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5강 집단 구원

아빠와 함께 2025. 8. 2. 07:16

2025 여름수련회 고린도전서 강해 제5강 : 집단 구원 - 이 근호 목사

5강의 핵심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라고 할 때 두 가지의 다른 종류의 십자가가 내포될 수 있어요. 십자가 이야기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과 2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두 종류의 십자가가 있었죠. 첫 번째는, 개인 자아를 위한 십자가. 두 번째는, 집단을 위한 십자가.

사도 바울은 이 둘 중에서 어느 것을 퇴출시키고 어느 것을 정당한 것으로 봤는가? 개인 자아를 위한 십자가는 퇴출시킵니다. 사도 바울은 이 개인의 십자가를 다른 종교로 봐요. 다른 복음으로 봅니다. 그리고 집단을 위한 십자가는 구약 이스라엘의 연속성을 구현하는 십자가로 보는 거예요.

그래서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은 구약을 놓치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구약을 완성했다고 보는 겁니다. 구약에 나오는 것은 개인이 아니고 집단입니다. 이스라엘의 어린 양이 개인을 위한 어린양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집단을 생산하게 하는 그러한 어린 양이죠.

그 하나의 어린 양 각자의 어린 양 앞에 종속되어 집단화하는 조건으로 히브리인 가정들에게 자기 집에 있는 양을 잡아 피를 바르라고 했습니다. ‘그 취지가 신약까지 계속 이어지는 것이 하나님 언약의 일관성에 부합된다.’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제가 개인 자아를 지난 시간에 ‘흩뿌려진 자아’라고 했죠. ‘흩뿌려진 자아’는 통합된 자아 형성에 실패합니다. 흩뿌려진 것을 내가 다시 끌어모을 수는 없어요. 왜 이렇게 흩뿌려지느냐 하면, 인간은 일어나는 벌어지는 상황에 대해 도무지 정신을 못 차리기 때문이에요. 여기서 이런 사건 터지면 거기에 몰두하고, 저기서 저런 사건이 터지면 또 거기에 몰두하기 때문에 자아 자체가 종잡을 수 없습니다.

라캉에서 S1, S2, 이것은 주체 1, 주체 2라고 하는데 사실 주체 1이라는 것은 없어요. 주체는 없어요. ‘완전한 자아’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데 주체 2는 뭐냐?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에서 ‘기존 사회에서 통용되는, 또는 가담되는, 또는 하나의 개인으로, 인격으로 인정받는 그렇고 그런 일반 인간’, 이것을 S2라고 이야기해요.

기존 상징 세계에서 써먹을 수 있는 주체, 자아입니다. 내가 이 사회에서 하나의 일원으로서 내가 보기에도, 남들이 보기에도 “넌 우리와 같은 사회인이 맞아.”하고 사회가 용납하고 인정하는, 거기에 같이 통용될 수 있는 S2, 이력서 작성할 때 쓸 수 있는 그런 자격이 되는 이런 인간, 이걸 ‘개별적 자아’라고 합니다.

S1은 상상의 자아인데 ‘완전한 나’를 말합니다. 이것은 어릴 때죠. 어릴 적 상상의 나, 내가 생각하는 어릴 적 상상의 ‘나’가 사회에 나가서 박살납니다. 그래서 입사 경쟁 뚫고 회사에 들어갔다가 못 버티고 한 달 만에 튀어나와요. “난 자영업 할래. 도저히 내 성격에 회사 근무 못 하겠어.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고 잔업까지 하고, 이건 내가 도저히 못 견디겠어.”하고 튀어나오는 거예요.

S2지만 S1을 지향하는 것(S1←S2), ‘내 개인 사업을 하겠다.’ 어떤 걸 해도 이건 실패하죠. 왜냐하면 백날 S2가 S1을 지향하면서 관계해도 이미 형성되어 있는 사회, 이 사회는 진실을 찾는 데 결국 실패하는 사회, 진실은 없으니까 실체가 아닌데 실체가 있다고 여기고 완전한 사회를 구현하고 싶어서 서로가 노력하는 사회, 이걸 무슨 사회라고 하느냐? 이것을 상징계, 상징 사회라고 해요.

늘 새로운 이미지에 우르르 몰리고, 새로운 저 이미지에 우르르 몰리고. “공부 잘하면 의대에 가야 된다.” “아니야, 공대를 가야 돼.” 또 새로운 세계의 경제 트랜드에 의해서 “적어도 한국 사람 같으면 외국에 나가서 일을 해야지. 한국에는 일자리가 없어.” 이런 것, 이 사회의 흐름, 현 사회에 구성되고 있는 이 discourse, 담화에 놀아나면서 거기서 필요한 나, 이 나는 사회에서 갈기갈기 찢어집니다.

그게 흩뿌려진 자아, 이렇게 갈기갈기 찢어지기에 자꾸 뭘 그리워하느냐? 옛날 백설 공주 시대 때의 나, 인어공주 시대 때의 나를 그리워하면서, 어떤 멋진 계획에 의해서 그 인생이 신데렐라처럼 갑자기 원하는 상상의 나로 접합할 수 있고 합치될 수 있는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노리면 뭐 합니까? 나이 벌써 40이 넘고 50이 되었는데요. 외부에 있어서는 이렇게 완전을 추구해도 내부가 썩어 들어가는 거예요. 전립선 비대증, 이런 거 있잖아요. 온몸이 쑤시는 거, 허리가 아픈 거, 이건 내가 원치 않는데 중력의 무게에 의해 척추가 망가지는 거죠, 물리적 환경에 의해서.

그래서 이 흩뿌려진 자아가 추구하는 것은 S2인데 S2가 자꾸 S1을 원해요. 원하는데 어디까지 원하느냐? 상상할 때 이 땅에서, 이 세상에 대해서 ‘아, 정말 이 세상은 더럽다. 하지만 죽어서는 좋은 데에 가겠다.’라는, 나의 영원한 영생과 구원을 성경에서 봤으니까 성경에 나와 있는 영생의 나라 천국에 들어가고 싶다고 할 때 ‘아, 무슨 수가 없을까? 아, 여기 있네.’ 하겠지요.

고린도전서 1장을 보면서 “십자가 지혜가 너를 구원한다”라는 소식을 듣고 “저 십자가 내가 믿을래!” 이렇게 해버리면 그 십자가는 무엇과 결속되어 있습니까? 개인의 자아와 결속되어 있는 십자가, 이거 가짜 종교, 가짜 복음입니다. 이스라엘과의 연속성이 전혀 매치가 되지 않는 거예요.

복음 듣고 은혜를 받았다는 말을 할 때 점검을 하는 거예요. 저 사람이 개인 절대성을 위해서 십자가를 믿는지, 아니면 자기를 포기하는지, 즉 자기 자신이 나올 수 없는 어떤 집단을 위한 십자가인지, 어느 쪽인지 그런 것을 검토해 보는 거죠.

그래서 기성 기독교에서는 어떻게 이야기하느냐? 1번(자아 구원)을 거쳐서 2번(집단 구원)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십자가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백성이 되면 어떤 게 기다리느냐? 여러분들과 같은 형제가 기다리니까 십자가를 믿던 그 믿음으로 형제와 결속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이 완성이 되니까 그게 참된 하나님의 공동체고 신앙 공동체고 교회입니다.” 이렇게 가르치는 거예요.

그러니 그건 뭐 신천지 되기 쉽죠. 굉장히 쉬운 거예요. 이런 기존의 집단, 대형 교회 이런 것이 거대한 집단을 통해서 개인으로 구원받는 사람에 결합되게 되면 ‘개인의 자질이 다 십자가를 안고 있으니까 십자가를 안고 있는 자질이 모이면 그 집단도 순수하고 하자가 없을 것이다.’ 그런 계산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이 개인은 이 십자가 안에서 죽어 있을까요, 살아 있을까요? 여전히 살아있어요. 꼭 발톱의 무좀 곰팡이 같아요. 발톱속으로 들어갔는데 안에서는 계속 발톱의 균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가짜가 들어왔잖아요. 고린도전서 5장에서는 이걸 누룩이라고 하는 거예요.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고전 5:7). 너희 속의 누룩을 내어 쫓으라는 겁니다.

이 개인의, S2죠, 흩뿌려진 자아를 강화시켜서 그 자아를 더욱더 공고히 해서 통합된 자아로 만든 자가 하나님이 생각하는 집단을 위한 십자가에 끼어들어 “나도 십자가 압니다.” 하고 같이 천국을 가고자 들어온 것, 이걸 누룩이라고 해요. 누룩이라는 좋지 않은 개념을 사용했어요. 저절로 퍼지니까, 개인적 사고방식을 안 놓치고 발휘하게 되니까.

남들 보기엔 속아 넘어가죠. “우리는 교회 소속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사도 바울은 그걸 족집게로 끄집어내죠. “개인이 없는 집단부터 시작해야 할 것을 너에게는 개인을 모아서 집단 만들겠다는 불순한 동기가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궁금한 것은 개인이 없는데 어떻게 집단이 생기느냐 하는 그 점이에요. 개인이 있어서 집단이 됩니다. 1, 2, 3, 4가 모여야 다수가 성립되는 것이 우리네 상식인데 십자가는 그 상식을 다른 종교로 간주하는 거예요. 다른 종교, 이방 종교로 간주하는 이유가 이스라엘 역사와 관련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민수기 25장 9절에 보면 2만 4천 명이 죽어요. 죽은 자가 2만 4천 명, 다른 종교의 요소가 끼어든 겁니다. 흩뿌려진 개인이 개인을 충족시키는 그러한 이방 신에게 현혹되어서 그런 일이 일어났어요. ‘그래도 나는 여기 소속이기 때문에 괜찮다’라고 여길 때 그걸 족집게로 뽑아내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다음에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3천 명 죽습니다. 아직 정신이 좀 멀쩡할 때 어려운 걸 빨리하겠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해서 그날 백성 중에 3천명 가량이 죽습니다. 죽는 그 이유가 여호와의 뜻에 반대되는 요소가 여기에 끼어들었기 때문에 그걸 뽑아내는 작업을 하는 거죠.

32장 9-1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다 죽이는 거예요. 3천 명 정도가 아니고 ‘현재 시내 산에 올라가서 40일 있던 모세 너 빼놓고 지상에 있는 것들은 다 죽이겠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숫자가 모자란다는 것이 아니고 천국에 합당한 자만 들여보내겠다는 거예요.

지금 여러분들이 궁금해하는 게 있을 거예요. ‘이스라엘 집단이 어떻게 신약의 교회라는 집단과 연관될 수 있느냐?’ 연관되는 그 방법은 이렇습니다. 간단해요. 시간이 이렇게 흐릅니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흐르게 되면 이스라엘은 몽땅 다 망합니다. 몽땅 다 망한다. 다 망하면 ‘이스라엘은 있다.’가 아니라 ‘이스라엘은 없다.’가 돼요. 이스라엘을 아예 없애버렸습니다. 있었던 이스라엘이 아예 없어집니다.

그러면 하나님 언약의 원칙인 이거에요. 언약의 원칙은 아브라함에게 언약이 작용할 때의 능력이 ‘없는 데서 있는 것’이고 그다음에 ‘죽은 데서 살리는 거’예요. 이건 에스겔 37장에 나와요. ‘인자’라고 불리는 에스겔이 하나님과 더불어서 뼈 있는 골짜기에 갔죠.

“시몬 너는 아느냐? 인자가 뼈 밟는 소리를!” 이런 것. 부지직부지직 전부 다 뼈, 뼈를 밟으니까 갈비뼈 열두 대가 나가고, 엉치뼈도 나가고, 밟아도 밟아도 그 골짜기는 뼈들만 있는 골짜기에요. 그것을 시체라고 합니다. 거기에 한쪽은 여호와 하나님이고 옆에 대동한 사람은 이름이 뭐냐?

‘인자’, 그 이름이 여기서는 에스겔이지만 ‘인자’라는 칭호, 장차 자기를 칭하는 그 칭호는 예수님에게만 해당이 됩니다. “인자야, 네가 본 것은 인자라는 조건하에 영원토록 지속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다. 너는 인자잖아!” 인자라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이 원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몽땅 다 죽입니다. 그러면 남은 것은 뭐냐? 죽은 이스라엘밖에 없어요. 죽은 이스라엘밖에 없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알아서 이스라엘이 된다는 모든 가능성은 어떻게 됩니까? 이미 끝났어요. 끝났습니다. 끝나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묻습니다. 에스겔에게 물어요. “이게 어떻게 살겠느냐?” 하는 거예요. 어떻게 살겠느냐.

지금 다 죽어 있는 판에 ‘살겠느냐’를 물을 때 에스겔은 이렇게 답변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게 답변을 했고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언약의 활동 주체자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언약이 언약대로 완성하기 위한 바탕은 하나님에 의해서 충분히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여기에 언약, 다시 말해서 말씀이 그냥 불어오죠. 말씀이 부니까 뼈와 뼈들이 조립됩니다. 조립이 될 때 여기서 궁금한 것은 ‘자기 뼈인지 남의 뼈인지, 뼈들이 어떻게 제대로 붙는지 안 붙는지’ 그건 모르겠어요. 그건 모르는데 어쨌든 간에 ‘그들은 죽음 가운데서 부활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대목을 보겠습니다. 흩뿌리는 그 자아는 아무 소용 없어요. 흩뿌려지면 그냥 끝나는 거예요. 흩뿌리는 자아가 하나의 개인 자아로서 통합돼도 그 숫자를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개인이 개인의 자아를 수렴하기 때문에, 그것은 언약의 개입이 없이 이뤄지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른 종교로 보는 거예요.

에스겔 37장 11-13절에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그다음에 뭡니까?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참 감격스러운 광경입니다. 그런데 이 광경은 이미 바짝 마른 뼈가 되어 죽었던 그들에게는 예상할 이유도 없고 예상하지도 못했다는 거예요. 예상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상한 구원은 가짜입니다. 구원받았으면 “나 전에 바짝 마른 뼈였습니다.”라는 고백을 동반해야 하지요. ‘내가 죽었었다’라는 사실을 품을 때 그게 우리 안에 들어오는 십자가의 본 내용이에요.

초등학교 운동회 할 때 “학부모님들 가운데서 어린 유치원생을 동생으로 가진 어머니들만 나오셔서 50m 달리기합니다. 단 그 어린이를 품에 안고 달려야 합니다.” 그래서 어머니들 전부다 초등학생의 동생들 품에 안고 달리는데 1등으로 들어온 아줌마가 보니까 자기애를 안고 온 게 아니고 베개를 품고 일등으로 들어오면 그건 상품 없어요. 그것은 청군이고 백군이고 간에 점수 확 깎입니다.

우리가 품어야 할 것은 ‘내가 죽었다’라는 사실을 품고 달려야 이게 구원의 역동성, 주님의 언약만 살아나는 모습인 거예요. “나 교회 50년 다녔습니다.” 그런 것 필요 없어요. 그것은 베개입니다, 베개. 인형 품고 살고 있는 거예요.

에스겔이라는 구약의 언약과 연결되어야 해요. 연결되지 않고 끊어진 것은 이방 종교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신약에 보면 바로 그런 사람들이 지금 기다리고 있죠. 영생, 천국 가야 되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 졌다는 소문 듣고 그 십자가를 내가 받아들여서 ‘내가 십자가로 살았다’라는 것으로 천국 백성 속에 가만히, 슬그머니 끼어들려는 시도가 교회라는 종교 단체마다 범람하게 된 겁니다. 개인을 위한 십자가는 없습니다. 집단을 위한 십자가입니다.

로마서 11장 25절에 보면 구원을 누가 받느냐 하면, ‘온 이스라엘’이 받아요, 개인이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오늘날 교인들에게 굉장히 큰 부담을 줍니다. 왜 부담을 주느냐 하면 내가 구원받고 천국 가기 위해서 예수 십자가 믿는 것은 굉장히 간단한 문제인데, 만약에 ‘집단구원’이 되어 버리면 내 구원도 챙겨야 하고 꼴 보기 싫은 남까지 챙기려고 하니까 이건 뭐 짐을 한 아름 안게 되어 버립니다. ‘그 이론 말고 나만 깔끔하게 천당 가는 이론은 없을까?’ 하고 찾기 마련이죠.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성령께서 역사해 줍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없다.” 이렇게 ‘죽은 자’임을 확실히 한 이유는 ‘인자’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모든 개인은 구원의 대상이 되지 않고 창세 전에 아무 인간도 없을 때 하나님께서 누구를 구원하느냐 하면, 예수님을 구원하는데 이걸 에베소서에서는 ‘예수님을 구원한다’라고 되어 있지 않고 ‘예수 안’을 구원해요.

예수님이 품을, 예수님이 품게 될…, 예수님이 왕이거든요. 백성이 없을 때, 백성이 태어나기 전에, 예수님이 품게 될 백성을 창세 전에 이미 정했어요. 정해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명단이 발생됩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3천 명이 죽었죠? 3천 명이 죽고 난 뒤에 “다 멸절하고 나는 모세 너만 건지겠다.”(10절)라고 하니까 모세가 “하나님! 그렇다면 이스라엘을 여기서 재편합시다.” 한 거예요.

재편 제안이 들어와요. 단계를 하나 주는 거예요. ‘애굽에서 건너온 모든 이스라엘 사람을 다 죽이겠다’라는 게 하나님의 뜻이에요. 거기다가 모세는 이렇게 제안합니다. ‘거기다가 세밀하게 한 단계를 넣읍시다.’ 하는 거지요. 왜냐하면 모세 본인 “너는 구원한다”라고 했으니까 “구원받은 나부터 새로 개시되는 명단을 만듭시다.”

그 명단이 뭐냐? ‘누구든지 앞으로 모세 말을 듣지 않으면 멸절하든지 다 망하든지 그렇게 하고, 모세 말을 듣는다면 그들만은 모세 말을 들었다는 조건하에 새로운 이스라엘을 개시하는 게 어떻겠습니까?’라고 제안해요. 하나님은 OK, 라고 한 겁니다. 하나님께 그 제안에 동의를 해줬어요.

모세의 의견을 들은 게 아닙니다. 이건 애초부터 창세 전에 예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할 때 중간에 집어넣는 한 단계가 있는데 모세를 통해서 미리 앞당겨 샘플로 한 과정을 집어넣은 거예요. 그래서 나온 것이 출애굽기 32장 32절입니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여기 책이 나와요. 명단들이 다 수록되어 있는 단권의 책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여기 등장합니다. 모세는 이 책의 존재를 어떻게 아는가?

주님과 함께 40일 동안 있었기 때문에 ‘그 책이 있고 책의 명단은 창세 전부터 작성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엔 변함이 없다’라는 것을 아는 거예요. 그러면 이 말은 무슨 뜻이냐? 이 말이 어렵기 때문에 제가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벌통, 벌통을 열었을 때 판이 나와요. 꿀벌들이 수집해서 모아놨던 그 꿀이 뚝뚝 떨어지는, 꿀로 흠뻑 범벅이 된 판이 나온다고요. 그 판이 만약에 생명책이라면 그 명단에서 누가 빠지고 누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최종 명단이 나올 때까지 ‘누가 빠지고 누가 들어오고’가 역사적 현장 속에서 되풀이되는 거예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지금은 최종 명단이 누군지를 모르는데 후보감으로 들어갔다가 탈락했다가, 들어갔다가 탈락했다가 하면서 창세 전에 있던 그 최종 명단만 남는 조치에 주께서 어떤 하자나 실패가 없도록 하시는 거예요. 수천 사람이 들락날락하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가 구원받는다고 여기는 거예요. 그건 그 시대의 벌통이에요. 예를 들어서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시험 한번 없이 세월을 보내면 그걸로 졸업이 됩니까? 그렇게 해서 대학에 들어갈 수 있어요?

수시로 뭘 합니까? 시험을 치잖아요. 내신 성적을 위한 시험, 그리고 모의고사 이런 시험을 치면서 “너는 이 대학 못 들어가. 넌 탈락이야.” 이런 식으로 계속 갱신, 계속해서 업그레이드되는 과정이 필요한 거예요. 그런데 이 대학에 들어갈 최종 명단이 초반부터 이미 정해져 있다면 수많은 사람이 지원하고 여기 도전을 해도 이 명단에 부합되지 않는 것은 계속해서 탈락시키는 거예요.

그러면 초반의 문제는 “2+3=?” 이거 대학 시험 문제입니까? 아니죠. 이건 변별력이 없어서 안 되죠. “2+3=5!” 유치원 단계에서는 이것이 되는데 어떤 아이가 이것도 모르고 “2+3=?” “2!” 이렇게 나온다면 그 유치원 아이는 그 꿀 판에서 탈락이에요. 그 꿀 판에서 탈락이기 때문에 “너는 영어유치원에는 못 들어가. 그냥 일반 유치원으로 가!” 이렇게 시험을 통해서 골라내는 작업이 이미 개시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에서 개시된 이것이 어디까지 계속되는가? 이것이 신약까지 이어지는 거예요. 계속 시험을 치는데 그 시험을 주도하는 자가 등장해요. 그 사람이 ‘선’ 씨입니다, ‘선지자’. 모세부터도 선지자지요. 선지자가 계속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누구든지 그 당대에 말하는 선지자의 말을 안 하면 그 시험에서 너는 탈락한다.”

그것이 이미 확보된 아무도 알 수 없는 명단에 든 사람만 남기기 위한 거예요. 자, 이럴 때 우리가 궁금한 것은 이겁니다. “목사님, 제 이름은 그 명단에 있습니까? 내 이름이 명단에 있는지 조사해서 미리 보고 싶습니다.” 그렇게 나온다면 그것은 땡, 탈락이에요. 그런 것이 궁금한 사람은 땡! 탈락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이미 ‘내가…’라는 개인 자아의 구원, 애초부터 그런 구원을 하나님께서는 준비한 적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명단이 있다 하니까 갑자기 뭐가 궁금하냐? 그 명단, 생명책 리스트에 내 이름이 있는가가 궁금해 지면서 가만히 잠자고 있던 개인 자아의 욕구가 발동을 한 거예요.

누가복음 10장 17-20절을 보겠습니다. “칠십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자, 귀신을 쫓아내면 그 일을 한 그 사람의 명단이 최종적으로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입니까, 아닙니까? 아닙니다. 왜냐하면 단 한 명도 개인적 자격으로 구원될 자아를 하나님께서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 외에는 허락한 적이 없어요.

이들이 귀신을 쫓아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그것은 성령 받은 예수님께서 성령이 없는 당시의 70명을 이용한 거예요. 성령 받지 않은 12제자를 이용한 거예요. 그중에 누가 포함되어 있어요? 가룟유다, 귀신도 포함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당시에 모의고사를 치니까 뭐라고 성급하게 생각했느냐 하면, ‘귀신마저 떨어지니 귀신마저 떨어져 나간 그 집단에 내가 속해 있으니까 곧 나는 완전히 합격 된 자’라는 착각들을 하는 거예요.

그 착각들을 본인이 하는 순간 그 사람은 ‘집단구원’이 먼저라는 생각을 못 하고 ‘내 구원이 먼저고 내가 어느 집단에 소속되면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냐?’하는 개인구원에 입각한 논리를 나름대로 펼친 거예요. 여러분, ‘남은 자’는 유일하게 예수님이고 그 남은 자 예수님 외에는 모조리 다 탈락이에요, 모조리 탈락입니다.

왜냐하면 자칫하면 예수님도 구원받고 이 사람도 구원받으면 천국 갈 때 이 사람에게 뭐가 있느냐 하면, 내 안에…, 그러니까 예수님 빼놓고 따로 독자적으로 내 안에 ‘내가 구원받는다’가 되어버리면 예수 안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신 한 분밖에 없는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안으로 들어갔다 나왔다는 그 경로가 없어요.

그것은 베개 들고 뛰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는 모든 인간은 죄 아래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는 거예요. 왜? 십자가, 나무에 달린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저주받은 자에 대한 합당한 결과입니다.

주님께서 저주의 표상인 나무에 달려 죽는 이유가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율법의 저주가 있어야 할 이유는 예수님까지 포함해서 어느 누구라도,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마저 저주라는 환경에서 빠져나갈 권한은 없다는 거예요. 일단은 저주받아야 해요. 저주를 안 받고는 구원이 없습니다. 아, 이 이야기를 하니 속이 다 시원하네요.

흩뿌려진 개인이든 예수님이든 이 환경, 하나님의 율법으로 조성된 환경은 저주 아래, 모든 입을 막아서 저주 아래 있게 하기 위함(롬 3:19)입니다. 확실하게 저주로 조성한 환경을 만들어놓고 그다음에 거기서 예수님만 먼저 빠져나와요. 나머지는 “시므온, 너는 아느냐? 뼈다귀 밟는 소리를!” 이렇게 인간은 전부 다 죽어 있다는 그 말이에요.

꼭 죽어서 뼈만 앙상하게 남아야 죽은 것이 아니고요. 교재에 나옵니다. 말씀에서 격리된 것, 떨어진 그것이 죽은 거예요. 교재 6쪽 끝에 있는 마태복음 13장 15-16절에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여기에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라고 되어 있는데 어떤 인간도 그 인간의 마음이 구원받는 마음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런 마음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겁니다. 구원되지 않으면 저주 아래 있고 그것은 죽은 마음이지요. 태어날 때부터 있는 죽은 마음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예수님께 말씀을 던지니까 아는 거예요. 호텔에서 음식 나를 때 뚜껑 덮은 채로 끌고 가잖아요. 주님께서 그 저주의 뚜껑에서 유일하게 탈출했어요. 탈출했으니까 구원받은 자아는 누구밖에 없습니까? 예수님밖에 없지요. 그 예수만 구원했다는 것, 예수님만 구원하면서 그 ‘예수 안’이 퍼집니다. 그 공간이 확장이 돼요.

확장이 되면서 예수님 안에 모든 구약 율법이 다 완성이 된 채 있어요. 율법에 이런 것이 있어요. 이사야 42장, 43장에 죽 보면 하나님은 자기가 택한 나의 이스라엘을 반드시 건진다는 내용이 나와요. 그러면 구약의 이스라엘은 다 망해서 없고, 이스라엘은 예수님이 예언적으로 품고 있고, 예수님이 예언적으로 품고 있는 그 이스라엘을 예수님의 영인 성령이 그 공로를 주게 되면 그 사람은 뭐가 되느냐 하면 ‘온 이스라엘’(롬 11:26) 되는 겁니다.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어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는데, 예수님만 구원받는데 ‘예수님 안’이 구약의 이스라엘을 반드시 구원한다는 그 조건이 그 안에 들어있으니까 그 조건이 새로운 환경으로, 새로운 현실로 확장이 되면 그 ‘온 이스라엘’ 명단에 있는 자들만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 겁니다. 자기 이름이 아니고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그럴 때 동원되는 것이 뭐냐? 성령이라는 환경이에요. 성령의 환경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만 구원될 자격이 있음을 분명히 한다는 조건하에 개인 자격으로 구원되는 것은 전부 다 용납하지 않고 거절한다는 똑같은 조건이 유지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작용을 성령이라는 환경이 하는 겁니다. 그 성령의 환경을 영적 세계라고 하지요.

‘예수 안’의 세계, 영적 세계, 다른 말로 하면 ‘성령 안에서’ 혹은 ‘십자가 안에서’ 그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는 어느 누구도 자기 자랑을 할 건더기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죽은 자를 살렸는데, 살리신 분의 공로만 왔을 뿐이지 자기가 뭘 했다는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서 이미 개인 구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전체를 용납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생각하는 이스라엘은 구원 대상이 아니고 예수님이 창세 전에 알았던 이스라엘은 따로 존재한다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성령이 왔다? 그러면 뭘 아느냐? 알려줬다는데 뭘 아는 것인가? 모든 말씀은 나 구원받기 위해서 준 것이 아니고, 내게 대한 것이 아니고 요한복음 5장 39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예수님을 겨냥해서 말씀이 집중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판은 무슨 판이 되는가? 벌통의 꿀 판, 벌통 속에 납작한 판, 꿀로 덮인 판, 그 판은 ‘예수님 안’이 되고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꿀들은 예수님이 가지고 온 그 꿀로만 촉촉하게 이 모든 공간을 채우게 됩니다. “너 어디서 먹었어?” “주님이 주신 꿀 먹었어.” “너는?” “나도 그 꿀 먹었어.” “그러면 네가 할 것이 뭐가 있는데?” 그러면 꿀 먹은 벙어리가 돼요.

내가 한 것이 하나도 없지요, 뭐. 주께서 죽었다가 부활한 그 성령에 대해서 로마서 8장 9-10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익히 알지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잘 들어보세요. 방금 이야기한 것이 이겁니다. 먼저 8절에 보면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어요.

로마서 8장 9-10절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그리스도 안의 그 공간이 확장되었으니까요.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어디에 있습니까? 그냥 “너희가 영을 받았다”가 아니라 앞에 뭐가 붙어요. 어디에 있지 않다? 육신에 있지 않아요. 육신에 있지 않습니다.

육신에 있지 않다는 말을 제가 지난 강의에서 뭐라고 했느냐? 내가 나에 대해서 심사하거나 평가할 권리가 이미 나에게는 날아가 버렸어요. 왜? 누가 심사하든 나는 이미 죽은 자니까요. 죽은 자라는 말이지요. 죽은 자니까 나는 마땅히 이미 죽은 자 입장에서 내세울 것은 없어요.

그런데 죽는 이유가 뭐냐? 죽는 이유가 조상부터 받아온 아담의 죄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미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범죄하지 않아요. 범죄하지 않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위해서 모든 일이 뭐로 나옵니까? 죄로 나오는 거예요. 신났지 뭐요. 죄로 나오는 이유가 방금 전에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나니.”

여러분이 이제 제대로 아는지 고등학교 1학년 모의고사로 봐봅시다.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나니.” 이것을 개인적으로, 개인 자아로 가져올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다고 한다면 시험 다시 치러야 해요.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는 것은 나의 과제가 아니에요. 나의 과제가 아니라고요. 이것은 누구의 과제냐? 예수님의 영의 과제에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주께서 과제를 하게 되면 ‘너는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율법과 말씀을 대하게 하면서 그래서 우리에게서 뭐가 나오느냐? 우리에게서 죄가 나오고, 그 죄는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 있던 그 죄가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죄는 육신에 있을 때 나오는 그 죄기 때문에 영에 있을 때는 그것은 하나님의 의로 된다는 그 말이지요, 하나님 의로!

이것은 너무 기분 좋은 이야기라서 내가 지금 구라를 떨고 있는지 여러분이 의심스럽게 보일 정도지요. really? 이게 사실입니까, 이게? 나를 무시할 때는 기분이 좀 나빴는데 무시 정도가 아니고 철저하게 밟으면 밟을수록 그게 성령이 내 안에 살아있다는 증거로 작동한다면, 작용한다면 어떻게 십자가만 자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언제까지 이렇게 합니까? 주께서 부르실 때까지 계속돼요, 주께서 부르실 때까지입니다. 십자가는 개인용도는 없습니다. 구원은 ‘개인 구원’도 없습니다. ‘집단 구원’이에요. 그래서 성령 받은 사람은 “너 성령 받았어?” “나 성령 안 받았어.” 이러한 비교는 성립이 안 됩니다. 옛날 제가 어릴 때 명절 설이 오면 할아버지가 손자들에게 예쁜 옷들을 사줬어요. 그때는 할아버지가 왕초고 할아버지가 돈을 다 쥐고 있어서 아버지는 돈도 없어요.

그러면 먼저 새 옷을 받고, 세배를 하면 세뱃돈을 받았어요. 그런데 먼저 돈을 받은 삼촌들은 형들은 어린 조카나 동생들한테 자랑들을 해요. “너 세뱃돈 받았어?” 이런다고요. 그걸 생각하게 되면 사람들이 “너 성령 받았어? 나 받았어. 너는 못 받았지롱~” 이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이게 성립이 안 돼요. 그것은 개별적이라 성립이 안 됩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옵니다. 4절에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나이와 성별은 다 달라도 세뱃돈은 같고. 똑같이 줘요. 물론 우리 할아버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삼촌에게 천 원 줬다면 우리에게는 5십 원 줬어요. 20분의 1, 그 정도 된 겁니다.

마태복음 20장에서 “천국은 이와 같으니…” 하면서 포도원의 인부 뽑을 때 사람들이 상상도 못 했어요. 똑같이 줄지를 상상을 못 했어요. 어떻게 일하든 똑같이 줄지를 사전에 알았으면 삐져서 일하러 안 갔을 거예요. 왜? 그 포도원에서는 개인 자아가 돋보이지 않는 거예요. 개인의 노동력, 내가 한 노동력이 돋보이지 않는 세계 같으면 사람들은 원하지 않아요.

내가 돋보여야, 죽어도 내가 잘나야 그것을 천국이라고 간주하고 가고 싶어지는 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천국이라고 해놓고 놀고 있는 사람들 불러다 아침에 온 사람, 오후에 온 사람, 마지막에는 한 시간만 근무하고 퇴근하는 사람을 불러서 똑같이 줬거든요.

그러니까 누가 삐졌느냐? 처음부터 아침에 온 사람 불러서 조용히 한 데나리온 주면서, 누가 행여 볼까 싶어서 “빨리 가, 가! 네 집으로 가!” 이러면 그 사람은 “고맙습니다!” 하고 갔을 거예요. 삐짐이 없다는 그 말이에요. 생명책에서의 탈락이 없어요. “고맙습니다”하고 가면 되는데 제일 끝에 온 사람에게 일당을 줄 때 아침 일찍 와서 일한 사람이 다 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너 얼마 받았어?” 하고 보니까 이게 천국인지 뭔지 그다음부터는 엉망진창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주인이 뭐라고 했어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마태복음 20장 15절에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즉 “내 것 가지고 내 맘대로 주는데 내가 왜?”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무엇을 나타내느냐 하면,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요 19:30). 이게 제가 이야기한 겁니다. 이 세상은 거짓이라는 그 거짓 자체를 들추지 아니하면 천국의 능력이 아닙니다. 인간은 전부 다, 천국 가겠다는 그것도 거짓되고 자기 자신이 누군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나오는 아이디어를 개인적으로 발산할 뿐이지요.

이제 고린도전서 1장의 십자가를 볼 차례가 되었습니다. 십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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