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눈
2025년 7월 30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15:25-30
15:25 유다 왕 아사 제이년에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이 이스라엘 왕이 되어 이 년을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15:26 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아비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한지라
15:27 이에 잇사갈 족속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가 저를 모반하여 블레셋 사람에게 속한 깁브돈에서 저를 죽였으니 이는 나답과 온 이스라엘이 깁브돈을 에워싸고 있었음이더라
15:28 유다 왕 아사 제삼년에 바아사가 나답을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고
15:29 왕이 될 때에 여로보암의 온 집을 쳐서 생명 있는 자를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다 멸하였는데 여호와께서 그 종 실로 사람 아히야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으니
15:30 이는 여로보암이 범죄하고 또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죄로 인함이며 또 저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동시킨 일을 인함이었더라
나답 왕은 여로보암 왕의 아들입니다. 아버지 여로보암과 아들 나답이 대를 이어 왕이 되었으니 왕조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답을 통해서 여로보암 가문은 끝이 납니다. 남쪽 유다 나라는 345년 동안 전부 다윗왕의 혈통에 속한 왕들로 이어지지만 북쪽 이스라엘나라 같은 경우에는 210년 동안 19명이 등장했지만 그 중 일곱명이 암살 당합니다.
그리고 나답 왕의 경우, 유다의 아사왕이 40년 간 통할 때에 3개의 왕조가 사라지고 6명의 왕이 교체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왕의 자리가 권세가 집중되는 자리이니 누구든지 권세를 갖는데 기대를 걸고 관심있는 자들에게는 찬탈의 대상이 됩니다. 욕망의 목표가 됩니다. 따라서 언약적 정통성이 도저히 성립될 수가 있습니다.
언약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든지 권세자가 될 수 있다는 상황이 인간의 본성에 부합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여로보암이나 나답이 ‘악한 자’로 나오지만 실은 보통 사람입니다. 도리어 언약에 신경쓰는 자가 신기하지요. 이처럼 인간은 하나님을 상대로 전쟁을 걸고 시비를 거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치 학교에서 선생님이 앞에서 훈화하거나 강의하고 있으면 “우∼”라는 잡소리를 내므로서 하나님의 뜻이 나오지 못하게 훼방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나답이 아버지 여로보암의 길로 가면서 같이 악한 왕이 되었다고 하니 아버지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뜻에 어떤 식으로 방해놓은지를 알아봐야겠지요.
열왕기상 12장에서 보면,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숭배함이더라
저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팔월 곧 그 달 십오일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 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 지은 산당의 제사장은 벧엘에서 세웠더라 저가 자기 마음대로 정한 달 곧 팔월 십오일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절기로 정하고 벧엘에 쌓은 단에 올라가서 분향하였더라”(왕상 12:28-33)
즉 우상이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현실을 이루어지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열심히 관철해나가는 식으로 결과를 얻고자 시도하는 생각이 집대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역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이미 말씀 세계 안에서 결정된 사항을 겨냥해서 일어납니다.
예를 들면 사무엘상 2:34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으리니 그 둘의 당할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 그런데 이 예언을 미리 들은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어떤 조치를 했습니까? 그 운명을 돌이킬 그 어떤 일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상 4:17에 두 아들이 과연 죽습니다.
“소식을 전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였고 백성 중에는 큰 살륙이 있었고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 즉 예언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두 아들은 역사 안에서 악한 일이 일어나야 하고 그 악한 일 이후에 블레셋과의 전쟁이 일어나야 했던 겁니다.
반면에 말씀의 세계가 아닌 역사 안에서 인간들은 자꾸만 “그런 악한 일을 안했으면 그런 죽는 일은 없을 것이다”고 생각합니다. 즉 역사 안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함이 원인이 되어 결과는 나중에 결정된다고 여깁니다. 하나님 말씀에 의하면 이런 인간들의 생각은 하나님의 시선, 즉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없어서 생긴 현상이라는 겁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31) 사람은 바닥에 깔려 있는 시선을 가지고 살아가면 이는 하나님의 시선이 아니라 인간들 수준의 시선입니다. 이렇게 되면 같은 사람들로부터 자꾸만 마음에 상처를 입게 됩니다.
이 바닥 세상에서 받는 상처는 뭘해도 오로지 자신에 의해서 자신을 지키려는 생각으로 중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가슴에 데인 것처럼, 눈물에 베인 것처럼 지워지지 않는 상처들이 괴롭다”고 한탄한다는 것은 제대로 지킬 것을 지키지 못하고 실패해서 자신에 대해서 실망스럽다는 겁니다.
“내가 사는 것인지 세상이 나를 버린 것인지 하루가 일년처럼 길구나 그 언제나 아침이 올까”라는 지경에 오면 우울증세를 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최종적인 독수리 시선은 신약에 오면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7-8)
즉 자기를 지키는 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에 쓰임받는 사실이 성도에 대해서 최종적 수준이요 시선입니다. 이 수준에 이를 데까지 하나님께서는 비록 모래같이 많은 자기 백성들이라도 가차없는 잘라냅니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롬 9:27)
이 ‘남은 자’의 이어짐은 연속성이 아니라 불연속적입니다. 마치 영화에서 귀신이 우발적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발적이라는 말은 성도에게 앞으로 또 어떤 사태나 사건이 다가올지 모른다는 겁니다.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3-6)
이 역사에는 사람들은 자신이 계속 1에서 1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1을 0으로 나아가도록 ‘남은 자 원칙’을 적용시킵니다. 0이 될 때만 위의 세계에 1이 됩니다. 사도행전은 사울은 부활하신 주님과 만나서 그의 시선이 일거에 ‘위에서 보는 시선’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때 주님으로 받은 말씀이 이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 26:14) 이처럼 높은 시선 아래서 이미 성도는 말씀을 따라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주를 위한 사는 존재’로 결정되어져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을 일어나는 모든 일이 결국 나를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기 위함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1강-열왕기상 15장 25-30절(독수리 시선) 250730-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15장 25-30절입니다.
열왕기상 15:25-30
“유다 왕 아사 제이년에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이 이스라엘 왕이 되어 이 년을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아비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한지라. 이에 잇사갈 족속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가 저를 모반하여 블레셋 사람에게 속한 깁브돈에서 저를 죽였으니 이는 나답과 온 이스라엘이 깁브돈을 에워싸고 있었음이더라. 유다 왕 아사 제삼년에 바아사가 나답을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고, 왕이 될 때에 여로보암의 온 집을 쳐서 생명 있는 자를 하나도 남가지 아니하고 다 멸하였는데 여호와께서 그 종 실로 사람 아히야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으니, 이는 여로보암이 범죄하고 또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죄로 인함이며 또 저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동시킨 일을 인함이었더라.”
여기에 나답 왕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바아사 왕도 등장하고, 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도 등장하고, 이렇게 성경에서 사람 등장하고, 나라 이름 등장할 때, 우리 교인 입장에서, 성경을 보는 사람 입장에서 부담이 되는 겁니다. 나답을 꼭 알아야 구원받느냐? 이스라엘에 대해서 알아야 구원받고, 이스라엘 모르고 나답 모르면 우리는 지옥가느냐?
이거 그냥 알지 못하고 넘어가면 되지 않느냐 하는 게으름, 골치 아픔, 평소에 공부 안하다가 교회 와서 공부하려니 골치 아프잖아요. 그래서 ‘이런 게으름을 좀 피워도 그냥 하나님께서 천국 보내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와 있는 나답, 이 사람의 이름이 나답이지만, 그냥 알기 쉽게 말해서 보통 사람입니다.
그냥 보통 사람, 노태우 알지요? 보통 사람, 우리하고 똑같은 보통 사람인데 그 보통사람을 하나님께서 쪽집게로 딱 집어서 샘플 삼아서 누구랑 만나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뜻과 만나는 거예요. 우리도 보통 사람이고, 나답도 보통 사람인데 우리 대신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로 나답을 끄집어내어서 ‘나답은 이런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죄 짓고, 이렇게 망했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나답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나답이나 우리나 똑같은 보통 사람인데, 우리를 대표해서 나답에게 하나님의 평가가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나답은 무슨 일을 했기에 하나님께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느냐? 그런 입장에서 성경을 보시면 돼요.
뭐, 인물 이름 하나 외우냐, 못 외우냐 가지고 천국 가냐, 지옥 가냐 결정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어떤 뜻을 그 인물에게 펼쳤느냐?’ 그것을 빼 먹으면 안 되지요. 왜냐 하면 하나님이, 천국에서 기다리는 하나님이 지상에서 이런 일을 했기 때문에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다 이 말입니다.
특히 이스라엘은 또 뭐냐? 이스라엘은 남쪽 유다하고 원래 하나의 나라인데, 북쪽 이스라엘을 이스라엘이라 하고, 남쪽 이스라엘을 유다 나라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북쪽 하고 남쪽이 나누어졌으니까 그 또한 차이가 있겠죠. 남쪽 유다 나라는 345년 동안 지속되면서 그 왕의 자리가 한결같이 다윗의 육신의 혈통을 따라 난 왕들이 계속 왕이 되었는데, 북쪽에서는 하나님의 다윗에게 약속한 그 계통은 하나도 없고, 210년 동안 19명의 왕이 등장했는데, 19명 전부 다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왕이라는 평가를 받았어요.19명 다.
보통 사람 19명이 다 악한 사람이 됐어요. 특히 여기 25절에 “유다 왕 아사 제이년”이라고 되어 있는데, 남쪽의 아사 왕이 40년 통치하는데, 그 40년 통치할 동안에 북쪽 이스라엘은 우당탕탕 굉장히 왕가가 요란스러웠어요. 여섯 명의 왕이 죽었고, 세 개의 왕조가 교체되었습니다. 왕조가 바뀌고 여섯 명 왕이 생겼습니다. 그만큼 번잡스럽게 권력을 쥐기 위해서 난리도 아니었단 말이죠. 남쪽하고 차이가 나죠.
여섯 명 왕이 자기의 기득권을 주장 하다가, ‘너만 권력 좋아하냐? 나도 권력 좋아한다.’ 이러면서 힘만 생기면 왕이고 뭐고 죽이고 제가 왕 자리에 앉고 이랬던 겁니다, 국회의원들이나 정치하는 사람들이 뭐를 좋아하겠습니까? 권력을 좋아하는 겁니다. “아, 나 진짜 권력은 싫어.” 이런 사람은 국회의원이나 정치를 하지 않습니다. 집에서 농사나 짓지 뭐 하러 정치하겠습니까?
자기가 좋아하는 게 있어요. 그것은 권력을 잡는 겁니다. 국민들 위에 군림하는 걸 그렇게 좋아해요. 그래 놓고 말을 할 때는 뭐라고 거짓말을 하냐 하면, “나는 국민에게 봉사하는 사람이 될 테니까, 이 사람을 믿고, 한 번 찍어 주이소.”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바로 보통 사람이에요.
보통사람들이 권력을 탐하고 있다는 것을, 정치인들이 나의 심정을 다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 권력을 가질 가능성이나 재주가 없으니까 지금 여기에 앉아있는 겁니다. 안 그러면 지금 유권자들 찾아다녀야지요. 그런 재주가 없으니까, 있는 걸로라도 빌어먹자 이렇게 하지, 조금만 주위에서 우쌰우쌰 해주면 권력을 탐합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은 뭐가 없냐 하면, 확고하게 확정된 하나님의 뜻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의 약속이 없다는 말은 북이스라엘은 하나님 없이, 인간끼리 만든 나라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치우고, 우리 인간들이 힘 센 사람이 왕이 되고, 또 그 다음에 힘 센 사람이 기존 왕을 쳐 내고 자기가 왕 되고, 그런 일이 반복되는 것이 북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런데 남쪽은? 우리가 보기에는 힘 있고 세력 가진 자가 왕 되는 게 당연한데 남쪽은 이상해요. 남쪽은 신기하게 아무리 권세가 있고, 신하들 중에서 세력을 잡아도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한 다윗의 혈통의 자식이 아니면, 절대로 남쪽 유다나라의 왕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힘이 남쪽에는 있고, 북쪽에는 거두어져서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북쪽의 초대 왕이 여로보암이고, 두 번째 왕이 나답인데, 나답이란 이름이 어려우면 이렇게 외우면 됩니다. ‘나 참 답답하다.’ 이걸 두자로 줄여서 ‘나답’ 외우기 쉽죠? 나 참 답답한 존재다, 나답.
그러면 이 나답에 대해서 어떤 평을 하고 있냐 하면, 자기 아버지를 닮아서 악한 길로 행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런 성경을 보면서 자기 아버지가 악한 길로 행했다? 그러면 자기 아버지가 무슨 악한 길로 행했느냐? 그 아버지에 그 자식이라고, 아버지가 악한 길로 행하고 나답도 악한 길로 행했는데, 그 악한 길이라는 내용이 뭐냐?
그 내용이 바로 인간이 하나님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겁니다. 하나님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거예요. 인간이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는 말을 성경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겼다, 우상을 섬겼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하나님에게 도전하고 전쟁할 때, 어떻게 전쟁하느냐 이 말이죠.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선생님이 학교에서 수업을 하는데 못된 학생이 선생님에게 대들 땐 어떻게 합니까? ‘자, 여기 보세요. 지금은 국어시간입니다.’라고 선생님이 이야기하면, 못된 학생은 ‘어러러러러러러러~’이렇게 하겠죠.
만약에 어떤 교인이 목사가 너무 밉다면, 목사가 ‘다같이 경건하게 기도합시다.’하면, ‘어어어어어어어~’하면서 토인 소리 내고, ‘나 안 듣는다~’같은 노이즈, 잡소리를 섞어 넣겠죠. 그게 바로 아버지 여로보암이 한 일이었습니다. 그게 우상 섬기는 거예요. 아까 여로보암이 보통사람이라고 했듯이, 모든 보통 사람이 이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내부적으로 하나님을 공격하고 대들고 전쟁을 벌이는 겁니다.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여기 팔공산 국립공원에 가면 갓바위가 있어요. 그 갓바위에 사연 깊은 전설이 내려옵니다. 지금부터 1400년 전, 삼국시대에 의현이라는 젊은 스님이 있었는데, 그 중이 어머니를 여의었어요.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자기는 열심히 불도를 전하고 중으로서 바른 생활을 하겠다며 지냈는데, 어느 날 꿈에 어떤 사람이 등장해서 이런 지시를 내립니다.
“네 어머니가 죽기는 죽었는데, 업이 많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이라는 것은 지은 죄, 평소에 실수한 것을 말합니다. “업이 많은데 그 업을 제거하지 않으면 네 엄마는 극락에 가지 못하니까 자식 된 도리로 네가 엄마의 업을 정상으로 회복시켜라.”그래서 의현이 꿈속에서 그랬습니다. “신령님, 그러면 제가 뭘 하면 어머니의 업을 정상으로 돌려서 극락으로 보내드릴 수 있겠습니까?” 하니까 “돌부처를 만들어라.”
그래서 의현스님이 정성을 다하고, 혼신의 힘을 다하여 돌부처를 만들었는데, 그게 돌이니까 3년 동안 눈매 하나 돌에 새기고 나머지는 못했어요. 그 3년 동안 눈매 만들면서 그래도 지치지 않고 새벽마다 망치 앞에서 세 번 절하고 기도를 마친 후에 또 돌에 조각을 새겨가지고 어머니의 업을 자식 된 내 힘으로 해결하겠다고 그렇게 다 했는데 문제는 갓돌, 이 돌을 얹는데 혼신의 힘을 다하여 올려도 본인의 힘으로 안 돼요.
도르래 동원하고 지렛대 동원하고 다 동원해도 몸은 점점 망가지고 눈도 어두워지고 모든 것이 쇠약해서 정말 포기할 수밖에 없을 때, 또 꿈에 그 당시 신라 시대 최고의 여자 무당인 우림처녀가 푸른 치맛자락을 휘날리면서 나타나 하는 말이 ‘그 갓돌은 하늘의 심장이기 때문에 인간의 힘으로는 얹을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너의 정성에 감동하여 마지막 갓돌을 내가 얹고 떠나겠다.’ 하고 깨서 아침에 가보니까 갓돌이 정 자리에 딱 얹혔다는 거예요.
그때부터 사람들이 기도하는데 기도가 왜 그렇게 응답이 잘 되는지, 자 이게 하나님 일에 초 치는 거거든요. 여기 동원된 본질이 뭐냐 하면은 정성을 다하여 혼신의 노력을 다하면 누가 감동한다? 하늘이 감동한다. 이게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약속으로 천국을 가는 이 진짜 하나님에 대해서 마귀가 초 치는 거예요.
이렇게 정성을 다해서 갓바위 하나 만들듯이 우상을 만들면 어떤 점이 삭제가 안 되느냐 하면 ‘나 애썼다. 나 노력했다. 나는 존재 가치가 있다. 나는 존재 의미가 있다.’ 이것이 우상한테는 제거되지 않아요. 이게 진짜 하나님의 일에 초를 치는 짓입니다. 방금 그 갓바위 의현 스님, 의현 중이 했던 일을 여로보암이 열왕기상 12장에서 그렇게 했어요.
12장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어어어어어~’이렇게 놀리는 것처럼.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의 힘으로 초자연적인 그러한 규칙을 내 힘으로 만들어 보겠다는 의도였어요. 하나님의 말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은 예루살렘 성전을 무시하고, 단과 벧엘이라는 엉뚱한 곳에 성전을 세우고, 그리고 성전에서 봉사하는 제사장도 아무나, 레위 지파도 아니고, 아무나 뽑아 가지고 그냥 꽂아 놓았어요.
왕한테 충성한다는 그런 조건만 있으면 ‘제사장 네가 해라. 너 제사장 해 가지고 밥벌이해라,’ 하면서 다 꽂아 놓았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하신 그 언약에 대해서 초 치는 거예요. ‘웃기네.’ 하는 겁니다. 그 여로보암의 정신이 뭐냐? 그 여로보암의 정신이 바로 로마서 14장에서 구현이 돼요.
14장 7절에서 8절.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나의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로라.”이 말씀에 대해서 ‘어어어어어~’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이 행동이.
내가 인간으로서 무슨 일을 하든지 나를 위해서, 내 위치와 체면과 가치를 위해서 해야지 성경은 완전히 우리 가치를 제치고 오직 주님을 위해서 먹든지 마시든지 주를 위해서, 사는 것도 주를 위해서, 죽는 것도 주를 위해서 사는 그것이 바로 천국 백성이라는 거예요. 이 말은 초자연적인 것,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이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거예요. 만들어낼 수 없는 거예요.
자, 그러면 다시 정리해봅시다. 인간은 날 때부터 하나님하고 싸운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하는 일은 인간이 만들어낼 수 없다.” 이게 하나님의 일이고 ,인간은 ‘내가 만들어낸 걸로 나는 나를 구원하고 천국가게 하겠다.’ 요게 바로 ‘어어어어~’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정면으로 초 치고 대드는 건방진 짓이고 그것이 여로보암과 나답, ‘답답한 나’ 그 사람이 바로 그 일을 한 겁니다.
그게 바로 여호와마저도 우상시 했고, 넘겨진 겁니다. 자 그러면 이렇게 우리가 사태를 이렇게 봤잖아요. 보게 되면, 방금 제가 한 이야기에 의하면 이렇습니다.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은 사람 손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라는 전제가 진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사람 손으로 하지 않는다.
그러면 여러분들 중에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은 ‘남쪽 유다는 유다 지파의 왕들만 345년 동안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훌륭해서 그런 거 아닙니까?’라고 생각할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다. 북쪽 왕이나 남쪽 왕이나 하나님의 말씀에 초 치는 건 똑같아요. 마찬가지예요.
마찬가지인데 남쪽에는 왕의 자리가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한 그 약속이 인간의 어떤 훼방에도 불구하고 그 왕 자리에 다윗의 혈통 계통의 왕이 착착착 그 자리를 지켰다는 것, 그게 바로 인간의 행함으로 생겨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일이죠. 그건 왜 그러냐 하면 다윗은, 다윗 언약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말씀의 세계, 언약의 세계에서 이미 결정 난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점을 아신다면 우리 이렇게 한번 정리해 봅시다. “말씀의 세계에서는 결론부터 먼저 나와 있고, 그 결론에 맞춰서 어떤 사건,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 바로 말씀의 세계다.” 이렇게 정리하시면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께 대들고 이 초자연적인 거, 그런 것은 내가 내 힘으로 그것을 유사하게 비슷하게 만들어 보겠다. 신앙인 것처럼, 여호와의 종교인 것처럼, 이렇게 천국인 것처럼, 내 힘으로 만들어 보겠다 하는 것은 원인이 먼저 있고, 그 원인에서 결과가 나오는 거예요.
아까 의현 스님처럼 갓바위, 지가 없는 갓바위를 그 부처를 이 보살을 자기 손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왔듯이 그게 바로 역사 세계, 이 보통 사람의 세계에 그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갑자기 숙제가 주어졌지요. 역사 속에 있는 우리가, 보통 사람에 불과한 우리가 어떻게 말씀 세계 속에 들어갈 수 있느냐? 요 숙제가 이제 남아 있는 거예요.
그 숙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를 지금부터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이사야 40장 31절에 그 아이디어가 나와 있습니다. 이사야 40장 31절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이 구절로 찬송가도 있어요. ‘올라가~ 올라가~’ 하는 찬송가가 있거든요. 유행가만 알면 안 돼요.
그러니까 올라가서 위에서 보게 되면 이미 결과가 확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시답지 않은, 사소한, 별일도 아닌 것들, 부질없는 일들만 일어나고 있어요, 위에서 보면. 위에서 본다는 말은 하나님의 독수리 날개 위에 앉아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안목으로 아래를 내다보면 이 세상에 심각하거나 뭐 울 일 이런 것들이 없어요, 없다고요.
그런데 아래쪽에는 역사 계통에는 현장이 있잖아요. 현장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현장에서는 위에서 보는 안목으로 봐야 되는데, 위의 안목이 없으니까 남아 있는 현장은 뭐냐? 역사 속 현장만, 안목만 딱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아래쪽 역사 속에 살면서 마음에 뭐만 나오느냐? 자꾸 상처만 생기는 거예요, 상처만.
가슴을 데인 것처럼
눈물에 베인 것처럼
지워지지 않는 상처들이 괴롭다 (그렇게 좀 있으면 우울증으로 넘어가요.)
내가 사는 것인지 세상이 나를 버린 건지
하루가 일 년처럼 길구나
그 언제나 아침이 올까
임재범이 불렀던 ‘낙인’이라는 노래의 가사예요. 현재 우울증 단계에 들어간 거예요. 왜? 안목이 독수리 날개 위에서 보면, 하나님 보시기에는 ‘무슨 일 있나? 상처라고? 아이고, 배 부르구나. 그 시답지 않은 일에 네가 베었어요? 아이고. 그래서 어쩌지?’ 왜 우리가 역사 속에서 자꾸 상처라는 말을 하고 이 아무 일도 아닌 것에 대해서 굉장히 바들바들 떨고 무서워하는 그 이유가 어디 있느냐 하면은, 결과를 모른 상태에서 원인만 쥐고 어떤 소기의 성과를 거두겠다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겁니다.
성경은 말씀의 세계거든요. 말씀의 세계이기 때문에 제가 여러분한테 질문을 던질 테니까 여러분이 한번 속으로 답변해 보세요, 강의 시간 아니니까. 강의 시간에 질문해도 답변하지도 않더라고요. 사무엘상 2장 34절에 엘리 보고 하는 이야기에요.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날에 죽으리니 그 둘이 당할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 이랬어요.
엘리에게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예언하기를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날에 죽으리라 했습니다. 자 질문 들어갑니다. 한날에 두 아들이 한꺼번에 죽는다 했을 때 엘리가 사전에 조치한 내용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요게 질문입니다.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말씀 세계에서는 어떤 사태가 일어나고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이미 결론은 끝났어요. 이게 사전에 조치한다고 해서 두 아들이 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결과가 먼저고, 그 결과를 위해서 어떤 일이 벌어져야 돼요. 이게 바로 말씀의 세계입니다.
과연 사무엘상 4장 17절에 보면 “소식을 전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였고 백성 중에는 큰 살륙이 있었고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 이렇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그 말씀, 예언을 책임지기 위해서 이 멀쩡한 이스라엘이 갑자기 블레셋과 전쟁을 하는 일이 일어나야 돼요.
전쟁을 하는 일이 일어났고, 그 전쟁에서 블레셋한테 질 리가 없는데, 그 홉니와 비느하스가 전쟁에 나섰고,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와야 되는데 안 돌아오고 전쟁에서 졌고, 져도 그냥 돌아오면 되는데 그날에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그 전쟁을 통해서 필히 죽었습니다. 이것이 위에서 보는 안목이에요. 위에서 보는 안목.
그러니까 독수리 날개 타고 위에서 보게 되면 모든 것은 말씀이 정한대로, 정한대로, 정한대로 그냥 진척될 뿐이에요. 인간은 거기에 대해서 아래쪽에서 놀아날 뿐이고요.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이것이 위에서, 말씀 세계에서 이미 확정된 건데, 사람들은 어떻게 오해하느냐 하면 내가 지금 예수를 안 믿고 있으니까 내가 예수를 믿는 원인을 제공하게 되면 나중에 결과로서 예수 믿어서 천국 가게 될 것이라는 이런 아주 현장적 안목, 높이 보는 게 아니고 높이 들어가지도 못하고 낮추어서 애써서 노력해서 기어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이것이 바로 우상적 사고방식이에요. 여로보암 사고방식, 나답 사고 방식이에요.
성경 말씀이 있으면, 그 성경 말씀을 지키면, 지킨 나를 내가 한 노력에 의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정성껏 노력한 그것에 의해서 나는 나중에 천국 간다는 거, 천국 간다고 주장하는데 내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그건 천국 가는 게 아니고 극락에 가죠. 왜? 불교 신자이기 때문에. 불교 신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애써서 천국 가겠다는 것이 그거는 누굴 위해서? 살아도 나를 위해서, 죽어도 누굴 위해서? 나를 위해서! 그러니까 아까 최종적인 결론, 성도는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다는 그 최종 결론에 위반되는 거예요. 사울이라는 사람이 그 일을 했어요.
제가 지금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자기를 위해서 사는데, 자기를 위해서 살아서 자기 교회 열심히 다녀서, 열심히 예수 믿어서 내가 예수 믿는다는 정성을 다하여 교회 봉사, 충성을 다하니까 이거는 무슨 스님? 의현 스님이 되죠. 예. 불교 신자죠. 불교 신자.
일단은 교회 온 모든 사람을 불교 신자로 간주합시다. 저도 여러분도 다 같이 출발을 불교 신자로 합시다. 정성과 희생을 다하면 언젠가 여기에 대한 보상을 하나님이 해 줄 거라는 이 불교 신자의 아이디어, 생각, 사상, 이것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사울이라는 사람도 그랬었어요. 그런데 사도행전 26장 14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자기가 예수님 만난 이야기를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6장 14절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하시고 그 뒤의 말을 한번 들어 보셔야 돼요. 예수님이 하신 말이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아까 그 의현 스님처럼 밤에 계시가 와서 ‘엄마를 극락을 보내기 위해서 자식 된 도리로 내가 부처상 만들어야 된다. 돌밖에 없는 그 돌을 깎아서 부처 만든다.’ 라는 그 아이디어 그 인식 그게 하나님의 일에, 예언 일에 초 치고 ‘어어어~’하고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인간이 하나님께 전쟁을 선포하는 그런 행위인 거예요.
그걸 누가 했다고요? 사울이 했어요. ‘우리가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그런 생각이 자기는 이게 하나님의 뜻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오셔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참 욕본다. 애 많이 썼다. 네가 지금 바르게 살려고 애쓰는데, 자, 사울아 내가 문제 낼게. 네가 예수라는 그 이단 척결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네가 생각하는 모양인데, 자, 그래서 문제 낸다. 1번, 예수가 힘들다. 2번, 사울, 네가 힘들다. 몇 번 이게?’
정답은 사울 본인만 대따 힘들지요, 대따 힘들어요. 불교 신자가 자기의 업보, 무수히 쌓여 나오는 죄를 자기 선에서 자기가 선행으로서 다 처리를 해야 되니까 이 인생이 얼마나 고달픕니까? 그런데 성경은 이걸 뭐라고 하냐? 독수리의 안목이 아니고, 이 세상의 바닥을 친 안목에 해당된다고 봐요. 위로 올라가야 되는데 못 올라가요.
그냥 마음속에 한과 상처만 계속 남아 있고, 어떤 사건이 터지면 그 사건에서 상처는 더욱더 깊어져요. 상처는 깊어진다고요. 옛날 그 일본 사무라이들, 검 가지고 칼질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웃통 한번 벗겨 보세요. 온 몸에 다 상처예요. 웬 상처냐? 내가 힘이 세야 내가 살아남는다는,
‘내가 힘이 세어야’ 이것은 원인이죠. ‘그래야 내가 살아남는다.’는 결과지요. 이게 바로 역사적 안목이에요. 역사적 안목. 초자연적인 것, 그런 것은 내 힘으로 만들어 내겠다는 불교 신자의 마인드예요. 불교 신자의 마인드. 그 불교 신자를 저는 보통 사람이라고 봅니다. 보통 사람, 노태우도 불교 신자라 하는데 보통 사람들 다 그렇게 살아갑니다.
자, 아직 해결 안 됐죠? 위에 올라가야 돼요, 우리가. 타고난 것이 내가 잘나서 내가 결과 얻겠다는 이것이 기본 마인드인데, 이런 불교 신자, 우상숭배의 마음인데, 이건 기껏 해 봐야 극락 가죠. 극락이라는 이름의 지옥가지요. 어떻게 천국으로 바꿀 수 있느냐? 주님이 찾아 와주시면 되겠는데, 안 찾아오면 어떻게 되는가, 그런 문제죠.
자, 이 문제에 대해서 갓바위의 전설 가운데 약간의 힌트가 있어요. 뭐냐 하면은, 부처의 몸체는 자기가 깎았잖아요. 그런데 갓돌, 그 갓돌이 없으면 무효가 되는 거예요. 갓돌이 없으면. 하나님은 말씀을 주실 때 ‘하나님이여 저 말씀이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인데 저한테는 그게 없습니다. 하나님 찾아오셔서 초자연적인 능력을 저한테 뒤집어 씌워 주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주께서는 우리의 소원대로 하는 것은 ‘저 갓바위나 하라.’ 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반대로 뒤집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가 오게 되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이 나를 구원한다는 생각 자체,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는 없애 버립니다, 없애 버려요. 하나님의 말씀 안에 들어 있는 결과가 내가 의도했던 것을 지워버리는 작업을 할 때, 그 작업을 할 때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
우리의 신앙은 독수리 날개 위에 올라가는 거예요. 위에 올라가면 저 아래쪽에 있을 때, 바닥 쪽에 있을 때 ‘요렇게 하고, 요렇게 해서, 요렇게 천당 간다.’는 그 생각이 얼마나 하나님의 생각과는 동떨어진, 마귀가 주입한 엉터리 생각이라는 것이 위에 올라갔을 때 발견되는 거예요, 위에 올라갔을 때.
이러한 작업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신약에 주신 개념, 단어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남은 자’입니다. 로마서 9장 27절에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창세기 22장 17절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기를 “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했거든요.
그런데 로마서 9장 27절에서는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구원되지 못하고 오직 남은 자만 구원된다.” 로마서 11장에서는 그 남은 자를 뭐라 하냐 하면은 7천명 남겨 두었는데(롬11:4~5), 그 남은 자의 특징은 뭐냐? 자기의 행함으로 남은 게 아니고, 은혜로 남은 자예요. 은혜로 남은 자.
그러면 우리가 독수리의 날개 신앙 되려면 뭐가 빠지고 뭐가 계속 충족돼야 되냐 하면, 내 행함으로 천국 가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그것을 제거해 주는 능력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 은혜를 받았는데 그 은혜를 이렇게 표현해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이게 은혜고 이게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주신 ‘나를 죽였다.’는 그것을 사랑으로 이해하고, 나를 죽였다는 것을 나는 믿음으로 이해하고, 나를 죽였다는 그것을 하나님의 선물, 은혜로 이해하게 된 것, 이것이 바로 독수리의 신앙이에요. 위의 신앙이에요.
왜? 위에서 보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운다든지, 슬픈 상처라는 것조차도 위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저는 이것을 일반화 하면서 이 설교를 끝내고자 합니다. 이런 것을 하나의 구조로, 원칙으로 한 번 만들어 보면 어떻게 되는가? 이렇게 돼요.
이스라엘 전체가 있으면 한쪽을 잘라내요. 잘라내고 남은 자, 남은 자를 또 잘라내고 남은 자, 잘라내고 또 남은 자가 남은 자, 그 최종 남은 자가 예수님이거든요. 그 예수님이 액기스가 되면 그 남아 있는 거저 주시는 용서, 거저 주시는 죄 사함, 거저 주시는 영생을 전에 잘라냈던 그 남은 자에게 주님의 은혜가 뿌려지는 거예요. 뿌려지는 거.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요령 부려 가지고 ‘요렇게 말씀 지키면 나 천당 간다.’ 이렇게 나와요. 그 나를 잘라내는 걸 어떻게 하냐? 내 존재가 1이잖아요. 1을 하나님이 역사 가운데, 이 역사라 하는 바닥 현장에서 1을 0(제로)로 만들어요. “너 뭐 하려고? 천국 가려고? 에라이, 제로가 되어라.”
있는 나를 없애고, 말씀 안에서는 뭐냐? 그 0을 없는 데서, 이미 죽은 자는 0을 뭘로 만드느냐? 새로운 1로 만들어요. 그런데 인간들은 여로보암이나 나답은 뭐가 잘못됐냐 하면, 이 지상에 있는 1을 가지고 하나님이 있는 1로 나아가고자 초자연적인 세계에 내가 그대로 가려 하는 이게 문제인 겁니다.
이걸 어떻게 원칙으로 할 수 있느냐? 원칙으로 할 수 있어요. 바로 옛날에 나왔던 영화 “여고괴담”(여고괴담1, 1998)이에요. 여고괴담의 한 장면을 보면, 고등학교 건물은 밤이 그렇게 무서워요. 학생들 다 집에 가고 복도에 수위 아저씨가 손전등 들고 쭉 한 바퀴 돌고 오거든요.
그런데 그 영화의 한 장면을 보면, 저 먼 복도에서 여고생 귀신이 주인공이 있는 쪽으로 오는데 천천히 걸어서, 걸어서, 걸어서 오지 않아요. 어떻게 오냐 하면, 탕! 탕! 탕! 탕! 멀리서는 좀 작게 보이다가 탕! 갑자기 20m 나타났다가 15m에 갑자기 나타나면서 크기가 약간 커졌죠. 15m 10m 탕! 그럼 10m에서 5m 탕! 코앞에 귀신이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면 20m에서 15m까지 귀신은 어떻게 왔어요? 물을 수가 없어요. 그걸 우연적 또는 우발적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남은 자를, 있는 자를 ‘우리 구원받았다’ 하는 걸 잘라내는, ‘구원받기는 뭘 구원받아? 너희는 다 제거되었어.’ 하는 그 사건이 우발적 사건이에요. 탕! 탕! 탕!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전쟁을 일으킵니다. 전쟁이라는 이 사건이 역사에서 보면 우발적이고, 위에서 보면 하나님 말씀 세계에서는 이거는 이미 결정된 예언을, 예언이 스스로 성취하기 위해서 필히 일어나야 될 사건인데, 역사 속 지상에 있는 인간들은 그걸 감을 못 잡죠.
“왜 이런 사건이 터졌습니까?” “왜? 내 마음대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주를 위해서,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해서 살기 위해서 탕,탕,탕 사건들이, 이렇게 예상치도 못한 사건들이 우리에게 귀신 나타나듯이 돌출하듯이 나타나는 거예요.
그럴 때마다 나는 잘리고, 지상에서의 1은 잘리고, 독수리의 날개 위에 올라가서 위에서 바라보면 그 내가 잘려야 내가 이미 천국에 도착한 1이 된다는 사실, 역사의 현장 속에서 자꾸 나를 못 놓거든요. 나를 위해서, 이거 완전 불교 신자라니까요.
그것을 주께서는 남은 자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그걸 잘라내고, 잘라내고, 성령으로 신앙을 주게 되면 우리는 그 순간에 독수리 위에서 날 다시 보는 그러한 은혜를 누립니다. ”네가 애썼다. 사울아, 사울아 너 나한테 욕 먹인다고 애썼다. 근데 누가 힘들어? 네가 상처받고 네가 힘들었잖아.“ 사도 바울은 알았죠.
그런다고 사도 바울이 그걸로 인생 끝나는 게 아니고, 또 사도 바울도 무슨 일이 벌어지면, 또 사태 벌어지면,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면 다시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하면서 다시 지상 역사 속의 1로 돌아올 때, 다시 하나님이 은혜를 줘버리면 역사 속의 1이 아니라 위에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이미 구원받았다는 그 최종적인 1의 안목을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허락해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 세상에서 일어난 일이 다 시시하고,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고, 어렵지도 않고, 슬픈 일도 아니고, 울 일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닌 일을 그 순간이 성령 안에서 그렇게 오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탕! 탕! 탕! 오늘이 7월 30일이지만 또 하여튼 며칠 후에 예상 못한 일이 벌어질 수 있어요. 옥수수를 먹는데 왜 이가 빠지냐? 이런 거. 예상치도 못한 일, 위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성도는 어차피 주께서 하신 일, 주를 위해서 살고 주를 위해 죽게 되어 있는데, 철없이 너무나 철없는 우리들이 세상에 살면서 그 독수리 위에 있는 신앙 잠시 잊어버린 채 남한테 안 지려고 자기가 자기를 지키려는 말도 안 되는 우상 행동을 보였습니다. 주여, 바로 말씀이 그 사실을 알려 주는 것에 대해서 또다시 하나님의 준비하신 은혜에, 거저 주신 용서에 감사하는 저희를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