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구 없는 세상
2025년 7월 13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1:23-26
11: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11: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천국을 설명하는데 있어 하나님께서는 특정 인물을 지목하고 그 인물의 여정에 특이한 내용을 담습니다. 세상에서 벌리는 인공적인 요소는 끼어들 수 없도록 배제됩니다. 모세가 무엇을 가졌는가 보다 모세가 무엇을 배제했는가를 보세요. 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됨’을 거절했습니다.
이것을 왜 거절하지요? 그것은 바로 ‘땅의 권세’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즉 하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땅의 권세’에서 빠져 나옴이 필수적이다는 말입니다. 주님에 의해 강제 분리가 실시됩니다. 일단 하나님께서는 모세 인생을 절단냅니다. 모세의 어미니 요게벳(출 6:20)은 혈육적으로 할 수 있는 것으로 기존의 권세를 거부해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세를 껴안고 계속 살 수 없어 물에 유기하기로 마음먹습니다. 버린 아이가 하필이면 바로왕의 딸의 손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로서 모세는 살았지만 이미 죽은 적이 있는 인물이요 있었지만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강제로 모세로 하여금 바로 왕가로부터 떨어져 나오도록 조치합니다.
이로서 모세와 더불어 나온 자들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들은 사실상 ‘준비 없는 구원’입니다. 그들은 할 수 없는 게 아무 것도 없으면서 무작정 애굽나라에서 나오게 됩니다. 하늘나라에 가는 것은 자신들이 준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준비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고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고난’이란 ‘바로 공주의 아들’에서 떼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공주의 아들’에 대해서 오늘 본문에서는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왜 애굽에서 산다는 것이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이 될까요? 그 이유는 ‘말씀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 일행을 광야로 흘러들어가게 하십니다. 애굽나라는 자연물 바탕 위에 인공물의 세계를 건설한 겁니다. 그 인공물로부터 떼어내어지는 이스라엘은 순수한 자연물만 있는 광야 공간으로 접어들어갑니다. 거기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야말로 인간들은 죽기 전부터 이미 흙이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이란 새삼스럽게 인간에게 미래를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이미 확정해 놓은 원리를 반복하게 하십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은 이미 흙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4장에서 인간은 아무리 발바둥쳐도 악의 권세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이란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자연의 무의미성에서 도망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즉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기에 아무 것도 아니어야 하고, 인간은 이미 죽었기에 기어이 죽어야 합니다. 이게 인간의 본래의 모습니다. 세상의 권세에 현혹되어 인공물을 잔뜩 땅 위에 쌓아놓고 지낸다 할지라도 없는 존재가 있는 존재 되는 것도 아니요 죽은 존재가 산 존재 되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광야 생활이란 자연물과 이제는 말씀의 세계가 따로 있음을 보여주는 경로입니다. 즉 말씀의 권세가 인공의 권세 말고 따로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메마를 자연세계인 광야를 통해서 말입니다. 도대체 이 악의 권세가 노리는 것이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1:5에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참 이상하죠? 물리적으로 자연세계는 아무리 어둡더라도 빛이 보면 어두움을 빛을 알아보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물리적 세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완벽하게 차단된 어두움의 권세벽이 쳐져 있습니다. 아무리 빛을 비춰봤자 이 세상은 여전히 빛 존재조차 모르고 어두움에 지냅니다.
이것이 바로 죄악의 낙이 펼치지는 애굽이라는 세계입니다. 그 세계에서 이스라엘이 강제로 분리되어 광야 길로 들어선 겁니다. 그런데 이 철저한 권세벽에 구멍이 나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그들은 세상의 권세벽을 뚫을 수가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이 권세는 혈육에서 내려오는 권세가 아니랍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그렇다면 이미 이들이 구원받은 입장에서 왜 고난이 주어지는 겁니까? 그것은 구원이라는 게 자신의 구원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동행하는 ‘하나님의 이름’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즉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고난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는 광야길를 통해서 제외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준비하는 평화란 말씀에 입각해서 인간은 죽은 자요 없는 자가 유지되는 상황입니다. 오로지 주님만이 살아 있는 분이요 계신 분인 상황이 평화의 세계며 안식의 세계인 겁니다.
인간들이 갖는 마음의 괴로움이나 우울증이나 번민은 자신을 여전히 살아 있는 존재라고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의 구원이라면 나머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새로운 열매가 됩니다. 이 열매들이 모여 ‘하나님의 장자’, 곧 ‘맏이’가 되는 집단이 됩니다. 이렇게 되려면 그 안에 ‘말씀의 권세’가 담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시고 사람이 맏이가 되는 관계는 예수님으로서 완성이 됩니다. 이제 기존의 인간의 몸으로 표현되는 형상말고 예수님의 몸으로 표현되는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새로운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이로서 인간의 몸을 가지고 저주의 열매와 복의 열매로 양분시킵니다.
마치 붕어빵을 굽는 틀에서 양꼬가 담긴 밀가루 반죽은 틀 안에서 하늘을 향해 뒤집혀야 합니다. 그동안 인간들의 어두움에 가두어두었던 악한 권세의 조각이 떨어지게 되면 하늘을 통해서 광채가 비취게 되고 바로 그 밝은 빛이 보이는 쪽으로 성도는 살아가는 이 모습,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는 ‘고난’이라고 하는 겁니다.
히브리서 2:10-11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단 한 사람이라도 천국의 빛을 발산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충분함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75강-히브리서 11장 24-26절(출구없는 세상)250713-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1장 24-26절입니다.
히브리서 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여기 모세가 등장하면서 다시금 반복해서 이 땅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 어떤 증거를 남기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모세를 보아라. 천국이 있잖아.”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러면 그 당시에 모세만 사람이었습니까? 모세만 살았습니까? 그렇지 않죠. 모세 말고 다른 사람도 살았죠.
“다른 사람을 보라. 천국이 있잖아.” 왜 그런 이야기는 안 하고 모세를 딱 지목해서 “모세를 보라. 천국이 바로 저기에 있잖아.”라고 설명할 수 있는가? 보이지 않는 세계, 실상의 세계가 모세란 인물을 태어나게 하면서 그 모세 인물에 천국의 본질이 어떻게 실려서 같이 인생을 동반하고 있는지를 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모세를 볼 때 뭐부터 제껴야 하느냐? 우리는 뭘 보지 않아야 하느냐? 모세를 보겠다고 마음먹으면 나 자신의 인생을 보지 마세요. 그리고 이 세상에 모세 말고 다른 인생도 치워버리세요. 이제는 내 자리가 아니고 모세가 내 자리에 들어와서 내 자리를 접수했을 때 모세에게 일어난 현상이 오늘날 어떻게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연속적으로 가는 것처럼 이 세상을 향하는 하늘나라도 연속적으로 같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 인생을 통해서 적절한 표현을 하자면 ‘모세 인물은 천국과 세상의 중첩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수퍼포지션(Superposition)’이라고 하는데 중첩됐다는 말은 0과 1이 있다면 ‘2분의 1’이 안 보이는 거예요.
어떤 때는 0으로 보이고 어떨 땐 1로 보이고, 분명히 중간이 있어야 하는데 중간이 없어요. 따라서 0의 세계와 1의 세계, 1의 세계가 이 세상이고 0의 세계가 천국이라면 천국 세계와 이 세상이 같이 포개져 있는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3절에 나오는 거예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이미 우리는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다른 곳, 하늘나라에 가 있다. 이게 바로 ‘수퍼포지션’ 중첩이라는 겁니다.
중첩이 되면 어떤 현상이 되느냐? 하늘과 땅이 중첩된 사람에게는 하늘과 땅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 얽혀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겁니다. 상호작용이라는 것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동전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지구에 뒀고 하나는 달에 놨다 칩시다.
여기서 지구에 있는 동전을 팽팽 돌려서 손으로 쳐 앞면이 나오는 순간 아무 상관 없는 달에 있는 동전은 뒷면이 나오는 거예요. 지구에 있는 동전을 탁 쳐서 뒷면이 나온다면 우리 보기에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달의 저 동전은 앞면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상호 얽힘이죠. 양자 물리학에서 이것을 과학자들이 발견해서 논리로 따질 것이 아니고 이것은 믿어야 하는 사실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양자 중첩과 양자 얽힘이라는 것이 쉽게 예를 들면 그렇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늘에 있는 예수님의 활동 여하에 따라서 땅에 있는 연결된 자기 백성에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데 그 현상이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고 성도도 마찬가지지만 옛날 시대 모세로 똑같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이 모세를 보라는 거예요. “너 자신을 보지 말고 모세를 보라.” 모세를 보고 난 뒤에 우리 자신을 봐야 합니다.
‘모세를 볼 게 뭐가 있는데?’ 모세를 한번 보자는 거죠. 여기 모세라는 인물은 출애굽기 2장에 보면 엄마 이름이 ‘요게벳’인데 이 엄마에게 아들이 태어나요. 여자 몸에서 아들이 태어나는 건 평범한 사태입니다. 아무 일도 아니에요. 그런데 그 나라에서 권세로 아들을 낳으면 다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민족에게도 그러하냐? 다른 민족은 손대지 않고 히브리 민족에 대해서만 ‘아들 낳으면 죽이고 딸 낳으면 살리라.’라는 지시가 주어졌어요. 애굽 나라가 뭔데 그렇게 지시하느냐? 애굽 나라가 권세를 갖고 있습니다. 권세를 갖고 있어서 그 애굽 나라에 사는 모든 자들은 그 권세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요.
오늘 본문 히브리서 11장 26절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이렇게 되어 있죠? 나라가 둘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 계신 나라, 그 나라는 중첩되어서 위에 있고, 모세의 몸은 애굽이라는 땅에 있어요. 그러니까 땅에 있는 몸과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의 세계 그 두 세계가 모세한테 중첩되면 그 중첩된 현상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두 개의 권세의 충돌로 나타납니다. “아들 낳으면 죽여. 묻지도 따지지 마. 그냥 죽여.” 아들만 죽이라는 거예요. 모세 엄마는 아들이 너무 아름다워서 죽이지 않았다(출 2:2)고 되어 있습니다. 기존 권세에 대한 반발이에요.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는데 위와 아래로 중첩된 사람 같으면 땅의 권세가 아무리 세도 하늘의 권세가 그걸 뚫고 간섭하게 되어 있어요. 상호작용이 되니까요.
그렇다면 모세 인생은 일단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또는 바로 왕에 의해서 절단났습니다. 이제 태어나자마자 죽게 되었어요. 그런데 하늘의 권세가 땅의 권세에 저항했습니다. “안 돼!” 하고 엄마가 나서서 저항했습니다. 저항했는데 이 저항의 한계가 있어요.
아이는 울죠. 더 이상 키울 수가 없어요. ‘에라 모르겠다.’ 해서 엄마가 모세를 물 위에 그냥 던졌습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냥 던졌어요. ‘내가 더는 못 키운다. 이런 세상의 권세 아래서 우리가 대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세상이 우리 애를 죽이라는데 그 죽음의 권세를 우리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애를, 내 손으로 죽이는 것보다 차라리 물에 띄워서 방치하듯이 자기 육신으로부터 애를 떼어냈습니다. 모세가 둥실둥실 바구니에 담겨서 물에 실려 떠갈 때 모세의 누나가 ‘내 동생이 어디로 가나?’ 하고 살폈어요. 따라가 보니까 나일 강변에 이리저리 스치다가 하필이면 바로 공주가 시녀와 함께 목욕하는 그 대목에서 바로 공주에게 걸려든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바로의 공주’라는 것은 인간의 권세에서 나온 겁니다. 인간의 권세에서 나왔으니까 일단은 인공물이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인도하면서 애굽이라는 인공물, 하나의 세상 권세죠, 그 인공물로부터 분리시킵니다.
분리시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디로 데려가느냐? 인공물이 전혀 없는 곳, 광야로 일단은 빼냅니다. 자연물만 있고, 사막이죠, 광야만 있고 인공물이 없을 때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냐? 죽은 존재죠.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없어지죠. 죽으면 없어지는 거예요.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면서 인간의 본모습을 자꾸 일깨워 주는 거예요. 인간은 살아있으면서 자꾸 ‘미래가 어떻게 될까?’ 하는데 인간은 미래를 볼 자격도 없고요, 미래는 모르고요, ‘과거에, 처음에 하나님이 본래 인간을 어디서부터 출발하게 했는지?’를 계속 되새기는 작업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들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과거에 확정한 원칙 그 원칙에 의해서 ‘넌 빼도 박도 못한다.’라는 이게 말씀의 권세에요. 이미 인간은 확정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가라.’(창 3:19) 이미 확정된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 반발하면서 인위적인 인공적인 힘을 키우는 것이 창세기 4장이었습니다.
가인이 나오고 가인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그 가인이 제일 먼저 한 게 도시를 세운 건데 그 도시 전체가 인간의 힘으로 세운 인공물입니다. 인공물로 도시를 세우면서 거기 법이 만들어졌거든요. 인간의 헌법도 인공물이에요. 자연물이 아니고 인공물입니다.
그 인공물에 하나님의 하늘의 권세 말씀의 권세에 대드는, 반항하는 그러한 악한 권세가 거기에 작용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4장에 가인이 동생을 죽일 때 악한 권세가 덮쳐서 죽게 되었거든요? 악한 권세의 지배하에, 통제하에 있는 가인이 세운 세계, 땅의 세계, 인간 사회, 애굽입니다. 이미 과거부터 이게 확정된 사실이에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옛날 애굽에서 살면서 인간이 인공물로 자기가 할 수 있는 행함, 요령껏 지혜로 해보려고 하는 모든 것이 광야를 통과하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거예요, 소용없는 거예요. 인간의 협조? 협력? 아무 소용 없어요. 자기를 살리는 데 전혀 도움 되지 않습니다. 자연물이 아무것도 없듯이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는 자기 본래의 발가벗은 모습만 광야에서 체험할 뿐이에요.
그런데 자꾸 살아요. 이게 문제에요. 광야에서 죽어야 마땅한데 자꾸 살아요. 새벽에 뭐가 떨어져 있어요, 만나가. 이것이 어디서 나왔는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왔습니다. 첫 번째, 애굽에 있을 때 애굽의 모든 나라는 자연 위에 인간들이 자기의 뜻과 지혜를 압축해서 권세를 만들었거든요.
가인의 권세니까 배후에 악마가 작용하겠죠. 악한 권세가 거기 작용해서 애굽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라고 그 애굽에서 이끌어냈습니다. 이끌어내는 그것이 구출, 구원인데 아무 준비 없는 구원이에요. 아무 준비가 없어요. 준비는 누가 하느냐?
하나님 쪽에서 준비해요. 오늘 본문 히브리서 11장 25절에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여기 ‘고난’ 나옵니다. 하나님이 친히 구원의 절차로서 그 과정 속에 준비하신 것이 고난입니다.
고난은 뭐냐? 죄악과 반대되는 게 고난이죠. “죄악을 누리는 것보다” 여기에 딱 대비되는 것이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고난받기를 더 즐거워하고” 이 표현입니다. “너 애굽 사람이야, 새로 만들어진 이스라엘 사람이야?” 같은 뜻입니다.
“너 천국 가는 게 이미 발동 걸렸어.”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이고요, “구원이고 뭐고 난 그냥 애굽에서 살래.” 이건 애굽이에요. 애굽 사람의 특징은 중첩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특징은 중첩되어 있는 거예요. 하늘과 땅이 서로 같은 몸에 같이 놓여 있습니다. 하늘의 뜻에 의해서 그들이 구원을 받는데 구원받는 그 모습이 고난이 되는 겁니다.
고난이 되게 되면 어떤 분리가 일어나느냐? 처음에는 자연물과 인공물로 분리가 일어나다가 그들로 하여금 광야에서 고난받게 되면 그때의 분리는 뭐냐? 아무것도 없는 죽음의 세계, ‘광야라는 자연물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권세가 담긴 말씀이냐?’ 이 분리가 일어나요.
‘아무것도 없는 이 자연물에서 네가 악착같이 살려고 애를 쓰는 그런 인물이냐, 아니면 이제는 자연물, 아무것도 없는, 죽음을 제공하는 죽음에서 말씀의 세계로 도약할 수 있는 그런 인물이냐?’의 또 새로운 분리가 광야에서 개시됩니다. 광야를 가면서 겪게 되죠.
그러면 여기서 애굽에서, 인공물의 권세에서 “못 살겠다!” 이러면서 빠져나올 수가 없죠. 왜냐하면 태어나기를 인공물의 권세에서, 세상의 권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것밖에 몰랐는데 하나님이 강제로 거기서 분리를 시키죠. 분리를 시켜놨는데 그 결과가 뭐냐?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라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넌 농담으로 여겼어? 네가 경험해. 창세기 3장의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라는 것을 광야 생활을 통해서 네가 직접 체험 해보라고. 넌 그냥 아무것도 아닌 거고, 그냥 흙이에요. 흙이니까 내가 없잖아요. 그래서 나는 그냥 없는 거고, 그냥 죽은 거고요. 이게 본래 우리 모습입니다.
나라는 것 자체도 없고, 살아있다면 주님밖에 없고, 살아 있는 것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이걸 가지고 성경에서는 ‘샬롬’이라고 해요. 평화라고 해요. 이걸 안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평화라는 것은 본래 인간을 인간으로 되돌리고, 거기다가 말씀의 권세가 같이 묶어져 한 묶음으로 중첩되어 있을 때 이게 샬롬, 평화, 이게 평화고 다른 말로 하면 안식이 됩니다. 마음의 평화.
여러분은 마음의 평화를 언제 얻었던가요? 내가 없을 때 마음의 평화가 오고, 내가 죽었음을 인지할 때 마음의 평화가 안 올라야 안 올 수가 없어요. 그러면 말을 바꾸겠습니다. 언제 여러분이 우울증이 생기고 언제 마음에 번민이 생기던가요? 내가 있다고 여길 때, 그것도 내가 살아있다고 여길 때 그때부터 여러분은 완전히 지옥으로 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고집이 있어요. “내가 준 안식과 평화를 너희가 깨뜨릴 권한이 없다. 내가 기어이 너희들을 흙으로 돌려보내고 기어이 너로 하여금 네가 있는 것이 아니고, 넌 땅에서 죽었고 주님 안에 네 마음이 있다. 주님이 너와 함께 있음을 내가 말씀을 통해서 기어이 알려줄게. 나도 한 고집 한다.” 이게 하늘의 권세입니다.
지난 금요일 보훈 병원 장례식장에 가서 박 집사님의 모친이 돌아가셔서 발인 예배를 했는데 이 발인 예배를 녹음해서 우리 교회나 십자가 마을에 올리려고 마음을 먹고 제가 아내보고 부탁했는데 들어보니 녹음 상태가 안 좋아요. 그 설교를 포기를 못 하고 오늘 낮 설교에 이걸 섞어 넣어야 하겠어요.
왜냐하면 장례식장에서 보니까 죽은 고인도 고인이고, 그 고인을 애도하는 산 사람도 고인이에요. 흙이 되어야 말씀이 들어가죠. 살아있으면 말씀이 안 들어가요. 왜냐하면 살아있을 때는 애굽이 되거든요. 애굽과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말씀이 속에 들어가지 않고 강하게 저항하게 되어 있습니다.
발인 예배 때 한 본문이 요한복음 1장입니다. 잠시 장례식 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장례식장입니다, 부조는 알아서 하시고. 발인 예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5절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 대목입니다.
보통 이 자연 세상에서는 빛이 어두움을 비추면 어둠은 “와! 빛이다.” 하고 알게 되어 있어요. 이게 자연 세계에요.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 세계는 그런 세계에요. 아무리 어둡더라도 빛이 비추면 이 어두움이 “오, 빛 봐라.” 이렇게 빛을 알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말씀의 세계에서는 이 세상의 어두움이 절대로 빛이 되지 못하도록 권세가 쳐져 있어요. 이 어두움의 권세가 그냥 자연의 권세가 아니고, 악한 권세가 꽉 둘러 차 있기 때문에 빛이 와도 어두움의 권세에 있는 인간은 빛이 온 줄 모르고 그냥 그걸 빛으로 깨닫지를 못해요.
그렇게 함으로써 어두움인데 제대로 된 어두움 속에 살아있어요. 그걸 어두움의 권세라고 합니다. 이 어두움의 권세로 인하여 어떤 힘이 발휘되는데 그 힘은 어떤 경우에도 빛으로 오신 분으로 빛으로 납득 못 하게 하는 힘이에요. 아주 센 권세에요. 굉장히 센 권세입니다.
‘빛이 자기 백성에 왔으매 자기 백성이 깨닫지 못했다’라고 했어요. 여기 1장 5절도 그렇고 11절도 그렇고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깨닫지 못한다는 뜻은 물건이 몇 개 빠져있다든지 제대로 된 능력이 없다는 게 아니고, 그냥 태어날 때부터 깨닫지를 못해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예수님이 무슨 일을 했는지 깨닫지 못해요. 4대째 교회 다녀도 예수님이 누군지를 몰라요. 하나님이 누군지 몰라요. 더 나아가서 내가 어두움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말씀이 없는 빈칸이 인공물로, 국민 교육으로 다 채워져 있기 때문에, 인간이 납득할 수 있는 모든 지식으로 다 채워져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결핍이 될 때 비로소 뭔가 감을 잡아요. 배우자가 죽으면 치매 환자가 20프로 증가한다는 그런 통계가 있습니다. 이게 어두움의 권세거든요. 어두움의 권세라는 말은 뭐냐? ‘빛 그까짓 거. 말씀 그까짓 거. 나한테 없어도 괜찮아.’ 이게 어두움의 권세에요.
어두움의 권세는 악한 권세기 때문에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하나님의 모든 일을 사력을 다하여 밀어내는 권세에요. 말씀이 없는 곳에서 살고 싶어 하는 힘, 그 힘은 어두움의 권세입니다. ‘말씀 같은 거 안 들어도 상관없고, 교회 안 나가도 상관없고, 성경 안 봐도 상관없이 내가 가진 것으로 살겠다.’ 이게 어두움의 권세에요.
이미 그 권세는 애굽이라는 나라를 통해서 ‘땅의 권세가 어두움의 권세로 이미 일체감을 가지고 살고 있다.’라는 것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모세라는 중첩된 인물을 통해서 평소대로 살았던 그 권세, 어두움의 권세에서 강제 분리를 시켰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거니까요, 천국은 공격하는 거니까요.
요한복음 1장 11절에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자기 백성도 몰라요. 어두움의 권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자기 백성도 못 알아봐요. 그런데 12절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다음에 나오는 말이 뭐냐? ‘권세’입니다, 권세. 새로운 힘이, 애굽 같은 이 땅에서 강제 분리시키는 힘이 작동하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이게 중첩된 인물에게 해당되는 하나님의 힘입니다.
자, 그러면 애굽은 어떤 세계냐? 애굽은 흙의 세계에요. 살아있어도 죽은 거예요, 죽은 것은 물론 죽은 거고. 있어도 없는 세계입니다. 왜냐? 하나님 말씀에 의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이미 강제로 있는 것도 없애는 세계고, 살아있는 것도 죽여 버리는 세계에요.
창세기 3장에, 과거에 이미 그 원칙이 세워져 있습니다. 전도서 7장 2-3절에 보면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죽는 날이 출생한 날보다 낫다. 왜? 자기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아주 즐거운 날이기 때문에요.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인간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인간에게 있다면 과거밖에 없어요. 과거에 확정된 하나의 원칙으로 우리는 돌아가고 귀환하는 거예요. 인간에게 무슨 희망이 있고 미래가 있어요? 죽은 자가 무슨 희망이에요. 죽은 자는 미래를 가질, 희망을 가질 권한조차 없는 게 죽은 자입니다.
“모든 인간은 장례식장으로 고고!” 그뿐이에요. “고고!” 순번 뽑고, 대기표 뽑고 기다리세요. “다음은 2465번입니다!” 그래서 발인 예배 때 했어요. “장례식장으로 강제 소환, 죽음으로 강제 소환”돼요. 죽는 사람은 우리의 선배입니다. 그래서 이걸 아는 사람을 지혜자라고 하는데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가 있고 이게 없는 사람, 중첩되지 않은 사람인 우매자의 마음은 기뻐하는 잔칫집에 가 있다.’라는 거예요.
요한복음 1장에서 왜 깨닫지 못하는지 이유가 나옵니다. 인간은 왜 자기 자신을 모르는가? 이것이 인간이 잘못해서가 아닙니다. 교회 잘 안 나와서가 아니고, 태어난 자체가 어두움의 권세에서 태어났고, 그 어두움의 권세에서 태어난 것을 요한복음 1장에서는 ‘혈육으로 태어났다.’라고 합니다.
본인이 혈육에서 태어났는데, 아빠 엄마의 혈육에서 태어난 이것도 하나님 보시기에 잘못이래, 이것도 죄가 된다는 거예요. 미칠 지경이에요. 우리가 아는 죄는 나쁜짓 한게 아닙니까? 그게 바로 이 어두움의 권세에서 가르치는 거예요. 선악 체계가 가르치는 거예요. “나쁜 짓 하면 나쁜 사람 되고, 착한 짓하면 착한 사람 됩니다.” 이게 선악 체계에요. 그거 다 마귀의 생각입니다. 그 안에 마귀의 힘이 받치고 있어요.
사람이 왜 번민 걱정이 많고 불안감이 드느냐? ‘내가 어떻게 하면 잘 사느냐,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사느냐, 죽을 때 죽더라도 살아있을 때는 호강하고 살아야지.’ 그게 애굽 생활이에요. 그게 오늘 본문에 뭐로 표현되는가? 바로의 공주에요.
그런데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 됨을, 그 인공적이고 인위적인 세상 권세를 거부했다는 거예요. 세상에! 그걸 왜 거부해요? 호강할 텐데 그걸 왜 거부합니까? 그 거부하는 것을 오늘 본문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그걸 ‘고난’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히브리서 2장 10절에 보면 예수님이 어떤 코스로 이 땅을 다녀갔는지가 나옵니다.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구출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고난이 없이는 온전함이 없다는 거예요. 예수님마저도 하나님인데 고난받아야 된답니다. 왜? 이 땅에 왔다는 이유때문에 중첩된 하늘의 구원하는 능력이 이 땅에는 고난으로 드러난다는 거예요. 고난으로 드러나면서, 이 세상에서 호강하고 행복하게 살자는 것과 대조가 된다는 겁니다. ‘행복하게 살자.’가 죄악이 된다는 거예요.
어둠의 권세 아래서 ‘내가 여기 있다.’도 죄가 되고, ‘있는 거 잘 살아보자.’도 죄가 된다는 겁니다. 그걸 죄로 규정하는 안목을 얻는다는 것은 주의 개입이 아니고서야 성립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성도는 고난을 받으면서 비로소 뭘 느끼는가?
내 뜻대로 다 되고 내 소망대로 다 된다고 할지라도 그게 하나님이 주신 평화가 아니에요. 뭔가 유혹 같고, 시험 든 것 같은 늪에 빠진 현상을 그렇게 보여줍니다. 내가 결부되어 있는 이상 하나님이 주신 샬롬, 평화는 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고난을 주시는데 내 인생을 아주 작살내고 절단내죠. 절단내는 것부터 해서 고난으로 갑니다. 고난으로 갈 때 고난에 대한 힘, 에너지는 어디서 오는가? 주어진 말씀에서 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는 너희에게 어떤 목적이 있는데 네가 구원받는 게 아니고 너와 동행하는 자가 구원받게 하고자 한다.”
그 구원받는 자가 누구냐?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의 고난에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은 그냥 동참하는 백성 수준이에요. 동참하기 싫다? 그럼 탈퇴시킵니다. 이 말은 “말씀 싫어? ‘애굽으로 돌아가자?’ 가 버려.” 애굽으로 가지도 못 해요. 그냥 흙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말씀이 주는 중첩된 하늘의 모습을 그렇게 네가 거부한다면 넌 내 백성이 아니야.”하고 계속 내보내는 작업을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해내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챙기고자 하는 것은 뭐냐? 그것은 바로 열매입니다. 그 열매가 무슨 열매냐? 지상에 육의 아버지가 있고 아들이 있듯이 하늘나라에도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면 아들이 있어요. 그 아들이라는 것을 아버지는 자신의 노력의 성과, 열매라고 보는 겁니다.
그 열매를 맏이라고 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 세상의 장자로 만들려고 합니다. 장자 값 못하는 것은 그 소속에서 계속 퇴출 당해야 되죠. 그 장자 만들 때, 강제 조치로 장자로 만들고 규정하고 이끌 때, 유월절 그 날밤 주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출애굽기 13장 1-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초태생, 처음 난 것은 내 것이다.’ 하는 이 취지에 대해서 무슨 뜻으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했는지 잘 떠오르지 않죠?
그런데 로마서 8장 29절에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 ‘맏아들’이 나와요, 장자. 그래서 예수님은 자꾸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이 땅에서 자기 아들다운 모습으로, 맏아들 모습으로 만들어놓고 그 맏이가 있으면 그 맏이 따라서 맏이에 소속되어야 할 새로운 양자들을 이스라엘 이름으로 생산하는 작업을 해주시는 겁니다.
그 맏이, 맏아들이라는 새로운 형상, 이게 나중에 몸이 되거든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형상 안에 소속되어 있는 각 지체들이 되는 겁니다. 얼굴 표정들을 보니까 잘 이해가 안 되는 것 같은데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붕어빵 구울 때 먼저 밀가루부터 넣죠. 밀가루가 육입니다.
그 밀가루(육)에다 앙꼬를 뚜겅 다 열어놓고 집어넣습니다. 이게 바로 맏아들의 형상이에요. 맏아들의 형상을 집어넣고 그다음에 앙꼬 넣은 틀을 뒤집어 버려요. 뒤집어 버리면 전에 땅만 바라보던 그 붕어빵이, 뒤집혔으니까 이제는 하늘만 쳐다보고 사는 거예요.
이게 광야 40년의 생활입니다. 안에 뭐가 있다? 앙꼬 들은 거예요. 뭐가 있다? 인간의 흙이 되는 형상 대신에 맏아들의 형상이 들어 있으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들은 주의 이름이 왔던 하늘을 쳐다보면서 살아가는 그런 절차, 공정, 붕어빵 생산 공정에 들어가는 거예요.
이게 모세가 보여준 거예요. 애굽의 생활은 인공적이에요. 인위적인 권세, 어두움의 권세에 “꼼짝 마라!” 하고 완전히 갇혀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도 애굽에서 나갈 생각을 못 하고요, 그냥 고통이나 좀 면제해 주시면 좋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몸, 아담의 몸은 창세기 2장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고 되어 있어요. 이미 과거에 확정되었어요. 그런데 형상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계획을 하셨느냐? 두 종류의 열매로 나타내기로 마음을 잡수시고 그 몸에서 하나는 하늘의 형상을 뽑아내고, 또 하나는 저주의 형상, 지옥 갈 형상을 또 뽑아냅니다.
여러분, 그건 안 찾아봐도 다 아시죠? 마태복음 3장 12절에 보면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인간의 몸을 가지고 거기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천국 백성의 열매를 만드시는데 천국 백성이라는 것은 붕어빵 안의 앙꼬 문제죠.
그 안에 형상이, 예수님의 맏이 형상이 들어있느냐, 아니면 없느냐로 결정된단 말이죠. 열매를 만드는 거예요. 머리 좋은 여러분들은 대번에 생각할 거예요. “아, 그럼 모세가 세상에서 나와서 광야 지나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그 여정은 모세의 여정이 아니고 예수님이 이 땅에 다녀가신 그 여정을 말합니까?” 이러면 바로 그거예요.
머리가 더 좋은 사람은 “그럼 예수님의 여정은 오늘날 우리한테 적용되는 여정입니까?” 바로 그겁니다. 그 끝은 어딥니까? 샬롬! 천국, 안식이죠. 히브리서 4장에 안식의 때가 남아있는데 아직 못 들어갈 사람도 많다는 거예요.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 지나서 약속의 땅인 안식의 땅에 들어간다는 거예요. 수평으로 펼쳐진 하나님 자기의 설계도가 쫙 깔렸습니다. 그걸 구약의 역사를 통해 보여주는 거예요. 문제는 뭐냐? 그걸 왜 인간적으로 못 하느냐?
어두움의 권세가 꽉 쥐고 있어서 모든 빛에 대해서는 저항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고난 없이 가면 되지 않느냐? 고난이라는 것은 딴 게 아니고 그 어두움의 권세가 타일처럼 되어 있다면 하나님께서 일을 벌이니까 그 타일 조각이 뚝 떨어지니까 타일 조각 떨어진 그만큼은 거기서 쨍, 하고 햇살이 나오지요.
햇살이 나오게 된 그 떨어진, 길이 없는 곳에서 길이 뚫려버린, 하늘과 땅이 중첩되는 그 길이 열린 그 떨어진 조각, 어두움의 그 조각이 자기 백성에게 떨어지니까 그게 아픔, 고난으로 작용하는 거예요. 우리의 육신은 흙의 육신인데 흙의 육신에 그게 떨어졌으니까 흙의 육신은 끝났다는 겁니다.
맹인 가수가 있어요. 이름이 이용복입니다. 이 용복씨가 불렀던 노래 중에 <그 얼굴에 햇살을>(1972)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제가 20대 때 그 노래가 나올 때는 그게 무슨 뜻인지를 잘 몰랐어요. 경상도 사람들은 ‘그 낯짝에 땡볕이’ 그런 식으로 가사를 바꿔서 부르기도 했는데요.
그 가사 초반에 “눈을 감으면 저 멀리서 다가오는 다정한 그림자” 그 노래는 집에 가서 들어보시고요. “눈을 감으면~” 특히 맹인 가수니까 눈이 어둡잖아요. 소리만 들리는 거예요. 말씀 소리만 들리는 거예요, 말씀 소리만. 분명히 애굽에서 없었던 현상, 광야에 오면서 말씀이라는 것이 실제로 현상화 되어서 그들에게 만나, 그리고 생수,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생기지 말아야 할 현상이 생겨버린 거예요.
그런데 그 기간이 무슨 기간이냐? 고난 기간이에요. 말씀이 주는 새로움과 새로움을 만끽하는 그 기간이 바로 고난의 기간입니다. 거기서 말씀이 계속 주어져요. “목사님, 광야 시대에 무슨 말씀이 주어졌습니까?”라고 물으신다면 그것을 살펴보겠습니다.
열매가 되는데 그게 맏물이거든요. 그런데 그 맏물이 이스라엘에게 생기는데 그 맏물이 어디서 나오느냐? 나중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농사를 짓는데 거기서 맏물이 생겨요. 그 맏물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칩니다. 맏물을 바치는 거예요. 그게 십일조입니다. 십일조가 맏물이고 맏물이 십일조에요.
백성들은 그걸 누구한테 바치느냐 하면, 백성들은 레위 지파한테 바쳐요. 레위 지파한테 바친다는 말은, 당신이 하는 그 특이 현상으로 인하여, “우리는 죽었는데 양 잡아서 살았다. 우리는 죽었는데 양 잡아서 살았다” 그것을 상번제, 매일 아침저녁으로 양을 잡으면서 “양 잡아서 죽은 우리가 살았다. 없어진 우리가 아직도 생존한다.” 이걸 제사와 결부해서 하늘에 있는 말씀이 지상의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고, 말씀의 권세 안에 놓여 있는 거예요. 말씀의 권세 안에 놓여 있는 겁니다. 어떤 상태에서? 세상의 모든 어두움의 권세가 차단된 상태에서. 그러면 말씀을 왜 들어야 하느냐? 어두움으로 차단된 그 타일 하나가 뚝 떨어졌어요.
원래 타일이 그대로 박혀 있으면 어두움밖에 없는데, 빛이 없는데 그 타일이 떨어지니 빛이 왔고, 그 떨어진 타일이, 율법이 우리에게 매우 심한 고난을 야기하는데 고난을 야기하면서 그 고난 가운데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하는 순간 위를 쳐다보니까 내 얼굴에 땡볕이 비치는 거예요.
그 하늘에서 그동안 몰랐던 하늘나라가, 주님의 나라가 “나는 맏물을 원한다”라는 소리와 더불어 “이스라엘은 내 장자들이다”라는 소식이, 출애굽기 4장에 나오는 그 말씀이 우리에게, 어둡기 짝이 없는 내 마음속까지 지하 105층까지 비추고 있는 거예요. 내 마음에 말씀의 빛이, 내 마음에 말씀의 빛이 비춥니다.
깨닫지 못하더니 깨달았다. 깨닫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데, “이건 미친 짓이다. 그걸 왜 깨달아? 너 대학 안 나왔어? 너 공부 안 했어? ‘성경은 전설이다.’라는 그런 너 안 배웠어? ‘성경은 그냥 인간의 책이야.’ 그런 것 안 배웠느냐는 말이야?”
이렇게 애굽 사람들이 나에게 닦달 내고 대드는 가운데서 전에는 “응. 그건 전설이야. 사람들 지혜 끌어모은 거야.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안 봐도 돼. 멀리해도 괜찮아. 사는 데 아무 지장 없어.”라고 하다가 나중에 보니 말씀이 딱 들어오는데 ‘이것이 바로 주여, 제가 중첩된 인물로 채택되었군요.’
누가복음 10장 20절에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그게 샬롬이고 안식이기 때문에. 말씀이 내 안에 앙꼬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거예요.
지난 수요설교 하면서 제가 너무나 크게 감동받은 구절이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생각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닌데 주께서 그런 생각을 주신 것이 뭐냐? 교인 숫자가 백 명이 되든 열 명이 되든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단 한 명이라도 천국의 본질을 드러내면 하나님께서는 오케이! 하나님께서는 충분하다.
그러면서 제가 노아 방주 이야기를 했어요. 그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은 노아의 여덟 식구밖에 없었어요.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아무 상관이 없었어요. 우리보고 이야기합니다. “노아야! 아무 상관 없어. 내가 그걸 기뻐해. 여러 사람 몰라도 괜찮아. 납득 못 해도 괜찮아. 미쳤다는 소리 들어도 괜찮아. 너만 천국의 본질만을 발산하면 돼. 비추면 된다고.”
제일 작은 숫자의 집합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숫자가 제일 적었어요. 신명기 7장 7절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얼마나 외롭습니까? 이 외로운 것도 고난이에요. 장례식에서 찬성 부를 때 다른 사람들은 멀쩡하게 서 있어요. “사도신경 합시다” 해도 몇 명 하지도 않아요. “주기도문으로 기도합시다” 해도 하지도 않아요. 얼마나 외롭고 쓸쓸합니까? 그런데 그것이 붕어빵 앙꼬인데 어떻게 합니까? 하늘과 땅이 중첩된 사람인데요.
우울증? 그거 사치 아니에요? 본인이 죽어 있는데요. 죽은 것을 십자가의 어린양이 살리고 있잖아요. 그게 권세 아닙니까? 그게 권세라고요. 그래서 요한복음 3장 5-6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앞뒤 아귀가 맞잖아요, 아귀가! 예수님의 진행상태가 앞뒤가 딱 들어맞잖아요.
마태복음 11장 7절에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요새 말로 하면 “네가 무슨 소리 들으려고 교회 나갔던가?” 그 말입니다. 제가 분명히 여러분에게 당부하고 싶어요. 교회-집, 교회-집…, 좋은데 ‘교회-집’ 차 타고 가든지 걸어가든지 왔다 갔다 하면서 그 사이에 다른 길을 발견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길, 하늘에 가는 다른 길을 발견해 주시기 바랍니다.
십일조 가운데 민수기 18장 26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자, 백성들이 제사장에 바쳤다. 뭐 어쩌라고? “나 십일조 냈습니다. 앞으로 나에게 간섭하지 마세요. ‘그런 생활이 바로 애굽생활이다’ 이런 식으로 간섭하지 마세요. 나 낼 것 냈습니다.” 이런 식으로 또다시 ‘나는 살아있다. 나는 죽지 않고 행복하게 더 살아야 하겠다.’ 여러분, 고급 아파트가 열매가 아닙니다. 고급 차가 열매가 아니에요.
그러면 열매가 뭐냐? 민수기 18장 26절에 ““너는 레위인에게 고하여 그에게 이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취하여 너희에게 기업으로 준 십일조를 너희가 그들에게서 취할 때에 그 십일조의 십일조를 거제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십일조의 십일조를 여호와께 드려라. 십일조의 십일조. 백성들이 레위 지파에게 드릴 것은 십일조예요. 그런데 레위 지파가 이제는 백성들에게 차단 된 세계예요. 백성들이 아무리 제물을 가져와도 접근하면 안 되는 세계로서 중간에 레위 지파가 있어요.
레위 지파의 특징은 땅이 없어요. 농사지을 땅이 없다고요. 농사지어서 밥 먹고 살 수 있는 모든 조건들이 애초에 다 날아간 지파가 레위 지파입니다. 레위 지파는 말씀 가지고 사는 거예요. 레위 지파에게 ‘십일조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은 하나님께 직접 가지를 못합니다. 중간에 레위 지파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넘기면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입니다. 맏이, 맏물입니다. 저희 노력이 아닙니다. 이 맏물 덕분에 삽니다.” 하고 드리면 그 중간에서 레위 지파가 하나님께 드리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끝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레위 지파 네가 도대체 뭐야? 네가 뭔데, 같은 인간인데 별거냐? 그런데 내가 왜 하나님께 그걸 드려?”라고 따지면 민수기 3장 11-12절에 나옵니다. 그러니 이 모든 말씀이 광야에서 주께서 ‘생명이 있다’라고 하면서 주신 것이 신명기, 민수기에 들어 있는 거예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그게 레위 지파라는 거예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처음 난 자’라는 겁니다, ‘처음’. 우리가 육에서 태어나서 여러분이 육신을 갖고 있지요. 하나님의 형상 갖고 있다는 그 형상은 안 받습니다. 처음 난 것, 예수님의 영으로 태어난 그것이 바로 처음 난 여러분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영, 예수님 몸의 지체가 되는 것,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 그걸 열매라고 합니다. 주님의 열매, 주님의 몸의 열매, 또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의 형상으로 만든 열매. 그러면 우리는 뭐냐? 예수님은 맏아들, 우리는 양자가 되려 함이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롬 8:30) 해서 하늘나라에 속한 중첩된 인물, 붕어빵의 앙꼬가 들어 있는 인물, ‘말씀을 다 이루었다’가 들어 있는 인물, 하늘이 주는 샬롬, 평화가 있는 인물, 안식을 이미 누리고 있는 인물은 하나님의 솜씨로 창조하시고 생산한 겁니다.
아, 이게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과 강제 분리되는 아픔이 있는데 그 아픔을 고난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세상이 뭐냐? 바로의 공주가 누리는 모든 세상 영광이지요. 그걸 뭉뚱그려서 ‘죄’에요, 죄.
요한일서 2장 15-17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태어날 때부터 우리의 육신, 땅에서 온 것이다. 주님의 사랑이 거기에 없다는 겁니다.“…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 말씀을 여러분이 전력을 다하여 거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도대체 뭐가 바빠서 말씀을 밀어내는지, 뭐가 싫어서 말씀을 거부하는지, 혹시 우리가 이 세상 권세와 한 짝이 되지 않았는지, 한패가 아닌지 돌아보게 하옵소서. 말씀 없어도 살아간다는 그 자신감, 악마의 자신감을 우리가 아직도 포기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주여, 하늘과 땅이 막혀 있는 타일 한 조각이 우리에게 떨어져서 비로소 우리 얼굴에 하나님의 얼굴에서 나오는 복음의 광채가 비취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