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여름수련회 고린도전서 강해 제6강 : 성령과 십자가 - 이 근호 목사
6강 시작합니다. 이제 돌고 돌아서 고린도전서 1장에 왔습니다. 이런 내용을 알고 고린도전서 1장 2절 보면 비로소 내용이 확 와닿지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 어떤 영화에 이런 것이 있어요. 3차원 공간 속에 동그란 구형의 물체가 있어요. 현재 눈에 보이는 공간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서 그 안에서 격투를 벌이는 영화입니다.
다른 차원이 기존 차원의 장소를 점유하는 것, 이것이 ‘중첩’이지요, 차원의 중첩.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일반사람들이 아무리 봐도 보이지 않는 데 여기에 ‘예수 안’이라는 다른 공간이 마련되어 있는 것, 이것을 고린도전서 1장 2장에서는 ‘교회’라고 하고, 더 놀라운 사실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이야기해요.
몸, 몸이라는 것은 기존의 육신을 바탕으로 해야 그것을 몸이라고 규정하는데 이 몸은 예수님의 부활체에 근거해서 확장되어 나온 몸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몸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이 몸이 눈에 보이느냐, 안 보이느냐?’라는 말을 하면 안 되고요, 출발점을 ‘과연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했느냐?’의 문제입니다. ‘죽었다가 부활했느냐?’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했다면 하늘에서 유일하게 인정하는 존재가 예수님입니다. 아버지가 친히 부활시켰거든요. 석가모니나 다른 위대한 성자나 성인 이런 사람들은 부활시키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그것은 창세 전에 계약된 주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이 빠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존재들 중심으로는 일을 벌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주어진, 약속에 의해서 주어진 것은 죽었다가 부활해야 해요. 부활해서 중첩된 공간, 차원이 다른 새로운 세계를 기존의 눈에 보이는 세계 속에다 엎어버렸지요. 엎어버리니까 편지는 누구한테 날아가는가? 기존의 세상으로 날아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 있는 교회를 향하여 날아갑니다.
그러면 기존에 있던 사람들은 듣기는 들어도 무슨 말인지를 모르지요. 기존 개념은 이 세계 안에서만 통용되는 개념이기 때문에 그 기존 개념을 배척하는 개념들이에요. 그래서 신학들이 여기서 떨어져 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고린도전서 1장 2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그다음의 단어가 중요해요. 뭡니까? “부르심을 입은 자들” 수동형이지요. “성도라고 해주세요”라고 요청한 적 없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인 조치로서 성도라고 불러주는 거예요. 성도가 뭐냐 하면, 성도란 구별된 다른 세계, 또는 다른 차원에 속한 자가 성도가 되는 겁니다.
이게 구약에 있어서는 애굽과 차이 나는 이스라엘입니다. 언약이 있는 민족인 이스라엘과 언약이 없는 애굽과의 차이, 그 틈, 그 사이를 ‘거룩’이라 하는 겁니다. 그 거룩으로 인하여 구분되는 겁니다. 그리고 왜 이렇게 거룩이 그 틈에서 나오는가 하면 이스라엘이나 애굽이나 둘 다 뭘 로 장착되어 있느냐 하면, 선악 사고, 선악 의식으로 무장되어 있기에 선악 체계를 피하면서 거룩은 거룩대로 챙기는 방법은 하나님의 언약이 그 선악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착하게 살면 어디에 간다고 했어요? 착하게 살겠다는 그 의식이 죄가 된다는 것을 모른다면 지옥 갈 수밖에 없지요. 착하게 사는 것은 자기 취미기 때문에, 성격이기 때문에 그대로 가는데 그 착함이 더 착함 앞에서는 빛을 잃어버려요. 자기 동네에서는 착한데 다른 동네에 가면 안착해요. 제주도에서는 “폭삭 속았수다!”가 되는데 다른 동네 가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취급받아요.
새로운 환경에서는 모든 조건이 재편되듯이 예수 안에서 요구하는 조건 안에서 이들은 강제로 재편되어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아버린 겁니다. 어떻게? 개인적으로? 아니지요. 집단적으로, 집단적으로 성도라 했어요. 여기서 개인적으로 “나는 거룩하다”라고 나온다면 그 사람은 그 집단에서 용납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자꾸 개인은 안 되고 집단인가? 이미 인간 환경 자체가 개인을 용납하지 않는 집단속에 있었습니다. 집단 속에서 지배를 받았는데 그 집단을 가지고 고린도전서 2장 8절에서는 “이 세대의 관원”이라 표현되어 있습니다. 알 수 없는 정치적 통제를 의식하는 것, 그게 인간세계에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고 되어 있어요.
권세라 하는 것은 power, 힘이죠. 인간과 인간 사이에 힘이 있다는 것이 굉장히 신기하지 않습니까? 이게 참 신기한 일이에요. 너와 나 사이에 아무리 봐도 뭐가 없어요.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으면 그 사이에 아무것도 없다고요. 물리적으로 공간이 떨어져 있으면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음’이 되는데 저쪽에서 “어이!”하고 부르니까 “예이!” 하고 달려가더라는 말이지요.
도대체 이 사이에 뭐가 있는데, 뭐가 있기에? 저쪽에서 부르면 내가 달려가야 하는 그 이유가 뭐지? 여러분이 그런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인간과 인간 사이에 힘이 있다는 것, 그것을 이미 물리학에서 밝혔어요. 필드(field), 어떤 장(場)이 형성되어 있어요. 패러데이(Michael Faraday, 1791-1867)가 말한 그 장(場)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역선(力線), 힘의 선이 가득 차 있는 거예요.
그래서 물리학에서는 이미 공간은 없어요. 공간은 없고 입자들의 관계, 그 관계망이 공간이 되는 거예요. 입자들의 관계망입니다. 입자들, 양자, 전자, 양성자, 중성자 입자를 분류할 때마다 거기에 뭐가 하나씩 끼어듭니까? 흩어져 있는 자아가 관찰자로 관계를 맺게 되지요.
이 관계, 보이지 않는 것, 여기서 ‘있다’가 둘로 나눠집니다. 1. 있다는 것은 장(場), 필드(field)가 있다, 영역이 있다. 2. 입자가 있다. 둘 중 어느 쪽이 먼저냐? 장(場), 영역이 먼저입니다. 이게 성경 어디에 나오는가? 창세기 4장에 나옵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동생을 죽일 때 보이지 않는 힘이 덮쳤어요.
형이 평소처럼 동생과 대화하면 될 텐데 악한 기운이 덮치니까 갑자기 성질이 확 올라오면서 ‘죽여버려야 하겠다.’ 죽이는 그 이유가 “하나님하고 관련된 동생이기에, 그리고 하나님이 내 제사는 안 받았기 때문에 나는 참을 수 없다.” “왜 참을 수 없는가?” “누가 뒤에서 시키더라” “누가?” “몰라.” 누가 그랬는지는 몰라요. 이미 권세의 노예가 되어 있는 상태에서 권세가 시키는 대로 그냥 그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어요.
이런 보이지 않는 권세가 히브리서 2장 14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에 권세의 정체가 나옵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자,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혈육’이 눈에 보입니까, 안보입니까? 눈에 보이지요. 혈육은 눈에 보여요. 몸무게 재고 키도 재고 하잖아요. “얼마나 컸느냐?” 하면서. 눈에 보이지요. ‘사망’은 눈에 보입니까? 안 보이지요. 사망의 세력이 눈에 보입니까? 안보이지요. ‘마귀’가 눈에 보입니까? 안보이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기독교 성경 자체가 거짓말이네.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그래서 없는 데 왜 있다고 하느냐?’
그러면 히브리서 2장 15절을 봅시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눈에 보입니까, 안보입니까? 강도가 “돈 내놓을래, 나한테 죽어볼래?” 할 때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어떻습니까? 뭔가 힘을 느끼지요. ‘아, 돈 안 내면 저 인간이 나를 죽이겠구나’ 느끼지요. 이게 뭐라고요? 이게 무서움이라고요, 무서움.
왜 무섭지요? 죽는 게 무섭지요, 죽는 게 무서워요. 철학에서 그리고 다른 종교, 불교에서는 이 죽는 것이 최고의 난제인 것을 알고 나름대로 대책을 내놓아요. “죽기 전에는 아직 안 죽었으니까 괜찮고, 죽고 나서는 죽은 것을 모르기에 안 무섭다.” 이런 논리를 내놓는데 이것은 인간을 입자로 보는 거예요.
죽는다는 것을 무섭게 하는 그 힘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죽음에 대한 무서움을 해결하는 방법은 뭡니까? 죽음이 힘이거든요. 죽음이 힘인데 죽기를 싫어하니까 더 큰 힘에 의존하면 되겠지요. 그 더 큰 힘이 뭐냐? 이제 정권이 바뀌었으니 새 대통령입니다. 큰 정치적 힘 아닙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했을 때 베드로에게 위협을 가한 것은 누구냐 하면, 같이 모닥불을 쬐던 소녀였어요. 그 소녀가 살짝 가서 조용히 “아저씨! 아저씨도 저 예수님과 한패인데.” 이 정도만 했어도 베드로가 피신 안 했습니다. 조용하게 다가가서 “아저씨, 아저씨도 한패지요?” 이렇게 했으면 겁을 안 냈어요.
그런데 거기 모인 사람들 다 듣도록 “저 사람은 예수와 한패다!” “쉿! 너 그 입 안다물거야?” “맞는데요!” 하니까 베드로가 후다닥 그 자리를 떠나면서 닭은 닭대로 또 울지요. 베드로가 울었던 이유가 이 세상 권세를 의식해서 주님을 배신할 정도로 어두움의 권세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는 자기 신세가 상당히 서글펐던 겁니다. 상당히 자조적인 거예요.
<나는 반딧불> (황가람, 2024)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
……………………
몰랐어요 난 내가 개똥벌레라는 것을
얼마나 서글픈 노래입니까? 슬픈 노래 리스트에 포함될 거예요. 자기 처신이 서글픈 거예요. 나는 별이 되고 싶었는데 어떤 보이지 않는 권세 때문에 내가 반딧불밖에 안 되게 하는 그 힘은 어디서 나왔는가를 어딜 봐도 규명하지를 못합니다. ‘그냥 나 하나 허무하게 살면 되지 뭐. 나 하나 죽었다 치고 살면 되지.’ 자꾸 자기 속으로, 내부로 응축이 되는 겁니다.
자, 인간은 작은 입자지만 그 위에 하나의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전자, 원자핵이 다 입자에요. 입자지만 그 가운데 빈공간이 있음에도 칼이 잘 안 들어가는 이유가 에너지의 장(場)이 그 빈공간을 꽉 채우고 있어서 거기에 강력한 에너지가 있다고 설명하거든요. 에너지는 파동으로 물결치고 그 파동 속에서 입자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우연적으로, 확률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렇게 이야기들 해요. 그러니까 나라는 것은 증명사진 찍듯이 찰칵 찍어서 ‘나 저기 있다’라고 하면 안 되고 예를 들어 증명사진을 찍을 때 무엇도 같이 나와야 하는가? 만화에 보면 머리 위로 풀풀 올라오는 것이 있어요. 시커먼 연기, “어머! 무서워라.” 시커먼 연기, 검은 기운이 같이 나와야지요. 여기서 파묘(破墓) 한번 할까요? 무덤을 파봐야 할까요?
인간의 세계는 참으로 공포스럽습니다. 그런데 공포를 못 느끼는 것은 뭐냐? 권세에 굴종하고 복종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의 세계에 아무 소리 하지 않고 뒤따라서 감으로써 우리는 그 공포를 줄이고 있습니다. 힘이 있는 곳에서 공포를 줄일 수 있는 처세술로 버티면서 결국 남는 것은 ‘나만 살면 되잖아요.’ 그런 식이지요.
다시 고린도전서 2장으로 돌아와서 십자가가 뭐냐? 이제 십자가가 나옵니다. 다시 한번 이야기합니다. 이 십자가는 어떤 개인적인 역량, 개인적인 신앙심으로 십자가를 믿을 수 없다고 했어요. 개인은 용납하지 않아요. 집단적인 거예요. 그 집단을 구성하는 권세, 그동안 우리를 어두운 기운으로 압박했던 그 권세를 뚫는 데 성공하신 그 성령의, 죽은 자가 부활하는 그 부활의 능력으로 십자가를 알려주기 때문에 십자가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4-25절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수동적입니다. 본인이 십자가를 찾아온 것이 아니지요. 어떤 결과에 의해서 이렇게 부르심을 받았느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세계에서 인간은 하나님이든 어떤 신이든 간에 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중요한 것은 코 앞에 있는 인간 대 인간들로 구성된 권세보다 더 센 권세가 없음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살아온 거예요. 하나님을 믿고 싶고, 예수님을 믿고 싶지만 눈치 보면서 조심스럽게 믿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흩뿌려진 개인의, 자아의 처세술이었습니다.
개인의 자아가 그렇게 약하다면 집단으로 모여서 항거하면 되지 않느냐? 회사에 모여서 “일요일은 쉬게 하라! 일요일은 교회 가게 하라!” 이렇게 하면 그것은 집단입니까? 왜 그것은 안 되느냐, 그것은 왜 실패로 끝나는가 하면 그것은 부르심을 입은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부르심을 입은 자가 세상 권세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하는가? 궁금해요? 궁금하면 알려드려야지요. 그것이 고린도전서 4장에 나옵니다. 9-13절에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쓰레기) 같이 되었도다.”
이게 바로 사도 바울이 제시한, 사도에게 주어진 사도의 처세술입니다. “좋은 것 다 해라. 우리는 남들이 기피하는 것 할게.” 왜? 주님이 이 모습으로 살아가셨기 때문에 그걸 보여주는 거예요. 왜 사도와 그 일행에게는 이런 비참한 삶이 허용되는가? 사도가 십자가에 더 근접해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안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권세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기능이 어떤 기능이냐, 십자가에 힘없이 맥없이 돌아가신 그 안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님의 그 기능에 근접한 자, 사도에 근접한 자들에게는 주님과 유사한 기능으로 다른 일반인들에게 다가서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공식 하나 만들면 이렇습니다. 시간이 구약 쪽에서 신약 쪽으로 흐른다고 했을 때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예수님만 계시다. 예수님 안에 뭘 품고 있다? 이스라엘을 품고 있다. 이스라엘을 품고 있을 때 예수님이 어떻게 했는가? 제자 몇 명? 열두 명이 나와요. 열두 명이 뭐가 되는가? 사도가 됩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하나는 가룟 유다, 사탄이잖아요. 사탄은 빼고 가실 게요, 해서 빼버리고 맛디아를 집어넣고 12라는 숫자가 되고 난 뒤에 하늘에서 뭐가 오느냐? 예수님의 영, 성령이 와버려요. 예수님에게 있던 성령이 열 둘에게 임하고, 열 둘에게 성령이 임하면 그다음부터는 또 많은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게 됩니다.
이 성령이 어디서 나왔다는 말입니까? 지상에 있던 그 예수님에게서 성령이 나왔기 때문에 성령은 다시 전부 어디로 귀속합니까? 예수 안으로 다시 돌아오게 함으로써 모든 성경은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고, 예수님을 위하여 말씀을 줬다는 그 코스를 밟고 예수 안으로 귀환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을 보겠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권세가 끝까지 우리의 자존심을 흔들고 ‘너 그러면 망한다’라고 자꾸 협박하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그 권세가. 우리는 그 권세의 장(場)에 놓여 있고요. 13절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믿음직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 이 말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예 처음부터 고생 없게 하면 되잖아요. 탄탄대로 가게 하면 되잖아요. 탄탄대로 가게 되면 예수님이 겪었던 것, 세상 권세가 확실히 존재하고 예수님이 갖고 있던 아버지의 권세가 기존의 권세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공동 체험이 되지를 않아요. 세상의 똑같은 어두운 권세 속에 있다면 주님의 권세가 어떻게 그 속에서 길을 내었는가를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길은 인간의 세상 권세에 의해서 늘 막혀 있어요. 세상 권세가 “자, 천국 가세요”라고 열어주지를 않습니다. 항상 막혀 있고 또 뒤따라오고 그래요. 우리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환경입니다. 이미 예수 안에 있는데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내가 훌륭하다는 말이 아니고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예수 바깥에서 예수님을 괴롭히고 있던 그 권세가 그리스도 몸인 성도한테 실제적인 현실로 경험되는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 자체가 뭐가 되는가? 천국 가는 길이 되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성도가 구원의 환경을 몰고 다닌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 홍해는 건너는 것이 아니라 ‘홍해를 짊어진다’라고 했지요. 홍해를 짊어지고 가야 해요. 홍해를 건너버리면 안 돼요. 홍해와 함께 가야 해요. 왜? 그 안에서 여호와가 용사가 되기 때문에.
그러니까 성도가 구원의 환경을 몰고 가는 거예요. 시험을 당할 때 빠져나온다. 그러면 빠져나왔는지 아니면 지금 시험 자체가 아닌지를 어떻게 아느냐? 15-16절에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 주께서 어디로 인도합니까? 십자가 사건이 있는 곳으로 인도합니다. 사건은 현실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건은 이 지상의 시공간에서 해프닝이니까 있다가 없어졌어요. 남들에게는 있다가 없어졌는데 성도한테는 이것이 자꾸 사건화되면서 그 현장에 나타나요. 나타나면서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를 유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유도하느냐? “이 난관을 네 신앙으로 이길래, 그냥 안 이길래?” 그렇게 되는 거예요. “네 믿음과 소망과 기도발로 이겨볼래, 아니면 안 이길래?” “나 안 이길래” 그러면 거기서 길이 되는 거지요. 굉장히 쉽지요. 굉장히 쉬워요. 괜히 나대지 말라는 거예요. 나대지 말라. 나서지 말라.
왜냐하면 다 이루었기 때문에. 어떤 난관이 왔을 때는 십자가에서 눈을 돌려서 하나님을 잘 섬기는 환경을 스스로의 힘으로 조성하려고 자기 능력을 동원하는 이것은 시험에 홀딱 빠진 거예요. 마귀 나라에서 좋~다고 춤을 출 겁니다. 또 하나 걸려들었다고.
17절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이렇게 해서 그다음부터는 절기와 관련되어서 이스라엘의 연속성, 구약의 절기와 신약의 성만찬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다 보여주는 겁니다. 20절에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여기에 또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 귀신이 등장합니다. 아니 무당도 아니고 누가 귀신하고 교제를 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핍박하는 환경이 예수님을 대적하는 주체, 귀신, 악마가 배후에서 부추기는 환경이라는 것을 성도가 시험받으면서 전체 윤곽이 그 순간에 파악이 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1장 봅시다. 24-26절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뭘 전한다고요? 주님의 죽으심, 특별한 분의 특별한 죽으심이 천국 가는 유일한 입구가 된다는 겁니다. 입구가 되면서 이 세상을 탈출하는 탈출구가 된다. 그런데 이것은 어떤 지점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출몰하는 사건이 되는 거예요. 그 사건에 자력으로 접근이 안 됩니다. 사건은 없어요. 없지만 하나님께서 매 순간 낯선 환경을 계속해서 일으킵니다.
일으키면서 다시 한번 묻는 것은 이겁니다. “네 힘으로 이 사태를 이겨볼래? 아니면 그냥 나 무능합니다, 하고 내팽개칠래? 어느 쪽 할래?” 할 때 “내 힘으로 해보겠습니다” 하면 그것은 시험을 이긴 것이 아니고 시험에 옴팍 빠진 것이 돼요. <사운드 오브 뮤직>(The Sound Of Music, 1969) 그 영화에 보면 마리아가 수도원을 떠나서 트랩 대령 집안의 가정교사로 들어가기 전에 수도원장이 세상살이가 힘든 것에 대해서 당부하는 내용이 나와요.
마리아(Julie Andrews)가 하는 말이 “제가 그걸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할 때 이 말씀을 줘요. “어디에 가든 네가 답답하고 막혔을 때 하나님께서 다른 창문을 열어서 탈출하게 한다.” 그래서 마리아가 오스트리아를 탈출해서 미국 가서 합창단 이끌었습니까? 지금 그 이야기 아니에요. 그것은 생존에 관한 문제지요.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었어요. 무슨 생존에 관한 겁니까? 그게 아니고 이거예요. 개별 구원, 이것은 마귀가 우리에게 요구한 거지요. “개별 구원받아라. 죽어서 좋은 데 가야지.” 이런 ‘개별 구원이냐 아니면 예수 안의 구원이냐?’를 두고 시험이 올 때 그 개별 구원부터 벗어나서 주님이 나 개별자를 대체하고 있다는, 나 개인이 하고 있던 것을 주님이 지금 대신하고 있다는 그 공동 체험으로 나갈 때 이게 바로 피할 길을 주신 거예요.
십자가의 그 죽으심으로 더 이상 내가 할 게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그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새록새록 감사하고 기뻐하면 되는 거예요. 참 아무것도 안 하기가 굉장히 힘이 들어요. 이제 남은 시간 정말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저녁 먹으러 갑시다.
정말 아무것도 안 한 사람,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하는 데 있어요. 구약 역사에 나옵니다. 구약 모의고사 출제 문제가 있어요. 두 가지가 있는데 왕과 선지자. 왕은 뭔가 하는 자에요. 왕의 특징은 뭐냐? 권세자에요. 권세자는 백성을 자기 권세 아래 모아야 할 책임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선지자는 어떻게 되느냐? 아무것도 안 해요. 아무것도 안 한다. “그래도 말씀을 외쳤잖아요.” 하는데 그것은 시키는 대로 했지요. 수동적이에요. 아무것도 안 해요. 약간 복잡하더라도 용납해 주시기 바랍니다. 민수기 11장 23-25절을 봅시다. 이 기쁜 소식을 우리가 그냥 모르고 지나갈 수는 없는 거예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 모세가 나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백성에게 고하고 백성의 장로 칠십인을 모아 장막에 둘러 세우매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신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신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아니하였더라.”
장로 70명에게 뭐가 임했습니까? 하나님의 신이 임했지요. 신이 임하니까 그 70명 외에 다른 사람이 삐졌어요. “모세만 선지자인데 왜 저들에게도 성신이 왔느냐?” 하고 삐지니까 모세가 하는 말이 민수기 11장 29절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즉 “아무것도 안 하고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이게 백성이 조건이다.” 이렇게 나옵니다. 신명기 18장 15절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찌니라.”
‘나와 같은 선지자’가 사도행전 7장에 스데반 집사 설교의 핵심 부분으로 등장합니다. 아무것도 할 게 없는 선지자를 너희에게 주겠다. 왜? 이스라엘 자체가 권세의 모임이 되어서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구원된다고 하는 그 예수님을 죽인 겁니다. 그렇게 죽이니까 주님께서 그를 살리시는데 뭔가 해야 된다고 여겼던 자들이 사도행전 7장에서 뭘 만들었느냐 하면 성전을 만들었어요.
사도행전 7장 48절에서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스데반 집사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손으로 지었다는 것은 뭔가 가 했다는 거예요. 사람이 뭔가 한 곳에서 하나님이 피해버립니다. 뭔가 했다는 업적을 남기는 것,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신다. “…선지자의 말한바” 또 선지자의 말이 나와요. 선지자라 하는 것은 인간의 눈에 보이고 뭔가 하는 것, 그런 것과 거래하지 않습니다. 종교적인 행위를 받지를 않아요.
예레미야 23장 21절을 보겠습니다.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예하였더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
그 당시의 선지자가 두 종류 있었습니다. 선지학교 출신의 선지자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선지자입니다. 물론 선지학교 출신 선지자도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선지자도 있어요. 엘리사같은 경우처럼 있는데 어쨌든 하늘나라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탈락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신이 위에서 오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위에서 하나님의 성신이 안 오게 되면 어떻게 하느냐? 자기들끼리 선지학교 만들어서 빡세게 기도해서 룰루랄라 방언하면서 응답받은 척을 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왜 그렇게 하느냐?
그들은 권세를 인정해요. 기존 국가의 안정적인 권세, 이스라엘의 권세가 안정적으로 있어야 할 이유가 현재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뭔가를 하는 왕의 이야기고 그것을 완전히 두 동강 내는 선지자는 그들의 권세에 입각한 주장들을 하나님께서는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예수님 빼놓고 다 멸망해야 되기 때문에. 그래서 예레미야 23장 25-26절에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에 내가 몽사를 얻었다 몽사를 얻었다 함을 내가 들었노라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언제까지 이 마음을 품겠느냐 그들은 그 마음의 간교한 것을 예언하느니라.”
이게 오늘날 ‘진짜 성도냐, 가짜 성도냐?’ 하는 판정도 되는 데 로마서에 나오는 것처럼 성령 받은 자는 진짜 성도에요. 맞지요. 그런데 가짜 성도가 ‘진짜 성도는 성령 받은 성도’라고 우기면 그것은 가짜입니까? 그게 가짜일까요? 예레미야에 의하면 성령의 특징은 내 속에 있는 죄와 거짓된 것을 들춰내는 기능과 함께 성령이 임합니다.
무슨 뜻이냐? “내 깨끗한 마음에 성령이 왔기에 이제부터 깨끗한 마음만 나오고 유지된다.” 내 손에 장을 지집니다. 이것은 백프로 가짜입니다. “성령이 왔을 때 성경에 나오는 모든 지저분한 일이 내 속에서 다 까발려지는데 그게 얼마나 고마운지” 이렇게 나올 때 그 사람은 절대로 성령 받음을 두고 자기 존재의 개인적 자아를 자랑할 수가 없지요. 자랑할 수가 없어요.
제가 이렇게까지 장담했는데도 이 소리 듣고 이렇게 나오는 수가 있습니다. “가짜가 하는 말이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죄밖에 안 나온다’라고 해서 또 성령 받은 척을 하면 어떻게 합니까?” 하는 문제에요. 예레미야 23장 32절을 봅시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거짓 몽사를 예언하여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이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백성을 미혹하게 했다는 말은 힘을 모았다는 말입니다. 힘을 모으고 그 힘의 중심에 자신이 존재한다는 거예요. 이제 한번 정리해 봅시다.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은 어디서부터 어디로 간다? 세상으로부터 어디로 갑니까? 십자가의 공로만으로 가요, 십자가의 공로.
이제 고린도전서로 가 봅시다. ‘죄만 나오는 것이 진짜 성령’이라고 이야기하는 가짜 선지자를 어떻게 파악하는지. 마귀도 성경을 이용하는 것처럼 성경을 그대로 이야기합니다. AI 아나운서처럼 성경 그대로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성도이고 진짜 백성이라고 하는 것, 집단을 언급해야 할 것을 특정 개인에게 주목해서 언급하는 것은 수상합니다.
어느 목사는 진짜고 어느 선지자는 진짜 선지자라고 하는 것은 구약 때 일이고, 신약 때는 성령이 집단화되어 있어요. 오순절 날 집단화되어 있어요. 베드로도 성령 받았고 요한도 성령받았지요. 가짜 영을 받은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베드로와 요한 중에 누가 더 셉니까?” 이렇게 나온 거예요.
또 사도 바울과 견줘서 누가 더 셉니까 하는 거기에 사도바울이 화가 나 버린 거예요. “나 십자가 안 졌다”라는 거예요. “나 십자가 안 졌다. 십자가 진 적이 없다. 없는데 그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나를 이용한다면 이게 꼭 나에게만 국한되는 일이겠느냐? 나 말고라도 주께서 이용하는 형제들이 있다.”
공통점이 뭐냐? 그 공통점이 고린도전서 2장에 나옵니다. 아까 7절 했지요? 9절입니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저는 고린도전서 2장 9절을 통해서 느낀 것은, 모든 신학자들이 이단이라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어요. 모든 신학자에요. 신학교 교수들이 이단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이유가,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그다음에 뭡니까?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데 기존의 신학교에서는 자꾸 인간의 마음을 유사 성령 받은 사람으로 조작하는 그러한 수업을 하더라는 그 말이지요. 학생들을 그런 식으로 부추긴 거예요. 제가 총신 신학교 때 교수라는 사람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했느냐 하면 가나안 농군학교에 데려갔어요. 가나안 농군학교와 십자가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건 농사짓는 거예요. 약속의 땅을 일궜다는 그 김진홍 목사 따라가라는 그런 식인가요? 김진홍 목사가 십자가 졌습니까? 아니지요. 저는 십자가 졌습니까? 진 적 없어요. 여러분은 십자가 졌습니까? 안 졌어요. 십자가 지신분은 오직 주님 하나로 끝났어요. 왜냐? 모든 말씀은 예수님을 겨냥하기 때문에. 끝났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겨냥하는데 뭐가 방해됩니까? “나도 얼추 신앙인이고 나도 얼추 성령 받은 티 난다고 좀 이야기해 줘.” 이게 바로 방해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께서는 말씀을 가지고 우리부터 쳐내는 일을 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12절에서 그 쳐내는 일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그걸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 그게 왜 은혜냐 하면 인간의 마음으로는 접근이 불가한 거예요. 고린도전서 2장 11절에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그래서 오직 성령으로 나타나는데 성령이 뭘 하느냐? 하나님의 깊은 곳에서 뽑아냅니다. 10절에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하나님 안에 우물이 있는데 사람은 물을 못 길어내고 오직 하나님의 영인 성령께서 으샤, 하면서 하나님의 제일 중앙, 제일 깊숙한 곳을 퍼내서 그것을 은혜로 명단에 있는 자기 백성이 될 사람에게만 성령을 줘버립니다.
그러면 그 성령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 그 영이 무슨 영이냐 하면 십자가의 영이에요. 십자가의 영이고 창세 전에 아버지와 아들과 약속한 것이 일점일획도 완전히 다 이룬 겁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주님이 다 이뤘기 때문에 내가 할 게 없어요. 내가 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하는 말을 하지 마시고 ‘내가 십자가 지지 않은 자로서 주님에게 쓰일 것인가?’ 그것만 생각하면 됩니다.
“주여, 어떻게 저를 쓰실 겁니까?” 주께서 “입 다물어. 너는 그걸 요구할 자격도 없어. 내가 시키는 대로 수박 먹으라 하면 수박 먹고, 비빔밥 먹으라 하면 비빔밥 먹고, 저녁 식사로 뭐가 나올지는 아직 모르겠고, 내가 주는 대로 먹고 감사하면 돼. 쓸데없이 네가 나대지 마.” 그것은 교만이라 그 말이지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2장 12절 다시 보면,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세상의 영은 악령이지요.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시는데 그 아는 방법은 내가 행함으로 얻었다는 그것을 제끼고, 그걸 부정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계시기에 주어지는 은혜만 오롯이 드러내는 삶을 살게 하는 겁니다. 그 과정속에서 내 행한 것이 작살나는 그것이 슬픔이 아니고 참으로 영광스럽고 기쁨으로 우리에게 나타나겠지요.
그다음에 고린도전서 2장 13절에,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그 다음에 14절부터 골치 아픈 것이 나와요. ‘워치만 니’(Watchman Nee, 1903-1972) 때문에.
「삼분설」, 「영에 속한 사람」 이런 책들 얼마나 많이 팔렸습니까, 막 찍어내서. 「열두 광주리」 아이고~! 그의 제자 ‘위트니스 리’(Witness Lee, 1905-1997)까지. 지방교회죠, 워치만 니, 여기에 공통점이 있어요. 그들은 뭘 추구하느냐?
개별 자아가 부정되지 않고 남아 있는 상태에서 성경 QT와 결합이 되니까 내가 지금은 미흡한 나지만 완전한 나가 될 수 있다는 그것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지방교회 교인으로 끌어당겼고, 그 당긴 그것이 구원파 쪽으로 나오면서 이단이 새로운 이단을 낳은 겁니다. 이게 다 어설픈 이단인데요.
기존 교회도 마찬가지지만 모든 이단들이 뭐 하나를 부정을 못하느냐 하면, ‘나 예수 믿고 천당 간다’ 이걸 부정을 못 하는 거예요. 예수 믿고 천당 가는 그런 것을 용납한 적이 없습니다. ‘집단 구원’이지 ‘개인 구원’이 아니에요. 그게 바로 육에 속한 사람이에요. 육에 속한 사람이 성경 말씀과 결합이 되면 개인을 계속 살리는 겁니다.
개인을 계속 살리면서 개인이 살아있다 보니 십자가의 능력이…, 십자가가 앞에 이렇게 보이지요. 그러면 십자가의 능력에서 나로부터 시작해서 뭘 뽑아낼 것인가, 그것을 계속 연구하는 겁니다. 이 전제가 어떤 전제냐? 절대로 나는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여, 나를 지옥 보내지 마옵소서.” “딱 걸렸어, 너! 처음부터 너는 지옥 사람이었어.”
지옥 사람이니까 마귀의 본색을 이런 식으로 고백하는 거예요. “주여, 어떤 경우라도 저를 지옥 보내지 마옵소서.” 그래서 “나는 목사 되기 전에 이렇게 구원받았으니까 여러분도 나와 같은 체험을 하면 구원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교회 하나 뚝딱 만들어졌지요. 그런 식으로 또 교회가 만들어진 거예요.
이제 시간이 되어서 강의를 끝내야 하는데 인상들이 좋지가 않아서 어떻게 이걸 마무리해야 할지 이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게 됩니다. 끝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어른에서 자아가 없는 어린아이로 바꾸시는데 그 바꾸는 방법이 십자가의 거저 주시는 은혜입니다. 어린아이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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