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위반자 입장에서

아빠와 함께 2025. 9. 4. 07:39

위반자 입장에서

2025년 9월 3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16:29-34

16:29 유다 왕 아사 제삼십팔년에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이스라엘 왕이 되니라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사마리아에서 이십이 년을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16:30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16:31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로 아내를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숭배하고
16:32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사당 속에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으며
16:33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으니 저는 그 전의 모든 이스라엘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더라
16:34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저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문을 세울 때에 말째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오늘 본문에서, 아합은 여호와 섬기는 것을 가볍게 여기고 그 대신 열심히 바알 종교로 전체 교체하는데 전력을 다 쏟습니다. 이런 일로 인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노를 격발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합왕의 입장에서는 그는 나라를 운영할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 합니다. 이웃 나라 시돈의 딸을 자신의 아내로 삼아서 좋은 관계를 맺고자 했습니다.

가까운 나라의 침공을 사전에 대비해야 나라가 안정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자세에 대해서 성경은 ‘그가 여호와를 버리는 죄를 가볍게 여겼다’는 평이 주어집니다. 사람이 자신이 일에 열중하게 되면 자연적으로 다른 일은 소홀히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예가 오늘 본문에 또 나옵니다.

여리고 성을 건축한 어느 사람이 두 아들을 잃게 된 사례를 거론합니다. 이 건축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행동에 있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고 자부했습니다. 옛날 옛적 과거에 언급한 내용을 의식해서 여리고성을 건축을 안하겠다는 것이 도리어 이상한 미신 같은 겁니다. 인간은 지나간 과거에서 무슨 말을 하든지 상관없이 현재 일에 충실하는 것이 당연한 삶으로 여깁니다.

건축 도중에 큰 아들이 죽었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인생 따로 있고 아들의 인생은 따로 있기에 아버지가 아들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아버지의 행동 하나하나가 자식의 운명에 관여한다면 아버지는 자기만 감당하며 되는 것이 아니라 집안 식구 전체의 운명까지 책임져야 하기에 도저히 힘들어서 못살게 될 겁니다.

우리가 타인의 운명까지 고려하며 살아야할까요?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타인의 운명을 어떻게 내가 책임질 수 있습니까? 아들의 죽음이 아버지의 건축 시작해서 그렇다는 인과적 관계는 어떻게 따져도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큰 아들 죽고 난 뒤에는 건축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다가 문을 달 때, 둘째 아들이 죽습니다. 이 죽음 또한 첫 번 아들의 죽음과 마찬가지고 우연한 일일 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두 아들의 죽음은 여호수아 6:26의 말씀의 성취라고 말입니다. 무려 500여년의 간격을 두고서 말입니다.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로 무리를 경계하여 가로되 이 여리고 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 하였더라”

이 말씀이 현실성을 가지려면 필히 위반되어야 가능합니다. 미리 알고 조심해봤자 소용없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자아내는 현실을 인간쪽에서 미리 구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어느 가정에 하나님의 저주가 임했는데 그 저주의 내용이 ‘그 집안의 아들이 공놀이 하다가 공이 길로 나가서 그 공 줍다가 죽는다’는 내용이 미리 주어졌다고 칩시다.

아무리 사전에 이런 예언이 되어졌다고 해서 아들의 공놀이를 금지시킬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예언이 예언답게 이루어짐이 성취되려면 필히 그 아들은 공놀이하다가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예언은 위반되고 난 뒤에 비로소 성취가 되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들의 예언 이해를 예언이 허락지 않는 겁니다.

사전에 예언의 미리 알아서 대비되는 것은 하나님쪽에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예언 위반을 통해서 예언을 주신 하나님께서 비로소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 안에 하나님에 배신하는 일들이 일어나므로서 비로소 하나님의 예언은 하나님 자신이 벌을 받는 식으로 완성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인간들은 뭘 하는 겁니까? 그 점이 바로 아합왕이 하는 짓입니다. 아합은 여호와 하나님을 쉽게 버리려 합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자신이 거저 주시는 것에 비해서 이방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나의 것’을 허락해 줍니다. 욥기에 보면 사단이 나옵니다.

사단은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 자신만만합니다. 즉 인간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겁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파괴되었을 때도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는 인간 치고 전혀 없다는 것이 악마의 생각입니다. 인간에게 왜 이런 생각이 있는 이유는 이 세상이 자기가 생각한 그 세상이었으면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서로 사랑한다고 여겼던 사이에서 갑자기 상대가 사랑의 관계를 끊고 사라졌다면 그 사이 큰 적막감이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적막감은 이 세상에 늘 간직하고 있던 여지요 공백이요 여백입니다. 갑자기 찾아든 이 먹잇감을 자기 힘으로 마저 메울 수 없을 때, 우울증과 자살 충동이 생깁니다.

즉 왜 나는 세상을 내가 아는 식으로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느냐에 오는 절망감 같은 겁니다. 이처럼 현실의 세계에서는 항상 인간이 마저 채울 수 없는 여백이 있지만 말씀의 세계에서는 이 여백이 예언으로 가득 차 있어 인간들의 위반을 통해서 밝혀지고 드러납니다. 세상을 내 세상을 만드는 것은 인간에게 애초부터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합이 자기 부인을 바알에 열심인 시돈 왕의 딸로 채웠습니다. 하지만 출애굽기 34:15-16에서 분명 하나님께서 그러지 말라고 예언하신 바가 있습니다. “너는 삼가 그 땅의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모든 신을 음란히 섬기며 그 신들에게 희생을 드리고 너를 청하면 네가 그 희생을 먹을까 함이며 또 네가 그들의 딸들로 네 아들들의 아내를 삼음으로 그들의 딸들이 그 신들을 음란히 섬기며 네 아들로 그들의 신들을 음란히 섬기게 할까 함이니라”

그런데 이 예언을 알면서도 아합왕이 바알 신을 섬기는데 조심했겠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예언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그것은 자기 세계를 구성하는데 열중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인간이 다룰 수 없는 여백이 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열왕기상 17장에 나오는 심한 기근입니다.(왕상 17:1)

인간이 어떤 계획을 하더라도 빈곤에서 벗어나지 아니하면 모조리 무산됩니다. 왜 우리는 아직도 이렇게 살아 있는 겁니까? 말씀 앞에서 위반자 아닌 경우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이 미처 알지 못하는 은혜와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자기 파괴이며 이 파괴를 통해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썩어져 가는 세상이 썩어져가는 것조차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6강-열왕기상 16장 29-34절(위반자 입장에서) 250903-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16장 29-34절입니다.

열왕기상 16:29-34

“유다 왕 아사 제 삼십 팔년에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이스라엘 왕이 되니라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사마리아에서 이십 이년을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로 아내를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숭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사당 속에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으니 저는 그 전의 모든 이스라엘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더라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저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문을 세울 때에 말째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오늘 본문에 두 가지 예언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하나는 34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여리고라는 지역에 성을 쌓는 사람이 건축을 했는데 빈터, 황무지에 땅을 사서 집 짓는 것이 그 당시 사람 입장에서는 하등 문제 될 것이 없지요. 여러분이 어떤 일을 할 때 이게 말씀 보기에 문제가 될까 안될까를 생각합니까? 안 하지요.

내가 뭘 하겠다는데 말씀이 그걸 방해하는 것을 우리가 용납하지 않습니다. 말씀은 성경 안에 갇혀 있고 우리는 성경 바깥에서 매일 활동하고 있고요. 뭔가 계획하는 것 하나하나 다 말씀, 예언과 다 연결시켜서 한다는 그것은 우리에게 강박증 같은, 일종의 정신병 같은 것으로 빠질 수가 있어요. ‘하나님, 이 일을 하려는 데 말씀에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하는 그것은 부채 도사나 하는 그런 것이지요. “맞겠습니까, 아닙니까?” 이런 거요.

그래서 여리고 성 건축할 때 건축허가라든지 이런 것은 고려하겠지만 ‘성경 말씀에 이 터가 별로 좋지 않다’라는 그런 것을 고려하면 그것은 미신에 해당될 겁니다. 그래서 열왕기상 16장 34절에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어요. 건축을 했어요.

그런데 “…저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집을 지을 때 아들이 사고 나서 죽을 수도 있는 문제지요. 그게 집 짓는 것과 내 아들 죽는 것을 연관시킨다? 그렇게 연관 짓는 사람이 문제라고 여겨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문을 세울 때에 말째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문을 세울 때 말째 아들도 죽을 수 있겠지요. 그것은 우연의 일치지요. 문을 세울 때만큼은 말째 아들은 절대 죽어서는 안된다는 그런 것조차 미신이라는 말이지요.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일을 하고 자식의 운명은 또 따로 주어지는 거지요.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아버지가 골프 치러 가면서 아들 보고 “오늘 내가 골프 칠 때가 마침 점심시간이니까 네가 금식하면서 내가 골프에서 이기도록 기도해라.” 그런 아버지가 있습니까? “내가 골프 치는데 만약 네가 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집에 가다 벼락 맞아 죽는다” 이런 것이 성립되느냐는 그 말이지요.

일이 터지고 난 뒤에 인과관계를 논하는 것은 되지만 미리 “일을 할 때 네가 이렇게 하게 되면 너는 재앙을 만날 것이다.”라든지 혹은 “네가 이런 복을 얻을 것이다.”라고 자신만만하게 언급할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은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거예요. 집 짓고 싶어서 집을 지었고, 집을 지을 때 큰아들 죽은 것은 우연이지요. 문 세울 때 말째 아들이 죽었다는 그것도 우연이지요.

그런데 성경은 달리 이야기합니다.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성경에서는 그렇게 단정했습니다. 여호수아 6장 26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로 무리를 경계하여 가로되 이 여리고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 하였더라.”

이게 언제적 이야기인가? 이게 5백 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집 구매하거나 집을 지을 때 500년 전, 혹은 3천 년 전의 삼국유사나 고려사 같은 역사책들 다 들여다보고 저줏거리가 있는지 없는지 그걸 찾아보고서 집 구매합니까? 복덕방이 그걸 알아요? “내가 이 집을 구매하면 재수 없다는 이야기나 전설 같은 것이 2,560년 전부터 내려오는 것이 있습니까?” 그런 것을 물어봅니까? 공인중개사가 그런 것을 알아도 이야기를 안 하지요.

“그냥 재수 좋~답니다.” 하고 끝낼 문제지 과거에 언급된 이야기는 과거로 끝나는 겁니다. 현재에 적용이 안 돼요. 그래서 여호수아 6장 26절의 내용대로 여리고 성 건축하다 아들들이 죽은 것이 여호수아 때 예언된 것이라고 성경에서 단정하는 그것이 인간들에게는 이상한 일이라는 말입니다. 그게 이상하고 그게 정설이 될 수 없는 거예요.

집 짓다가 예언대로 망했다. 그걸 믿는다면 앞으로 어떤 인간도 행동할 때 성경 보고 행동해야 하는 데 성경에 내가 하는 일이 성경에 다 나오느냐 그 말이지요. ‘아들을 3월에 군대 보내야 할지 아니면 좀 더 연장해서 10월에 보내야 할지’ 그것을 고민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잠깐!” 성경 여호수아 찾고 또 열왕기상도 찾아서 ‘어느 철에 군대에 가야 네가 무사히 제대할 수 있느냐?’ 한다면 성경에서는 그런 답을 줄 수가 없습니다.

벧엘사람 히엘이 여리고 성 터에 집을 짓다가 자식이 죽었잖아요. 그 말이 성경대로 합치되려면 그 사람이 죽고 난 뒤에, 실패하고 난 뒤에 1746년 후에 여리고 성 그 터에 누가 또 집을 지을 때 그 사람 아들 둘도 다 죽어야 하잖아요. 거기다 1400년 후에 이스라엘 당국이 집여리고 성 터에서 재개발하려고 택지를 조성했는데 그 사람들 집안의 아들들이 다 죽어야 해요.

그래야 성경의 적합성, 성경은 계속해서 저주가 살아 있다는 그 적합성에 맞잖아요. 그런데 히엘의 이야기 말고는 그 자리에서 집 짓다가 누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없어요. 그러니까 성경을 우리 인간 식으로는 믿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에서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느냐? 그걸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걸 설명하기 전에 한가지 예를 더 들겠습니다. 길에서 공을 줍다가 아들이 차에 치어 죽었다. 그것은 성경의 어느 구절과 관련되어 있습니까? 이 질문이요. 차도로 굴러간 공을 줍다가 차에 치어 죽었어요. ‘그럴 줄 알았어. 그런 저주가 내릴 줄 알았어.’라는 성경 구절이 있다면 그다음부터 걔는 두 번 다시 공놀이를 못 합니다. 공이 어디로 굴러가든지 차가 대기하고 있다가 치어죽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성경에서 어떻게 해서 저주받았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은 바로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경의 뜻이 뭔지 궁금하지요?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죽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죽은 자로 태어나는 거예요. ‘이러면 살 수 있었는데, 이렇게 했다면 첫째도 둘째도 아들을 다 살릴 수 있었는데’ 인간이 그런 요령을 부릴 입장이나 처지가 못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태어난 이 세상에 인간을 죽이는 일이 일어나는 용광로 같은 곳이에요. 사람을 죽이는 용광로 같은 곳이에요. 아주 천박한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이 목욕탕 갔다가 미끄러져 넘어졌다. 그래서 머리가 깨져서 죽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사람이 한 주 전에 또는 1년 전에 무슨 죽을죄를 범했을까?’ 그걸 찾는데 그런 것을 찾을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목욕탕 바닥은 다 미끄러워요.

이처럼 이 세상의 바닥은 인간을 죽이는 동네입니다. 인간을 죽이는 힘이 있어요. 따라서 ‘야, 이러면 살 수 있었는데!’ 하지 마시고 반대로 생각해야 해요. ‘아직도 내가 왜 안 죽고 있지? 내가 분명히 일곱 살 때 공놀이하다가 공 줍는다고 차도로 들어갔는데 그때 왜 차가 안 지나갔지?’

그러니까 차가 지나가서 차에 치이는 그것만 생각하지 말고 내가 공 주우러 차도로 들어갔을 때 왜 차가 나를 안 치었느냐는 그 말이지요. 그러면 어떤 사람은 “그것은 그 사람이 어릴 때부터 조심스러워서 그렇다.” 조심스러워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공 줍다가 죽은 그 애는 평소에 조심성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있었어요.

하지만 그 순간에 차가 온다는 생각을 못 하도록 주께서 하신 거예요. 죽고 사는 것이 주의 손에 달렸다는 그것은 이미 사무엘상 2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살고 죽는 것은 주의 뜻이에요. 가난하거나 부하게 되는 것도 주의 뜻이고요. 전도서 3장에도 나오는 이야기에요.

그래서 이 성경을 보면서, 어떤 사람은 그 말씀에 해당되는데 해당되는 그 사람은 ‘해당된다고 해도 내가 여리고에 집을 지어야 하겠다.’ 이런 식으로 고집을 부린 것이 아니고, 짓다 보니 해당이 되는 것을 아는 거예요. 무슨 뜻인지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누구든지 때때로 사랑에 빠질 수가 있지요. “내가 어떤 여자를 알게 됐는데 그 여자와 결혼할 거야. 나이 서른 되도록 그런 아가씨는 처음이야”라고 만나는 친구에게 마다 자랑질 하잖아요. 그럴 경우는 사랑에 빠지고 난 뒤에 설명이 되는 거예요.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지키지 못하고 위반이 될 때 비로소 성경 말씀이 우리를 통해서 설명이 되는 겁니다.

어떤 아가씨와 연애하는 것을 친구들에게 자랑질할 때 이미 사랑에 빠진 자는 그 여자 말고 다른 여자를 선택하겠다. 혹은 말겠다는 그러한 판단자, 편안한 외부자가 결코 될 수가 없습니다. 왜? 이 사람은 이미 그 아가씨에게 꽂혔기 때문에 ‘나는 이런 것 때문에 저 여자가 아니고 이 여자를 사랑했다’라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무조건 꽂히고 난 뒤에 그 꽂힌 것을 합리화한다고 설명하는 거잖아요.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벧엘 사람이 히엘이 여리고 성 건축하다가 애 둘 다 죽였다는 그 이야기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있느냐?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고 국가 전체가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 위반되었고, 그렇게 위반하고 난 뒤에 성경 말씀은 뒤늦게 “너희가 위반했다”라고 설명하는 식으로 성경은 기재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이 두꺼운 성경 전체는 우리가 이 성경 말씀을 지키는 것은 없고 모두 다 이미 위반자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이 성경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겁니다. 참 이해하기 쉽지요. 참 이해하기 쉬운 거예요. 그러니 성경 말씀을 지켜서 구원받는 사람은 없다 이 말입니다. 위반했음을 아는 자만이 구원되는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위반했음을.

‘성경 말씀을 보니 내가 바로 위반자네. 나는 주의 말씀을 못 지키는 자네.’라고 발견하는 자가 비로소 성경을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그 말입니다. 또 하나의 예가 열왕기상 16장 31절에 나옵니다.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오므리의 아들 아합왕의 이야기입니다.

바알신을 섬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여호와를 버리는 것을 가볍게 여겼다는 말이지요.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로 아내를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숭배하고” 엣바알의 딸 이세벨로 아내를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겼다. 이 대목은 출애굽기 34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출애굽기 34장 11-16절까지가 긴데요, 앞의 이야기는 “네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거든 이방민족의 신을 섬기지 말라. 그들의 신을 버려라”라고 합니다. 14절에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라고 하고요. 16-17절에 “또 네가 그들의 딸들로 네 아들들의 아내를 삼음으로 그들의 딸들이 그 신들을 음란히 섬기며 네 아들로 그들의 신들을 음란히 섬기게 할까 함이니라 너는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찌니라.”

이미 출애굽기 34장 16-17절에 율법으로 예언되어 있습니다. 예언되어 있는데 여기에 이방신을 믿는 자들의 딸들로 이스라엘 아들들의 아내를 삼지 말라고 했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 열왕기상 16장 31절에 보면, 소위 민간인들이 아니에요. 일반 백성들이 아니고 이스라엘 왕이라는 이 아합이 이방 나라 왕의 딸을 아내로 삼았습니다.

왜 그랬는가? 그래야 출애굽기 34장 16-17절의 이 말씀을 모든 인간은 위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들통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따져보면 이 성경 말씀이 대단히 쉬워요. 성경 말씀이 믿기 어려운 것이 아니고 참 믿기 쉽습니다. 내가 위반자로 이 성경을 새삼스럽게 바라보면 어느 말씀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 말씀이지요.

자, 얼마나 생생한지 신약에 나오는 말씀을 제가 읽어드릴 테니 여러분 마음속에 이 말씀이 어느 정도로 생생한지를 생각해 보세요. 로마서 8장 20절 22절에 보면,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말씀은 “창조된 세상천지는 지금 썩고 있는 중이다. 썩고 있는 중에 산천초목뿐만이 아니고 우리 자신, 우리의 몸뚱아리도 지금 썩고 있다.”라는 말씀을 이렇게 또 예언으로 우리에게 전달해 줬습니다. 우리 몸이 썩고 있다는 것 굉장히 반갑지 않습니까? 기쁘게 다가오지 않습니까?

출애굽기 34장을 보면서 “내 그럴 줄 알았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위반할 줄 알았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여호수아 6장에 나오는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사람은 자식 둘 죽는다.” 이 말을 500년 전에 했는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내가 그럴 줄 알았지. 여리고 성에 감히 건축할 게 뭐야? 아들 죽어도 싸지!’ 하는 마음을 먹었다면 로마서 8장에 본인이 썩는 것에 대해서 흔쾌히 ‘이게 바로 내 모습이다.’ 하고 기쁘게 감수가 되고 받아들여지십니까?

남이 위반하면 고소하다고 하고, 내가 말씀대로 위반하고 있으면 어떻게 자신을 변호하거나 옹호할 생각이 없습니까? 우리는 위반을 하면서 성경을 알아가게 됩니다. 위반을 하면서 성경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위반케 하고, 이스라엘은 왜 여호와를 버리게 하느냐?

오늘 본문 열왕기상 16장에 보면, 성경이 아합 왕에 대해서 다른 걸 묻는 게 아니고 이걸 물어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너 어떻게 했어?” 그걸 묻는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네가 악을 행하는 사람인데 그 점에 대해서 너는 어떤 태도를 가질 수 있느냐?” 이걸 성경이 물어요.

그런데 그 답은 “‘저 여호와 그게 뭔데?’ 이렇게 여호와 믿는 것을 아주 가볍게, 아주 우습게 봤다.” 그러니까 아합의 특징은, 여호와의 말씀이 있든 없든 자기가 멀쩡하다고 자신만만해하는 거예요. 왜 아합 왕은 굳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 신을 믿는…, 본문에 “엣바알의 딸 이세벨”이라고 되어 있지요.

그 시돈 지방이 바알과 관련된 이름을 많이 지었어요.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았고 바알을 숭배하고 이렇게 한 이유가 무엇이냐?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에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거예요. 모든 주신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냥 주신 거예요. 아무것도 한 게 없을 때 그냥 준 거예요. 그런데 아합 왕은 그게 싫었던 겁니다.

멀쩡한 내가 뭔가 해서 이뤄져야 그게 내 것이 돼요, 내 것. 바알 신은 내 것을 인정하는 신이고, 여호와 하나님은 내가 아무리 많이 가져도 일체 내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하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에요. 여러분에게 둘 중 어떤 하나님을 골라잡으라고 한다면 어떤 하나님을 선택할 것입니까?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더 깊은 이야기는 여호와 하나님이 거저 주신다는 데에서 인간 내부에 하나님이 거저 주신다는 것을 몹시 불쾌하게 여기는 요소가 이미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아합 왕을 통해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 내부에 여호와를 모실만한 그런 마음이 자리 잡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을 누가 아시느냐?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그걸 아셔요.

그래서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로 하여금 의도적으로 이 여호와를 배신하게 만들어요. 배신하게 만들면 누가 상처를 받고 어느 민족이 힘드냐 하면, 여호와께서 직접 만드신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로 인하여 균열이 일어나고 파괴되고 무너지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무너지고 파괴되는 그것이 어디까지 이어지느냐 하면, 바로 여호와 하나님 자기 내부가 인간들로 인하여 상처받고 무너지는 것에까지 도달돼요. 하나님께서는 이걸 내다보고 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 자신이 자기 내부의 일에 대해서 공격을 하게 되면 어떤 결과를 낳느냐 하면, 하나님 자기 자신이 파괴되도록 조치하는 일이 되어 버려요.

만약에 여러분 옷 안에 파리나 모기가 들어가면 어떻게 합니까? 쥐어패죠. 누가 누굴 팹니까? 자기가 자기를 패죠. 오늘 예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아주 유치한 예를 들 수밖에 없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기가 자기를 팰 수밖에 없어요. 모기 물론 잡죠, 파리도 잡는데 진짜 된통 오래가고 아픈 것은 본인 자신이에요.

바로 이것이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파괴되는 하나님, 파괴되는 하나님. 왜 그러냐하면, 인간은 신이 있기 때문에 신을 거부하는 존재입니다. 신이 없어서 거부하는 게 아니고 신을 인정하기 때문에 인간은 신에 대해서 공격하는 속성을 지닙니다. 이게 바로 우리 인간의 본성이에요. 이 본성에 대해서 욥기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욥기에 사탄이 나오거든요? 악마가 하나님과 이야기할 때에 악마가 자신만만했던 것이 뭐냐? 모든 인간은…, 악마의 말을 잘 들어보세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자기 것이 있기 때문에 자기 게 있다는 조건 하에 하나님을 섬깁니다.” 다시 말해서 악마가 보기에 “어떤 인간도 순수하게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이 세상 인간 가운데 없습니다.”라고 확고하게 이야기했어요.

자기가 파괴된 상태에서 자기를 파괴시킨 하나님한테 고맙다고 하나님을 섬기는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이 말입니다. 그 마귀의 말에 대해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전부 다 따르고 있고 동조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어떤 사람은 굉장히 명랑해요. 밝고 맑고 명랑해요.

밝고 맑고 명랑해서 사람들이 묻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매사에 그렇게 밝고, 명랑하고, 싱글 벙글입니까?” 그러면 뭐 아버지 DNA가 어떻고, 또 “성격이 그렇습니다.” 그게 마귀 보기에는 웃기지도 않는 변명에 해당되는 겁니다. 마귀는 어떤 사람이 맑고, 명랑하고, 씩씩하고, 표정도 밝고, 그렇게 하는 것은 빈곤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욥기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인간이 빈곤해 보세요. 처절하게 아무것도 없이 가난해버리면 자기의 자존감? 자기의 고상한 것? 소중한 것? 위대한 것? 존재감? 이거 아무짝에도 소용없습니다. 빌어먹어야 돼요, 아무것도 없으면. 사람이 우울증 걸리고 자살하는 사람들 있죠. 사람이 우울증 걸리고 자살하는 이유는, 이 세상에 대해서 자기가 설명할 때 자기가 마저 설명 못 하는 여백과 공백이 발생될 때에요.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열심히 자기 남편 병간호를 하면서 계속 살 줄 믿고 기대했어요. “여보, 우리 건강해서 옛날처럼 웃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요.” 했는데 그 남편이 그만 죽었어요. 죽었을 때 찾아오는 게 뭐냐? 적막감이 찾아와요, 적막감. 멍~해요. 그 적막감이 뭐냐 하면, ‘내가 남편에게 정성과 봉사를 다 하게 되면 이 세상은 내 편에 서서 잘 풀릴 것’이라고, 남편을 봉사하는 것과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을 일치되게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거에요.

그런데 그 보람도 없이 남편이 그냥 죽어버렸을 때 나오는 그 적막감, 이 세상에 내가 미처 모르는 다 덮을 수 없는 공백과 여백과 여지가 가득 차 있는 세상인 것을 새롭게 발견할 때의 그 적막감을 미처 메꾸지 못 하면 그 사람은 우울증 걸리고 자살까지 생각합니다.

‘아, 세상은 내 편이 아니었구나.’ 내가 어떤 일에 집중한다고 해서 세상현실이 내가 집중하는 데에 동조하고 도와줘야 된다는 것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이에요. 그게 바알 종교에요. “내가 신에게 열심을 다 하게 되면 앞으로 내가 하는 일이 잘 풀릴 수 있겠죠? 아마 있을 겁니다.” 하고 묻고 싶은 거예요.

열왕기상 17장 1절, 거기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3년 반 동안 이스라엘에 이슬 하나 물 한 방울 오지 않았습니다. 지금 강릉 난리도 아니죠? 저수율이 지금 15프로 밑으로 떨어졌잖아요. 비 오라고 그렇게 애쓰고 있어도 비 안 오고 있죠. 옛날엔 지금보다 더했어요. 농경 시대에 비 안 오면 그야말로 빈곤입니다. 처절한 빈곤이에요. 먹을 것도 없어요. 자존심? 맑고, 밝고, 명랑한 그거? 그거 다 사라집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에게 뭘 주느냐? 인간들이 마저 덮지 못하는 준비되어 있는 여지와 공백과 여백을 터트려버려요, 그 폭탄을! “너 이런 거 알았어, 몰랐어?” “우리 애는 명랑하고 공놀이를 잘 해요.” 명랑하고 공놀이 잘하는 것은 엄마가 아는 일이죠? 아이가 공놀이 하는데 길에서 공 줍다 차에 받혀 죽는 그것은 엄마의 머릿속에 아예 없던 거예요. 아예 없던 겁니다.

인간이 신을 골라서 믿는다? 그건 내 현실에 대해서 내가 붙들고 있겠다는 각오를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 현실은요,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것들이 훨씬 더 많아요, 훨씬 더 많다고요. 제가 오늘 설교 초반에 아주 지루하도록 이야기했어요.

여리고 성에 집 짓다가 애 두 명이 죽었다. 이건 성경 여호수아 6장에서 말하는 저주가 임했다고 되어 있지만 아무리 성경에서 이야기해도 성경을 보는 인간들에게는 ‘그것은 우연한 일이고, 타이밍이 맞아서 일이 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지 저주받아서 된 것이라는 생각이 일체 없어요.

왜? 저주받아서 된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그때부터 자기 삶이 없어요. 무서워서 못 살아요. 뭐 행동 잘 못 하다가 성경에 나오는 저주 된통 받으면 안 되잖아요. 따라서 인간은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쪽으로, 성경 말씀을 이야기해도 안 들은 걸로 여기고 밀어내는 쪽으로 자기 인생 또 그대로 살아갑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6절에 보면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했어요. 인간이 온 천하를 얻었다고 해서 내 영혼도 얻었다고 오해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바알 종교입니다. 내가 온 천하를 얻었으니까 복 받은 게 맞다고 여기는 것이 바알 종교에요.

왜? 바알 종교는 하나님의 자기 내부가 파괴된 것과 동일한 파괴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하나님 믿는 종교는, 하나님 믿는 신앙은 ‘하나님이 현실 속에서 인간들로 인하여 파괴된 것처럼 파괴되는 그 길이, 하나님의 마땅히 파괴되어야 할 그 마음이 내 마음’이라고 일치시킬 때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거예요. 구원받은 자가 되는 겁니다.

시시콜콜 내가 세상에서 일어난 일을 다 압니까? 모르지요. 모르는데 보세요. 우리가 지금 밥 먹고 살잖아요. 건강하게 여기 앉아있잖아요. 그 이유가 뭡니까? 내가 모르는, 내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내가 노력한 것보다 훨씬 더, 수천 번 수만 번 더 많기 때문에 내가 한 것으로 산 게 아니고 내가 미처 모르는 하나님의 선물로 살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겁니다.

왜 내가 한 걸로 산다고 생각합니까? 내가 내 인생 단도리하고 조심하는 걸로 산다고 생각합니까? 그렇게 되면 예상 밖의 일이 터질 때는 그건 어떻게 수습하시렵니까? ‘나 이제 하나님 안 믿어. 열심히 믿는 내가 바보지. 열심히 믿어 봤자 나한테 돌아오는 이익이 없잖아. 안 믿는 것보다 더 못하네?’ 이런 거, 바로 그 요소가 모든 인간에게 이미 자리 잡고 있었던 겁니다.

아합의 잘못은, 하나님이 약속의 땅에 거저 주시는 걸 가지고 내 것 만드는 이게 문제였어요. 내 것이라고 만든 겁니다. 그런데 열왕기상 17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내 것 만든 그 나라에 3년 반 동안 가뭄이 들게 해서 기근이 오니까 여기에 대해서 아합은 개과천선하고 여호와 믿는 게 아니에요. 끝까지 버티기에 들어갑니다.

그 아합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가 미처 알아내지 못 한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우울증과 자살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왜 세상은 내 뜻대로 안 되는가? 나 정말 짜증 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은, 인간이 미처 알지 못하는 여백과 공백으로 이 세상이 가득 차 있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미처 몰랐던 은혜와 긍휼과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데 인간들이 정신을 어디다 파느냐 하면 자기가 행한 것, 행해서 노리는 것 거기다가 몰두하고 집착하다 보니까 항상 우리 마음은 어떤 마음이냐? ‘내 뜻대로 안 되면 나 하나님께 원망할 거야.’ 그런 마음 준비 자세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교회 나와도 마찬가지예요.

도대체 우리의 죄는 멈출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성경에 분명히 범사에 감사하라 했잖아요. 범사에 감사하라 했는데 우리는 모든 일에 불평합니다, 모든 일에. 무슨 권리로요? 왜? 이유는 단 한 가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은 십자가에 파괴되었지만 나는 그 마음 닮기 싫어. 나는 파괴되기 싫어.’ 이 마음이 우리 안 제일 끝부분에 극단적으로 들어있어요.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아합 이야기를 하면서 “너의 끝 대목을 네가 이 말씀 앞에서 털어내 봐라.” 털어내라는 거예요, 이 말씀 앞에서. 아합 욕 하지 말고. 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아합은 자기가 멀쩡하다고요. 오늘 본문에 아합왕이 이세벨을 자기 아내로 삼았다고 했잖아요.

여기에 대해서 이세벨이 어떻게 죽는지를 엘리야 선지자가 21장에 보면 예언을 해요. 열왕기상 21장 21-25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재앙을 네게 내려 너를 쓸어 버리되 네게 속한 남자는 이스라엘 가운데 매인 자나 놓인 자를 다 멸할 것이요 또 네 집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처럼 되게 하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처럼 되게 하리니 이는 네가 나의 노를 격동하고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까닭이니라 하셨고 이세벨에게 대하여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가라사대 개들이 이스르엘 성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찌라 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저가 그 아내 이세벨에게 충동되었음이라.”

엘리야가 이렇게 예언을 했거든요. 이 예언을 듣고 아합이나 이세벨이 회개했습니까? 택도 없는 이야기에요. 이렇게 저주 소리 듣고 회개를 안 하잖아요? 그런데 그 마음이 오늘날 우리 마음이에요. 우리는 말씀을 듣고 회개할 위인들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는가?

우리가 위반자라는 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어느 구절 하나 위반되지 않은 게 없다고 성령이 우리에게 통보해 줄 때 우리는 비로소 위반자의 입장에서 기쁘게 성경 보면서 ‘나 닮은 인간이 또 있네? 똑같네, 내 마음하고.’ 이러면서 범사에 감사하고 하나님 은혜에 고마워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감사 안 할 수가 없어요. 왜? 못된 짓밖에 못 했는데 아직도 살아 있잖아요. 이게 누구 덕입니까? 주님의 은혜죠. 범사에 감사하죠. 이게 바로 우리 안에 들어온 예언의 효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누가 하나님께 범죄 했다고 고소하다고 할 게 아니라, 우리가 언제 말씀에 신경이나 쓴 적이 있는지 돌아보게 하옵소서. 우리는 집중적으로 내 잘될 일만, 내가 성공할 일만 집중했던 그 모습이 바로 주님을 오히려 파괴시키는, 말씀에 위반되는 우상 숭배자의 모습임을 새삼스럽게 뒤늦게라도 발견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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