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우상과 형상

아빠와 함께 2025. 7. 30. 09:59

우상과 형상 

2025년 7월 27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44:15-19

44:15 때에 자기 아내들이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는 줄을 아는 모든 남자와 곁에 섰던 모든 여인 곧 애굽 땅 바드로스에 거하는 모든 백성의 큰 무리가 예레미야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44:16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하는 말을 우리가 듣지 아니하고

44:17 우리 입에서 낸 모든 말을 정녕히 실행하여 우리의 본래 하던 것 곧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방백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대저 그 때에는 우리가 식물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였더니

44:18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 드리던 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핍절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느니라 하며

44:19 여인들은 가로되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릴 때에 어찌 우리 남편의 허락이 없이 그에게 경배하는 과자를 만들어 놓고 전제를 드렸느냐

우상이라는 개념은 이스라엘에게만 있는 개념입니다. 참된 신이 따로 있고 그 외의 모든 신은 가짜라는 차원에서 우상이라고 표현되는 겁니다. 그런데 무엇을 가지고 ‘참된 신’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인간들이 골로 믿겠다는 신은 그게 어떤 신이든지 다 가짜입니다. 심지어 여호와 마저도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스라엘에서 선언적으로 ‘참된 신’이라고 규정된 그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해 얼마든지 우상이 용납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가 참된 신이라고 하들 가정 살림의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부녀자들에게는 전혀 실질적인 효력을 주지 못하고 있는 관념적인 신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한 국가의 정신을 통합시킬 수 있는 통일된 신 개념이 수립되어야 나라의 정체성이 수립되기에 모두다 수긍하는 필요한 관습이라고 받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무적인 선에서 그 하나님을 믿고 얻을 수 있는 효력면에서 도무지 신뢰가 가지 않는 겁니다. 이때 주변의 다른 민족들의 신들이 종류대로 주입됩니다.

골라 믿는 재미를 안겨줍니다. 어떤 신이 기도 응답이 신속히 이루어지는지 비교하고 경쟁할 수 있는 권한이 인간 자신들에게 있다고 자부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정 생활의 실무를 담당하는 부녀자의 입장에서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여호와를 믿는 것은 대단한 불만이었던 겁니다.

자식을 키우고 생존을 집착할 수 밖에 없는 가정 주부입장에서 같은 부녀자끼리의 의견 교환이 오랫동안 이어져 온 겁니다. 남성 가장이 가정의 책임자로 확고하게 다져진 체제 안에서 부녀자 선에게 하늘 여신이라는 우상을 섬기게 되면 주변에서 그 집 가장에 대해서 불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런 외부의 압력에 밀려 자기 아내에게 우상 섬기지 말라고 요구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남편 입장에서도 큰 소리를 칠 수 없는 이유는, 일단 생계가 유지되는 수준 유지가 급선무라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실질로 기도의 효과를 봤다는  신을 선택해서 믿고 섬기겠다는 것 심정을 이해해 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자기 가정에 실제적인 이익을 가져다 주기 때문입니다. 살림에 보탬이 되는 신을 본인들이 결정해서 믿겠다는데 타인들이 더는 할 말이 없는 겁니다. 부녀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우리 방백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대저 그 때에는 우리가 식물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였더니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 드리던 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핍절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느니라 하며”(렘 44:17-18) 즉 유다 공동체 사회가 요구하는대로 참된 하나님인 여호와 섬기는 식으로 억지로 해보니 도리어 나쁜 결과가 주어졌다는 겁니다. 데이터가 말해준다는 식입니다.

여기서 부녀자들이 내세우는 참된 신의 조건이 다음의 세 가지입니다. “먹을 것이 풍부하고 복을 받고 재앙이 찾아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것을 주장하면 “기복신앙’에 따져 있기에 가짜 신앙자”라고 매도할 겁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기복신앙 이 아닌 것은 뭐지요?

참으로 기본신앙이 아닌 하나님을 제시해보라고 할 때에 사람들은 막상 할 말이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믿는 것은 생계가 어느 정도 안정을 유지한다고 여기고 그 뒤에 덮쳐지는 일종의 오락거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배부른 자들이 하는 사치성 취미생활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여유 있는 재물과 건강의 복과 재앙없음이 무관하게 일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그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을 어떤 식으로 일하신다는 말입니까? 애초부터 하나님께서 십계명 제 1계명을 통해서 온 천지가 우상으로 넘쳐남을 전제로 한 말씀을 주셨던 겁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출 20:3)

그 뒤에 나오는 말씀이 ‘형상’에 관한 겁니다. 즉 인간들이 여러 신을 믿을 수는 없으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는 ‘하나님과 마주 할 수 있는 조건’은 단 하나 뿐입니다. 왜냐하면 출애굽기 33:20에,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주시고 그 하나님의 얼굴, 혹은 형상을 마주 볼 수 있는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받아주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형상은 어디에서 어떻게 나타나는 걸까요? 스가랴 9:9에,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인간들이 기대한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생각해내는 신의 형상들은 모조리 자기 내부에 있는 자기 형상을 극대화시켜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이점을 골로새서 3:5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인간의 탐욕에서 나오는 신의 형상을 피하고 도리어 반대되는 낮은 모습으로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낼 때에 과연 어느 인간이 자기 과대화를 위한 신의 형상을 마다하고 낮아진 형상을 참된 형상으로 받아들이겠습니까? 그것은 십자가의 능력이 품은 말씀이 우리 자신의 본심을 들추어줄 때 가능합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19-21)

땅에서 자신을 분리한 자만이 타인에 대한 같이 천국에 가고자하는 갈급함이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무시당하는 것으로 그다지 서러워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64강-예레미야 44장 15~19절(우상과 형상)250727-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44장 15~19절입니다. 구약성경 1122페이지입니다.

“때에 자기 아내들이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는 줄을 아는 모든 남자와 곁에 섰던 모든 여인 곧 애굽 땅 바드로스에 거하는 모든 백성의 큰 무리가 예레미야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하는 말을 우리가 듣지 아니하고, 우리 입에서 낸 모든 말을 정녕히 실행하여 우리의 본래 하던 것 곧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방백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대저 그 때에는 우리가 식물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였더니,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 드리던 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핍절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느니라 하며, 여인들은 가로되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릴 때에 어찌 우리 남편의 허락이 없이 그에게 경배하는 과자를 만들어 놓고 전제를 드렸느냐”

여자들이 앞장서서 지금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대들고 있습니다. 대들 때, 그들은 여호와 섬기는 것과 하늘 여신을 섬기는 것과 그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본인들이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우선 하늘 여신 섬기는 것은 간단했어요. 뭐냐 하면, 제사 드릴 때, 과자를 만들면 돼요.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릴 때, 그들에게 제사 드리는 방식은, 과자를 남편 없이 그에게 전제를 드리는 과자를 드렸느냐?”라고 반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과자를 만드는 행위, 과자를 신이 원하고 있다는 그 마음 자세, 그런 것들이 그들이 아는 여호와 섬기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여인들이 알고 있습니다. 여인들이 하늘 여신 섬기는 것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는, 그들에게 믿을 것은 이제는 남편의 하나님, 그러니까 여호와에 대해서 더 이상 본인들이 신뢰할 수 없다는 거예요.

원래 이스라엘 여자들의 종교는 남편 종교를 따라가게 되어있습니다. 남편이 여호와 섬기면 군말 없이 따라줘야, 그게 그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윤리적 자세였습니다. 그러니까 여자가 만약 여호와 섬기지 않고 다른 신을 섬기면, 그 책망을 누가 당하느냐 하면, 여자에게 묻지를 않아요. 여자 자체가 남편에게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의 비품 또는 가구, 이런 종류이기 때문에 여자에게 묻는 것이 아니고 남편에게 닦달하죠.

어떻게 남자가 되어서 여자 하나 제대로 간수 못해서, ‘우리 봐라. 이스라엘 모든 남자들이 여호와 섬기는데, 당신의 아내가 이렇게 하늘 여신을 대놓고 섬기니까, 우리 여호와 신앙 공동체에서 이건 반칙이다. 그러니까 남편 노릇 제대로 해라’라고 사회에서 이렇게 책망을 주는 거예요. 그게 장로의 역할이었어요. 여자는 장로가 되지 않고 그 사회에 지도자층이 남자들이었던 거예요.

그 소리를 듣고 남자들이 기분 나빠서, 아내에게 이야기했겠지요. ‘당신, 주변에서 소문 다 났어. 당신이 여호와 안 섬기고 하늘 여신 섬긴다는 소문 다 났다고’라고 그렇게 할 때, 여자가 고분고분 말을 듣는 게 아니고, ‘당신이 나에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내 앞에서 큰 소리야. 우리 맘 카페에 이미 다 퍼졌어. 하늘 여신 섬기는 거. 당신은 아이 낳아놓고 나 몰라라 하지? 자식 관리하고 필요한 거 먹이는 것은 당신이 책임져야 하는데, 제대로 책임을 감당 못 하니까, 나라도 자식을 먹여 살려야지’라고 맘카페(여자들의 카페)에 이렇게 이렇게 하면 재수가 좋아지고 행운이 찾아오는 그런 사례들로 굉장히 많이 수집하고 있었던 겁니다.

여러분들이 하늘 여신이 뭐가 좋다고 그렇게 섬기겠습니까? 효과를 보니까 섬기는 거예요. 효과. 어떤 효과? 내가 기도한 대로 응답받는 효과가 있으니까, 나는 효과 보는 신(神)과 거래하고 싶은 거예요. 백날 기도해도 응답 없는 여호와 말고, 남편이 믿는 그 종교 말고, 오늘 내용이 바로 여자들이 적극적으로 여호와 말고 다른 신을 섬긴 내용에 관한 겁니다.

이미 남성들이 믿었던 여호와를 남성들이 밀어주는 거예요. 이런 예가 적절한지 아닌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남성들이 윤석렬 찍으니까, 여자들이 이재명 찍은 것과 똑같은 거예요. 물론 경상도에서나 해당 되는 거예요. ‘효과 없잖아. 윤석렬 때 뭐 잘 살았나? 이재명이 똑똑하니까 뭔가 일을 낼 거야. 25만 원씩 주고, 뭔가 일을 한다고’

갑자기 편의점 소비가 팍 늘어나고, 자영업자들은 손님들이 많이 오고, 더 못사는 사람은 십만 원 더 줘서 38만 원 받고 이런 거죠. 그러니까 결국은 어떤 신을 믿느냐는 것은 이미 위에서 일방적으로 딱 지목해서 이 신(神)을 믿으라는 그것이 더 이상 먹히지도 않고 그게 통하지도 않는 세계 속에 그들이 놓여있었던 겁니다. 하나님을 믿고 안 믿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인간에게는 진짜 중요한 것은 우리 가정이 사람 사는 것처럼 사느냐, 못 사느냐, 생존이 되도록 유지되느냐, 못 되느냐는 이것이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을 선택하느냐보다 더 시급한 문제인 거예요.

돈 있고 없고가 중요하지, 어떤 하나님을 믿느냐는 나중 문제예요. 직접 삶을 담당하고 생활을 책임지는 여자 입장에서 자기 여성들, 부녀자들끼리 효과 봤다는 신(神)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여성들의 파워(Power), 우먼파워(Woman Power)에 대해서 남성들이 어떻게 했는가. 반박했는가? 반박 안 했습니다.

여기 19절에 보니까, “어찌 우리 남편의 허락이 없이 하늘 여신에게 경배하는 과자를 만들어 놓고 전제를 드렸느냐”라고 나와요. 남편 묵인하에 우리는 하늘 여신을 섬겼다는 거죠.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남편들이 ‘우리 여호와 믿어야 맞잖아’라고 하는 말을 꺼냈다가, 여자 쪽에서 다다다다 따발총이 튀어나오는 거예요.

‘우리 조상들 다 섬겼어’ 그때 어떠했느냐. 우리가 여호와 안 믿고 하늘 여신 섬겼을 때, 모든 것이 풍족하고 복을 받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했다는 겁니다. 예레미야 44장 17절 이 구절 없었으면 어쩔뻔했어요. 어쩔뻔했냐는 말을 제가 왜 하느냐 하면, 예수 믿고 하나님 믿고 하는 그 취지가 이렇게 노출 안 될 뻔했다는 겁니다.

하나님 믿고, 예수 믿고, 성령 믿는 이유가 복을 받고 재앙을 만나지 않기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 믿는 단체가 이 교회라는 단체란 말이죠. 갑자기 하늘 여신 섬기는 이 아줌마들에 대한 고마움이 확 밀려오네요. 이렇습니다. 생각을 간단하게 해야 해요. 개뿔 돈도 없고 생활 수입도 없는데, 여호와 믿으면 우리 생활 책임지느냐. 그건 못 믿겠다는 거예요. 실질적으로 마음이 당기는 거, ‘이렇게 하면 복 준다’라는 이런 신(神)같으면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이런 신을 믿겠다. 이건 누구에게 따짐 받고 이런 거 없고, 나의 솔직한 마음은 뭐냐. ‘하나님께 빌면 복을 받고! 끝! 그게 전부 아니에요?’라고 부녀자들이 반발하고 있습니다.

이 전통이 오늘날 기독교 교회 전통 안에 그대로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소위 부흥되는 교회, 부흥되는 교회가 무슨 교회냐? 효과 본 교회예요. 기도에 응답받은 교회로 효과 본 교회예요. 응답받았느냐, 안 받았느냐 하는 것은 무엇으로 측정하는가. 돈의 액수 지표로 측정합니다. 헌금이 많아지고, 생활비가 증가하니까, 이건 복 받은 거고, 생활의 궁핍이 있을 때는 이건 복을 안 받은 것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볼 때, 이걸 기본으로 까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분야들이 노골적으로 ‘내 배 째라. 예레미야 당신의 신앙은 나는 거부한다’라고 노골적으로 자기 본심을 드러내는 이 상황, 이 상황을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상황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피해 가지 말고, 반드시 이 상황을 우리 자신이 그 시대에 선지자라고 치고, 그걸 유효하게 그 중간 한복판을 한번 걸어가 봅시다.

걸어 가보게 되면 내린 결론은 뭐냐. 어느 누구도 우상을 피할 수 있는 위인은 아무도 없다. 명칭이 예수가 되든, 하나님이 되든, 그건 아무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그 본 내용은 우상숭배 하고 싶은, 믿고 싶은 그 심보가 안 죽고, 그대로 생생하게 살아있는 한, 그건 명칭이 뭐든 우상입니다. 그래서 방금 이야기한 것을 이렇게 정리합시다. 구원에 실패한 사례는?

여호와 믿는데, 이상하게 믿는데 구원에 탈락한 사례는 어떤 게 있을까? 그중 하나가 오늘 본문입니다. 하늘 여신을 분양하고 전제를 드리고 하던 그때 우리는 사는 것이 풍부하고, 우리 음식물이 풍부하고, 사는데 복을 받고, 재앙을 만나지 않았다. 첫 번째, 먹는 게 풍부하고, 두 번째는 복을 받고, 세 번째는 재앙을 만나지 않았다.

‘이 세 가지의 증거를 두고 이 증거에 부합되는 신이 진짜 신이다’라고 그렇게 정하고 싶은 마음이 내 마음이다, 왜? 여기에 대해서 ‘그게 아니고!’라고 나온다면, 이 부녀들이 뭐라고 하느냐. 딱 불러서 이게 아니라면, 그러니까 세 가지, 먹을게 풍부하고 그러니까 돈이 풍부하고, 복을 받고, 건강도 복이죠, 그다음에 재앙을 만나지 않는다는 요거, 요거 빼고 여호와 믿을 이유를 아니라고 한 그 사람 데리고 와서, 요거 빼고 하나님 믿는다고 하면, 요거 요거 때문에 하나님 믿는다고 제시하면 납득이 성립되거든요.

그래야 앞뒤 논리가 맞잖아요. 자, 그렇다면 성경에서 이 대목을 상세하게 언급을 했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은 다른 쪽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다른 쪽, 그 다른 쪽은 뭐냐. 자꾸 이건 아니고, 그건 기복신앙이고 그러는데, 기복신앙이라고 욕하지 말고 그럼 다른 쪽은 뭐냐는 말이죠. 기복신앙 욕은 잘하면서 다른 쪽은? 그럼 당신은 뭣 때문에 교회 나왔고, 뭣 때문에 하나님 믿느냐고 딱 물으면, 유구무언(有口無言)이죠.

할 말이 없지요. 뭐 할 말이 있어야지요. 교회에서 아무도 안 가르쳐주니까. 설교시간에는 뭐 ‘그 나라 의’라고 하는데. 점심 식사할 때 모여서 이야기하는 거 들어보면 전부 다 이 이야기하는데요. 벌써 설교 다 잊어버렸어요. 이 말은 인간은 때려 죽여도 인간의 본심은 바뀌지 않는다는 그 원리와 동일합니다. 인간은 안 바뀌어요. 우상 섬기겠다는 것은 계속 갑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여호와를 모르고 섬기고, 그냥 우상 섬기듯이 여호와 섬기고, 예수 섬기고 그런 겁니다. 왜 그러면 성경에서 우상이 범람하도록 하나님께서 방치를 하느냐. 그게, 인간에게 나올 수 있는 것은 우상밖에 없기 때문에 그걸 방치시키고 그걸 노골화시켜야 하죠.

온 세상이 우상 세계라는 것을 그냥 교회 다니는 사람 있고, 절에 다니는 사람 있고, 이래서는 안 되고, 교회고 절이고 천주교고 성당이고 전부 다 우상만 섬긴다는 이걸 완전히 노골화시켜 줘야, 가짜만 있는 데서 진짜라는 것이 어떤 식으로 진짜 천국 가는 사람이 나오는지 그제야 이게 밝혀지는 거예요. 우상이 많은 것을 너무 서러워하거나 슬퍼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아주 신이 나야 해요. 스가랴 9장 9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여기에 기쁨이 나와요. 여호와 믿는 사람의 기쁨은 뭐냐.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이게 바로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아무도 예상 못 했어요. 제자들도 예상 못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초라함의 이벤트를 벌이시는 거예요. 그냥 초라하게 오시는 것이 아니고 나는 기존의 세력을 가진 자와 이런 식으로 차별화된 방식으로 예수님 오시기 때문에, 예수님 오시는 세상은 모조리 다, 넉넉하게 우상을 섬겨야 해요. 우상을 어느 정도로 섬겨야 하느냐. 사천 군에 비 오는 만큼 섬겨야 하죠. 온 마을을 전부 다 덮어야 해요.

그 마을에 교회도 있고 절도 있고 성당도 있지만, 모조리 다 우상 섬기는 자로, 이게 분명히 확인되는, 그러한 환경을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기다렸습니다. 고대했습니다. 인간에서 나오는 거 치고 우상 아닌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십계명, 제 일 계명에 나오죠.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출20:4)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하라’부터 하지 않고, ‘~~하지 말라’부터 시작한 것은, 이미 ‘하지 말라’라는 일이 전체 다 퍼져있는 상황인 것을 감안해서 나온 거예요. 이미 너희들은 형상을 만들고 있다. 그 형상은 뭐냐? 그 형상을 조각한 사람 본인을 외부의 대상체로 드러낸 거예요. 이게 형상이에요. 인간의 형상은 가만히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바깥으로 드러내게 되어있습니다.

그런 것을 조각했고, 그런 것을 상품으로 제조한 거예요. 이게 상품의 세계, 소비 시장의 특징입니다. 소비시장에서 파는 모든 물건은 내 마음속에 품은, 내가 원했던 것들을 바깥으로 드러낸 거예요. 내가 뭘 원하느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러운 것들은 전부 다 형상화되어서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어요. 내 속에 있는 것이 바깥에 형상화되는데, 내 속에 있는 것이 곧 우상입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에 말씀, “탐심이 곧 우상숭배니라”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너희들은 그 꼴이다. 너희들의 코스는 이미 그곳으로 확정되었고 지정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탐심이라는 것이 그냥 조각, 불상 조각, 십자가 조각, 그걸로 멈추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속의 형상이 바깥으로 노골화된 것은 확정되게 되어있어요. 신약에 오면 그게 넘치게 되어있어요.

괜찮은 내 모습을 내가 보고 싶은 거예요. 자, 그렇다면 이 시간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이 우상밖에 모르는, 우상밖에 난 몰라, 우상밖에 모르는 내가 어떻게 우상을 자포자기, 우상을 포기하면서 참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느냐. 이 문제가 남아있겠죠. 이 문제를 위해서 제가 하나의 머리로 하는 시험을 해보겠습니다.

둥근 원탁이 있는데, 그 둥근 원탁에서 두 사람이 마주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몇 가지? 수학 문제입니다. 둥근 원탁에서 두 사람이 만날 수 있는 경우의 세계는 몇 가지? 단 한 가지입니다. 마주 볼 수 있는 경우는 한가지. 여러 명이 앉을 수는 있지만 마주 볼 수 있는 경우는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인간 같은 인간을 원해요. 어떤 인간을 원하느냐.

처음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추방했잖아요. 그러니까 진짜 인간은, 천국으로 하나님께 들어오는 인간은 하나님과 마주 볼 수 있는 인간만 뽑아서 천국에 넣어줍니다. 하나님과 마주 볼 수 없는 인간은 넣어주질 않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하나님과 마주 안 하고 뭘 마주하느냐. 인간이 마주하는 것은, 내가 보고 싶은 나의 형상을 갖고 있는 대상과 테이블에 마주 하고 싶은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같은 테이블에서 만날 수 가 없습니다. 결혼식을 앞두고 상견례 하는데, 10초 만에 파토난 상견례가 있어요. 10초. 테이블에 앉자마자 여자 쪽에서 하는 말이, ‘우리 딸은 집 사는데, 한 푼도 못 보탭니다. 집은 아들이 하는 게 맞죠?’라는 그 소리 듣고, 그 말 하는데 10초 걸렸는데, 맞은편 사돈이 찬물 한잔 마시고, ‘보는 것은 오늘로 끝났습니다’라고 하고 나갔어요.

그런데, 그 만나는 장소가 코스요리 나오는 중국집인데, 동그란 테이블 있는데, 그 테이블에서 상대 쪽 사돈이 보고 싶은 사돈이 있고요, 자기가 만나고 싶은 사윗감이 있고, 저쪽에는 내가 만나고 싶은 며느릿감이 있어요. 인간은 내가 마음속에 생각하는 형상이 들어있지 않은 사람 같으면 절대로 만날 수가 없어요. 거부합니다.

우상숭배자 둘이 결혼하자고 만났는데, 둘이 파토난 거예요. 그러면 상견례가 다 파토날 건데, 잘 사는 사람이 있잖아. 잘 사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아들과 딸이 만나서 사는데, 사돈끼리는 잘 안 보죠. 형상, 추억이 다르기 때문에, 사돈끼리는 어려워서 잘 안 만나요.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 낯짝 보지 맙시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33장에서 시작하신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얼굴을 제시하고요, 그걸 골로새서 1장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데요, 하나님 아들의 형상인데, 그건 보이지 않는 형상이에요. 하나님 얼굴을 제시하고, 이 하나님의 얼굴에서 나오는 광채를 보기를 원하는 사람이 혹시나 있을까 만나러 가는 그 과정, 그 과정이 구원의 과정인데,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얼굴인데, 거기에는 누구도 만날 수 있는 극히 낮은 얼굴로 오시는 거예요.

평범하고 낮고 천한 얼굴로 오셨단 말이죠. 심지어 그게 목마른 자, 옥에 갇힌 자, 헐벗은 자, 아무도 그렇게 되고 싶지 않은 얼굴로 다가오는 모습. 그런데 가난하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옥에 갇혔다고 구원받는 것은 아니고요. 옥에 갇힌 건 죄인뿐인데 무슨 구원을 받겠어요. 그게 아니고, 이렇게 옥에 갇히고 헐벗어도, 그 헐벗은 사람의 원하는 얼굴은 어떤 얼굴이냐 하면 자신의 얼굴을 비치는 거예요. “누구 그 나라 의에 함께 가고 싶은 사람 없어요?”

그 나라 의에 함께 하고자 갈급한 심령을 갖고 있는 사람은 누가 뭐래도 지금 그 나라 의를 추구하는 사람이에요. ‘난 우상 없어요. 절에 안 갑니다. 조상숭배 안 합니다’라고 이렇게 소극적으로 나설 것이 아니고, ‘나 구원받는데 혹시 같이 갈 마음이 있습니까?’라고 묻는 거예요. 그게 마태복음 6장 21절에 나옵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그러니까 지금 자기 형편에 수입이 얼마인지, 정부 보조금 얼마 받는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누구를 만날 때, ‘나 천국 가는데, 혹시 같이 안 갈래? 이 딸아. 같이 안 갈래? 이 아들아. 나 천국 가는데..., 수학 100점이 기쁜 건 좋은데, 수학 100점을 천국에서는 안 받아 준데’ 그걸 무효라고 해요. 무효. 수학 100점 맞은 나는 내 형상의 대상체 거든요. 내 형상이 그리워하는 거.

그걸 안 받고, 뭐냐 하면 예수님이 극히, 십자가 죽기까지 낮아지는 그 형상이 바로 주님의 얼굴이고, 우리에게 나타난, 정면으로 나타난, 마지막으로 나타난, 다른 얼굴은 없고 십자가에 일그러진 모습, 내 죄 때문에 일그러진 그 모습, 그 얼굴이 구원의 능력이 된다는 것을 같이 알고, 같이 그 능력 받고 갈 사람이 혹시 있어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형상이 아니고 일그러진 예수님의 형상이 바로 참된 형상인 것을, 우리는 부처 안 믿고 예수 믿는 것으로 때우려고 하지 말고, 정말 우리 마음속 우리 보물이 예수님의 십자가 모습, 일그러진 모습으로 있는지 늘 확인하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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