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악어 신세

아빠와 함께 2025. 8. 11. 08:57

악어 신세 

2025년 8월 10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46:24-28

46:24 딸 애굽이 수치를 당하여 북방 백성의 손에 붙임을 입으리로다
46:25 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노의 아몬과 바로와 애굽과 애굽 신들과 왕들 곧 바로와 및 그를 의지하는 자들을 벌할 것이라
46:26 내가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의 손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과 그 신하들의 손에 붙이리라 그럴지라도 그 후에는 그 땅이 여전히 사람 살 곳이 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46:27 내 종 야곱아 두려워 말라 이스라엘아 놀라지 말라 보라 내가 너를 원방에서 구원하며 네 자손을 포로된 땅에서 구원하리니 야곱이 돌아와서 평안히, 정온히 거할것이라 그를 두렵게 할 자 없으리라
46:2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종 야곱아 내가 너와 함께 하나니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흩었던 그 열방은 다 멸할지라도 너는 아주 멸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너를 공도로 징책할 것이요 결코 무죄한 자로 여기지 아니하리라

강대국 중심으로 권력이 편성되는 것은 이 세상으로서 자연스러운 추이일 겁니다. 전통적 막강한 권세를 유지해 왔던 애굽나라는 온 세상 나라들의 국가다운 면모를 갖추고 있다고 여기고 표준적 강대국으로 인정해 왔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은 거이에 비해 신흥제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전통적 기반이 약한 나라라서 권세가 오래간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그 두 나라 강국 안에 끼어 있습니다. 바벨론으로부터 제대로 당했던 이스라엘 입장에서 남은 자들이 기댈 곳은 오랫동안 안정적 권세를 유지해온 애굽 나라를 선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애굽은 요즈음 시대의 미국과 같은 곳입니다.

애굽은 역사적으로 모든 인간 세계의 중추자리를 유지해 온 나라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다른 여러 나라들이 마구 흔들리고 흥망성쇠를 겪더라도 애굽나라는 든든함을 유지할 것이라는 믿음을 제공해 왔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애굽 나라의 중심에 놓고 다른 군소 나라들이 애굽을 보좌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고 보았습니다.

마치 미국은 오늘날 모든 나라들은 뒷배경처럼 간주되는 것과 같습니다. 여타의 나라들은 미국을 자신의 나라의 뒷배처럼 되기를 원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기꺼이 미국이라는 나라를 배경나라를 모실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애굽 나라의 실존은 이스라엘의 특수성을 가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그 ‘애굽’에서 탈출해서 생긴 나라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애굽 나라를 깨트린 바로 그 분의 나라를 배경으로 해야 하는 나라인 겁니다. 이게 바로 ‘구원’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 나라에서 탈출할 때, 하나님께서 애굽나라에 내린 조치를 보세요. 애굽 나라는 든든한 자연의 질서를 궁극적인 배경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9:24-26에 보면, “우박의 내림과 불덩이가 우박에 섞여 내림이 심히 맹렬하니 애굽 전국에 그 개국 이래로 그 같은 것이 없던 것이라 우박이 애굽 온 땅에서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무릇 밭에 있는 것을 쳤으며 우박이 또 밭의 모든 채소를 치고 들의 모든 나무를 꺾었으되 이스라엘 자손의 거한 고센 땅에는 우박이 없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10:21-23에서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하늘을 향하여 네 손을 들어서 애굽 땅위에 흑암이 있게 하라 곧 더듬을만한 흑암이리라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매 캄캄한 흑암이 삼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어서 그 동안은 사람 사람이 서로 볼 수 없으며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으되 이스라엘 자손의 거하는 곳에는 광명이 있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한 출애굽기 11:4-7에서는, “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밤중에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니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지라 애굽 전국에 전무후무한 큰 곡성이 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으리니 여호와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배경 바꿈’을 시도하셨습니다. 세상 권력에는 한도가 있고 이스라엘 등장과 더불어 그 한도가 깨어지고 열리게 되면 거기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보인다는 겁니다. 이스라엘과 세상 나라의 차별화는 곧 배경의 차이를 말해줍니다. 인간들이 이미 알고 있는 그런 환경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입장에서 하나님 나라를 뒷배경으로 하니 참으로 기뻐할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하나님의 나라가 뒷배경으로 했을 때는 경악스러운 율법에 의해 압박을 받는 환경이었습니다. 민수기 15:32-36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

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의 앞으로 끌어왔으나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 온 회중이 곧 그를 진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그를 쳐 죽여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소개하는 하나님 나라는 이스라엘 세상 권력 구조 안에는 겪는 정도의 심각성과 공포가 아니라 훨씬 초과합니다. 이는 인간 내부 안까지 침투된 악의 영향력까지 고려해서 지적하기 위함입니다. 모든 인간 내부와 이스라엘 사람 마음 안에는 외부 정치 세력도 어찌 할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와 불안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자기 주도권을 끝까지 행세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것마저 하나님께서 끄집어내어 주시지 아니하면 진정 ‘애굽으로서 구원’은 성사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의 배경 바꾸기는 이스라엘이 선호해서 자진해서 찾아간 그 애굽 나라에 대한 손을 봅니다. 우선 그들의 실존을 분명히 합니다.

에스겔 29:3-4에 보면, “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애굽 왕 바로야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중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내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내가 갈고리로 네 아가미를 꿰고 네 강의 고기로 네 비늘에 붙게 하고 네 비늘에 붙은 강의 모든 고기와 함께 너를 네 강들 중에서 끌어내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실시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인간들의 각자 갖고 있는 주도권은 물 속에 갇혀 있는 악어 신세에 해당됩니다. 텀벙대로 물장구쳐봤자 그냥 지면에 붙어사는 악어 신세일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세상을 초월해서 하늘로 가시므로서 인간 지면의 한계를 벗어났습니다.

사람이 자기 주도권을 쥐고 눈 앞으로 달려는 날파리를 후쳐내고자 하는 것은 스스로를 더욱 피곤하게 만들 뿐입니다. 방충망 모자를 쓰듯이, 이미 ‘예수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원수와 적이 누구인지를 충분히 파악하면서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일 겁니다. 자신에게 전혀 주도권이 없음을 아는 자만이 그 어떤 상황조차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약속이 이행되는 공간으로 여기게 됩니다.

홀로 사는 게 아니라 늘 주님과 더불어 사는 것이 진정한 구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사랑이 사랑으로 드러나기 위해 날마다 우리의 주도권을 묵살해 주에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66강-예레미야 46장 24~28절(악어 신세)250810-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46장 24~28입니다. 구약성경 1127페이지입니다.

“딸 애굽이 수치를 당하여 북방 백성의 손에 붙임을 입으리로다, 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노의 아몬과 바로와 애굽과 애굽 신들과 왕들 곧 바로와 및 그를 의지하는 자들을 벌할 것이라, 내가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의 손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과 그 신하들의 손에 붙이리라 그럴찌라도 그 후에는 그 땅이 여전히 사람 살 곳이 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 종 야곱아 두려워 말라 이스라엘아 놀라지 말라 보라 내가 너를 원방에서 구원하며 네 자손을 포로 된 땅에서 구원하리니 야곱이 돌아와서 평안히, 정온히 거할 것이라 그를 두렵게 할 자 없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종 야곱아 내가 너와 함께하나니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흩었던 그 열방은 다 멸할찌라도 너는 아주 멸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너를 공도로 징책할 것이요 결코 무죄한 자로 여기지 아니하리라”

오늘은 애굽이 멸망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애굽이 멸망한다는 것은 현재 시점에서 미국이 멸망한다는 것과 똑같습니다. 애굽이 어떤 나라냐 하는 것은 미국이 어떤 나라냐는 것을 대체해서 보면 이해가 쉽게 될 것입니다. 애굽 나라의 특징은 본 나라가 나라의 덩치가 있는 것에 준해서 외부 환경을 후차적으로 결정하는 그런 시스템입니다.

내가 미국의 시민이라면 이 세상에서 미국이 최고다. 따라서 미국이 최고라는 것을 증명하도록 세상 모든 국가의 권력은 재편된다. 이게 애굽의 생각이고 오늘날 미국의 생각입니다. 만약에 나라가 미국만큼 되지 못하다면, 이 세상 중심은 미국이 차지하니까 빌붙어서라도, 사정해서라도 같이 살자고 미국에게 아부하자는 쪽이죠.

그래서 미국은 결정권을 갖고 있는데, 그 당시 인간세계에 환경은 나 중심, 애굽 중심이어야 한다는 그런 결정권을 갖는 나라가 애굽이고, 그 외에 모든 나라는 애굽이 우리 나라의 운명을 결정할 배경으로써 자리 잡고 있다고 이렇게 이해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어려울 때 애굽을 찾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거예요.

도와줄 곳이 애굽밖에 없기 때문에, 도움 요청하러 간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어떤 나라입니까? 그 애굽에서 나왔던 나라입니다. 살기 위해서 애굽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왜 살기 좋은 나라에서, 그러니까 오늘날 미국 같은 나라에서 왜 빠져 나와야 하는가. 미국에서 빠져나온 것이 한국이 아닙니다. 남한이 아니에요. 일본이 아닙니다. 미국에서 빠져나오면 천국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그 당시 모든 인간세계에 있어서 최종 나라는 애굽으로 이미 출애굽 때 정해놓은 거고요, 현재 오늘 예레미야 예언 때는 애굽의 역할을 누가 하느냐. 바벨론이 역할을 한 겁니다. 지금 최종 결승점에 바벨론 이냐, 애굽이냐를 놓고 지금 최종 승자를 가리는 전쟁이 곧 있습니다.

그 두 세력 사이에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예레미야에 의하면 최종 승자는 바벨론 이니까, 바벨론에 포로 잡혀가라는 것이 선지자의 조언이고, 그 선지자를 선지자로 인정하지 않는 자는, ‘그래도 애굽이 일시적으로 성장한 졸부가 된 바벨론 보다는 애굽이 정통적으로 강국이다. 애굽을 의지하자’라고 해서 애굽으로 예레미야를 끌고 애굽으로 피신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애굽에게 예언을 하는 장면입니다. 24절에 보게 되면 “딸 애굽이 수치를 당하여 북방 백성의 손에 붙임을 입으리로다” 결승전에 와서 완전히 북방의 새로운 바벨론에게 쳐 발릴 것이다. 쳐 발리는 그 나라, 26절에 보면 “내가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의 손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과 그 신하들의 손에 붙이리라”

최종 결승에서 바벨론이 승리하고 네가 든든하다고 여기는 애굽 나라는 애굽 나라와 함께 너희들이 망한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아까 이야기했듯이, ‘애굽 나라에서 나오면 천국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바꿔서 하겠습니다. 이제 최종 승자인 바벨론 나라에서 빠져나오면, 이것은 천국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빠져나온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빠져나올 때, 그들이 빠져나온다는 거, 구출 또는 구원인데, 빠져나오는 구원을 받는다는 게 무슨 뜻인가. 그것은 기존에 세상에서 주는 배경이나 환경 말고, 하나님이 친히 마련하신 다른 환경과 배경이 그동안 숨어 있다가 이제는 제대로 나타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출애굽기 9장에서 한 절 찾고, 10장에서 한 절 찾고, 11장에서 한 절 찾겠습니다.

출애굽기 9장 24~26절에 보게 되면 “우박의 내림과 불덩이가 우박에 섞여 내림이 심히 맹렬하니 애굽 전국에 그 개국 이래로 그 같은 것이 없던 것이라 우박이 애굽 온 땅에서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무릇 밭에 있는 것을 쳤으며 우박이 또 밭의 모든 채소를 치고 들의 모든 나무를 꺾었으되” 그 다음절에 “이스라엘 자손의 거한 고센 땅에는 우박이 없었더라”라고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서, 배경과 너희들이 거주하는 쪽, 그것을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빠져 나왔다고 치고, 새로운 환경과 배경으로 교체하는 작업이 열 가지 재앙에 포함되어있습니다. 10가지 재앙은 뭐냐. 그동안 든든한 뒷배가 된다는 애굽 나라가 뒷배가 아니라, 그 애굽 나라를 쳐버리면 하나님이 친히 준비한 다른 배경, 다른 뒷배가 이스라엘을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장만했다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애굽 나라가 전부가 아니고, 애굽 나라를 칠 때 비로소 그 커튼 뒤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원한 천국이 이스라엘을 반기게 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구출작업이에요. 구출작업이란 뒷배 바뀌기, 또는 배경 그림 바뀌기, 또는 환경 바뀌기입니다. 애굽 나라가 그동안 모든 나라의 부러움을 사면서 뒷배경을 주장했던 이유가 애굽을 치는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이렇습니다.

주도권이 본인에게 있다고 우겼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주도권. 세상의 주도권. 그러면 예레미야 당시에 주도권이 누가 있다? 바벨론이 갖고 있다. 그래서 바벨론도 애굽처럼 그렇게 하나님께 당합니다. 주도권은 애굽에도 있지 않고, 바벨론에게도 있지 않아요. 주도권은 우리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은 주님의 나라가 아직 숨겨져 있어요.

앞에서 주도권이 있다고 까부는 자들을 제거할 때, 진정한 주도권을 쥔 천국이 나타날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자신의 주도권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혹시나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지만, 혹시나 우리 자신에게 주도권이 있지 않습니까? 교회 주도권 누구에게 있습니까? 목사에게 있습니까? 오래된 장로에게 있습니까? 오랫동안 텃세를 잡은 집사에게 있습니까?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다른 말로 하면 말발이 누구에게 있느냐. 아주 쉽게 말하면, 그 교회에서 헌금을 누가 많이 내느냐, 돈을 많이 내느냐는 이게 주도권이잖아요. 세상의 주도권. 그 주도권을 우박으로 때립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는 우박이 없었어요.

출애굽기 10장 21~23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하늘을 향하여 네 손을 들어서 애굽 땅위에 흑암이 있게 하라 곧 더듬을만한 흑암이리라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매 캄캄한 흑암이 삼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어서 그동안은 사람 사람이 서로 볼 수 없으며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으되 이스라엘 자손의 거하는 곳에는 광명이 있었더라”

어둠이 없고 광명이 있었다. 또 환경 바꾸기, 배경 바꾸기입니다. 환경이 이처럼 그 짧은 순간만큼은 이스라엘이 사는 동네와 애굽 사람이 사는 동네가 뒷배, 뒤에 환경이 서로 다른 환경으로 짜여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재앙을 통해서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애굽 사람들은 주도권이, 자기가 믿는 애굽에 있지 않고, 애굽에 재앙을 내리는 커튼, 환경을 찢어버리는 그분에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출애굽기 11장 4~7절도 보겠습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밤중에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니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지라 애굽 전국에 전무후무한 큰 곡성이 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으리니 여호와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

또 뒷배경 가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차이를 두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애굽에 들어왔던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제가 들었던 이야기인데, 유치원 졸업반에 있는 우리 손자가 이런 이야기를 해요. 덧셈 배우고, 곱셈 배우고, 뺄셈 배우고, 나눗셈 배웠는데, 이제 고민이 된다는 거예요. 더 이상 세상에 배울 게 없어서 고민이라는 거예요.

제가 보기에는 완전히 주도권을 본인이 쥐고 있어요. 본인이 살아갈 이 세상의 환경과 배경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를 완전히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손자 탓만 할 게 아니고,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뒷배경을 줬다고 하니까, 이스라엘은 뭐라고 오해를 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게 하기 위해서 아주 넉넉한 배경, 살기 좋은 세상을 준비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준 배경은 이겁니다. 율법을 준 거예요. 율법을 줬습니다. 민수기 15장 32~36절인데, 제가 쭉 읽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 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의 앞으로 끌어왔으나,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 온 회중이 곧 그를 진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그를 쳐 죽여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하니라”

안식일에 나무했다고 해서 이 율법이라는 뒷배경, 뒷배, 환경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회중 앞으로 끌고 왔는데, 어떻게 처치할지를 몰랐단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추가적인 지시가 내려오기를, 하나님의 추가적인 지시와 명령이 뭐냐. 하나님의 천국이죠. 천국에서 지시가 오기를 안식일에 나무하는 사람은 어떤 특정 집행관이 죽이지 말고, 온 회중이 달려들어서 그 사람에게 돌을 쳐서 죽이라는 겁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진 밖, 빈터에 가서 온 회중이 달려들어 안식일에 나무한 사람을 쳐 죽이라는 이게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준 배경이고 환경입니다. 이럴 것 같으면 차라리 애굽에서 사는 것이 더 낫지 않습니까? 이렇게 무시무시한 이런 동네에서 하나님이 살도록 이스라엘을 구원했다는 것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도저히 믿기지를 않아요. 믿을 수가 없어요.

이럴 거면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이건 뭐, 무서워서 못 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 율법을 주느냐 하면, 근본적으로 바깥에 환경이 문제가 아니고 인간 내부, 인간 마음속에 하나님이 원치 않는 어떤 환경이 자리 잡았습니다. 그건 뭐냐. 공포예요. 공포. 알 수 없는 공포, 알 수 없는 불안과 알 수 없는 두려움. 이건 내가 어떻게 내 환경을 교체하거나 빼낼 수가 없어요.

알 수 없는 이 공포와 무서움. 이걸 인간 힘으로 극복해 보려고 노력한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작곡작사가인데, 그 사람은 노래 하나 작사하기 위해서 어디에서 지냈느냐. 공동묘지에서 생활하면서, 나중에 기어이 노래 하나 작사했습니다. 그 사람이 작사했던 가사 내용이 이렇습니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라는 노래. ‘아침 이슬’입니다. 얼마 전에 죽었던 김민기 씨가 작사했습니다.

‘태양은 묘지위에 붉게 떠오르고’라는 이 가사, 이 사람이 서울대 회화과 출신인데, 서울대 학생이 그 당시 정치적 환경, 민주주의가 짓밟히고 독재자가 설치는 그 환경에서, 자기는 알 수 없는, 출구가 없는 공포와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다시 민주주의를 회복할 길이 없는가. 다시 국민을 위한 나라가 될 수 없을까. 이런 정치적 생각을 가졌지만, 사실은 정치적 생각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 불안감이에요.

그리고 그 불안감은 김민기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모든 인간이 그래요. 모든 인간. 나눗셈 다음에 더 배울 게 없다는 것이 불안감이잖아요. 도대체 내가 어디까지 나의 주도권을 발휘할 수 있는 그런 멋진 환경이 내 앞에 펼쳐질 것인가. 그 주도권 발휘해서 뭘 할 건데요? 뭘 할 겁니까? 그 주도권 아무 소용 없어요.

아무 쓸데가 없는 그 주도권 가지고 자기만 행복하면 그만입니까? 그건 자기 나라이지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율법적 조치에 의해서 사전에 자기 주도권 안에 내가 극복할 수 없는 불안감과 공포와 그리고 두려움이 있다는 그것을 까발릴 때, 바로 그 배경, 그 환경까지 교체가 되어야 하겠지요. 그것까지.

교회에 온 대부분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해요.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이거 불안감입니다. 이건 고칠 수 없는 고질병 같은 정신병입니다. 살아있는 것도 기적인데, 거기에 바르게 살아야 한다니, 이게 무슨 욕심입니까? 바르게, 착하게 살아서 우리가 살아있는 겁니까? 해와 달과 별, 이 햇빛과 공기, 그것 때문에 우리가 살아있는 거예요.

기적을 받아놓고 받은 기적이 얼마나 큰 기적인지 알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은 뭐냐. 그들은 애굽에서 빠져나온 적이 없다. 내 속에 불안감과 공포와 근심이 있다면, 그것은 진정 애굽이라는 그 짐승의 세계에서 빠져나온 것이 없어요. 오늘 여기 우리가 읽었던 본문에 보면, 25절에 “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노의 아몬”

여기에서 노의 아몬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노’라는 것은 지명이고, ‘아몬’은 애굽의 신이에요. 태양신입니다. 그런데 태양신이 아까 우리가 출애굽기 10장에서 봤듯이 사흘 동안 어두워졌어요. 그러니까 내가 마지막까지 믿는, 저것은 내가 정말 든든해서 믿겠다고 만든 게 바로 인간이 만든 종교잖아요. 그 종교를 주께서, 그 벽지를 뜯어버려요. 그 종교라는 벽지를 뜯어버립니다.

내가 만든 하나님을 주께서 뜯어버립니다. 그럴 때 그 뜯은 이유가 하나님을 빙자해서 자기 주도권을 계속 쥐고 나 중심으로 살아가려는 그런 얍삽한 그런 모든 것을 주께서 철거해주시는 것이 바로 진정한 나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자, 그러면 애굽에 일어난 일이, 그중에서 출애굽이라는 이름으로 이스라엘이 탄생했다면, 이 시대에 우리가 애굽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정의 내릴 필요가 있지요.

에스겔 29장 3절에 보면, 애굽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애굽 왕 바로야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중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내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래 봤자 악어라는 겁니다. 악어. 악어는 뱀처럼 기어 다녀서 짧은 안목밖에 없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에스겔 32장 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악어 사냥에 나갑니다. “인자야 너는 애굽 왕 바로에 대하여 애가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 너를 열국에서 젊은 사자에 비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 큰 악어라 강에서 뛰어 일어나 발로 물을 요동하여 그 강을 더럽혔도다”

악어가 아무리 커봤자, 물 안에 있는, 갇혀있는 신세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주도권을 아무리 발휘해봤자 우리는 애굽 같아요. 하나님이 주는 이 망해가는 자연 세계에서 몸부림, 맘부림 치는 악어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갇혀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이 악어를 주께서 끄집어내야겠죠. 그게 구원이잖아요.

애굽 같은 세상에서 끄집어낼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슨 명령을 안 해요. 이거 해라, 저거 해라, 그런 명령을 하지 않습니다. 어제 아침에 제가 새벽마다 산 위로 운동을 가는데, 어떤 아주머니 두 분이 날파리가 계속 달려드니까 부채 들고 날파리를 쫓아내면서 운동을 갔어요. 그걸 보고 이 세상은 딱 두 종류구나 했어요.

자기가 부채 들고 날파리를 쫓아내는 사람, 나처럼 방충망 모자를 쓰고 날파리가 달려드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 운동을 끝내는 사람, 딱 두 종류가 있어요. 신약에서는 예수그리스도로 우리가 뒤집어 씌워지면 이제는 우리가 할 게 없고 예수님의 안목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이 세상을 보고, 사랑으로 우리를 빼내 가는 그 안목밖에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 없습니다.

발음이 안 좋지만, 설교 마지막에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After all that we've been through~I will make it up to you, I promise to’ 이 말은 ‘당신이 겪었던 모든 일을 나는 사랑할 겁니다. 당신이 우리와 함께 했던 모든 일, 나는 당신의 전체를 사랑합니다. 내가 꼭 약속할게요’

당신이 이 땅에서 어떤 짓거리를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그건 당신 혼자 한 것이 아니고 방충망을 씌운 내가 당신과 더불어 내가 만들어낸 일이니까, 끝까지 나의 일에 대해서 사랑으로 보듬어줄 겁니다. ‘Hard To Say I’m Sorry’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라는 시카고(Chicago)가 1982년에 부른 노래입니다. 그 가사에 나와요.

우리가 뒤돌아볼 때, 태어나서 지금껏 살아온 것이 자꾸 나를 위한 나의 일로 생각하지 마시고, 주도권은 주님에게 있음을, 뒤늦게 주님이 나타나셔서, “네가 평생 살아온 모든 것은 너와 내가 함께 만든, 사실은 나의 일이다. 너를 구원한 나의 일” 이제 우리 일은 없어졌습니다. 이제는 오롯이, 앞으로 몇 년을 더 살든 몽땅 주의 일입니다. 힘들게 포도원에 가서 캠벨포도 농사를 짓든 어떻든, 그게 나의 일이 아니고 주의 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에게 주도권이 있는 일을 우리는 자꾸만 잊어버립니다. 마치 내 인생,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오해했습니다. 마귀가 웃고 있고 비웃고 있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이제는 나의 일은 하나도 없고, 몽땅 주의 일인 것을 감사함과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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