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보조 자아

아빠와 함께 2025. 8. 5. 09:07

보조 자아 

2025년 8월 3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45:1-5

45:1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제사년에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예레미야의 구전대로 이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니라 때에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에게 말하여 가로되
45:2 바룩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45:3 네가 일찍 말하기를 슬프다 여호와께서 나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으니 나는 나의 탄식으로 피곤하여 평안치 못하다 하도다 하셨고
45:4 또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그에게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나의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나의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이러하거늘
45:5 네가 너를 위하여 대사를 경영하느냐 그것을 경영하지 말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에게 재앙을 내리리라 그러나 너의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로 생명 얻기를 노략물을 얻는 것 같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

말씀을 다루는 직업은 바룩은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 때문에 슬퍼합니다. 다른 민족에는 없고 오로지 자신의 민족에만 있는 그 말씀으로 인해 자신의 민족이 망하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추가적인 말씀을 주셔서 바룩의 말씀을 대한 의식의 한계를 키우시려 합니다.

사람이 거룩한 하나님 말씀을 대할 때, 이러한 바룩같은 의식으로 나서기 마련입니다. 즉 “하나님, 저는 하나님 말씀을 존중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현실을 조성해 나가는 것도 인정합니다. 따라서 세상이 말씀대로 되는데 있어 말씀을 접하고 있는 저도 같이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해주세요”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식에 문제가 있습니다. 구약 사람으로서 말씀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문제가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아’에 대해서 안일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자아는 단일자아처럼 간주되지만 사건과 말씀과 사태가 일어날 때부터 자아는 여러 개가 쪼개져 대처하는데 급급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단일자아’라고 여기다가도 예상 못한 사태를 만나면 그것 수습한다고 하면서 여태껏 알고 있는 자아와는 딴 판인 자아성을 드러냅니다. 자신에게 잘해 준 자에게는 더할 나위없이 친절하다가 특정 사람만 만나면 표독스러운 짐승성으로 발작을 일으킵니다. 이는 내가 나를 갖고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조정관리가 서툽니다.

그것은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상황에 대해서 완벽하게 처리하고서는 그것을 종합하기 위해 끌어모아 그 시점의 자아로 늘 재구성에 나서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을 두고서, 어떤 상황에서 ‘부모 공경하라’에 자신감을 잃다가 어떤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탐내지 말라’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일어나고 주어진 모든 상황 전부에서 자신이 신처럼 처리하는 모습을 본인이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약점을 가진 자아가 되기 싫은 겁니다. 모든 상황을 다 철저하고 완전하게 성취시키는 그런 자아의 본성을 원하게 됩니다. 배후에 마귀가 그렇게 살도록 부축입니다. 가상 자아 차원에서 자신은 신이기에 개별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상황에서도 자신은 완벽하고 싶은 겁니다.

바룩은 실은 말씀을 다룰 자격자가 아닙니다. 혼자 고통에 슬픔을 더 보탤 필요가 없습니다.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 처리 담당자는 신약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5:39에 보면, “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예수님을 경유해서, 그 경유된 내용을 가지고 자신을 비춰봐야 하는 겁니다. 인간들의 자아는 종잡을 수 없는 자아입니다. 떠도는 자아입니다. 말씀이 주어지거나 사건이나 사태가 일어나게 되면 거기에 휘말리는 것이 자아입니다. 조금전까지도 하나님께 감사하다가 새로운 일이 일어나게 되면 자신의 완전한 행복이 흠집이 될까봐 노심초사합니다.

이런 경향은 자신이 말씀을 쥐고 그 말씀을 관리해보려고 하면서 생기는 현상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에서의 성도의 자아는 최종적으로 어떠한 자아이어야 할까요? 갈라디아서 2:2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십자가의 의미를 남기신 분은 예수님 뿐입니다. 즉 예수님만이 제대로 십자가 죽음을 성사시키시는 자아가 되십니다. 그 분의 자아가 나에게 찾아와서 나의 흩뿌리진 자아의 원천을 박아버리십니다. 그렇게 되면 나의 안에서 자아는 예수님의 자아만 활약하게 됩니다. 그 자아는 모든 말씀을 다 성취하신 자아입니다.

그분의 자아를 위해서 십자가에 함께 죽는 자아’로서 사도 바울이나 성도로 쓰여집니다. 이게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모든 말씀을 모든 말씀을 다 이룬 상태입니다. 즉 성도의 행함에 따라 말씀이 성취되고 실패하고 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새삼스럽게 말씀을 달성하고자 하는 것은 자아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즉 상황 판단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증거입니다. 고린도전서 7:23에 보면,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즉 십자가 지지도 않은 자의 종이 아니라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종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종이된 자아 말고 다른 자아를 염두에 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런 상황은 이솝 이야기에 나오는 ‘토끼와 거북이 경주’를 가지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거북이와 토끼가 누가 먼저 산 정상에 올라가느냐 놓고 경주하는 것은 불공정한 경주입니다. 하지만 거북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거북이는 누구와 비교하거나 경쟁해서 자아를 새삼스럽게 깨우쳐 하등의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이 해야 될 일은 경쟁이 아니라 맡은 일, 즉 저 산 정상까지 묵묵이 걸어갈 뿐입니다. 반면에 토끼는 경주 내내 거북이와 경쟁한다는 의식이 지속되었습니다. 저 정도 느림보하고는 중간에 한숨 자고 가도 자신이 먼저 산 정상에 도달하겠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잠이라는 것은 ‘일시적 죽음’입니다.

즉 언제쯤 깨어날 지를 본인이 가름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경쟁을 모르는 자아의 승리입니다. 이 비슷한 경우가 마태복음 13:27-30에도 나옵니다.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이미 자아가 십자가에 못박은 성도라 할지라도 세상은 극심한 가라지 천지 속에 살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성도 자아의 승리가 되지 않고 주님의 승리가 되기 위함입니다. 성도는 주님의 자아 만을 증거하는 종이니까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뽑기도 하고 거두시는 것은 하나님의 고유 영역인 것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65강-예레미야 45장 1~5절(보조 자아)250803-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45장 1~5절입니다. 구약성경 1126페이지입니다.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제 사년에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예레미야의 구전대로 이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니라 때에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에게 말하여 가로되, 바룩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일찍 말하기를 슬프다 여호와께서 나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으니 나는 나의 탄식으로 피곤하여 평안치 못하다 하도다 하셨고, 또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그에게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나의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나의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이러하거늘, 네가 너를 위하여 대사를 경영하느냐 그것을 경영하지 말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에게 재앙을 내리리라 그러나 너의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로 생명 얻기를 노략물을 얻는것 같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뜻이 서로 아주 산뜻하게 대조되면서 나타나는 구절입니다. 바룩이라는 사람은 말씀을 다루는 사람. 예레미야가 전했던 말씀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을 한 자가 바룩입니다. 여기서 말씀과 가까이하는 자가 거의 100 프로 느끼게 되는 오해를 바룩이 대표해서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하나님 말씀을 주셨고 말씀대로 사는데, 왜 이렇게 고통에 고통을, 슬픔을 더하게 하십니까?’라는 투로 불평합니다.

이 불평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하나님의 자기 백성이기 때문에 특별히 충고를 해줍니다. “네가 왜 내가 하는 일을 미리 기대하고 예상하느냐? 말씀에 대해서 완성하는 것에 대해 네가 지레짐작하지 말라” 너는 너의 시대에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너의 짧은 식견이고, 하나님께서는 전체 다가 말씀대로 잘 진행 중에 있는데, 네가 뭔데 말씀대로 안 된다고 그러냐.

오늘 본문에 의하면 “여호와께서 나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으니”라는 투로 말하느냐. 그것은 잘못이라는 겁니다. 이 대목, 이 본문을 놓고, 우리 구약적으로 해석한다면, 다시 말해서 최종 정답이 아닌 차원에서 이걸 해석한다면, ‘바룩아, 하나님께서 너를 통해서 말씀을 다루게 했는데, 그게 다 헛된 일이 아니고 언젠가 너를 다루는 말씀이 성취할 날이 올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로 위로받아라’라는 이게 구약적 조치죠.

그런데 신약적 조치가 오게 되면, 인간은 상상도 못 할,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식으로 해결이 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아가 흩뿌려진다. 이번 수련회에서 나왔죠. 뭐 ‘기억나지 않습니다’라고 청문회 할 때처럼 그럴 수도 있는데. 자아가 산산조각 납니다.

지금 바룩이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 말씀대로 왜 안 됩니까? 말씀이 왜 나에게 고통과 슬픔을 줍니까? 말씀에 의하면 우리 백성들이 잘되어야 할 텐데, 이 말씀이 백성을 박살 냈으니까, 어떻게 내가 이 말씀을 받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는 식으로 하는데, 그 자체가 뭐냐, 자아가 하나로 응어리져 있어요. 딱딱하게.

자아가 하나의 자아로 쇠뭉치처럼 엉켜있습니다. 굳어져 있어요. 굳어있으면 뭐가 생기느냐. 고통이 생기고 슬픔이 생깁니다. 자아를 백 개의 자아, 천 개의 자아로 말씀이 팍 쪼개버리면, 어떤 일이 생기느냐 하면, 이 쪼개진 자아는 말씀 따라서, 만약 말씀이 100가지라면, 100가지를 보는 자아가 모조리 다 다른 거예요.

수련회에 나왔던 예를 직접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뭐냐 하면, 십계명에 나오거든요.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출20:3)로 시작해서 열 가지 계명이 쭉 나옵니다. 그러면 수련회 하면서 내가 문제를 낸 것이 “하나님 말고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에 달라붙어 있는 자아, 그게 진짜냐? 아니면 “우상 섬기지 말라”에 달라붙어 있는 자아가 너의 진짜냐?

그다음에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에 신경 쓰는 자아가 진짜냐?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신경을 쓰는 자아가 네 진짜냐? 그다음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찌니라”, “간음하지 말찌니라”, 그 전부 다의 말씀을 뿌려버리면, 내가 하나의 자아라고 여겼던 것이, 자아가 쪼개지면서 말씀 하나하나에 다 달라붙어서, 다 신경을 쓰는 거예요.

신경을 써서 10가지의 계명을, 나는 자아가 하나인데, 말씀이 열 가지가 오니까 자아가 졸지에 열 가지 자아로 분해되면서 말씀 캐취(catch)에 나서는 겁니다. ‘잡았어! 잡았어! 이것도 잡았어!’ 말씀을 캐취해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라는 자아와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자아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라는 자아와 “도적질하지 말찌니라”라는 자아와,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찌니라”라는 자아를 한데 모여서, 독수리 5형제 모이듯이 모여서, 나의 자아는 하자 없이 온전하다고 자아가 자체 내에서 자기 구성에 나서는 것을 복합 자아라고 수련회에서 제가 표현했습니다.

이게 거짓된 자아예요. 이게 거짓되었어요. 인간은 개를 훈련 시킬 때, 뭐 뼈다귀 같은 거 탁 던지고, ‘가져와! 가져와!’라고 하잖아요. 뭔가 말씀이 탁 날아오게 되면, 그 말씀이 없던 때는 점잖게 있다가 말씀이 있으면, ‘아, 저 말씀 내가 지켜야지’라고 자아에서 쪼개져서 다른 자아가 그걸 캐취해서 ‘지켰다’라고 하면서 이리로 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질문하기를, ‘열 가지 십계명과 마주하는 10가지 자아 중에서 그 자아가 동일한 자아입니까, 다른 자아입니까?’라고 제가 질문을 했지요. 정답은 각기 다 다릅니다. 인간에게는 단 하나의 자아도 허락한 적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의 자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아를 허락한 자가 누구냐. 마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인간이 악마에 의해서 본인이 완전함을 추구할 때, 나는 신이 된다고 할 때, 그 인간은 이미 자체적으로 자아가, ‘나는 곧 신이다. 하나님이다’라는 인식을 가지고 자동으로 자신도 모르게 활동하게 되어있습니다.

만약에 좋은 일, 기쁜 일이 아홉 가지 생겼는데, 한 가지의 슬픈 일이 생기면 그 아홉 가지가 슬픈 일 한 가지 때문에 그 순간 날아가 버리고, 한 가지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기 위한 몰입, 거기에 열중해서 그것마저 기쁨으로 바꿔서, 지금 만나기로 기다리고 있는 아홉 가지 착한 자아가 서로 만나면 반갑다고 드디어 온전하게 완전한 ‘나’가 되었다고 반가워서 서로 껴안고 난리도 아니에요.

마귀가 그 짓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가정에 어떤 문제가 생겨버리면,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자아가 쪼개지면서 파견근무 나가죠. 빨리 이 문제를 해결해야, 아주 건재하고, 온전하고, 나는 늘 행복해야 마땅한 나의 흠집을 어떻게든 벌충하고 보충하기 위해서, 마저 채우기 위해서, 내 자아에서 쪼개져서 파견근무 나가서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옵니다.

이게 구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줄 때, 그 말씀은 요한복음 5장 39절에 의해서 그 모든 말씀을 지키는 자는 우리가 아니었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우리가 지키라고 준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말씀은 예수그리스도가 지키는데, 왜냐 하면 예수님만이 단독자로서 유일하게 아버지가 인정한 분은, 인정한 자아는 예수님밖에 없고, 자아가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에 구원도 예수님만 구원받아요.

나머지 자아는 다 가짜입니다. 성립이 안 돼요. ‘이 방금 이야기가 신약에 나옵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이게 나옵니다. 어디 나오느냐고 물어본다면, 성경 시작부터 전체 다 나오지만, 이렇게 말하면 무슨 뜻인지 모르기 때문에, 제가 알기 쉽게 대표적인 것을 하나 끄집어낸다면,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자,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십자가 사건 벌어졌습니다. 여기서 십자가 달리신 분은 한 분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밖에 없어요. 앞에 있는 강도는 보조니까. 보조자이니까 주인공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따라서 예수님만 십자가에 못 박혀서 구원받았기 때문에, 예수님만 구원받았다는 것을 피력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사도바울의 자아가 필요했던 거예요.

자아를 딱 가져와서, 거기에 뭘 박아버리느냐 하면, 예수님만 십자가 졌고 부활했다는 것을, 그 내용을 거기에 박아버립니다. 박아버리면 사도바울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살아있는 것은 주님의 사랑뿐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믿음이라는 것은 연합을 말하죠. 그리스도와 연합된 그것뿐이라는 겁니다. 나는 주님의 구원과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믿음에 보조자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보조자가 되면 내 자아가 흩뿌려질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나댈 필요가 없어요.

만약에 여러분의 어떤 직장 상사가 여러분에게 접시 비슷한 것을 날리면서, ‘물어! 물어!’라고 하면, 말은 쉽게 했지만 실제로 사회가 그렇게 돌아가지 않습니까? 상사의 말이, ‘물어! 물어! 내가 네 월급 준다. 물어!’라고 한단 말이죠. 그러면 그걸 물려고 나서면 이게 바로 구약적 인물이라는 거죠. ‘저걸 물어야지. 저걸 물어서 일해야지’라는 이게 아니고 고린도전서 7장 22~23절에는 거기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걸 알고 편의점 취직했으면 참 좋을뻔했는데,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이거 설명하면서 남편, 아내 설명했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종이 아니고 아내는 남편의 종이 아닙니다.

남편이 십자가 진 적 없고, 아내가 십자가 진 적 없어요. 십자가에, 이 복합 자아를 한방에 말뚝으로 한 방에 찍어 누르시는 분은 진짜 살아계신 하나밖에 없는 자아, 주님의 자아가 내 안을 장악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장만이 아버지의 사랑이 유일하게 통하는 통로죠. 유일하게 통하는 통로예요. 다른 통로는 없습니다. 다른 통로로 구원받을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또 할 말이 많이 있어요. 그게 하나님의 진리라면 거기에 따른 하나님의 환경도 우리로 하여금, 오직 주님만 섬겨도 아주 넉넉하게, 아무 일 없는 그런 상황과 환경을 조성해 줘야지, 성경은 이렇게 되어있고, 진짜 사는 꼴은 이건 뭐 이 사람 말 들어야 하고, 저 사람 말 들어야 하고, 이건 뭐 자아가 갈래갈래 찢어지도록 그렇게 만들어 놓으면 우리에게 이 말씀을 어떻게 지키라는 건지, 불만이 늘어집니다.

그런데 제가 아까 설교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이 말씀을 지켰다는 것을 우리에게 통보해 주는 거예요. 전에 어릴 때부터 늘 생각했던 건데, 이솝우화에 이런 게 있습니다.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한다는 거예요. 산 위에 깃발 꽂아놓고 누가 빨리 정상에 가는지를. 아무리 생각해도 능력자와 능력이 안 되는 불공정한 게임을 왜 하느냐 하는 거예요.

도대체 왜 하느냐 하는 겁니다. 아직도 그 문제가 얼마 전까지만도 풀리지 않았어요. 얼마 전에 우연히 들어서 이제 풀렸는데, 거북이랑 토끼가 왜 경주해야 합니까, 그거 게임도 안 되는데. 이게 왜 풀렸느냐 하면 마귀가 요구하는 자아상이 있어요. 완전함이죠. ‘너 독립해라. 내가 독립한 것처럼 너도 독립해라’라고 자꾸 독립하라고 해요.

그런데 왜 주님께서는 세상 신, 마귀가 이 세상 신이잖아요. 세상 신과 우리와 왜 게임을 하라고 하느냐는 겁니다. 게임 자체가 안 되는데요. 말씀도 지켜야 하지요, 내 생활을 위해 돈도 벌어야 하죠, 이건 뭐 두 가지, 세 가지를 어떻게 합니까. 안 되지요. 어떻게 왜 게임을 하느냐. 그 게임 이야기를 좀 풀어줘야 속이 좀 시원하겠습니다.

그 게임 이야기가 마태복음 13장에도 나옵니다. “밭에 가라지도 있고 알곡도 있구나, 하나님의 원수가 그렇게 만들었구나”(28~29절) 그러니까 종들이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 방해하는 거추장스러운 것을 뽑을지를 물어보니까 주인이 하시는 말이,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29~30절)

이렇게 나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하는데, 거북이 생각에, 어떤 생각이 있느냐 하면, 거북이는 토끼와 경주를 아예 안 합니다. 거북이가 보는 것은 산 정상에 깃발, 그곳에 가기만 하면 돼요. 경쟁자가 누구인지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토끼는 경쟁하기 전부터 내내 무슨 생각을 하느냐 하면, ‘내가 지금 누구와 게임하고 있지?’

나의 정체성, 내가 어떤 존재인 것은 누구와 비교하면서 내가 밝혀지지? 이러면서 보니까 상대가 거북이예요. 거북이와 내가 경쟁한다고? 이거는 뭐 하나 마나지. 이러면서 나 토끼가 저 거북이와 상대를 한단 말이지? 나를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그러니까 이솝이 그 이야기를 하면서, 토끼 안에 들어있는 것과 거북이 안에 들어있지 않은 것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게 자만이죠. 자만심. 이솝이 그것을 이야기하려고 한 거예요. 토끼는 내내 누구와 비교하고 견주는 가운데서, 후차적으로 자기가 누구인 것을 발견하고자 한 거예요. 그래서 저 거북이는 내가 한숨 자도 충분히 이긴다고 했어요.

그런데 잠을 자게 되면 의식이 날아가 버리죠. 잠잘 때는 죽은 자가 됩니다. 경쟁 자체가 아니라 이미 죽은 자가 되지요. 신약,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주님께서는 사도바울을 아예 죽은 자로 만들었어요. 그걸 오늘 본문 예레미야 45장 4절에서는 “또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그에게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나의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나의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주님께서 신약에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우리의 복합 자아를 아예 뽑아버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뽑아버리고, 주님이 우리 자아가 있던 자리를 대신 차지함으로써, 이제는 주님이 인내성 있게 끝까지, 가라지든 알곡이든 자라는 것을 지금도 쉬지 않고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계속 관찰하세요. 뽑아버린다는 말은 뽑히지 않으면 내가 관찰해요.

관찰하는 나를 주께서 뽑아버림으로써, 너는 주께서 시키신 일만 하면 됩니다. “너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사람의 종이 되지 말고 나의 종이 되어라” 이 말이 뭐냐 하면, “네 인생, 이미 내가 책임졌다. 내가 책임지고 너를 나 있는 곳에 잡아 당기는 것이 안 느껴지나? 가라지만 있는 곳에서 한번 느끼게 해봐? 지옥 가는 사람들 속에서 한 번 느끼게 해봐?”

지옥 가는 사람들, 가라지 있는 속에서 우리는 굳이 그들과 경쟁할 이유가 없다는 거, 경쟁하지 않으면 피곤함이 오질 않아요. 내가 굳이 멋진 자아가 되기 위해서 쓸데없는 별짓을 할 이유가 없다는 거죠. ‘가라. 그래, 너 먼저 가. 빨리 가서 부자 돼. 성공해. 빨리 가’ 이제 끝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이 이겁니다.

인생에 단락을 중간에 끊지 말라는 거죠. 네가 뭘 안다고 네 인생의 중간을 끊어버리냐. 인생 실패했습니다. 성공했습니다. 이렇게 함부로 네 자아 티 내지 말아라. 자아는 내가 가지고 간다. 자아는 내가 가지고 가서 너는 보조자로서 주님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우리 여러분들이 성도로 살아가면서, 이보다 더한 현실을, 정말 지독하게 지옥 같은 현실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코로나, 그것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엄청난 재앙을, 주께서 밥상을 어떻게 펼쳐놓으셨을지가 있지요. 그러나 헐든지 뽑든지 그것은 우리 소관이 아닌 것을 가벼운 마음으로, 제발 감사하지 않거든 살지 마세요.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쓸데없이 토끼와 경쟁할 필요도 없는데, 자기 자신을 느림보 거북이라고 자기 자신을 자책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절망하고 고통 가운데 슬픔을 더하는 쓸데없는 행위를 하며 살지 않았습니까. 주여 다시 한번 우리 인생에 나 자아를 꽂아버리는 주님의 자아가 대신 차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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