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8강 죽음, 그리고 부활

아빠와 함께 2025. 8. 2. 15:14

2025 여름수련회 고린도전서강해 제 8강 : 죽음, 그리고 부활 - 이 근호 목사


제 8강하겠습니다.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했지만 ‘그래, 십자가면 다야.’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 방해되는 요소가 있어요. 방해되는 요소가 뭐냐? 고린도전서 7장 23절에 보면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그렇게 되어 있죠.

22절에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했단 말이죠. 이 말은 세상에서 말하는 주인과 종의 관계가 주님 안에서는 그것이 전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재편성되는 겁니다. 권세가 재편성되는 겁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 이야기를 고린도전서에서 혼인 이야기로 이것을 언급한다는 것입니다. 혼인 이야기를 언급한다는 말은 그 당시 혼인이 남자가 주인이고 여자가 종이 되는 것이 원칙인 것처럼 그것이 정의로운 것처럼 합법적인 것처럼 그렇게 여겨졌던 그 시대가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여기 기존의 인간세계에서 말한 혼인제도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종이 아닌 사고방식에서 나온 혼인제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그걸 무효화시키려는 거예요. 사람에게 종이 된다는 말은 사람이 만든 혼인제도에 꼼짝 마라는 식으로 묶여있는 것도 하나님의 종으로서… 적어볼게요. 공식이에요. ‘하나님의 종=어느 사람의 종이 아니다’ 이렇게 보라는 거예요.

“너 하나님의 종이야? 그렇다면 더 이상 사람의 종이 될 수 없어.” 이걸 왜 혼인제도로 언급하느냐 하면, 혼인제도를 언급한 이유가 그 당시 남편은 주인노릇하고 여자는 종노릇하는 이런 조건 하에 혼인이 성사됐기 때문에 그래요. 남자나 여자나 그 시대가 그러니까요. 그 시대의 모의고사가 그러니까요. 이게 혼인제도였습니다.

그럼 어떤 여자가 성령을 받아서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면, 종이 되었다는 말은 본인이 종 되고 싶어 된 게 아니고 부르심을 입은 거예요. “야, 너 그쪽이 아니고 이쪽 소속이야.” 부르심을 입어버리면 이것은 사람의 종이 아니죠. 사람의 종이 아니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이 만든 문화, 그 당시 문화인 혼인제도가 나쁘다는 게 아니고 그 당시 인간들의 혼인제도의 종이 될 필요 없다는 거예요.

혼인제도의 종이 될 필요 없다면 그럼 여기서 두 가지 경우가 있죠. 같이 살던지 안 그러면 이혼하고 헤어지던지 이 두 가지 경우인데, 상대방 배우자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방해하지 않거나 거기에 대해서 동의하고 있거든 굳이 헤어질 필요 없고 같이 살아라. 하지만 하나님의 종에 대해서 성령에 대해서 상대방이 거기에 대해 강력하게 거부하거든 이것은 성령에 대한 악령의 횡포로 여기고 이것은 이혼해라.

아니, 마태복음에 보면 하나님이 짝지은 것은 두 몸으로 나누지 못한다고 했는데 예수님 때에는 그때의 모의고사고 복음이 전파된 이쪽에서는 이제 모의고사가 아니고 본고시죠, 본시험에서는 이처럼 헤어진다는 그러한 아주 괜찮은 조건 하에 부르심을 살리면 된다는 거예요. 괜찮은 조건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문제는 헤어질 때 나뉠 때, 부르심을 입어서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조건 외에 다른 조건을 여기서 제시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오직 부르심을 입었다는 조건과 거기서 극렬하게 네가 부르심을 입은 것에 대해 나는 용납 못한다고 나올 때는 굳이 하나님의 종이 사람의 종 제도에 매일 필요 없고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이게 성경입니다.

그런데 또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이 말씀을 우리가 실시해서는 돼요, 안돼요? 안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이 개별 자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해서 본인의 욕망을 충족하려는 의도가 싸악 올라오거든요. 싹 올라온다고요. 저쪽하고 살기 싫은데 어떻게 하면 저쪽에서 구차 없이 헤어지게 만드는가? 방귀를 막 뀐다든지 해놓고는 핑계대기를 “네가 나의 종 됨을 거부했기 때문에 성경에 따라 이혼하자.” 이거는 NO. 이거는 안 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러한 이혼도 가능하다는 거예요. 15절에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 16절,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그러니까 모든 관심이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한다는 그 원칙에만 입각해서 그것을 적용하는 기능으로서 어떤 남자와 어떤 여자가 만나 혼인하게 되었다, 이렇게 보라는 거예요.

네가 누구를 만나든지 나는 행복한 결혼을 위해 만났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 의미를 부여해서 혼인에 개인 행복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데 성도는 그렇게 되어버리면 사람의 종, 다시 말해서 나의 종이 되어버려요. 내가 나의 종이 되어버린다고요. 자꾸 하나님 핑계대지 말고. 나 편한 대로 살려고 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부르심과 십자가 죽으심이 우리 가정을 통해 구현될 것인가.’ 그 기준 외에는 어떤 다른 기준도 제시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뒤의 말은 일단은 결혼한 대상을 향하여 이렇게 쓰여져 있는 것이고요. 지금 어떤 아가씨가 결혼하기 전에 부름을 받았어요. 이게 불행인지 행복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결혼하기 전에 사람의 종이 아닌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을 때는 사도 바울이 아주 진중하게 이야기합니다. “하지 마! 결혼하지 마!”

결혼 안하게 되면 국가 출산율이 0.75명으로 뚝 떨어졌는데요? 국가 발전의 원동력으로 후세가 없는데요? 어떻게 하면 되죠? 그럼 나라에서 애 낳는다고 주는 보상금도 못 받고. 사도 바울은 과감하게 이야기합니다. “결혼하지 마.” 그래서 이렇게 되어 있어요. 28절에 나온 그 뉘앙스를 보세요. 말하는 뉘앙스. “그러나 장가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로되”

지금 총각, 처녀가 결혼하고 싶어 환장하고 있는데 사도 바울의 뉘앙스는 정반대죠. “억지로 장가갈 필요 없고 처녀가 억지로 시집갈 필요도 없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뭐냐? 억지로라도 가고 싶어, 장가. 우연을 빙자해서 억지로라도 재벌 만나 시집가고 싶어요. 재산은 얼마 안 되도 괜찮아요. 기본재산 한 240억 정도, 집은 한 60평 되는 아파트 그 정도. 아주 겸손하게 그 정도만 되면 시집 갈 용의가 되어 있다. 지금 만반의 마음 준비가 다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런데 “너 부름 받았어?” “예, 부름 받았어요.” “가지 마! 혼자 살아.” 그러니 이게 얼마나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현실에서 인간들의 기본적인 육적 욕구가 ‘너 행복해? 나도 너만큼 행복할 자격 있어.’ 자격을 남에게 보여서 ‘나도 이렇게 가정 꾸리고 행복하단 말이야. 나는 너 안 부러워.’ 경쟁에서 남한테 지지 않으려는 본성이 남아 있는데 거기다 대고 “꼭 시집갈 필요 없고 억지로 장가가지 마라.” 그다음에 나온 이유가 뭐냐 하면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여러분, 육신에 고난 있다고 장가 안갑니까? 장가 안가도 고난 있고요, 시집 안가도 고난이 더 심해요. 주위에서 집적대서 더 심하다니까요.

자, 그 이유가 뭐냐? 이유가 이제 등장합니다. 환경이에요, 환경. 복음으로 인하여 유발된 환경은? 공식이 뭐냐? ‘존재가 등장하면 존재를 지시하고 존재를 부각시키고 존재를 돋보이게 하는 환경도 같이 등장한다.’ 이게 공식입니다. 어떤 특정 언약적 존재가 등장하면 환경도 같이 등장한다.

그럼 마지막 때에 예수님 등장했죠. 그럼 예수님이 등장한 환경은 어떤 환경으로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느냐? 7장 29절에 나옵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 하되…” 이렇게 쭉 나와요.

이게 뭐냐 하면 ‘환경 자체를 건너뛰자. 어차피 세상 떠날 거 굳이 세상에 깊숙이 관여해서 내 인생 책임지라느니 어떻게 싸우고 그런 거 다 생략하고 그냥 건너뛰는 것이 고난을 줄이는 방법이다.’ 그런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럼 이 말에 동의하려면 여러분 뭐를 동의해야 돼요? 과연 종말이 가까우냐 하는 것에 대해서 동의가 되어야 되겠죠. 종말이 몇 년 남았느냐 그걸 사전에 정보입수 해야 되겠죠. 누구한테 물을까요? chat GPT한테 물을까요, 몇 년 남았는지?

지구가 멸망하기까지 남은 시간, 남은 세월은 그 사람의 복음의 깊이에 비례합니다. 복음의 깊이에 비례해요. 세상을 진짜 떠나고 싶을 때는 얼마 남지 않았고, ‘언젠가 재림하겠지. 그러나 난 더 있고 싶어.’ 하면 남은 세월의 길이가 그만큼 길어지는 겁니다.

이게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원리에 나오는 거죠. 속도를 늦추면 그만큼 보이는 게 많고 속도를 빨리 하게 되면 생략되는 요소가 많은 거예요. 주님께서 어서 나를 데려가고자 하는데, 부동산 재벌이고 한 달 수입이 수 억 되는 남자가 와서 “아가씨와 결혼하고 싶습니다. 아가씨 없으면 자살하겠습니다. 당신 없으면 못 살겠습니다.” 할 때 여러분 어떻게 하겠어요? “잠깐만요! 계산 좀 해볼게요. 주님 몇 년 남았습니까?”

그러한 환경이 찾아오게 되면 이 세상 떠나서 주님께 가겠다는 자신의 복음의 깊이, 속도가 늦추어지겠죠. 그때 결혼하면 되죠. 결혼하고 이제 고생 실컷 하고.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그냥 사세요, 그냥! 누굴 만나거든 그냥 살고, 안 만나거든 그냥 떠나고. 결혼이 뭐냐, 혼인이 뭐냐 하는 것은 일체 알 필요가 없어요. 왜? 우리는 그리스도와 십자가 죽으심 그것만 알면 되니까. 괜히 다른 것 신경 쓰다가 근심 걱정만 덤터기로 뒤집어쓸 문제란 말이죠.

11장 끝났어요. 간단해요. 자기가 갖고 있는 복음의 역량, 깊이에 따라서 주께서 그걸 조절해서 성경 말씀대로 결혼하는 사람에게 고난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고난 받기 위해 결혼하는 게 아니고, 고난이 있다는 그 말씀의 기능을 위해서 우리는 어떤 남자와 어떤 여자를 만나게 되는 것도 주의 뜻으로 범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나 너 만나서 고생만 실컷 한다.’ 주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것도 고린도전서 7장에 결혼해서 고생했다는 그 말씀의 성취 아닙니까. 신나지 않습니까? 고생은 내가 하지만 말씀 성취했다는 그 마음이 기쁘죠. 혼자 기쁜지 모르겠어요. 아무도 기뻐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그다음 15장 봅시다. 예수님의 부활. 예수님의 부활에서 초반부터 난제가 등장합니다. 어려운 문제가 등장해요. 15장 12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절이 어렵습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그다음 15절,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이 말이, 말이 안돼요. 지금 사도 바울이 원인과 결과를 자기 마음대로 바꿔버렸습니다. “아저씨, 파출소 어디 있습니까?” “미장원 옆에 있습니다.” “미장원은 어디 있습니까?” “파출소 옆에.” 이게 무슨 새로운 의미를 추가하는 거예요? 부활이 없다 하니까 사도 바울이 부활이 있다는 거예요. 부활이 있는데, 예수님의 부활이 있기 때문에 다시 사는 게 있다. 그럼 예수님을 왜 부활시키는가? 다시 사는 게 있기 때문에. 이게 무슨 말이에요, 이게? 이게 무슨 말이에요? 새로운 의미가 추가되는 것이 전혀 담겨있지 않고 동어반복, 같은 말을 지금 반복하고 있습니다.

방금 사도 바울이 왜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 제가 질문에 두 문항을 제시하면서 여러분들에게 답변을 골라보길 제가 권하는 겁니다. 부활에 관해서 부활의 의미가 1.죽은 다음에 다시 산다는 말인가? 2.계속 산다는 말인가? 이거에요. 둘 중에 어느 겁니까? 이건 5초 드리겠습니다. 별로 어려운 게 아니라서. 이게 무슨 말이에요? 부활의 의미가 뭡니까? 인간은 계속 산다는 말입니까, 죽은 다음에 산다는 말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사도 바울은 어느 쪽이에요? 1번이에요. 맨날 2번만 정답 아니에요. 가끔은 1번도 정답이에요. 죽은 다음에 산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부활이 없다는 사람이 주장하는 게 뭐냐 하면 우리는 계속 산다는 거예요. 죽음이라는 말이 있지만 죽음은 별 게 아니고 ‘죽음’, 시력 1.5 아니면 안 보이게 더 작게. (죽음은 작게 하고) 우리는 계속 산다는 말이에요. 1번은 ‘죽음’ 시력 0.3도 보이도록 크게. 죽음 다음에 산다는 말이다.

그럼 이걸 합하면 어떻게 됩니까? 죽음이 계속 사는 세계가 부활의 세계. 따라서 죽음이 없으면 뭐가 없습니까? 부활이 없죠. 죽음이 없으면 이 세계 말고 다른 곳에서 계속 산다는 말이에요. 부활이 없다는 사람은 현재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계속 산다는 말이에요.

사도 바울이 부활 이야기하니까 ‘같은 동질성을 갖고 있는 내가 이 동네에 사는데, 내가 만일 이 동네에서 죽는다면 죽고 난 뒤에도 계속 산다.’ 그런 뜻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럼 그런 증거를 찾아보자. 말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거기에 필요한 증거를 찾아보니까 죽고 난 뒤에 자기 동네에서 계속 귀신처럼 나타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부활은 성립이 되지 않는다.’ 쪽으로 사도 바울에게 반박을 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뭐를 놓쳤느냐? 죽은 자들의 세계가 계속 산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죽음의 의미가 누락된 채 계속 산다는 사람은 이 부활에 참여할 수 없는 이유가 죽음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일반인의 죽음은 2번이 맞죠. 다시 사는 증거가 없으니까. 그런데 일반인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음은 죽음 다음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예수님의 부활만이 예수님만이 그걸 보여줬다는 겁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일반인들의 죽음이 재편된다는 거예요. ‘일반인의 인식 자체가 재편되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인하여 확장되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도 ‘죽음’을 크게 쓴 이유를 몰라요. 왜 일반인들이 죽고 사는 게 안 되느냐? 그게 왜 첫 번째 모델이 아니냐?

일반인들이 죽고 살아도 “그래. 죽고 난 뒤에 다른 세계가 있고 거기서 산다.” 이럴 수 있잖아요. 에녹 같이. 또 엘리야 같이. 에녹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마리아, 마르다 오빠 나사로도 아니고, 왜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야 그게 부활이 되고 예수님 외에 다른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은 왜 부활의 세계가 아닌가 하는 그러한 이야기에 대해서 충분히 질문이 되는 겁니다. 그 이유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일반인이 죽는 죽음은 남들에게 영향력을 줄 수 없는 죽음이에요. 본인이 죽었다가 본인이 뭐 소생할 수도 있고 살아날 수도 있는데 그것은 개인 문제에요. 개인 문제는 개인의 동일성에 갇혀있고 멈춰버려요.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이 갖고 있던 그 본질이 기존 모든 인간들의 본질을 무효화시키고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본질의 바꿔치기가 되는 겁니다. 바꿔치기가.

만약에 바꿔치기가 안 된다면 4살 때 죽었다가 부활할 때 몇 살로 태어나겠어요? 일반인의 죽음이라면 몇 살로 부활되겠습니까? 4살 때 죽었으니까 4살로 태어나겠죠. 95살에 죽었다가 부활해서 다시 산다면 그 사람은 천국 가서 뭐가 되겠어요? 노인네 얼굴이 되겠죠. 전립선 비대증 있고 부활의 세계에서 병원 찾고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초대 교회 신학자들은 말하기를, 얼마나 이 사람들이 성경을 안 봤는지… 신학자들은 신자가 아니에요. 언제로 부활하느냐 하면 인간의 가장 절정기로 태어난다고 이야기했어요, 어거스틴이. 절정기가 언젠데? 32살로 봤어요. 남자도 32살, 여자도 32살 쯤으로 다시 태어난답니다. 그다음부터는 늙지도 않고 쭉 간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참. 같잖은 것도 아니고 이것 참. 코미디도 그런 코미디가 없습니다.

그분이 뭘 빠뜨렸느냐 하면 우리가 아담에 속했다는 걸 빠뜨렸어요. 기존의 아담에 속했는데 아담에 속한 몸은 무슨 몸이냐? 15장 42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을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썩을 것으로 심었어요.

그러니 썩을 것에 미련을 두면 돼요, 안돼요? 안되죠. 죽을 때 손가락이 없거나 죽을 때 다리를 절거나 죽을 때 위암이 있거나. 어쨌든 위암이 있든 말짱하게 건강하든 전부다 퇴비에요, 퇴비. 썩을 것으로 이 땅에게 돌려주는 겁니다. 이게 하관예배 아닙니까. 그냥 자연에게 땅에게 돌려줘요. “네 거니까 네가 가져가. 흙에서 났으니 흙아, 이거 다시 소환해, 전부다.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가져가. 흙 주제에 잠시 인간같이 됐다만 결국 버티지 못하고 흙이니 흙으로 끝나는구먼.”하고 썩을 것이 썩을 것으로 끝나는 거예요.

일반적인 부활은 전체를 다 대체할 수 있는 부활의 몸이 아닌 거예요. 그래서 부활의 첫 열매는 에녹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리고 마르다, 마리아 오빠 나사로도 아니에요. 죽었다 살아난 ‘달리다 굼’ 그 회당장 딸도 아니에요. 부활의 첫 열매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부활의 첫 열매가 예수님인 이유는 예수님이 죽을 때 예수님만 죽은 게 아니고 모든 자가 다 죽었기 때문이에요. 그게 고린도후서, 다음 편지 5장에 나옵니다. 그분이 죽을 때 저주받아 죽었잖아요. 이 말은 모든 인간의 죽음은 저주받는 죽음,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저주받아 마땅한 죽음을 예수님께서 대표로 보여주신 게 됩니다. 대표로. 그래서 인간은 어떤 자기의 연속성, 동질성을 부활을 거론하며 주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 어머니께서 연세 많을 때 치매 걸렸었는데, 치매 걸렸을 때 길을 잃어서 경찰관이 밤중에 우리 집까지 찾아다 준 적이 있었어요. 제가 은혜를 받았는데 어떤 은혜를 받았느냐 하면, 어머니가 치매 걸렸기 때문에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요. 그런데 단 하나만 기억했어요. 뭐냐 하면 아버지(남편) 이름만 기억했어요. 남편 이름만 기억해서 경찰관이 그 이름을 치니까 주소가 나와서 찾아온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분명히 우리 어머니지만 어머니가 자기 남편에게 종속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 거예요. 그 당시 모의고사에서는. 까짓 거 본인 이름은 모른다니까요. 본인 이름보다 더 우선되는 것이 남편의 이름이듯이 이미 남편이 갔다면 자기가 따라가야 된다는 거예요.

삼국시대에 순장(旬葬) 제도 있죠. 왕 죽는데 멀쩡한 산 사람, 하인들까지 100일치 양식 주고 다 무덤에 집어넣었죠. 거기서 뭐 유격 훈련합니까? 우리는 몰래 삽 들고 가서 파헤치고 나왔을 거예요. 그런데 그 당시에 그것이 영광이고 그 사회의 권세였어요.

권세가 그렇게 무서운 겁니다. 권세는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마땅히 그래야 그 공동체에서 인정해주고 그 공동체에서 살아남는 거예요. 그게 바로 아담의 세계, 첫 아담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세계가 결국 썩게 만드는 동력이었어요.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이 썩을 것이 썩을 것끼리 모여서 썩는 짓만 하고 결국 썩는 것으로 끝나는 거예요. 아무 새로운 의미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분이 어디서 부활했다고 했느냐 하면 자기 죽음에서 부활한 게 아니에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했다고 했어요. ‘죽음’이라는 것이 ‘죽은 자들’이 되어버리면 뭐가 드러나느냐? 모든 인간을 죽게 한 원인, 악마의 권세가 함유된 의미가 ‘죽은 자들 가운데’에 있어요. 어느 누구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알아서 부활된 자는 단 한명도 없다. 그만큼 보이지 않는 악마의 권세가 센 거예요. 또 그걸 겨냥한 율법의 권세도 그만큼 세고. 죄의 권세도 세고.

구원이라 하는 것은 죄로부터 율법으로부터 저주로부터 죽음으로부터의 탈출이잖아요. 탈출인데 그것을 우리가 언급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나는 그걸 알아서 나는 구원되었다.’ 이러면 안돼요. 우리 어머니가 자기 이름을 알고 내 이름을 어떻게 구원하겠다고 나서면 안돼요. 우리 어머니는 살아계실 때부터 아버지 앞에서 자기 이름을 포기한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장기기억 속에 뭐만 남아있어요? “할머니 이름 뭡니까?” 몰라요. 왜? 그걸 굳이 알 필요가 없으니까요. 남편 있음이 곧 나의 있음이니까. 멋지시지 않습니까? 그대 있음에 내가 있다. 그게 그 당시 문화였으니까요.

주님께서는 새로운 문화를 제공합니다. “죽은 자가 너의 이름이었다. 너의 이름들 가운데서 나의 이름을 끄집어내었다. 다시 네 이름 기억할 거야, 안 할 거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과 죽은 것 외에 기억할 거야, 안 할 거야?” 이렇게 묻는 겁니다. 십자가 알고 따로 부활 알고 이런 것은 사도 바울의 복음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에 있을 수 없어요.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겠다 할 때는 알지 않아야 될 것 중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습니까? 부활이 포함되어 있어요.

십자가만 알면 구원 안 되고 부활도 알아야 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그럼 거기에 계속 항목이 붙어야 돼요. 예수님의 십자가 알아야 되지, 부활 알아야 되지, 예수님의 재림 알아야 되지. 이 말은 뭐냐? 십자가 알고 부활 알고 그다음에 재림 모르면 구원에 탈락된다는 거예요. 그럼 그것만 알면 됩니까? 성령의 열매 외워보라고 할 때 성령의 열매 외워야 되지. 그다음에 주기도문 못 외워서 더듬거리면 또 탈락이죠. 사도신경 다 외워야 되죠, 십계명 외워야 되죠. 도대체 이게 구원을 받는 건지, 지금 시험 치다 볼일보고 끝나는 건지.

나의 신앙의 자질과 능력을 측정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죽은 자 안에서 죽음으로 이미 끝났다는 사실이에요. 그냥 죽어줘, 그냥. 자꾸 나불대지 말고 그냥 죽어줘. 네 역할은 그냥 죽는 거야. 그 죽는 죽음 속에서 우리 말고 예수님이 먼저 와서 이 죽은 자들 가운데 부활했기 때문에 그 죽은 자를 누가 건질 거냐 하는 권한은 누구한테 있습니까? 일방적으로 누구한테 있어요? 주님한테만 있는 겁니다. 주님한테만.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지금 부활 이야기하면서 누구를 설득할 마음은 조금도 없어요. 없고, 모든 사람이 산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는데 그분이 모든 걸 대표해서 첫 번째 아담을 완전히 다 무효로 돌렸다는 거예요. 여기 나옵니다. 22절,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아, 얼마나 급진적인 사고방식입니까?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너 어디서 태어났어?” “아담 안에서.” “그럼 죽었네.” 이 얼마나 급진적인 거예요. 파격적인 거예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이 말은 ‘아무리 잘나고 노력해도 네가 아담의 몸으로 태어났으면 너의 진수, 너의 본질은 그냥 죽음이 너를 말해준다.’ 이 뜻이에요. 죽는 존재가 뭘 까불어, 이런 거죠.

20절에 보면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에녹 아닙니다. 엘리야 아닙니다. 자꾸 에녹 아니고 엘리야 아니라고 언급하는 것은, 사람들이 성경을 통해서 자기가 죽어서 살아나는 경우를 자기 동일성을 포기 못한 채, 쟤들도 사는데 우리도 예수 믿으면 산다고 그렇게 연관시켜서 문제가 되기 때문이에요.

에녹이 하나님께 갔지만 그것은 잠자는 자의 첫 열매입니까, 아닙니까? 첫 열매가 아니에요. 첫 열매도 아닌 걸 왜 모델로 삼습니까? 엘리야도 마찬가지에요. 엘리야도 불마차타고 올라갔잖아요. 뜨거우냐, 안 뜨거우냐 하는 것은 잘 모르겠는데 하여튼 이 땅에 시체 남기지 않고 그냥 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걸 부러워하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이젠 나를 잊어도 되는 게 부럽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이거 15초 드립니다. 중요한 문제라서. 내가 죽었다가 내가 부활되는 게 좋습니까, 아예 나를 삭제시키고 나 여기 없다~ 영구 없다~ 하는 것처럼 나 여기 없다~하는 이게 낫습니까? 내가 없으면 걱정도 없는 거예요.

우리의 기능은 이겁니다. 21절, “사망이” 그다음에 뭡니까?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이 기능에 충실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어떤 역할을 맡는데 뭐냐 하면, “나 사람이다. 따라서 필히 죽어야 돼. 이게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한 명령이야. 먹든지 마시든지 뭘 하든지 죽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돼.” 그 사명에 충실하면 돼요. 그리고 ‘죽었으면 내가 부활한다.’가 아니에요. 죽으면 내가 부활할 필요가 없고 흙으로 된 내 인생은 그걸로 마감이 되는 겁니다. 마감이 되는 거예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교회에서 불만이 대단해요. ‘그동안 주님 복음 믿고 충성했는데 본전도 못 건지고. 투자는 했는데 이익이 하나도 없잖아요. 나 살리기 위해서 교회에 열심히 봉사하고 헌금하고 십일조하고 다 했는데 주께서 나를 부활에서 배제한다? 나는 닭 쫓던 개꼴이 됐네.’

그런 생각이 든다면 또 주님께서 종용히 불러요. “봉사하지 말고 이참에 날 버려. 그따위 사고방식 가지고 더 갈 것도 없어. 지금 나를 버려. ‘이익이 없는데 예수 왜 믿어?’ 하거든 그냥 날 버리는 게 좋아.” 개별적 자아가 계속해서 살아있어서 성경의 모든 것을 지금 나 잘되기 위해서 끌어오는 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끌어와요.

그러니까 이 성경을 봐도 전혀 좋아지지 않고 반갑지도 않고 감사도 없어요. 맨날 하는 게 ‘그럼 내게 돌아올 이익은? 수익금은 얼만데?’ 맨날 이거 따지는 거예요. “나 그렇게 착하게 살았는데 뭔가 보상 없는 착함은 착한 일할 동기부여가 안 되잖아요. 뭔가 보상이 있어야 내가 열심히 힘을 낼 건데…” “네가 아무리 봉사해도 그건 무효가 되고 네가 천당 갈지 지옥 갈지는 네가 어떤 기여한 바 없고 주님의 일방적인 결정이다.” “그러면 주께서 일방적으로 결정 안 해주면 나 뭐하는데? 그냥 손가락만 빨고 있느냐?”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26절이 답변합니다.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뭡니까? “사망이니라” 너는 하나님의 원수와 더불어 사망을 품고 살았잖아. 사망의 기세가 예수 그리스도의 하는 일을 모독하고 있었잖아. 그 일에 너 가담하고 있었잖아. ‘하나님, 저 죽여도 영원히 지옥 보내지 말고 천국에서 살게 해 주세요.’라고 하는 그것이 바로 배후에서 사망이 “물어! 물어!” 하면서 시킨 일이에요.

모든 자가 죽은 자가 되어야 되는데 죽은 척을 하면서 빼꼼히 한 눈 뜨는 거예요. 주님께서 재림하나, 안하나? 언제쯤 기름 준비할까? 기름 준비할 타이밍을 자기가 잡아. 스케줄을요. 주께서 오려고 하다가 눈뜨고 있으면 “안 가. 아, 취소. 취소. 천사님들, 지금 타이밍 안 되었습니다. 저거 저거 한 눈 뜬 거봐. 죽은 척하는 거구나. 나 안 가요.”

모든 인간이 자기의 의지와 바람과 기대가 완전히 죽음 속에서, 죽음이 사망이니까, 철저하게 마귀에게 매인 자 되어야 부활은 그때 찾아오는 거예요. 어떤 내 일말의 희망의 빛이라든지 이런 게 남아있으면 이건 제대로 죽은 자가 아니에요. 수련회 와서 8강까지 듣는데 갑자기 수련회 들은 것 취소하고 싶은 생각 없어요? ‘이거 뭐 헛다리 짚었네. 결국 그 이야기 들으려고 왔나. 수련회 온 보상이 있어야지, 아무 대가도 없고 건진 것도 없이 뭐야? 차라리 7강 듣고 갈 걸.’ 그런 생각 들지 않습니까?

주의 뜻은 이겁니다. 얼마나 평소에 예수님과 비교하면서 예수님 앞에서 잘난 체하고 있었는지, 새로운 하나님의 계시가 주입되게 되면 예수님이 하는 일에 대해서 ‘그럼 내가 얻을 보상은?’ 이런 식으로 토 달고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본인의 일이 자기의 존재 잘남을 증명해서는 안돼요.

성령이 임하면 땅 끝까지 누구의 증인된다고 했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인 척하면서 ‘증인으로 살면 내게 돌아올 콩고물은 무엇입니까?’를 생각하는 거예요. 그것은 유사 성령을 받은 거예요. 유사 성령. 성령 이야기하면서 자기 천당 가는 것을 주장하는 것과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똑같은 거예요.

여기 29절에 보면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 이 이야기가 복음을 곡해했던 자들이 세례 받으면 부활되는 데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어드밴티지(이익)를 준다는 그 당시 분위기가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 35절부터 계속해서 집중적으로 나오는 내용을 보겠습니다. 47절,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했다고 되어 있죠. 소속이 어딥니까? 소속은 흙입니다, 흙. 소속은 흙이에요. 소속대로 돌아가야 됩니다. 그러면 하늘을 간다는 것은 흙에 속한 자에게 있을 수 없는 거죠.

그래서 ‘예수 믿고 어떤 보상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할 때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한다’에서 이 십자가가 뭐냐 하면 원래 흙에 속한 것을 흙으로 돌리는 작업을 십자가의 능력으로 해주시는 겁니다. 흙에서 난 것이 자꾸 하늘 흉내 내지 말고 흙은 흙으로 돌아가야 돼요.

그런데 흙으로 돌리는 그 작업의 연장선에서, 흙으로 돌리는 작업은 주님이 하기 때문에 나를 죽이는 분이 주님이라면 그 사람은 100% 천국 가는 사람입니다. 뭘 알기 때문에? 내가 가만있으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적극적으로 나를 죽이는 그 일을 말씀에 입각해서 나에게 실시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아는 없어지고 자아 자리에 뭐가 옵니까? 요한복음 5장 24절부터 해서 이 고린도전서 15장이 자리 잡겠죠. 그러면 요한복음 5장 24-28절을 봅시다. 결정적이니까 마지막 힘냅시다. 요한복음 5장 28절, 이게 얼마나 기이한 이야기인지 아예 단서를 붙여요.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그러니까 “애들아, 제발 무덤으로 가줘. 제발!” 내 음성으로 너희들 부를 테니까 가라는 거예요. 그럴 때 음성을 들려줬는데 안 불러주면 어떻게 합니까? 무덤 속으로 갈 수밖에 없는 이것이 내가 고려할 사항이 아니고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아버지께 받은 사명을 나 피조물에게 일방적으로 적용시키는 주의 일의 연장 속에 내가 포함되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사람이에요.

내 안에 말씀이 작동하고 있는 거예요. 말씀이 작동하는데 우리는 자아가 작동해가지고 ‘이 말씀대로 하면 내게 돌아올 콩고물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생각해버리면 그 말씀에 대해서 내가 대적하는 게 되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 사망이 자꾸 뒤에서 부추긴 게 돼요. 죽으면 안 돼. 살아야 돼.

제가 어느 강의에서 얼마 전에 했잖아요. 프로이트가 죽음 충동을 이야기했어요. 죽음 충동을 이야기했는데 죽음 충동이 뭐냐 하면, 나는 기필코 살아남아야 돼. 이 사람이 얼마나 똑똑합니까? 내가 기필코 살아남아야 된다는 것이 우리 보기에는 무슨 충동입니까? 생존 충동처럼 느껴지죠. 그게 아니고 뒤에서 쫓아오니까 이런 생각이 든다는 거예요.

어느 한 순간도 죽음에 안 쫓긴 적이 없는데 프로이트는 누가 죽음을 주는지에 대해서는 모르죠. 몰라요. 다만 ‘내가 어떻게 해서 어떤 결과를 낳는다.’ 거기에만 충실하지, 인간을 초월한 다른 외부의 세력이 인간을 지금 다루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 사람은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없어 그렇죠.

그러니까 요한복음 5장 28절에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는데, 이게 참 놓치기 쉬워요. 이걸 이야기하고 싶어요. 선한 일이 뭐냐 하면 예수님과 함께 움직였던 것이 선한 일이고 그것이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아버지의 언약이에요.

언약이 있는 사람은 지금 죽기 전에 이 말에 동의를 해요. 이 말에 동의한다고요. 왜? 예수님이 구주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아버지의 뜻대로 한 것에 대해서 오케이, 동의가 돼요. 동의가 된다는 말은 자기 미래의 걱정을 본인이 이제는 더 이상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럼 주의 일에 의하면 하나님 일이 자기에게 어떻게 작용합니까? 제발 좀 죽어줘. 무덤에 좀 가줘. 내가 죽게 된 것에 대해 무한한 영광과 감사를 드리죠. ‘생일 축하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질이 아니고, 장례식에 가야 우리의 본질이 드러나죠. 모든 인간이 이와 같으니까요. 나에게 죽는 날이 있다는 것은, 죽기 전에 살아있을 때부터 끝까지 주께서 말씀대로 착착 진행 중이라는 거기에 대한 신뢰도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기를 바라고 있는 거예요.

자, 이 시간 끝으로 고린도전서 15장을 봅시다. 주께서 이렇게 일을 한다면 우리의 육은? 우리를 왜 만들어놨는가? 어차피 살아있으면서 천국 만드는 능력이 왜 없느냐? 살아있을 때 천국을 만들고자 했어요. 그게 뭡니까? 구약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살아있는 인간을 천국 만드니까 이게 개판되어버렸어요. 안 되는 거예요. 잠시 되는 듯했지만 오래 안 가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그 원인을 보니까 인간 안에 사망이라는 원수가 들어있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누가 그 원수의 세력을 뚫고 나오면 그다음부터는 이제 사망과 상관없이 마음대로 자기 백성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만드신 겁니다. 이게 원천이에요. 모의고사 말고 본고사가 되는 거예요.

따라서 50절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 이게 고린도전서 2장 2절,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예수님의 육과 우리의 육이 이제는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질이 달라졌다. 질이 다른 거예요.

주께서 하는 것은 천국과 연속성을 갖고 있지만, 아담에 속한 자는 흙에서 난 인생으로 끝입니다. 끝났어요. 끝나고 난 뒤에 예수님의 영이 온 사람은 이미 살아있을 때부터 죽은 자도 살린 영이 너희 속에 임하면 네가 있는 육신은 그냥 혈과 육에 불과하기 때문에 고물 처리가 돼요. “이것은 고물이니까 내가 안 가져간다.” “그러면 뭘 주시렵니까?”

주님이 부활할 때 예수님의 부활이 마지막 아담이거든요. “전에 옛 아담에 속해서 육체를 고스란히 DNA 받은 것처럼 이제는 새로운 예수님의 부활체로 너희가 변형될 거야. 내가 그렇게 할 거야.” “어떻게 그걸 확신할 수 있습니까? 뭐 담보가 있어야지. 담보를 제시해보세요.” “내가 죽었다가 살아났잖아.” “그건 안 믿는데요?” “그럼 내가 죽은 것을 믿느냐?” “예수님 죽은 것은 일반인 죽은 것과 별다를 것 없죠. 사형 당했으니까.” “그렇다면 너는 나의 죽음,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한다는 그 말씀에 너는 탈락이다.”

탈락하고 끝내면 안 되는데…. “탈락이다.” 할 때 “그 ‘탈락’이라는 요소가 내가 지니고 있는 썩을 혈과 육의 한계입니다.”를 말씀을 통해 영접하면 바로 그것이 천국 백성입니다. 내 혈과 육이 바로 그런 한계, 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걸 들추어내는 것이 성령의 역할입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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