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등불과 소금

아빠와 함께 2025. 7. 17. 08:51

등불과 소금 

2025년 7월 16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15:1-8

15:1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 왕 제십팔년에 아비얌이 유다 왕이 되고
15:2 예루살렘에서 삼 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마아가라 아비살롬의 딸이더라
15:3 아비얌이 그 부친의 이미 행한 모든 죄를 행하고 그 마음이 그 조상 다윗의 마음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나
15:4 그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저에게 등불을 주시되 그 아들을 세워 후사가 되게 하사 예루살렘을 견고케 하셨으니
15:5 이는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고 자기에게 명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
15:6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 사는 날 동안 전쟁이 있었더니
15:7 아비얌과 여로보암 사이에도 전쟁이 있으니라 아비얌의 남은 사적과 무릇 행한 일이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15:8 아비얌이 그 열조와 함께 자니 다윗 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아사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인간은 누구든지 태어나면 죽습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일반인들에게 일어가는 각종 일에 주목하라는 것이 아니라 오늘 본문에서는 다윗의 후손인 유다 왕에게 주목하라고 하십니다. 왜 일반인은 안되고 그 아비얌에게 일어난 일에 주목해야 할까요?

그것은 유다에게 있어 왕의 자리란 ‘다윗의 등불의 실효성’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미 죽고 없어진 다윗에게 일어난 일이 그 후 역사에 주도적으로 실제 현실을 유발하는 힘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점을 신기하게 여겨야 합니다. 상식으로는 현재 나에게 일어나고 나를 이끄는 힘은 내가 노력한 그 결과로 얻어진 힘에서 나온다고 여깁니다. 참으로 상식에 부합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다윗의 등불’이란 이미 죽고 없어진 그 다윗이라는 인물과 그때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어진 언약이 계속 미래의 역사 전체가 지배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실제로 다윗의 후손들이 되는 유다왕들에게 있어 이 언약을 알리는 상황이 계속 펼쳐지게 됩니다. 이런 ‘다윗의 등불’이라는 상황이 지니는 취지를 위해서 아비얌은 다윗의 길보다 도리어 다윗의 길에서 벌써 벗어난 아버지 르호보암의 행세를 반복합니다.
그것이 바로 ‘조상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등불’은 여전하다고 알려주십니다. 도대체 ‘다윗의 등불’이 무엇이기에 왕이 우상을 섬겨도 나라는 멀쩡하게 유지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이 사실은 아예 ‘다윗의 등불의 혜택이나 효과’가 없는 북이스라엘과 비교하고 전쟁을 통해서 알려지게 됩니다.

역대하 13장에서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비얌에 대해서 보다 상세하게 나옵니다. 단순하게 ‘북이스라엘과 전쟁했다’가 아니라 그 전쟁을 통해서 남쪽 유다는 북이스라엘과 어떤 점에서 차이나고 있느냐가 드러납니다. 그리고 드러난 차이가 전쟁이 승패에도 관여됩니다. “아비야는 택한바 싸움에 용맹한 군사 사십만으로 싸움을 예비하였고 여로보암은 택한바 큰 용사 팔십만으로 대진한지라 아비야가 에브라임 산 중 스마라임 산 위에 서서 가로되 여로보암과 이스라엘 무리들아 다 들으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이 아니냐”(대하 13:3-5)

아비얌왕이 말한 대목에서 ‘소금언약’이 소개됩니다. 즉 북이스라엘은 소금언약이 없고 남쪽 유다는 소금언약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차이로 인하여 남북대결과 전쟁은 승패는 이미 끝났다는 겁니다. 특히 역대한 13:11에, “조석으로 여호와 앞에 번제를 드리며 분향하며 또 깨끗한 상에 진설병을 놓고 또 금등대가 있어 그 등에 저녁마다 불을 켜나니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계명을 지키나 너희는 그를 배반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물론 북쪽 이스라엘도 나름대로 성전이 있고 등불에 불을 켜놓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여로보암의 등불’이지 결코 ‘다윗의 등불’은 아닌 겁니다. 아비얌은 ‘다윗의 등불’의 여부를 소금언약의 여부로 연결시킵니다. 이 소금언약이 남쪽 유다나라를 북이스라엘과 전혀 다른 정체성으로 확립시켜 주고 있다는 겁니다.

‘소금언약’이란 언약을 소금의 기능적 효과성으로 표현한 겁니다. 즉 소금이란 자신도 썩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남도 썩지 않게 합니다. 이 소금을 하나님께서는 향을 만들 때 섞어넣으라고 하십니다.(출 30:35) 뿐만 아니라 레위기 2:13에 보면 식물성 제물인 소제를 드릴 때 소금을 넣으라고 합니다.

썩지 않는 요소가 함유된 제물은 하나님 언약의 영원성을 드러내어주는 제물이 된다는 말입니다. 민수기 18:19은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영한 응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이니라”

이처럼 아비얌이 북이스라엘과 전쟁을 하면서 북이스라엘과 차이나는 남쪽 나라의 정체성으로 마음 무장할 때, 전쟁 중에서 다급할 때에,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의 일관성을 호소할 수 있었던 겁니다. “여로보암이 유다의 뒤를 둘러 복병하였으므로 그 앞에는 이스라엘 사람이 있고 그 뒤에는 복병이 있는지라 유다 사람이 돌이켜 보고 자기 앞뒤의 적병을 인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제사장은 나팔을 부니라 유다 사람이 소리지르매 유다 사람의 소리지를 때에 하나님이 여로보암과 온 이스라엘을 아비야와 유다 앞에서 쳐서 패하게 하시니라”(대하 13:13-15)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할 것 같은 아비얌이 왜 3년이라는 짧은 통치 가운데서 아버지를 따라 우상을 섬기는 이유가 무엇이었던가요? 그것은 사람에게 있어 ‘나’라는 것은 본인의 절대성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에 의해서 합세되고 마는 겁니다. 즉 인간 자체가 환경의 일부가 되는 겁니다.

아버지 르호보암은 비록 우상을 섬겼지만 나라가 여전히 부강했다는 점을 아들 아비얌이 알고 있었던 겁니다. 즉 안정적으로 막강한 환경 속에서의 인간들의 자아는 자신들이 마땅히 그 모든 환경을 합당하게 누릴 권리나 자격이 있다고 오인해 버리는 겁니다. 인간은 도무지 자기 자신이 누군지를 모릅니다.

세상에 어느 누구가 자식의 고기를 먹을 권리가 부모에게 있다고 평소에 떠벌리고 다니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열왕기하 6:28-29을 통해서 인간은 결코 환경과의 일치성을 거부하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또 가로되 무슨 일이냐 여인이 대답하되 이 여인이 내게 이르기를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오늘날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 하매 우리가 드디어 내 아들을 삶아 먹었더니 이튿날에 내가 이르되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먹으리라 하나 저가 그 아들을 숨겼나이다”

반면에 신약의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상도 못한 환경 속에서 ‘내가 환경을 이용해서 구원이 아니라 새로운 환경이 새로운 자아를 구원해 버린다’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고후 12:1-3)

이렇게 볼때에, 우상이란 진정한 자아를 가리고 덮는 신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참된 여호와 하나님은 반대로 기존의 우리가 아는 자아(=나)에 대해서 하나님의 언약은 변치 않는 소금 기능으로 새롭게 사용하시는 겁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나를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비언약적인지를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9강-열왕기상 15장 1-8절(등불과 소금) 250716-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15장 1-8절입니다.

열왕기상 15:1-8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왕 제 십팔년에 아비얌이 유다 왕이 되고 예루살렘에서 삼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마아가라 아비살롬의 딸이더라 아비얌이 그 부친의 이미 행한 모든 죄를 행하고 그 마음이 그 조상 다윗의 마음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저에게 등불을 주시되 그 아들을 세워 후사가 되게 하사 예루살렘을 견고케 하셨으니 이는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고 자기에게 명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 사는 날 동안 전쟁이 있었더니 아비얌과 여로보암 사이에도 전쟁이 있으니라 아비얌의 남은 사적과 무릇 행한 일이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아비얌이 그 열조와 함께 자니 다윗성에 장사 되고 그 아들 아사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아비얌’이라는 인물을 성경은 집중 조명하고 있습니다. 추적하고 있고 주목하고 있습니다. “아비얌을 보라.” 아비얌을 보라는 것은 ‘아비얌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라. 하나님이 누구시냐를 궁금해하지 말고 아비얌이라는 인생의 굴곡과 여정 속에 하나님의 일이 삽입되어 있다.’라고 하나님은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이 계시 책에 있는 거예요. 따라서 ‘만약 아비얌이라는 사람이 없다 했을 때, 또는 아비얌을 역사 속에서 빼버린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어떤 대목을 알지 못하게 되는가?’ 그 점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비얌이라는 이런 사람 몰라도 되잖아?’ ‘몰라도 되잖아’가 아니고요, 아비얌을 몰랐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일의 연속성이 끊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아비얌은 인간의 대단함을 위해서 등장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이 아비얌이라는 그 인물을 통해서 어떻게 꺾이고 어떻게 흐르는지를 보여주는 겁니다. 강이 발원지에서 바다까지 올 때 수백, 수천 차례의 꺾임이 있잖아요. ‘강은 발원지에서 바다로 흐르겠지’ 그게 아니고 직접 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다시 강줄기를 따라서 내려가 봐야 그 강줄기에 담겨 있는 강의 본질을 알듯이 하나님의 계시도 강물 같아요.

구약부터 출발한, 창세기부터 출발한 그 강줄기가 예수님에게 다다라 바다가 되는 겁니다, 천국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말씀을 다 이루었다고 이야기했어요. 창세기 알고 다 이루었다, 해버리는 식으로 그 중간을 삭제하면 하나님의 일을 알 길이 없지요. 그래서 우리는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중간중간에 있는 사실들을 ‘몰라도 된다’라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주 전체에 관한 것이고,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 열왕기상 15장 8절에 “아비얌이 그 열조와 함께 자니.” 결국은 죽었다고 되어 있어요. ‘아비얌? 그 사람 죽었잖아.’ 이거 알면 하나님의 뜻 아는 겁니까? 안 죽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 죽지요.

‘아비얌은 죽었다. 죽었으니 죽은 그 옛날 사람 알 필요 없다.’ 이렇게 하지 마시고 ‘그 사람이 태어나서 죽은 그 사이에, 삶과 죽음 사이에 무엇이 있었느냐?’ 그것을 아시면 되는 겁니다. 무엇이 있었느냐를 제가 말씀드릴게요. 환경이 있습니다. 환경, 어떤 환경인가?

오늘 본문 4절에 나옵니다. “그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저에게 등불을 주시되.” 등불이란 계속 켜져 있어야 맛이거든요. 등불이 켜져 있는 상태, out 상태가 아니라 on 상태가 계속되더라는 말이지요. 이 더운 날 밖에 나갔다가 집안에 들어오면 서늘해요. 밖이 얼마나 덥습니까? ‘집안에 무슨 일이 있었지?’ 무슨 일은요, 에어컨이 켜져 있었지요.

‘왜 갑자기 시원하지?’ 에어컨이 켜져 있었죠. ‘아비얌이 하나님 보시기에 모든 죄를 범했다. 그런데 왜 죽어서 다윗 족보에 얹히지? 뭐가 작동되고 있고 뭐가 켜져 있었지?’라고 묻는다면 ‘아하, 다윗의 등불이 켜져 있었구나.’ 아비얌이 분명히 우상을 섬기고 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유다가 유지된다는 것은 에어컨 정도가 아니라 다윗의 등불이 켜져 있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비얌이라는 인물을 기록하게 한 것은 ‘아비얌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다윗의 등불이 대체 뭐냐? 하나님께서 다윗의 등불을 켜 놓았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를 보여주는 거예요. 열왕기상 15장 6-7절에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 사는 날 동안 전쟁이 있었더니 아비얌과 여로보암 사이에도 전쟁이 있으니라.”

이 전쟁은 우리 보기에는 그냥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의 전쟁으로 보이지만 성경은 그렇게 보지 말라는 거예요. ‘북쪽에는 뭐가 없고, 남쪽에는 뭐가 있는데 둘이 싸웠다’ 그렇게 돼요. 북쪽에는 다윗의 등불이 없어요. 더운데 에어컨이 없어요. 남쪽에는 다윗의 등불이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하나님이 우리에게 강조합니다. ‘다윗의 등불이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보다 더 우선되고 더 소중하다’라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의 할 일은 좁혀졌어요. 아비얌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하나님은 다윗의 등불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알리고자 한다.

다윗의 등불이 있는 남쪽 유다 아비얌과 등불이 없는 북쪽의 여로보암과 전쟁하는 것이 역대하 13장에 나옵니다. 역대하 13장에서는 ‘아비야’라고 나오는데 아비얌과 동일 인물입니다. 아비얌이 전쟁을 하면서 전쟁의 의미를 북쪽 여로보암에게 이야기해요. ‘우리에게는 이런이런 것이 있는데 너희에게는 없잖아. 그러니까 우리 둘이 전쟁하면 너희는 지게 되어 있다.’라는 결론을 선전포고하듯이 미리 이야기해요.

북쪽에는 다윗의 등불이 없고 남쪽에만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일단 알고요, 좀 더 세밀하게 다윗의 등불이 무엇인가를 아비얌의 입을 통해서 알 수는 없을까? 그것이 역대하 13장에 나옵니다. 남쪽에는 40만 군대가 있고 북쪽에는 80만 군대가 있었다는 내용이 3절에 나옵니다. 그러면 군사력으로만 보면 완전히 두 배지요.

두 배나 되는 군사의 숫자를 이렇게 알려주는 것은, ‘마지막에 누가 이겼다’에 대해서 군사력이 아닌 다른 요소가 남북의 전쟁에 개입했다는 거예요. 그 다른 요소로 인하여 군사력을 배나 가진 북쪽이 전쟁에서 졌다는 거예요. 군사가 반밖에 안 되는 남쪽에게 졌다는 겁니다. 그러면 남쪽이 이기게 된 결정적인 것은 뭐냐?

다윗의 등불이겠지요. 역대하 13장에서는 다윗의 등불이라는 것은 없고 이것이 있어요. ‘우리는 성전 안에 등대가 있는데 저녁마다 그 등대에 불을 켠다.’ 역대하 13장 10-11절에 “우리에게는 여호와께서 우리 하나님이 되시니 그를 우리가 배반치 아니하였고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이 있으니 아론의 자손이요 또 레위 사람이 수종을 들어 조석으로 여호와 앞에 번제를 드리며 분향하며 또 깨끗한 상에 진설병을 놓고 또 금 등대가 있어 그 등에 저녁마다 불을 켜나니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계명을 지키나 너희는 그를 배반하였느니라.”

제가 아까 했듯이 등불은 켜있어야 맛이라고 했습니다. 불이 꺼진 등은 있으나 마나지요. 뭔가 우리 쪽에는 계속 불이 켜져 있다는 거예요. 불이 켜져 있는 장소가 어디냐? 성전이에요. “그런데 북쪽 너희들은…” 북쪽을 북한이라고 봅시다. “북한 너희들은 가짜 성전이잖아, 가짜 성전!”

가짜 성전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지도 않은 성전이기 때문에 있으나 마나 그것은 하나님이 지켜주지 않는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면 북쪽에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우리도 성전 있어”라고 하거든요. “우리도 매일 저녁 등불 피운다.” 이렇게 이야기한다는 그 말이지요.

그것은 그들의 억지에요. 왜냐하면 여러보암이 성전 만들고 거기서 등불 켜는 그것은 ‘여로보암의 등불’이지요. 그런데 남쪽에는 아비얌 왕 때이지만 아비얌의 등불이 아니고 무슨 등불이냐 하면, 이미 죽은 다윗의 등불이에요. 이미 고인이 된 다윗의 등불이 왜 계속 유지가 된다고 생각하느냐?

다윗은 죽었지만 다윗언약은 안 죽고 그 후손들에게 계속 살아 있다는 겁니다. 다윗과 하나님 사이에 약속했던 그 약속이 실효성을 가지고, 그것을 언약실효성이라 하는데 언약이 실제적인 효과를 가지고 계속 남쪽에 살아 있다는 겁니다. 북쪽에는 인간들만 살아 있어요.

그런데 남쪽에는 언약이 살아 있다는 조건하에 하나님께서 남쪽의 군사들을 지켜서 살게 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살아서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살아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아직도 하나님은 우리를 살게 해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나 우째 사노?’ 이런 식으로 자꾸 생각하지 마시고 ‘주께서 어떻게 살려내고 있노?’ 이렇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살려주시는 이유는, 우리 안에 주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생명의 약속이에요. 우리 안에 영생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죽을 때까지 영생의 효과, ‘너 같은 죄인을 죄 없는 사람만 가는 천국에 거뜬히 넣어준다.’라는 효과로써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등불을 지켜주듯이 우리 안에 생명의 말씀을, 에어컨을 켜두는 거예요.

남들이 ‘돈이 있네, 없네’ 또 ‘배웠네, 못 배웠네.’ 놀리더라도 우리 안은 시~원해야 합니다. 주님이 켜놨어요. 바깥은 껍데기, 안은 영생. 그래서 저는 그런 예를 든 적이 있는데 인간이라 하는 것은 다 빨아먹고 갖다 버린 쭈쭈바 껍데기라고요. 이상하게 쭈쭈바 껍데기는 비닐이잖아요. 처음 샀을 때는 탱탱한 게 보기 좋아요. 쪽쪽 빨아먹으면 쭈그러들면서 안에 내용물이 하나도 없어요. 툭, 갖다 버리죠.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다. 그럴싸하게 외모, 가진 것들 자랑하지만 생명이 빠진 쭈쭈바는 아무 쓸모 없습니다. 주께서 빨아먹을 것이 있어야지요. 전에 그런 이야기도 한 적이 있지요. 주께서는 불에 태운 음식물만 받는다고요. 훈제? “너 불 통과했어? 불을 통과했는데도 살아있네. 네가 나의 양식이다, 나의 조찬이다.”하고 받아 드시는 거예요.

이것이 레위기 1장에 나오는 겁니다. ‘기쁘게 받으시는 향기로운 냄새다. 내 응식이다.’ 그리고 그 응식을 제사장의 양식이 되게 하셨던 거예요. 어쨌든 아비얌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있다는 것, 다윗부터 계약 속에서 한결같이 지속적으로 일관되게 내려오는 그것이 뭐냐?

그것이 역대하 13장 5절에 나옵니다. 남쪽 왕이 북쪽 여로보암 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 집에는 있는데 너희 집에는 이런이런 것이 있어?”하고 자랑하는 것과 같은 거예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이 아니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소금언약’, 왜 갑자기 소금이 등장하지요? 소금언약과 다윗의 등불과 무슨 관련성이 있느냐 하는 거지요. 다윗의 등불은 뭔가 하나님의 약속이, 등불이 켜져 있는 것과 같이 밝게 켜져 있다는 것이고, 그 등불을 켜기 위해서 안에는 어떤 조건이 작동해야 하느냐 하면, 소금언약이 작동해야 된다는 겁니다.

아비얌이 이렇게 소금언약을 언급했어요. 그러니 열왕기상 15장의 아비얌하고 역대하 13장의 아비얌하고 완전히 딴 사람 같지요. 왜? 열왕기상 15장의 아비얌은 “아비얌이 그 부친의 이미 행한 모든 죄를 행하고”(3절) 부친이 르호보암을 말하는데 우상 섬긴 아버지따라 같이 우상 섬겼다는 그 말입니다.

아버지가 우상 섬겼다는데 아버지는 강대했어요. 다윗의 등불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인 아비얌은 다윗의 등불 때문에 나라가 튼튼하게 아무 문제 없다는 생각은 못 하고 ‘아버지가 우상 섬겨도 괜찮네. 나도 좀 섬기면 어때?’ 이런 식으로 나온 거예요. 열왕기상 15장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역대하 13장에서는 남과 북의 전쟁 이야기가 아주 구체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선전포고를 어떤 내용으로 구체적으로 했는지도 역대하 13장에는 나옵니다. 여기서 바로 소금언약을 언급하는 겁니다.

자 소금언약의 특징이 뭐냐? 자기도 썩지 않고 남도 썩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소금의 특징이에요. 썩는다는 것은 뭐가 중도에 소멸되었다, 없어졌다, 사라졌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소금을 친다는 것은 사라질 것도 사라지지 않게 하는 강제조치, 조건으로 소금요소가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소금요소가 어디에 들어가는가? 성전의 향을 만들 때 소금을 넣어요. 그러면 향은 소금기를 머금고 있겠지요. 출애굽기 30장 35절에 그게 나와 있어요.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그리고 레위기 2장 13절에 보면 식물성 제물은 빨리 부패합니다. 그래서 식물성 제물에 소금을 뿌려요.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찌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찌니라.” 그리고 그 소금을 뿌린, 소금기가 있는 제물은 소제라는 이름으로 하나님께서 받습니다.

민수기 18장 19절에서는 그런 취지를 한꺼번에 종합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영한 응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이니라.”

변하지 않는 소금언약이다. 소금은 한결같다, 일관되다, 영원하다. 소멸되는 인간의 육체로 살아가는 인간, 없어질 인간, 거기에 뭐 영원한 것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그 말입니다. 아까 아비얌도 결국 죽었다고 되어 있는데 인생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인간에게 일어나는 그 일은요, 여러분이 한 번 생각하고 따져보세요. 인간은 그 속에서 자꾸 자아, 나, 어렵게 말하면 자아, 쉽게 말하면 나, 그 ‘나’가 한결같다고 착각해요. 자꾸 오해하고 있거든요. ‘나는 어제나 오늘이나 같아.’ 그런데 한 번 상상을 해보는 겁니다.

부자들의 저택으로 가득 차 있는 마을을 높은 축대 위에서 내려다본다고 합시다. 부잣집 정원이 내려다보입니다. 향나무가 심겨 있고, 잘 가꾼 푸른 잔디가 있고요. 백 평 이상 되는 2층으로 지어진 저택, 그런 저택을 내려다보면 마치 자신이 부잣집 도련님 같은 느낌을 준다고요. 그런 골목, 조용해서 사람도 별로 없어요.

만약에 또 여러분들이 추운 겨울날 아주 촌스러운 골짜기 시골 장터 5일 장에 놀러 가면 어느새 자기가 촌사람 같아요. 부잣집의 고급 차 타고 가게 되면 잠시나마 들뜨죠. 고급 차 탈 만한, 이런 호사를 누릴만한 자격이 되는 자아로 변화가 되었다가, 촌에 가서 경운기 타든지 혹은 시골 버스 타면 촌사람으로 쉽게 적응이 돼요.

이 말은 뭐냐? 인간은 환경에 따라 그때그때 자아가 바뀝니다. 그것을 캐치하는 사람이 바로 소설가들이에요, 드라마 작가, 시나리오 작가, 영화 작가. 작가들이 하는 작업이 뭐냐? 정제된 순수한 나를 찾는 작업을 소설을 통해서 하는 거예요. 그게 작가들이 하는 일이에요.

‘도대체 나는 누구냐?’ 그래서 소설책을 읽으면 그 환경 속에 빠지면서 마치 내가 그 소설의 주인공인 것처럼 울고 웃고 난리도 아니죠. 소설 중에 우리가 어릴 때부터 읽은 소설이 뭐냐? 인어 공주, 백설 공주, 주로 공주 쪽이죠. 그리고 영국의 아서왕, 그런 모험 이야기들. 나는 그 소설 읽으면서 소설의 주인공이 되고, 새로운 나에게 그런 요소가 있다고 자부하게 돼요. 가짜입니다, 가짜에요.

아비얌이 아버지 따라 우상을 섬겼는데 아비얌이 우상을 섬겼던 이유는, 진정한 자아에 대해서 곡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슨 뜻이냐? 아비얌은 자기가 왕이잖아요. 왕이니까 ‘이 왕의 자리는 내 자리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내 것이 있으면 내게 소유된 그 내 것으로 인하여 ‘나’라는 인식이 재정립이 돼요.

그런 일이 별로 없지만, 만약 여러분들이 복권 1등 당첨돼서 한 76억이 있으면 옛날처럼 못 살아요. 나한테 걸맞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 갑자기 넓은 아파트로 이사 가든지 차를 바꾸든지 합니다. 내가 이 정도 누릴 자격이 된다고 착각하게 돼요.

그래서 이런 것을 우리가 그냥 세상 이야기라고 하는 데 성경에 보면 이게 나옵니다. 성경에 보면 인간이 환경 따라서 얼마나 자아라는 것이 잘 뒤집어지는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도대체 한 번도 내가 누군지를 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긍정적으로 내가 누구냐를 보여주는 환경은 고린도후서 12장 1-3절에 나옵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이게 무슨 이야기냐? 셋째 하늘에 올라간 그 사람이 분명히 사도 바울 본인이에요. 본인인데 그 계시가 있기 전의 ‘나’는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알던 내가 아닌 내가 셋째 하늘로 올라갔단 말이죠. 그러니까 굳이 셋째 하늘에 올라간 자를 내가 안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그냥 바꿔 쳐서 ‘하나님이 아신다’로 그치겠다는 거예요.

내가 나를 안다는 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내가 셋째 하늘 가고 싶어서 갔습니까? 하나님이 알아서 가게 했으면 셋째 하늘 간 그 ‘나’는 하나님이 알고 있던 ‘나’지 사전에 내가 알던 그 나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참 어려운 이야기지만 해야 하겠어요.

여러분이 아는 나는 지옥 갑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모르는 ‘나’가 천국 갑니다. 이 이야기를 복음 안의 내용으로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해야 해요. 하도 사람들이 “나 예수 믿습니다. 천국 보내주세요.” 자꾸 자기가 아는 나를 천국에 들어가는 나로 연장시키는데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천국 간다고 우겨버리면 일곱 귀신 마귀가 달려들어요. 안 돼요.

현재 내가 알고 있는 나는, 내가 아는 나는 엉터리 나예요. 나는 환경 따라 다르기 때문에 종잡을 수 없습니다. 또 긍정적인 나를 하나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긍정적인 걸 먼저 해야 부정적인 걸 할 때 여러분이 충격을 안 받죠.

마태복음 17장 1-3절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여기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해 같이 빛난 것이 아니고요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해 같이 빛났어요. 그런데 모세와 엘리야는요, 지상에 있을 때 해 같이 안 빛났어요. 그러니까 모세와 엘리야 본인들이 아는 나, 자아는 진짜 자아가 아니고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그때 진짜 자아가 모세 엘리야란 말이죠.

그 원칙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고요, 여러분에게도 적용되고요, 저에게도 적용되고,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에게도 적용돼요. 그런데 그 당시에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뭐라고 하느냐? 마태복음 17장 4절에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우리를 위해서는 아니고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왜? 해 같이 빛나니까. 해 같이 빛나는 사람들만 모시는 그런 전원주택, 처소를 지어서 “우리는 그냥 밖에서, 한 데서 자도 괜찮습니다. 모시는 걸로 족합니다.” 이렇게 나왔단 말이죠.

그러니까 변화산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내가 누군지를 아예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그것이 바로 뭐다? 천국이다, 이거에요.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나’가, 주님의 천국 환경으로서 더 이상 내가 생각을 하지 않아도 괜찮은 환경이 천국입니다. 따라서 다시 말씀드립니다. 환경이 ‘내가 누구냐’를 결정합니다.

그런데 작가들은 그 인간의 여러 가지 상황을 뽑아서 이게 인간이라고 자꾸 정제해서 ‘이게 저와 여러분입니다.’ 하고 자꾸 소개하는데 그게 엉터리에요. <데미안>(Demian, 1919)이라는 책에 보면 헤르만 헤세(Hermann Karl Hesse, 1877-1962) 그 사람이 말하기를 ‘인간이란 자기 세계를 깨고 나올 때 진정한 자아를 발견한다.’

이 사람은 사상이 완전히 불교 사상이에요. 변화산 아닙니다. 불교에 무슨 변화산이 있어요. ‘지독하게 연구하면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아닙니다. 엉터리입니다. 주어진 환경 따라 인간은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 환경이 어떤 환경인지, 이번에는 부정적인 환경일 때 인간은 어떻게 변하는지 보겠습니다.

열왕기하 6장 28-29절에 보면 아람 나라가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포위하니까 양식이 다 떨어졌어요. 전쟁할 때 굳이 활 쏘고 할 것이 완전히 포위해서 외부에서 투입되는 양식을 다 끊어버리면 그쪽에 식량난이 와서 난리도 아니잖아요.

미국이 이란이나 북한을 압박할 때 바로 무역 통제를 함으로써 핵 개발을 하지 말라고 압박하는 것과 똑같아요. 어떤 나라도 자체적인 생산물로만 살 수가 없어요. 이게 옛날 성과 성 싸움할 때처럼 현대에도 그렇게 싸움해요.

“또 가로되 무슨 일이냐 여인이 대답하되 이 여인이 내게 이르기를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오늘날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 하매 우리가 드디어 내 아들을 삶아 먹었더니 이튿날에 내가 이르되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먹으리라 하나 저가 그 아들을 숨겼나이다”

이건 뭐 자기 배에서 난 자식으로 완전히 백숙해 먹는 거예요. 인삼도 빠진 삼계탕? 평소에 얼마나 예뻐했겠어요. “아이고, 이렇게 이쁜 내 새끼!” 그러나 막상 다른 환경이 딱 들어서니까 평소에 그렇게도 귀여웠던 내 자식이 내가 살기 위한 양식으로 보이는 겁니다.

이렇게 식량이 단절됐을 때 그때 상황에서, ‘이렇게 나는 지독하게 자식마저 양식으로 삼는다’라는 것, 평소에 여유 있을 때 과연 내가 나를 그런 인간이라고 생각했겠습니까? 평소에 “우리 친구 아이가!” 이렇게 했다가도 전쟁 통에 건빵 하나 가지고 싸우고 있어요.

인간은 환경 바뀌면 모릅니다. 직장 다니고 취미 생활도 하다가 빡빡한 직장으로 옮겨버리면 ‘굳이 이렇게 해서 내가 살아야 하나?’ 동일한 인물이 상황이 바뀌니까 갑자기 예상도 못 한 다른 인간으로 그 본질이 드러나 버려요.

또 하나 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28절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리는 그 어간에 불쌍하다고 주변에서 아줌마들이 막 울었단 말이죠. 그것도 그냥 우는 것이 아니라 가슴을 치면서 따라오고 통곡하며 울었어요. 27-28절에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예수님이 안됐다고 따라오면서 우는 거예요. 자기 집안 가족 일에는 안 울어도 김호중이 감옥 가니까 팬들이 울고, 자기가 좋아하는 어떤 가수 아파 죽으면 또 울고, 방탄소년단 군대 간다고 울고요, 온 세계 소녀들이. 나 군대 갔을 땐 아무도 안 울었어요.

그러니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너무나 단순하게. 방탄소년단이 아예 없었으면 “내가 어떤 남자가 군대 가도 안 운다.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야!” 얼마나 장담했겠어요. 상황은 전혀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겁니다. “내가 남 죽으라고 비는 그런 나쁜 사람이 아니야.”라고 했던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 “저 사람 죽어 마땅해.” 이런 식으로 예수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는 요소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죠.

헌금을 하나님께 한다고요? 무슨 말씀 합니까? 헌금은 교회 회사에 주식 투자한 거예요.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해놓고 어떤 목사가 헌금 가지고 장난치니까 “너 나와! 내가 돈 보태 세운 부동산 네가 왜 마음대로 하느냐?” 인간은 자기 자신을 몰라요. 상황 따라서 그냥 변명할 뿐입니다.

그래서 이걸 종합하면 이렇습니다. 도대체 나를 얼마나 쪼개야 나를 알 수 있느냐? 쪼개고 쪼개서 집게로 이게 나라고 뽑아낼 수 있느냐? 없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나라는 것을 얼마나 끌어모으고 또 끌어모아서 이게 나답다고 멈출 수가 있느냐? 그 욕망은 멈추지 않습니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모조리 가짜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아비얌은 전쟁에서 승리를 했어요. 역대하 13장에서 승리를 했습니다. 북쪽 왕에게 “너 공격 하지 마.” 이렇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공격했거든요. 북쪽에서 복병을 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이긴다. 전략적으로 옛날부터 했던 거다.” 하고 80만 대군이 복병 작전을 했어요. 완벽하게 덫에 걸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남쪽은 복병한 것도 몰랐어요. 모르면 백 프로 지게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이 역대하 13장 14절에 죽 나옵니다. “유다 사람이 돌이켜 보고 자기 앞 뒤의 적병을 인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제사장은 나팔을 부니라.”

그러니까 “복병이다! 적병이다!” 부르짖었거든요. “하나님이여, 이거 우리 힘으로는 안 됩니다.” 이렇게 하니까 하나님이 도와줘서 적들이 북쪽 이스라엘이 대패한 거예요. 15-17절에 “유다 사람이 소리 지르매 유다 사람의 소리 지를 때에 하나님이 여로보암과 온 이스라엘을 아비야와 유다 앞에서 쳐서 패하게 하시니 이스라엘 자손이 유다 앞에서 도망하는지라 하나님이 그 손에 붙이신고로 아비야와 그 백성이 크게 도륙하니 이스라엘의 택한 병정이 죽임을 입고 엎드러진 자가 오십만이었더라.”

남쪽이 이겼어요. 그래서 몇 명이 죽었냐? 17절에, 80만 대군 중에 50만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18절에 거기에 대해 해석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항복하고 유다 자손이 이기었으니 이는 저희가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음이라.” 이렇게 되어 있다고요. 이게 누구냐? 이게 아비얌이에요.

오늘 본문 열왕기상 15장에서는, 아비얌이 우상을 섬겼거든요. 우상을 섬겼다는 것은, 진짜 나를 알 수 있는 기회가 내가 선택한 신으로 인하여 나를 모르도록 가린 겁니다. 이걸 쉽게 이야기하면, 말씀을 안 보게 되면 진짜 나를 예수님의 십자가와 견주지 않는 상황이기 때문에 내가 아주 평온하고 안정된 이것을 마땅히 누려도 될 정도로 대단한 존재인 줄로 착각하게 되어 있어요. 말씀을 보시고 말씀을 들으시라고 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만 우리 자신이 얼마나 가짜인 것을 티 내고, 자기를 감추며 살아가는지 그 엉터리 죄가 들춰지는 겁니다.

이제 말씀을 맺을 때가 되었습니다. ‘내가 누구냐’를 제대로 지적하지 않는 신이 바로 우상입니다. 그래서 어제 강남 강의에서 이야기했어요. 성경 해석할 때는 뭘 쫙 빼라고 했습니까? 윤리·도덕을 다 빼고 성경 해석을 해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미 범죄 했을 때 윤리·도덕으로, 선악과 체제로 무장되어 있는 마음이기 때문에 어느 성경을 봐도 자기가 착해지려고, 자기가 얼마나 훌륭하고 착한 사람인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성경을 봐요. ‘아, 내가 이 점이 잘못됐구나. 그렇다면 회개하고 반성하면 하나님이 복 줘서 다시 괜찮은 인간으로 바뀌겠지.’ 이런 선입관을 가지고 성경을 본다고요.

그러니까 그 윤리·도덕을 빼고 성경을 보시라는 거예요. 윤리·도덕을 빼버리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건덕지 자체가 없는데요? 윤리·도덕을 빼면 남는 것은 뭐냐? 하나님의 등불이, 다윗의 등불이, 주님의 소금 언약, 그 언약이 자체적으로 만드는 환경만 자체적으로 남아요.

그 환경은 바로 예수님이 다 이뤘다는 환경, 주께서 친히 알아서 천국을 만드는 그 환경 안에서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내 모습이 얼마나 하나님의 언약과 상관없이 내 기준으로 살아가는지 티가 나는 겁니다. 그 티가 날 때 격차를 보고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끝으로 소금이라는 것 가지고 성경의 두 군데를 찾아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13절, 유명한 말씀이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소금 언약이 다 이뤄진 환경이 만들어낸 생산물이 오늘날 성도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뭐냐? 짭짤한 소금기가 있어야 해요. 소금기라는 것은 내 안에 하나님의 영생의 영원함, 한결같이 에어컨을 늘 켜놓는,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환경이 내 속에 들어있는 이 맛을 소금 맛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4장 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너의 말 속에 어떤 단어 어떤 문장으로 하든 간에 이 단어 하나에 소금이 들어있고, 저 단어에 소금이 들어있고.

우리가 어떤 세상 모임에 가더라도, 직장에 가서도, 학부모와 전화하거나 뭘 하더라도 이 소금기, ‘내 안에 영생이 있다. 영생이라는 환경 있다. 내 안에 시원한 에어컨 켜져 있다. 하나님 다윗의 등불이 켜져 있다.’ 이런 마음 자세로서 소금기가 없는 세상 사람들에게 자부심을 가지고 그들에게 대화를 하게 되면 상대방이 “어떻게 당신은 성을 낼 만도 한데 왜 성을 안 냅니까?”

그러면 이제 소금기가 있는 성도는 딱 하나만 하면 됩니다. ‘풉! 칫! 그게 성령께서…’ 그런데 겉으로 말은 하면 안 되죠. 말하면 예의에 어긋나니까 “그것이 고민거립니까? 아 그랬었어요?” ‘소금기 없는 환경, 다윗의 등불이 없는 환경, 소금 언약이 없는 환경 속의 사람은 저렇게 늘 불안해하며 살아가는구나. 참 웃긴다.’ 이렇게.

안정감이 없어요. 자기를 지키려고 하고, 자기를 속이고. 하나님의 소금 언약이 있고, 하나님의 다윗 등불이 켜져 있는 안정적인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하나님 언약을 주실 때 일관되게 항상 썩지 않는 존재로 찾아오신 것을 감사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 속이 말씀의 환경으로 조건 지어진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 생활이 엉망이어도 우리 안에 하나님의 소금의 효과, 등불의 효과가 늘 살아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수요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수리 시선  (11) 2025.07.31
선물 지키기 전쟁  (13) 2025.07.24
천국 표준말  (10) 2025.07.10
저주와 변호  (2) 2025.07.03
남쪽 선지자  (4) 2025.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