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지키기 전쟁
2025년 7월 23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15:16-22
15:16 아사와 이스라엘 왕 바아사 사이에 일생 전쟁이 있으니라
15:17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와서 라마를 건축하여 사람을 유다 왕 아사에게 왕래하지 못하게 하려한지라
15:18 아사가 여호와의 전 곳간과 왕궁 곳간에 남은 은금을 몰수히 취하여 그 신복의 손에 붙여 다메섹에 거한 아람 왕 헤시온의 손자 다브림몬의 아들 벤하닷에게 보내며 가로되
15:19 나와 당신 사이에 약조가 있고 내 부친과 당신의 부친 사이에도 있었느니라 내가 당신에게 은금 예물을 보내었으니 와서 이스라엘 왕 바아사와 세운 약조를 깨뜨려서 저로 나를 떠나게 하라 하매
15:20 벤하닷이 아사 왕의 말을 듣고 그 군대장관들을 보내어 이스라엘 성들을 치되 이욘과 단과 아벨벧마아가와 긴네렛 온 땅과 납달리 온 땅을 쳤더니
15:21 바아사가 듣고 라마 건축하는 일을 그치고 디르사에 거하니라
15:22 이에 아사 왕이 온 유다에 영을 내려 한 사람도 모면하지 못하게 하여 바아사가 라마를 건축하던 돌과 재목을 가져오게 하고 그것으로 베냐민의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하였더라
하나님의 전쟁을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맡기신 적이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하고 하는 전쟁이 아니기에 하나님께서 직접 챙기십니다. 인간이 인간적으로 벌리는 전쟁은 필히 인간들이 자기 공적과 공로를 내세우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애초에 전쟁할 그 어떤 명분도 자격도 없습니다.
창세기 3:15에 보면,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전쟁 주체자는 애초부터 벌써 결정되어 있습니다. 악마와 전쟁에서 인간은 빠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세상은 모조리 다 인간 대 인간끼리의 전쟁으로 보이는 양상입니다. 모든 인간이 같은 인간들 끼리의 전쟁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그것은 더 많은 생존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 자신이 가진 에너지를 밑천으로 삼아 투자에 나서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소모한 에너지보다 몇 배 더 많은 에너지로 얻어서 다음의 더 큰 전쟁을 기약합니다.
세상의 모든 왕들은 자기 위상과 백성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이런 차원에서 전쟁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늘 성공적인 전쟁을 하는 왕은 백성들의 충성심을 보다 많이 확보하여 자신의 자리가 든든해진다고 계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전쟁은 개인의 명예나 권력 확보용 전쟁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사왕은 선지자 하나니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같은 인간을 의지했습니다. “ 때에 선견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에게 나아와서 이르되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한고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구스 사람과 룹 사람의 군대가 크지 아니하며 말과 병거가 심히 많지 아니하더이까 그러나 왕이 여호와를 의지한고로 여호와께서 왕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아사가 노하여 선견자를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 말에 크게 노하였음이며 그 때에 아사가 또 몇 백성을 학대하였더라”(대하 16:7-10)
선견지의 요지는 이러합니다. 아람왕은 본디 다윗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넘겨준 선물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인간의 전쟁이 되지 않기 위해 천사들이 동원됩니다. 야곱이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창 32:1-2)
야곱 이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리사 선지자 시대에도 천사가 하나님의 전쟁에 개입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수종드는 자가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쌌는지라 그 사환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대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 6:15-17)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전쟁에 의해 획득물은 이스라엘에게 선물로 주셨고 그 주변 나라들은 다윗 때와 솔로몬 때에 조공을 바치고 평화를 유지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선물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윗 이후의 왕들은 이스라엘은 자신의 공적의 치하성으로 전쟁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와중에 아람이라는 나라는 이스라엘의 통치성에서 이탈했고 도리어 유다 나라가 아람 나라의 의존하는 위치에 놓이게 된 겁니다. 이처럼 인간이 끼일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전쟁의 특성을 왕들은 자신의 위신용으로 전락했습니다.
‘인간이 낄 수 없음’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인간의 에너지’에 기반을 두지 않는 전쟁으로 나타난 적이 있습니다. 바로 ‘여성에 의한 전쟁’이 그것입니다. 사사기 4장에서, 남성인 이스라엘의 군대장관 바락이 도저히 자신은 전쟁을 진두지휘할 자신이 없다고 하면서 여성인 선지자 드보라에게 지휘권을 넘깁니다.
실제로 가나안의 종족인 왕을 최종 제거하는데 있어 어느 한 시골 여성인 야엘에 의해서 실행됩니다. 여성에서 시작한 전쟁이 여성으로 끝냈습니다. 이는 인간의 에너지의 개입과 무관한 것이 하나님 나라의 전쟁이라는 겁니다. 신약에 들어와서 에베소서 4:8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예수님의 혼자만의 공로로 인해 악마에 손에 잡혀 있는 자기 백성을 무사히 끄집어 낼 수가 있었던 겁니다. 주님은 남성없이 여성을 통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따라서 기존의 남성들인 다윗의 혈육적 왕들과 달리 무사히 하나님 나라 전쟁을 홀로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성도가 할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신랑되시는 예수님에게만 공로가 돌아가게 하시는 겁니다. 인간이 자신을 빛내는 데 조명을 비출 수는 없습니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마 25:1-4)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에너지를 활용해서 자기 인생을 자기 관리 하에 두고자 합니다. 이런 태도는 성령이 없는 일반인들도 다 하는 겁니다. 이들의 모든 활동은 자신의 가치를 지키고자 필사의 노력을 합니다. 하지만 이미 이 세상의 힘이 악마에게 넘어가 있고 또한 악마는 각 인간들에게 ‘죽음의 공포’로 가지고 다루게 됩니다.
따라서 친히 악마의 속까지 틀어가셔서 무사히 그 악마의 권세를 뿌리치고 벗어난 예수님의 능력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구원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모든 공로를 오로지 예수님에게만 돌리는 그런 ‘영적 전쟁’을 수행하게 됩니다. “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엡 6:12)
이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나라의 전쟁의 용사는 우리 주님이십니다.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출 15:3)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힘을 빼고 주님만 의지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0강-열왕기상 15장 16-22절(선물 지키기 전쟁) 250723-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15장 16-22절입니다.
열왕기상 15:16-22
“아사와 이스라엘 왕 바아사 사이에 일생 전쟁이 있으니라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와서 라마를 건축하여 사람을 유다 왕 아사에게 왕래하지 못하게 하려한지라 아사가 여호와의 전 곳간과 왕궁 곳간에 남은 은금을 몰수히 취하여 그 신복의 손에 붙여 다메섹에 거한 아람 왕 헤시온의 손자 다브림몬의 아들 벤하닷에게 보내며 가로되 나와 당신 사이에 약조가 있고 내 부친과 당신의 부친 사이에도 있었느니라 내가 당신에게 은금 예물을 보내었으니 와서 이스라엘 왕 바아사와 세운 약조를 깨뜨려서 저로 나를 떠나게 하라 하매 벤하닷이 아사왕의 말을 듣고 그 군대장관들을 보내어 이스라엘 성들을 치되 이욘과 단과 아벨벧마아가와 긴네렛 온 땅과 납달리 온 땅을 쳤더니 바아사가 듣고 라마 건축하는 일을 그치고 디르사에 거하니라 이에 아사왕이 온 유다에 영을 내려 한 사람도 모면하지 못하게 하여 바아사가 라마를 건축하던 돌과 재목을 가져오게 하고 그것으로 베냐민의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하였더라.”
무슨 이야기냐? 남쪽과 북쪽이 싸움하는데 북쪽 바아사 왕의 군사력이 대단히 강했어요. 그래서 비겁한 남쪽 아사 왕은 자기가 북쪽과 직접 전쟁하지 않고 당시 대국인 아람 왕 벤하닷에게 뇌물을 바칩니다. 아람은 이스라엘 북쪽의 나라인데 지금의 시리아입니다. 그 아람에 뇌물을 주고 이스라엘의 북쪽에서 압박을 가하게 한 거예요. 일종의 용병이지요.
예를 들어 북한하고 남한하고 전쟁하는 데 우리나라 대통령이 중국 시진핑한테 금은보화를 주면서 중국이 북한을 공격하도록 하는 식입니다. 그 전에 북한의 김정은이 뭘 했느냐? 북한 사람들이 남쪽의 한국으로 자꾸 귀순을 하니까 휴전선 근처에 종합검문소를 크게 지어서 한 사람도 남쪽으로 귀순하지 못하게 하면서 군대를 집결시켰어요.
그랬는데 이스라엘의 북쪽에서 중국이 쳐들어오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수도가 북쪽에 있으니까 방어하기 위해서 후다닥 휴전선 근처에 있던 군대를 다 빼느라 건축자재니 이런저런 것들을 다 놓고 가버렸지요. 그러니까 남쪽의 건설사들이 그 남아 있는 건축자재로 필요한 여러 건물을 지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아사 왕은 ‘앗싸!’ 이번 기회에 적은 적대로 물리치면서 경제는 경제대로 회복을 도모하는 정치적 계산을 했는데 예상대로 딱딱 맞아떨어져서 기분이 좋았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방금 죽 이야기한 가운데 ‘하나님’ 언급은 없었지요.
과연 하나님 믿는 유다 나라가 하나님 없는 전쟁방식으로 그 왕국을 유지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계시를 믿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이 떠나지 않는 나라라고 자처하면서도 행정 하는 그 꼴을 보면 완전히 하나님을 배제하고 그저 인간들의 아이디어에서 나오는 것으로 정치를 했잖아요.
아사 왕이 그렇게 한다는데 백성들로서는 아무 소리도 못 하지요. 백성들이 아무 소리도 못 할 때 그래도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을 배제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 나라와 같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그 자체가 저주입니다.”라고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에 근거해서 이야기해야 할 사람이 있겠지요.
그 사람이 열왕기상에는 안 나오는데 역대하 16장에는 나옵니다. 7절에 “때에 선견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에게 나아와서 이르되…” 왕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나왔어요. “…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한고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한고로’ 딱 이 한마디. “왕은 지금 사람과 하나님 둘 중에서 누구를 의지해야 하는가, 그 속셈을 이번 전쟁을 통해서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니까 왕은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고 힘 있는 사람을 의지했습니다.”라고 딱 지적해요.
그러면 나나 여러분이 왕이라면 “그래, 했다. 왜! 네가 뭔데?” 이렇게 나오겠지요. “내가 왕이냐, 네가 왕이냐? 내가 왕이다. 왕이 왕의 뜻대로 합리적으로 했다.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므로 그런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선지자가 왕의 권세에 너무 대드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너 맞을래?’ 이런 식으로 나온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니 선지자가 왕 보고 하는 말이 역대하 16장 9절에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즉 ‘이제부터 당신이 전쟁만 내내 하도록 조치했습니다.’
선지자는 개인적 감정은 없어요. 그냥 전달할 것만 전달하는 거예요. 군대에 ‘PX(Post eXchange)병’이라고 있지요. 군대 편의점, 군의 다이소, 거기서 일하는 병사가 나라 걱정할 일 있습니까? 자기는 돈 받고 물건이나 팔면 근무 끝이에요. “복숭아 통조림 얼마입니까?” 하면 그거 내주면 되고요, 오징어포나 소시지 달라면 그거 팔면 되고, 크림빵 달라면 그거 팔면 되지요. 매점의 병사가 대법원장 노릇하고 국회의장 할 필요 없잖아요.
선지자는 하늘나라 PX병이라 보면 됩니다. 이 세상 제일 팔자 편한 사람이 군대의 PX병이잖아요. 아침에 매점으로 나가서 물건이나 팔면 되니까요. 선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지자는 왕과 달리 하나님만 의지했어요.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한결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나와요.
그런데 이 왕이라는 작자, 이 아사 왕이라는 작자는 자꾸 어떤 소유가 있어요. ‘국가를 내가 어떻게 관리해 볼까?’ 곧 백성들로부터 내가 인기 끌고, 칭송받고, 존경받는 왕이 되고자 해서 자기한테 관심이 되게 많은 거예요. 정확하게 말해서 왕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고, 아람 왕을 의지한 것도 아니고 본인을 의지했던 겁니다.
본인의 가치, 본인의 위상, 본인의 의미 오직 자기밖에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만 의지해놓고는 “나는 하나님을 의지한다. 믿습니다.” 이러고 있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보시기에 같잖고 가소롭지요. “이게 어디서 거짓말을! 너는 너 의지해. 나 의지 안 했어. 어디 볼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주 센 군대를 갖고 있는 북쪽 바아사 왕을 통해서 남쪽 유다를 침범해서 전쟁하도록 한 겁니다.
‘라마’라는 곳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불과 8킬로미터 떨어졌어요. 얼마 안 되잖아요. 두 시간이면 얼추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 아닙니까? 거기다 강력한 부대가 딱 버티고 있으니까 아사 왕이 쫄았던 거예요.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계산에 하나님이 안 도와줄 것 같은 계산이 섰던 겁니다.
그리고 시일이 너무 촉박해요. 너무 가까이 왔어요. 그래서 북쪽보다 더 센 것이 지금의 시리아, 아람이지요, 아람 왕에게 도와달라고 곳간의 재산을 다 바쳐서 협상을 한 겁니다. 아람 왕이 바보가 아니잖아요. 인간이 인간을 의지할 때 서로가 바보가 아니에요. 협상할 때 처음부터 뭘 다 주겠습니까?
아람 왕이 “나는 우리나라 국익이 먼저입니다. 관세 50퍼센트 매기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면 “북한이 쳐들어와서 우리 사정이 너무 급하니 좀 봐주소” 하겠지요. 그러면 “한국의 금은보화 다 가져와 보세요.” 이런 식으로 해서 도와준 거지요. 하나님이 없다고 치고 누가 왕 자리에 있다고 해도 기껏 나올 수 있는 아이디어는 그것밖에 없습니다.
성경의 전쟁에서 너무나 인간적인, 너무나 상식에 입각한 통치, 그런 생각을 끄집어냈다는 것에 대해서 “아사 왕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라고 하면 아사 왕이 우리보고 이렇게 이야기해요. “네가 그 당시로 가서 왕 해봐라. 나랑 똑같이 결정했을 것이다. 제 3자 입장에서 말을 너무 쉽게들 한다. 네가 한번 해봐. 너도 마찬가지라고!” 이렇게 도리어 우리를 나무랄 겁니다.
그런데 선지자 입장, 곧 하나님 입장에서 아사왕의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우리가 알아야 해요. 오늘 본문에서 아사 왕의 무엇이 잘못되었느냐 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의 평소 일상생활에서 무심코 나오는 것이 어떤 한계, 어떤 잘못을 품고 나오는지를 봐야 합니다.
사무엘하 10장 18-19절에 “아람 사람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한지라 다윗이 아람 병거 칠백승의 사람과 마병 사만을 죽이고 또 그 군대 장관 소박을 치매 거기서 죽으니라 하닷에셀에게 속한 왕들이 자기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함을 보고 이스라엘과 화친하고 섬기니 이러므로 아람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다시는 암몬 자손을 돕지 아니하니라.”
아람 사람이 다윗이 통치한 이스라엘을 두려워했다고 되어 있어요. 두려워했으니까 다윗이 있을 때는 이스라엘에 조공을 바쳤겠지요. 지금 선지자 입장, 하나님 입장에서는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주변 나라들이 다 그랬지만 아람 사람들이 다윗 때 꼼짝 못 하고 발발 떨면서 조공을 바친 것은 다윗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고 다윗이 갖고 있던 언약, 언약을 높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전쟁에 나서서 패배하게 하신 거예요.
그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뭐냐? 이스라엘은 다윗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아사 왕은 어떤 잘못을 하고 있는가? 이스라엘 나라는 왕 본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은 사울 때도 계속되었어요. 사울이 블레셋과 전쟁할 때, 또는 아말렉과 전쟁할 때 근본적인 사고방식이 글러 먹었어요, 잘못되었다고요.
‘이스라엘은 이 나, 왕이 지키지 않으면 지킬 사람이 없다.’라는 거예요. 너무나 상식적이고 너무나 인간적이지요. 그럴 것 같으면 이방 나라와 똑같이 되지 하나님 나라의 특별함이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이것은 역시 오늘날 우리를 지목하면서 주시는 말씀이에요.
일렁이는 파도 같은 세상의 모든 물결은 하나님께 소속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고 하나님이 이렇게 분명하게 살아서 일하신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우리에게 찰싹대는 잔물결이 늘 밀려오지요. 잔물결 가지고 안 될 때는 센 물결도 들어옵니다.
물결이 이렇게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어떤 입장이냐? 베드로가 바다 위를 걸었잖아요. 바다가 잔잔할 때 좀 걸었던 모양이지요. 그런데 풍랑 센 게 오니까 ‘야, 이건 내가 감당 못 한다.’ 원래 못해요. 원래 인간은 감당 못 하는데 ‘작은 것은 감당하고 큰 것은 감당 못 한다.’ 이렇게 되니까 물에 빠진 겁니다. “왜 너 자신을 보느냐?” 그 말이지요. “너는 원래 감당 못 해!”
여기서 우리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일관된 법칙 하나 정리해 봅시다. “전쟁은 하나님이 친히 하시고 어떤 인간도 전쟁에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전쟁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인생은? 우리 인생의 전쟁도 하나님이 하시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는가?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남자의 후손 아니에요,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과 싸우게 되어 있습니다. 싸움은 이것부터 시작해서 이 자체로 종결돼요. 그런데 인간세계가 뱀에 장악되었잖아요. 마귀에 장악되었어요. 마귀에 장악되었으니까 인간세계에서는 전쟁을 누가 하느냐? 에너지가 많은 쪽이 지도자가 되어서 전쟁해야 된다는 의식이 생겼습니다.
에너지가 많은 쪽이 어디냐? 여자가 아니고 남자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꼭 집어서 뱀의 후손과 싸우는 것은 남자의 후손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이에요. 여자라 하는 것은 그 힘이 남성보다 약합니다. ‘여자의 전쟁’이라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작은 힘이지만 여자도 힘을 보탰다’ 이게 아니고 ‘여자는 아예 힘을 뺐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남자는 자기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지만 여자는 있는 에너지조차도 다 쏙 빠져버렸다, 에너지 없이 전쟁에 나섰다’ 이게 바로 여성이 하는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요한계시록 12장에 입각하면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전쟁이 사람이 하는 전쟁이냐, 아니면 천사가 하는 전쟁이냐?’를 묻는 거예요. “악마의 앞잡이에 대처할 때 인간이 나서지 말고 천사가 나서서 전쟁하도록 해라.” 하나님께서는 그 사실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열왕기하 6장에, 아람 왕이 북쪽 이스라엘을 포위했는데 거기에 엘리사가 있었죠. 엘리사 선지자를 공격했단 말이지요. 감히 인간이 하나님께 속해 있는 선지자를 잡겠다고 공격한 겁니다. 거기에 사환이 있었는데 아침에 보니까 수많은 병사와 말과 병거가 엘리사가 있는 성을 완전히 포위해서 곧 쳐들어올 기세입니다.
열왕기하 6장 15절에 “하나님의 사람의 수종드는 자가 일찌기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쌌는지라 그 사환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거기 있는 그대로 보면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우리는 여기서 죽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절망 가운데 이야기했어요. 그때 엘리사가 하는 말이 열왕기상 6장 16절에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이랬어요. 그러니까 그 이야기를 듣고 사환이 둘러보지 않을 수가 없죠. ‘가만있어 보자. 저쪽에 엄청난 군대가 있다.’ 그런데 보니까 자기 쪽에는 달랑 두 사람밖에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이제 엘리사가 기도를 했습니다.
열왕기하 6장 17절에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엘리사를 두른 이 천군 천사의 군대에 대해서 아람 나라는 몰라요. 사환도 몰랐는데 뭐 알 리가 있어요?
드디어 아람의 공격이 들어왔습니다. 엘리사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하매 엘리사의 말대로 그 눈을 어둡게 하신지라.”(왕하 6:18) 그 눈을 어둡게 하니까 저쪽은 우왕좌왕 난리도 아니죠. 창세기 3장 15절에, 전쟁은 하나님이 일으켰고 동시에 하나님이 개입하셨고 마지막 승리도 하나님의 승리로 가져옵니다.
그런데 아사 왕은 뭐가 잘못됐냐? 자기가 왕이니까 이번 전쟁의 승리, 국토와 백성의 안정과 보호의 공로를 자기 몫으로 돌리려 한 거예요. 인간에게 공로가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겁니다. 이건 봐주는 법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잘했지만 저도 잘했지요?’ 이런 것을 하나님이 봐주지 않습니다. ‘수학 백 점 맞았다.’ 하나님이 봐주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승리할 입장이 애초부터 못 돼요.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 승리를 가져가면 백 퍼센트 마귀의 밥이 돼요. 마귀가 원했던 거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전쟁하거나 뭘 할 때 그만큼 자기 에너지를 쏟아부으니까 그 에너지 쏟아부은 것에 대해서 몇 배나 자기가 벌충, 보충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은행 이자 몇 프로 되지 않는 데 이번에 주식 한 번 해보자. 비트코인 한번 해보자. 내가 신경을, 에너지를 약간 더 써서 근무 시간 2시간 반만 빼서 단타로 넣었다가 뺐다가 하면 은행이나 펀드보다 이자가 훨씬 많이 오지 않겠는가?’ 보상, 뭔가 내 행위에 대한 보상을 노리고 평생토록 게임에, 게임에 몰두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자기가 에너지를 쏟은 만큼 몇 배나 뽑아내려는 의도 없이는 인간이 하루하루 살아가지를 않습니다. 이게 투자 아닙니까? 공격적 투자잖아요. 심지어 이건 예수님 제자한테도 마찬가지였어요. 마태복음 26장 51-52절에 보면,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한다.’ 칼로 해결하려는 자는 칼로 망한다. 집에서 왜 총기를 조립하고 난리입니까? 총기 조립하는 그 방법 몰랐으면, 유튜브 안 봤으면 자기 가정이 파괴될 일이 없었잖아요. 나의 에너지가 나를 파괴시킵니다. 내가 임의로 쓸 수 있는 여분의 에너지가 나를 망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해요.
남성들이 에너지가 있으니까 남성들이 나서요. 이스라엘 왕은 남자잖아요? 왕이 나서서, 남자가 나서서 이것이 왕의 명예로 돌아올 때 그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만, 하나님의 모든 전쟁은 천사가 해요.
창세기 32장에 보면 나옵니다. 창세기 32장 2절에 보면, 야곱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자들을 만납니다.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마하나임, 하나님의 군대가 왜 이 땅에 왔겠습니까? 천사들이 왜 이 땅에 왔겠습니까? 왜 엘리사를 둘러치겠습니까?
이건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재판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본디오가 예수님에게 하는 말이 “나한테 말 잘하면 내가 당신 풀어줄 수 있다.” 이렇게 했어요. 예수님께서 “내가 지금 십자가에서 못 내려가서 당신한테 지금 구걸하는 것으로 보이냐? 지금이라도 하늘의 천군 천사가 와서 날 데려가려고 해.”
하지만 만약에 그 끝의 순간에 휙 돌아서서 십자가 없이 하늘나라 가버리면 이건 누구의 승리냐? 마귀의 승리죠. 마귀가 마지막 쥐고 있는 것은 뭐냐? 인간의 모든 에너지보다 더 센 에너지를 갖고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죽음의 힘입니다. 그 죽음의 힘을 주님께서 무섭다고 돌아서 버리면 예수님 혼자 구원받지 자기 백성인 인간은 못 건지잖아요.
자기 백성은 어디 묶여있습니까? 악마의 권세에 묶여있다고요. 죽음의 권세에 묶여 있잖아요. 죽기를 무서워하는 것에 갇혀 있잖아요. 그러면 그들이 안 무서워할 수 있도록 죽음 속으로 주님이 들어가야죠, 들어가야 해요. 들어갈 때 누가 도와줍니까? 천사들이 도와줬어요. 이 얼마나 아이러니하고 재밌는 현상입니까?
주님께서 겟세마네 기도할 때 천사가 와서 도와주는 거예요. 시험받을 때도 마찬가지고요. “주님이여, 두려워 말고 들어가셔야 됩니다. 이게 아버지와 아들의 약속이잖아요. 주님이 그렇게 쫄아서 되겠습니까?” 이런 식으로요. 지옥에 있는 자기 백성을 건지려면 지옥으로 가야 되는 거예요. 주께서 지옥에 가서 자기 백성을 건지려면 지옥의 힘보다 더 센 힘이 주님의 이름에, 십자가의 피에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끝까지 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끝까지.
낚시할 때 아주 신나서 물 위로 뛰어오르는 고기나 뜰채로 잡는 것이 아니고, 아예 낚싯바늘을 깊숙한 곳에 집어넣어야 큰 고기가 잡힐 것 아니겠습니까? 숨어 있는 고기, 마귀를 잡는 거예요. 주님께서 “너 잡혔어. 꼼짝 마라. 이제는 내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돼.”
지금 그 전쟁을 할 때 미끼가 이스라엘이에요. 하나님이 친히 전쟁한다는 것은 출애굽기 15장에 나옵니다. 출애굽기 15장 3절에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주의 이름이 인간인 이스라엘의 이름과 동행하는데 이스라엘은 그냥 목숨 건사하고 밥 먹고 사는 것밖에 몰라요.
진짜 악에서 우리를 건진다는 이런 개념이 없었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보다 앞장서서 용사가 되셔서 “저쪽 이방 민족들은 지금 마귀한테 꼼짝 마라, 하고 있다. 그런데 너희 이스라엘은 그 마귀로부터 구원받은 백성이야.” 이걸 친히 전쟁을 통해서 알려주십니다.
자, 그렇다면 그 전쟁할 때 이스라엘이 전쟁을 어떻게 합니까? 힘을 빼는 거예요, 힘을. 힘이 안 빠지는데 어떻게 합니까? 힘을 빼는 방법은 견줄 수도 없는 아주 센 적을 보내는 거예요. 게임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센 적을 보내는 거예요. 내 힘을 총동원해 봐야 어림도 없는 그런 센 적을 만나게 해주는 거예요. 포기하게 만들어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을 지킨다는 그 아이디어, 의식 자체를 포기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전쟁할 때 에너지가 넘치는 남자가 지도자가 되어서 전쟁을 한다고 제가 아까 말씀드렸죠. 사사기에서 이스라엘에 지금 가나안 적들이 쳐들어왔는데 당시에 바락이라는 남자가 전쟁에 나서야 합니다. 그런데 남자인 이 군대 장관이 나자빠져 버렸어요.
“나 못 해. 이 전쟁은 하나 마나 우리가 졌어.” 이렇게 나자빠졌어요. 주의 이름으로 주님을 의지하면서 ‘이 전쟁은 사람의 전쟁이 아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앞장서야 하는데 적군들이 너무 센 것을 보고 질린 겁니다. 적이 만만하면 “악당아, 주의 이름으로 물러가라!” 할 수 있어요. 만화 영화 보면 불빛 반짝반짝하는 지팡이 쳐들고 “정의의 이름으로 너를 처단하노라!” 하잖아요.
정의의 이름은 하나님의 전쟁이 아닙니다. 인간은 정의를 앞장세울 자격 없습니다. 인간 본인도 추스르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정의를 이야기합니까? 사사기 4장에서 바락이 나자빠져서 누굴 찾는가? 여성을 찾아와요. 여성 선지자, 선지자는 전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는 팔자 편한 직업이죠.
그냥 PX병인데, 그냥 물건이나 파는 식으로 말씀 전하면 되는데 아니 드보라 선지자 붙들고 전쟁하라고 해요. 그러면 하나님의 군대 장관을 왜 했습니까? 바락이 드보라한테 와서는 “나 못 해요. 당신이 앞장서주세요.” 이렇게 하니까 “그러면 당신에게 돌아올 명예는 없습니다.” 하고 전쟁을 하는데 이 전쟁에서 누가 이기는가? 그 무서운 남성들, 가나안 유명한 영웅들, 험상궂은 장군들이 누구한테 죽게 되는가? 아주 연약한, ‘야엘’이라는 아줌마에게 죽어요.
사사기 4장 17-18절, “시스라의 온 군대가 다 칼에 엎드러졌고 남은 자가 없었더라 시스라가 도보로 도망하여…” 옛날에는 왕이 죽어야 전쟁이 끝나요.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에 이르렀으니 하솔 왕 야빈은 겐 사람 헤벨의 집과 화평이 있음이라 야엘이 나가 시스라를 영접하며…”
거기서 어떻게 했는가? 우유 좀 주니까 마시고 난 뒤에 피곤했던지 한숨 잘 때에 사사기 4장 21절입니다. “그가 곤비하여 깊이 잠든지라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장막 말뚝을 취하고 손에 방망이를 들고 그에게로 가만히 가서 말뚝을 그 살쩍에 박으매 말뚝이 꿰뚫고 땅에 박히니 시스라가 기절하여 죽으니라.”
그 죽는, 살해되는 방식 절차가 이렇게 상세하게 잘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심약하기 짝이 없는 여자가 적군을 잔인하게 죽일 수 있는 용기가 어디서 나오는가? 야엘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사람으로 보지 않고 괴물 내지는 기계로 보기 때문이에요.
기계 부순다고 거기에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없고 말씀이 없는 것은 사람 취급을 안 해요. 이 관점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허락한 관점이고, 이스라엘은 그 관점을 유지해 줘야 해요. 이방 나라와 전쟁할 때 이방 나라의 젖먹이, 갓난애, 여자 그런 것을 불쌍히 여기면 안 되고 모조리 다 몰살해야 돼요.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자, 구약에 그렇게 여자의 전쟁이 되었는데 그럼 신약에서는 전쟁을 어떻게 하느냐? 신약에서는 아무것도 성도가 한 게 없습니다. 에너지를 쏟지를 않아요.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에베소서 4장 8절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아, 성도는, 예수님이 홀로 전쟁을 하시고 그 전쟁의 전리품을, 성령이라는 이름으로 예수님의 공로를 선물로 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누구의 승리냐 하면, 우리 주님의 승리에요. 주님은 여자의 후손이에요. 여자의 후손이 이렇게 전쟁하시는 것, 이것이 신약에서도 나오지만, 구약에서는 주님이 홀로 전쟁하는 것을 알리기 위해 ‘인간의 전쟁이냐, 천사의 전쟁이냐?’ 할 때 천사들이 전쟁을 한 겁니다.
이게 다니엘에 보면 나와요. 다니엘이 계시를 전할 수 있도록 미카엘 천사가 다니엘에게 적들이 오지 못하도록 커버하는 그런 대목이 있어요(단 10:21). 모든 것이 주님의 공로로 성립했다는 것을 알리는 데에 천사들이 자기 성도들을 눈 뜨게 하고 보여주는 쪽으로 인도하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날 신약의 성도는 전쟁할 때 아무 에너지 보탬 없이 그냥 구원받았기 때문에 정말 아무것도 안 하게 되느냐는 그 점에 대해서 마태복음 25장 1-2절이 적절합니다. “그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여기에 신랑이 올 때 등을 준비하라고 했어요. 밤에 결혼식을 한다는 말은, ‘신랑이 진짜 신랑인지 가짜 신랑인지, 아니면 떠돌이 총각이 왔는지’ 그걸 밝히려면 조명발이 있어야 해요. 나를 밝히는 등이 아니고 오실 신랑의 정체를 밝히는 등불, 신부 쪽에서 신랑을 맞이할 조명 불을 준비한다는 것은 ‘내 공로가 아니고 신랑의 전적인 공로입니다.’를 표현해 주는 거예요.
이게 바로 구원받은 여성, 여기 여성으로 되어 있지만 교회가 처녀거든요. 교회가 예수님의 신부잖아요. 구원받은 신부가 해야 될 것은 무엇인가? 자기 에너지 쏟아서 ‘내가 이만큼 했다’가 아니라, ‘주님이 어디까지 선물을 주셨고, 얼마나 많은 선물을 주셨는지’ 내 일상을 통해서 주님이 비치도록 내가 주님을 비추기 위한 등불을 준비하는 거예요.
내 잘남을 비추기 위한 플래시, 그거 켜서 자기 이렇게 비추면 귀신 됩니다. 갑자기 남들이 놀라요. 주님을 비추기 위해서 돈 벌고, 활동하고, 교회 나오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전도하고, 찬송하고…, 이건 주님 쪽을 비추기 위함이에요.
찬송가에 두 종류가 있거든요? ‘아멘’이 붙는 것과 ‘아멘’이 붙지 않은 찬송가가 있어요. ‘아멘’이 붙는 찬송가는 내가 뭘 헌신할 때 붙고, ‘아멘’이 안 붙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것을 설명하는 것, 교리적인 설명이나 뭘 가르칠 때는 ‘아멘’이 안 붙어요. 절대적인 건 아니겠지만. 어쨌든간에 주님을 비치는 거예요. 왜냐하면 주님은 남자의 아들이 아니고 ‘여자의 아들’이기 때문에요.
다윗이 성전을 못 짓는 이유가 피를 많이 흘렸어요. 피를 많이 흘렸다는 것은 전쟁하면서 땅을 더럽혔다는 이야기죠. 다윗의 후손들, 오늘 본 아사 왕도 자꾸 전쟁함으로써 전쟁을 통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위신과, 가치와, 자기 의미에 몰두하는 식으로 하나님 앞에 뭘 잘 보이려고 하는, 플래시를 비춰서 자기를 비추도록 그런 식으로 백성들을 유도하는 그 짓거리를 다윗의 육적인 왕들이 한 거예요.
그래서 진짜 다윗의 후손은 남자의 자손이 아니고 성령으로 태어난 여자의 자손으로 오셔서 오직 주님 자신에게만 비치게 하는 겁니다. 바로 이 전쟁, 이 전쟁의 군사로 우리 성도가 뽑혔습니다. 그러니까 에베소서에서 우리의 전쟁은 영적 전쟁이라서 내가 나를 내세우지 않는 전쟁,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유지하는 전쟁, 내가 한 게 없이 지금까지 살고 있다는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전쟁, 그 전쟁 쉬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사 왕의 잘못된 것, 우리는 매일 같이 아사 왕 식으로 자기 위신과 체면을 챙기는 식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아사 왕을 통해 우리를 지적한 줄로 압니다. 그저 아무것도 없이 주께서 주신 말씀을 그대로 외치는 선지자의 심정으로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으로 나타내며 주의 선물로 살아가는 것을 늘 기뻐하고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