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대구강의 17] - [피 103] - 예수 안 13,10,21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나는 집 안에 있다 !! 오늘은 '예수 안'과 '예수 밖'에 대해서 살펴보겠는데, 사실상 신학자들도 제일 난감해하고 어려워하는 것이 바로 이 '예수 안' 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에 자기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하면, 그러면 '할아버지 안' 이라는 말을 사용하기가 매우 곤란하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나는 집 안에 있다" 라고 하면 말이 되는데, "창고 안에 있다" 라는 것도 쉽고 말이다. 그런데 "나는 할아버지 안에 있다", 혹은 "엄마 안에 있다" 라고 하면,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는 것이다. 이게 왜 어려운고 하니, "어디 안에 있다" 라는 것은 장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보, 지금 어디야?" 라고 하면, "지금 마트 안에 있어요" 라고, 그렇게 지정된 장소가 확정되어있고, 그 안에 들어가면 "어디 안에 있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게 아니고 "나는 남편 안에 있다" 라고 하면, 그 남편은 장소가 아닌데, 그러면 그런 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이해를 하려고 나름대로 애를 쓴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하, 늘 남편을 기억하는 모양이다" 라고 하면, 하지만 기억을 하는 당사자가 본인이기 때문에, 그러면 남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남편을 기억하는 그 기억 안에 자기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안에 있다" 라는 것은 장소의 의미가 분명한데, 물론 그 반대말은 "밖에 있다" 라고 하면 되고 말이다. 이렇게 경계선이 있으면, 당연히 장소와 장소를 구분하게 되는데, 그래서 "안이냐? 밖이냐?"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장소가 인물로 바뀌려면? 그런데 그 장소의 개념은 어떤 인물로, 그래서 "나는 어떤 인물 안에 있다" 라고 하면, 당연히 장소가 인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장소에서 인물로 바뀔 수 있는 원활한 과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과정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창고 안에 있다", "창고 밖에 있다" 라고 하면, 그것은 우리가 얼마든지 이해를 할 수 있는데, 그런데 "나는 아저씨 안에 있다" 라고 하면, 혹은 청춘남녀가 연애를 하면서 "나는 자기 안에 있어" 라고 하면, 물론 "남편 안에 있다" 라고 할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러면 그것이 항상 남편을 기억한다는 말인지, 혹은 돌아가신 그분을 회상하면서 재혼도 하지 않고 남편을 떠나지 않겠다는 것인지, 그러면 그것은 남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방금 이야기했지만 자기 기억 안에 있는 것이고, 자신의 회상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남편 안에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안에 있다는 말이다. ◈ 어서 오세요. 오랜만입니다 !! 여기서 약간의 힌트가 나왔는데, 즉 장소에서 인물로 갈 때는 한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방금 이것을 하나 알았는데, "나는 우리 아저씨 안에 있어" 라고 하면 안 되고, "나는 항상 내 안에 있는데, 나는 항상 돌아가신 아저씨를 생각하기 때문에, 내 안에 아저씨가 있어"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즉 "내 안에 아저씨가 있다" 라는 것을 가지고, 즉 자기 안에 아저씨의 추억이 있다는 것을 가지고, "아저씨 안에 내가 있다" 라고 비약을 했다는 말이다.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복잡하게 하는고 하니, 성경에 나오는 '예수 안' 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것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미리 정지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안에 있다는 것은 장소인데, 그런데 장소를 가지고 인물을 이야기하는 것은 일종의 반칙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풀어보니 어떤 것이 나오는고 하니, "아하, 나는 항상 내 안에 있는데, 그렇게 내 안에 있는 것들 중에서 돌아가신 남편이 생각나니, 그래서 내 안에 남편이 있으니, '남편 안에 내가 있다' 라고 쳐주자" 라는 것이다. 그러니 기껏해야 이것밖에 안 된다는 말이다. ◈ 무덤 속에 들어가 보지 못한 우리가 어떻게? 이런 경우에는 실제로 남편은 살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미 돌아가신 경우에 해당이 된다는 말이다. 아미면 어디로 멀리 떠나있다든지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물론 예수님은 돌아가신 적은 있지만, 돌아가셨다가 다기 되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돌아가신 곳은 우리는 전혀 가본 적도 없다는 말이다. 어제 낮 설교시간에 뭐라고 했는가? 무덤 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과, 무덤 속에 들어가 보지 못한 사람하고는 이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르다고 했는데 말이다. 그렇게 무덤 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을, 무덤에 들어가 본 적도 없는 사람인 우리를 보고 믿으라고 하니까, 우리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믿지 않는 것이 정상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믿지 못하는 것은 지혜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무덤에 들어갔다가 부활한 경험이 없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부활하지도 않았는데 믿기는 어떻게 믿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성령이 오셨다는 것이다. 성령은 아직 죽지도 않은 우리를, 이미 죽었다가 살아나신 그분의 마음이 우리에게 와 닿았기 때문에, 우리는 죽지 않아도 이미 주와 함께 죽었다는 그 사실을 가지고 이 세상을 다시 보고, 자기 자신을 다시 보게 된다는 것이다. ◈ 하지만, 성령을 받게 되면 !!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을 받지 않았다고 하면, 우리는 자기 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자기 안에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성령을 받게 되면, 성령은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의 영이기 때문에, "나는 죽어도 다시 산다" 라는 것을, 자기의 경험이 아니라 주님의 경험에 근거해서 그것이 현실로, 그게 그동안 숨어있었던 제대로 된 현실임이 가슴이 그대로 '확' 와서 닿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세상에 사는 것은 아주 재미가 있는데, "넌 이런 것을 모르지? 죽어도 다시 살아. 그렇게 살기 위해서 죽어야 돼, 죽는 것은 살기 위한 하나의 절차에 불과해.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넘어가는 문턱인데, 그 문턱만 넘으면 다시 살 수 있어" 라고 하면서 자랑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 '예수 안' 인가?, '함께 있음' 인가? 주님은 바로 이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소녀도 죽였다가 다시 살리고, 나사로도 죽고 난 뒤에 가셔서 나흘만에 살려내시고 말이다. 그러니 주님도 나름대로 참 바빴는데, 숨어있는 현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령을 받지 않아서 어떻게 하는가? 성령을 받으면 '예수 안'이 되는데, 그 이전에는 예수 안에 아니라 '함께 있음'이 된다는 것이다. 말이 좀 어려워도 이해하시고, 아무튼 우리는 예수 안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런데 우리는 예수 곁에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을 가지고, 마치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과 같은 현실에 있는 것처럼 자꾸만 우기게 된다는 것이다. 그 예가 누가복음 22장에 보면 나오는데, 이게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내용인데 말이다. 여기 33절에 보면,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라고 하는데, 이것이 베드로가 한 이야기인데 말이다. 여기에 보면, '주와 함께' 라고, '함께' 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한 번 제자는 영원한 제자라고, 예수님이 옥에 하면 같이 가고, 예수님이 죽는다고 하면 같이 죽겠다고 한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의미인가? 베드로가 자기의 충성심을 극단적으로 끄집어내면, 이렇게 '함께' 라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눅 22:33)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 신랑은, 아내와 함께 하겠느뇨 ?? 이런 표현은 주로 결혼식 때 많이 하는데 말이다. 먼저 신랑에게 "아내가 아플 때나 슬플 때나 함께 하겠는가?" 라고 하는데, 거기에 '함께' 라는 것이 나온다는 말이다. 아무리 그렇게 해도 나중에 마누라가 보증을 잘못해서 집이 차압에 들어오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장에 이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아내에게도 묻는데, "남편이 아플 때나 슬플 때나 함께 하겠는가?" 라고 말이다. 그러면 신부는 다소곳이 "예!" 라고 하는데, 하지만 신랑이 치매에 걸리든지, 그것보다 더 심하게 남편이 바람을 피우면 어떻게 되겠는가? 다른 여자와 잠을 잔 기억이 자기 남편에게 있다고 하면, 그 남편을 두 번 다시 남편으로 간주하겠는가? 아마 미역국을 끓이면 거기에 독약을 넣지 싶은데 말이다. 그게 아니면 몸에 해로운 설탕이나 소금을 잔뜩 먹이든지 말이다. 미필적 고의로 말이다(ㅋㅋ). 그동안 속옷을 빨아주고 밥을 해준 것을 생각하면 부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자기가 준 정성을 다른 여자에게 쏟았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그런 남자를 평생을 믿고 살아온 자기 자신이 그만 미워진다는 것이다. 그때는 '사랑과 전쟁2'에 나가는데, 4주 냉각기를 가지고 말이다. 그리고는 갈라선다는 것이다. ◈ 그야말로 '동상이몽(同床異夢)' !! 그러니 '함께 있다' 라는 것이 그야말로 말이 안 되는데, 그것은 우리 인간에게 해당사항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항상 자기와 함께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자기와 함께 있는 이상은 남과 함께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야말로 동상이몽(同床異夢)인데, 그렇게 잠을 자도 서로가 꿈이 다 다른데, 절대로 함께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들 안에 있다" 라고 하시는 말씀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진, 우리가 믿고 싶어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단어를 주님께서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셨는가? 믿지 말라고 말이다. 우리의 믿음이 다 엉터리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즉 "이것들이 어디서 내 앞에서 믿는 척을 하는가? 믿지도 않으면서 말이야" 라는 것이다. 그러니 통렬하게 그것을 까발리기 위해서 '예수 안'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셨다는 말이다. ◈ 니가 베드로보다 믿음이 좋아? 다시 말해서, "베드로도 성사시키지 못한 신앙을, 니가 뭔데? 니가 베드로보다 믿음이 더 좋아? 니가 베드로처럼 모든 것을 다 버리고 3년 동안 나을 따라다녔어? 그것도 안 되는 인간이 나를 믿는다고? 베드로도 나를 배신했어. 그러니 너는 두말할 필요도 없어. 믿기는 뭘 믿어? 이제 솔직하게 너의 정체를 드러내" 라는 차원에서 '예수 안'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용어를 사용하는 사도바울을 보고 욕을 많이 하지 싶은데, 전혀 실천 불가능한 이야기를 왜 하느냐는 말이다. 차라리 "돈을 사랑하지 말라" 라고 하면 어떻게 한번 해보겠는데 말이다. 그런데 "예수 안에 거하라" 라고 하면, 이게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나는 내 안에 거하는데, 내 안에 거하면서 무슨 수로 예수 안에 거하느냐?" 라는 것이다. "십일조를 하라" 라고 하면 할 수 있겠는데, 하지만 십일조를 해서 구원을 받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 안에 있을 수가 없는데, 그런데 어떻게 예수 안에 있느냐는 말이다. 40년, 50년 예수를 믿은 게 이제 다 헛방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믿는 척을 한 것이 다 들켰다는 말이다. ◈ 에이, 좋다가 말았네 !! 고린도전서 15장을 보면, 이게 부활에 대해서 언급했다고 보면 되는데 말이다. 그렇게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아주 화려한데, 즉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태어나고, 그리고 흙에 속한 자는 흙에 속하고, 하늘에 속한 자는 하늘에 속하고 말이다. (고전 15: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그러면 우리는 "믿습니다. 믿습니다. 아멘!" 이라고 외치고 싶은데,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까, 마지막 58절에 보면, '주 안에서'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이 모든 것들은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만 적용되는 혜택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고전 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 서 목사님이 오늘 왜 안 왔지요? 이렇게 되니까, 그동안은 실컷 좋았는데, 하늘의 영광을 맛보고 천사처럼 산다는 것에 대해서 희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 모든 토대가 '주 안에서' 라고, 즉 주 안에 있는 자에게만 해당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 안에 있지 않으면 이 모든 부활의 혜택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죽어서 가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서 이미 주 안에 있는 사람에게만 죽어서 이런 혜택이 주어진다는 말이다. 그러니 먼저 이 땅에서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데, "죽어서 천당에 가면 되겠지!" 라고 하는 게 아니고 말이다. 자기가 죽을 때 천당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서 자기 위치가 주 안에 있을 때만 해당되는 것이지, 주님 바깥에 있으면서 좋아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 주님의 일관된 스토리가 있어야 !! 어제 오후시간에 설교를 하면서 참 중요한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사람들이 자꾸만 자기의 감정이나 느낌을 의지하는데, 그러면 안 되고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이 왜 있느냐는 말이다.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 라는 말을 누가 못하겠는가? 실제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이 하신 스토리와 줄거리가 자기 안에서 전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로 주님을 사랑하고 믿는다면 말이다. 그것도 없으면서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어요" 라고 한다면, 그것은 지나 개나 다 하는 소리이고, 주님이 일관되게 벌리는 주님의 스토리가, 그 전개과정이 자기 삶에 젖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에 천의 입장이라면 바느질을 하면 천이 몹시 아픈데, 그렇게 바늘이 찌르는 것이 성령이고 바늘귀에 달린 실이 곧 언약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천이고 말이다. 그런 천을 바늘로 찌르게 되면, 우리는 바늘만 달랑 소유하려고 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바늘에 달려있는 실처럼 줄줄이 이어져오는 것이 하나님의 스토리라는 것이다. 그게 바로 언약이란 말이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는 이제 일가친척 집을 떠나라" 라고 하시면, 그게 곧 바늘에 찔리는 것인데, 그러면 아브라함이 "예, 떠나죠. 어디를 가든 농사를 지으면서 살면 되겠지요" 라고 한다면,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집을 떠나라" 라고 한 다음에 무엇이 따라오는고 하니,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만드시는데, 그리고 자식을 낳아도 남들처럼 그냥 낳는 것이 아니고, 일이 무지 꼬이고 복잡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낳은 자식을 자기 손으로 잡아죽어야 하는데, 이런 모든 것은 아브라함의 스토리가 아닌 하나님의 스토리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어떤 스토리를 전개할 것인지, 그것을 미리 앞당겨서 아브라함에게 보여주신다는 것이다. 즉 아브라함의 인생 자체는 예고편이고, 그리고 영화의 하얀 스크린이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그 스크린에 장차 오실 예수님의 그림자가 투영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의 인생도, 우리가 성령을 받게 되면 신구약이라는 모든 언약이 성령이란 바늘을 통해서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된다는 것이다. 뒤에 실을 매달고 말이다. 그러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담이 매일같이 자기 속에서 재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떡과 물이 없는 못 삽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좋아도 안 됩니다.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천국보다도 세상이 좋습니다" 라는 마음가짐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다는 말이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어려운 것을 하겠는데, 인내력을 좀 발휘해야 될 시간인데 말이죠. 그런데 아까 고린도서 15장에서 '주 안에서' 라고 했는데, 여러분이 이것을 보고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야하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우리의 생각에는 '하나님 안에서' 라는 것이 더 좋아 보인데, 그런데 성경에서는 왜 '주 안에서' 라고 했느냐는 것이다. 이것을 알면 천재, 아니 성령을 받은 사람인데, 왜 '하나님 안'이 아니고 '주 안' 이냐는 것이다. 아까 힌트를 드렸는데, 즉 바늘을 찌르면 '따끔' 하면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이 뒤따라온다는 것이다. 즉 언약이 딸려온다는 것이다. 그 언약에 의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근거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언약맨, 그게 구약에서는 '주의 이름' 이고,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 인데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주님인데, 그 주님이 우리를 "구원할까? 말까?" 라는 것을 결정하는 그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주 안에서' 라고 하는데, 그런데 촌에 있는 할머니들이 뭐라고 하는가? 교회에 다니면서 "아이고, 나는 하나님을 믿어" 라고 하는데, "그러면 예수님은요?" 라고 하면, "복잡한 것은 나는 몰라. 그런 것까지 요구하지마. 나는 방금 밭에서 일하다가 왔어. 그저 하나님이 내 자식만 지켜주면 돼" 라고, 하나님께 정성을 다해 빌면 복이 온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 공포의 여름철이 되면 !! 그러니 복음을 아는 목사가 시골교회에서 목회를 한다는 것이 참으로 애로사항이 많이 있는데, 물론 도시도 마찬가지만 말이다. 특히 촌에서는 여름철이 되면 그야말로 공포의 계절인데, 왜 그런고 하니, 장로님이 기도를 시작하면 그때 이미 다들 주무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축도를 하면 그제야 기지개를 펴면서 깨어나고 말이다(ㅋㅋ). 그래서 광고를 보통 설교를 마치고 나서 하는데, 설교내용은 몰라도 돈을 내라는 광고는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선교사에게 선교비를 보내야하니 매월 정한 것을 미루지 말고 내라고 말이다. 그런 것은 잘 알아듣는데, 그래서 이번에 자두를 농협에다 수매하면 내겠다는 식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설교내용은 모르는데, 아무튼 광고시간이 설교시간 뒤에 있다는 말이다. 설교는 잊어도 광고는 잊지 말라고 말이다. "이번 주일 주차요원들은 예배시간 30분 전에 미리 나오세요" 라는 소리를 알아듣는데, 그런데 정작 '주 안에서' 라고 하면 무슨 말인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설교는 하지도 않겠지만 말이다. '주 안에서' 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그것이 왜 '하나님 안'은 아닌지, 그것을 이제부터 해보자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 ?? 이런 것을 보면 전부 새롭게 배워야 하는데, 알았다고 해놓고 돌아서면 또 잊어버린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안'과 '주 안'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까, '하나님 안'에서,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라는 것은 모든 인간들이 다 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고, 하나님은 크신 분이고, 반면에 우리는 초라하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크신 분께서 작은 자를 건지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이다. 이것은 모든 민족, 모든 종교에 다 있는데, 불교에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특별히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이게 '하나님 안' 이라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이름' 이라는 것이다. 즉 '주 안에서' 라고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쪽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만 계시를 주셨는데,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말이다. 다른 민족에게는 미안하지만 계시를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 낯설게 등장한 '주의 이름' !!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그 당시에는 '주 안에서' 라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이름' 인데, 그렇게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하신다" 라는, 그야말로 새롭고 낯설게 등장한, 방금 제가 낯설다고 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의 상식을 파괴해버린다는 것이다. 우리의 상식을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언약 자체가 인간의 상식과 대결하는데, 만약에 우리 인간이 선택한다면, "청량리로 갈까요, 명동으로 갈까요 ♬" 라는 노래도 있는데 말이다. 만약에 기차를 타야한다면 우리의 선택은 청량리로 갈 수밖에 없는데, 그런데 그렇게 우리가 청량리로 갈 수밖에 없음을 모두 다 까발리면서 명동으로 가버리는 것이 곧 주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따라올 사람은 따라오는데, 자기 상식이 있는 사람은 여기서 헤어지자는 말이다. 그렇게 자꾸만 헤어지자고 하는데, 즉 "너희는 너희의 갈 길을 가고, 나는 내 갈 길을 따로 가겠다" 라는 것이다. 마치 "너희도 따라오려느냐?" 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말이다. 주님께서 가신 길을 넓은 길이 아니고 좁은 길인데,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간 사람은 그 숫자가 항상 적다는 것이다. ◈ 12명이 정탐을, 그러나 !! 가나안 땅을 12명이 정탐을 하려고 가서 주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몇 명인가? 2명인데, 사실 2명도 기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숫자상으로는 6대 1인데,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0.001퍼센트도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다수의 의견이 진리에 가깝다고 여기서 그쪽에 손을 왕창 다 들어준다는 말이다. 12명이 가서 2명만 들어갈 수가 있다고 하니, 사람들은 2명보다는 10명이 본 것이 더 옳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권사나 장로를 투표할 때 3분의 2를 가지고 하는데, 그것은 전혀 성경과는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어느 목사라도 청빙을 할 때 3분의 2가 안 된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거의가 100퍼센트인데, 하지만 와서는 자기 마음대로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주님의 일은, 주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을 다 알고 있으면서,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샛길로 우리를 데리고 가신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우리가 미처 몰랐다는 말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라고 하면, 그 순간 우리는 머리를 마구 굴린다는 것이다. "빛이 되기 위해서 환갑이 지난 이 나이에 무엇을 해야되지?" 라고 하는데, 그러면 주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그냥 집에 가만히 있어. 그게 곧 빛이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ㅋㅋ). 봉사를 하고 무엇을 하고, 그렇게 돌아다니지 말고 집에 그냥 있으라고 한다는 말이다. ◈ 우리가 하는 것 반대가 곧 정답 !! 그렇게 항상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다른 것을 해버리신다는 것이다. 정답이 특별히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것 반대가 곧 정답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뭔가 정답이라고 붙들면, 그 반대 자리에 등장하는 것이 곧 정답이란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자기 의와 자기 공로를 더 이상 소유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내 인생을 내가 참 착하게 살았습니다" 라는 소리를, 그렇게 자기 자랑을 못하게 하는 것이 곧 정답이란 말이다. 우리가 "청량리를 갈까요? 명동으로 갈까요?" 라고 하면, 그렇게 "어디로 갈까요?" 라고 하는 것 자체가 실수임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 바로 정답이란 말이다. ◈ '나는 가난하다' 라고 했을 때 !! 예를 들어서, 이게 참 어려운 논리인데 말이다. "나는 가난하다" 라고 했을 때, 그게 논리적으로 맞으려고 하면, 이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다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대충 자기 주위를 둘러보고 그런 소리를 하는데, 그게 문제가 된다는 말이다. 만약에 자기보다 더 가난한 사람이 오게 되면, 자기는 그 사람에 의해서 가난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은 진리에 대해서 자기가 너무 성급하게 결정을 하는데, 그것을 제가 어제 오후에 '시장의 우상', 혹은 '종족의 우상'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두 개가 더 있는데, 극장의 우상, 동굴의 우상이 있는데 말이다. 모두가 비슷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뜻인고 하니까, 남에게 들은 풍월을 가지고 "나의 위치가 이 정도는 되지 않겠는가?"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것이 모두 선입관이고 잘못이란 말이다. 그런데 '주 안'에 있으면, 우리가 하는 모든 실수를 주님이 어떻게 하시는고 하니, 우리가 실수를 하면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실수를 하도록 함으로 말미암아서, 혼자서 만들어 가는 현실이 아닌 것을, 혼자서 꾸려나가는 인생이 아님을 깨닫게 할 때, 그런 우리 자신의 잘못과 부족을 통해서 주님의 현실이 드러나도록, 그런 식으로 '주 안에서' 라는 것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 다른 민족은, 하나님이 대상이지만 !! 제가 말을 하고도 참 어려운데, 이게 다른 민족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대상이 되는데 말이다. 하나님이 만든 달의 경우에도, 그것이 호수에 비춰지게 되면 저절로 두 손이 모아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달을 보고 빈다는 말이다. 수능도 몇 일이 남지 않았는데, 그럴 때는 달처럼 하나님이 대상이 되는데, 이스라엘이 아닌 경우에 말이다. 그러게 달이 함께 있듯이 자기도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본성은 항상 '주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는 여기에 있고, 하나님은 저기에 계신다" 라고, 그냥 가까이 있는 것으로, 그것으로 '주 안에서' 라는 것을 대체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가까이' 라는 것으로 말이다. 가까이 에서 주고받는 것으로 말이다. 다방에서 남녀가 이야기를 하듯이, 그렇게 가까이 에서 마주보고 이야기를 하면, 그것으로 '주 안에' 있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 이스라엘만은 '주의 이름'이 !!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은데, 이스라엘은 그 주도권을 누가 쥐는고 하니까, 그만 '주의 이름'이 들어오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들어온 흔적이 곧 피 있는 제사라는 것이다. 물론 여러분도 여기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지만, 이렇게 제가 이야기를 하고 자주 들음으로서 이전에 알고 있던 것과 모호했던 것들이 뚜렷하게 연결이 되고 길이 생긴다는 말이다. "아하 모든 것이 피구나" 라고 말이다. 교재 제목이 '피' 인데, 오직 피로서만 하나님이 "나, 여기에 있다!" 라고 하시면서 등장한다는 것이다. 피가 없는 곳에는 등장하지 않는데, 그런데 이 피는 우리의 근원적인 죄를 지적한다는 말이다. "너는 무엇을 해도 인간이 안 돼. 믿는다고? 누구를 믿는데? 나를 사랑한다고? 웃기고 있네" 라고 말이다. 그렇게 피를 앞장세워서 우리의 죄를 지적하시는데, 성령이 오신 이유가 무엇인가?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판단에 대해서 우리를 책망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이다. 그러한 책망을 받게 되면, 우리는 "아하, 이게 내 인생이 아니구나. 주님의 업무구나" 라고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 실수에 실수를 거듭하면서 !! 그것을 주일 낮 시간에 이야기했는데, 지금 우리가 하는 것도 주님의 업무라는 말이다. 물론 우리는 것을 실수에 실수를 거듭하게 되는데, 그래서 강제로 질질 끌려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우리 몸을 통해서 "그리스도 때문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고 하는 소리를, 그래서 그 명예와 자존심을 주님께 돌려드린다는 것이다. 주기도문의 경우에도, 전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우리의 죄인 됨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 곧 주제라는 말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하는데,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뒤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고 하는데, 그렇게 언제나 죄 문제와 관련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우리에게 돈을 더 주는 기적이 아니라 십자가를 재현하는 기적이라고 낮 시간에 이야기를 했는데, 그 주기도문에 나오는 내용처럼, 우리의 죄를 드러내놓고 용서하시는 그 주도권이 주님에게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에게만 영광을 돌릴 때, 그러면 우리는 이미 이 땅에서 주 안에서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 이스라엘의 장자는 죽었는가? 살았는가?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주 안에서' 라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을 하겠는데 말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스라엘에게는 장자가 있는데, 그러면 애굽에서 이스라엘의 첫 유월절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장자를 살리셨는가? 죽이셨는가? 이게 굉장히 어려운 질문인데 말이다. 하나님께서 장자를 살리기 위해서 어린양을 잡으라는 것인가? 아니면 죽이려고 어린양을 잡으라고 하시는가? 그들이 하나님의 지시대로 양을 잡고 문설주에 그 피를 발랐는데, 그렇게 양을 잡음으로서 장자가 살았다는 말인가? 아니면 같이 죽었다는 말인가? (출 12:21) 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같이 죽었다는 것인데, 그러니 이러나 저러나 이스라엘에게 이제 장자는 없다는 것이다. 장자는 주님 손으로 넘겨졌는데, 그게 로마서 8장에 나온다는 것이다.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에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의미인가? 하나님께서는 장자 같지도 않은 장자는 다 죽여버리시고,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장자를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주셔서 성취를 시키는데, 우리가 거기에 말려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집안에 맏이가 있으면 그가 곧 장자인데, 하지만 그 장자는 구원이 되지 못하는 장자, 즉 육신에 속한 장자라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모른다고 했을 때, 그때 달을 보고 빌 듯이 그렇게 정성을 다해 빌면 복을 받고, 또한 착하다고 해서 죽으면 천당에 간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고, 가장 기본적인 것이란 말이다. ◈ 장자를 죽여라 !! 물론 교회에 처음 나올 때 가장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인데, 그런데 성경을 펼치면 "장자를 죽여라"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스토리가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가장 기본적인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제공하는 성경의 스토리 속으로 들어가는 세월이 너무 길다는 것이다. 물론 빠른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그건 특별한 경우이고 말이다. 이것을 수천 번을 이야기해도 알아듣지를 못하는데, 그 동안 제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났는지 모르는데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보고 죽으라고 하시는데, 즉 "니가 죽어야 산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에 교회에 왔을 때는 정성을 다해서 비는데, 왜냐하면 사는 것을 더 오래 살기 위해서 말이다. 초반에는 그렇게 하더라도 주님의 스토리에 들어오게 되면 "이제는 죽어야지" 라고 하면 참 좋겠는데, 목사가 되어도 그 목사 짓을 해서 또 살려고 한다는 것이다. 장로가 되어서 또 살려고 하고 말이다. 장로인 자기를 보고 장로답게 대우를 해주지 않는다고 삐쳐서 교회를 뛰쳐나가고 말이다. 제가 어제 낮에 중요한 이야기를 했는데, 즉 "구원을 받고 난 뒤에 어떤 결과물을 소유하지 마시고, 구원인지 아닌지 구별하는 그 기준을 받으세요" 라고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기준은 버리고서, "나는 이제 살았으니 성화가 되면 그만이다" 라는 식으로, 그렇게 또 다시 자기 자신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 '함께' 인가? '안에' 인가?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주 안에 있는 자가 전혀 아닌데, 오늘 강의가 '주 안에서' 인데 말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있으려고 하고, 예수님과 함께 있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함께 있으면 안 되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이전인데, 그렇게 함께 있다가 십자가 사건이 터지나 모두가 도망을 가고 말았다는 것이다. 함께 있겠다고 하던 인간들이 말이다. 그것도 그냥 간 것이 아니라 배신을 때리고 갔다는 것이다.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와 12제자에게 주님이 일부러 찾아갔는데, 문이 닫혀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고기를 잡을 때도 찾아가셨다는 것이다. 처음에 베드로를 찾아갔을 때도 배의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는데, 마지막으로 찾아갔을 때도 배의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처음에는 어부생활을 하던 때였다고 하면, 그런데 이제는 무엇인가? 이제 와서 고기를 잡아서 무엇을 하겠다는 말인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라" 라고 하는 취지는, 그것은 베드로가 지키는 게 아니라, 그 약속을 예수님이 지켰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바다의 포세이돈이기 때문에 말이다. 즉 "이제는 내가 너에게 들어간다" 라는 것이다. 성령께서 말이다. "너는 가만히 있어라. 너는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면서 고기나 잡고 있어라. 이제는 내가 너에게 들어간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 그것이 곧 '주 안에' 라는 것인데, 즉 주님 안에 베드로도 있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라고 되어있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사실 이렇게 되면 아마 한국교회에 교인이 몇 명 남아있지도 않지 싶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부가 함께 하려고 하지, 주님 안에 있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없기에 말이다. 물론 십자가 이전까지는 함께 하겠지만, 그래서 좋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3년 동안이나 졸졸 따라다니고, 어떤 때는 오병이어도 얻어먹고 말이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당신이 오병이어를 직접 행하시죠 !! 저는 기적을 주장하는 분들에게 묻고 싶은데, "당신은 이제 돈벌이를 하지 말고, 아이들에게 도시락을 하나 가지고 오라고 해서, 축복을 해서 5000명을 먹이든지 하면 되지, 그런데 일부러 무슨 돈을 벌고 하는가? 그렇게 초대교회의 기적을 강조하고, 예수님은 기적을 베푸는 분이라고 하면서 말이야. 그러면 당신도 예수님처럼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면 되지 않는가?" 라고 말이다.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너희들이 오병이어를 좋아하는 것은 떡을 먹고 살고자 함이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유월절의 장자는 살라는 것이 아니라 죽으라고 장자를 만들어놓았는데, 그렇게 하나님께서 그 장자를 이어오신 것은, 이 땅에서의 장자를 죽이고, 그렇게 죽여서 다시금 하나님의 장자로 변신시키기 위해서 이스라엘에게 장자를 주셨다는 것이다. ◈ 신약은 장자가 확정 !! 그게 구약의 이스라엘인데, 그러면 신약은 무엇인고 하니, 신약은 장자가 확정되었다는 것이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장자이고 예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이 장자인데, 먼저 태어났다고 해서 장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형이든 동생이든 성령을 먼저 받으면 장자라는 말이다. '맏아들의 형상' 이라는 것은, 장자의 형상이 있는 사람이 장자라는 것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장자를 빼놓고는 인간이 아닌데, 그러니 오늘날은 성령을 받은 성도를 제외하고는 인간이 아니라는 말이다. 맏아들의 형상이 없으면 하나님은 사람으로 취급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저를 보고 욕을 하면 참으로 섭섭한데, 저의 주장이 아니라 로마서 8장에서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맏아들의 형상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지옥으로 보내지 천국에는 해당사항이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맏아들의 형상으로 만드는 작업은 성도가 하는 것도 아니고, 주님의 자기 과제이고 숙제라는 것이다. ◈ 유월절 양 때문에 살아난 자들은, '주님의 소유' !! 유월절에 양을 잡은 것은, 양을 잡아서 그 집안에 장자로 다시 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이 유월절의 양 때문에 살아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다른 민족에게는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없고, 다른 민족은 하나님만 섬기면 되고, 오직 주의 이름이 들어오는 이스라엘에게만 일어나는 매우 특이한 하나님의 축복이고 조치라는 말이다. 이와 동일한 조치가 우리에게도 임하게 되면, 구약에서는 주의 이름 안에서 함께 하는 나라가 이스라엘이라고 하면, 오늘날 신약에서는 주 안에 있는 우리가 곧 이스라엘이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 때에 말이다. 이 세상의 장자이고, 이스라엘이 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말이고 주님이 기수인데, 말은 기수가 "이랏!" 라고 하면서 때리면, 그렇게 기수가 인도하는 대로 달리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그러한 자기 인생에 대해서 너무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는 것이다. "내 남편은 왜 돈을 잘 벌지 못하는가?" 라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할 수 없는데, 그것은 주님의 과제이고 업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주님의 과제를 자기가 한번 해보겠다고 설치는 사람들이 있는데, 참으로 기가 막히고 코가 차서 말이다. 그것을 떠맡는다고 해서 의로워지는 것도 아니고 구원을 받는 것도 전혀 아니란 것이다. 물론 자기가 해보겠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겠지만 말이다. ◈ 주님의 지시만 따르면, 'OK' !! 제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 인생에 대해서 잘 모르겠으면 주님의 지시만 따르면 된다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결정해야되지? 이럴 때는 자식에게 무슨 말을 해야되지? 자식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어떻게 복음을 전하지?" 라고 자꾸만 고민을 하면 어색해지는데, 그렇게 되면 결국 억지가 되어서, 나중에 자식은 화가 나서 "이제는 두 번 다시 엄마를 안 본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자식에게 복음을 증거한답시고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자기부터 주님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 왔을 때 아무 소리도 하지 말라는 지시가 왔으면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된다는 말이다. 괜히 한 건수 올려서 덜 미안해하려고 하지 말고, 아니 주님에게 무슨 덜 미안하고 더 미안한 것이 있는가? 그런 생각자체가 함께 있는 것이지 주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주님과 함께 있을 때는, "주님이 죽는 곳이라도 같이 가겠습니다" 라는 소리가 나오지만, 그렇게 함께 있는 것은 아무런 짝에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남편과 함께 있다고 해서 어디 남편이 아내의 말을 듣는가? 함께 있으면 나오는 것은 잔소리뿐인데, 말을 하고 보니 참으로 옳은 소리를 했다는 느낌이 드는데 말이다(ㅋㅋ). 하지만 부부간에 함께 있으면 어떠한가? 아무리 좋은 소리를 해도 결국 잔소리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 고마해, 고마해라. 너무 과하다. 나는 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는 줄 아나?"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한 바탕 싸우고 말이다. ◈ 이스라엘과 동거하는 '주의 이름'에 의해서 !! 이제 점점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주의 이름이 들어왔는데, 물론 이스라엘은 매일 실수를 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실수를 해도 바늘 뒤에 있는 실처럼, 그 실의 완성도는 이스라엘 사람에게 맡긴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함께 동거하는 주의 이름에 의해서 실시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약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은 믿는다는 것은, "저는 주님을 믿습니다" 라고 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아도 마땅합니다" 라는 고백을 통해서 다른 민족에게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 라는 것을 증거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너희들은 인간이 왕이지. 우리는 주님이 왕이야"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 경우가 계속해서 나오게 되는데, "우리가 주님의 함께 하심을 몰랐습니다" 라고 말이다. ◈ 유다의 아사 왕을 아세요? 유다의 아사 왕의 경우에, 적들은 쳐들어오고 싸울 무기는 없고, 그래서 자폭을(?) 하듯이 하나님을 찬양하니 적들이 물러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사들이 하는 모든 것, 즉 미디안의 135000명이 쳐들어왔을 때 기드온은 달랑 300명으로 이겼다는 것이다. 이게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은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은, 그들의 성실함도 아니고, 의로움도 아니고, 착함도 전혀 아니고, "오직 언약만을 드러내기 위해서 못나고 못난 너희들을 택해서 너희들 속에 들어왔다" 라는 것이다. (대하 14:9) 구스 사람 세라가 저희를 치려하여 군사 백만과 병거 삼백 승을 거느리고 마레사에 이르매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우리 가운데 잘난 사람이 누가 있으면, 부한 자가 누가 있느냐?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오직 그리스도만 자랑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고전 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니 이게 구약의 원칙과 어떻게 그리 똑같은지 말이다. 아브라함이 보았던 하나님, 야곱이 보았던 그 하나님이 놀랍게도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인 우리를 구원했습니다" 라는 고백을, 그런 기적을 유발시키는 하나님으로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다. 아니, 우리 안에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자꾸만 우리의 기억 속에 담으려고 하니, 그때부터는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기억을 믿는 오류가 계속해서 발생하게 되는데, 하지만 주님은 거기에 전혀 구애를 받지 않고 또 다시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하시는가? 우리의 분노와 원통함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못된 존재인가를 깨닫게 함으로서, "이같이 못난 존재를, 주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 자를 구원해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라고, 주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능력만을 증거할 수 있도록 조치하시는 그 기적이, 그것이 바로 주님이 함께 있는, 아니 주님 안에 있는 자에게만 해당이 된다는 것이다. ◈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경우에 !! 그렇게 이스라엘이 주와 함께 있었는데, 이제 여러분도 어느 정도 감을 잡았으니 스피드를 내겠는데 말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있으면서,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바뀌면서, 자기가 이삭을 모르고 이스마엘을 낳았다고 하는 그 육적인 것을 통렬하게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삭은 하나님이 원하시고 지정한 자에게 축복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별미를 주는 맏아들에게 축복을 내리는데, 그게 장자인 줄 알고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개입해서 그것을 바꿔버린다는 것이다. 동생이 축복을 받고, 형이 저주를 받는 말이다. 그럴 때 이삭은 "아하, 하나님은 내 뜻대로 해주지 않음을 통해서 구원해주시는구나" 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죄인이기 때문에 바꿔치기를 해야만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야곱의 경우에는 축복을 두 손을 어긋맞게 하는데, 죽었다고 여겼던 아들이 오히려 형제들을 살린다는 것이다.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형들을 말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 마치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듯이, 그리고 야곱의 입장에서는 요셉이 죽었듯이, 그렇게 죽은 자가 오히려 살았다고 여기는 자들을 죽어가면서 살려내는, 바로 그 방식만이 하나님의 구원방식이고, 그게 곧 십자가라는 말이다. ◈ 사라는 천국에, 하갈은 지옥에 !! 우리가 십자가의 영을 받으면 구약의 그 오류들이 우리 속에 다 들어오는데, 우리가 곧 철없는 아브라함이고, 이삭이고, 야곱이란 것이다. 아브라함의 부인이 사라인데, 참으로 못됐다는 것이다. 자기는 자식이 없는데 자기 종인 하갈은 자식이 있으니, 그 하갈과 자식을 굉장히 구박했다는 말이다. 요즘은 못된 시어머니만 아니라 못된 장모도 유행인데 말이다(ㅋㅋ). 사라도 그에 못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못된 사라가 지금 어디서 살고 있는고 하니, 천국에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못된 사라에게 시달리고 시달린 하갈은 어디에 살고 있는가? 저 밑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상식을 그야말로 뒤엎고 마는데, 책상을 마구 엎어버리듯이 말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그런 업어치기에, 그런 바뀜에 참으로 많은 세월과 시간이 필요한데, 즉 "착한 내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천하에 못된 내가 구원을 받는다" 라는 것이다. 이렇게 바뀌어야만 하는데, 그것이 결코 우리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교회에 온 나에게 왜 착하다는 소리를 안 합니까?" 라고 하면서 삐쳐서 나가버리니, 정말로 환장한다는 것이다. "교회까지 나와주고 예수까지 믿어주는데, 그렇게 착한 우리인데, 그런 우리를 왜 긍정해주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데, 제가 미쳤다고 긍정을 해주느냐는 것이다. 제가 하나님도 아닌데, 그러니 하나님의 방식대로 해야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이 세상이 착한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그런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전문용어로 '못되처먹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교회 교인들은 너무 착한데 말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멸망시켜버리는데, 조금 전에 이야기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개인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나중에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그만 집단화를 시켜서 업어치기를 하신다는 것이다. ◈ 우리가 어찌할꼬 !! 여기서 사도행전 2장을 보겠는데, 성경의 흐름이 어떠한지 궁금해하는 분들이 있는데, 바로 이렇다는 말이다. 36절부터 보겠는데,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라는 것은, "너희들이 천하게 여긴 분을 오히려 하나님은 귀하게 보셨다" 라는 것이다. 그리고 37절에는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라고 되어있는데, 이게 바로 성령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그들이 뭐라고 하는가?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 뒤의 말은 보지 말고, 이렇게 "우리가 어찌할꼬!" 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성령이 들어왔기에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 뒤에는 아무 것도 없어도 괜찮은데, "우리가 어찌할꼬!" 라는 이 비명소리가 자기 소리가 아니라, 곧 성령의 소리라는 말이다. 그 뒤 38절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라고 하는 것은 앞의 것을 설명해놓았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그렇게 "우리가 어찌할꼬!" 라고 찔리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양심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다. (행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우리는 그 "나는 어쩌면 좋아!" 라는 것을 웃으면서 해야하는데, 왜냐하면 이게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라는 의미인데, 혹은 "막 살았는데!" 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미 다 이루어졌다는 것인데, 즉 "왜 하나님이 저에게 찾아오셨습니까?" 라는 것의 다른 표현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저 같은 인간은 그냥 내버려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이렇게 찾아오셨으니, 이제 나는 어쩌면 좋아!" 라고 하는, 그렇게 십자가 앞에서 "저는 무슨 존재입니까?" 라고 묻는 것 자체가 이미 그 사람은 '주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미 주 안에 말이다. ◈ 쉼 호흡을 한 번 하고, 요한복음 14장을 !! 진짜 어려운 것은 아직 손도 대지 않았는데, 이제 터치를 하려고 하는데 말이다. 그래야 오늘 강의가 마감이 되니 말이다. 드디어 요한복음 14장을 보겠는데, 이게 너무 난해해서 잠시 숨을 한번 쉬고서 해야되는데 말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전까지는 '예수 안' 이라는 것이 없는데, 그게 성립이 안 된다는 것이다. 함께 붙어있는 것은 되는데 말이다. 하지만 같이 있어봐야 배신만 때리니 그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에서 장래의 일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는데, 즉 "근심하지 말라. 내가 먼저 가게 되면 내가 보혜사를 보내줄 것이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분이 오시게 되면, 여기 10절에 보면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라고 하면서, 20절에서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요 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 ◈ 이 세상에서 살았던 기억들이 죽어서도 여전하겠는가?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목사님, 너무 어렵다고 하지 마세요. 딱 보니 알겠는데, 뭐가 그리 어렵다고 하십니까?" 라고 나올 수도 있는데, 그런데 제가 어렵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을 염두에 둔 것인고 하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았던 기억들이 죽어서도 여전히 남게 되는지, 그것과 결부해서 어렵다고 했다는 말이다. 이 세상에 살 때 우리는 누구와 함께 있었는가? 처음에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나는 내 안에 있다" 라는 것이다. 자기가 이순신 장군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것은 자기 기억 안에 있다는 말이다. 기억은 자기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누구를 기억하든지 간에, 돌아가신 남편을 기억하든, 아니면 자식을 기억하든, 그것은 자기 기억 안에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나는 내 안에 있다" 라고 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내 안에는 나밖에 없다" 라는 것이다. ◈ 어머니 기도를 못 잊어 ?? 그러니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을 기억하자" 라고 하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기억이라는 말이다. 즉 여러 가지 기억들 중에서 하나일 뿐이란 것이다. "어머니 기도를 못 잊어 ♬" 라는 찬송가 가사가 있는데, 물론 잘못된 가사라는 것이다. 왜 하필이면 어머니 기도를 못 잊어서냐는 것이다. 어머니의 기도 때문에 나쁜 짓을 하면 안 된다는 말인가? 어머니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어머니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어머니가 무슨 성모 마리아인가? "어머니가 교육을 잘 시켜놓았더니만, 그 아이가 어디를 가도 예수도 잘 믿고 반듯하게 산다" 라는 것인데, 아무리 어머니라도 자기 자신도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데, 자식까지 어떻게 감당이 되느냐는 말이다. 굳이 어머니가 기도를 한다면 그 내용이 다음과 같아야 하는데, 즉 "이젠 제발 마마보이가 되지 말고, 이 어미를 떠나서 주님 안에서 마마보이가 되어라. 주님 안에서 살아라. 주님이 매일같이 너를 살려주신다는 것을 알아라" 라고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 진주야, 사랑하는 아빠다 !! 어제 제 딸에게 다음과 같이 메일을 보냈는데, 즉 "니가 결혼을 앞두고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날 때, 항상 이것을 생각해라. 이제는 부모에게 묻지 말라" 라고 말이다. 결혼은 에베소서 5장에 보면 '부모를 떠나서'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면 부모를 떠나서 혼자 사는 것인가? 그게 아닌데, 그 동안은 부모와 함께 있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으로 했는데, 이제는 주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엡 5: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그래서 남편을 공경해도 주 안에서 해야하는데, 아내사랑도 그렇고 말이다. 그냥 사랑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주 안에서' 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우냐는 것이다. 처녀총각들이 '주 안에서' 라는 것을 모르니, 그냥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와 함께, 그렇게 여긴다는 것이다. 용돈을 주는 부모와 함께 있는 것이 버릇이 되어서, 결혼을 해도 '주 안에서' 라는 것을 모른다는 말이다. 그래서 보증설 일이 있으면 부모에게 달려와서 서류를 내밀고 말이다.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의지하려고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친정에 와서 남편이 때린다고 하면서 질질 짜고 하는데, 그러면 화끈한 엄마라고 하는 "그냥 이혼해라. 그 사람이 아니면 어디 남자가 없나?" 라고 하고 말이다. 그리고 또 부모는 자식이 걱정이 되어서 미리 전화를 해서 "야야, 요즘 힘든 일이 없나? 아를 내가 좀 돌봐줄까?" 라고 하고 말이다. 그러니 '주 안에서' 라는 것을 찾을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에서는 "주 안에서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되어라 " 라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너희들이 맺어진 것은 주님의 업무다. 너희들이 큰 것도 주님이 키워주셨다는 것을, 그것을 부모를 떠나서 소급해서 깨달아라. 부모가 너희들을 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너희 부모의 손을 통해서 밥을 먹여주고 키워주셨다" 라는 것이다. 그것을 이제 어른이 되어서, 자기가 아내와 남편을 만나면서 "아하, 주 안에서 사는 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 나는 아버지 안에, 아버지는 내 안에 !! 이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는가? 그동안 '함께' 있었는데, 하지만 이렇게 함께 있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것이다. 이제는 주 안에 있어야 하는데, 그 바탕이 무엇인고 하니, 아까 10절에 있었는데, 즉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있다" 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아버지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아버지는 있는", 그런 상태로 말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무슨 발언을 하지 않는가? "내 안에 내가 있다" 라는 소리를 하는가? 결코 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인가? "내 안에 내 것만 들어있다" 라는 말이다. 남이 들어온다는 것을 어림도 없다는 것이다. 어린애들을 보라는 것이다. 아무리 할머니가 그렇게 잘해줘도, 자기가 싫으면 그냥 "할머니, 미워!" 라고 바로 나온다는 것이다. "왜 그래?" 라고 하고 말이다(ㅋㅋ). 그렇게 어릴 때부터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짜 하나님의 장자가 되시는 예수님은 무엇인가? 아버지가 없는 자기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아버지도 자기가 없이는 아버지가 아니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내가 되기 위해서 아버지가 있어야 하고, 아버지가 되게 위해서 내가 있어야 한다" 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 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나'만 있으면 '나' 라는 존재는 밝혀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 창조했을 때의 인간은, 즉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은, 그것은 곧 '예수 안에' 있는 인간만이 하나님께서 영원히 버리기 싫어하는, 영원토록 천국에서 함께 살고 싶어하는, 그것을 '인간'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창조 때의 그 인간만이 진짜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런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셔야만, 그리고 성령이 와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 '예수님다움'은, 아버지만 있으면 'OK' !!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러면 목사님, 우리가 어떻게 살 때 주 안에 있다고, 또 어떻게 살아야만 주 안에 있는 것이 유지될 수 있습니까?" 라고 하는데, 갑자기 그런 쓸데없는 걱정들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에게 있어서, '예수님다움'은 예수님 본인이 결정한 게 아닌데, 예수님 본인이 애를 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 탕자가 믿는 것은? 탕자가 비록 돈을 다 날리고, 친구들과 기생과 어울려서 허랑 방탕하게 살다가 나중에는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도 먹고 했지만, 하지만 탕자가 하나 믿은 것은 무엇인고 하니, 비록 자기는 탕자이지만 아버지까지는 탕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아버지가 있는 이상 자기는 영원한 아들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그런 비유를 들었다는 것이다. 비록 본인은 자식이 아니라고 여겨도, 아버지가 기다리는 이상 "너는 영원한 내 자식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 관계가 곧 언약인데, 바로 그 사이를 승계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려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을 하심으로 말미암아서, 아들도 아닌 자들이 감히 영원히 아버지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마치 예수님 본인이 아버지의 아들이 된 것처럼, 아들이 아닌 자들도 예수님처럼 아들이 된다는 말이다. '아바 아버지' 라고 부를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과 예수님의 생각이 얼마나 깊고 진지하고 성의가 있느냐는 것이다. 성실하고 말이다. 반면에 우리는 그야말로 천방지축인데, 교회에 와서는 아멘을 연발하지만 집에 가서는 다 잊어버리고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살아가는 것이, 자기만 잘나고 편하고 행복하면 되는데, 자기만 배가 부르면 천국이라고 여기는데, 하지만 주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해야만 천국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고, 내 자매이고, 내 모친이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만이 말이다. 바로 그럴 때 주 안에서 영원히 함께 살아갈 수가 있다는 말이다. (마 12:47)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 아무리 좋아도, 모든 것이 '주 안에서' !! 제가 조금 전에 고린도전서 15장을 이야기했는데,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그리고 흙에 속한 자는 흙에 속하고, 하늘에 속한 자는 하늘에 속하고 말이다. 정말로 기분 좋은 이야기인데, 하지만 것도 마지막 58절에 보면 '주 안에서'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땅에서 주 안에 있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지, 바깥에 있는 자들에게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말이다. (고전 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그러면 어떤 자들이 과연 '주 안에' 있는 자들인지, 그것을 "어떻게 할까?" 라는 문제가 아니라, "어떤 것이 주 안에 있기" 라는 것이다. 즉 "이렇게 해야 유지가 된다" 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으로서 처음부터 주 안에 있는 사람인가?" 라는 문제라는 말이다. 여기 요한복음 14장 12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면 이것을 오해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것부터 먼저 살펴보자는 것이다. ◈ 우리의 오해는? '내가 믿어야' !! 여기 1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어라" 라고 하시는데, 바로 이것을 가지고 "내가 믿어야 아버지의 일을 할 수 있다" 라고 해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전형적인 이 말씀에 대한 오해라는 것이다. (요 14: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그러면 오해가 아닌 해석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로마서 9장을 할 때 나왔는데, 그것은 바로 '그릇' 이라는 것이다. 사발, 혹은 대접이란 말이다. 알다시피 그릇은 비어있는데, 그러니 그릇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과연 무엇이 담겨 있는가?" 라는 것이 관건이라는 말이다. (롬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 빈 그릇이 요란하면 곤란해 !! 여기 요한복음 14장 12절에서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라는 것은, "너는 빈 그릇에 불과하고, 즉 너는 의자에 불과하다" 라는 것인데, 거기서 누가 앉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고 하니,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라는 것인데, 그러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이미 약속한 것이 있고, 그 약속한 것이 성취가 되는 족족 어디에 담기는고 하니, 여기 그릇에 담기게 되는데, 그러면 우리는 놀라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어찌 이런 놀라운 일을 했을까? 예수님께서 하신 것보다도 더 큰 일을 했구나" 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지상에 예수님이 하신 것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되는데, 베드로고 그렇고 사도바울도 그렇고 말이다. 그들이 복음을 전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은 엄청난 일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큰 모든 일은 결국 누가 하신 것인가? 아버지와 아들의 약속에 의해서, 그 약속대로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대로 행했다는, 마치 방앗간에서 쌓을 넣으면 떡가루가 나오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담는 그릇이 바로 우리 성도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논리적이고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가는데 앉은뱅이가 구걸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 사람들은 기대를 하면서 주시하고 있었는데, "저 사도들이 무슨 일을 할까?" 라고 하면서 말이다. ◈ 우리는 그런 재주가 없어 !! 하지만 사도들은 재주를 부릴 줄도 모르고, 그럴 권한도 없고 방법도 사실 없다는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른다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앉은뱅이에게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주셨다는 말이다. 그러면 사도는 무엇인가? "예수님이 너에게 힘을 주었잖아. 그러니 털고 일어날 수 있지? 우리가 이야기하면 걸어봐. 우리는 돈도 없고 오직 예수 이름밖에 없어" 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라" 라는 의미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눈에 보이는 사도가 한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분이 하셨는데, 주님의 믿음으로 인해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것은 앉은뱅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결코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자기는 창세 전부터 구원을 받아야할 자이기에, 그렇게 아다리가 되었다는 말이다. 마침 사도를 만나게 되었고, 예수님 소식을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미 구원을 받기로 작정이 된 자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사도를 거기로 파견하셨다는 말이다. (행 3: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 고넬료도 천사가 다리를 놓아서 !! 고넬료의 경우에, 그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천사가 와서 베드로와 고넬료 사이에 다리를 놓았는데, 이런 모든 일에 대해서 사도는 하나의 그릇으로 사용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우리도 역시 싱크대 위에 놓인 그릇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우리의 힘으로는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행 10: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명절이 되어서 자식들이 집에 다니러 오면, 자기가 복음을 전해서 구원을 시키려고 하지 말고, 그냥 주님의 지시에 따르면 된다는 것이다. 이런 모든 상황도 다 주님이 주신 것이라고 편안한 마음으로 자식들을 대하면, 그게 바로 복음적인 모습이라는 것이다. 물론 성질이 나면 또 성질을 부리면 되고 말이다. 그러면 자식들은 삐쳐서 곧 바로 서울로 올라가든지 하겠지만 말이다(ㅋㅋ).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건수 하나를 올리는 차원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도, 바로 위에서 내려오는 떡가래를 담는 하나의 그릇으로서, 그런 용도로서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그렇게 사용을 하시겠다면 우리는 어쩔 수가 없는데, 그것을 두고 '주 안에서' 라고 한다는 말이다. ◈ 가만히 있어라. 내가 한다 !! 더욱 더 친절을 베풀어서 매우 알기 쉽게 이야기를 한다면, "내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었던 일을 적용을 시키는 빈 그릇으로 너희들을 일방적으로 사용하겠다" 라는 것인데, 그리고 그 뒤에 그것을 인정하라는 의미에서 '믿어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빡시게 믿으면 일이 된다" 라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에 대해서 너희들은 반드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될 것이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일들은 다 어떠한가? "너희들이 한 것이 아니다. 가만히 있어라. 내가 한다" 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다 알아서 어떻게 하시는가? "내가 너희로 하여금 반드시 나의 증인으로 만들고야 만다. 그러니 너희는 거기서 감탄만 하고 찬양만 하고 놀라움을 표하기만 하면 된다. 알겠지?"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 그것이 요한복음 14장 16절에 나오는데, 이게 바로 정답이란 말이다. 전국노래자랑에 나가면 '딩동댕' 인데, 바로 그렇다는 말이다. 우리를 완전히 빈 그릇으로 만들어서, 예수님이 아버지께 구해서 다른 보혜사인 성령이 오게 되면, 영원토록 함께 하겠다는 것이다. 즉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라고, 그렇다는 말이다.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그러니 모든 것은 다 주님이 알아서 하신 것인데, 주님의 솜씨이고 작품이란 말이다. 우리는 도화지인데, 주님께서 그림을 그리는 말이다. 2013년 10월 21일을, 그렇게 도화지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변곡점을 거쳐서, 어떤 꼬부랑길로 왔던 간에 주님과 함께, 아니 주님 안에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물로서, 그런 주님의 작품으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 '그 날'이 언제인가? 그런데 여기 20절에 보면, '그 날에는' 라고 하는데, 그 날이 도대체 언제인가? 이것이 '예수 안에서' 라는 대목에서 마지막으로 남는 부분인데, 이 지상에서는 어제와 내일 사이를 두고 '날' 이라고 표현하는데, 그런데 묵시의 세계에서는, 즉 '주 안에' 있으면 이미 천국에 들어온 상태를 두고서 '날'로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요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그러니 지상에서는 천년이 흐르던 만년이 흐르던 상관이 없는데, 즉 주님이 활동하신 자국이 있으면 '그 날'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날인지 아닌지는, 주님의 활동을 느낄 수 있는지 없는지, 거기에 달려있다는 말이다. 주님의 활동을 느끼지 못하면 오늘은 자기의 날이 되지만, 주님의 활동을 느끼고 믿게 되면, 오늘은 자기 날이 아니고 그 날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작업하시는 그 날이 되기 때문에 말이다. 이렇게 '날'의 개념이 정립되면, 날은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여기서 부글부글 끓는, 언제나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상태를 '그 날'로서 표시를 하셨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주와 함께 있는, 주 안에 있는 그 날로서 말이다. ◈ 바깥에는 '나' 라는 귀신이 기다리고 있어 !! 그러니 "주 안에 있다" 라는 것은, 오늘 죽어도 주 안에 있고, 내일 죽어도 주 안에 있고, 모래 죽어도 역시 주 안에 있다는 것이다. 즉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 라는 그 어려운 성경말씀이 주님의 지속적인 기능에 의해서 해소가 된다는 것이다. 만약에 해소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 안에' 있을 때인데, 그때는 "주님, 제가 얼마나 더 착해져야 천국에 갑니까?" 라고 하면서, 갑자기 자기의 시간대로 흐르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 '주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만 '주 바깥에' 있다는 것이다. 그 바깥에는 '나' 라는 귀신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러면 '나' 라고 하는 말을 '나' 자신이 기수가 되어서 타고 달린다는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오늘은 내가 이렇게 착했는데, 그러면 내일은 얼마나 더 착해야 복을 받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자기 말을 자기가 열심히 탈 수밖에 없는, 주님 바깥에 있는 자의 모습이란 것이다. ◈ 죽은 세상, 산 성도 !! 이렇게 '주 바깥에' 있게 되면, 이제 마지막으로 이 대목만 보고 마치겠는데, 갈라디아서 6장 14절인데, 여기서 뭐라고 하는가? 복음을 모를 때는 "내가 어디에 있는가?" 라는 것이 중요한데, 복음을 알게 되면, "아하, 주님께서 이 말씀대로 만들었구나" 라고,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당연히 주 안에 있는 사람이란 말이다.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그런데 그게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하면 십자가에 들어가지?" 라고, 자기가 자꾸만 들어가려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 안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는 사람인데, 우리는 백 날을 해도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주님께서 만들게 되면, 세상에 대해서는 자기가 죽은 자가 되고, 세상도 자기에 대해서 죽은 세상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의 책 가운데 '죽은 세상, 산 성도' 라는, 옛날에 그런 책이 있었다는 말이다. ◈ 해골이 과소비를 했구나 !! 아무튼 '주 안에' 있으면, 자기는 세상과 더불어서 죽은 자가 되고, 주님과 더불어서 죽어도 산 자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비로소 납득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때는 '살았다' 라는 게 아니라, '죽었다' 여기고 살아가면 된다는 말이다. 죽은 놈이 무엇을 못하겠는가? 아니 말을 잘못했는데(ㅋㅋ), 죽은 자가 도대체 무엇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비싸고 좋은 옷을 걸쳤다면, "해골이 과소비를 했구나" 라고 여기면 되고, 넓은 아파트를 마련했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죽은 자에게 더 편안하게 죽으라고 이런 아파트를 주셨구나" 라고 여기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족 중에서 누군가가 아프면, "죽은 자로 하여금 간호를 하도록 하시는구나" 라고 여기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이것을 고치면 구원을 받습니까? 못 고치면 지옥에 갑니까?" 라고, 자기 말에 자기가 말대꾸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에 스토리가 있고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데, 우리는 우상 숭배자와 같아서 정성만 다하면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주님의 계획으로 가득 차 있음을 증거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3,11,7 오후 5시에 마침. '예수 안'에 있어야 하는데, 매일 '가게 안'에만 있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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