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전도
긍휼히 여김을 받기를 원하는 10명의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오지도 못하고 그저 멀리 서서 부르짖었다. 예수님께서는 10명 모두를 보내셨고, 율법대로 제사장에게 그들의 몸을 보이라고 지시하셨다.(눅17:14) 모두가 가는 도중에 깨끗함을 입은 것을 알게 되었고, 예수께서 분명히 지시하신 그대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려고 더욱 열심히 달려갔다. 그런데 마치 자신을 잠시 잃어버린 것처럼, 방향성을 이탈하여 오히려 지시를 어기고 되돌아온 한 명이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9명 만이 열심히 주님의 지시를 따르는 것으로 보였다.
성경의 말씀은 하나같이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고 부정하며, 예수님만 보이도록 이끌고 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율법에만 담긴 자들과 율법에 담긴 채로 예수님의 피로 이끌림을 받는 자들, 이 두 부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안에 뭔가가 담긴 통이 맞고, 통이 자기가 담고 있는 것으로 자신을 또는 타인을 스스로 규정하는 것이 정상이 아니라, 통이 푹 잠겨있는, 놓여있는 터로 규정당하는 것이 정상이다.
정상을 정상으로 보는 것이 불가능한 세상, 이같은 세상에서 성경을 펴고 말씀을 읽게 되는 것은 위험한 일이고 무모한 일이다. 자신은 사람을 상대하지 않고 말씀을 상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여전히 나라는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다. 성경도 복음도 말씀도, 그 안에 등장하는 모든 출연자가 나로 말미암아 모두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향해 발걸음을 돌린 사마리아인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예수께 감사하러 되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믿음이 잡아당기니, 진짜 제사장이 계신 그곳으로, 율법을 지키는 제사장이 아니라 친히 피가 되어주시는 제사장, 친히 희생제물이 되어주시는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왔고, 예수님은 그를 예물에 참여 되게 하셨다.
전도라는 명목으로 이 세상에서 성도를 찾고자 하는 것조차 죄인 것을 들키고, 자신이 죽음에 다시 넘겨지고 핏속에서 재발견 될 때, 모든 일어난 일은 역할체들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이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다 되어진 계시의 실상이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막1:38) 이제 예수님의 전도에 동참 된 자들은 전도하는 자들이 아니라, 주님의 전도를 목격하는 자들이다.
제작자 주님이 만들어 내신 말씀의 작업장에, 사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참 빛의 산란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나타난 것을 사람으로서 상대하고 해석하기 시작하면, 중구난방으로 들리고 향방 없이 움직이는 듯 보이나, 말씀의 프리즘을 통해 보이는 모습은 항오를 갖춘 군대처럼 각 잡힌 주님의 빛들의 배치였고 움직임이었다. 감사는 하는 것이 아니라 목격되는 현장에서 피어오르는 현상의 일부이다. 오해하고 미워지고 짜증 나는 사람들이, 나의 사망선고, 사람 사망선고와 함께 모두가 계시를 위한 출연진들로 밝혀질 때, 감사가 파동치듯 지나간다.
지옥에 갈 운명, 태어나고 보니 그 공간은 갇힌 곳, 인간으로는 뭘 하더라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린 감옥, 그래서 이곳에서는 무엇을 해도 이미 우리에게는 저주가 합당한 곳이 되어있다. 어차피 이미 정해진 심판의 운명 앞에, 너 스스로 너를 잊을 수도 없고, 망가뜨릴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데, 죽기 전에 조기에 손 놓게 해주시는 사건, 가진 것 중에 받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햇빛이며 공기며, 거기에 또 하나 치매를 추가해 본다.
육체가 그렇게 무너져 가는데도 여전히 체면을 차리고,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고, 인정받기를 바라는 그 마음을 스스로 벗을 수도, 잊을 수도 없는데, 사형선고를 앞두고 미리 안락사 시켜주시는 듯한 그런 치매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주의 마음이 세상에 펼쳐지도록, 참새가 땅에 떨어지는 것까지도 쓰시듯이(마10:29) 세상에 배치된 모든 것, 아무 가망 없는 노인의 몸까지도 쓰신다. 쓰신다는 것을 마치, 지옥에서 배제됨으로 해석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
엄마께서 분명 진단이 치매로 나왔는데, 치매같은 치매가 아닌, 치매의 현상이 있었다. 서서히 두뇌의 기능이 손상되며, 지능과 기억이 상실되는 그런 치매가 아니었다. 분명 일주일 전까지도 인지가 분명하셨던 엄마가, 너무도 갑작스럽게 아무것도 기억 못 하셨다. 남편은 물론이고 자식들 이름조차 기억 못 하셔서 급히 검사를 받았고, 초기가 아니라 중증 치매 판정을 받으셨다.
마치 그간에 엄마 주변에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그래서 아무도 관찰할 수 없었던 것처럼, 분명히 아빠가 늘 함께 집에 계셨고, 자식들이 돌아가며 계속 왕래했었다. 그런데 어떻게 아무도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의사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진행되었다고 말했다. 졸지에 우리는 가족애 일도 없는, 세상 무심한 가족, 불효자식들이 될 위기에 처했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뒤집어 놓는 촬영 결과가 나왔다.
뇌출혈이 언제부터 진행되었는지, 뇌의 반쪽이 거의 다 하얗게 나왔다. 우선 치료를 위해 입원은 하셨지만, 의사는 이미 뇌의 기능이 죽어버린 부분을 다시 살리는 건 기대할 수 없고, 더 악화되지 않는 쪽으로 관리를 해야 한다고 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는 너무 천진한 아가처럼, 주변 사람들이 하자는 대로 몸을 맡기셨다. 이쪽으로 가자면 가고 저쪽으로 가자면 가는, 본래 엄마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그래서 내심 부럽기도 한 모습을 보여주고 계셨다.
그렇게 한 달, 엄마의 머리에 덮인 피가 녹여져서 빠져나가면서, 서서히 인지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된 나름의 기적 같은 시간 동안, 내 마음 안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일어났다. 나를 덮고 있던 복음이, 말씀이 환상이었던 것처럼 녹여져서 빠져나갔다. 어떻게든 말씀을 붙잡아 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작용이 일어날 때, 얼마나 말씀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빛도 아니면서 자체 발광하고 싶어 하는 어둠인지를 목격하게 되었다.
빠져나감을 느끼지 못했다면 붙잡으려는 시도가 들키지 않았을 거고, 늘 담대하다면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서로 넘치도록 사랑하고 있다면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의 의미를 알지 못할 것이다. 이방인으로서 성경의 말씀을 만나고, 얼추 유대인 바리새인 흉내를 내게 되고,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는 고상한 십자가 복음도 접했지만, 정작 마음 안에 악독은 변한 것이 없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과 같은 예수님의 자리에 놓이는 상상은 해도, 도살장을 만들어 낸 유대인, 예수님을 죽이기까지 악해졌던 유대인은 결코 내 모습이어서는 안 된다. 내 마음 안에서 그런 도살장이 만들어지려는 낌새는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발을 빼려 안달한다. 속히 말씀에 손을 씻고 이 일에는 관계가 없음을 애써 증명하려 한다. 그러니 여전히 미워하는 상대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나를 흠집 내는 자는 밉다. 나를 악하다고 하는 자는 다 밉다.
형제는 인간 대 인간으로 파악될 수 없기 때문에, 누구를 미워하든, 미워하는 대상이 발생할 수 있는 마음에는 복음이 말하는 형제 사랑이 자리 잡을 수 없다. 애초에 말씀이 거할 곳이 없었다.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4) 주의 십자가 제단에 자신이 예물로 드려지는 자는 더이상 사람일 수 없다.
십자가가 이미 마음 안에 꽂힌 자는 미움이 성립될 수 없다. 주님의 마음이 인간의 마음 안에 자리 잡는 과정은 마치 도살장 안에 들어오는 어린양과 같이 오신다. 양이 이리 가운데 들어왔을 때, 인간이 하나같이 어떤 속사정을 안고 있는지, 낱낱이 밝혀진다. 내 안에 선한 것이 없음을 알리시며 진격하시기에, 어린양의 피가 흥건한 그곳에서 정당함을 주장하는 것이 도리어 불가능이 된다.
주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산 제물로 내어드리기 전에 먼저 급히 사화하라. 마치 지시를 이탈하는 모습으로 비칠지라도, 먼저 속히 형제에게 가서 화목하라. 믿음이 작동되는 흐름이 시작되면, 그 흐름에 몸이 맡겨지고 움직이기에 사람을 상대하는 자체가 차단된다. 당연히 내가 생각한 형제의 개념도 차단되고, 주께서 발생시키신 그 형제 안에 계신 주님을, 살아계신 예수님이 아니라 피 흘리신 어린양의 모습으로 계신 예수님만 보이도록 방향을 되돌려놓으신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마음을 뚫고 들어와야 만 내가 사랑할 수 없는 자인 것을 알고, 두려움이 와야만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의 일이 아님을 알게 된다. 어떤 말씀도 지키라고 하신 적이 없고, 하라고 하신 적이 없다는 것을, ‘하라’는 주님의 지시를 통해서 알게 되고, 그 말씀에 나를 던져 넣고 갈아 넣는 성령의 일하심 뒤에 숨겨질 수 있다.
엄마의 머리에 피가 덮여서, 인지가 사라지고, 자기 자신이 사라지는 잠시의 현상에서, 주님은 늙은이의 육체를 실컷 이용하시고, 주님 것만 챙겨가심을 알아챈다. 언약 완성의 잔상들, 끝까지 한 분의 의를 기념하고, 찬송 받으실 증거들이 마지막 때를 알리며, 여전히 분주히 일어나고 있다. 죄로 인한 결국을 알리는 육체의 치매와 주님의 피에 덮으셔서 나를 상실시키시는 주의 기념 돌들의 치매가 다르다는 말이 굳이 필요 없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고, 누가 믿으리오.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는 것은, 이미 상실된 뇌의 인지가 하는 일이 아니라, 상실시키신 피가 이루어 내는 업무이다. 마귀에게 납치당해서, 그것이 세뇌한 대로 살아가는 방법 외에 다른 것은 알지 못하는데, 도대체 우리 인간에게 무엇을 바라시냐고 하나님께 대들어 봤자, 지혜의 답은커녕, 감옥의 한쪽 벽에 부딪혀 다시 돌아오는 내 마음을 점거한 마귀의 메아리만 들릴 뿐이다.
감옥을 벗어나지 못한 육체들이 더 심오한 것, 더 깊은 어떤 것의 극치에 도달할 수는 있어도, 결국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다는 것을 알리시기 위해, 하나님이 성경을 이 세상에 선물로 남겨두셨다고 한다면, 그 말씀이야말로 인간으로서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맞다. 마귀가 알고 있는 것을 인간도 알게 된다는 것만큼 이 세상에서 내놓을 최고의 지혜가 있을까. 그래서 예수님도 칭찬하셨다. 바리새인이 이 세상 어떤 인간보다 가장 지혜롭고 의롭다고. 그리고 그들의 의를 가지고도 지옥에 가야 한다고.
이제 터의 문제만 남았다. 터가 안 좋아 악몽을 꾸는 것이 아니라, 터가 제대로 된 터이기에, 불가능한 미션이 가능한 미션이 되는 몸이 된다. 1층에 갇힌 몸이 2층의 전쟁을 증거할 터가 된다. 사람이 사람이어야 하는데, 사람이 아닐 수 있는 건, 이미 불을 통과한 예수님의 죽음의 옷으로 덮어주셨기 때문이고, 말씀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이 살아서 싸우고 있는 공간이 되고, 비밀이 보관된 함이 된다.
그 함을 열어 비밀을 본 자들은 모두 죽어야 하는데,(삼상6:19) 죽지 않는 자들이 출현한다. 이미 죽었기에 죽을 수 없는 지체들, 그들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생명이 움직이는 자들, 이들이 서로 소통할 때, 도리어 세상에서는 그들 안에 비밀이 더욱 비밀로 잠겨버리는 그런 지체들이 여기저기에서 출몰해서 분주히 주의 일을 보도한다.
더욱 더러울수록, 더욱 깜깜할수록, 그래서 의로운 심령이신 성령이 더욱 상하시고 근심하실수록, 주의 일은 더 선명히 드러난다. 어릴 적 옥탑방에 아빠가 늘 천으로 덮어놓는 어떤 물건이 있었는데, 무엇인지 궁금해서 몰래 들추었다가 뱀과 아이컨택(눈맞춤)을 하게 되었다. 술에 담겨 퉁퉁 불어서 더 크고 선명하게 두드러졌던 흉측스러운 뱀의 모습이 기억난다.
술에 담긴 뱀처럼, 율법안에 담긴 실체 그 하나뿐이라면, 영원히 죄와 씨름하다가 아무 해답도 없이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 좀 더 정당하려고 몸부림치다가 뱀의 모습 그대로 지옥으로 가면 될 운명뿐인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율법에 박제된 뱀이 고스란히 피에 담겨, 핏속에서 가려지고 용해되어 희미해지다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 담아주시고 가려주신 예수님의 피만 보이게 만드시는 그곳은 예수님의 소리만 들리기에 그의 말만 듣게 되는 아들의 나라이다.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눅9:36)
주님께서는 주의 공로는 안 보이고, 나의 수치와 허물에 집중되어 여전히 관리하고싶은 옛사람의 충동을 스스로 억제하지 말라고 하신다. 율법의 술에 담긴 끔찍한 뱀의 형상만 더 선명해지는 어리석음을 그치라는 책망만 남게 하시려고, 주의 말씀만 남는 터로 만들어가는 것은 주가 하신다. 차라리 들려오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죄가 보이거든, 보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그 복음이 나를 저주의 불덩이로 만들어 투하시키실 때, 두 손을 벌리고 자유롭게 낙하에 몸을 맡기라고 하신다. 질질 끌려가든, 자유롭게 낙하하든, 이미 주님이 정하신 뜻대로 어차피 목표지점에 투척 된다.
그렇게 나는 사망에 넘겨짐으로, 이 세상에서는 더욱 저주스럽게 지옥으로 보내질 그 모습으로, 주께서 알곡과 가라지를 가려내는 키로 쓰시겠다는 주님의 의지에 항복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신다. 스데반이 돌에 맞았던 모습을 이미 환경이 바뀐 지금도 똑같이 순교의 모델로 흉내 내려는 것은 주의 일을 지식으로 해석하려는 사람의 일이다. 꿈은 꾸는 사람이 실현 시키는 것이 아니라, 꾸게 하신 분이 이루어 가신다.
아벨의 피를 시작으로 하나님께서 에녹과의 동행하심이 마침이 되도록 말씀이 조성했던 예수님의 그림자가, 이제는 시작점이자 마침점인 십자가가 조성하는 환경에서, 허상을 믿음으로 된 실상으로 바꿔치기하시면서 주님 재림하심의 날까지, 주와 동행하심의 현상만 주께서 값주고 사신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발산되게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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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청일 복음을 설명하려고 하면 할 수록 더 아득해지는 느낌은 이방인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분을 설명하려고 하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