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여름수련회 고린도전서 강해 제4강 : 아무것도 아님 - 이 근호 목사
4번째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연이어서 고린도전서 8장 3절을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핵심 단어를 뽑으라고 한다면 저는 8장 3절을 뽑고 싶어요. 너무나 난해해요. 너무나 난해해서 기가 찰 정도의 말씀이 이겁니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 이 대목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바 되었느니라(개역한글)
But if any man love God, the same is known of him.(KJV)
but if anyone loves God, he is known by Him.(NASB)
But the man who loves God is known by God.(NIV)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도 그를 알아주십니다.(공동번역)
한 번 적어볼게요, 이 말이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 이 구절입니다. 지금껏 공부한 걸 복습으로 적용시켜 보겠습니다. ‘누구든지’라는 인간은 배후에서 주께서 조성한 사람이죠. ‘없는 데서 새로 만들어진 사람’입니다.
이것은 무슨 능력에서 온다? 십자가의 능력. 이 능력은 어디서 온다? 악마와의 대결에서 승리했다는 증거물로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뽑아낼 수 있는 T/O를 확보했고, 그 T/O에 준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생성되게 되면 그 생성된 자에 한해서는 ‘누구든지’(everybody)가 돼요.
여기서는 ‘없던 자’ 또는 ‘이미 죽은 자’라는 조건이 붙기 때문에 인간적인 조건은 ‘누구든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인격이 훌륭하다든지, 직업이 뭐라든지, 이런 것은 이 ‘누구든지’의 자리에 앉는 것에 대해서 어떤 이점도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는 결과적 용어가 돼요. 결과적으로 생성되는, 드러나는 이게 바로 ‘누구든지’가 되죠. 이 ‘누구든지’가 되면 하나님이라는 주체…, 칠판에 문장을 길게 적어놓고 풀어가는 식으로 하니까 저 대치동의 영어 강사 같아요. 이거 수능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기존의 하나님과 차별성을 띄죠. 내가 알던 그 하나님이 아니죠. 따라서 그 뒤에 나오는 종속절…, 또 뭐 굉장히 문법적으로 보이고 유식해 보이잖아요, 뒤에 나오는 이것은 하나님께 속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누구든지’를 만들 권한을 제공하는, 그러한 권한을 갖게 되는 거예요.
이 사랑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준비된 사랑이에요. 준비된 사랑, 이것만 거룩이 되는 겁니다. 왜? ‘거룩’이라는 말은 차별화된 다른 영역에 속한 그 속성을 두고 거룩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사랑이고. 착함과 관계없이 인간은 모르고 하나님이 따로 아버지와 아들 두 분이 준비한 속성을 ‘누구든지’에게 “쏘세요!” 하고 쏘면 이걸 가지고 ‘은사’ 또는 다른 말로 ‘은혜’라고 합니다.
이 ‘은사’의 특징이 뭐냐? 이것은 단편적이 아니고 영원성, 영원적 속성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한 번 주면 취소가 안 되는 겁니다. 취소가 안 돼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은사를 줘놓고 “네 힘으로 네가 범죄 해서 취소가 되는지 해 봐. 네가 죄지은 것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가 취소되는지 한 번 버텨봐. 해 봐, 그게 되는지!”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다’라는 이 말은 시편 23편 전편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뭐다?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것도 한 번 적어볼게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목자잖아요. 목자, 누가 전화해서 초청했습니까? 없어요. 아무도 초청한 사람이 없어요. 양들이 모여 회의해서 “괜찮은 목자 달라고 요청하자.” 한 적이 없습니다. 양들은 계속해서 목자의 기능을 위해 모집될 뿐이에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래서 나머지 종속되는 뒤따라오는 모든 기능은 목자의 일방성입니다. 일방성, 일방적인 조치에요.
이 일방적인 조치에 양들은 반발합니다. 제 갈 길을 가면서 반발하죠. 반발하는데 결국엔 그 반발을 통해서 ‘내가 하는 것은 일체를 받지 않는다’라는 것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내가 하는 거룩은 안 받고, 내가 하는 기도도 안 받고, 내가 하는 헌금도 안 받고, 찬양도 안 받고, 아무것도 안 받는다.’
왜? 이미 하늘나라엔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기 때문에. 풀세트에요. TV 있죠, 냉장고 있죠, 가습기도 있고, 전자레인지도 있고, 세탁기도 있어요. 자기가 살림하려고 가져온 살림살이들은 다 갖다 버려야 되고 주의 살림살이에 맞춰서 사는 생활이 천국 생활입니다. 하기 싫어요?
하기 싫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나한테 익숙한 가구를 계속 갖고 가겠다고 버티는 것, 그런 사람은 문제가 돼요. 그런 사람은 도중에 주께서 다 가려내죠. 내가 목자를 선택할 권리가 없고 일방적으로 목자가 양을 선택하는 겁니다. 주체가 바뀌죠.
이렇게 되면 어려운 게 없는데 어렵다는 게 뭐냐? ‘아신 바 되었다’라는 이 사실, 이 사실을 에베소서에서는 ‘창세 전’(엡 1:4)까지 가져가요. 창세 전의 특징이 뭐냐? 누가 없다? 내가 없어요. 내가 없기 때문에 내 의견이 끼어들 여지도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없는 데서 이미 구원은 확정이 되어 버렸어요. 그런데 이걸 실시하기 위해서 주께서 뭘 없앴습니까? 있는 나를 ‘없다’, ‘죽었다’로 전환 시켰죠. 주께서 멀쩡하게 살아있는 나를 없는 존재로, 죽은 존재로 이렇게 바꾸는 이유는 ‘내가 있음’으로 인하여 고린도전서 8장 3절의 이 말씀이 계속 방해받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강의하는데 “카톡!” 하면 방해될 게 아니겠습니까? 끊임없이 나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위주로 있기 때문에 그 사실이 주의 일에 계속 방해가 되는 겁니다. 방해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고 말씀을 보내서 이 방해되는 요소를 제거하죠.
방해되는 요소를 제거할 때 우리가 고분고분할까요, 아니면 저항할까요? 아니면 더 나아가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전혀 모릅니다.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듣습니다. 못 알아듣는데 일은 잘 풀려요. 희한해요. 참 희한해요.
성경 말씀이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듣는데 일은 너무너무 잘 풀리고 있습니다. 사후적으로 그걸 발견해요. 그걸 저는 ‘인간은 늘 뒷북 친다’라고 말해요. 뒷북 치는 식으로 되돌아보게 되면 ‘합력하여 선을 이뤘고 또 합력해서 선을 이루었다.’(롬 8:30) 합력하여 선과 선의 코스가 중지되지 않고 이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가면 갈수록 발견하게 됩니다.
간단하게 생각해서 이렇습니다.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나름대로 자기의 코스, 인생길이 있다고 보는 거예요. 기억이 축적된 인생길이 있다. 그런데 주께서 마중을 나와요. “네 인생길이 잘못됐다.”가 아니라…, 잘 들으세요. “넌 인생길을 잘못 살아왔다.”가 아니라 “너는 없다.”가 돼요.
잘못 살아왔으면 자꾸 우리는 “이제 제대로 살겠습니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건 마귀 짓이죠. “넌 애초부터 없고, 넌 죽어 있다.” 그런데 네가 1살 때, 2살 때, 3살 때, 4살 때 이렇게 살아온 것, 유치원 가서 눈병 나는 그런 것도 다 주께서 미리 조치를 한 거예요.
왜냐하면 ‘네 인생이 아니고 내가 목자 되기 위한 내 양에 관한 일이기 때문에 내 책임하에 너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끊임없이 내 관리하에 있었다’라는 겁니다. 만약에 42살이라면 42살에 이걸 알았다고 칩시다. ‘아, 내 인생이 아니고 주의 인생이구나. 주께서 관여하고 주께서 자기를 위해서 우리를 이끌어 왔구나.’
이게 디모데전서와 디모데후서에서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겁니다. “내가 포행자요, 살인자인데 창세 전부터 주께서 날 아신바 되어서 예정하사 나로 하여금 포행자 되는 코스, 살인자 되는 코스를 밟아서 영생에 이르도록 했습니다.”(딤전 1:13) 이런 대담한 고백을 합니다.
그걸 보고 많은 사람이 “좋겠다, 너는!” 비아냥거리면서 “그 말을 지금 우리보고 믿으란 말인가?” 이렇게 나올 것이 뻔하죠. 사도 바울이 뭐라고 했어요? “이걸 네가 네 힘으로 믿을 수 없어. 성령이 나타나면 믿는 거야.” 이렇게 하죠. 바울이 그렇게 논쟁하는데 자, 42살까지 주께서 이끌어 왔습니다.
만약에 42살, 생일이 7월이라고 합시다. 그럼 42살 7월! 여기부터 정신 차렸으니까 ‘이제부터는 주를 위해 살 거야.’ 이렇게 나오는 겁니까? 어떻게 되는 겁니까? 42년 6개월 동안 한 것이 주의 일이라고 한다면, 인간은 ‘주의 일에+개과천선한 1개월’ 이렇게 보탤 때 주의 일이라는 생각을 무슨 보자기에 담는가? 새로운 자아 보자기에 담아요.
이것은 또 문제에요, 또 문제! 회개하고 반성했는데 그게 괜찮은 자아로 전환되고 마는 겁니다. 분명히 정신 차렸는데 어느새 나의 우수함을 보여주는 요소로서 이미 근거, 바탕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친절하신 주께서는 여기서 또 말씀으로 다가갑니다.
이걸 42년 6개월의 그것조차도 네 길은 전부 죄의 길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사건, 사태를 친절하신 주님이 마련해 주셨습니다. ‘회개하고 반성했는데 내 인생 꼬라지가 왜 이렇습니까? 그때 얼마나 절실하게 기도했는데!’ 집에 휴지가 많죠? ‘잘 풀리는 집’이라고 많이 있는데 내용은 전혀 안 풀리고 있어요.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그 생각을 하죠.
그래서 이렇게 보면 돼요.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신 바 된다”라는 그 말씀은 언제 가서 최종적으로 마감이 되어서 진짜 하나님이 아신 바 된 그 앎, 아신 바 되었다는 그 사실에 내가 동참할 수 있는가?
그것은 죽고 난 뒤에 주님의 천국 갈 때 그걸 알게 돼요. ‘아, 이게 내가 살아있는 게 아니고 나를 재료로 해서 말씀이 살아있게 했구나. 주인공이 말씀이지 내가 아니구나.’ 그때 후다닥 자기 받은 면류관을, ‘이런 걸 왜 내가 갖고 있어?’ 후딱 벗어서 누구한테 줍니까? 주님의 일이니까 주님께 반납하는 그 쇼가 마지막 천국 입성할 때 있습니다.
천사들이 박수를, 선배들이 막 박수를 치면서 고생했다고 하죠. 무슨 고생을 했단 말입니까? 나의 자존심과 나의 의를 반납하는 그 순간 내 모든 것이 주의 은혜라는 것을 은혜 주신 당사자에게 돌려주는 그 이벤트, 그 축제, “모든 것이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간다”라는 말씀, 로마서 11장 36절의 말씀이 이게 장난이 아니고 그게 곧 현실이라는 사실을 그때 가서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가 어렵지 않은데 자꾸 어렵다, 어렵다고 하는 이야기, 그리고 고린도전서 이번 강의의 핵심인 이 대목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다”라는 이 대목을 왜 자꾸 의도적으로 거론하느냐 하면 이 사람의 소속이 ‘이 사람’에게 있지 않다는 거예요.
이건 하나님에 의해서 말씀대로 생성된 새로운 사람이지 ‘이 사람’이 ‘나’라고 여기에 끼어들 수 없는 ‘이 사람’이에요. 분명히 ‘나’를 재료로 한 건 맞는데 날 재료로 했다고 해서 이 사람이 ‘나’라고 동질성을 유지할 수 없다, 이 말이죠.
만약에 여러분들이 양배추라고 합시다. 내가 양배추인데 주께서 양배추 좀 찢어서 어떤 햄버거, 빅맥 햄버거를 만들었다면 그 햄버거 내 겁니까? 예가 좀 유치한데요, 내가 생각해요. 그 한 자리 끼웠다고 그 햄버거가 내 거라고 할 수 있느냐는 말이죠.
그걸 고린도전서에서는 ‘주의 것’이라고 하고요, 그 주의 것에는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나만 들어있는 게 아니고 패티로 들어온 다른 형제도 있어요. 어떤 이는 케첩…, 케첩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우리 손자, 케첩에 막 밥 말아 먹어요. 하여튼 케첩으로 참여한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손, 어떤 사람은 발, 어떤 사람은 눈으로 해서 결국 어느 누가 뭘 했다고 말 못 하는 그 이야기를 해야 한다, 는 그걸 가지고 교회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고요. 그게 고린도전서 3장에 나옵니다.
3장 5절에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3장 5절 보기 전에 8장 4절로 다시 한번 돌아가 봅시다. 우상 언급하면서 그것과 연관을 시켜야 해요.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그다음에 뭡니까? “아무것도 아니며”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지금 누구보고 이야기합니까? 우상 보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우상과 연관시킨 우리 자신을 보고 “네가 이 세상에 어떤 윤리적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도 그 자체가 주님 보시기에는 무효, 아무것도 아니고 네 착함에 내가 호응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나는 선합니다’라고 할 때 그 선함에 동조할 이유도 전혀 없다. 왜? 너는 Nothing,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지난주일 오후에 이야기했죠.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내부에 있는 자기 형상이 바깥으로 드러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우상을 섬기는 것은 그 우상, 그 대상체와 내 속에 보이지 않는 형상과 서로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우상을 섬긴다”라고 했어요.
그래서 우상을 섬길 때는 골라 먹는 재미로 서른한 가지 아이스크림을 골라 먹듯이 내 마음에 맞는 우상 하나, ‘부처를 믿을까? 예수를 믿을까? 아니면 아무 종교도 갖지 않을까? 그건 내 마음대로다.’ 하는 식으로 자기 형상을 바깥으로 드러내게 되면 결국 우상은 자기 안에 들어있고 그 우상을 ‘탐심’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탐심의 특징은 단일하다는 거예요. 사람마다 지문이 다르고 얼굴이 다 다르지만, 그 안에 있는 형상은 아담의 형상이기 때문에 모든 탐심은 단일하고 공통점이 있어서 이 사회는 협동이 가능한 겁니다. 다수가 원하는 것이 진리로 취급받는 이 더러운 세상, 각자 있는 탐심이 동일하게 작동하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자가 영웅이 되는 이 세상, 1등만 기억하는 이 더러운 세상, 1등과 2등의 차이점을 발견하는 이 더러운 세상, 사실은 똑같은데 똑같이 뭡니까?
우수한 게 아니고 똑같이 개뿔도 아무것도 아닌데 너와 나의 가치를 차별화시키는 이 세상, 그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가지고, 우상의 단일성을 가지고 집요하게 말씀으로 공격합니다. “똑같은 의식과 사고방식으로 너희는 무장되어 있다, 똑같은 의식. 다르다고 하지 마. 나는 전체를 ‘아담 안’, ‘죄 안’, ‘죽음 안’이라는 동일함으로 너를 다루겠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죠. 그런데 아무것도 아니라고 해놓고, 다시 고린도전서 3장으로 와봅시다. 휴대폰을 진동으로 바꿔주시든지 소리 안 나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 시간 휴대폰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 어떤 메시지도 아무것도 아니고요.
고린도전서 3장 6절에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죠. 그게 표면적으로 차이가 났죠? 각기 다른 일을 했죠. 그런데 7절에 보면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그다음에 , 그거 수능 나옵니다. 주관식으로 딱 빼놓고.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 네모 안에 뭐 들어가겠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요’ 아예 명찰을 달아버려야 해요. ‘이 아무것도 아니요, 박 아무것도 아니요’ “이 호실에 몇 명 있습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 네 명 있습니다.” “식구가 몇 명입니까?” “아무것도 아닌 자 6명입니다. 아이들 네 명하고 부부하고.”
아무것도 아니니까 큰소리 내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고. 잘 들어야 해요. 큰소리 내고 화내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고, 더 중요한 것은 큰소리 내고 바가지 긁어도 그 소리 듣는 남편은 어떻게 봐야 합니까? 허허, 웃어야죠. 왜? 아무것도 아니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그 큰소리 내는 것이 현실에 반영이 안 되니까요. 현실은 말씀대로 되지 잔소리 많이 한다고 현실이 되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면 훌륭한 남편은 어떤 남편입니까? 내가 아니면 퍼부을 데가 없으니까 마음대로 퍼부으라고 앰프의 볼륨을 막 올려주면서, 그렇게 모든 것을 용납하는 거죠.
고린도전서 3장 7절 계속 봅시다.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이는 오직…” ‘오직’ 뭡니까? 자라나게 하는 거죠. becoming, 존재가 아니고,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죠, ‘아무것도 아닌 것 + 생성, 부지런히 활동하시는 분’, 그런데 이 분은 안 보여요. 보이질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히브리서 11장 1절에 의하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뭡니까? 리얼리티, 실상이라고 하죠. 그다음에 리얼리티 말고 보이는 것은 뭡니까? 가상이죠. 그 가상을 심볼, 상상이라고 합니다. 허상이란 말이죠.
그래서 어떤 학자는 말하죠. ‘인간의 모든 행위 + 언어’는 제스쳐에 불과하다. 몸짓이 발달해서 인간의 행위와 언어가, 법이 만들어졌다는 거예요. ‘넌 그냥 있을 때는 하나의 몸짓이었는데 내가 너를 꽃이라고 불러주고 언어가 투입될 때 넌 나에게 와서 하나의 의미가 되었다.’ 경북대학교 교수로서 시인이었던 김춘수(1922-2004)가 말한 거예요.
그 사람 벌써 옛날에 죽었어요. 하나의 제스쳐, 하나의 몸짓이에요. ‘몸짓’이라는 의미가 잘 안 다가오죠? 몸짓이라고 제가 점잖게 이야기했지만, 욕망을 현실이 받쳐주지 않는데 현실은 말씀대로 되기 때문에 내 욕망을 안 들어줘요. 우리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이유가, 기도 응답을 하지 않는 그것이 사랑인 이유가, 기도하는 자 따로 있고 주님의 응답은 따로 펼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어긋남, 안 맞다는 것이 기도의 응답입니다.
기도를 하셔야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새삼 느끼게 돼요. 그걸 제스쳐라 하지만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이것은 몸부림치는 거예요. 자아를 버리기 싫은, 자아를 포기하기 싫은 몸부림, 아무나 붙들고 시비 걸고 다투고요. “내 말 좀 들어봐, 내 이야기 좀 들어보라고!” 자기 속에 있는 폭발하는 욕망을 들어줄 사람이 있을 때 이 세상에서는 훌륭한 상담이라고 이야기해요.
아까 ‘분석가 담론’ 있었죠? ‘히스테리 담론’도 있었죠? 그리고 ‘대학 담론’ 또 하나는 뭡니까? ‘주인 담론’. 내가 원하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얻고자 하는 제스쳐, 몸부림치는 이 사회, 그런 인간관계가 곧 이 세상의 관계입니다. 인위적 관계, 자연적 관계가 아니고 ‘자연적 관계 + 인간의 몸부림’ 이렇게 더하면 그걸 문화라고 하고 문명이라고 합니다.
몸부림 쳐보는 거예요. 세상에 나오는 모든 뉴스가 몸부림입니다, ‘자연’은 서울 섭씨 38도, 그다음에 거리에 물 뿌리는 것은 ‘몸부림’. 몸부림과 몸부림 사이의 질적인 차이는 없습니다. 인간이 보여주는 이 몸부림을 이미 사도 바울도 알고 주님이 아시기 때문에 인간 세계가 어떤 식으로든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아닌 데 무슨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내 몸부림이나 내 기도 응답도 어떤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고 억지를 부리는 그 시도, 고린도전서에서 이미 말씀이 주어졌기에 그게 벌어지고 있었던 거예요.
첫째 시간에 제가 이야기한 것, 벌써 몇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제가 다시 말씀드립니다. 첫째 시간에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 말씀이 오게 되면 인간의 그 속살, 속내를 완전히 발각시켜서 ‘왜 말씀의 세계와 인간 세계가 차이 나는지’ 이야기를 하고, 말씀은 인간을 유한 락스처럼 탈색시키고 없애버리죠. 그런데 인간의 몸부림은 말씀을 주게 되면 그 말씀을 그냥 액세서리로 들고 있다가 돌아서면 다 털어버리고 다시 본래의 자기 위주로 살아가는, 그런 세상이 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뭘 알아야 하느냐?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방적으로 자기 백성을 만드는데 ‘내가 어떠한 식으로 평소에 이 세상을 살아가는지’ 그것을 우리 자신이 먼저 알아야 하겠죠? 그걸 이야기하겠습니다. 제가 보니 여러분이 많이 피곤하신데 할 수 없어요.
인간은 자신의 단일성을 증명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의 단일성, ‘나는 나다.’ 어디서 많이 들었죠? 출애굽기 3장 14절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건데 이미 악마의 형상이 있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금 모방하고 있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인간이 이미 이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나는 나다.” 에요. 이사야 47장 8절에, “나 외에 다른 이는 없다.” 이게 인간이 이야기한 거예요. 그래서 아무리 철학과 신학과 과학으로 자기가 무장해도 연필 심지가 있잖아요. 찐빵의 앙꼬, 그 대목에서 자기를 표현하라면 “내가 나에게 All, 전부다.” 그게 타고났어요. 그뿐이에요.
윤리? 도덕? 나한테 유리하면 착하고, 나한테 해로우면 악하다고 누가 규정한다? 내가 규정하고 싶어요. 남들이 동의하든 관계없어요. ‘나만 옳으면 그만이야.’ 그걸 가지고 증명, ‘자기 존재 증명’이라고 해요. 여기에 성경 말씀을 합하면 그대로 들어가요.
“내가 믿는 예수가 참된 예수다.” 십자가 마을이 아니라 십자가 도시가 되든 십자가 교회가 되든, 혹은 십자가 식구가 되든 모든 인간에게 이게 다 들어있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걸 두고 뭐라고 하느냐?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로 대치해 주죠.
“내가 믿는 예수가 참된 예수다.” 주님이 불러요. 빵, 치면서 “누구 마음대로 내 이름을 꺼내느냐? ‘내가 믿는 것은 참된 예수’라고 자아를 굳힐 필요 없이 그조차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규정시킨 내가 바로 예수다.” 내가 너를 구원했지, 네가 나를 믿어서 네가 구원된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여기서 뭐가 드러납니까? 종교라는 것이 얼마나 악마의 탈을 쓴 것인지가 들통나요. 기독교, 불교 이런 것들의 속내가 다 드러나는 겁니다. 그 점에 대해서 하나 이야기하고 계속 이야기를 끌어가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9장 14-21절, 문제 하나 나갑니다.
역시 오전 끝이 다 되니까 지금 아무것도 아닌 게 서서히 드러나요. 요한계시록 9장 14-16절,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주라 하매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예비한 자들이더라 마병대의 수는 이만만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 그렇게 되어 있죠.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을 믿는 신자라고 주장한다면 요한계시록 9장 14절 이 뒤에 나오는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여러분들이 아셔야 해요. 압니까? ‘나팔 가진 여섯 천사’ 갑자기 ‘큰 강 유브라데’, 유브라데가 왜 나와요? ‘네 천사’는 왜 나오는 겁니까? ‘삼분의 일’은 누구를 이야기하는 거고, 또 ‘마병대의 수가 이만만이다’ 이건 뭐예요?
전부 다 요한계시록의 말이 이상한 단어들로 이렇게 꽉 차 있을 때 1번, 우리는 해석을 포기한다. 2번, 이 해석대로 현실이 지금 꾸려져 가고 있다. 몇 번입니까? ‘내가 해석한다’가 아니죠. 해석된 것은 실제 이뤄진 것과 별개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결과적으로 이 말씀이 말씀대로 그대로 꾸준하게 이뤄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이 말씀에 대해서 해석 못 한다고 걱정할 문제가 있습니까? 걱정할 문제가 아니고 “내가 너한테 준 은사를 받기나 해라.” 이러는 거예요. 그러면 ‘말씀 해석’과 반대에 위치한 것이 뭐냐?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방금 요한계시록 9장 14절은 뭘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집니까? 해석을 강요하죠.
“너 해석 못 하면 지옥 가는 거야. 지금까지 믿은 거 소용없어.” 이런 식으로 나오다가 맞은편에 뭡니까? 사랑이 나오죠. 이 사랑이 십자가의 사랑이에요. 그러면 해석은 누가 한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서 이 현실을 만들기도, 해석도 하시는 거예요. 해석하는 그 시간이 2시간? 3시간? 30분 안에 해석이 가능합니까? 이 해석이 며칠 걸립니까? 평생 가죠, 평생 갑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장 16절이죠. 해석해 보라고 하면 “저요, 저요!” 손 다 듭니다. 이거는 뭐 자신 있다, 이 말이거든요. 아니에요.
평생을 다 살고 면류관 반납할 때 요한복음 3장 16절에 대한 해석은 누구 담당이냐? 바로 주님께서 이 말씀대로 실시한 결과물로 내가 천국에 오게 된 거예요. 해석을 제대로 해야 합격이 아니고, 우리는 그것을 뭐로 이해합니까? 주님이 해석하는 것을 뭐로 이해한다? 그걸 사랑으로 이해하는 거예요, 사랑으로.
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랑 앞에서는 해석하는 우리도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방금 이야기한 것은 성도한테 하는 것이고, 제가 계속 이야기를 해보면 자신의 단일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인간은 뭘 하느냐 하는 거예요.
조금만 더 하겠습니다. 제가 안타까워서 못 보겠어요. 크게 쓰겠습니다. ‘분류’합니다, 분류. 이건 아까 한 것과 관련이 있어요. 인간은 끊임없이 분류합니다. 분류 작업을 해요. 세밀하게 회 뜨듯이 ‘이것은 착한 일, 이건 나쁜 짓, 이건 개선의 여지가 있는 일, 이건 좀 두고 바르게 하면 이제는 괜찮아지는 것’ 이것을 계속해서 합니다.
그 예를 한 번 보여드리겠습니다. 이 그림이 뭘까요? 여기에 눈동자 그리고, 이렇게 하면 아기 공룡 둘리 같기도 하고요. 여기 앞부분, 이게 뒷부분, 윗부분, 이게 옆부분, 전두엽, 두정엽, 측두엽, 후두엽, 인간의 두뇌 이야기입니다(*강의 동영상과 파일 참고).
(출처 : 박문호의 자연과학 세상 http://www.mhpark.or.kr)
인간이 어떻게 이걸 분류하느냐? 밑에서부터 이곳이 비주얼, 시각 담당입니다. 여기 접혀 있는 게 청각 담당입니다. 옆에 있는 이것은 사회성 담당, 이 앞부분은 장기 목표, 상상. 이 반을 쪼개서 이쪽에서는 감각 부분, 여기는 운동 부분, 이렇게 나눠요.
시각도 중간에서는 전경과 배경을 구분하는 것, 여기 앞부분은 시각을 통해서 어떤 눈에 보이는 개념들을 분류하는, 하나의 사전을 마련하는 것. 여기는 대상과의 거리, 대상 구분하는것, 그리고 여기는 손가락의 움직임. 그리고 청각들의 모든 기능들이 여기 있습니다.
이제 감각이 밑에서부터 올라오면 기다리는 것이 운동인데, 운동은 그냥 운동이 아니고 기억은 전두엽에서 해요. 해마라는 것은 장기 기억을 저장하고, 단기 기억 작업은 여기서 해요. 이렇게 영역을 나누고 자꾸 분류해요.
그래서 어떤 계획이 있으면 이 계획이 운동이니까 여기는 입술, 그다음에 손가락, 사지, 몸통, 모든 운동에 관한 것. 촉각과 시각과 청각이 만나는 입술에서 흘러 내려온다, 곧 브로카와 베르니케 영역에서 언어 영역이 이렇게 입술에 들어가게 되면 인간은 입을 통해서 언어를 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베르니케 영역에 문제가 있으면 실어증에 걸린다’,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입술을 통해서 말하니까. 이런 식으로 두뇌를 기능별로 분류했습니다.
그래서 뭐? 그래서 뭔데? 이게 뭐예요? 왜 분류해요? 분류를 왜 하느냐? 자꾸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내가 누구인지를 계속 파헤치고, 또 파헤치고 그걸 환원주의라고 하는데 끊임없이 파헤치는 거예요. 심지어 어떤 물리학자는 이런 수치를 계산해 냈습니다. ‘2.6×10⁻²²kg’
이게 놀랍게도 자아의 무게에요. 여러분, 무게를 재도 자아의 무게를 재본 적이 있어요? 프랑스와 이탈리아 학자들이 실험해서 자아의 무게가 ‘2.6×10⁻²²kg’라는 거예요. 이걸 어떻게 알아냈느냐 하면 이 세상은 정보로 되어 있고 정보를 가지고 실험합니다.
1비트의 정보가 빠질 때 거기서 나오는 열에너지를 측정해 보니 이렇다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정신 영역이라고 했던 자아가 어느 영역으로 들어옵니까? 자아도 이미 물질 영역으로 들어 와버렸다는 거예요. 이런 연구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말하는 건, 그래서 뭐? 이걸 연구했다. 나이 50에 이걸 연구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게 있어요. 뭐가 째깍째깍, 하고 있습니까? 시간이 흐르죠. 그 시간은 이렇게 연구하는 사람을 어디로 몰아세웁니까? “정녕 죽으리라.”(창 2:17) 자아 연구, 이거 몇 킬로그램, 이런 것 하지 말고, 두뇌 분석하지 말고 근본적으로 이렇게 잘나고 이렇게 살고 싶어서 자기를 증명하는 나를 왜, 왜! 왜 나를 죽이느냐 하는 거예요.
“Why me?” 이렇게 훌륭하고, 연구 많이 하고, 남에게 기여를 많이 한, 사회적으로 긍정적 기여도가 많은 나를 주님께서 멱살 쥐고 명복 공원 화장터에…, 이름도 명복 공원이에요. 그 화장터 10시 반에 가면 순번 대기표 받아서 대기하고 있고, 목사는 앞에서 설교하고 있고요. 왜 죽이느냐는 거예요.
그때 찬송가 부르면서 아버지 보내드리겠다고 하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누워서 “그다음 차례는 네 차례야. 여기 내 자리 있잖아? 네가 곧 여기 들어와야 해.” 줄줄이 소시지처럼 떨어지지도 않고 왜 이렇게 자꾸 죽음 쪽으로, 한 방향으로 이미 죽는다는 것이 확정되어 있느냐는 거예요.
‘왜 죽어야 되는데?’ 정답은 ‘아무것도 아님’이 드러날 때 죽는 것조차 누구의 일이냐 하면 죽음이, 죄송합니다만, 사실은 죄송할 일이 아니고 기뻐해야 할 일인데요, 내 죽음이 나의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도는…, 어느 강의에서 그랬죠. 뭐가 기적이다? “내가 죽는 것이 하나님의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기적이다. 그리고 기뻐하라. 기뻐하고 감사하라.”
‘알아서 때 되면 죽겠지.’는 기적이 아니에요. 감사가 안 나와요. 그런데 적극적으로 주께서 죽여주시는 것은 주께서 살아계셔서 내 일에 개입을 해주니까 주께서 감히, 그냥 버려둬도 되는데 적극적으로 날 죽여주시니까,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드러나니까 얼마나 감사한지요.
끝으로 말씀드릴 것은, 뇌 과학자가 이 일을 했습니다. 이거 하지 말라는 말이에요? 자아 무게 재지 말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 과학자가 진짜 성령 받은 성도라면 이렇게 돼요.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우리가 죽어 마땅한 그 죽음…” 죄의 값은 사망이니까요, “…그 죽음을 앞두고 내가 죄가 무엇인지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짜잔! 나 이런 연구 했지롱~! 나는 죽어 마땅한데 죄가 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짜잔! 자아의 무게는 2.6×10⁻²²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의 직업을 자유인으로 바꾸지 마세요. 혼자서 가야산 같은 데로 들어오지 말고요. 가야산 들어오면 나방 같은 벌레가 많아서 못 살아요. 어젯밤에 문 열어놨다가 큰일 날 뻔했어요. 그냥 주께서 지정한 여러분의 그 위치, 현재 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리인 줄 알고 남 탓하지 말고 불평하지 말고 그렇게 하시되 ‘죽는 것도 기적이지만 이 일에 꽂아준 것도 멋진 하나님의 계획에서 나왔다’라고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3장의 말씀이 이렇게 되죠.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이 말을 이렇게 봐요. ‘어떤 사람은 뇌 과학자로 일했고, 어떤 사람은 물리학자로 일했지만 그 둘은 아무것도 아니고, 나로 하여금 죽음에 참여했다가 살게 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어느 구석도 말씀이 빠져있는 구석은 한 곳도 없습니다.
그래서 열두 시 되기 전에 제가 이야기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어요. 아까 한 이야기와 연결시키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두 자로 뭐라고 했습니까? 고린도전서 8장 3절에 보면 이 세상의 신은 한 분밖에 없고, 우상들, 또 종교들이라고 하는 것은 전부 다 뭡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 오늘도 아무것도 아닌 채로 점심을, 아무것도 아닌 마음으로 주께서 주신 선물로 여기고 드시기 바랍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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