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가짜 인간들

아빠와 함께 2025. 8. 28. 07:35

가짜 인간들

2025년 8월 27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16:21-26

16:21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둘에 나뉘어 그 절반은 기낫의 아들 디브니를 좇아 저로 왕을 삼으려 하고 그 절반은 오므리를 좇았더니
16:22 오므리를 좇은 백성이 기낫의 아들 디브니를 좇은 백성을 이긴지라 디브니가 죽으매 오므리가 왕이 되니라
16:23 유다 왕 아사 제삼십일년에 오므리가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이 년을 위에 있으며 디르사에서 육 년 동안 치리하니라
16:24 저가 은 두 달란트로 세멜에게서 사마리아 산을 사고 그 산 위에 성을 건축하고 그 건축한 성 이름을 그 산 주인이 되었던 세멜의 이름을 좇아 사마리아라 일컬었더라
16:25 오므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여
16:26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로 죄를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여 그 헛된 것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케 하였더라

이 땅에서 아무리 권력 투쟁이 전개되더라도 이 세상을 닫혀 있고 막혀있습니다. 탈출구가 없습니다. 마치 장기판 위의 형편 같습니다. 뛰어 봤자, 승리해 봤자 수평적 차원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두 권력자의 싸움에 북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같이 편승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관심사의 총화가 기껏 정치 투쟁에 머무르게 됩니다.

하지만 신약은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7:34-36에 보면,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신대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저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가서 아버지를 뵈옵는다는데 유대인들은 수평적인 지상에서 지상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막혀있지 않고 닫혀 있지도 않습니다. 탈출구를 알고 있습니다. 이로서 인간들의 모든 지상 활동은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막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대범하게 알리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47에, “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같은 사람인데 일반 사람들은 흙에 속했다는 겁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하늘에서 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빼놓고서는 하늘 나라에서 받아주지 않는데 그 이유는 모든 인간이 ‘기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이 ‘가짜 인간’이라는 규정은 구약에서는 ‘언약이 빠진 인간’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오모리나 지난 번에 나왔던 왕인 시므리나 모두 ‘여로보암의 길’로 가는 악을 범한 자들이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로보암의 길’이란 다윗 언약이 포함되지 않는 길을 말합니다. 북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 언약을 이어받은 유다 지파와 결별을 선언하고 만든 나라입니다.

“온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말을 왕이 듣지 아니함을 보고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뇨 이새의 아들에게서 업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라 다윗이여 이제 너는 네 집이나 돌아보라 하고 이스라엘이 그 장막으로 돌아가니라”(왕상 12:16)

이처럼 다윗 언약을 배제하고 나면 남는 것은 무법천지가 되는 겁니다. 최고의 힘 가진 자가 당연히 왕이 되어야 함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이의를 갖지 않게 됩니다. 힘의 극대화에 신경쓰는 이유는 자신이 진짜 인간임을 그 어떤 경우에도 의심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모리가 은 두 달란트로 세벨의 땅을 구입하여 수도를 삼았던 것도 극히 자연스러운 일로 여겼습니다. 언약이 없는 상태에서 말입니다.

하지만 레위기 25:23-28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만일 그것을 무를 사람이 없고 자기가 부요하게 되어 무를 힘이 있거든 그 판 해를 계수하여 그 남은 값을 산 자에게 주고 그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그러나 자기가 무를 힘이 없으면 그 판 것이 희년이 이르기까지 산자의 손에 있다가 희년에 미쳐 돌아올지니 그가 곧 그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약속의 땅은 소유주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차지한 땅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됨을 인정하는 자만 그 땅에 살 권한이 있습니다. 이는 그 사람의 중심부에 주님의 언약이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언약이 중심부에 차지하지 않고 있는 자는 이러한 레위기 말씀을 준수할 하등의 의무를 느끼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 소유권을 유지하시려고 하기에 행여 가난해서 땅을 팔아먹었다면 아일가친척이 대신 빚을 갚아서 땅을 원상복귀시켜야 한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빚을 갚아줄 넉넉한 친척이 없다면 하나님의 일괄적인 조치, 즉 돌아오는 50년에는 모든 땅을 처음 분배받았던 자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오늘날 신약에 적용시켜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양보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렇다면 진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율법을 전부 다 지켜야 합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7:13-14에 나오는 두 개의 길 중에서 어느 길을 골랐던 자가 진짜 인간이고 어느 길을 골랐던 자가 가짜 인간이겠습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얼른 보면, 넓은 길로 가서 사는 자가 가짜 인간이고 좁은 길로 들어가서 사는 자는 진짜 인간일 것 같이 보일 겁니다.

실은 둘 다 가짜 인간이고 진짜 인간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진짜 인간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진짜 인간됨은 율법을 다 이루시면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은 살려고 율법을 준수하신 것이 아니라 죽을려고 율법을 준수하신 겁니다. 여러분들은 진짜 자아를 좋아 하십니까 가짜 자아를 좋아 하십니까?

흔히 ‘나는 상처받았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가짜 자아를 결사적으로 지키려고 했기 때문에 그런게 아닐까요? 진짜 인간이신 예수님은 가짜 인간들로부터 상처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천국에서 받아주는 자는 우리로 인하여 상처받으신 예수님이 중심으로 자리잡은 자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가짜 인간이 진짜 인간이 될 수 있을까요? 사도행전 1:8에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우리 자신이 얼마나 가짜 삶에 치중하고 지키려고 하는지 들통납니다.

따라서 더는 못난 자기 자신이 잘났다는 식으로 삶을 살지 않게 됩니다. 성령께서 그것을 용납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세리와 창기와 같은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이 관계가 바로 성도 내부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위한 힘은 일체 축적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5강-열왕기상 16장 21-26절(가짜인간들) 250827-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16장 21-26절입니다.

열왕기상 16:21-26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둘에 나뉘어 그 절반은 기낫의 아들 디브니를 좇아 저로 왕을 삼으려 하고 그 절반은 오므리를 좇았더니 오므리를 좇은 백성이 기낫의 아들 디브니를 좇은 백성을 이긴지라 디브니가 죽으매 오므리가 왕이 되니라 유다 왕 아사 제 삼십일 년에 오므리가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 이년을 위에 있으며 디르사에서 육년 동안 치리하니라 저가 은 두 달란트로 세멜에게서 사마리아산을 사고 그 산 위에 성을 건축하고 그 건축한 성 이름을 그 산 주인이 되었던 세멜의 이름을 좇아 사마리아라 일컬었더라 오므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로 죄를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여 그 헛된 것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케 하였더라.”

오늘 본문에서 북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둘로 나뉘어졌습니다. 지금 왕이 없는 상태에요. 기존의 왕 ‘시므리’는 왕궁에 불을 놓고 그 안에서 자결했습니다. 왕궁조차 없는 입장, 그런 처지에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백성들이 차기 지도자를 두고 자기 성향에 맞는 사람들을 좇아서 나라가 두 쪽으로 나뉜 겁니다.

시므리가 ‘디르사’에서 7일 동안, 일주일 동안 왕이 되었는데 그때가 아사 왕 27년이라고 열왕기상 16장 15절에 나와 있습니다. “유다 왕 아사 제 이십칠 년에 시므리가 디르사에서 칠일동안 왕이 되니라.” 그 반면에 오므리가 왕이 된 것은 오늘 본문 열왕기상 16장 23절에 나옵니다. “유다 왕 아사 제 삼십 일년에 오므리가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 이년을 위에 있으며 디르사에서 육년 동안 치리하니라.”

그러니까 4년 동안 왕이 없는 시절을 보냈습니다. 북쪽은 백성들이 이렇게 왕이 없는 4년 동안 혼돈의 세월을 보냈지만 남쪽은 여전히 아사 왕으로서 굳건합니다. 유다 왕과 남쪽은 안정되어 있다는 것을 뜻하고, 북쪽은 요란스럽게 불안정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둘 다 인간들이 통치하는 세계인데 한쪽은 안정되어 있고 다른 한쪽은 불안정해요.

성경은 그 불안정한 이유를 찾아냅니다. ‘같은 사람들에 같은 왕이 있는데 왜 북쪽은 불안정하고 남쪽은 안정되어 있는가?’ 그것을 설명하는데 불안정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열왕기상 16장 19절에 “이는 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범죄함을 인함이라 저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로 죄를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였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로보암의 죄라는 것은 무엇 중심인가? 하나님의 언약이 빠져 있는 상태, 하나님의 언약을 중심에 두지 않고 자신의 욕구, 자신의 희망 사항이 중심이 된 사람, 그런 나라가 북 이스라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빠져 있다는 그 말이지요.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자기중심으로 세계관을 갖춘 사람은 천국에서 받아주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으로 세계관을 갖고 있는 사람의 예를 들어보지요. 술 먹는 사람, 담배 피우는 사람이 아주 전형적으로 자기중심의 세계관을 갖고 있어요. “왜 술을 먹습니까?” 기분 좋다고 한 잔, 기분 나쁘다고 한 잔, “내 기분 푼다고 술 먹는데 네가 왜?” 이게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인 거예요.

그런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천국에서 안 받아줘요. 천국은 예수님 중심의 나라기 때문에 안 받아줍니다. 우리나라 옛날 영화에 귀신 쫓아내는 내용이 있어요. 교회에 커다랗게 써놨어요. “천국에 자리를 만들 겁니까, 지옥에 자리를 만들 겁니까?” 이렇게 크게 써 붙여 놓고, 자기를 장필준 목사라고 소개하는데 “천국에 자리를 만드는 사람 장필준 목사” 이렇게 해놨어요.

자, 천국에 자리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에서 탈피, 벗어나야 하거든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디브니’를 좇는 사람도 있고 ‘오므리’를 좇는 사람도 있는데 디브니라는 사람, 오므리라는 사람 그리고 추종자들 전체가 다 뭐냐? 다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 사람들의 공통점이 뭐냐?

언약이 빠져 있는 여로보암의 길로써 전부 다 공통된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10 지파가 북이스라엘 지파가 된 이유가 뭐냐? 북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언약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그게 시급한 문제가 아니라고 내쳤던 사람들이에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언약했다는 그 사실을 그다지 중차대한 문제로 여기지 않은 거예요. 그만큼 각자자기 인생이 따로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보면서 여러분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어야 돼요. 본문을 제가 읽을 때 같이 보셨지요. 그때 오는 느낌이 뭐냐? 그들은 탈출구가 없습니다. 어디에서 탈출구가 없는가? 이 세상에 살면서 탈출구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갇혀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요.

신약에 와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7장 34절에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하고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한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듣고 이 세상에 탈출구 없이 갇혀 있는 유대인들이 이렇게 대꾸합니다.

35-36절에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저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터인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

참 중요한 말씀을 하셨고, 거기에 대해서 유대인들이 정말 중요한 답변을 했어요. ‘도대체 이 사람은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못 만나는가?’ 예수님이 트럼프인가? 함부로 만나지 못하는 사람.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갇혀 있는 반면에 예수님은 갇혀 있지 않아요. 인간은 닫혀 있는데 예수님은 갇혀 있지 않습니다. 하늘과 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 나와서 성경을 본다는 그 취지가 뭡니까? 탈출구가 어디에 있는가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 자세가 교회 나오는 마음 자세여야 한다는 그 말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어떻게 잘 먹고 잘사느냐가 목적이 아니고, 이 땅 자체에 갇혀 있고 탈출구가 없이 나름대로 몸부림치는 그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예수님 하시는 말씀도 충격적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충격적인 말씀을 사도바울도 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7절에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와~, 같은 사람인데 왜 한쪽은 땅에서 났고 다른 한쪽은 하늘에서 났습니까? 하늘에서 난 사람은 진짜고 땅에서 난 사람은 가짜라는 거예요.

그러니 사도바울의 말이 얼마나 도발적이고 대담한 발언이에요? 참 대담한 발언입니다. 어느 누가 들어도 이것은 화를 낼 수밖에 없어요. 이게 무슨 뜻이냐? “당신은 가짜야!” 그런 뜻이에요. “당신은 태어나서 지금껏 살아왔어도 가짜 인간이야!” 당신이 그동안 상처받은 것은 가짜인 줄 모르고 상처받았다고 지금 우기고 있는 거예요. 가짜가 상처받지 그러면 뭐가 상처받습니까?

상처받아도 가짜잖아요. 진짜입니까? 성경이 이처럼 도발적이에요. 대범합니다. 좋게좋게 용납하고 이런 것은 성경에서 할 수가 없어요. 여러분이 어느 순간에 내가 가짜라는 것을 느낍니까? 느껴보신 적은 있습니까, 느껴보신 적은? 어제 꿈을 꿨는데 너무 생생했어요. 큰 강당 같은 곳에서 집회하는 데 제 딸이 갑자기 쓰러지면서 실려 나갑니다.

제 딸 아시지요?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그런데 깨보니 꿈이에요. 여러분, 꿈에서 아무리 참혹한 일이 벌어져도 상처 안 받습니다. 꿈이기 때문에요. 가짜거든요. 다만 제가 느낀 것은,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그런 꿈을 통해서, 언제 죽더라도 탈출이 되는 조건으로 사는 것, 이것이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것이다.’ 그것은 느꼈지요.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르잖아요. 급하게 죽을 수 있기 때문에 언제 죽어도 상관없이 죽어도 사는 그것이 우리의 자존심보다 더 우선되어야 하고 더 소중하다는 것, 그런 것은 꿈을 통해서 정리가 되었지요. 이 사도바울의 설교,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오늘 열왕기상 본문의 내용을 전제로 해서 볼 때 ‘인간세계는 서로 쥐어뜯고 싸우든 말든 간에, 누가 승자가 되고 누가 패자가 되든 그들은 갇혀 있다. 탈출구가 없는 상태에서 서로 싸우고 있다.’ 그겁니다.

디브니가 왕이 될 것인가, 오므리가 왕이 될 것인가? 온 백성들이 두 패로 나뉘어서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오므리를 좇는 백성들이 이겨서 오므리가 차기 왕이 되고 디브니는 죽었어요.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그래서 뭐 어쩌라고?” 트럼프 대통령과 이재명 대통령이 만났습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요? 둘 다 갇혀 있는데. 닫혀 있잖아요. 막혀 있어요.

탈출구가 막혀 있다는 그 말이지요. 열왕기상이나 구약을 보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신약의 내용은 그게 답이거든요. 신약이 답이고 구약이 문제지입니다. 문제지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그 당시의 백성이라면 너는 디브니쪽에 속할래, 오므리쪽에 속할래?”라고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질문을 던지면 사람들은 대부분 답변을 이렇게 합니다. “디브니 쪽으로 할까?” “그러면 나는 오므리로 할까?” 이 두 가지 종류밖에 선택을 못 해요. 너는 어느 쪽으로 할 것인가의 그 질문은, “네가 어느 쪽을 선택해도 똑같이 그들과 함께 막혀 있고 닫힌 세계, 탈출구 없는 세계에서 그저 코 앞에 있는 먹고 사는 일에 급급한, 아무리 살아도 소용없는 그런 인생에 머물 수밖에 없다.”라고 말해주는 겁니다.

그게 뭐냐? 여로보암의 죄의 길로 갔던 사람들의 공통점이에요, 여로보암의 길. 그런데 여로보암의 길을 성경에서는 악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오늘 본문 열왕기상 16장 26절에도 마찬가지예요.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로 죄를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여 그 헛된 것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케 하였더라.”

화내는 분이 위에 따로 있다는 생각을 못 하고 우리끼리 최선의 선택을 했다는 그 자체, 하나님 보시기에는 탈출구가 없는데 자체적으로 뭔가 정의를 구현했다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화가 날 만한 일입니다. 신약의 경우를 다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요 7:34).

주님을 찾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주님의 중심 세계관을 갖추지 못한 것이 되지요. 주님의 중심 세계관을 갖추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천국에서 안 받아주지요. 천국에서 안 받아주는 사람을 뭐라고 하느냐? 그게 바로 가짜 인생입니다. 가짜 인간이에요.

아까 봤던 고린도전서 15장 47절 말고 그 앞에 있는 44-45절에 보면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여기 ‘마지막 아담’이 나왔어요. 마지막 아담이라는 이것은 첫 아담이 죽어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마지막 아담이 역할이에요. 왜? 마지막 아담은 죽은 자를 살려내는 기능을 발휘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일단 알아야 할 것은, 우리 본인이 가짜라는 사실, 그리고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가짜의 특징은 나 중심으로 살아간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오므리는 자기가 왕이 되었으니 인간 승리라고 보겠지요. 오므리가 어떤 점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가짜가 되는가의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열왕기상 16장 24절에 “저가 은 두 달란트로 세멜에게서 사마리아산을 사고 그 산 위에 성을 건축하고 그 건축한 성 이름을 그 산 주인이 되었던 세멜의 이름을 좇아 사마리아라 일컬었더라.”

디르사가 북이스라엘 수도였는데 그 수도를 옮겼습니다. 왜 옮겼느냐 하면, 왕궁에 불이 났어요. 왕이 궁에 불을 내고 그 안에서 자살했기 때문에 재수 없다고 사마리아라고 이름 붙여진 그 땅을 은 두 달란트를 주고 새로 샀습니다.

이게 바로 오므리가 가짜라는 거예요. 그리고 오므리의 이런 행동을 추종했던 그 백성들이 또 가짜고, 그러니까 통합해서 모조리 다 가짜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왜 가짜인가? 공짜로 달라는 한 것도 아니고 돈 주고 땅 매매 했는데 이게 왜 가짜냐?

레위기 25장 2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아, 이 북이스라엘의 오므리가 무엇을 고려 못 했느냐? 이 땅에 율법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못한 거예요. 내가 하는 행위가 율법에 의해서 저촉된다는 사실을 이 가짜 인간들은 고려하지 않은 거예요, 율법이 있다는 걸.

율법에 의하면 그 약속의 땅의 어느 땅이든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복된 땅이기 때문에 매매가 금지되어 있어요. 물론 부동산 소개도 못 합니다. 매매를 하면 안 되니까요. 레위기 25장 23절을 계속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그러니까 이게 뭐냐? ‘토지는 하나님 거고, 토지가 하나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자만 이 하나님 소유의 토지에 살 자격이 있다’라는 이것이 하나님의 율법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만약에 내가 이 땅에 사니까 더 살아야겠다고 자기 편리대로 “저 땅이 좋네? 돈 줄게 팔아라.” 이렇게 되어 버리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주어진 땅이라는 사실을 거부하고, 언약이 빠진 채로, 율법이 빠진 채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죠. 그 사람은 약속의 땅에서 배제됩니다. 천국에서 안 받아주죠.

아까 술 담배 이야기했는데 술 담배 그거 왜 하느냐? 자기 좋으라고 하는 거죠. 그러면 “술이나 담배는 몸에 해로워요. 끊으세요.” “예. 내 몸 건강을 위해 술 담배 끊겠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그 사람이 언약 중심으로 돌아왔어요? 자기 몸 중심이니까 마찬가지로 자기중심의 세계관인 거예요. 역시 천국에서 안 받아줍니다. 천국에서 안 받아주니까 하나님 보시기엔 가짜죠.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자, 가짜입니다.

레위기 25장 25절에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너무 가난해서 살길이 없어서 자기 땅을 부자에게 돈 받고 팔았어요. 왜? 지금 당장 끼니가 없어서. 그 소식을 들은 유력한 일가친척은 그걸 굉장히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에요.

“조카야! 너 하나님이 주신 땅 팔았다면서?” “팔았습니다. 제가 몸도 아프고 일도 못 해서 먹을 건 없고 그래서 팔았습니다.” “그래? 내가 네 삼촌 아니냐. 누구한테 팔았는데?” “저 사람이요.” “걱정하지 마. 내가 너 대신 돈 다 지불하고 그 땅 다시 돌려줄게.” 이렇게 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일가친척도 똑같이 못 살아요. 그럴 때는 어떻게 하느냐? 그때는 모든 것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는 기한을 주께서 준비해 주셨습니다. 그게 희년, 50년이죠. 50년만 지나면 모조리 다 돌려줘야 해요. 하나님이 주는 것만 우리가 가져야 하는데 그 이유가 뭐냐?

주신 분은 하나님, 그걸 갖는 토지의 소유자는 하나님과 임대차 계약이 되어 있습니다. 그 임대차 계약이 율법이에요. 율법으로 계약이 되어 있기 때문에 토지는 누구의 소유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의 소유임을 드러내는 식으로 그 땅에 거주할 자격이 성립됩니다.

이것이 신약에 와서 천국도 마찬가지인데, 천국은 소유권이 예수님한테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내가 인생을 몇 년을 살지 모르겠지만 몇 년을 살든지 간에 예수님이 허락하신 세월 동안만 임대차 계약하에 주어진 세월이에요. 우리의 몸도 그렇고, 우리의 모든 것도 그렇고요.

그러니까 진짜 인간은 뭐냐? 하나님의 율법이 나의 주인공으로 차지해서 들어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주인으로 중심에 차지된 그 사람만이 진짜 인간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보니까 오늘 본문의 오므리가 두 달란트 주고 왕이라는 이름으로 땅을 구입한 것은 그 마음속에 레위기 25장 23절에서 28절의 말씀이 전혀 들어있지를 않다는 뜻이에요.

그렇다면 다윗, 다윗이 땅을 산적은 있어요. 사무엘하 24장 24절에 다윗이 땅을 샀는데 그 땅은 여부스 족속의 땅이에요. 그 땅은 돈 주고, 값을 주고 샀어요.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은 오십 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를 사고.”

그래서 이것은 이방 민족의 땅이기 때문에 아직까지 약속의 땅으로 접수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돈 주고 산 거고요. 그리고 그 지시는 바로 하나님에 의해 이뤄졌기 때문에 성립이 되는 겁니다. 자, 지금까지 한 걸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여로보암의 죄는 하나님의 언약이 빠져 있고 그 자리에 자신의 욕망이 거기 들어있는 거죠.

그러면 오므리는 자기가 왕이기 때문에 어떤 입장에 있는가? 법을 제정하는, 법을 만드는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왕이기 때문에 법을 만들어요. 법을 만드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 있느냐? 무법한 사람이에요, 무법한 사람, 곧 법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욕망은 뭐냐? 어떻게 하든지 법 없이 내 맘대로 살고 싶은 것이 인간 내부의 욕망이 추구하는 최정점의 희망사항입니다.

“나는 법 없이 한번 살고 싶다!” 무슨 뜻입니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욕망대로,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다 하고 싶다.’에요. 모든 인간이 갖고 있어요. 갖고 있는 그것을 실현시킨 사람, 그걸 현실화시킨 그 사람을 왕이라고 해서 사람들은 그 왕을 대단히 부러워합니다.

그리고 그 왕이 되는 오므리나 디브니 이런 사람들은 희망이 있었죠. ‘내가 법을 만들기는 하지만 어떤 법도 나를 저촉하지 못하는 그 최고의 자리를 내 욕망으로서 한번 차지하고 싶다.’라는 정치적 야망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그 말은, 가짜가 진짜 흉내를 내는 거예요.

서부극에 보면 주인공이 나오죠. 악당 나오고, 그리고 악당을 처벌하는 총잡이, 아주 빠른 총잡이가 나오죠. <장고>라든지 그런 영화에. 그런데 영화 제목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무법자’에요. <황야의 무법자> 그러니까 법이 세밀하게 세워지지 않은 서부 개척 시대 있었던 사나이들, 그냥 ‘사나이’가 아니고 시옷 두 개 들어간 ‘싸나이들’ 싸나이 중에 싸나이 특징이 뭐냐 하면, 성질대로 막 총 쏘는 사람들이에요.

직장 생활하면서 많이 피곤했던 아버지, 가장이 집구석에 빨리 들어오고 싶은 이유가 뭡니까? 거기서는 자기가 무법자거든요. 법을 뛰어넘고, 법 없는 세계에서 자기가 살고자 하는 것, 가짜 인간이 바로 신이 되고 싶은 그런 야망을 지금 북이스라엘의 두 왕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에게 제가 문제를 내겠습니다. 신약에 나오는, 마태복음 7장 13절에 나오는 말씀인데요. 넓은 길이 가짜일까요, 좁은 길이 가짜일까요? 여기 보면 두 가지의 길이 있다고 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넓은 길이 가짜일까요, 좁은 길이 가짜일까요? 사람들은, 심지어 초등학교 아이들도 이야기 합니다. ‘넓은 길은 가짜고, 좁은 길은 진짜다’ 그렇게 생각하죠. 그러면 또 하나 문제를 내겠습니다. 마태복음 21장 31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 창기가 있는데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에요.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가 문제 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이 진짜입니까, 세리 창기가 진짜입니까?”라는 문제를 낼 수 있어요.

누가복음 18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리가 나오는데 그 세리는 회개하고 있고 바리새인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하고, 그렇게 자기 잘난 체해요.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주님께서는 이 세리가 의인이고 바리새인은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똑같은 문제죠. “바리새인이 진짜입니까, 아니면 세리가 진짜입니까? 어느 것이 가짜고 어느 것이 진짜입니까?”라고 질문을 하면 그 질문에 대해서 아무도 어려워하지 않습니다. 과연 그 질문은 너무나 쉬운 질문이에요.

좁은 길은 진짜고, 넓은 길은 가짜라고 초등학교 애들도 그렇게 생각하죠? 틀렸습니다. 이게 왜 틀렸는지를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마르셀 뒤샹(Henri-Robert-Marcel Duchamp, 1887-1968)이라는 사람이 있는데요, 조각가입니다. 마르셀 뒤샹이라는 그 조각가가 작품을 출품하는데 어떻게 하느냐?

남성 소변기 있잖아요. 남성 소변기에다가 자기 사인을 써놓고 제목을 spring, <샘>이라 해서 그걸 그대로 가지고 와서 포장지만 뜯고 전람회에 출품했어요. 이건 누가 봐도 기성품이에요. 공장에서 만든 기성품입니다. 기성품에 자기 사인을 해서 출품했어요.

심사위원들이 기가 막혔어요. 이걸 작품으로 받아줘야 할지 아니면 돈 주고 사는 기성품이니까 작품에서 배제해야 할지 굉장히 난감해했어요. 당시에 이게 이슈가 되었습니다. 20세기 서양 미술계에 화제를 일으킨 사건이에요. 마르셀 뒤샹 그 사람의 취지는 이렇습니다.

당시에 ‘인간이 모든 정성을 들여서 만들어낸 것은 예술품이고, 시장에서 아무나 살 수 있는 기성품은 절대로 예술품이 아니’라고 하는 두 가지로 나눠진 거예요. 어느 것이 가짜고 어느 것이 진짜냐? ‘예술 세계에서 정성을 들인 것은 진짜고, 돈 주고 사는 것, 공장에서 찍어내는 이것은 예술품이 아니고 가짜 예술품’이라고 고정화된 것에 대해서 ‘진짜 예술품은 기성품에서 끄집어낼 수 있다’라는 것을, 그 <샘>이라는 작품을 출품함으로써 알려주려고 한 거예요.

‘진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넓은 길로 가지 말고 좁은 길로 가야 된다. 왜? 좁은 길이 진짜다. 난 좁은 길로 갈래.’ 이게 가짜입니다. 이게 가짜에요. 어떤 인간도 좁은 길을 갈 수 있는 위인은 없습니다. 마태복음 5장 17-18절에 보면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자, 이 다 이루어내는 것이 진짜 인간이거든요. 그런데 다 이루는 방법이 뭐냐? 다 이루는 방법이 예수님 자신의 죽음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천국 가지 못하고 세리와 창기가 천국을 먼저 간다’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세리와 창기로 살면 천국 가는 줄 알고 있는데 그것도 잘못된 생각이에요.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넓은 길로 가서 살래.” 가짜입니다. “좁은 길로 가서 살래.” 이것도 가짜입니다. 진짜는 뭐냐? 성도의 길은 핍박 받는 길이에요. 왜냐하면 좁은 길도 넓은 길도 뒤에 뭐가 붙느냐 하면, “…살래.”가 붙어있어요. 우리는 태생이 가짜이기 때문에 가짜가 아무리 율법을 지키려고 애써도 가짜는 가짜로 끝납니다.

또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여러분, 진짜 ‘나’가 좋습니까, 아니면 가짜 ‘나’가 좋습니까? 이거는 답변하기 굉장히 곤란할 거예요. 인간은 진짜 ‘나’로 인하여 가짜 ‘나’가 상처를 받습니다. 자기가 가짜인지를 모르고 무조건 ‘나’니까 지켜야 된다는 것 때문에 오히려 진짜 ‘나’로부터 상처를 입는데 그 상처 입는 이유가 가짜 ‘나’로 인하여 진짜 ‘나’인 아담 예수님이 이 땅에서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 때문에 예수님이 상처받은 건 생각 안 하고 너 때문에 나 상처받았다는 것만 생각하고 있어요. 제 이 말은 한마디로 말해서 뭐냐? 언제까지 자기중심으로 살렵니까? 천국에서 안 받아주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나 진짜이고 싶어.’ “나 진짜이고 싶어!” 하면서 실험했던 자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디브니하고 오므리에요.

지난번엔 시므리고, 여로보암이고요. 그런데 그들의 전쟁터는요, 탈출구가 없어요. 백날 실패하거나 또 성공해 봤자 성공한 자나 실패한 자나 모조리 가짜인 건 똑같아요. 그들은 구약 성경의 그 평면에서 그들 나름대로 법을 제정하는 최고의 자리, 법에 저촉받지 않고 잘난 척을 하는 최고의 자리를 노리고 서로 권력 투쟁을 한 겁니다.

구약 성경의 이 본문이 오늘날 신약의 우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주는 겁니까? 남한테 이길 생각 말고 본인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십자가 앞에서 다시 한번 점검해 보시라, 이 말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주님께서 진짜인 것이 드러난 것은 주님께서 진짜 죽음을 죽으셨는데 그것이 마태복음 21장 38절에 나옵니다.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유대인들이 약속의 땅에 살고 있습니다. 약속의 땅의 주인이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왔는데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 땅에 사는 농부들이 진짜 땅의 주인인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핍박을 받는 모든 인간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인간인 가짜들로부터 핍박을 받아 죽으신 그 분만이 마지막 아담이고, 하늘에서 태어나신 분인데 땅에 오신 분이고 그분만이 진짜 인간이고 그 진짜 인간이 중심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서 받아주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신앙생활 잘하면 뭐합니까? 천국에서 받아주지 않으면 끝이죠. 이제 끝으로 문제를 던져놨으니까 해결책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있습니다. 해결책 있습니다. 그것이 사도행전 1장 8절에 나옵니다. 해결책 있으니까 이제 눈 떠도 괜찮아요. 마지막 해결책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1장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지묘동에서, 서울에서, 대구에서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게 뭐냐 하면, 진짜 인간인 예수님의 영이 임하면 그다음부터 가짜의 증인 노릇을 그만두게 된다는 거예요.

‘가짜 나, 이렇게 잘났어. 이렇게 우수해. 훌륭해’ 그 노릇, 그 가짜의 노릇을 그만두고 주님이 가짜인 나를 통해서 진짜 나를 증거하는 용도로 성령께서 활용하고 있다는 고백을 내놓게 됩니다. 애를 둘 키우든, 애를 몇 명을 키우든 그 모든 것조차도 예수님이 주신 자식이 예수님 것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가짜인 나를 통해서 그 진짜인 주님이 오셔서 그 일을 하게 하신 거예요.

왜냐? 그래야, 내가 가짜라는 걸 알아야 나 잘났다는 것을 증거하는 생활이 얼마나 엉터리고 이게 가짜가 가짜다운 모습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 수 있잖아요, 성령이 임하면. 그러니까 좁은 길로 간다는 이것은 주님 가신 길이 좁은 길인 거예요. 좁은 길은 뭐냐? 힘들게 가는 길이 아니고, 내 증인 노릇하는 게 아니라 주님 증인 노릇하는 겁니다.

이것은 가짜로서는 마음대로 안 되고 주위의 핍박과 곡해와 오해가 수반되면서 나타나는 놀라운 주님의 능력이 못난 우리를 통해 드러날 때 이게 바로 천국에서 받아주는 진짜 성령의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언제부터 막혀 있는 인간이고, 탈출구 없이 잘난 맛에 살아가는 인간인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성령이 오셔서 십자가 앞에서 우리 자신을 비춰 볼 때, 주님이 우리 때문에 돌아가신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가 분명 가짜인 것을 아는 그 감사와 기쁨이 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이제는 나의 증인이 아니라 주의 증인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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