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바벨론과 애굽의 차이

아빠와 함께 2025. 7. 20. 17:58

바벨론과 애굽의 차이 

2025년 7월 20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44:11-14

44:11 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여 재앙을 내리고 온 유다를 끊어 버릴 것이며
44:12 내가 또 애굽 땅에 우거하기로 고집하고 그리로 들어간 유다의 남은 자들을 취하리니 그들이 다 멸망하여 애굽 땅에서 엎드러질 것이라 그들이 칼과 기근에 망하되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칼과 기근에 죽어서 가증함과 놀램과 저주와 모욕거리가 되리라
44:13 내가 예루살렘을 벌한 것 같이 애굽 땅에 거하는 자들을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벌하리니
44:14 애굽 땅에 들어가서 거기 우거하는 유다의 남은 자 중에 피하거나 남아서 그 사모하여 돌아와서 거하려는 유다 땅에 돌아올 자가 없을 것이라 도피하는 자들 외에는 돌아올 자가 없으리라 하셨느니라

애굽도 사람 사는 땅이요 바벨론도 사람 사는 땅이라면 아무 데서는 살기 편리한 대로 살면 안되나요? 왜 하나님의 예언은 바벨론에 살면 편안하고 애굽은 왜 지독한 징벌로 갚아주시겠다는 겁니까? 그것은 애굽이 저주받은 모든 인류 민족의 모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처음 생겨났습니다.

그냥 곱게 만들어서 곱게 나온 것이 아닙니다. 10가지 재앙이라는 요란스러운 재앙이 애굽 전역에 내려지는 그 결과로서 이스라엘이 특수한 민족이 탄생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탄생은 필히 ‘애굽에게는 저주가 주어짐’이라는 경우를 동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10가지 재앙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일강이 피가 됨’→‘개구리 난입’→‘이 창궐’→ ‘파리 들끓음’→‘생축의 죽음’→‘독종’→‘우박과 불 내림’→‘메뚜기 공격’→‘흑암’→‘장자의 죽음’ 이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의사 전달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것은 애굽은 하나님의 멸망 상대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멸망의 대상’과 대비가 되는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멸망의 대상이 아니라 ‘멸망 면제’의 대상에 해당됩니다. 출애굽기 15:26에 보면, 이스라엘은 치료 대상입니다.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입장에 서지 말고 애굽 입장이 되어 봅시다. “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는 이 애굽 나라에 굳이 재앙이 내려셔야 할까요?” 즉 과연 애굽 나라의 존재 자체가 이스라엘 하나님으로부터 그토록 모진 재앙을 받아야만 하는 악한 짓을 했는가입니다. 이점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의미있는 물음입니다.

우리가 지옥 갔다고 치고, 왜 하나님은 우리를 지옥에 굳이 보내시는 이유가 뭔가가 궁금합니다. 10가지 재앙 가운데서 아홉 번째 재앙인 ‘흑암 재앙’은 해를 잠시 잃어버리는 재앙입니다. “왜 우리 애굽은 태양이 빛을 잃어야 마땅한 나라인가?”를 따저 봐야 합니다. 이 이유에 대해서 그 어느 인간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이유를 아십니다. 그것은 ‘애굽의 재앙’이 없다면 결코 이스라엘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애굽 재앙 면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이 애굽의 재앙이 면제될 이유를 대라면 그 이유는 이스라엘에는 인간들 집단 이상의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요소란 바로 ‘하나님의 이름의 동행’입니다. 달리 말씀드려서 ‘하나님의 얼굴’이 비취는 쪽입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민 6:25-26) 하나님의 얼굴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 하나님의 얼굴에서는 광채가 피어납니다. 세상의 빛들, 곧 해와 달과 별은 진짜 하나님의 얼굴이 나타나는 날 그 빛을 잃고 소용없이 됩니다. 모세가 40일 동안 하나님 만나고 올 때도 그 광채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없었습니다.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모세가 그들을 부르니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이 모세에게로 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하니 그 후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는지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하고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출 34:30-33)

예수님은 하나님의 얼굴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천국의 모든 조명은 영원토록 예수님에게 나온 빛으로 감당됩니다.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계 22:4-5)

그렇다면 여기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기를 원합니다. 이를 위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예언 따라 바벨론으로 일단 들어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은 하나님의 약속에 준해서 그 약속을 구현하는 터전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점에 대해서 호세아는 이런 식으로 압축시켜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측량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할 것이라”(호 1:9-10)

도저히 ‘나의 백성이 될 수 없음’이 ‘나의 백성이 됨’의 스토리는 바벨론에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바벨 속에서 ‘그곳’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야 합니다. 호세아 6:1-2에 나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렇다면 애굽은 어디일까요? 여기서 그 누구도 자신이 최후의 이스라엘이 될 자격자가 없음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박수를 칠 때는 필히 두 손바닥이 마주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대하는 축하의 박수 소리에 인간의 손바닥은 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박수는 한 손으로 치는 박수가 될 겁니다.

인간들이 하나님과 마주할 수 없는 그 자리에 다른 분이 끼어들어야 가능합니다. 요한복음 1:48에서 나다나엘은 다음과 같이 예수님에게 되묻습니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이 질문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알아서 내가 믿을 수 있습니까?”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얼굴이신 주님께서 움직이셨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자진해서 인간이 해낼 수 있는 자리에 끼어드셨습니다. 그로 인하여 이 거대한 바벨론 안에서 애굽은 제대로 그 진가를 드러냅니다.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계 11:8)

즉 바벨론과 애굽의 차이점은 약속을 구성하는 환경으로서는 바벨론이요(계 18:2) 그 안에서 진짜 애굽은 이스라엘의 모판으로서 십자가 사건으로서만 그 본질을 드러내며 저주의 진수를 드러내어지는 영적 공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존재가 주님의 예언을 바탕으로 계속 그 기능을 드러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63강-예레미야 44장 11~14절(바벨론과 애굽의 차이)250720-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44장 11~14절입니다. 구약성경 1122페이지입니다.

“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여 재앙을 내리고 온 유다를 끊어 버릴 것이며, 내가 또 애굽 땅에 우거하기로 고집하고 그리로 들어간 유다의 남은 자들을 취하리니 그들이 다 멸망하여 애굽 땅에서 엎드러질 것이라 그들이 칼과 기근에 망하되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칼과 기근에 죽어서 가증함과 놀램과 저주와 모욕거리가 되리라, 내가 예루살렘을 벌한 것 같이 애굽 땅에 거하는 자들을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벌하리니, 애굽 땅에 들어가서 거기 우거하는 유다의 남은 자 중에 피하거나 남아서 그 사모하여 돌아와서 거하려는 유다 땅에 돌아올 자가 없을 것이라 도피하는 자들 외에는 돌아올 자가 없으리라 하셨느니라”

유다 민족, 이스라엘 민족을 징벌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다른 민족이 이스라엘을 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계속 강조하시는 것은, 다른 민족이 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너희를 친다는 것이고 내가 내 백성을 친다는 쪽으로 계속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치지 않는다는 그런 생각은 큰 오산이라는 겁니다.

사랑하기에 때리고 사랑하기에 치신다고 그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칠 때는 그만한 이유를 알면 되죠. 이유는 오늘 본문에서, 애굽 땅으로 피신한 유다 민족을 치는 이유는, 왜 애굽 땅에 거하려고 하느냐는 겁니다. 애굽 땅에. 애굽 땅은 약속의 땅이 아닙니다. 약속의 땅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따로 지정한 곳이 있어요. 가나안땅이에요.

약속의 땅에 거했는데 하나님께서 치셔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거민들을 약속의 땅에서 완전히 쫓아냈고 비워냈다고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러나 약속의 땅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뽑힐 때는, 그 뽑힌 무리가 약속의 의미를 놓치거나 흩트리지 않고 그대로 담아서 어디로 갔느냐. 바벨론으로 갔어요. 바벨론에는 바벨론 땅이 아니고 바벨론에서 거하시는 하나님의 거처, 하나님 약속의 무리가 거기 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에 가게 하실 때, 그들, 거기 간 사람들은 예레미야의 예언이 담겨있어요. 예레미야가 하나님에 의해서 받았던 그 예언이, “바벨론에 가면 산다. 애굽은 아니야. 바벨론에 가면 산다”라는 그런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애굽에서 멸망 당한 유다는, 애굽과 바벨론의 차이점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자기 몸뚱아리 하나 건사할 수 있다면 어느 곳이든지 우리는 살 권리가 있다고 이렇게 나온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는, 바벨론과 애굽 나라의 차이점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일단 애굽은 하나님의 징벌이 있던 곳이었습니다. 애굽 땅은 열 가지 재앙이 있었던 곳이지요. 그 열 가지 재앙은 나일강이 피가 되고, 두 번째는 개구리가 밥상까지 올라오고, 세 번째는 이가 들끓고, 네 번째는 파리가 들끓고, 다섯 번째는 가축, 그 당시에 목축하는 사람의 재산이죠, 그 가축들이 죽고, 여섯 번째는 독종이 가축뿐만 아니라 사람에게까지 있었어요.

이렇게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까지는 수평적, 지표면에서 일어난 거라면, 이제는 입체적으로 나갑니다. 일곱 번째는 우레, 그냥 우레가 아니고 불이 섞인 우레가 일어났습니다. 불이 섞인 우박이 주어졌다고 하는 것이 참 신기하잖아요. 출애굽기 9장 24절에 “우박의 내림과 불덩이가 우박에 섞여 내림이 심히 맹렬하니 애굽 전국에 그 개국 이래로 그같은 것이 없던 것이라”

우박이 불덩어리가 섞여서 내리는 것이, 어디 지구 온난화 문제입니까? 지구 온난화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과학을 하면서, 과학이 복음을 방해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과학을 공부해 보면 좋은 점이 있어요. 과학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13층 아파트에서 떨어질 때, 거기에 중력이 작용합니다.

중력이 작용할 때, ‘이건 착한 여자니까 좀 안 죽게 해줘야겠다’라는 이런 게 없어요. 하나님의 중력 앞에서는 남자나 여자나 아이나 어른이나 그런 걸 일체 묵살해 버리죠. 그리고 의하사 수술할 때, ‘이분은 우리 아는 분이고, 이분은 우리 아버님이기 때문에, 수술 살살 안 아프게 해줘야겠다’라든지 ‘여기 암세포가 있는데 이건 떼 내지 말고 이건 좀 남겨두자’라는 이런 게 없어요.

의사가 수술할 때는 사돈이든 팔촌이든,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관계없이 뭐만 쳐다보느냐. ‘암세포가 어디 있느냐’라는 그것만 쳐다보면서 떼 내는 거예요. 이게 바로 과학의 정신 아닙니까? 과학 정신은 사람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물컹물컹한 세포 덩어리로 보는 겁니다. 이런 점이 하나님이 인간을 볼 때,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흙덩어리로 봐요. 그런 점에서는 과학이 공부를 해보면 좋다는 겁니다. 과학이 유리하다는 거죠.

애굽 재앙의 여덟 번째가 메뚜기를 보내서 남아있는 양식 다 긁어갔어요. 메뚜기가 도둑놈이에요. 내년에 농사지을 것까지 싹쓰리 다 먹었어요. 아홉 번째가 입체적으로 흑암이에요. 해가 깜깜해졌어요. 해가 깜깜해졌다는 말이 이게 무슨 뜻이냐면요, 하나님께서 해와 달과 별을 밤중에 운영해요. 그런데 이게 비용이 많이 들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떤 계획을 하시냐 하면, 예수님 재림하실 때, 그동안 인간들이 빛의 원천, 빛의 조명으로 여겼던 해와 달과 별을 철수합니다. 그동안 해와 달과 별을 통해서 빛을 줌으로써 인간들은 이 세상이 환하고 밝은 세상이라고 오해를 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해와 달과 별을 주니까, 이 빛이 전부인 줄, 이게 다인 줄 안 거예요.

사실은 어두운데요, 본인이 어두운 줄 모른 거예요. 해와 달과 별이 있으니까. 그래서 이 무대세트 장에 조명들 다 치워버립니다. “그동안 은혜 많이 받았지?” 철거하시고 주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는 이제 빛이 없어요. 그래서 마태복음 8장에 지옥의 특징이 나옵니다. 지옥은 빛이 없어요. 깜깜해요. 반면에 천국의 특징은 뭐냐. 천국의 특징은 요한계시록 22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5절에 보면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리로다” 제대로 된 빛, 빛다운 빛, 이제는 해와 달과 별 같은 것은 그 앞에 촛불만큼도 못한, 빛 자체가 비추는 그 빛, 영원토록 환해요. 지옥은 영원토록 깜깜해요. 검은 세상이에요. 왜 깜깜한가. 너에게는 빛 한 조각이라도 줄 가치가 없다는 뜻이죠. 너희에게는. 어두운 곳에서 영원토록 실컷 못 빠져나오고 한번 살아보라는 그게 지옥입니다.

이처럼 지옥과 천국을 극한 대립을 시켜놓고, 지옥을 뭐로 보느냐 하면 애굽으로 보는 겁니다. 지옥을 애굽으로 전환 시켜서, 태양이 있던 것을 재앙을 통해서 흑암이 되게 합니다. 그다음 열 번째 마지막 재앙이 빛을 없애 놓고 난 후에 마지막에는 장자, 인간 자체를 죽이는 겁니다. 인간을 하나님께서 직접 죽이는 재앙을 내렸습니다. 그 재앙을 받을 만하다는 겁니다.

여기서 어려운 점이 이겁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그때, 히브리인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애곱 본토 사람이라고 생각해 볼 때, 진짜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애굽 나라에 이렇게 큰 열 가지 재앙을 준다면, 그다음에 궁금한 것이 ‘왜 재앙을 주십니까?’라는 겁니다. 재앙을 열 가지 받기는 받았는데, 왜 이 재앙을 받아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는 거예요.

합천 군민이 다 풀에 잠겼는데, 합천 군민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이렇게 냉장고랑 티비가 둥둥 떠내려가고, 살림살이 떠내려가고, 며칠 전에 지은 새롭게 인테리어한 집이 홀라당 소용없게 되고, 다 물에 잠기고, 마을 회관에서 텐트치고 앉아있으면서 그다음에 나오는 질문은 ‘왜? 뭐가 잘못되었는데?’ 그러니까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보다도, 뭘 모르느냐 하면, 왜 이런 징벌을 받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이 이유를 모르는 게 제일 답답한 문제예요. 벌 받아놓고 맞는 이유를 모를 때, 정말 이건 미치는 겁니다. 그 이유를 오늘 설교를 통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될 때, 아기 예수 태어났을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거든요. 천사들이 찬송한다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여러분 박수를 할 때, 박수는 두 손을 가지고 쳐야 박수 소리가 나요.

그런데, 인간은 박수한 적도 없는데 한 손으로 박수가 나온다면, 이러한 찬양과 기쁨의 함성은 인간 말고, 인간 자리에서 다른 분이 여기 끼어들어서 아버지의 뜻을 완성했기 때문에, 그 빛의 세계인 천국이 우리에게 주어진 겁니다. 우리가 천국 가는데 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진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요. 누구 말대로 ‘믿어주세요’

주님이 중간에 끼어서 천국 가게 해주신 거예요.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주님이 천국 가게 했다면, 아무것도 우리가 한 게 없다면, 주님을 통해서 천국만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에 의해서 지옥도 만들어 내요. 따라서 애굽 사람들이 열 가지 재앙을 얻은 것은, 그들은 왜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들이 끼어들지 않는데 하나님을 찬양하는 박수 소리가 들렸다는 말은, 인간의 손 말고 다른 손이 여기에 끼어들어서 아버지의 뜻에 합당하게 맞췄기 때문에, 모든 것은 천국에서 아름답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하나님께 만족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거예요.

이 사실을 애굽 사람들은 모르는 거예요. 누가 끼어들었지? 해와 달과 별이 물론 열 가지 재앙 끝나고 난 뒤에 다시 빛나겠지요. 그 밤에 빛나고 낮에 빛나는 해와 달과 별의 조명발이 계속 유지되는 것은 우리 인간이 끼어들지 않았어요. 하나님과 또 누가 끼어들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 누리고 받고 있는지, 그 내용에 대해서 애굽 사람은 모르는 겁니다.

왜? 재앙은 지나갔으니까. 재앙 받을 때는 ‘신이 이럴 수가 있을까’라고 했지만, 또 지나가고 나면, ‘뭐, 지구 온난화겠지. 태풍 잠시 왔다가 가겠지. 늘 태풍이겠어? 늘 가뭄이겠어?’라고 이런 식으로 관심이, 우리에게 주신 해와 달, 자연 세계를 주신 은혜가 어떻게 오는가에 대한 관심 자체가 없어요. 관심 자체가.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들이 애굽에서 살던 인간이거든요.

애굽에서 살던 인간을 애굽의 부분, 조각이라고 생각하고, 애굽 일부를 똑 떼었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통해서 도대체 누가 인간 자리에 끼어들어서 하나님에게 대만족이 되어서, 한쪽은 천국, 한쪽은 지옥을 했는가. 그 이유를 이스라엘을 통해서 알려줍니다. 그 첫 번째 나오는 것이 출애굽기 15장 26절입니다.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그다음 말씀입니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이게 차별화입니다. 하나님의 차별화. 애굽 사람들과 전혀 다른 새로운 인종, 새로운 민족을 하나님께서 개발하시고, 거기에 대한 질병이 ‘그들은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없다’로 하나님께서 조정해 나가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 조건이 있는데,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지키면 그렇다는데, 안 지키면 어떻게 되는가. 안 지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는 애굽에 내린 질병을 내리지 않습니다. 안 지켜도. 그런데 안 지키는 대신 다른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주님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대신 지켜주는 조건 하에, 그들에게 지옥의 저주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아십니까? 그 사실을 내가 어떻게 감 잡지요? 어떻게 알게 되지요? 정말 중요한 이야기 아닙니까? 요한복음 1장에 보면, 거기에 누가 나오느냐 하면, 나다나엘이 나와요. 나다나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1장 48절에 “주여,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라고 했어요. 생각보다 상당히 어려운 말이에요. “주여,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라는 이 질문과 ‘제가 어떻게 하면 주를 압니까?’라는 이 질문이 달라요.

주께서 먼저 시작을 한 거예요. 주께서 먼저 시작해서 “나다나엘아”라고 한 겁니다. 주께서 먼저 시작해서. 그럴 때, 나다나엘은 자기에 대한 관심이 날아갔어요. 자기에게 관심이 없어요. 이건 굉장히 무서운 이야기예요. 왜냐 하면 부부가 잠을 자는데, 아내가 잠시 눈을 떠보니까, 남편이 캄캄한 밤에, 새벽 2시인지 3시인지 분간도 안 되는데, 창문 앞에서 서서, “주여,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라고 하고 있으면, 아내가 대번에 ‘당신 누구랑 이야기하고 있느냐’라며 얼마나 화들짝 놀라겠습니까.

‘뭐야. 창문 밖에 누가 있다고. 당신 지금 누구를 보고 이야기한 거야. 당신 환자야?’라고 이렇게 나올 겁니다. 당신은 나를 봐야지, 있지도 않은 사람에게 이야기하지 말고. 하나님의 성령 받은 성도의 특징은 꼭 몽유병 환자 같아요. 모든 사람은 사람에게 문제 해결하려고 하잖아요. 얼만 전에 이재명 대통령님께서, 갑자기 ‘님’자가 막 붙는데, 대전에 가서 연설하는데, 제가 ‘님’자를 붙이는 이유가 있어요. 이재명 대통령이 질문을 해보라고 하니까, 어떤 국민이 와서, ‘우리가 지금 비정규직인데, 어떻게 하면 정규직이 될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했어요.

그 답변하는 것이 제 예상과 너무 달랐기 때문에, 제가 갑자기 ‘님’자를 붙입니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바꾸면, 제가 검찰에 구속당합니다’ 그렇지. 바로 그거예요. 검찰에 구속당합니다. ‘당신들 어려운 일 해결하는 것은 내가 아니에요’라는 그런 뜻이죠. 쓸데없이 좌파 대통령 된다고 기대하지 말고요. 바로 그거 아닙니까. 바로 그거.

지금 나는 내 살 궁리가 급하지, 당신들 이야기 들어주는 게 아니다. 이렇게 본색을 드러내는 거. 좀 진작에 드러내지. 무슨 노동문제 해결될 줄 알았나 본데, 얼마나 이재명이 지혜롭습니까. 나도 내 살길 바쁘단 말이죠. 이걸 애굽으로 보면 이렇게 됩니다. 남이 죽든 말든 나는 모르겠고, 나는 나 살 것만 산다. 방금 이재명 대통령과 똑같죠.

그러면 ‘어떡하죠?’라고 사람들이 걱정한다고요. 그런데 하나님 입장에서는 어떻게 할 것도 없어요. 같은 방향으로 가기 때문에. 각자, 어떤 사람은 남을 위해 살고 나는 나를 위해서 사는데, 가는 방향은 넓은 길이에요. 왜? 지옥의 아귀는 커요. 갈 자가 많아요. 전부 다 자기를 위해서 넓은 길로 가고 있는 입장에서는, 나는 나대로 가고 너는 너대로 가도 방향이 다른 것이 아니고 똑같은 방향으로 지옥 가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애굽입니다.

따라서 제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 어떤 경우라도, 이스라엘은 애굽의 성향에서 끝까지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게 바로 구약성경이에요. 어떤 노력을 해도 인간은 애굽에서 발을 못 뺍니다. 그게 애굽이에요. 그러면 바벨론은 뭐냐. 바벨론을 바로 언급할 수도 있지만 호세아를 언급함으로써 바벨론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호세아 1장 9~1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측량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할 것이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너는 내 백성이 아니라고 분명히 언급했지요? 그때 언급을 한 너희들이, 바로 내 백성이 될 것이다. 어디에서? 한 곳에서. 그러면 그곳이 어디냐? 바로 그곳이 호세아 6장 1절에 보면,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그리고 2절“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예수님 십자가 죽으시고 부활하실 때, 예수님 몸만 부활한 것이 아니고 몸 안에 오글오글한 하나님의 자기 백성도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게 해주신다는 이 말입니다. 그것을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어디서 했는가. 바로 바벨론에서 그걸 했습니다. 그걸 제가 오늘 설교 처음에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이 치셨다. 찢었다”라는 그 내용을 버리지 말고, 그걸 그대로 품고 바벨론에 가요. 바벨론에 가서, 이스라엘을 쳤다고 우쭐대는 그 바벨론의 세력을 하나님이 치시면서 그 안에, “하나님이 우리를 찢었다”라고 말씀대로 하신 그것을 말씀대로 사흘에 부활시키는 작업을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서 성취하는 겁니다. 예언대로.

그러면 오늘날 이 세상은 애굽이냐, 바벨론이냐. 18장 2절은 바벨론이라고 되어있어요. 그러면 애굽과 동일하지 않으냐? 동일하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에 11장 8절에 보면, 하나님의 성도가 될 때 비로소 그곳은 애굽으로 표현되는 겁니다. “저희 시체가 큰 성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애굽이라고 해놓고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환경은 바벨론,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면 그때는 더 원초적인, 가장 모태적인, 바벨론의 모태, 인간세계의 모태라고 하는 애굽, 애굽의 재앙, 곧 지옥이죠. 저주. 거기서 십자가의 의미가 나타날 때, 그때 그 사람은 바벨론에서 탈출한 것이 아니고, 애굽에서의 탈출, 출 애굽된 진짜 내 백성이 된 겁니다. 그 백성의 특징은 뭐냐. ‘주여, 저를 어떻게 아시나이까’

주님께서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하셨지요. 나다나엘은 “주여, 주님이 저를 어떻게 아시나이까” 여러분, 이 애굽 같은 세상에서, 주께서 여러분을, 우리가 박수 안 해도, 주님과 예수님이 합쳐서 박수하는 그 박수, 그 박수의 영광스러움에 이제는 우리가 함께 동참하게 된, 그렇게 아버지가 아신 자 됨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백성 아님이 분명한데, 백성 아님이 유지될 때, 비로소 백성 되었다는 그러한 하나님의 백성 되었음을 통보함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십자가를 근거해서 파악하는 하나님의 성도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래서 이 애굽과 천국이, 지옥과 천국이 어떻게 다른 지를, 그 차이에서 늘 감사와 감사가 이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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