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십자가 외등

아빠와 함께 2025. 8. 7. 07:27

십자가 외등

2025년 8월 6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16:1-4

16:1 여호와의 말씀이 하나니의 아들 예후에게 임하여 바아사를 꾸짖어 가라사대
16:2 내가 너를 진토에서 들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주권자가 되게 하였거늘 네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로 범죄케 하여 저희 죄로 나의 노를 격동하였은즉
16:3 내가 너 바아사와 네 집을 쓸어버려 네 집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 같이 되게 하리니
16:4 바아사에게 속한 자가 성읍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 하셨더라

예언자가 등장한다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책망할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자주 등장한다는 말은 그만큼 자주 책망할 것을 하나님께서 집어내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또한 예언자가 왕을 상대로 지적한다는 것은 그 당시 왕과 백성이 함께 망하는 길로 합세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선지자의 지적이 ‘앞으로 잘해!’가 아니라 망하는 것이 확정되었음을 알려주시는 차원입니다. 이미 망함이 확정되었는데 뒤늦게 와서 잘못된 점을 알려주시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예언의 내용이 완성을 향해 줄기차게 진행 중에 있음을 나타내는 겁니다. 무력으로 왕 자리를 찬탈하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지적받을 대상에게나 해당되는 속성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선지자의 안목보다 지적받는 바아사의 입장이 되어 봅시다. 왕이 될 수 있는 그만한 힘과 기회가 왔는데 왕의 자리를 피하고 왕에게 굽신거리기를 원하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쉽게 말해서 평소에 왕이 되고 싶은 여망은 모든 인간에 잠복되어 있는 마음 가짐입니다.

만약 일가친척 가운데 왕이 되었다고 한다면 대대로 가문의 영광이라고 여길 겁니다. “우리 집안 그냥 왕가 되지 말고 온갖 압박 받으면 그냥 압박받는 대로 그냥 삽시다. 왕 되지말고…”라고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인간 야심의 종착점이 왕의 자리입니다. 권력을 소모하는 모든 이들의 여망이 왕의 자리입니다.

따라서 바아사는 운 좋게 왕을 처단할 기회가 주어졌기에 “너만 왕이냐 나도 왕 될 수 있어”라는 생각을 가지고 실행에 옮긴 것이 무어 그리 잘못된 일입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문제 삼으시는 바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들의 근본 생각을 그대로 반영한 태도라는 겁니다. 즉 인간들은 자기와 의논하고 자기와 약속하면서 매사를 진행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있어 자아는 신이기 때문입니다. 최후로 믿고 신뢰할 자는 본인 말고는 없는 겁니다. 자기 인생을 이끌어가는 파트너는 오직 자기 뿐입니다. 이런 마음은 인간에게 타고 났기에 한도, 끝도 없이 자기 내부에서 계속 올라옵니다. 강력한 바탕에서 올라오는 유일한 의식임을 과시하듯이 올라옵니다.

이러한 인간들의 자연스러운 본성을 문제 삼는 것은 선지자들 뿐입니다. 그 마음은 언약이 아니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미 다윗이라는 왕과 언약을 맺었다는 겁니다. 따라서 북 이스라엘 왕을 지적하는 기준은 곧 ‘다윗과 맺은 언약’의 취지를 부합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대가가 바로 왕의 가문은 결국 성읍에서 개에게 뜯어먹히고 들에서는 공중의 새들에게 쪼아 먹힌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멸절을 통해서 그 저주성을 보이게 된다는 겁니다.

다윗의 맺은 언약 속에서는 구원자의 모습도 담겨 있지만 짐승의 속성도 담겨 있습니다. 언약을 통해서 두 개의 속성이 현실의 본질로 나타납니다. 요한계시록 13:1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에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짐승의 세계는 서로 칼을 쓰고 칼로 죽이는 방식으로 유지되다가 본인도 또한 칼로 망하게 되는 세계라는 겁니다. 이런 점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게 이 세상의 본성이 아닌가? 이런 본성말고 또 다른 게 있단 말인가?”라고 의아해 할 겁니다. 여호수아 4:7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었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영한 기념이 되리라 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 세상은 힘이 작용하는 세상이 아닙니다. 언약이 요단강을 갈라놓았습니다. 힘으로 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윗 언약에는 권세를 휘두르는 요소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희생하시는 왕의 요소도 내용으로 들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0:25-28에 보면, “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따라서 세상 권세자가 설쳐대는 것에 대해서 필히 저주로 갚아주시는 분을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통해서 준비해두셨습니다.

다니엘 5장에 보면, 바벨론의 마지막 왕인 벨사살 왕이 나옵니다. 그는 자신이 믿는 우상이 여호와 하나님을 이겼다는 축하 파티를 성대하게 열었습니다. 그 자리에 여호와께서 제사 드린 제기들에 축하 술을 부으면서 마시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누를 수 없는 것이 나타났습니다.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이에 왕의 즐기던 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힌지라”(단 5:5-6) 인간의 권세가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을 결국 이겨낼 수는 없습니다.

도리어 인간들이 하는 모든 것을 언약을 통해서 들추어냅니다. 마치 십자가 앞에서 늘 얼쩡거리는 자아처럼 말입니다. 평생토록 자신이 든 손전등으로 코 앞에서 앞 일만 처리하면서 살던 자들을 위에서 외로이 내려다보는 외등처럼 십자가는 “다 이루심”으로 오늘날도 버젓이 어두움 세계 안에 존재합니다.

성도는 십자가 능력이 뿜어나오면 그것을 세상에 쏟아놓는 관수로 같은 입장에 있습니다. 이 짐승의 세계에서 유일한 십자가의 능력을 알리는 선지자들입니다. 베드로후서 1:19-21에 보면, “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와 같습니다.

분노보다 어두운 세상에서 외롭게 물끄러미 내려다 보는 십자가 능력을 먼저 생각하는 선지자로 삽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생각에 몰두하며 사는 바가 십자가 능력을 가리는 태도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2강-열왕기상 16장 1-4절(십자가 외등) 250806-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16장 1-4절입니다.

열왕기상 16:1-4

“여호와의 말씀이 하나니의 아들 예후에게 임하여 바아사를 꾸짖어 가라사대 내가 너를 진토에서 들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주권자가 되게 하였거늘 네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로 범죄케 하여 저희 죄로 나의 노를 격동하였은즉 내가 너 바아사와 네 집을 쓸어버려 네 집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 같이 되게 하리니 바아사에게 속한 자가 성읍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 하셨더라.”

북이스라엘 왕의 자리가 마치 무슨 함정, 혹은 늪에 빠진 것 같습니다. 그것을 탐내고 들어선 자들은 자기만 망하는 것이 아니고 그 집안 자체가 쓸어버림을 당하지요. 그래서 “성읍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왕상 16:4).

이것은 열왕기상 14장 11절에서 여로보암에게 이미 언급한 겁니다.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가 성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으리니 이는 여호와가 말하였음이니라.” 공중의 새가 바빠요. 들의 개, 들개도 굉장히 분주합니다. 하나님의 지시에 따르기 위해서 5분대기조처럼 딱 준비되어 있습니다.

“물어, 물어! 쪼아, 쪼아!” 하듯이 새가 사람의 살점을 쪼아먹고, 들개가 사람을 먹어 치우는 이러한 구조, 장치 거기에 어떤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왕이 될 자격도 없는 자가 들어섰을 때의 운명을, 빠져나올 수 없는 하나의 장치를 마련해 놓고 새와 개를 동원해서 거기에 처단해야 할 인간이 들어서게 하는 겁니다.

방금 읽은 열왕기상 16장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1절에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해놓고 이 “…하나니의 아들 예후에게 임하여 바아사를 꾸짖어 가라사대”라고 해서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성경에 보면 선지자가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그 선지자는 그냥 빈손으로 등장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선지자가 등장하고, 또 여기에 그 말씀을 들어야 할 자들이 일반 백성이 아니고 딱 지목해서 왕에게 그 말씀을 전하려 합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예언이 빈번하다는 그 한 가지, 흔하다는 것, 요즘 같지 않다는 것. 두 번째는, ‘왜 하필이면 왕을 지목해서 예언하시는가?’예요. 그것은 이 왕의 세계가 인간의 본질을 최종적으로,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자리가 왕의 자리인 겁니다.

왕만 치면 나머지 백성은 그 나물의 그 밥이어서 왕하고 똑같은 속성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 쉽게 말해서 왕 잡고 백성 잡고 다 잡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왕과 더불어 백성도 함께 망하게 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람 뜯어먹는 들개와 공중의 새까지 준비하면서 걸려들기를 바라는, 또는 걸려드는 것에 대해서 실제로 이렇게 조치한다는 것, 여러분 이게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참 신기한데요, 하나님이 저주받는 광경이 이스라엘에서는 실제로 일어난다는 것이 정말 신기한 일입니다.

물론 하나님께 저주받기를 바라서 북이스라엘의 왕 자리로 나서는 자는 이 세상에 없겠지요. 그래서 선지자가 등장하는 게 책망을 위함인데 책망 듣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 생각하면서 하나님 편에서, 선지자 편에 서서 생각을 먼저 하지 마시고요, 왕 바아사의 편에서 생각해 봐야 해요.

그래야 바아사가 몰랐던 것, ‘우리 집안 사람들이 성읍에서 개한테 뜯어먹히고 들에서는 새한테 쪼아 먹히는 그 신기한 일, 내가 대체 무슨 일을 했기에 우리 후손들이 몽땅 당하는지?’ 그 신기함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바아사 심정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열왕기상 15장 25-26절에 “유다 왕 아사 제 이년에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이 이스라엘 왕이 되어 이년을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아비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한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나답이 2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아버지 여로보암을 본받아서 우상을 섬기는 악을 저질렀습니다.

지난 시간에 ‘나답’이라는 이름을 이렇게 보면 된다고 했었지요. “나 참 답답하다!” 그래서 ‘나답’인데 그 나답이 죽습니다. 열왕기상 15장 27-28절에 “이에 잇사갈 족속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가 저를 모반하여 블레셋 사람에게 속한 깁브돈에서 저를 죽였으니 이는 나답과 온 이스라엘이 깁브돈을 에워싸고 있었음이더라 유다 왕 아사 제 삼년에 바아사가 나답을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열두 지파 중에서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잇사갈 지파의 바아사에게 나답이 죽어요. 바아사가 당시에 힘이 있었던 모양이지요. 북쪽 이스라엘은 땅도 크고 인구도 많았던 에브라임 지파가 주도해서 유다에서 독립했는데 잇사갈은 별 볼 일 없는 작은 지파거든요.

그래서 열왕기상 16장 2절에 “내가 너를 진토에서 들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주권자가 되게 하였거늘” 여기서 ‘진토에서 들어’라는 것은 ‘천한 자’를 뜻합니다. “천한 출신을 들어서 왕을 세웠는데 너는 왜 네가 척결한 그의 아들 나답 그리고 여로보암과 똑같은 짓을 하느냐?”라고 하면서 “바아사에게 속한 자가 성읍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왕상 16:4)라고 해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하겠다는 겁니다.

멸절이지요. 가문 자체를 멸절, 쓸어버리겠다는 겁니다. 여기서 바아사입장을 생각해 봅시다. 나답을 왜 죽였는가? 권력이 탐나서 죽인 거예요. 권력의 마지막 단계인 왕 자리가 코 앞에 보이는데 누가 그걸 마다하겠어요? 힘이 있겠다, 찬스가 왔을 때 그것을 놓치지 말아야지요. ‘네가 왕이야? 나도 왕 될 수 있어. 너만 자격 있는 것이 아니라 나도 왕 될 수 있어. 내가 본때를 보여줘? 봐! 나 왕 되었잖아.’ 간단한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바아사 입장이 되지 않으면 오늘 본문의 의미에 들어가지를 못해요. 일단 바아사 입장이라 생각할 때 다른 사람이 바아사에게 묻지요. “당신에게 왕 되고자 하는 마음이 왜 생겼습니까?” 그러면 바아사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너는 왕 되기 싫어? 너도 왕 되고 싶잖아. 내가 왕 될만한 권한이 있을 때 왕이 된 그게 뭐가 문제냐?”

바아사가 왕이 된 것에 대해 문제 삼는 사람에게 도리어 따질 거예요. “내가 왕이 된 것이 왜 이상해? 내게 군사가 있겠다, 또 기회가 왔겠다. 왕 자리는 정해놨어? 내가 좀 하면 안 돼?” 다른 말로 “내가 대통령 좀 하면 안 돼? 나보고 ‘대통령을 왜 하셨어요?’ 이런 질문 자체가 나에 대한 실례잖아!” 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아사의 마음이고 오늘날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라면 이 마음 자체가 문제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는 영적 안목이 과연 갖춰져 있는지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바아사가 우리 일가친척이고 삼촌이고 고모부라 합시다. 우리 일가친척 중에서 대통령이 나온다면, 만약에 고모부가 대통령이 될라치면 조카로서 고모부에 대해서 무슨 생각 하겠습니까?

‘아, 큰일이다. 조만간 검찰청에 불려 가겠네. 명품 백 때문에.’ 친척이 대통령 될 때부터 벌써 그런 걱정 하겠습니까? ‘와 가문의 영광이다’ 하잖아요. 그게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지금 성경에서 시비 걸지 성경 외에는 아무도 그런 것에 대해서 시비를 걸지 않습니다. 권력을 잡았다는 것은 집안의 영광이잖아요.

‘우리 집안 사람들을 들개가 뜯어 먹고, 새가 쪼아먹을 것이다. 너는 이제 죽었어!’ 이렇게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인간이 누가 있습니까? 그래서 제가 바아사 입장에서 성경을 보자는 거예요. 성경에서 괜히 호들갑 떨고 있는 거예요, 그냥! 우리는 지금 대통령 되고 싶어도 힘이 없고, 인기도 없어서 안 되잖아요.

그런데 우리 집안에서 대통령이 등장했다. 이것은 정말 존경받을 만하고 축하할 만한 일이라는 말이지요. 우리 일상의 상식이잖아요. 자기 거기에 대해서 성경은 묻습니다. “네가 그런 자에게 뭐라고 지적할 수 있느냐? 선지자의 안목을 가지고 지적해 보라.” 이것이 하나의 숙제처럼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답변은 이렇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이거예요. ‘내가 하나님이다. 나는 나하고 약속한다. 나에 대한 내 믿음으로 나는 산다. 이게 뭐가 나쁘냐?’ 아무리 교회 오래 다니고 또 복음을 듣고 해도 이 내부에서 올라오는 본성, ‘나는 나하고 약속하고 내 인생 내가 꾸려나가고 나는 나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내 일을 설계해 간다.’라는 이것이 왜 나쁘냐는 겁니다.

이게 왜 나쁘지요? 남들 다 그렇게 사는 것 아닙니까? 교회 나가는지 안 나가는지 그런 것 따지지 말고 인간의 본성 자체가 뭐냐? 나는 나하고 의논해서 살아가잖아요. 이걸 지적하면 어떻게 살라고? 살 방법이 없는데요! 하나님의 선지자가 딱 나타났을 때 우리가 이런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선지자를 통해서 우리 내부에 있는 유일하고 강력한 바탕 기초가 나와요.

그 기초가 뭐냐? ‘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나다. 내가 하나님이다. 나는 나하고 의논하고, 나하고 계획하고, 나는 나하고 내 뜻에 맞춰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산다. 왜? 나는 여태껏 그렇게 살아왔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다. 이걸 나쁘다고 탓하면 안 되지. 왜? 다들 그렇게 사니까. 선지자 당신이 이상해. 내가 왕 되고 싶어서 왕이 되었는데 그걸 지적하는 당신이 이상해.’

우리의 이러한 본성이 말씀을 통해서 다시 까발려져야 해요. 하나님 믿는 척하면서, 아니 믿지도 않으면서 자기 마음대로 살면서, 그냥 믿는 척이나 하면서 ‘나는 선지자 편에 섰다’라고? 선지자가 같잖아서 웃겠습니다. “너는 네 편이야! 너는 너밖에 몰라.”

교인들도 말씀을 이야기 안 하는 이유가, 나는 나하고 평소에 살아가는 그 이력이 있고 그게 습관화되어서 전부 다 자기가 자기하고 의논해서 살아가는 그 세상 이야기로 계속 대화가 다 이어지는 거예요. “선지자 말씀에…” 뭐 이런 이야기하는 것 봤어요? “성경 말씀에…” 진짜 교회에서도 성경 말씀 끄집어내면 실례처럼 느껴지는 시대, 희한한 시대예요.

그런데 만약에 선지자가 이런 문제를 냈을 때 답변해 보세요. “언약궤와 요단강은 어떻게 만나는가?” 요단강이 홍수 져서 아무도 못 건널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라는 상자를 가지고 뭘 했는가? 여러분, 자기와 의논해서 요단강이 갈라집니까? 홍해가 갈라지던가요?

인간은 손전등 비추듯이 자기 바로 앞의 것밖에 몰라요. 요새는 손전등 대신 휴대폰으로 비추지요. 그렇게 해서 자기 바로 코 앞만 비추는 거예요. 여러분이 젊었을 때 무엇을 믿음의 내용으로 삼았습니까? 손전등 비추는 식으로 “요 코 앞의 일만 잘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그런 식으로 맨날 자기 반경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얼마 되지도 않는 코 앞의 일을 성취하고자 하나님, 하나님 붙들면서 그 일만 처리하면 자기 일이 잘될 것이라고 여겼잖아요. 그 점은 바아사도 마찬가지에요. 바아사가 군사쿠데타 일으킬 때 얼마나 마음이 조마조마했겠습니까? ‘이 계엄에서 실패하면 나는 완전히 교도소다.’ 얼마나 조마조마했겠어요!

그런데 성공했으니까 자기는 성공한 사람이 맞잖아요. 그런데 그게 성공이었습니까? 이것은 본인 보기에는 성공이지요. 예언자가 나타나서 네 집안 사람 누구든지 “성읍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 이런 이야기를 하기 전까지는 자기가 성공적인 인간이에요, 성공한 인간.

하나님께서는 일반인 가운데서 인간이라면 태어나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당연한 심성을 가진 바아사로 하여금 나중에, 미리 오는 것이 아니고 나중에 오는 예언자, 왕 되고 난 뒤에 예언자가 등장해서 “네가 죽인 여로보암 집안하고 똑같이 우상 섬기는구나. 너도 당해봐라.” 예언자가 뒤늦게 와서 빼도 박도 못하는 운명을 설명합니다.

왜 그렇게 했는가? 그것은 요단강을 건너간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가로막지 말라는 뜻이에요. 십자가를 가로막지 말라는 뜻이에요. 이걸 위에서 제가 준비했습니다. 여기에 십자가가 이렇게 있어요. 고린도전서 1장, 2장에 보면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받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그런데 그 십자가의 능력을 누가 가로막느냐?

요게 가로막아요. 요게 자아입니다. 하나님 뜻은 너무 간단해요. 예언된 것은 이미 십자가로 다 이룬 거예요. 다 이룬 것 앞에서 인간의 자아가 자꾸 얼쩡거리는 겁니다. 구약 때도 마찬가지고요. 아무리 귀여운 손자지만 TV 볼 때 얼쩡거리고 선풍기 바람 쐬는데 앞에서 가로막으면 짜증 납니다.

그래서 주님의 예언자가 하는 일은 간단해요. 요 십자가 앞에서 요 자아를 치워버리는 거예요. 치워버릴 때 말로 좋게 해서 치우는 것이 아니에요. 들개가 와서 뜯어먹고 공중의 새가 와서 쪼아먹으면서 이 언약의 언약만 드러날 수 있도록 이 자아를 치워버립니다. 지금도 동일합니다. 지금도 동일해요.

자꾸 구시렁구시렁하면서 “주님 잘 섬기려고 했는데 일이 자꾸 꼬이고, 사업이…, 가정에 우환이…” 자꾸 자기 이야기를 십자가 앞에서 하면서 가리고 있으니까 주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서 그 자아를 없애버립니다. 평소에 설교 시간에 잘 안 하는 퍼포먼스를 한 것은 우리 교인들 일일이 심방 좀 하고 싶은데 심방 오라는 곳이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이 똑같은 말씀으로 전체를 심방 한 것으로 들어달라고 한 거예요.

오늘 본문 내용은 이 언약이 왕을 겨냥한다는 거예요, 왕을! 왜 왕을 지목하느냐? 이게 핵심이에요. 예언자가 와서 백성들을 보고 이야기를 하지 않고 굳이 왕을 지목하고, 또 사전에 오지 않고 왕이 저지레를 했을 때, 이미 망했을 때 와서 ‘너는 망한다’라는 이야기, ‘넌 이런 짓을 했다’라는 것을 뒤늦게 이야기하느냐?

그것은 ‘자기를 신으로 여기고 자기하고 의논하며 살아가는 인간은 하나님의 그 언약 앞에 등장할 가치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왕과 언약했는데 그 왕이 누구냐? 다윗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과 언약을 한 거예요. 하나님이 다윗과 언약했다는 말은 다윗 자손과 언약을 한 겁니다. 다윗의 후손과 언약을 한 거예요.

다윗에서부터 해서 마지막에 다윗 언약이 마감되는 시점이 로마서 1장에 나옵니다. 로마서 1장 1-3절에 보면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로마서 1장 1절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했어요. 하나님의 복음은 뭐냐? 하나님의 복음 자체가 예언이라면 예언은 어떤 특정 왕을 겨냥해요, 특정 왕입니다. ‘다윗의 자손이 우리의 왕이다, 그리스도다. 예수라는 이름의 왕이 복음을 다 이루었다.’라는 거예요. 하나의 기쁜 소식을 이뤘다는 거예요. 그 앞에 얼쩡거리지 말라는 거예요. 내가 기도를 안 했습니다, 내가 헌금을 덜 했습니다…, 자꾸 쓸데없이 네 이야기를 가지고 다 이룬 십자가 복음 앞에 얼쩡거리면서 막아서면 안 된다는 겁니다.

저번에 비가 많이 올 때 대구 북구 노곡동에 또 물이 찼어요. 수문이 고장 나서 제때 열리질 않아서 또 물이 찼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올 때 하나님의 예언자들은…, 잘 들으셔야 해요. 하나님의 다윗 언약이 갖고 있던 것이 댐이라면 그 수문을 열어요. 수문을 열면 쓸려서 내려오는 겁니다. 내려와서 다윗에게 약속한 그 내용 앞에 되지도 않는 인간들 바아사, 나답, 그 뒤에도 마찬가지인데 그 인간들을 쓸어버립니다.

공중의 새와 들개를 가지고 쓸어버리는 거예요. 오늘날도 십자가 앞을 가로막으면 우리는 쓸리죠. 쓸어버릴 때 다윗도 마찬가지고 인간이 하는 일은 관수로에요, 관수로. 물이 통하는 관 역할, 파이프 역할이 하나님의 언약을 담아내는 예언자의 역할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십자가 지지 않았다”(고전 1:13)라고 분명히 이야기했어요. 그럼 사도 바울 당신은 뭐냐? 십자가의 능력이 흘러내리는데 자기가 관수로가 되어서 자기 안에서 십자가의 그 능력이 가려지지 않고 세상을 향해 뿜어지는 거예요.

여러분 아시다시피 주님 십자가 옆에 강도가 두 명 달려 있었잖아요. 십자가의 능력이 무슨 능력이냐 하면, 지옥 갈 자를 지옥으로 보내고 영원히 저주받게 하는 능력, 또 하나는 천국 가서 영원히 영생을 얻어야 할 자에게 영생 얻게 하는 능력, 이 능력은 인간의 능력이 아닙니다. 인간의 능력이 될 수 없어요.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이상하게 북이스라엘의 왕 자리, 공중의 새가 뜯어먹고 들개한테 죽임을 당하는 자리, 처참하게, 아주 비참하게 저주받는 그 자리를 하나님께서는 왜 만들어놨느냐 하는 거예요. 그게 오늘 설교의 주제가 됩니다. 짐승 생리의 발달 과정, 짐승 속성의 발달 과정을 북이스라엘을 통해 보여주시는 겁니다.

다윗 언약 안에 짐승, 악령, 또는 악마의 속성이 들어있었다는 겁니다. 당연히 악마의 속성만 들어있는 게 아니에요. 또 하나 더 있죠. 다윗 언약을 다 이루실 메시아의 속성도 들어있죠. 그 두 개의 속성이 들어있습니다. 이건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대결 구조’가 언약을 통해 계속 같이 흘러 내려오는 거예요.

그래서 북쪽의 나답, 바아사 이쪽은 뭐냐? 어떤 속성을 가진 것이 짐승이냐, 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이니까 성경 거의 제일 뒷부분이죠. 요한계시록 13장 10절에 보면 짐승의 속성 또는 생리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3장 6-8절에서 짐승 이야기를 쭉 하면서 9절부터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찌어다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로 죽으리니. 짐승의 특징이 뭐냐? 위협적인 칼을 들고 자기 앞을 막는 자는 모조리 죽이는 그 속성, 성격, 성질이 바로 짐승에 담긴 성질이라는 거예요.

자기 앞길을 막아버리면 칼을 동원해서라도 죽여버리는 속성, 이게 인간의 분노잖아요. 인간의 분노는 어떨 때 생기죠? 인간의 분노는 바로 자기의 앞을 막을 때 생깁니다. 왜 자기 앞을 막는데 이렇게 화가 날까요? 그건 내가 나와 의논했기 때문이에요.

나는 한평생 내가 하나님이고 나와 의논하고, 나와 약속하고, 그 약속에 충실해 성과를 얻기 위해 누구든지 내 앞을 막는 자는 용서치 않고 죽여버리는 거예요. 이게 바로 나의 한도, 나의 제약이에요. 내 정신의 제약입니다. 여러분 들어보니까 “그렇지 않은 인간은 없잖아요?”라는 말이 절로 나오죠.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은 인간은 없습니다. 그러면 열두 제자도 그렇습니까? 당연하죠. 열두 제자도 그렇죠. 그래서 방금 제가 요한계시록 말씀드렸지만 구약과 요한계시록 중간에 열두 제자에 대해서 주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2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23절에 보면 주께서 물으시고 또 일방적으로 답변하십니다.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즉 “그래. 너희가 마셔야 해. 싫든 좋든 마셔야 한다. 내가 마시는 쓴 잔을 너희가 마셔야 해.”라고 하면서 누구를 거론 하냐면 세상의 권세자를 거론합니다. 마태복음 20장 25절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큰 자)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자, 언약 안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짐승이 어떻게 발달하는가? 또 하나는 하늘의 구원자께서 어떤 발달 과정을 거쳐서 인간을 구원하느냐? 이 두 가지 요소가 다윗에게 내린 언약 안에 나란히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관수로를 통해 신약까지 이어집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의 파이프 역할을 하니까요.

지금 마태복음 20장 이야기를 하는데요. 26-28절에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게 다윗 언약, 다윗이라는 인간에게 준 언약 안에 들어있는 내용이에요. 그러니까 이 내용이 짐승을 의식해서 짐승과의 어떤 차이성, 차별성을 분명하게 드러내면서 다윗의 자손, 다윗의 임금 그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통해서 신약까지 끌어당기는 거예요.

신약까지 끌어당길 때 다윗에게 그런 약속을 했는데 다윗 본인이 이스라엘 왕이라는 입장에 대해서 권세자인 줄 착각했어요. 물론 다윗은 신앙이 있는 사람이죠. 하지만 손전등, ‘난 왕이다. 통치를 잘해야지.’ 이것만 가까이 작게 비췄기 때문에 먼 데까지, 신약의 완성까지 보지를 못했고, 다윗의 정신적인 제한, 육적인 제약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우리야의 아내가 있을 때 자기는 권세자니까 그 남편이 누구든 상관없이 ‘나는 저 사람을 내 아내 삼고 싶다.’ 하고 그냥 그렇게 한 거죠. 그리고 권세자니까 자기 부하 요압에게 ‘우리끼리만 알자.’ 하는 식으로 우리야를 제일 위험한 전쟁터에 보내게 합니다. 그래서 적들로 하여금, 암몬이죠, 내가 좋아하는 밧세바의 남편을 죽이도록 그렇게 조치했습니다.

왜? 자기는 그만한 권세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요. 그러니까 이건 뭡니까? 나한테 권세가 있다는 것이 이게 독이 된 거죠. 다윗이 그 권세에 대해서 ‘아, 나는 이 왕 자리 때려 쳐야 해. 이런 인간이 왕 되면 안 돼.’ 왜 이렇게 포기를 못 합니까? 율법을 그렇게 잘 알면서요.

그것은 이방 나라 벨사살 왕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니엘 5장에 보면 벨사살 왕이 자기 귀족 1천 명과 함께 큰 잔치를 벌여 술을 마셨습니다. 이렇게 왕이 잔치를 베푼다는 것은 인간 세계에서 구현할 수 있는 어떤 최고의 화려함, 사치스러움, 다시 말해서 권세가 실제로 눈에 보이게 표현될 때는 사치스러움과 요란스러움과 아름다움과 최고의 예술적 모습으로 그렇게 드러나는 거예요. 왕궁에서의 큰 잔치를 벌인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그런 권세가 있음을 귀족들에게 알려주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서 벨사살 왕이 뭘 했느냐 하면, 유다 나라의 여호와를 섬겼던 제사의 도구들을 가져와서 그 안에 술을 담아 퍼마셨습니다(단 5:2-3절). 그다음 4절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무리가 술을 마시고는 그 금, 은, 동, 철, 목, 석으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니라.”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깔보면서 “나는 여호와를 이겼다!” 이 말이죠. ‘내가 믿는 신에 의해서 여호와 신을 완전히 눌러놔 버렸다.’ 그것을 축하하는 파티였습니다. 여기서 벨사살 왕은 하나의 권세자로서 사람들에게 납득될 수 있는, ‘힘이 있는 자는 뭐든지 할 수 있고 따라서 힘보다 이 세상에서 더 소중하고 귀한 것은 없다.’라는 것을 파티로 증명했는데 과연 그 벨사살 왕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눌렸겠어요? 눌렸습니까?

이거 다시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십자가)입니다. 그 앞에서 벨사살 왕의 자아가 까불거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누르는지 한 번 보세요. 이 벨사살 왕, 최고의 권세자 바빌론의 왕, 이 왕을 어떻게 하느냐? 다른 거 안 했어요. 공중에 손가락이 나타나서 그냥 말씀만 썼어요, 말씀만.

그냥 말씀만 쓰는데 “너 끝났어. 내가 너를 들어 쓴 그 기한이 마감됐어. 그동안 내가 너를 들어서 썼어.” 이게 참 중요하고 어려운데 “벨사살 왕 너로 하여금 여호와를 모독하도록, 날 모독하고 모독한 대가로 저주받는 것까지 포함해서 짐승이 해야 할 그것까지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있는 내용”이에요. 마음껏 까불라고 하세요. 까불, 까불, 까불락거리는 그것도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있어요, 십자가 맞은편에서.

뭐 하나님께서 힘이 없어서 벨사살 왕을 사전에 망하지 않게 한 게 아니에요. 충분히 자기 짐승의 속성, 사탄의 속성을 다 드러내고자 하는 겁니다. 그 사탄의 속성을 드러내는 게 뭐냐? 바로 칼을 들고 설치는 거예요. 칼이 뭐냐? 자기 분노의 표현이죠. 내 앞길 막으면, 내 인생 부끄럽게 하면 어느 누구도 나는 봐주지 않는다는 거, 강력한 사인이죠.

자 설교 처음에 이야기한 첫 번째 것, ‘왜 그 당시에는 예언이 흔하냐?’ 두 번째는, ‘왜 왕을 지목하느냐?’ 왕을 지목하는 것은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이미 특정 왕의 후손을 정해놨기 때문이에요. 다윗이라는 왕과 언약 맺고, 그 다윗의 자손과 그 외 모든 사람, 어느 누구도 십자가 진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한 유일한 사람은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죽어주신 그분만이 왕이고 그 왕부터 새로 시작이에요. 하나님의 계획은 그분의 취지에 따라 백성들을 새로 만들겠다는 거예요. 기준은 뭐냐? 잘난체하는 왕과 백성들이 같이 망해버려라. 왜? 몽땅 그들은 우상 숭배자니까요. 여호와를 모르는 우상 숭배자니까요. 자기가 믿는 신을 자기가 의논해서 자기가 결정한 신이에요.

여기서 남은 문제는 이거에요. “오늘날 우리 성도에게도 하나님의 예언이 있어야 하는데 예언이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질문할 수가 있어요. 충분히 질문할 수 있죠. “우리가 신약의 성도라면 하나님이 예언을 왜 안 주십니까?” 이렇게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오늘날엔 십자가가 밤에 혼자 외롭게 켜져 있는 외등 같아요. 어두운 골목길에 쓸쓸하게 외등이 있지만 그 밑에서 사람들은 울고불고, 지나가면서 시시덕거리고…, 외등이 켜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전부 다 자기의 좁은 일상에 집중하고 전념하고 몰두합니다. 그 십자가 외등의 불빛이 비추고 있다는 것은 자꾸 놓치고 잊어버려요.

긴 밤을 홀로 지새는, 아무 말 없는 십자가가 있는데 사람들은 그 십자가의 그 가치, 안에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자꾸 자기 이야기만 하려고 해요. 그러면 오늘날 성도한테는 어떻게 하나님의 예언이 기능하느냐? 베드로후서 1장 19-21절에 십자가 언약 안에 들어있는 내용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19절에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야, 이것 중요해요. 그냥 등불이 아니에요. 어두운 가운데 비추는 등불이에요. 다시 말해서 오늘날 성도로 하여금 무엇을 발견케 하느냐? 모든 인간이 자기한테 의논하고, 자기 인생 혼자서 열심히 사는 그 모든 것이 바로 십자가 밑에 있는 어두운 골목의 풍경이라는 것을 성도는 샛별처럼 떠올라서 발견해야 해요.

“당신 그 계획 있잖아?” “응” “그거 어두워. 대단히 어두워. 깜깜해. 그 계획 누구 좋으라고, 당신 좋으라고 하잖아?” “그래!” “그게 어둡다고.” 그게 십자가 불빛을 안 보이게 하는 어둠이에요. 그저 자기 그림자만 쫓고자 하는 거예요. 자기 그림자 내지는 남의 그림자, 그림자와 검은 그림자만 이렇게 수풀처럼 깔려 있는 이 대도시 풍경 속에서 십자가라는 외등을 쳐다보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갈수록 없습니다. 심지어 교회에도 없어요. 자기 이야기 하기 바빠서요.

어두운 데 비치는 등불, 그게 샛별이거든요, 샛별. 샛별이니까 어둠이 예상도 못 한 거예요. 예상도 못 한대로 퍼뜩, 하고 나온 게 이거예요, 십자가. ‘아, 내가 십자가를 또 깜박했네. 십자가를 잊어버렸네. 나는 내 생각만 하고 살았네. 코앞에 있는 내 인생. 나만 생각했네.’

나이 많은 사람 같으면 노후대책 그런 것, 젊은 사람 같으면 ‘군대 언제 가고 언제 취직하지?’ 나이 서른 넘으면 ‘나는 언제 결혼하지?’ 딸 보고 너 시집가라고 하면 “나 안 가!” 짜증 내지요. 뭐 기도를 해야 합니까, 어째야 해요? 베드로후서 1장 19절 계속 읽어보면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도록 그렇게 하는데 이걸 누가 하느냐? 베드로후서 1장 21절에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파이프죠. 하나님께 십자가를 받은 사람만이 그 마음속에는 어두운 세계와 대별되는, 차별되는 샛별이 이렇게 떠올라요.

저는 이걸 ‘십자가의 반딧불’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내 반딧불 말고, 세상 속에 살면서 십자가가 늘 “반짝반짝” 십자가가 빛나서 “주여, 혹시 이 십자가를 나의 자아가 또 가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후딱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를 치워주시고 십자가만 전하게 하옵소서.” 늘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벌써 주께서 다 이루었고 우리는 이제 천국 갈 것만 남아있는데 또 세상 소리 들어보면 남한테 안 지려고, 내 앞길 마련하기 위해 또 칼 들고 설치는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주여, 세상 권세 흉내 내지 말고 주께서 다 이루신 것을 선물로 받고 은혜로 여기는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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