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뜻

자살충동070214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3. 10. 16:32

자살 충동

사람들은 왜 자살할까? 화를 내고 있을 때 자살하게 된다. 왜 화가 날까? 세상이 자신의 가치를 안 알아주니, 머리 끝까지 화가 났고, 그 화를 풀 데가 마땅치 않아 차라리 화를 내고 있는 자기 자신을 죽이고 싶은 것이다.

이 세상에는 하루하루를 화를 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만큼 주위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 소홀히 대하고 애정(愛情)이나 관심을 안 가져준다는 이야기도 된다. 요즈음 들어서 젊은 이 사이에는 홀로 시간 보내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모양이다.

주변으로부터 애정 얻기를 고대하는 것을 차라리 포기하므로서 스스로 우울증을 이겨내려는 한 방편으로 간주된다. 이런 경향은 일찍이 소위 성직자들 속에도 자리 잡고 있다.

왜 성당의 신부들이 왜 민주화 투쟁을 하고 친북성향을 가지고 통일 문제에 깊이 관여할까? 그들에게는 자기 성당 내의 숱한 신자들이 있을 것이고 그들을 돌아보고 신앙을 독려하기도 분주할 텐데 무슨 시간이 남아돌아서 그런데 까지 신경 쓸까?

그들은 무척 외롭다. 숱한 인파 속에 있다고 해서 덜 고독한 것이 아니다. 대화가 안 되면 누구나 외로운 법이다. 신부들 중에서는 신도들의 두둑한 지갑에나 신경 쓰는 대다수의 무당 같은 신부들은 민주화 투쟁에 관심 없다. 그들은 그 지역의 유력한 자를 신도로 확보하기 위해 평소에 친분을 쌓고, 더 나아가서 성당 확장 공사나 리모델링에 필요한 자금 확보에만 분주할 뿐이다. 이들에게는 외로울 시간이 없다.

하지만 소위 엘리트 신부들에게 성당 내에 대화할 상대가 줄어들어서 안타까워한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점점 타인과 의사소통이 안 된다. 격이 차이지기 때문이다. 이는 그 사회에서의 사망 선고를 받는 느낌을 갖게 한다.

즉 인간에게 있어 자아란 본인이 임의로 설정한 관념이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진 정체성을 내용으로 하여 다져진 관념이다. 그런데 그 사회가 자신에게 아무도 말을 안 붙이거나 못 붙일 때, 그 사람은 사회적인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소외이다. 신체적으로 살아 있으나 사회를 그 사람을 요구하지 않기에 실은 죽은 자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엄연히 살아있는 신체를 가지고 죽은 자처럼 살려니 여기에 화가 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엘리트 신부들은 건전하다고 간주되는 명분에 몸을 던진다. 그것도 사회적으로 이슈가 될 만한 사건 한 복판에다 자기 자신의 몸을 폭탄으로 간주하여 집어넣으므로서 간접적 자살을 감행한다. ‘평택 미군기지 이전 반대 투쟁’ 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명분도 얻고 자신을 안 알아주는데서 오는 화풀이 감도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 신부나 목사라는 성직자들이 이 사회를 향해 화를 낼 자격이 있는 것인가?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피가 담간 십자가를 구원의 능력으로 건네 주셨다. 로마서 5:8에서는 ‘그 십자가 사랑’으로 하나님의 모든 사랑을 확정지어졌다고 되어 있다. 게다가 또 반가운 소식 중에는 우리 예수님께서 천군천사를 대동하시고 구름 사이의 나팔소리와 함께 이 세상을 두 번째 방문 하신다는 소식도 들어있다. 또한 성령으로서 날마다 우리로 하여금 정과 욕심을 십자가 못박아 주신다고 하셨다.

이런 활발한 하나님의 활동을 생각하면서 병행해서 도대체 어떻게 자신에게나 사회에 대해서 화를 낼 수 있단 말인가? 결국 성직자들은 그동안 분주하게 목회 활동은 하고 있으나 본인 스스로는 전혀 신앙생활을 안 하고 왔다는 것이 들통 나게 되는 것이다. 목회자 본인이 목회 하는 방법은 아는데 신앙생활은 어떻게 해야 될 지 난감한 것이다.

그래서 교회 일에 분주할 때는 목회술이라는 기능 발휘에 푹 바빠서 신앙은 안중에도 없다가 막상 어느 시점부터 목회자 본인의 말이 교인들이나 다른 이에게 전혀 먹혀 들어가지 않아서 졸지에 외톨이로 남게 된 순간, 도대체 본인조차 신앙생활은 어떻게 하는지를 알 수가 없는 상태가 된다. 그동안 쭉 자기를 키우는 방향으로 자기 완전함에다 모든 것을 투자해 온 터라 자기 자신 외에 달리 신봉하고 기쁘게 따를 만한 분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목회자가 서서히 자폐 증세를 드러내는 시점이 이 시점이다. 자발적인 칩거에 들어간다. 세상에 나를 버리기 전에 내가 먼저 세상을 버림으로서 내가 패배했다는 의식은 안 갖는 최소한 자존심은 건져보겠다는 것이다. 세상을 향하여 일종의 복수를 감행하는 것이다. “나 같이 가치 있는 존재를 못 알아 보다니, 이 더러운 세상아 (혹은 교인들아), 어디 너희가 얼마나 잘 되는가 한 보자”라는 식이다.

신앙생활의 입구는 자신을 죄인으로 보는 눈이 열리는 것이다.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욥 40:4) 즉 신앙생활에는 자아가 필요 없다. 주님만 눈에 띄면 그만이다. 자신에 대해서는 누군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무관심해야 한다. 단지 자아란 ‘어떤 한 사람’일 뿐이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고후 12:2)

주님의 시선으로 볼 때 자아란 곧 타인 중의 하나일 뿐이다.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나’라는 그 타인에게 평소에 무엇을 주문하고 무엇을 지시하고 계신지를 아는 것이다. 이처럼 주님과 늘 분주하게 주고받았으면 자기 자신이나 세상을 보고 화를 낼 것이 아니라 감사함으로 복음을 받고 세상에서 대해 늘 복음의 빚진 자 입장에서 서서 때를 가리지 않고 복음 전파하기에 환장하게 될 것이고, 자신의 죄성에 대해서 깊이 인식하여 주님 앞에서 고개 낮추는 생활을 해왔을 것이다.

즉 외롭기 보다는 ‘어떤 한 사람=자신’의 죄를 아는데도 시간이 모자랄 정도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외로움을 지워버리는 방식으로 십자가 피를 동원하신다. 그 앞에서 인간은 그 사랑의 규모의 엄청남에 혼절하면서 스스로 자기의 입을 가리게 만든다. 즉 자신의 무지함과 무식함을 아는 순간, 자실 충동도 달아나고 “주여, 너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을 쏟아놓기에 분주하다.

목회자의 목회란 성도들을 붙잡고 화풀이하듯이 설교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죄인됨과 주님의 십자가 용서의 위대함을 그 자리에 부어놓는 것이다. 이런 목회는 교인들에게 은근히 반대급부를 기대하지 않는 목회이다. 자신의 카리스마나 권위의 덫에 교인들이 무심코 말려들기를 고대하는 그런 음흉한 목회가 아니다.

복음을 아는 자는 새삼 자살할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이미 주님께서 그를 죽은 자로 단정지으시고 다루시기 때문이다. 행여 조금이라도 신자가 자신을 ‘산 자’ 행세하면 가차 없이 주님께서 그 성도를 뜻을 뭉개버려서 본래의 ‘죽은 자’ 자리로 눕혀놓으신다. 그래서 허상에 불과한 자아로부터 ‘주님의 것으로서의 성도’가 시달림을 당하지 않게 하신다.

이미 성도에게는 죄만 가득 들어있다. 이미 용서로 처리된 죄이기에 주님의 십자가 피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용도로 되풀이 되어 발생되는 죄들이다. 이 죄를 더 깊이 알고 전하므로서 성도는 이 세상을 분주하게 살아간다. 사회에 대해서 화를 내거나 자살할 생각도 안 날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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