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언약의 결정체

아빠와 함께 2025. 8. 21. 10:06

언약의 결정체 

2025년 8월 20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16:15-19

16:15 유다 왕 아사 제이십칠년에 시므리가 디르사에서 칠 일 동안 왕이 되니라 때에 백성들이 블레셋 사람에게 속한 깁브돈을 향하여 진을 치고 있더니
16:16 진중 백성들이 시므리가 모반하여 왕을 죽였다는 말을 들은지라 그 날에 이스라엘의 무리가 진에서 군대장관 오므리로 이스라엘 왕을 삼으매
16:17 오므리가 이에 이스라엘 무리를 거느리고 깁브돈에서부터 올라와서 디르사를 에워쌌더라
16:18 시므리가 성이 함락됨을 보고 왕궁 위소에 들어가서 왕궁에 불을 놓고 그 가운데서 죽었으니
16:19 이는 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범죄함을 인함이라 저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로 죄를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였더라

군인들에 의해서 계속 왕권이 바뀝니다. 이런 군사 정권의 지속에 대해서 백성들은 별 반감을 갖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평소의 백성들의 삶의 태도에서 하나님 섬김보다 늘 더 우선되는 게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생존의 안정성’입니다. 즉 자신들의 목숨을 안정적으로 보장해 줄 수 있는 바탕을 간절히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극히 육적입니다. 자신과 가족의 안녕과 번창을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들의 현실 생활이란 딴 게 아니라 자신을 보다 안정적으로 보장해 줄 수 있는 힘을 만나서 거기에 기대는 삶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을 버린 북이스라엘의 정치 풍토 안에서 백성들이 왕이나 모든 생각이 합치됩니다.

군인들은 전쟁하는 전문가들입니다. 그들은 물리적인 군사력을 최우선적으로 신봉합니다. 세상에 얼마든지 아름답고 좋고 선한 것들이 많이 있지만 실질적인 효과를 내는 것은 궁극적으로 군사력이라는 것을 믿고 사는 자들입니다. 전쟁의 무기란 상대방의 육체에 대해서 실적으로 효과를 주는 수단이라는 것을 이들은 온 몸으로 단련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 군인들 입장에서 솔로몬 때에 블레셋 땅마저 솔로몬의 지배하에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의 군사력이 블레셋보다 월등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하수에서부터 블레셋 사람의 땅에 이르기까지와 애굽 지경에 미치기까지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므로 그 나라들이 공을 바쳐 솔로몬의 사는 동안에 섬겼더라”(왕상 4:21)

오늘 본문에 보면, ‘깁부돈’이라는 지명이 나옵니다. 이곳은 이스라엘의 수도는 아닙니다. 이스라엘 수도는 ‘디르사’입니다. ‘깁부돈’은 블레셋 땅입니다. 북이스라엘 왕은 자신이 강제로 전임왕으로부터 정권을 강탈하고 난 뒤, 자신의 왕위의 정통성을 새삼스레 만들어내기 위해 선왕 못지 않은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자 했습니다.

이 깁부돈 지명에서 전쟁을 치르고자 했던 왕이 바로 나답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아사가 이 나답을 그곳에 죽였습니다. (왕상 15:27) 25년 뒤, 이번에는 깁부돈에서 전쟁을 하던 오모리가 디르사에서 전임 왕(엘라)을 죽이고 7일간 왕이 된 시므리를 백성들을 데리고 가서 왕궁으로 쳐들어가니 여기에 놀란 시므리가 왕궁에 불지르고 자신도 그 불구덩이 속에 자결합니다.

이러한 시므리의 죽음을 하나님께서는 그가 여로보암의 죄를 지어서 주어진 당연한 결과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에게 연이어 벌어지는 군사정권 쟁탈을 통해서 참된 이스라엘은 무언가를 새삼스럽게 들추어내십니다. 자신이 가진 군사력을 의지하는 방식으로 국가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는 보는 것은 이스라엘이 탈출한 애굽나라의 특성입니다.

육의 힘의 최종 형태가 바로 애굽이라는 나라입니다. 거기에서 감히 벗어날 이스라엘은 애굽나라가 추구하는 권력의 안정적인 방식과 다른 안정성을 바탕으로 깔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언약입니다. 솔로몬이나 다윗이 주변 나라의 군사력들을 꼼짝없이 점령하고 공물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언약의 효력입니다.

언약이란 인간의 잠재력으로 활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정반대입니다. 마치 길이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나뭇가지를 가져다가 오스트리아 할스타트에 있는 소금광산에 오래 묵히면 그 나뭇가지에서 소금의 결정체가 맺히는 것과 같습니다. 히브리인이나 애굽 사람이나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생계와 생존이 기본입니다.

일단 생존에 여유가 있으면 자신을 짐승이 아닌 인간의 존엄성에 신경 쓰면서 착하고 바르고 아름답게 살려고 시도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적인 여망들에 대해서 더 선험적이고 우선적인 현실성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정치권력이며 특히 군사력에 근거한 정치성향입니다. 착한 농부가 열심히 밀을 재배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옆의 나라에서 총과 칼과 각종 무기를 들고 쳐들어오면 재배한 밀은 그 침략을 막아낼 실질적인 수단이 되지를 못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말입니다. 울릉도에 오징어가 잡히지만 그 오징어로 침략자들을 굴복시키지 못합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에 군대 자체가 없이 교회만 세운다고 해서 점령당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은 기존의 상식적인 일반적인 나라와는 특수성을 띠어야 합니다. 칼이나 활이나 말 같은 군사력보다 더 우선적인 것이 이스라엘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이 말씀대로 성취’되는 성취력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 4:4)

따라서 북이스라엘에서 계속 군사 정권교체가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껍질을 강제로 벗겨내시는 작업입니다. 뜯어내시는 겁니다. 마치 장판을 뜯어내면서 그동안 못보던 풍경이 시멘트 바닥에 나타나듯이 말입니다. 언약으로 기존의 이스라엘 역사를 뜯어내면 무엇이 보일까요?

그것은 바로 기업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상속분입니다.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8) 이 기업은 언약의 은총을 받아 말아야 될 자에게는 결코 전달되어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매”(창 21:10)

이 기업의 중심처에는 시온이 있습니다. 이 시온은 ‘여호와의 처소’입니다.(시 76:2) 거기에 언약에 합한 왕이 임하게 됩니다.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시 2:6) 그리고 구원도 바로 그 시온에서만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시 14:7)

성도란 바로 그 왕이신 예수님에 의해 언약으로 뚫린 자입니다. 이들만큼은 언약층을 내부적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언약이 성도의 자기 의가 있는 자리에 겨냥해서 오셔서 그 자기 의와 자존감에 뚫린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이들 마음이 빨대를 꽂고 위에서 빨아당긴다면 하나님의 언약까지 빨대를 통과해서 올라오게 될 겁니다.

바로 이들만이 천국 백성입니다. 주님과 더불어 통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자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언약의 결정체가 되어 주님만 증거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4강-열왕기상 16장 15-20절(언약의 결정체) 250820-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16장 15-20절입니다.

열왕기상 16:15-20

“유다 왕 아사 제 이십 칠년에 시므리가 디르사에서 칠일 동안 왕이 되니라 때에 백성들이 블레셋 사람에게 속한 깁브돈을 향하여 진을 치고 있더니 진중 백성들이 시므리가 모반하여 왕을 죽였다는 말을 들은지라 그날에 이스라엘의 무리가 진에서 군대 장관 오므리로 이스라엘 왕을 삼으매 오므리가 이에 이스라엘 무리를 거느리고 깁브돈에서부터 올라와서 디르사를 에워 쌌더라 시므리가 성이 함락됨을 보고 왕궁 위소에 들어가서 왕궁에 불을 놓고 그 가운데서 죽었으니 이는 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범죄함을 인함이라 저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로 죄를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였더라 시므리의 남은 행위와 그 모반한 일이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시므리’가 7일 동안 왕이 되었습니다. 시므리는 어떻게 왕이 되었는가? 전임 왕 ‘엘라’를 죽이고서 왕이 되었습니다. 엘라는 ‘바아사’의 아들인데 바아사는 누구인가? 그냥 군인이었어요. 군인인데 ‘나답 왕’을 죽였습니다.

열왕기상 15장 25-27절에 “유다 왕 아사 제 이년에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이 이스라엘 왕이 되어 이년을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아비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그 죄중에 행한지라 이에 잇사갈 족속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가 저를 모반하여 블레셋 사람에게 속한 깁브돈에서 저를 죽였으니 이는 나답과 온 이스라엘이 깁브돈을 에워싸고 있었음이더라.”라고 되어 있어요.

25년의 간격을 두고 나답이라는 사람도 ‘깁브돈’이라는 곳을 에워싸고 있었고, 오늘 본문 15절에 보면 시므리가 7일간 왕으로 있을 때 깁브돈에서 진을 치고 있던 ‘오므리’라는 군대 장관이 깁브돈에서 백성들과 더불어 왕이 되어버렸어요. 그래서 왕이 동시에 두 사람이 된 거예요.

본문에 ‘디르사’가 나오는데 북이스라엘의 수도입니다. 북이스라엘 수도 디르사에서 시므리가 7일 동안 왕위에 있을 때 ‘깁브돈’이라는 곳에서 진을 치고 있던 군대 장관 ‘오므리’가 또 왕이 되었으니 이스라엘에 왕이 두 명이 된 거지요. ‘디르사’라는 곳이 어디쯤인가?

북이스라엘을 경상북도로 치고 남쪽 유다를 경상남도라 치면 ‘디르사’는 경북의 ‘안동’쯤 됩니다. 갈릴리 바다와 사해 사이에 요단강이 흐르는데 위에서 3분의 1지점에 ‘디르사’가 있어요. 그러면 ‘깁브돈’은 어디인가? 거기는 경상남도도 아니고 경상북도도 아닌 충청북도의 ‘영동’쯤이라 할 수 있는데 거기는 블레셋지역입니다.

블레셋인데 깁브돈이라는 지역, 즉 충북의 영동에 있는 군인이 스스로 왕이 되고 또 경북의 안동까지 와서 왕을 죽이는가? 이들은 지금 뭘 하고 있는 겁니까? 왕이라는 것은 대체 뭘 하는 작자들이지요?

솔로몬왕 당시에는 이스라엘이 아직 둘로 쪼개지지 않았을 때예요. 단일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솔로몬의 통치에 대해서 군인 출신들이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어요. 솔로몬의 군사력이 막강해서 왕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군인들의 발상은 뭐냐? 군사력 외에는 다른 실체를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군대에 다녀오지 않은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군대 병기고에 총이 있고, 그리고 기관총과 탱크와 미사일 같은 무기들 그거 왜 있는 겁니까? 옛날처럼 창 들고 씨름하고 그렇게 전쟁하는 겁니까? 인간이 도구를 사용해서 힘을 극대화시킨 그것이 전쟁 무기입니다. 전쟁 무기를 누가 장악하느냐? 군인들이 장악해요.

무기를 장악해서 전쟁하는 전문가들이 군인들이잖아요. 군인들에게 현실 세계라는 것은 군사력 외에는 없는 겁니다. 양심? 도덕? 착함? 농사짓는 것? 고기 잡는 것? 장사하는 것? 물론 그것도 사는 데 필요하지요. 전쟁놀이만 하면 못살잖아요.

하지만 힘이 된다는 그 점에서 울릉도의 오징어가 힘이 될까요, 아니면 바주카포가 힘이 될까요? 이것은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되잖아요. 핵미사일이 힘이 될까요, 교사가 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는 것이 힘이 될까요? 어느 쪽입니까? 핵미사일이지요. 이것은 뭐 바보가 아닌 이상은…, 견줄 것을 견줘야 하고 비교할 것을 비교해야지요.

‘궁극적으로 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군사력이다. 군사적, 정치적 힘이다.’ 이것을 군인들은 온몸으로 체험하고 있었던 겁니다. 열왕기상 4장 21절에 이런 말씀이 나와요. “솔로몬이 하수에서부터 블레셋 사람의 땅에 이르기까지와 애굽 지경에 미치기까지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므로 그 나라들이 공을 바쳐 솔로몬의 사는 동안에 섬겼더라”

‘깁브돈’이라는 곳은 아까 이야기한 대로 충북의 영동 지역이지요. 블레셋 땅이에요. ‘솔로몬이 그 블레셋 땅까지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과연 군사력이었느냐?’ 하는 것을 성경은 우리한테 묻습니다. 시므리, 또는 오므리, 또 나답, 바아사, 여로보암 이런 사람들이 생각한 것처럼 솔로몬이 애굽부터 주변의 온 지경의 나라들을 다스리고 그들로부터 조공을 받은 것이 과연 전쟁을 잘해서 그랬는가를 성경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만약에 성경을 모르는 사람 같으면 ‘그것은 솔로몬의 군대가 막강했기에 가능했다’라는 상식적인 답변이 나오겠지요. 그러나 솔로몬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과 맺은 언약을 제일 우선적으로 생각해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그 언약이 이스라엘을 다스렸기에 군사력이 뛰어난 주변 나라를 통치했다.’ 그렇게 보는 거예요.

옛날에 나온 <밀양>(2007)이라는 이창동 감독의 영화가 있어요. 신애(전도연)가 ‘준’이라는 이름의 아들을 데리고 이사 오게 되는 곳이 밀양입니다. 그곳 밀양 남부교회 장로 부부가 약국을 하는데 맞은 편에서 피아노 학원을 차린 신애에게 전도합니다. “준이 엄마! 내가 선물 하나 줄게” 하면서 책을 내밀죠. “준이 엄마는 보이는 이 세상이 다라고 생각해요? 이 세상에는 보이는 것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이렇게 전도해요.

신애(전도연)가 회개하고 신자가 된 후에 다른 사람 전도할 때 또 그 방법을 사용합니다. “이 세상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영화에서 보이지 않는 것이 뭔지가 나타나지 않아요. 이스라엘의 특수성은 뭐냐? 애굽을 꺾었다는데 그 특수성이 있습니다.

애굽은 군사력이 막강해요. 역사적으로, 전통적으로 군사력이 막강했고 그 군사력의 정점에 왕이 있었습니다. 그 왕은 자칭 신의 아들이 되어서 모든 백성들을 자신을 믿는 종교인으로 만들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신과 보이는 인간 사이의 중간지점에 왕이 있는데 그 왕이 바로, 태양신의 아들입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백성들은 “믿습니다!”가 되는 거예요. 국가가 아니라 하나의 종교단체로 만든 것이 애굽입니다. 단일종교에요. ‘보이는 왕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래서 왕에게 복종하는 것은 신으로부터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그게 애굽나라였습니다.

애굽의 군대, 발달된 병기들, 말과 병거, 칼과 활 이런 것들로 대제국을 만들 수 있었어요. 감히 그 나라에서 독립하는 어떤 민족도 없었는데 이스라엘은 거기서 특수하게 나왔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그랬다는 거예요. 그게 이스라엘의 특수성이에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은 그 특수성을 다 날려 보냈어요. 없어요. 애굽하고 똑같이 된 겁니다. 이렇게 정리하면 돼요. 인간들이 평소 살아가는 것은 생존, 생계가 우선입니다. 직업이 없으면 못사니까요. 비가 많이 오거나 가뭄 들어서 농사 망치고 곡식 없으면 못 살아요.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내가 사느냐, 죽느냐?’ 하는 것은 나에게 양식이 될 수 있는, 생계가 될 수 있는 수입이 있어야 한다는 이것이 1차적이에요. 당연한 거지요. 인간의 세포가 단백질, 탄수화물, 지방이 없으면 못살고 그것은 식량에 들어있고 그걸 구해야 사니까요. 그게 당연한 거잖아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 당연한 것을 엎어버립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마 4:4) 이게 신약에서 예수님이 마귀에게 시험받을 때 나왔다면 그런 차원에서 구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버릴 때 인간은 무엇을 우선시하느냐?’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드러내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버릴 때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적용되었던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원칙을 배제할 때 그 나라, 이스라엘은 어떤 식으로 변질되느냐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것은 군사력 위주가 되지요. 군대 위주가 되는 겁니다. 힘 있는 자가 왕이 되고, 또 힘 있는 자가 그 힘을 엎어버리고 왕이 되고, 그런 식으로 군사력으로 지배하는 거예요.

일반백성들은 어떻게 되느냐? 일반백성은 그냥 밥 먹고 살게만 해준다면 누가 왕이 되든 상관치 않고 복종할 마음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아까 한 이야기 다시 하면, 솔로몬이 당시에 블레셋 지역까지 통치한 것은 언약의 힘이었어요. 언약을 믿은 거예요.

그런데 북이스라엘이 현재 ‘깁브돈’이라는 블레셋 지역을 차지해야 하는 그 이유가 뭐냐? 그렇게 해서 옛날 솔로몬 왕만큼의 권위가 있음을 백성들로부터 부여받으면 자신의 왕권을 자기 아들에게까지 세습할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만큼 왕권을 유지하는데 군사력이 무엇보다 필수적이라는 거예요.

층을 나눠봅시다. 인간의 기본은 생계 위주에요. 돈 벌어서 밥 먹고 사는 것이 제일 윗 층입니다. 밥 먹고 살만하면 그다음은 뭐냐? ‘밥 먹고 사는 것은 짐승들도 한다. 우리는 인간이잖아. 인간답게 사는 것은 무엇인가? 착하게 살아야 하고, 바르게 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 그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일단 밥 먹고 살만하면 그다음부터는 진선미, 아름답고 착하고 선한 것을 도모하는 것, 이것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수립돼요.

그런데 그 아래층에 뭐가 있느냐? “착한 것이 밥 먹여 주나? 다른 나라에서 군대가 쳐들어오면 착하고 뭐고가 없어. 농사짓고 고기 잡고 장사하는 것도 다 빼앗기고 포로 잡혀가는 거야. 막강한 군사력만이 이 나라를 지켜주는 거야” 즉 “군사력에 토대를 둔 단단한 국가체제가 여러분의 정서적인 행복과 생계를 도모하는 생업도 보장해 줄 수 있습니다.” 이런 정신이에요.

제일 위층은 사적으로 생계 문제, 먹고 사는 문제가 되면 그다음 층은 ‘착하게 살면 하나님께서 복 준다’라는 그것. 그러나 그 아래쪽에 뭐가 있는가? 그런 것 다 무산시키고 엎어버리는 것이 바로 깡패들, 군인들의 세계, 군사력입니다. 착한 것이 밥 먹여 주지 않잖아요. 하나님 믿고 교회 간다고 해서 북한의 핵 도발로부터 우리를 지켜줍니까?

군대 없애고 교회 대신 만 군데 만들면 북한이 “무서워라!” 해서 안 쳐들어옵니까? “아이고, 겁나라! 저 십자가 겁나서 안 쳐들어갈 거야.” 이게 김정은 마음입니까? 그러니까 이 성경이요 현재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여지없이 다 까발려주는 거예요. “너희들 이렇게 살고 있잖아, 그렇지? 내가 틀린 소리 했어?” 이게 성경이에요.

실제로 하나님의 언약을 버린 북이스라엘 쪽에서 계속 군사력을 의지해서 왕의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것에 대해서 놀라운 사실은 백성들이 동조하고 있다는 겁니다. 왕도 하나님의 언약을 모르고, 백성들도 하나님의 언약을 모르고. 서로 죽이 맞아요. 군사력을 가진 군인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죽이고 왕이 되는 것을 백성들은 왜 굳이 싫어하지 않았느냐?

백성들 입장에서는 삶의 안정성이 우선이에요. 누가 군사력을 쥐고, 누가 대통령이 되고, 왕이 되든 내가 하는 일을 그냥 보호해 주기만 하면 세금 바칠 요량이 되어 있다는 겁니다. 깡패사회를 그린 영화 내용이 그거잖아요. 남대문 시장에서 깡패들이 돌아다니면서 점포의 물건들 발길로 차면서 “누가 허락도 없이 여기서 장사하라고 했어! 세금 냈어?”

그러면 어떻게 해요? 세금 바치고 깡패들에게 보호받으면서 둘씩 셋씩 있는 자식새끼들 밥 먹이는 것, 그것 외에 인간에게 무슨 다른 소원이 있습니까? 없지요. 설교 끝났어요. 설교 끝나야 해요. 성경에서 현실을 현실 그대로 이야기하잖아요. “솔로몬처럼 되는 것? 솔로몬은 군사력이 세서 그랬지. 나도 솔로몬 못지않아. 왜? 나에게는 힘이 있으니까.” 이 이야기가 열왕기상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자, 말씀에 해결책도 있거든요.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라고 신약에 해답이 나와 있는데 그 해답에 이르기까지 구약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런 정황을 보시고 그냥 방치하시느냐, 아니면 일을 벌이시는가? 일을 벌입니다. 어떻게 벌이시는가?

제가 TV 프로에서 보니까 어떤 식당에 젊은 사람이 와서 주문을 해요. 주인아저씨가 와서 “뭘 주문하시겠습니까?” 하고 친절하게 물어보니까 삼겹살하고, 돼지 목살하고, 또 하나 돼지 껍데기를 달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주인이 머리가 얼마나 나쁜지 세 가지인데 세 가지도 복잡했던 모양이에요. 삼겹살과 목살은 줬는데 돼지 껍데기는 그만 잊어버렸어요.

그 돼지 껍데기를 보면서 저는 무슨 껍데기를 생각했느냐 하면, ‘이스라엘 껍데기’를 생각했습니다. 진짜 이스라엘은 언약층이 제일 밑바닥에 있어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서 약속의 땅에서 이뤄지는 모든 역사는 어디에 속하느냐? 돼지 껍데기에 속해요, 이스라엘 껍데기.

군사력에 입각한 힘자랑을 하면서 자기가 솔로몬도 아닌 게 솔로몬처럼 천하를 정복하겠다고 날뛰는 왕들, 군사력을 전문으로 하는 그 왕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자체 껍데기를 하나님은 이렇게 뜯어내는 거예요, 뜯어내는 작업을 합니다.

옛날에 온돌이 고장 나서 장판 뜯어낼 때 여러 번 봤거든요. 우리 집도 그렇고, 비 샐 때나 보일러 수리하면서 장판 뜯어낼 때 꼭 나타나는 게 뭐냐? 화투장, 화투장이 1개 2개 있어요. 화투 치다가 얇은 장판으로 들어갔던 모양이죠. 이처럼 장판지를 뜯어내는 거예요. 투두둑 죽 뜯어내면 못 보던 게 나와요.

우리가 사는 이 역사는 사실은 언약 위에 있는 껍질, 돼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걸 알아야 해요. 실제로 지구도 마찬가지예요. 지구 반지름이 6,378km인데 사람이 사는 지각은요, 해양 지각은 10~30킬로미터, 평균 12킬로미터고요, 대륙 지각은 35에서 40킬로미터니까 평균 35킬로미터밖에 안 돼요.

전체 두께의 0.4%밖에 안 돼요. 동그란 구에서 껍데기 부분만 지각이에요. 밑에서는 암석의 뜨거운 것, 맨틀에서 순환하면서 쏟아지면 약한 지각이 터지면서 지진이 일어나고 화산이 터지잖아요. 그러니까 준 액체에 해당하는 맨틀이라는 뜨겁게 녹은 암석 위에 떠돌아다니는 것이 지각이 되어서 지금도 지각이 이동하고 있다는 게 ‘지각 이동설’이라고 해서 정설이에요. 그래서 지진이 일어나는 거지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불안정하다는 거예요. 정말 안정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안정돼 있는데, 지금 열왕기상의 그 당시에 사는 백성들은 미칠 지경이에요. ‘도대체 어느 깡패 편에 서야 우리가 살아남느냐?’ 그러니까 진리라는 것은 없고 내가 살아남는 게 진리에요. ‘어느 힘 센 왕들 편에 서야 내가 살아남을 것인가?’ 백성들은 그 깡패 같은 왕과 한통속이 되어 있습니다.

힘의 기류? 힘이 흐르는 그 흐름에 신경 쓰면서 눈치껏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 이게 무슨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의 본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일단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너희들이 사는 곳은 이렇게 불안정하다. 힘을 기반 해서 정치적 군사적으로 안정된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은 애굽이나 이방 나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없는 언약 없는 하나님을 믿는 우상 신을 섬기는 자들의 상투적인 삶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이거에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껍질이에요. 껍데기에요, 돼지 껍데기. 그건 본바탕이 아니에요. 들떠있는 거예요. 이렇게 보시면 제일 쉬워요. 주님께서 빨대를 꽂아요. 빨대를 딱 꽂아서 주님과 관계있는 사람, 그 꽂힌 빨대 제일 밑에 있는 언약의 본질이 빨대를 통해서 주님 입에 들어오면 그 사람은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인데, 빨대를 딱 꽂았는데 언약이 고갈되어서 아예 없어요.

그리고 정치적인 힘 있잖아요. “정치적인 힘을 바탕으로…” 이 말을 제가 바꾸겠습니다.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게 된 국민소득 3만 7천 달러의 막강한 K 방위 정책, 강력한 국방에 입각해서 나는 오늘도 교회 다니고 직장 생활 잘하고 있습니다.”

그게 빨대의 내용으로 쭉 올라온다면 주님께서는 “넌 열왕기상 16장도 안 봤냐? 열왕기상 13장, 14장, 15장, 16장을 너 안 봤어? 너의 그 고백이 비언약적이고, 강제로 뜯겨나가고 벗겨질 불완전한 껍데기 그걸 넌 존재의 바탕 삶의 터전으로 삼는 거야.”

교회 올 때 주와 동행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 사람들 속에 말씀이 포함이 안 되어 있어요. 언약층까지, 지구의 맨틀층까지 시추선이 꽂혀서 거기서 복음이 나와야 되거든요. “나는 뭐 생계도 책임 안 지고 그냥 세상도 모르고 삽니다.” 지금 이런 소리가 되는 게 아니라 그 층을 뚫고 들어가야 해요.

인간의 가장 육적이고 혈육적인 것, ‘인간은 밥 먹고 살아야 사람 노릇한다.’ 이걸 부정하면 안 돼요. 부정하지 않고 뚫고 들어가야 해요. 뚫고 들어가면 우리는 어떤 마음 자세여야 하는가 하면, ‘하나님은 나의 의가 자리 잡은 그곳까지, 그 바닥까지 뚫는 기세로 말씀이 찾아온다’라는 것, 그걸 단단히 마음 준비해야 돼요. 말씀은 너의 잘남, 너의 자존심, 자존감 너의 의가 있는 그곳을 겨냥해서 뚫고 지나옵니다. 뚫어버려요.

열왕기상 16장 16절에 보면, “진중 백성들이 시므리가 모반하여 왕을 죽였다는 말을 들은지라 그날에 이스라엘의 무리가 진에서 군대장관 오므리로 이스라엘 왕을 삼으매.” 그러니까 왕이 두 사람이죠. 그러면 내전이 일어난 거죠. 현재 북이스라엘에서 안동 지역, 서울에 있는 왕 하나 있고요, 충북 영동의 전쟁터에 있는 왕, 그래서 왕이 둘이 되어 있죠.

그 두 왕의 내전이 붙었다는 그 말은 백성들도 두 패가 되었다는 말이에요. 백성들이 무슨 힘이 있어요? 백성들은 군사력 있는 깡패 대장이 있으면 “살려만 주이소!” 하고 거기에 본의 아니게 굽신굽신하는 방식으로 자기 집 처자식이나 먹여 살리려는 그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내가 정치적으로 어느 당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냥 “경제만 살려 주이소!” 이것밖에 없어요. “경제만 살려주소. 밥이나 먹고 살게 하면 그걸로 족합니다.” 그런 사람에다가 주님께서 빨대를 꽂아봤자 나오는 것은 “그냥 살려 주이소!” 이것밖에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이런 것을 노골적으로 다 들춰내면서 그냥 까발려버려요. 하나님의 언약은 지금도 쉬지 않고 그 당시에도 쉬지 않는데 그 당시에 ‘바로 백성들이나 왕이나 하나님 앞에 여로보암의 죄를 범했다’라는 말은 어떤 한 사람만 문제가 아니라 나라 전체가 다윗의 언약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생업이라는 이유로 내팽개쳤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거예요.

자, 오늘 남은 시간에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돼지 껍데기를 벗겨 냈단 말이죠. 벗겨내면 뭐가 나오느냐? 언약층이 나오죠. 언약층은 뭘로 구성되어 있는가? 도대체 언약층이라는 게 뭐냐? 그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준 언약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주신 그 언약의 내용은 뭐냐? 창세기 17장 8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여기 ‘기업’이라는 말이 나와요. 회사 이름이 ‘기업’이 아니고 상속, 하나님의 상속분을 ‘기업’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늘나라에 있는 속성과 동일한 속성으로 땅에 천국이라는 것을 만들 때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게 분배되도록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시고 이 땅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신 거예요. 그래서 ‘기업’은 하나님이 주신 상속이에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가나안 땅은 소유가 인간 소유가 아니고 이스라엘이 그 땅에 들어서면서 하나님 소유가 된 겁니다. 하나님 소유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소유가 된 자들은, 그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어야 해요.

그러면 언약 백성이라는 말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무엇이 언약이냐? 도대체 언약이 뭐냐? “한 마디로 언약이 뭡니까?”라고 물을 때 “언약은 이겁니다.”라고 답변해야 되죠. 창세기 21장 10절에 보면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천사가 와서 아브라함에게 이야기한 겁니다. 언약이란 뭐냐 하면, 은혜를 입지 못한 자, 은총을 입지 못한 자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 ‘기업’이고 그 ‘기업’이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자, 곧 은혜만이 들어있는 것, 이게 바로 하나님의 상속분입니다. 은혜 덩어리, 이게 언약이에요.

그런데 언약은 줄 사람에게만 가야 되지 받을 가치 없는 자에게는 언약이 들어서면 안 되겠죠. 그래서 ‘하갈과 그 이스마엘을 내어 쫓아라.’ 이 말이죠. “하나님의 기업을 받아라.” 이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내어 쫓으라’라고 하면서 ‘현재 너한테는 따로 하나님의 은혜와 언약이 주어진다’라는 것을 생각하는 겁니다.

이게 왜 중요하냐?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사람 같으면 “나는 천국 간다”라고 말을 할 수도 있어요. ‘나는 천국 간다’라는 말을 할 수는 있는데 말을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이렇고 이런 사람은 천국에 못 간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은총을 모르는 사람은 천국에 가지 못합니다.”

은총은 다른 말로 신약에 오면 선물이죠. ‘하나님의 일방적 선물을 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천국을 가지 못한다.’ 이렇게 되겠죠. 하나님이 주신 이스라엘을 다윗과 솔로몬은 뭐로 이해했느냐? 하나님이 선물로 준 땅으로 생각한 거예요. 군사력이 아니고, 애써서 힘들이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냥 공짜로 주신 하나님의 상속이기 때문에 거기에 누가 계시는가?

상속을 주신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거예요. 좀 어렵더라도 마지막에는 참아야 해요. 하나님의 상속이 함축되어 하나의 결정체가 되면 거기서 하나님의 ‘산성’이 나오고, 그 산성이 결정체가 되면 하나님의 ‘시온’이 되는 거예요. 그 시온에 장차 왕이 임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길가에 있는 나뭇가지 하나를 잘라서 잘츠부르크 소금 광산에 던져놓고 몇 년 지나면 시시한 나무 조각이라고 여겼는데 그 주위에 소금 결정체가 생겨요. 죄인 하나를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곳에 툭 던져놔 버리면 그 죄인에서 뭐가 생기느냐?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결정체가 생기는 거예요.

잘츠부르크는 오스트리아에 있습니다. 거기에 할슈타트라는 소금 광산이 있거든요. 제가 알기로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이에요. 호수가 있는 아름다운 그 마을. 아무것도 아닌 볼품없는 그런 나뭇조각도 소금 결정체가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란 죄인이 있어 줘야 결정체가 생겨요. 나 같은 죄인을 통해서 주님의 십자가 거저 주신 용서의 결정체가 생길 때 이것이 천국 백성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결정체 샘플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죄인의 모습으로서 오셨거든요. 자, 그것을 시편 18편 1-2절에서 보게 되면 일단 ‘산성’이 먼저 나와요. 주님도 군사력이 있으니까요.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그러니까 인간들만 군사력 가지고 전쟁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도 전쟁하시는데 인간들은 군사력을 의지하잖아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약을 의지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대로 밀어붙이는 거예요. 하나님의 선물의 위력입니다. 이 전쟁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가뿐하게 나올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시대에서 가뿐하게 나오게 했던 은혜가 백성들이나 왕들 어디에 있느냐? 없다는 겁니다. 시편 14편 7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여기에 ‘시온에서’라고 되어 있지요. 그 산성이 어떻게 시온이 돼요? 시편 76편 2절에 보면 “그 장막이 또한 살렘에 있음이여 그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온’은 ‘여호와의 처소’라고 되어 있어요. 그리고 여호와의 처소에 누가 오느냐?

시편 2편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그 시온에 왕이 임합니다. 시온에 왕이 임해요. 왕이 임하고 그게 여호와의 처소가 되고요. 시편 126편 1절은 이스라엘이 바빌론에서 돌아올 때 그때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126편 1절에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러니까 상속된 게 뭐냐? 하나님의 땅을 상속한 거예요. 다윗 왕의 자손이 왕이 되셔서 자기 백성을 모집하는 거예요. 어디에? 시온으로 모집하고 있는 겁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예수님이 왕이 돼서 승천하면서 예루살렘이 하늘에 완성이 되고 그 하늘에 완성된 예루살렘의 상황이 요한계시록 21장, 22장의 천국을 이루는 겁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자기 백성들이 해 같이 빛납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그들의 삶이 천사와 같다고 했어요.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22:30) 마태복음 13장 43절,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해같이 빛난다. 이것은 뭐냐 하면, 그냥 아무 가치 없는 나뭇가지 하나 주워서 언약 속에 집어넣었더니만 거기서 언약이라는 결정체, 해 같이 빛나고 천사같이 생활하는 언약 결정체가 만들어지는 것, 이것이 바로 참된 이스라엘이에요.

끝으로 그러면 이 신약 시대에는 그것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에베소서 1장 11절에 보면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에베소서 1장 18-19절에 보면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끝으로 골로새서 3장 24절,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상속된 땅, 그게 바로 약속의 땅이에요. 약속의 땅은 언약의 땅이기 때문에 약속의 땅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언약 백성으로 개조하려고 하는 거예요.

개조를 어떻게 하느냐? 돼지 껍데기, 천국에 같이 갈 수 없는 자를 뜯어내는 작업인데 그 뜯겨나가는 그들이 바로 나답이고, 여로보암이고, 바아사고, 그다음에 엘라고, 그다음에 시므리고, 그다음에 오므리고, 상식적인 힘이 전부고 힘이 곧 현실이라고 이야기하는 그들은 장판 뜯겨나가듯이 둘둘 말아 뜯겨나갈 때 비로소 그 안에서 하나님의 진짜 언약층이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빨대 꽂을 때 우리 마음속에서 그 빨대가 어디까지, 어느 층까지 도달됐는지 저희의 마음과 고백과 행위를 통해서 거저 주시는 은혜까지 뽑혀 나오는, 빨려 나오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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