고 주께서 살려줄 만 해서 일거리 있어서 살려준 거고, 사나 죽으나 주의 소유고, 그러니까 우리는 그러면 살아서 무엇을 할 것이냐?

바로 사망으로 생명으로 옮겼을 때 그 문턱, 그 경계선에서 나는 내 육신 가지고 무슨 짓거리를 했는지를 보는 거예요. 아, 육신에 있으면서 ‘내가 얼마나 잘났으며, 얼마나 고상하고 품위 있으며, 나는 이렇게 바르게 살려고 애쓰고 있는 훌륭한 사람’이라는 마귀 짓을 하는 모습을 어떤 관점에서, 주님의 마음의 관점에서 우리 자신을 애처롭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참, 쓸데없는 짓거리를 해왔네. 아이고, 내가 저런 인간으로 계속 살았으면 어쩔 뻔했나?’ 주께 감사하라고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이 땅에 살 동안만 주의 일을 하라고 살게 하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약속을 받아 챙긴 채로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은 약속을 획득한 입장에서 우리 육신을 가지고 매일 증거를 쏟아내게 해주시옵소서. 얼마나 반항하고, 대들었고, 하나님을 미워했고, 싫어했는지. 그러나 하나님을 미워하는 그것이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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