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것도 아닌 나라
2025년 8월 24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48:11-13
48:11 모압은 예로부터 평안하고 포로도 되지 아니하였으므로 마치 술의 그 찌끼 위에 있고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옮기지 않음 같아서 그 맛이 남아 있고 냄새가 변치 아니하였도다
48:12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그 그릇을 기울일 자를 보낼 것이라 그들이 기울여서 그 그릇을 비게 하고 그 병들을 부수리니
48:13 이스라엘 집이 벧엘을 의뢰하므로 수치를 당한 것 같이 모압이 그모스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리로다
모압 나라는 지형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외래 침략을 덜 받았고 또한 정복하기가 힘든 위치에 있습니다. 마치 안정적인 그릇 안에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나라도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예외없이 멸망받는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멸망당하므로서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도 동반해서 망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 말은 이런 주변 나라가 그동안 건재했던 것은 이스라엘이 멸망당하는 이유와 관련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주변의 이방나라와 차별화된 생각을 가진 나라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대 모압이나 주변나라들이 건재하고 멀쩡하니까 이스라엘은 굳이 자신의 나라의 특별함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었습니다.
이방나라와 동일한 의식과 동일한 종교관으로 뒤뎦었습니다. 이방나라의 공통된 의식은 딱 하나입니다. “우리는 행복해야 한다” 혹은 “우리는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행복해 내고야 말리라” 이런 국가관의 다부진 면은 종교적으로 잔인함의 극치를 보입니다. 열왕기하 3: 26-27에 이렇게 나옵니다.
“모압 왕이 전세가 극렬하여 당하기 어려움을 보고 칼 찬 군사 칠백을 거느리고 충돌하여 지나서 에돔 왕에게로 가고자 하되 능히 못하고 이에 자기 위를 이어 왕이 될 맏아들을 취하여 성 위에서 번제를 드린지라 이스라엘에게 크게 통분함이 임하매 저희가 떠나 각기 고국으로 돌아갔더라”
이 사건은, 이스라엘과 유다와 에돔 세 나라가 연합해서 모압과 전쟁을 벌릴 때입니다. 모압왕은 전세가 불리하자 극단의 종교적 해결책을 들고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의 차기 왕이 될 아들을 제단 위에 불로 태우는 제사를 올리는 겁니다. 이 모압이 신봉한 우상은 ‘그모스’입니다.
“모압아 네가 화를 당하였도다 그모스의 백성아 네가 멸망하였도다 그가 그 아들들로 도망케 하였고 그 딸들로 아모리인의 왕 시혼의 포로가 되게 하였도다”(민 21:29) 즉 그들은 ‘그모스’의 백성으로 자처하면서 자체적으로 안정적인 국가가 형성해 왔습니다. 이 자학적인 해결책이 통했는지 세 나라 연합군들이 환멸을 느끼고 기겁을 하고 해산했습니다.
극단적인 자기 파괴를 해서라도 자신을 지켜보겠다는 것이 모압정신입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이들과 같은 의식으로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했다는 점입니다. 이 모압 나라의 출현은 창세기 19장에 나옵니다. 거기 소돔과 고모라에 하나님의 천사에 의한 불심판이 주어집니다. 이곳에서 건짐받은 자는 롯과 두 딸입니다.
두 딸의 엄마는 어디있지요? 두 딸의 엄마는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딸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어머니의 재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심판의 원칙에 감히 롯의 아내는 도발한 겁니다. 비롯 엄마는 죽었지만 그 엄마의 흔적인 두 딸에서 전수되어 있습니다.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이 땅에는 세상의 도리를 좇아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없으니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 하고 … 롯의 두 딸이 아비로 말미암아 잉태하고 큰 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 족속의 조상이요”(창 19:31-32, 35-36)
즉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원칙은 아브라함 언약이 내재된 이스라엘의 존재로 인해 주변국에 지속적으로 적용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나타난 국가의 성격은 그 구성원들 끼리 동일한 성격들을 긍정해주는 공통의 우상에 의해서 결집되어 있습니다. 헬라어 문법에는 능동태와 수동태와 중간태가 있습니다.
능동태란 ‘내가 ∼ 한다’입니다. 수동태란 ‘내가 ∼을 당했다’가 됩니다. 그렇다면 중간태란 무엇일까요? ‘나는 두렵다’가 됩니다. 내가 한 일이 나에게 대해서 결과적으로 예상밖에 사태가 주어지는 게 경우를 말합니다. 혹은 타인이 요구하지도 않는 일이 도리어 내가 그 요구를 들어주어야만 하는 경우의 발생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시골에 있는 어른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전화를 받을 경우입니다. “얘야 올 겨울에는 유난히도 춥단다. 너희들은 추운 겨울 동안 잘 지내라. 그동안 우리 늙은이는 보일러 없이도 잘 지냈단다”하고 전화를 끊은 경우입니다. 이처럼 모압의 멸망은 모압 나라가 뭘하나 아니하나 상관없이 그모스라는 우상을 섬김의 결과로 그대로 심판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 심판의 기준은 멸망하는 이스라엘에게서 나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압이라는 이방나라의 한계로 작용합니다. 언약 없이 자기들만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모든 시도는 이스라엘을 멸망케 하는 바로 그 언약의 힘에 의해서 결국 무산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점은 한 국가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에게도 동일하게 작용합니다.
슬로베니아에 사는 어떤 여상이 성별을 남성으로 바꾸고 싶어 했습니다. 그 젊은 여성은 자신의 결심을 굳히기 위해 주변의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양해를 받아내었습니다. 이때 주변에서는 그 여성에게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동안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고 네가 행복하다면 너의 성별을 바꿀 수밖에 없지 아니한가”라고 말입니다.
그녀는 필요한 행정 절차를 마친 뒤, 자신이 이제 남성이라는 공식 확인서를 우편으로 받은 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왜 자살했습니까? 목적이 달성했잖아요? 자기 소망을 달성했잖아요? 왜 스스로 모든 것을 실패로 만드는 겁니까?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국가라는 존재의 허가만이 효력이 달성된다는 점입니다.
자기 중심의 현실은 늘 국가 현실 밑에서 가능하다는 이 참된 현실이 서글펐던 겁니다. 무엇이 진정한 운명의 주인공이 누구일까요? 절대적인 나 일까요 아니면 국가가 내 운명을 결정해주는 걸까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해서 뒤돌아보게 된 롯의 아내는 결정은, 인간이 왜 심판이라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처지인지를 말해줍니다.
사도 바울은 어떨까요? 빌립보서 3:10-11에 보면, “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사도 바울의 인생을 천국을 향하는 화살표처럼 작용합니다. 이 나라는 세상 나라가 아니라 진정한 이스라엘, 진정한 천국입니다.
‘아무 것도 아님’을 아는 자만이 참된 이스라엘입니다. 우리 자신을 해석하거나 해설하지 마세요. 이미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결정났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율법 앞에서 평생 죄인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68강-예레미야 48장 11~13절(아무것도 아닌 나라)250824-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48장 11~13절입니다. 구약성경 1130페이지입니다.
“모압은 예로부터 평안하고 포로도 되지 아니하였으므로 마치 술의 그 찌끼 위에 있고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옮기지 않음 같아서 그 맛이 남아 있고 냄새가 변치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그 그릇을 기울일 자를 보낼 것이라 그들이 기울여서 그 그릇을 비게 하고 그 병들을 부수리니, 이스라엘 집이 벧엘을 의뢰하므로 수치를 당한 것 같이 모압이 그모스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리로다”
모압이라는 종족이 사는 그 위치가 꼭 그릇 같아서, 시원하고 높은 고원지대에 있습니다. 모압 지대가 어디인지가 궁금하시다면, 그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서 홍해를 지나서 광야로 갈 때, 광야에서 쭉, 그대로 올라가면 바로 느보산이 나와요. 그 느보산이 모압 땅에 있습니다. 느보산이 일종의 전망대 같은 곳인데, 그 전망대에서 보면 모세가 죽으면서 느보산에서 약속의 땅을 보기는 보아도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못 들어가도 다 보이는 그 전경이 느보산이에요.
그 느보산 넘어가게 되면, 요단강 나옵니다. 그래서 느보산에서 이별하는 거죠. 모세는 죽고, 너희들은 여호수아가 인도해서 가거라. 바로 그 땅이 모압 땅입니다. 모압 땅은 이스라엘 옆에 있는 땅인데, 높은 고원지대라서, 마치 지형적으로 그릇같은 위치에 있어서 어지간히 세력 좋은 나라도 모압을 함부로 공격 못 해요. 공격하는데 너무 비용이, 에너지가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치지 않고 그냥 넘어가서, 그 땅에서 사는 모압 족속들은 편안하게 자기 종족을 이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기가 이제는 끝났습니다. 왜 끝났느냐. 그것은 이스라엘과 관련해서 주변에 모압, 암몬, 아람, 그리고 모든 제국이 이스라엘의 운명과 관련지어서 자기 위치를 잡고 있었거든요. 이스라엘이 망하면서,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전환되면서 이런 모압이나, 블레셋, 암몬, 모조리 다 바벨론 제국 안에 속합니다.
심지어 애굽까지도 그렇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예언입니다. 하나의 제국 안으로 모든 것이 통합됩니다. 그렇고 그런 인간들이니까. 너희들이 나라를 쪼개서 우리 민족만의 나라라고 아무리 독립 국가 세워봤자, 속성은 똑같아요. 이 나라나, 저 나라나, 추구하는 것은 똑같다는 겁니다. 똑같은 입장에서 나라 쪼개서, 우리나라는 우리나라, 너희 나라는 너희 나라라고 해봤자, 하나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거죠.
이 세상의 나라는 딱 두 종류밖에 없어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백성과 그렇지 않은 백성인 마귀의 백성, 딱 둘로 나뉘는 거예요. 둘로 나뉘면서, 이스라엘 역사가 이제 유다 나라, 예레미야 때에 유다 나라가 멸망하잖아요. 유대 나라가 멸망함으로써 그 실체가 딱 드러납니다. 두 민족 외에, 다른 민족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망한다면, 결국 모든 나라가 망했으니까 동일하지 않겠느냐. 그런 생각이 들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살아있습니다. 언약에 준해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대로 실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과정은 뭐냐. 바로 이방 나라를 거쳐야 하죠. 하나님께 버림받은, 저주받은 나라를 경유해야, 거기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 참된 백성이 나옵니다. 그 택한 백성 나오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모압 족속의 멸망과 관련성이 있은 것이 바로 우리가 멸망한 이유인 것을 알고 있어야 해요.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그냥 망했다’라고 하면 안 되고, 모압이 망한 거, 그 든든하고 단단한 나라, 아무 걱정 없을 거 같은 그 나라가 망함으로써, 우리는 그 망하는 족속과 동일한 식으로 살아왔었구나. 남의 나라에 일어난 일이, 곧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계시의 부분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어릴 때, 우리가 살던 여러 곳에서, 특히 도시에 살게 되면, 어린 마음에 이층 슬래브 건물인 부잣집은 그렇게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나도 2층에서 한번 살아보면 좋겠다’
촌에도 마찬가지예요. 촌에서 다른 사람들은 다 초가집인데 기왓장 지붕에 살게 되면 딱 둘 중의 하나예요. 술도가 아니면 과수원집. 실제 드라마에도 나와요. 옛날 유지들, 잘 살던 사람들로 나와요. 그런데 수십 년 지나면, ‘그 집 망했대’라는 소식이 들리죠. 아주 기쁜 소식이 되죠. 잘 산다고 까불다가 망했대. 그 집 얘는? 그 집 아이도 망했대.
인생이라는 것은 유별날 것이 없이, 전부 다 똑같다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렇게 든든하고 안전적으로 살았던 모압이 왜 망했느냐. 그것은 여기 나옵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나옵니다. “이스라엘 집이 벧엘을 의뢰하므로 수치를 당한 것 같이 모압이 그모스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리로다” 민수기에서도 모압을 그모스의 아들들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그모스라는 신은 도대체 어떠한 신인가.
열왕기하 3장 26절과 27절에 보면 모압이 전쟁을 합니다. 전쟁하는데, 모압 사람들이 전쟁을 하다가 지니까, 어떤 식으로 전쟁에 패배한다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들이 취한 노골적인 행동은 뭐였던 가가 나옵니다.
“모압 왕이 전세가 극렬하여 당하기 어려움을 보고 칼 찬 군사 칠백을 거느리고 충돌하여 지나서 에돔 왕에게로 가고자 하되 능히 못 하고, 이에 자기 위를 이어 왕이 될 맏아들을 취하여 성 위에서 번제를 드린지라 이스라엘에게 크게 통분함이 임하매 저희가 떠나 각기 고국으로 돌아갔더라”
전쟁을 하는데, 공격하는 적군의 눈에 뭐가 보이느냐 하면, 전세가 불리한 모압 왕이 차기 자기의 왕위에 앉을 아들을 불에 태웁니다. 그걸 보고 누구 기겁을 했느냐 하면, 모압 왕과 전쟁을 하는 이쪽 편에서 기겁을 해서, ‘야야, 집에 가자. 가자. 모압을 통해서 우리가 저런 참상을 보고 있다’라고 했어요. 그 신이 그모스 신입니다.
민수기 21장 29절에 보면 “모압아 네가 화를 당하였도다 그모스의 백성아 네가 멸망하였도다”라고 나옵니다. 모압이 멸망 당하고 그모스라는 우상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과 새로운 이스라엘이 등장하는 것과 관련성이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시 내용입니다. ‘망했다. 망했다’ 그런데 망한 이유가 뭐냐.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식으로 했던 다른 사람이 망했다는 말은, 나도 그 망함에 같이 편승 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챈 사람만 구원받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네 사는 거, 나 사는 거가 똑같다는 거예요. 똑같다는 것을 보고 우리 자신이 기겁해야 해요. 내가 지금 정신을 어디에 팔고 있느냐. 세상이 이렇게 안전빵으로 나가니까,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천국 간다고 안일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세상에 살아가는 그 모든 모습은 멸망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는데, 그게 멸망의 길인데 우리가 지금 감을 놓치면 안 돼요.
감각이 있어 줘야 한다고요. 지난 시간에 오후 설교에서 제가 이런 이야기 했지요. 인간은 그냥 화살표다. 인간이 어떻게 뭘 하고 얼마나 잘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은 어느 방향을 가리키는 화살표 기능을 발휘하고 있느냐. 그 사람이 열심히 했고, 돈을 모았고, 승진했던 이 모든 것이 일종에 화살표 같은 그런 모습으로 형상화된다고 하는 거예요.
‘나는 이런 식으로 간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물을 수 있는 것은, ‘사도바울은 어떤 인생을 살았습니까, 어떤 화살표입니까?’라고 우리에게 물을 수 있는데, 그 점은 빌립보서 3장 10~11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사도바울의 화살표는 어찌하든지 죽는, 십자가에 합류하는 것이, 사도바울의 말과 행동과 삶의 모든 것이 그쪽 방향이고, 그곳으로 뭉쳐져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모압이나 이스라엘은, 어찌하든지 내 나라, 내 겨레를 살려보겠다는 국가주의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제를 정한다면, ‘모압의 국가주의와 그 한계’로 주제를 정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모압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성경 창세기에는 모압의 만들어진 출처에 대해서 나옵니다. 그 출처가 창세기 19장에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가운데서 모압과 암몬이 나옵니다. 우리가 여기서 창세기 19장에 소돔과 고모라의 불 심판 가운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누가 빠져나왔지요?’ 롯과 두 딸은 나왔습니다.
그러면 또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두 딸은 어디서 생겼지요?’ 롯의 아내가 있기 때문에 두
딸이 생겼습니다. 그러면 소돔과 고모라에서 탈출할 때, 그 아내는 어디 있지요? 없습니다. 왜? 뒤돌아봤기 때문에 없습니다. 그러면 두 딸은 무엇의 대행자입니까? 뒤돌아봤던 롯의 아내의 대체물이죠. 롯의 아내가 왜 뒤돌아보았느냐 하면요, 천사가 뒤돌아보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뒤돌아본 거예요.
하나님 말씀의 특징이 그래요. 말씀을 전하는 것은 자기 본색을 드러내는 방법이에요. 그게. 우리가 감추고 있고 들키지 않은 것을 말씀을 딱 해버리면, 그 말씀을 위반하는 식으로 우리 본심이 말씀과 더불어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게 말씀이 말씀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말씀은 실현되거든요. 그 실현되는 현장이 심판의 현장인데, 심판의 현장에서 말씀에 위배 된 자는 심판 대상자로서 분류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전체 내용이 바로 그 내용이에요. 그래서 이 소돔과 고모라뿐만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율법을 준 것은 율법으로 인해 내가 갖고 있는, 내 안에 잠복된 죄를 바깥으로 들춰내기 위해서 율법을 준 겁니다. 그러면 이 들춰진 죄가 사적인 죄도 있지만, 이건 윤리 도덕적인 죄고요, 그 나왔던 개인적인 죄가 정당화되는, 그 정당화되는 구체적인 모습이 바로 국가라는 겁니다.
제가 좀 어렵게 말씀드릴게요. 잠이 확 깨도록 어렵게 말씀드릴게요. 헬라어에 보면, 문법에 능동태와 수동태가 있어요. 문법이 나오면 좀 골치 아프죠. 능동태와 수동태. 그런데 또 뭐가 있느냐 하면, 중간태가 있어요. 헬라어 문법에. 능동태나 수동태는 다 알죠. ‘내가 뭔가를 한다’라고 하면 능동태이고, ‘남이 나에게 하게 한다’라고 하면 수동태죠.
그러면 그것만 있으면 되지, 무슨 또 중간태가 있느냐. 중간태의 특징이 뭐냐. 내가 한 행동이 나에게 위협이 되고 나로 하여금 그 결과에 대해서 포로 잡히게 하는 상태가 중간태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나는 두렵다’라는 말입니다. 중간태가 없으면, 인간은 내가 하는 행동으로 현실을 개발하고, 내가 하는 행위로 말미암아 내가 원하는 내 미래를 내가 보장할 수 있는 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하지도 않았는데, 남들이 하게 하면, 나는 수동태가 되면서, ‘이건 내 탓이 아니고 네 탓이야. 너 때문에 내 인생은 망했어’라고 돼요. 이러면 능동태와 수동태 둘밖에 없어요. 그런데 내가 한 행동이 나에게 위협이 된다면, 내가 한 행동이 나를 파멸하게 했다면, 그건 문법적으로 뭐라고 설명해야 하죠? 내가 했는데, 내가 잘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잘 안될 때.
이건 좋다고, 맛있다고 갈치를 네 상자나 샀는데, 갈치 사놓고 보니 맛이 되게 없다면, 내 능동이 먹히지 않은 상태, 이게 중간태예요. 중간태. 내 인생에, 내가 만든 환경에 그리고 계획에, 내가 관여하지 못하고 내가 종속된다는 그 문법이에요. 중간태 비슷한 것이 또 있어요. 시골에 있는 아버지가 서울에 있는 자식에게 전화합니다.
‘야야, 이번 겨울에 그렇게 춥단다. 춥지만, 나는 보일러 없어도 잘살고 있다’라고 하고 전화를 끊어버립니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올겨울에 그렇게 추운데, 나는 잘 견디고 있다고 하면서 전화를 끊으면, 이게 뭡니까? 전화 받았던 자식들은, ‘우리 아버지 집에 보일러 놔드려야 한다. 귀뚜라미 보일러 놔드려야 한다’라는 거죠.
이상하게 수동적으로 전화를 받았는데, 능동으로 뭔가 행동을 해야 할 타이밍이 된 느낌이 드는 거예요. 제가 말하는 요점은 이거예요. 인간이 국가를 만들면 능동적인 거예요. 능동적인데, 이게 중간태예요. 내가 만든 국가가 우리를 단체로 망하게 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의 효과입니다.
또 하나의 예가 이것입니다. 슬로베니아라는 나라가 있어요. 그 나라에 어떤 여자가 있었는데, 그 여자는 자기 성별이, 다 컸으니까 이제는 여성이 아니라 남성으로 살고 싶은 여자가 있었어요. 그래서 친구나 여러 가족에게, ‘아빠, 나는 본성에 여성이 안 맞는 거 같아. 난 남성이 되고 싶어’라고 하니까, 가족들을 펄쩍 뛰죠.
그런데, 이제 자신의 남성이냐, 여성이냐는 성별 권한까지도 이제는 성인이니까, ‘네가 여성으로 사는 것이 그렇게 힘들다면, 네가 행복한 것이 최고야. 아빠 마음은 그거야. 너만 행복하다면, 너는 네 마음대로 할 수 있어’라고 하면서, 남성이 되는 것에 대해서 집안에서는 어쩔 수 없이 찬성했고, 친구들도 마찬가지 이론이죠.
‘네가 힘들다는데, 한번 사는 인생인데 편하게 살아야지. 누가 뭐라고 해도, 이제는 남성으로 살아’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결심을 하고, 주변에서 자기 마음을 인정까지 했으니까 기쁜 마음으로 공공기관에 가서 등록했어요. ‘여성(XX)에서 남성(XY)로, 물론 DNA는 여성이지만 사회적 성별은 남성으로 하겠습니다’라고 등록 절차를 마치고 집에 와서 자살했습니다.
왜 자살했는가. 내 운명이기 때문에, 내 운명은 내가 결정했는데, 이게 국가라는 공공기관에 등록되어야 한다는 이것이 바로, 내 운명은 내 운명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내가 성별을 바꿀 때 비로소 그 현실성을 발견한 거예요.
나는 분명히 이제부터 남성이라고 해도, 내가 그렇게 해도, 국가가 그것을 등록해야만 국가적으로 보장되기 때문에, 내가 주인공이 아니었다는 사실, 국가가 주인공이라는 말은 옳고 그름도 내가 판정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 자기 인생에서 너무나 서글픈 거예요.
다시 말해서, 그 여자는 내가 온전하게 신이 되기 전까지, 나는 늘 불만이었는데, 결국 내가 신이 된다는 이것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장렬하게 죽었지요. 우리가 이점을 한번 생각해볼 때, 이 이야기가 왜 중요하냐면, 이 세상에서 개인적으로 죄를 뿜어내요.
뿜어내는데, 국가는 국가의 존립을 위해서 그걸 뭐로 바꾸느냐 하면, ‘그럴 만하다. 이게 모여야 우리는 행복해. 행복하면 모든 죄는 다 마무리, 다 무마되는 거야’라고 우리는 이런 식으로 어릴 때부터 교육받아왔고, 가정교육 받았어요. ‘네가 여성 되기 싫고 남성 되고 싶다면, 아빠로서 허락할게’라는 이게 가정환경이에요.
‘죄냐, 죄 아니냐?’라는 절대적 기준을 우리 인간은 내릴 자격이 없는데, 국가는 자격도 없으면서, ‘국가가 너 대신 우리가 자격 내려줄게. 그래 이제 여성으로 살지 말고 남성으로 살아’라는 이런 식으로 국가가 그동안 자격도 없으면서 자격을 내리는 행세를 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압을 통해서 그 국가, 그 우상을 심판해버렸거든요.
그러면 최종 심판자 기준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예요. 너무 아무것도 아니어서, 그걸 못 견뎌서 그 사람은 자살했습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걸 숫자 3으로 한다면, 3+3, 아무것도 아닌 것 +아무것도 아닌 것, 이건 아무것도 아니죠.
인생을 더 살아봐야,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닌 것이 인생 더 살아서, 나이 70, 80까지 살아봐야 아무것도 아니죠? 여기 80 되신 분? 동의하시죠?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그 정도가 아닙니다. 3*3,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과 곱해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야기해도 역시 아무것도 아니에요. 3+3은 6이고, 3*3은 9예요. 아무것도 아닌 것이 9배예요.
그러나 더 심한 것은 3의 3승(3^3 )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27배예요. 그래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나님의 뜻은 3-3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생각하지 마라.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자격조차 너에게는 없다. 너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가롯유다야 너는 자살할 권한이 없다.
아무것도 아닌 채, 아무것도 아닌 것을, 말씀을 통해서 알면서, 진짜 중요한 것은 우리 주님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하나님의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죄인으로 넣어줬다는 이 사실만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 무의미한 것을 우리는 왜 못 견딥니까. 안 살아도 되는데, 그만 살아도 되는데, 왜 고집을 부리는지. 주여, 이러한 죄를 통해서 정말 아무것도 아닌 자가 가는 천국이 날마다 새롭게 새롭게 느껴지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