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여름수련회 고린도전서강해 제 7강 : 여자와 남자 - 이 근호 목사
지금부터 일곱 번째 강의를 하겠습니다. 일곱 번째 강의는 고린도전서 11장부터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 보면 남자와 여자에 관해서 나와 있습니다. 3절,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그렇게 되어있죠.
But I would have you know, that the head of every man is Christ; and the head of the woman is the man; and the head of Christ is God.
그것을 보기 전에 먼저 전제가 있는데, 그 전제가 상당히 중요해요. 전제가 고린도전서 2장 2절입니다. 2장 2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 대목이 나오죠.
그럼 이 사도 바울의 말대로 하면 2장 이후의 편지 내용은 없어야 마땅해요. 내가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를 원한다. 그럼 그 뒤에 3장, 4장 내용은 알지 않기로 한 그 내용에 포함될 거냐, 말거냐가 관건이 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를 원한다.’ 이 말은 ‘십자가 외에는 알려고 하지 마라.’ 이런 뜻이거든요. ‘십자가 외에는 알려고 하지 마라. 알면 너 다친다.’ 뭐 그런 거죠. 십자가 외에는 알려고 하지 마라는 말은 만약에 십자가 외에 우리가 알아버리면 그 안 것이 우리에게 걱정과 근심과 고통을 제공합니다.
너희들이 살면서 내가 분명히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작정한다고 말했어, 안했어? 했잖아! 그런데 왜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알려고 하느냐?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것이 너에게 걱정과 근심과 고통을 안겨주게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면서 걱정과 근심은 십자가 외에 쓰잘데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에요. 애가 공부를 잘하니 못하니, 수입이 이것밖에 안되니,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 상담하면, “하나님, 상담 좀 합시다. 이 걱정과 근심을 어떻게 해결합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심하게 나무라면서 “너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 내가 분명히 뭐랬어? 네 살림살이, 가게문제, 애 걱정 그런 거 내가 알지 말라고 했어, 안했어? 예수님과 십자가 못 박힌 것 알면 끝나는데 알아서는 안 되는 걸 네가 끌고 왔으니까 너한테 그런 걱정과 근심과 고통이 주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거 아니냐? 왜 말을 그렇게 지독하게 안 들어? 내가 몰라도 되는 것은 몰라야 된다고 얘기했어, 안했어? 했지? 이제 와서 십자가 외에 다른 것 가지고 상담하지 마! 네가 잘못해놓고 왜 나한테 그러느냐?”
십자가 외에 나의 장래는 어떻고 내가 취직하고 어떻게 생활하게 되고 그런 것은 어디에 해당되느냐? 알지 않아야 될 것에 해당됩니다. 삭제하고 가위로 잘라버리고 몰라야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고린도전서는 1장, 2장 초반으로 끝나야 돼요. 편지에 3장, 4장이 있을 이유가 없어요, 그렇게 되면. 제가 나쁜 게 아니고 사도 바울이, 이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했다. 끝! 그런데 2장, 3장은 왜 있냐? 2장 2절로 끝나야 되는데 2장 3절, 4절 이게 왜 있냐 이 말이죠.
그것은 예수님과 그 죽으심을 삽입하는 과정이에요. 삽입을 시켜놓고 그다음에 계속 묻는 거예요. 삽입된 환경은 생각하지 말고, 무엇이 예수님과 그 십자가 죽으심 외에 어디에 발자국을 남기는지 주시하는 그것이 고린도전서 2장 2절의 내용을 계속해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이 된다는 거죠. 십자가가 어디에 박혀있는지 보라는 거예요.
씨름이 한판 끝나고 난 뒤에 주최 측 관리요원이 밀대 비슷한 걸로 모래 미는 것 있잖아요. 모래 미는 것을 가지고 와서 방금 두 선수가 치열하게 싸워서 들어가고 나오고 엉망인 모래상태를 평탄하게 고르죠. 고르고 난 뒤에 “자, 다음 판!” 싹 고르게 해놓고 다음 판 한다고요, 고르게 해놓고.
그러니까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한다.’ 이 말은 주님께서 십자가 능력으로 우리 인생판을 평평한 모래판처럼 쫙 밀어버린다는 거예요. 사적이고 개인적인 고민, 걱정 그런 것은 쫙 밀어버리고 다시 십자가 자국만 거기 박혀있기를. 그렇게 해서 인생 살아가면서 ‘나는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라는 것이 우리 인생을 통해 절로 나오도록 그런 조치를 하시는 겁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조치를 해주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2장 다음에 3장, 4장 있더라도 모순되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십자가가 우리 안에 어떻게 박히는가? 이번 제7강에서는 11장을 하겠습니다. 어떻게 박히는가를 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쓸찌니라” 이렇게 적혀있단 말이죠.
여기 11장에서 파악할 것은 우리가 아까 본 고린도전서 2장 2절과 관련해서 파악하면 되겠죠. ‘이게 무슨 삽입된 십자가냐? 십자가가 무슨 이런 십자가가 다 있냐? 십자가인데, 남녀는 이렇게 서열화 되어 있고 여자는 이렇게 해야 되고. 남자가 여자처럼 여자가 남자처럼 해서는 안 된다고 차별화시키는 것과 십자가와 무슨 관련이 있느냐?’ 이런 해석이 딱 튀어나와야 되는 거예요.
괜히 2장 2절 잊어버리고 ‘봐, 성경에 보면 남자가 머리를 길어서는 안 되고 여자가 머리를 기르라 했잖아.’ 그러면 교회 오면서 장발로 머리 펄펄 날리면서 가끔은 머리카락 제켜서 눈에 보이도록 넘기는 것, 그런 거 해놓고 나는 주의 말씀대로 고린도전서 11장대로 ‘나는 머리 안 깎았다’, 또는 ‘깎았다’, ‘여자가 왜 머리 깎으러 왔어? 이것은 11장에 어긋나네.’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지금 십자가와 관련 없는 쓰잘데 없는 것으로 시비 걸고 있는 거예요.
“당신 여잔데 왜 머리를 이렇게 짧게 깎았어?”하면 그땐 이렇게 하세요. “고린도 전서 2장 2절, 나는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느니라.”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그게 8절에 나옵니다. 7절부터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찌니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도대체? 이게 무슨 취지로 무슨 뜻에서 여기 남자가 나오고 여자가 나오고 그다음에 천사까지 동원하느냐 그 말이죠. 이제 그것을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님께서 왜 사도 바울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하게 하느냐? 이것부터 해야 돼요. 창세기에 남자, 여자를 누가 창조했습니까?
적을게요. ‘남자, 여자를 누가 창조했습니까?’라는 질문이 창세기에 성립되죠? ‘남자, 여자를 누가 창조했습니까? 하나님이 창조했습니다.’ 성립된단 말이죠. 그런데 이 창세기가 신약의 십자가와 관련되어 버리면 이 질문이 아니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남자, 여자를 누가 낳았습니까?’ 누가 낳았냐? 남자, 여자를 누가 낳았습니까? 정답은 ‘복음이 남자, 여자를 낳았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복음이 남자, 여자를 낳았습니다.
역사적으로서는 창세기가 먼저 있고 그다음에 역사가 흘러서 신약이 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한 계시는 역사가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그 원천을 찾아가는 식이 되어버려요. 처음부터 감추었던 비밀이 나타났으니까 감추었던 비밀이 나타난 그 시점부터 창세기로 다시 돌아가서 이 원천과 창세기에 나타난 그 사실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를 파악해야 된다는 겁니다. 감추었던 것이 나타난 것은 그건 나타나기 전부터 애초에 이미 선재해서 있었다는 이야기거든요. 선재한 것이. 뭔가 창세기부터 만들어진 게 아니고 원래 있었는데 안 나타났을 뿐이었던 거예요.
남자가 뭐냐, 여자가 뭐냐. 창세기를 바라보는 것은 초등학교 4학년 수학시간 같아요. 초등학교 4학년 수학시간에 가면 ‘1톤은 몇 kg이냐?’, ‘1000kg×10은 몇 kg?’ 이게 초등학교 1학년한테는 상당히 어려워요. 어려운데 물론 선행학습하면 또 돼요. 강남에서 하면 되는데, 중학교 3학년 되면 그것은 시시한 문제인 거예요. 시시한 문제에요.
“아담과 하와는 누가 만들었어요?” “하나님.” 이스라엘 모의고사에서는 이건 문제도 아니에요.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만들었습니다.”라고 해서 천국에 안 넣어줍니다. 왜? 원천과 만나지 않았기 때문에. 신약의 이미 준비된 원천과 결합이 안 되었기 때문에 그냥 조금씩 아는 것에 계속해서 점진적으로 지식을 쌓고 모으는데 그 모의고사 시험을 쳤던 자가 이스라엘 백성이고 그들은 다 천국에 못 갔습니다. 전부다 실패했습니다. 열심히 시험치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인간의 본성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과 차이난다는 그 이유 때문에 주님만 합격하고 나머지는 다 탈락했습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예수님 소속이 어딥니까? 어느 민족 소속입니까? 다윗 자손이죠. 다윗은 어느 소속이냐? 유다지파. 예수님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 속해요. 열두 지파가 왔는데 합격자는 달랑 한 명. 남은 자는 단 한 명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의고사 치고 정시 다 쳐도 소용없이 탈락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구원받지 못하는가? 그건 아까 강의했어요. 원천되는 예수님부터 이스라엘을 새롭게 창조하는데, 그것은 창조가 아니고 낳으면 돼요. 아담, 하와를 새롭게 낳으면 됩니다.
참고로 이야기해서 고린도전서 4장 15절,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스승으로 있던 것은 예수님 당시의 모의고사였습니다. “너희 제자들, 나를 따를 거냐, 안 따를 거냐?” “죽기까지 제가 따르겠습니다.”
탈락! 베드로 탈락이죠. 베드로는 예수님을 스승으로 여기고 따르기만 하면 된다고 여긴 거예요. 그 당시 모의고사에 의하면 제자는 스승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쳐야 되는 것이 당시 유대 전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역사 속에서 펼쳤던 모의고사였어요. 원천이 아니었어요. 원천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복음이 남자와 여자를 낳아요. 아들, 딸을 낳은 게 아니고 남자와 여자를 낳아요. 아들, 딸이 아닙니다. 아들, 딸을 낳는 것은 기존의 첫 아담, 남자와 여자가 자식, 아들과 딸을 낳는데 이건 모의고사에 지나지 않아요. 모의고사고 예수님이 낳는 것은 아들, 딸이 아니고 남자와 여자를 낳아요.
이 차이점을 아셔야 돼요. 아들과 딸을 낳게 되면 그다음 결혼해서 얘들이 다른 남자, 여자 만나서 아들, 딸 낳잖아요. 이것은 자기 족보에 그냥 갇힌 꼴이 돼요. 그러나 남자, 여자를 낳아버리면 이것은 복음이 살아있는 한 원천에 의해서 계속해서 무엇이 반복되느냐? 창세기 사건이 반복돼요. 창세기 사건이 반복됩니다.
창세기 사건에 나왔던 그때 주연배우들이 누구였습니까? 하나님 계셨고 뱀 있었고 그다음에 남자 있었고 여자 있었고. 끝이죠, 창세기 3장에? 가인이나 아벨은 그때 초반에 첫 번째 아담 중심의 사건에서 아직 등장할 때가 안 되었어요. 하나님, 그리고 남자, 그리고 여자, 그다음 뱀, 이 4인조 밴드. 이 4인조 밴드가 장차 신약에 등장하는 복음의 내용 구성요소로 꽉 차 있는 거예요. 모자람이 없이 꽉 차는 거예요. 이 네 배역에 의해서 남자, 여자, 뱀은 각각 신약시대가 되면 자기의 숨겨놓은 감춰진 비밀, 창세전 비밀에 있는 배역과 더불어서 신약에 공개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에요. 하나님은.
여러분, 참고로 창조과학회가 있습니다. 창조과학회가 과학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걸 증명하는데 내가 보기엔 이건 초등학교 4학년 수준의 모의고사에요. 그거 통과한다고 구원되는 거 아니에요. 왜냐하면 창조과학회에서 제공하는 고고학적 증거물이나 화석, 이거 따진다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증명됩니까? 고고학에 예수님이 피 흘린 게 나오고해서 그게 증명돼요? 안되죠.
그런데 아까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것, 이것을 알라 했습니까? 아니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알고, 그 외에는 알지 말라 한 것이 모든 핵심 비밀이 다 공개되었을 때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십자가 사건에 관여된 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남자, 여자, 그리고 그땐 뱀이 아니고 뭐냐? 마귀. 그리고 당사자인 예수님. 이 4인방을 통해서 원천이 완전히 다시 한 번 공개되고 그 공개된 것이 신약에서는 계속해서 반복되는 겁니다.
반복이 되면서 전에 창세기라는 모의고사가 지녔던 그 내용을 다 소환시켜서 남자, 여자, 그리고 뱀, 예수님이 있는 이상은 그때 창세기 사건을 되풀이하는 기능을 신약시대 고린도 교회가 떠맡아야 될 임무가 있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실제로 고린도 교회도 그렇고 이제 11장을 할 거지만, 신약의 사도 바울은 원천이 다 공개되는 거니까요, 사도 바울의 다른 편지에서는 그 4인방의 내용이 없는가? 나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그래서 지금 여러분, 갈라디아서 4장부터 먼저 봅시다. 각자 남자, 여자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21절,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자, 두 아들이 있죠. 두 아들은 남자 역할과 여자의 역할에서 원천이 드러나게 되면 실무자가 남자가 아니고 실무자가 여자에요. 왜냐하면 창세기에서 범죄 한 사건의 실무자가 남자 우선이 아니고 여자가 먼저 선악과를 따먹었거든요.
창세기를 아무리 봐도 남자, 여자가 의논해서 따먹을까, 말까를 결정 안하고 왜 남자가 없을 때 여자 혼자 따먹었느냐? 사도 바울의 편지에 의하면 여자 혼자 따먹어줘야 하나님의 언약, 주님이 바로 우리의 어머니가 된다는 사실이 밝혀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6절,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그러니까 실무자 차원의 배역에서는 뭐가 없어요? 아버지가 없어요. 아버지는 진두지휘하고 어머니는 그 배역에서 구원, 늘 새로운 자기 백성을 잉태하는 기능을 하나님 차원에서 했다는 거예요. 뭐가? 언약이.
지금 어머니 교회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고 되어 있어요. 이 ‘자유자’라 하는 것은 율법이 있고 자유가 없는, 곧 모의고사가 있던 세계와 대비하는 겁니다. 제가 모의고사라 하는 것은 구약을 말합니다. 구약 내내 인간들은 계속 업그레이드 된 모의고사를 치면서 처음에는 ‘하나님 믿습니다’ 하다가 나중에는 이방 종교로 다 빠지고 바알 섬기는 데로 다 빠졌잖아요. 모의고사를 다 실패한 거예요. 실패했다니까요.
실패했는데 모의고사의 기능 자체가 뭐냐? “인간이냐? 처음에 있던 아담과 하와 출신이야?” “예.” “단 한 명도 구원받지 못한다.” 그게 모의고사의 출제 이유였습니다. 율법에 속한 자는 율법의 저주만 받아야 되지, 율법을 통과할 수 있는 그런 대상은 아니다. 그러면 그 율법을 통과 못하니까 어느 인간도 하나님 나라에 갈 수가 없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갈라디아서 4장에서 실무자는 남자가 아니고 여자에요. 하와가 제일 먼저 선악과를 따먹고 남자한테 줘서 남자가 먹었기 때문에 실제 첫 저촉사건을 유발한 것은 여자 쪽입니다. 첫 번째 사건, 선악과 따먹었다는 사건이 여자 쪽에서 터져버렸을 때 그 사건을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한 원천의 차원에서는 그 여자 역할을 다시 반복하되 심화학습으로 반복하는 거예요. 그 내용을 까발릴 대로 다 까발려서 원천적 차원에서 최종적 차원에서 진짜 남자, 여자를 만든 원래 설계도의 원 취지가 뭐냐는 것을 다 까발린 입장에서 남자는 이런 역할, 여자는 이런 역할 했다는 것이 다 드러나는 겁니다.
어렵게 할 것이 아니고 쉽게 말해서, 예수님은 골라잡으라는 거예요. “예수님은 남자의 후손이냐, 여자의 후손이냐?” 딱 묻는 거예요. 예수님은 여자의 후손이죠. 보세요. 남자는 빠지잖아요. 예수님은 여자의 후손이에요. 여자의 후손이 예수님이라 했다면, 남자 쪽에서 태어난 건 뭡니까? 뱀이죠. 뱀이 태어나는 거예요.
창세기에 그런 내용은 없습니다. 왜? 그것은 초보 수준, 그 당시 계시가 발달하지 못한 수준에서 치는 모의고사에서 약간씩 약간씩 조금씩 풀어내듯이 알려주는 계시가 그 정도 수준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랬죠. 세례 요한이 선지자 중에서는 최고지만 천국에서는 어린아이보다 실력이 못하다는 거예요(마11:11, 눅 7:28). 천국의 어린아이는 성령에 의해 모든 걸 알았는데, 구약의 성도들은 천국의 어린아이보다 더 못해요. 확실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모든 것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갈라디아서 4장을 계속 봅니다. 사라가 두 조각으로 나눠집니다. 사라가 있고 사라의 여종이 있어요. 여종이 하갈이죠. 여종과 사라가 중첩되어서 하나로 모아져 버리면 그냥 실무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돼요. 실제로 잉태 담당은 여자 쪽이니까요.
남자는 잉태를 못하니까 여자가 담당할 때, 그 여자 쪽에서 어떤 요소를 품느냐 하면 여자가 먼저 선악과 따먹었다는 부정적 요소가 여자를 통해서 그게 나타나는 겁니다. 여자를 통해서. 여자가 부정성인데 그 부정성을 내용으로 해서 비로소 천국에 합격되는 긍정적인 자식도 태어난다는 거예요. 실무자 선에서. 남자 말고 여자 쪽에서. 실무자 선에서 나타나는 거예요. 잉태 담당은 여자기 때문에.
아들, 딸 자식 낳고 가정을 이루고 뭐 그것은 전혀 상관없는 거예요. “우리 가정은 어떻게 하면 행복합니까?” 할 때는 고린도전서 2장 2절로 또 혼나야 돼요.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알지 말라 했어, 안했어?” 괜히 가정 생각하면 가정 때문에 이 십자가만 알아야 될 것이 훼방 받는다고요. 훼방되니까 걱정, 근심, 염려가 물결처럼 덮치는 거예요. 철저히 여자는 여자의 역할이 되어야 되고 남자는 남자의 역할이 되어야 돼요.
이 점을 위해서 레위기를 한번 보겠습니다. 레위기 12장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2절, “…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게 아닙니다. 남자를 낳아요. 남자를. “남자를 낳으면 그는 칠 일 동안 부정하리니 곧 경도할 때와 같이 부정할 것이며 제 팔일에는 그 아이의 양피를 벨 것이요 그 여인은 오히려 삼십삼 일을 지나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잉태 담당자가 여자 쪽이기 때문에. 여자가 남자를 낳는 그 사건을 이스라엘에서는 특수하게 창세기를 반복하려는 의도와 연결 짓고 있습니다.
그 다음 다른 이야기가 없고 그냥 13장으로 넘어가게 되면 ‘아, 남자를 낳거나 여자를 낳거나 전부다 칠 일 동안만 부정하고 그다음 팔 일째 제사 제물을 거기다 가동시키면 더러운 것이 깨끗하게 되어서 가는구나.’하고 넘어갈 텐데, 그게 아니고 여기 어떤 구별을 둬요. 남자를 낳으면 7일 동안, 여자를 낳으면 며칠 동안 부정하냐? 14일 동안 부정하고 깨끗하게 되는 것도 곱빼기에요. 남자는 33일 지나면 산혈이 깨끗하지만 여자는 33×2=66일 지나야 이게 깨끗하게 되는 겁니다.
그럼 실무선의 여자의 육신을 가지고 주님께서는 창세기에 있었던 사건을 거기다 삽입시켜 버리는 겁니다. 삽입시킬 때 “거봐. 남자말고 여자 쪽에서 먼저 더러운 것, 부정한 것, 죄를 유발하고 촉발하는 그러한 배역을 그 당시 에덴동산에서 벌였잖아.”라는 것이 드러나게 돼요.
그런데 이것이 뭐냐? 모의고사란 말이죠. 사람들은 여기서 뭘 생각하느냐 하면, 여자로 태어난 것에 대해서 어떤 불이익, 불평등, 페미니즘 사상 그런 것, ‘여자로 태어난 것이 죄냐? 여자는 사람도 아니냐? 사회는 가부장제로 불평등해도 하나님께서는 좀 봐줘야지. 진짜 하나님마저 이러기에요?’ 이런 식으로 ‘여자를 무시합니까?’ 이렇게 하는데요.
사람이라는 것은 없어요. 남자와 여자가 있을 뿐이고 사람은 예수님만 사람이에요. 원천적으로 예수님만이 사람이라는 것이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와요. 마지막 사람이고 두 번째 사람이죠. 예수님만이 참된 아담이 되고. 예수님이 원천이거든요, 원천. 시원(始元)이고 기원(起源)이에요.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미리 남자, 여자가 만들어지고 그 관계 속에서 예수님의 기능이 여기에 미리 담기게 되는 겁니다. 아담과 하와 속에 담기게 돼요. 만약에 남자가 자궁이 있어서 아이를 낳는다면 바꿔서 하겠죠. 그러면 예수님도 누구의 아들? 남자의 아들. 남자의 후손이 될 거예요.
그러나 처음 사건은 여자가 먼저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되어 있고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왜 남자가 먼저 따먹지 않고 여자가 먼저 따먹었느냐? 하나님께서 원래 인간으로 온다면 인간은 잉태라는 조건, 잉태라는 환경을 통해서 사람이 되는 그 원리를 애초부터 하나님께서 시연했고 계획했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래요. 이러한 사고방식은 시간을 따라서 본래의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사실은 무엇이 끝이냐 하면 창세기가 끝이라 할 수 있어요. 창세기가 끝이에요. 끝부분부터 거꾸로 말아가는 거예요. 거꾸로.
이미 예수님에 의해서 복음으로 구원을 받은, 그것도 집단적으로 구원을 받은 자는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어요. 다만 남자 기능은 있고 여자 기능이 있습니다.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남녀를 차별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그게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 받은 자는 그게 남자가 됐든 여자가 됐든 종이 됐든 자유자가 됐든 전부다 한 몸이니라(갈 3:27-28). 한 몸이니까 군소리하지 말고 여자 기능을 하라고 여자 육체를 만들어놓고 남자 기능을 하라고 남자 육체를 만들어놨으니까 남의 배역 탐내지 말기. 각자 각자 자기 기능하기.
무엇이 중요하냐? 내가 맡은 기능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이 발생되는 그 지점에 있는 자는 여자가 돼요. 왜냐하면 죄와 더불어 있기 때문에 여자가 구원의 기표, 구원의 상징성이 더 깊이 나오는 겁니다. 여자는 여자를 낳으면 여자를 낳았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그만큼 하나님의 죄에 대한 사랑의 깊이가 여자한테는 곱빼기로 그냥 두 배로 주어지는 거예요. 두 배로.
철딱서니 없는 남자는 죄의 깊이를 몰라요. 그러나 여자는 아기를 해산함으로써 남자보다 훨씬 더 죄라는 것이 깊숙이 안에 바탕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을, 아기 낳으면서 고통을 느끼면서 그것을 남자보다 더 깊이 느끼는 거예요. 그게 디모데전서에 나옵니다. 여자는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딤전 2:15). 구원의 체험을 해산을 통해서 느낀다. 그 기능이 여자의 기능이라는 거예요.
산부인과에서 애 낳을 때 남자는 뭐했습니까? 남자 뭐했어요? 복도에 앉아서 게임하면서 ‘아직 멀었나?’ 요새 남편은 또 안 그런대요. 요새 남편은 공동 체험한다고 자기도 옆에 붙어 있고 아주 유난을 떨고 있어요. 쓰잘데 없이. 네 마음이나 고쳐라, 그런 걱정하지 말고. 엉뚱한 짓하지 말고. 그런다고 위로받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그런 이벤트를 벌여서 나머지 뭘 또 요구하려고… 수상해, 수상해.
사라는 잉태하지 못합니다. 잉태하지 못하는데 뭘 잉태 못하는가? 사라는 사람을 잉태하지 못해요. 사람을 잉태하는 것은 바로 하갈, 종 쪽입니다. 그래서 그 종이 낳은 이스마엘은 율법이 가진 저주를 옴팍 쓰고 평생 동안 이게 저주라는 것을 드러내는 기능을 분배받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비 약속, 약속에서 배제된 자가 보여주는 기능입니다.
골로새서 1장에 보면 세상에 남자나 여자나 어떤 자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리기 위해서 각각의 맡은 배역대로 한쪽은 지옥가고 한쪽은 천국가게 되어 있어요. 로마서 9장에 보면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 때 저주의 그릇도 만들고 사랑을 담는 그릇도 만드는데 거기에 대해서 불평하지 마라. “만드는 자가 그렇게 만들었다는데 만들어진 네가 왜? 토기가 왜 나한테 시비 걸고 달려드느냐? 그게 토기의 자세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런 것은 누구를 의식하는 것이냐? 같은 피조물이면서도 대적하는 자, 원수가 있어요. 바로 악마가 인간을 자기 마음으로 자기 심성으로 버려놨던 거예요. 인간을 버려놓은 겁니다. 창세기에서 선악과 따먹은 것은 잘한 짓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건 잘했다.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은 참 잘했다.’ 그게 유포되어 있는 세상이 이 현실세계란 말이죠.
그래서 그런 세계에서 남자, 여자는 각자 사람이 되어버려요. 사람이 되어버리면 사람과 사람의 존재가 아니라 사람의 기능에 있어서 차별되는 것을 사람들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용납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내가 하는 기능은 내가 정하기 때문에 내가 남자 못지 않고 남자도 여자 못지 않다면 “남자가 여자 행세하든 여자가 남자가 되든 그건 내 마음대로다. 왜?” 이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동성애 문제 이런 문제가 다 그런 거란 말이죠. 뭔가 누구로부터 부여받는 게 없다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11장을 봅시다. 고린도전서 11장의 문제를 풀면서 해답이 의외로 간단히 풀려요. 여자가 왜 머리에 쓰거나 머리에 쓰기 싫거든 길러야 되는가? 그 이유가 여기 10절에 나옵니다. 10절에 보면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다.
For this cause ought the woman to have power on her head because of the angels.(KJV)
Therefore the woman ought to have a symbol of authority on her head, because of the angels.(NASB)
For this reason, and because of the angels, the woman ought to have a sign of authority on her head(NIV)
천사들이 보고 있으니 여자는 자기가 남편의 권위를 인정하는 표시로 머리를 가려야 합니다.(공동번역)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 때문에 남자의 권세아래 있다는 표로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합니다.(현대인의 성경)
여자가 있다면 여자는 뭘 하나 더 짊어지고 있어요. 권세의 자리가 점선 자리로 비어있는데 그 비어있음의 지배를 받는 기능을 여자가 해야 된다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권세가 지배를 하고 있다. 그 권세에 지배받는 역할을 인간 수준에서는 여자가 그 일을 담당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 권세가 어떤 권세냐 하는 것은 여자가 긴 머리 들고 물에 빠지면 되겠죠. 그럼 여자 머리는 물미역이 되겠죠. 척!하고 얼굴에 붙어가지고 물미역이 돼서 축 늘어지면 여기에 권세가 흐르고 넘치죠. 그런 역할을 하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무엇이 풀리느냐? 8절이 풀려요.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럼 남자는 누구한테 났는데? 여자한테 난 것이 아니고 남자는 그리스도로부터 났다는 거예요. 3절에 보면 “…각 남자의 머리는” 뭡니까?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은 안보이잖아요. 하나님도 안보이죠. 보이는 차원을 생각해보자. 위에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서열을 수평적인 남자와 여자, 보이는 차원에 그대로 복사해서 그 둘 사이 관계를 걸어다니는 남자, 여자를 통해 이들이 보이지 않는 권세를 둘 다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이는 기능을 담당하라는 겁니다.
담당하면 구원받습니까? 아니죠. 이 내용이 뭐냐?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한다는 그런 원천이 공개된 차원에서의 남자의 존재이유, 여자의 존재이유를 보여줌으로써, 이래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지금 보이지 않는 구석에 뭐가 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창세기 모의고사가 신약에 와서 이제는 합격해서 다 이루었다는 것을 너희들이 보여주라는 겁니다. 그걸 보여주라는 거예요.
이렇게 하면 “여자가 머리 반드시 길러야 됩니까? 숏 커트하면 안 됩니까?” 그런 질문이 막 나오죠. “숏 컷트하고 있다가 교회 갈 때만 가발 뒤집어쓰고 물미역 쓰고 가야 됩니까?” 그렇게 묻는데, 그것은 지금 ‘하라, 하지 마라’는 우리 인간에게 해당이 안 되는 것을 모르는 거예요. 하라, 하지 마라는 우리 인간에게 해당이 안돼요!
그럼 왜 이걸 하라 하느냐? 그 시대, 사도 바울 시대에 있었던 그 당시의 사회 문화 제도를 주님께서 모의고사의 하나의 전형으로 빌려온 거예요. 그 당시의 문화 속에서 십자가 다 이루었고 인간은 누구나 구원받았는데 다만 기능은 남아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세기를 여기서 재현하고 창세기라는 넷플릭스 드라마를 반복하기 위해서 그렇게 사용한다.
그 시대의 문화 자체가 여자는 머리에 안 쓰고 머리를 깎아버리면 이것은 그냥 창녀나 사회적으로 부정했던 여인으로 평가돼요. 헬라 뿐만 아니고 민수기 5장 18절이나 이사야 7장 20절에 보면 그 당시 모의고사 입장에서는 여자가 부정한 것을 들켰을 때는 머리를 깎아서 ‘나 이런 나쁜 여자입니다.’하는 호손의『주홍글씨』처럼 문자를 새기듯이 머리에 표시해서 ‘나는 저주받아 마땅합니다. 율법을 어긴 여자입니다.’하고 돌아다니는 거예요. 그 당시 모의고사에서는.
그러면 지금의 문화는 뭐냐? 지금의 문화는 민주주의죠. 뭐 간단하죠.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자본주의 경제에서 남자의 역할, 여자의 역할은 뭐 간단합니다. ‘여자가 돈 번다고 남자 너무 구박하지 마라.’ 이런 거죠. “너 요새 돈 좀 번다고 막 기어오르는데 세상 참 좋아졌다. 응? 세상 좋아졌어. 하늘같은 남편을 너 그렇게 생각하나?”라고 한다면 여자 쪽에서 가만있지 않아요. “하늘같은 남편 월급 좀 가져와라. 미치겠다, 정말. 살림살이 살고 돈 벌라고 하니 미치겠다.” 이렇게 나오겠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늘같은 남편은 돈 벌어준다고 남편이 아니고, 나는 그리스도의 권세,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그 점을 남편이 아내를 통해 그 관계를 보여주면 되는 거예요. 보여주면 되겠죠. 이 이야기 듣고 여자들이 “그 쉬운 거 내가 할게. 당신이 돈 벌어. 쉬운 거 내가 할게.” 이런 통박이 막 돌아가요.
그런데 남자가 “나는 홀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내 안을 뭔가 누르고 있는데,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를 누르고 있다.”라는 이 말을 할 때, 여자는 뭐냐? “당신이 그런 기능이 있다면 내가 기꺼이 그 복음에 대해서 복종할 의사가 있다. 복음에 대해서.” 남편 더러운 성질 말고요. 땡깡 부리는 거 받아주는 게 아니고 “그 복음에 대해서 난 오케이! 나 동의한다.” 그러면 복음적으로 아주 사이좋은 부부입니다. 사이좋은 부부가 돼요.
힘이라는 것은 원천,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는 것이 힘이 되어야지, 기존의 자본주의나 가부장제도에서 남자는 하늘같다는 그런 식으로 내미는 것이 고린도교회가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그 당시에 또 문화적 사회적 분위기에 있어서 여자가 공공장소에서 함부로 말하고 남자 가로막고 “김 권사, 나도 말 좀 합시다. 이 교회에 장로밖에 없나? 권사는 말 못하나?” 이렇게 제시하는데, 그 내용이 어떤 경우에 그러느냐 하면 그 당시 그 교회의 모든 장로들이 복음을 하나도 말 안할 때, 선지자적 입장에서 ‘이게 복음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드보라 같은 그런 사람일 때에요.
그럴 때 교회 목사가 고린도전서 11장을 하면서 “여자들은 집에서 이야기하지, 여기서 말하면 안 됩니다. 만약에 복음을 이야기하려거든 순서대로 하세요. 먼저 남자부터 하고 여자가 하세요.” 이렇게 나오면 여자가 하는 말이 “남자 중에서 할 사람 아무도 없는데요?” 그럼 그 교회 권사 다섯 명 있으면 첫 번째 여자, 두 번째 여자, 전부 다 여자가 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십자가와 그 외에는 알지 않기로 원하는 것이 오늘날 이 시대에 남자든 여자든 해야 될 마땅한 사명이고 성령의 도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다음 7장 봅시다. 7장 내용이 8강까지 이어지겠는데 7강에서 남은 짧은 시간동안 이것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보세요. 고린도전서를 어른들보고 이야기하면 어른들이 이성적으로 따져서 ‘믿을까, 믿지 말까? 아, 이런 게 하나님의 일하심이고 구속하심이구나.’ 아는데, 어린아이는 어떻게 구원받죠? 어린아이는? 고린도전서 이걸 어린아이한테 알려주게 되면 이건 뭐 <킹 오브 킹스>도 아니고 이걸 만화영화 만들어서 알려줄 수도 없고 어린아이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느냐 이 말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 고린도전서에 이렇게 나옵니다. 7장 14절,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뭡니까?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사도행전 16장 31절에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해서 그 기초단위가 아버지나 어머니가 복음을 알게 되면 거기에 영향력이라든지 그 훈계 속에 반드시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는 일체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라는 그 기능이 성령을 통해서 전달되게 되어 있어요.
“애가 뭘 알겠습니까?”하지만 말씀은 그냥 알아지는 게 아니고 성령과 동반해서 알아진다면 애들 수준에서 “나는 죄인이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애라도 그걸 알 수 있어요. 그런데 그것조차 모르는, 태어난 지 24시간 만에 죽어버린 애는 어떻게 됩니까? 그건 하나님 자기 마음대로 하지, 그걸 죽기 직전에 태어난 지 24시간도 안된 애한테 “마지막 유언이 뭐냐? 마지막 유언을 남겨줄게.” 지금 젖도 못 먹는 애한테 “고린도전서 7장에 이런 내용이 있거든.” 해봐야 소용없죠.
그러니까 모든 자녀나 배우자나 이미 주님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니라는 입장에서 한 가정에 붙여준 피조물이죠. 내가 책임질 문제는 아닙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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