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9강 마지막 사랑

아빠와 함께 2025. 8. 2. 15:14

2025 여름수련회 고린도전서강해 제 9강 : 마지막 사랑 - 이 근호 목사


이제 9강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하겠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는 그 에너지, 힘이 사랑에서 나오면서 사랑이 뭐를 뽑아내느냐 하면, 방언과 천사의 말과 그리고 예언하는 능력과 모든 비밀과 지식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사랑이 내 속에서 다 뜯어내감으로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만 남아있죠.

3절에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한 나, 그 자아는 사랑이 오지 아니하면 뜯겨나가질 않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오게 되면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는 것, 순교하는 것, 산을 옮길만한 믿음까지라도 그것은 사랑을 대체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계속 유지가 되게 하는 그 힘은 오직 사랑에서만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쭉쭉 나오면서 13장 5절에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사랑은 자기의 이익을 계산하지 않는다. 왜? 사랑은 나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인간하고 거래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 나타나죠. 사랑은 나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할 때, 왜 우리를 이렇게 들뜨게 만드느냐? ‘아, 내가 하나님의 사랑이구나. 나한테 그만한 가치가 있어서 사랑하겠지.’라는 이런 선입감, 말도 안 되는 그런 착각을 왜 자꾸 유도하시는가? 그것은 창세기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하고 거래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어디서 드러내느냐 하면 창세기 2장에서 ‘~을 하지 말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했어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심어놓고, 너는 그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선악과 나무와 아담과 하와의 인간관계죠, 선악과와 아담과 하와 인간 둘을 창조해놓고 나무와 인간 그 둘 사이에 ‘하지 말라’를 설정해버린 겁니다.

이 말은 너희 인간들은 ‘하지 말라’의 대상이 된다는 거예요. 감히 피조물이 하나님의 계획에 ‘그냥 나도 한번 끼워주세요.’ 요청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는 거예요. ‘하지 말라’는 단서를 미리 붙여놔요. 하지 말라는 이 조건, 이 조건에 인간이 들어오면 에덴동산에서 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되죠. 하나님의 사람. ‘하지 말라’를 늘 품고 사는 사람. 그러면 여기 인간이 중요하냐, ‘하지 말라’는 비중이 더 크냐? ‘하지 말라’가 비중이 더 큰 거예요. 하지 말라는 것을 했을 때는 나는 너를 이 땅, 에덴동산, 최고의 낙원동산에서 추방시키겠다는 겁니다.

자, 그럼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계획을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렇습니다. 에덴이라는 극락의 기쁨이죠, 최고의 기쁨의 공간. ‘에덴이라는 최고의 기쁨의 장소에서 인간 내쫓고 그 자리에 자기 아들을 박아 넣는 것’ 이게 하나님 계획이에요. 인간을 내어 쫓고. 인간을 내쫓고 인간세상을 다녀갔던 하나님 자기 아들을 거기다 박아 넣습니다.

박아 넣으면서 나온 결과가 뭐냐? 골로새서 1장 13절, 사랑의 나라에요, 사랑의 나라. 인간을 내쫓지 않으면 뭐가 구성이 안 되겠습니까? 아들의 사랑의 나라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구성되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 뜻은 일관성이 있어요. 나 너 내쫓고 싶다는 일관성. 너는 내 사랑의 방해물이 된다는 그 일관성.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아들 예수님께만 집착하고 집약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인간에 대해서 하지 말라는 조건, 선악과 따먹으면 너는 죽는다는 뭔가 따먹지 말라는 조건까지 걸어가면서 철저하게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과 그 사랑하는 아들이 지배하는 사랑의 나라만 하나님께서는 애초부터 계획하신 겁니다. 계획하신 거예요.

이번 강의를 통해서 몇 번 강조했지만 그냥 슬쩍 지나치고 놓치기 쉬운 게 뭐냐 하면, 제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분이 그런 질문을 했어요. 왜 창세기가 마지막이냐는 질문을 했어요. 상당히 중요한 질문이죠. 왜 창세기가 마지막이냐? 창세기를 보면 천지창조, 창조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한 불꽃놀이의 불쏘시개로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지막 불꽃이 터질 때 친히 만든 것을 불로 싸질러 다 태우면서 팡, 팡, 팡, 팡, 여의도 불꽃축제처럼 화려하게 쇼를 하는 마지막 불쏘시개기 때문에 창세기는 마지막이 돼요.

그렇다면 우리의 생각은 뭐냐?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사랑의 아들, 예수님 재림에 어떤 식으로 들어갈 수 있고 다가설 수 있느냐? 재림을 믿으면 되지 않느냐? 안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되지 않느냐? 안됩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하지 말라’는 조건이 철저히 작렬하는 대상이기 때문에.

십자가 믿어도 안 되고 예수 믿어도 안 되고. 산을 옮겨볼까요? 그것도 안 돼요. 그럼 예언의 능을 과시할까요? 안 돼. 그럼 내 몸을 불사르기까지 구제할까요? 안 돼. 뭐든지 안 돼.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안 되는 걸 무엇 때문에 굳이 성경까지 동원해서 주께서 일부러 찾아오시는 친절을 베푸시고, 약을 올리는 것도 아니고. 안 되는 걸 왜 먼저 사람이 착각하게 혼동하게 만드느냐 이 말이죠.

되지도 않고 사랑의 아들 나라에 가지도 못할 것을 마치 들어가는 것처럼 분위기 팍 띄워놓고 나중에는 “구원 받는 것은 네 뜻이 아니고 내 뜻이다.” 이렇게 입 싹 닦아버리면 실컷 투자했는데 투자비용부터 해서 그 정성부터 해서 본전 뽑을 수 있는 기회 자체를 박탈하는 것은 불공정 계약 아니에요?

실컷 했는데 은근히 기대를 팍 올려놓고 기대하지 마. 그럼 애초부터 찾아오지를 말든지, 애초부터 지옥을 보내시든지 해야지, 왜 간만 보시고 분위기 들뜨게 해놓고 이제 와서 “천국, 지옥은 내 일방적인 결정이다. 왜? 할 말 있나?” 이렇게 나오면 어떻게 되느냐? 한 마디로 “어떻게 하면 그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어느 말씀을 지키고 어느 말씀을 깊이 새기면 됩니까?”라고 한다면, 주께서 뭐라고 하느냐? 말씀을 지켜서 들어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그럼 뭐냐? 말씀이 우리 속에 찾아오죠. 찾아온다고요.

‘재림’이라는 말씀이 있잖아요. 재림이라는 말씀이 있으면 ‘재림을 믿습니다’ 해서는 안 되고 재림이라는 말씀의 조건 자체가 우리 안에 장착되면 돼요. 그렇게 되면 이제부터는 “나는 어떻게 들어갑니까?” 질문이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들어온 말씀이 어떻게 차근차근 말씀대로 순차적으로 자기 성취성을 드러냅니까?” 우리는 거기에 하나의 수단이 되기 때문이에요. 말씀이 알아서 드러낸다면 우린 그냥 딸려가면 되잖아요. 딸려가는 조건이 뭐냐? “너, 아무것도 아니다.”

“주님, 어떻게 사랑합니까?” 그것은 사랑이 안돼요. 사랑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사랑이 자체적으로 자기의 코스를 밟아나가면 사랑이 가는대로 끌려가다 보니까 나중에 사랑이 완성을 보는 그 지점에 우리가 같이 끌려온 겁니다. 그것이 사랑의 아들의 나라에요. 아들의 나라, 천국입니다. 그게 골로새서에 나오는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사랑할 때 우리 인간을 아무것도 아니라하는 것은, 주님께서 처음부터 모든 사랑을 우리 안에다 다 담은 거예요. 그래서 저는 이번 강의 제목을 이렇게 정해봤어요, 미리. ‘마지막 사랑’. 이 ‘마지막’이라는 것이 마가복음 12장 6절에 나옵니다.

마가복음 12장 1절부터 보면 “예수께서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즙 짜는 구유 자리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저희가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또 다른 종을 보내니 저희가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혹은 때리고 혹은 죽인지라”

“오히려 한 사람이 있으니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거기 ‘최후로’ 되어 있죠. 다른 번역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를 보내며”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보내요. 마지막으로 보낸다는 말은 하나님은 인간 세상에 하나님의 시작과 끝을 이 세상을 통해서 나타내고자 하신다는 겁니다.

마지막이라는 것은 끝을 이야기하고 에덴동산에 따먹지 말라는 것은 시작을 이야기하면서, 끝과 시작 사이에 일관되게 추진되어온 하나님의 뜻은 오직 내 사랑하는 아들을 위한 사랑의 아들로 모든 것이 꽉 채워지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사랑을 투입하면서 마지막 사랑까지 줬기 때문에 주께서는 이 마지막 사랑을 위해서 마지막 질투, 최고의 질투와 더불어서 마지막 사랑을 투입시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에요. 너무 사랑해서 질투하는 겁니다. 그 마지막 사랑에 대한 집념, 온 열정을 마지막 사랑에 다 쏟아 부었기 때문에 “이 사랑 건드리고 이 사랑 모독하면 나도 가만있지 않는다.”라고 해서 발생된 것이 하나님의 진노하심, 질투, 진노, 그리고 지옥입니다.

지옥은 사랑의 아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주변에 이 사랑의 강도가 얼마나 센지를 지옥을 통해 반영해주시는 겁니다. 신명기 6장 15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14절부터 보면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지 말라 너희 중에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그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의 사랑, 온 정열을 다하여 오직 자기 아들을 위한 사랑의 아들을 만드는 데 있어서 방해되거나 그걸 모독하거나 하는 것에 있어서는 사랑과 더불어 따르는 질투심의 강도가 모든 것을 진노하사 진멸해버리는 겁니다. 이 땅에서 멸절시켜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주님이 지옥 만드시는 그 열정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감을 잡고 그걸 이해하고 그걸 수긍하게 되는 거예요. 그 사람만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과 질투가 같이 겸해서 느껴져야지, 사랑만 날름 챙기는 그런 경우는 없어요. 하나님의 질투심이 이 사랑에 하나님이 얼마나 모든 것을 투자하고 맡겼는지를 보여주는 겁니다. 사랑 만드는 그 열정 하나에 주님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걸었어요. 모든 걸 건 결과가 바로 사랑의 아들, 천국이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우리가 느껴지는 게 아니니까 이 비슷한 노래 가사를 제가 하나 적어왔습니다. 진시몬이 불렀던 <애원>이라는 노래입니다. 그 가사를 한번 보세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병원에 누워 죽어가고 있는 거예요.

애원

나에게 남아있는 사랑을
이제는 다 줄 수밖에
이 사랑일 거라고 이 사랑 뿐이라고
그렇게 믿었었는데

단 한 번도 나에게 사랑은
기회를 주지를 않아
내 앞에 누워 있는데 이 사람만은 안 돼
차라리 나를 데려가

십자가 아닙니까? 차라리 나를 데려가. 이 사람은 죽어가고 있어요. 죽어가고 있는데 자기의 사랑으로 죽어가고 있는 자를 살리고 내가 대신 죽는 것으로 마지막, 가사에서 한 번 더 강조해요, 마지막 마지막 사랑을 이 사람에게 퍼붓겠다는 거예요. 흥분 그만하고 다음 가사를 보면

사랑한다고 행복하라고
이렇게라도 볼 수만 있다면
(자기 사랑이 너무 아파서)

그러니까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은 아들의 사랑, 절절한 그 사랑을 위해서 ‘사랑의 대상자를 네가 임의로 한번 뽑아봐라.’ 내가 그런 선택과 권리를 너에게 주겠다는 거예요. 아버지가 선택한 것이 아들의 선택으로 넘어오는 것, 이게 요한복음 5장에 나와요. 어떤 학자는 그걸 ‘이중선택’이라고 하는데 아버지께서 누구누구를 구원한다는 그 조건을 아버지가 알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 조건이 나 예수님께 넘어왔다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것을 임의로 뽑을 수 있는 권한, 선택권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넘겨줬다. 왜? 천국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고 이 아들의 나라기 때문에. 그럼 아들의 사랑이 집약되어 있고 넘쳐나는 그 사랑의 아들이 하나님 아버지가 이미 창세전에 약조한 것이고 계획한 바였습니다.

안 돼요 이번만은 나 어떻게 살라고
마지막 마지막 사랑을 어떻게 하면 돼요
나 뭐든지 다 할게요
한 번만 사랑하게 해줘요

뭐든지 다 할게요. 뭐든지 다 하는 것이 이 우주와 해와 달과 별을 불살라버리는 겁니다. 사랑 빼놓고 다 죽여 버리는 거예요. 진멸하는 거예요. 질투심으로. 하나님의 계획은 오직 아들 사랑 뿐이기 때문에, 이 사랑이 이 세상에 찾아왔는데 이 사랑을 무시하고 모독하는 것은 전부다 지옥불에 집어넣어요. 마귀부터 모든 인간들도 불에 다 태워버리는 거예요. 나 뭐든지 하겠습니다. 세상을 다 불 지른다 할지라도 나는 이 사랑을 관철하고 말겠다. 이게 무슨 사랑? 마지막 사랑입니다. 마지막 사랑인지 마지막 스토컨지 모르겠습니다만. 지독한 스토커에요.

2절 가사를 보면 진짜 애원해요. 이 노래 제목이 <애원>인데 숙제입니다. 한번 꼭 들어보세요. 사랑으로, 죽어가는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 절절한 안타까움 때문에 겟세마네 기도 비슷한 내용이 나와요.

고개를 저어 봐도 울어 봐도
변한 건 하나도 없어 (십자가 지시기 전 겟세마네 바위 붙들고 기도하면서)
왜 하필 나에게만 왜 하필 나에게만
이런 아픔을 주는지

사랑한다고 행복하다고
이렇게라도 볼 수만 있다면
안돼요 이번만은 나 어떻게 살라고
마지막 마지막 사랑을 어떻게 하면 되요
나 뭐든지 다 할게요

한번만 사랑하게 해줘요
한번만 사랑하게 해줘요

지독한 사랑이 우주의 설계도면이었던 겁니다. 요단강 세례 받을 때 하늘에서 성령이 내려왔어요. 성령이 내려와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너는 네 할 일을 다 해라. 창세전에 약속한 네 할 일. 사랑하는 아들아, 이 창조를 네게 선물로 줄게. 그리고 백성들도 너한테 선물로 줄게. 그런데 그 백성들은 지금 죽어가고 있다. 아니, 죽었어. 죽었는데 죄로 죽었는데 네 백성을 사랑한다면 네 목숨 바쳐서 살려내라.”

이것이 아버지가 나(예수님)한테 허락한 마지막 사랑입니다. 마지막 사랑. 이렇게 사랑에 미쳐있으니까 사랑을 모르는 자에게는 어떠한 처벌도 질투도 너무나 합당하고 정당한 조치가 되는 거예요. 이 우주 전체가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 추진 계획 프로젝트에요.

지옥을 만드는 것도 오직 사랑을 위해서 지옥을 만들죠. 그것이 아가서 끝부분에 나옵니다. 아가 8장 6절에 보면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내 사랑이 너에게 하나의 문신처럼 네 속을 파고들어갈 것이다.

유한 락스. 락스를 몸에 바르면 피부가 상해요. 상하든 말든 주님의 사랑이 집요하게 우리 안에 들어옵니다. 말씀을 지킬 생각하지 마세요.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자기가 계산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 이용해서 천당 가려고. 그런 것은 네 사랑이지. 퇴출대상이에요. 가만있어. 내가 찾아갈 테니까.

찾아가서 주님의 사랑을 꽂아주게 되면 그 사랑이 얼마나 지독한 사랑인지 어떻게 되느냐?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새겨지게 되면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이 말은 뭐냐 하면, “야, 죽음가지고 협박하는 마귀 너 나와!”

욥 있잖아요. 욥기 보면 “마귀 네가 욥에게 죽음으로 협박, 공갈해봐라. 내가 욥을 사랑하는 사랑이 센지, 네가 욥을 꼼짝달짝 못하게 하고 발발 떨게 만드는 그 죽음의 공포가 더 센지 내기 한 번 해봐.” 이렇게 되는 거예요.

바둑을 보면 정식 대국은 아닌데 대국 방식 중에 ‘연기 바둑(2~3명의 선수가 팀을 이뤄 페어 방식으로 대국하는 것)’이라는 게 있어요. 3인조가 한 팀을 이룬다면 양쪽에 3명씩 있는데 한 사람 두고 나가면 이어서 두 번째 middle man이 두고 그다음 마지막 사람이 두고 이렇게 경기하는 거예요. 팀워크(teamwork)를 이루어서 하나의 대국을 이어지게 하는 거거든요.

성부, 성자, 성령이 팀워크를 이루었어요. 그 안에는 사랑, 하나님이 계획한 원래 사랑만 집요하게 작동함으로써 사탄의 세계와 대결하는 겁니다. 그런데 승부는 이미 끝났죠. 아주 독하게 사랑하는데 그 독한 사랑의 대상은 지금 이 세상에서 생존 때문에 벌벌 떨고 있어요. 죽으면 안 된다고 벌벌 떨고 있습니다. 온갖 몸에 좋은 것은 다 신경 쓰면서 듣고 이러죠. 그냥 안 죽고 살아남으면 남는 장사다, 이런 사고방식을 우리는 사회에서 완전히 뒤집어썼어요. 그러니까 사랑은 “이렇게 하시면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다가오면 그건 가짜 사랑입니다.

“나 너 죽이겠다.” 사랑이에요. 그리고 네가 무서워하는 것을 내가 더 심하게 조정해서 그걸 의도적으로 몰아세워서 비로소 그 자리에 죽음보다 더 강한 게 있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겁니다. 우리를 자기 백성 만드는 지독한 집착이 우리의 죽음마저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해내는 겁니다.

누가 우리의 사랑을 끊으리요. 오라 해, 오라 해! 이 대국에서 어떤 상대자도 다 오라 해! 환란? 곤고? 핍박? 웃기네. 더 센 거 없어, 더 센 거? 마귀? 마귀 떼로 다 와! 일곱 마리 말고 다 오라 해! 그 어떤 것도 우리 안에 박혀있는 주님의 사랑을 끝내 끊어낼 수가 없느니라.

일방적 사랑이니까요! 지독한 사랑이니까. 주님이 자기 목숨을 바친 사랑. 어떤 사랑? 마지막, 마지막 사랑. 마지막 사랑을 이 이방인인 우리에게 퍼부은 거예요. 질투심과 함께. 지독한 질투심과 함께.

그러니까 우리는 “주여, 제가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습니다. 제가 몸을 불살라 구제를 했습니다. 제가 예언과 방언을 하고 설교를 하고 강의를 하고…” “웃기지 마.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거 기억해서 네가 또 무슨 계산을 챙기려고. 십일조 해서 뭐 또 얻겠다고. 그 나라 천국이 네 사랑의 나라야, 내 사랑의 나라야? 우리 확실히 하자. 내가 분명히 했지? 따먹지 말라고. 지금껏 했던 따먹었던 행세를 또 하고 있어. ‘내가 구제를 했습니다. 전도를 했습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거는 아무것도 아님을 방해하는 거야! 아무것도 아닌 것을. 이게 불속에 한번 들어가 봐야 정신을 차리지.”

그래서 아가서 8장 6절을 계속 보면 “질투는 음부 같이 잔혹하고” 주님의 사랑은 너무 잔인해요. 너무 잔인해. 나에게 어떤 의미, 나의 가치가 약간이라도 남아있으면 그걸 잔인하게 파괴하고 파쇄해 버립니다.

상조 회사나 장례 회사들이 문제점이 있어요. 불교 미신 믿는 사람들에게, 극락 가는데 뇌물 좀 넣으라고 죽은 자에게 금반지를 그냥 끼우고 화장터 소각하는 데에 집어넣게 하거든요. 상조 회사나 아니면 화장터 직원들이 아주 잔혹해요. 재를 다 뒤져서 금반지 다 뽑아내는 거예요. 금이빨, 금반지를 다 뽑아냅니다. 싹 자기 것 하죠, 짜고.

그런데 그걸 누가 하느냐? 성부, 성자, 성령 3인조가 해요. 팀을 이루어서. 왜냐하면 예수님 사랑 빼놓고는 일체 들어가면 안 되기 때문에, 그 동네가. 그 사람의 자기 존재 의미, 가치가 조금이라도 남아있으면 안돼요. 그걸 미리 보여주는 것이 고린도전서 3장입니다. 3장에 보면 11절에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겠다는 그 취지가 그 뒤에 계속해서 연속됩니다. 누구든지 십자가 예수님의 공로,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그 지독한 마지막 마지막 사랑, 그 사랑 외에 다른 게 섞여버리면 그것을 하나님께서 천사와 성령을 동원해 다 제거해버려요.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3장에 보면 물 주는 자도 아무것도 아니고 심는 자도 아무것도 아니고 모든 처리는 무기력한 상태에서 오직 사랑만 있으면 되는 거예요(7절).

그래서 유명한 가수가 불렀던 노래, <사랑밖엔 난 몰라>. 숙제 하나 더 늘었습니다. 진시몬의 <애원>에다가 심수봉의 <사랑밖엔 난 몰라>. 지금 가시면서 들을 게 두 개 생겼어요. 복음 찬송가입니다. 세상에 뭐든지 감사하면 되죠. 주의 일을 위해서 감사하면 못 먹을 게 없다고, 노래도 감사하면 안 들을 게 없어요. 송재원 노래도 가끔 들어주시고. 사랑밖에 난 몰라. 심수봉씨가 젊을 때 뭘 그렇게 알아서 노래를 불렀는지.

그 사랑의 위력은 교회 편안히 다닐 때는 어느 정도 얼추 수입되고 죽고 난 뒤에도 계산을 해야 되니까 돈은 돈대로 받아놓고 노후대책 됐다면 이제는 자기 영혼을 생각해서 교회 다녀볼까, 이렇게 이용할 생각하는 것. 그게 인간의 한계 아닙니까. 자기를 잃지 않으면서도 자기를 천국까지 자기능력으로 인간 승리해보겠다는 거예요. 마이웨이. 내 방식대로 해서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천국 가서도 자랑질하려는 그 의도.

그 의도가 ‘하지 말라’는 조건을 계산하지 않은 조건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대해 사전조치를 합니다. 그 조치는 바로 사랑의 성령에 의해서 하는 겁니다. 3인조니까. 성부, 성자, 성령. 성령은 바둑 연기 대국에서 마무리 작업에 들어가는 역할이죠. 바둑에서는 그걸 ‘끝내기’라 합니다. 끝내기. 명칭이 아주 복음적 아닙니까. 끝내기. 포석(초반 돌 배치)-중간 전략-마지막에는 끝내기. 반집 승부. 끝내기를 성령께서 하십니다.

끝내기를 하는데 그 끝내기 기준은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한다.’에요. 그 기준을 가지고 아무것도 아닌 자로, 손에 있는 금반지 다 빼는 거예요. 기도한 반지 빼고 구제한 반지 빼고 성경 강의한 것 빼고 설교한 것 빼고 목회한 것 빼고 다 빼고 아무것도 아닌 걸로 하고 오롯이 사랑만 남는 걸로 성령께서 그렇게 친절하게 관리를 해주시니 이 마무리 사랑까지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을 보겠습니다. 성경에서 사실 제가 보기에 제일 난해구절은 바로 고린도전서 13장 13절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이게 무슨 뜻이냐? 믿음, 소망, 이것이 온전한 데에서 나오는 부분적인 요소라는 겁니다. 내가 여기 존재하니까 ‘내가 믿습니다.’, ‘내가 소망합니다.’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나마저 없어버리면 이 사랑을 가릴 수 있는 마지막 방해물이 날아가죠. 내게 있던 믿음, 내가 했던 소망은 믿음, 소망으로 나에게 왔다가 나는 날아가고 내 속에 있던 믿음, 소망은 후닥닥 그 원천을 찾아가는데 그 마지막 도착지점은 마지막 사랑.

믿음, 소망이 선재해서 주어졌지만 내가 죽고 난 뒤에는 믿음, 소망이 사랑으로 가죠. 사랑으로. 사랑에서 나온 소망이었고 사랑에서 나오는 믿음이었기에 이 사랑은 십자가에서 나온 사랑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뭘 툴툴 털어내느냐? ‘내가 예수 믿었습니다.’, ‘내가 예수를 사랑했습니다.’를 다 털어내는 거예요.

이것이 요한일서 4장에 나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10절) ‘아마 신앙 초반에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었는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죽을 때까지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 적이 없기에 그것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의 실현인 것으로 바꾸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한 적이 없다는 그 말씀이 내 안에 말씀으로 유한 락스처럼 새겨들어오게 된 이 실제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감사해야 돼요. 참으로 내가 아무것도 아니구나.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면 사랑이 왔다는 것을 어떻게 우리는 가끔 우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느냐? 요한일서 4장을 봅시다. 요한일서 4장 17절을 볼 것인데 그전에 13절을 볼게요. 아까 3인조가 하는 바둑에서 성령의 역할이 끝내기라 했죠.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사랑의 아들에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고 마무리 짓는, 끝내기 하시는 분이 3인조 중에 한 분으로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속에 남아있는 나의 의, 내가 뭔가 했다는 것을 다 처리하고 내게 사랑만 남게 하는 그 마무리작업을 친절하신 3인조 중에 한 분,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성령께서.

17절,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재림 날에 담대한 것은 이미 재림한다는 말씀이 이 속에 새겨져 있기 때문에 ‘재림하게 된 것을 압니다’가 아니라 재림도 주님의 사랑에서 남아있는 마지막 절차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재림에 대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죠.

자꾸 내가 살기 위해서 주의 재림을 기다리게 되면 나중에 치매 걸리면 자기 남편 이름만 알고 재림도 몰라요. 예수님 이름도 몰라요. 다 잊어버려요. 이게 콩고물 돼서 흘러가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안에 새겨져야 되는데.

그래서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말씀과 더불어서 이미 우리는 따먹지 말라는 걸 따먹었기 때문에 ‘정녕 죽으리라’가 작동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조치인 것을 받아들여야 될 텐데, “정녕 죽으리라” 하는데 “아니요. 아직도 기회가 있습니다. 나에겐 배 열두 척이 남아있습니다.”

열두 척이고 한 척이고 그거 소용없는 거예요. 어쨌든 악을 발휘해서 나를 천국 보내려고 시도하는 이 모든 시도가 말씀이 안 들어왔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게 종교생활인 거예요, 종교생활. 그게 종교생활인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담대함이 아니고 발발 떠는 거예요.

재력가인 엄마가 선생님하고 짜고 중간고사, 기말고사 시험문제를 다 빼냈잖아요. 다 빼내서 딸애는 집에서 미리 시험을 치면 되는 거예요. 시험지 있고 정답 있고 그 시험 치면 자기 반 1등인 거예요. 그런데 돌발사태가 벌어져서 시험지 빼내기 전 수학 시험을 쳤는데 40점 나왔어요. 그런 일이 있었어요. 어떤 분이 이천 만원 주고 몇 년 동안 시험지를 빼낸 일이 있었어요. 아주 지독한 어머님의 사랑이에요. 그 딸 나중에 어머니한테 효도 많이 해야 돼요.

그거보다 더 독한 사랑이 있어요. 미리 시험지 다 빼내서 다 준 거예요. “유월절 양 있지?” “예.” “너한테만 이야기하는 거야.” “왜요?” “너만 내 백성이니까. 그 양 잡아.” “어떻게 할까요?” “그 문지방하고 문설주 있지? 거기에 피 발라라.” “이유가 뭔데요?” “묻지 말고. 지금 너는 이유를 몰라. 그냥 한번 발라 봐. 발라보고 일단 오늘 밤 어떻게 되는지 지나가보자.”

지나가보니까 옆집에서 난리도 아니에요. 난리도 아닌데 유월절 천사가 와서 하는 말이 자기들끼리 “야, 이 집 이거(문설주에 양의 피) 있다. 넘어가자.” 넘어간다고 유월절(逾越節, Passover)이에요. 천사가 죽이려고 왔다가 피보고 넘어간 날. 이게 유월절이고 그 유월절 양이 모의고사에서는 양이었지만 실제로는 연기 바둑에서 두 번째 사람, 예수님이었어요. 예수님이 먼저 양 던져놓고 예수님이 자기가 던진 양이라는 기표, 문자를 자기가 집는 겁니다.

이게 <오징어 게임>에 나와요. 오징어 게임을 보면서 제가 은혜 받은 게 딱 한구석 있어요. 영희. 목에 담 걸린 영희 있잖아요. 담이 걸려서 눈동자만 굴리고 움직이지도 못해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하면서 쳐다보기만 한다고요. 움직이면 그게 여자든 남자든 노인이든 관계없이 기관총이 날아와서 다 죽여 버리는 거예요. 영희가 보는 것은, 내 사랑의 대상이 누구냐. 지독한 마지막 사랑을 받을 사람이 누구냐만 살피고 사랑이 없는 사람은 진멸해버리는 그 게임. 오징어 게임, 최고에요!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미 조건 자체가 따먹지 말라 했는데 따먹는 순간 그건 사람이 아닙니다. 그건 하나님의 형상이 없다고 봐야 돼요. 복음적으로 이야기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없는 거예요. 쉽게 이야기해서 “너는 살아도 산 게 아니고 그냥 괴물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괴물한테는 인정도 동정도 필요치 않아요.

그래서 요한일서 계속 보게 되면,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뭐가 없고?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제가 수십 번 이야기해도 이 말씀을 보면서 ‘그래. 이제는 결심했어. 예수 믿고 복음 알고 두려워하지 말아야지.’ 또 이렇게 말씀을 내가 지키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지 마세요. 정말 주님의 사랑이 있다면, 다른 사람이 알아줍니다. “너 무섭지?” “아니.” “두렵지?” “아니.” “왜 안 두려운데?” “주의 사랑이 그렇게 했나보지, 뭐.” 이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너 그 소리 들으니까 약 오르지?” “아니.” “네가 막 성질나지?” “아니.” “왜 그 이야기 듣고 성질이 안 나지?” “주께서 그렇게 했나보지, 뭐.” 이렇게.

주의 사랑, 그 지독한 사랑이 하나님께서 자기 사랑을 위해서 이런 불에도 집어넣고 이런 골짜기에도 집어넣고 온갖 모욕과 온갖 비난과, 특히 제일 힘든 게 억울함이잖아요, 하지도 않았는데 했다고 당하는 그 억울함, 그 모든 곳에 다 집어넣어놓고 과연 이 인간이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는 자라면 어떤 경우라도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을 것이다. ‘본전 좀 챙겨주면 안됩니까?’라는 소리를 안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있는 본전도 다 뽑아내는 겁니다.

자, 고린도전서 16장 봅시다. 마지막 사랑이죠.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마지막 사랑을 어떻게 표현했는가? 진정 복음대로 표현했어요. 그것이 고린도전서 16장 22절,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아주 당당하게. “내가 늘 이야기했지?” 이런 식으로.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

사도 바울이 누구한테 억한 심정이 있습니까? 감정적으로 나오는 겁니까? 이게 감정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누가 미운 게 아니에요. 그냥 현실 자체가 이래요. 주께서 ‘사랑밖엔 난 몰라’ 그 쪽으로 이미 추진을 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 본인이 거기에 끼어들 여지가 없죠.

끼어든다면 어떻게 끼어드는가? 16장 11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멸시하지 말”라. 아, 담대함, 두려움이 없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누구를 멸시하지 않는 거예요. 본인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게 저 사람은 이렇다, 이 사람은 이렇다 할 자격도 없으니까요. 그런 자격도 없어요.

누구누구 신앙은 뭐 이렇고 누구누구 신앙은 우수하고 그런 말을 한다는 자체가 내부적으로 무서움을 갖고 있다는 뜻이에요. 자기 무서움이 탄로 난 거죠. 두려움이 드러난 겁니다. 나는 나를 지키고 싶을 때, 누구에게 접근하고 접촉되고 닮고 싶은 모델을 상정하고요, 그 모델과 가까이 있나 멀어졌나를 통해서 내 신앙이 어느 수준인가를 측정하는 자체가 두려움이에요. 그 자체가 두려움입니다.

사람하고는 상대할 가치가 없지요. 가치가 없기 때문에 상대가 어떤 사람이 오든 내 자체가 아무것도 아니라면 내가 그 사람에게 보여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받은 사랑뿐입니다. 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사랑밖엔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요한일서에서는 이렇게 표현했어요. 네가 형제를 미워하면 곧 나를 미워하는 것이다. 요한일서 이야기는 지키라고 준 말씀이 아니고, 못 지킨다. 내 개별적 자아의식으로서는 도저히 지킬 수 없는 그런 말씀으로 다가오시면서, 다시 한 번 네가 밟을 때마다 지뢰 터지듯이 잘난 네가 늘 팡팡 터져버려라.

그러면 남는 것은 오직, 사랑밖엔 난 몰라. 깨어지지 않는 내가 깨어지도록,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사랑을 날마다 지뢰처럼 맞닥뜨리게 하는 이것조차도 하나님의 사랑 스케줄의 일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의도적으로 그런 사랑과 환경을 몰아세우신 거예요.

이제 강의를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같이 보고 싶습니다. 마태복음 3장 16-17절,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이제 여러분들은 성경 전체 뜻을 다 알았죠? 성령께서는 아버지의 모든 깊은 뜻을 다 알게 하셨기 때문에 성령 받은 사람은 다 알아요. 다 안다는 것은 성경구절을 다 안다는 것이 아니고, 전체 프레임을 다 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스케줄이 어떻다는 것을 다 아는 거예요. 아는 상태에서 비로소 이 말씀이 이해가 돼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뭡니까? ‘하나님은 자기들의 팀워크를 자랑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밖에 모르는구나.’ 그렇게 이해가 되죠.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성부, 성자, 성령 3인조가 드디어 자기들끼리의 사랑관계를 개시했구나. “비둘기 같이 내려” 또 비둘기 같이 내려와서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끝!

오직 하나님만이 자기만의 만족스러운 세계 건설에 도저히 끼어들 수 없는 예수님의 자기 공로를 담는 사랑의 그릇으로 지독한 질투에서 나온 사랑을 일방적으로 담아서 하나님의 사랑의 그 공간에다 백성으로 영원한 영생이라는 도저히 갈 수 없는, 추방된 땅에 있었던 영생나무의 영생을 맛보도록 조치를 해놓고 잠가버려요.

쥐나 개나 오지마라. 올 이유가 없어요. 주님이 찾아오지 않으면 올 이유가 없어요, 주님의 영이. 딱 걸어놓고 이 사랑을 모독한 자에 대해서는 질투심으로 “지옥이나 가라”고 마귀한테 명령하는 것. 이것이 고린도전서에 나타나 있고 성경 전체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알 필요도 없고 관심 없어도 무방할 것 같은 이 예수님 십자가 이야기, 이것이 내가 스스로 방해물이 되어서 몰랐던 진짜 현실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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