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3강 평가자의 확장

아빠와 함께 2025. 8. 2. 07:14

2025 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3강-고린도전서: 평가자의 확장
(강의:이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 사도행전 19장을 언급하면서 악령이 등장했지요. 19장 15절에,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이거는 평가 주체에서 평가 주체자가 확장되었다. ‘하나님+예수님’께서 평가하는 걸로 해서 말씀이 주어졌는데 여기에 누가 끼어드느냐 하면 악령, 사탄이죠. 악귀가 평가기준 속에 포함이 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어떤 사람이냐? 그 사람은 성령 받았다, 라고 평가 주체자에 악령이 합세하고 말았어요.

악령이 합세했다는 말은 평가기준에서 빠져야 할 자가 있다는 거예요. 그게 누구냐 하면 바로 자아와 그리고 타인/타자, 남이죠. 자아와 타자와 내 말씀에 대한 행위에 대한 평가기준에서 이 둘은 여기서 빠지는 겁니다. 평가 주체가 확장되면서 악령이 여기서 들어가게 되는 거죠. 그게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처음 시작될 때에 주님께서 인간을 판단하고 평가하고 인간을 심판하는 목적이 아닙니다. 뭐냐 하면 악귀, 악마를 노리고 영원한 구렁텅이에 보내기 위해서 말씀을 주신 거예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죄가 유발된 그 최초의 원인자로서 아담은 여자한테 미뤘고, 여자는 누굴 겨냥하느냐 하면, 저 뱀이라고 최초의 유발자를 지목을 했어요. 그러면 아담과 여자, 그러니까 하와와 남자는 중도에 최초의 죄의 책임자로서는 빠져버리고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최종적으로 토너먼트 최종 결승전이 돼버린 겁니다.

그중에 있는 남자와 여자라 하는 것은 둘의 튼 싸움에 말려드는, 그러니까 고급스런 용어로 쓰면 시다바리, 거기에 일 도와주는 예수님과 마귀 각자 최종적으로 한 판 붙는데 거기에 동원된 일꾼, 그런 역할밖에 하질 않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5장 3절에 이번 낮 설교에서 홍해 안에서 기다리는 자가 있었어요. 인간에게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일이 벌어져야 나타나는 분, 그게 뭐냐 하면 여호와는 용사다. 격전지에서 이미 기다리고 있었어요. 용사는 전장에서 대장이죠. 전장의 대장이 홍해를 전쟁터로 삼아서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고 애굽의 군대가 거기서 몰살합니다.

그러면 주일날 설교한 것처럼 애굽 사람들의 특징은 내일이 없어요. 거기에 비해서 이스라엘은 과거가 없습니다. 본격적인 주님의 마중 나온 미래의 시작이 되는 것. 이스라엘에 과거가 없다는 말은 이제부터 인수인계를 하는 거예요. 포로 교환할 때 인수인계.

마귀한테 잡혔던 이스라엘을 주님이 가서 이제부터 내가 용사니까 여호와가 용사니까 너희들은 이제는 더 이상 세상의 말 들을 필요 없이 내 말 듣고 내가 하는 일을 들춰내고 그걸 실시하는 그러한 동원된 일꾼으로써 이스라엘을 자기의 전리품으로 가져오는 것,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그들에서 선물을 주는 것 이러한 에베소서 4장 8절에 나오는 이 말씀이 하나의 전쟁터로 전환된 겁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잡아당긴 거예요.

그 한 가지 예가 욥기 1장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욥을 미끼로 사용해서 하나님 옆에 있는 최고의 천사의 자리에 앉았던 그 사탄에 대해서 내가 왜 너를 영원한 지옥 구덩이에 가둬야 될 그 정당성을 지상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욥이라는 한 남자를 미끼로 사용해서 빌미로 사용해서 시비를 거는 거예요. “저 욥 봤나? 믿음 너무 좋아.”

그렇게 할 때 사탄이 가만있으면 되는데 괜히 끼어들어요, 그 판에. 미끼에 걸려든 겁니다. “욥이 잘 먹고 잘 살고 건강하고 자식들 잘 되니까 하나님 믿는 거지 그렇게 믿음이 좋은 게 아닙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 제가 이 땅에 대해서는 환합니다. 인간들이 어떤 종류의 존재인지를 나는 이미 바싹하니 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인간들에 어떤 기대를 거시면 안 됩니다. 인간은 내가 알아요.” 왜? 모든 인간이 자기 손아귀에 있으니까요. “오케이. 해봐라.” “내기합시다.” 내기했지요.

그 내기의 담보가 어마어마합니다. 니가 지면 지옥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 악마의 잔당들, 악마를 추종하는 자, 일찍 감치 누가 옆에서 빼내주지 않고 가던 길로 그냥 가는 사람, 살던 대로 그냥 사는 사람, 이미 선악체계 안에서 그것으로 자기의 인생관으로 확정한 사람, 그런 사람들은 마귀가 가는 쪽으로 줄줄이 따라가면 그게 영원한 지옥 불에 갇히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이렇게 돼요. ‘인간은 들러리다.’ 이걸 어느 철학, 어느 과학에서 말하질 않아요. 인간은 들러리다. 이거는 성경에 여호와가 용사라는 그러한 주님의 관점에서 볼 때 가능한 거고, 세상의 과학과 철학과 놀랍게도 신학마저 인간은 들러리가 아니고 인간을 뭐로 보느냐 하면 관찰자다.

나에 대한 행동 심사를 누가 한다? 내가 한다. 왜? 난 이미 자아가 있기 때문에. 선악적으로 옳고 그름을 알기 때문에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이 이미 보장돼 있고 확고하기 때문에 이 선과 악의 지식에 의해서 내가 원하는 자아상은 내가 알아서 개척하고 그리고 그걸 증진시키고 강화시킨다. ‘그냥 밀어붙여!’ 어디로? 과학과 철학과 신학으로.

관찰해서 얻은 것에 가치론을 집어넣어요. 이것은 선한 것이고, 악한 것으로 구분해서 선한 것만 끌어 모으면 그것이 인간의 신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다. 이걸 지금 어린이집부터 시작해서 어린이집,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 사회의 모든 교육에서 이것 가르칩니다. 티비 틀면 나오는 게 이거에요. 인간은 나는 나의 관찰자다. 내가 심사한다.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심사한다, 건들지 마.’ 이 논리거든요. 모든 심리학도 마찬가지고요.

사도행전 19장 15절에서 악마가 관찰자의 관점에서 확장해서 심사위원 추가되니까 여기서 누가 심사위원에서 빠지느냐 하면 나와 타자가 심사위원에서 빠지는 겁니다. 과연 빠졌는지 안 빠졌는지 시험 한 번 쳐볼까요?

고린도전서 6장 9절, 제가 하겠습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여기 리스트가 쭉 나와 있지요. 이 리스트에서 우상 숭배, 간음, 탐색, 남색, 도적질이라고 그 심사를 누가 합니까? 이 성경을 우리가 보게 되면 심사를 누가 하죠? 내가 하죠. 아니면 남들이 여기에 대해서 나보고 이런 짓했다고 평하더라. 걸려든 겁니다, 걸려든 겁니다. 성경을 백독하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자기가 심사위원에서 빠져야 되는데 본인이 자기 인생을 심사하고 있어요.

그래놓고 나온 결과가 뭐냐? ‘나 천국 가기 굴렀어. 나 끝났어. 하늘나라 유업은 이젠 끝난 거야. 안 돼.’ 여기 중간에 뭐 나왔어요? 10절에 술 취하는 자. 여기서 또 지가 분류를 해요. 술 한 잔은 되느냐? 그러면 자기가 경찰서에서 사용하는 음주측정기로 측정해서 알코올 농도가 0.2%냐, 0.3%냐? 술 취하지 않은 거면 천국 가고 술 취하면 이건 지옥 가고. 지금 나만 흥분하고 있는 거예요?

또 다시 예를 들겠습니다. 고린도전서 백독하니 무슨 소용 있습니까? 계속 자기가 자기를 평가하는 관찰자로 작용하는데. 하나님께선 악령을 집어넣었다고요. 예수도 알고 그다음에 바울도 안다는 그 심사의 심사위원은 마귀에요, 마귀. 인간이 아니고. 심사위원을 확장하고 거기서 인간은 빠지는 거예요. ‘이건 너의 싸움이 아닌데? 끼어들지 마. 이건 예수 내가 처리할 거야. 네가 마귀를 잡을 수 있어? 못 잡아.’

또 하나 예를 들면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십계명입니다. ①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②형상 만들지 말라. 우상 숭배하지 말라. ③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그다음에 ④안식일을 지켜라. ⑤네 부모를 공경하라. ⑥살인하지 말라. ⑦간음하지 말라. ⑧도적질하지 말라. ⑨거짓말하지 말라. ⑩네 이웃의 집을 탐하지 말라.

자, 제가 문제 낼 테니 알아 맞춰보세요. 우상 섬기는 나, 그다음에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나, 안식일을 어긴 나, 도적질한 나, 간음한 나, 그리고 거짓 증거한 나, 여러 가지 탐내는 자가 있다면 문제는 이거에요. 이 나가 동일인물입니까, 각기 다른 사람입니까? 10초 드리겠습니다. 첫째, 같은 나다. 두 번째, 다른 나다. 몇 번이겠습니까? 정답은 ‘다른 나’입니다.

왜냐? 나는 자아는 복합요소기 때문에. 자아가 복합요소가 되는 것은 말씀이 주어질 때 떠돌아다니는 자아들이 말씀 등장하면 마귀가 뒤에서 물어, 물어 해서 조각난 자아의 파편들이 말씀 있는 곳에 선악의 사고방식으로 달려들어서 나로 하여금 내가 추구되는 하나의 과정으로 말씀을 이용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교회에서 성경공부 아닙니까, 큐티 아닙니까. 동일한 자아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동일한 자아로 생각하니까 무슨 문제가 되느냐 하면 부활할 때 나와 부활 후의 나가 동일성이 있느냐? 이 문제는 초대교회부터 신학자들에게 골치 아팠던 문제에요. 손가락 하나 날아갔을 때 부활할 때 손가락 붙이고 부활하느냐, 그 문제. 남자라고 했을 때 남자로 부활하느냐, 그 문제. 그런 문제가 초대교회를 아주 골치 아프게 만들었어요.

이 모든 문제를 지금껏 신학계에서 손을 놓고 있는 이유가, 첫 번째는, 내가 나를 평가할 수 있는 평가자에서 탈락했다는 사실을 모르고요. 두 번째는, 말씀 평가에 대해서 주님 쪽에서의 평가단과 악마의 평가단과의 대치 속에서 자아의 평가를 빠져야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내 운명은 내가 알아서 한다, 라고 할 때 계속해서 낄 자리도 모르고 그렇게 끼어드는 거예요.

말씀을 하나님께서 열 개나 계명에다가 공중에다 뿌린 것은 이 공중 자체가 복합자아로 되어, 이걸 제가 부사로 쓰겠어요. ‘뭉실뭉실’ 이건 하늘에 있는 구름들이 존재하는 방식이죠. 자아₁, 자아₂가 여기에 뭉실뭉실, 또는 몽실몽실 구름처럼 떠돌아다닙니다. 떠돌아다니다가 여기에 무슨 사건 하나 터지면 자아들이 그 떠돌아다니는 나들이 여기 모이게 돼요.

평소에 그냥 내가 있던 내 일에 열중하다가 윤석열 찍을 것인가, 이재명 찍을 것인가, 하면 여기에 매스컴이 집중해서 갑자기 좋은 친구 사이가 원수지간 되고 난리도 아닙니다. 이 자아가 갑자기 어디서 출현한 거예요? 자아라는 것은 어떤 사건을 중심으로 말씀을 중심으로 간헐적으로 출몰하는 겁니다. 자기가 단독 자아는 없어요.

나는 별인 줄 알았는데 나는 반딧불이었어요. 반딧불의 특징이 뭡니까? 없는데서 출몰하는 거잖아요. 어두운데서 출몰하는 거죠. 별은 저 하늘에 반짝이고 빛나고 있잖아요. 나는 내가 별인 줄 알았어요. <나는 반딧불>(황가람)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난 눈부시니까
하늘에서 떨어진 별인 줄 알았어요
소원을 들어주는 작은 별
몰랐어요 난 내가 개똥벌레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나는 빛날 테니까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난 눈부시니까
한참 동안 찾았던 내 손톱
하늘로 올라가 초승달 돼 버렸지
주워 담을 수도 없게 너무 멀리 갔죠
누가 저기 걸어놨어 누가 저기 걸어놨어
우주에서 무주로 날아온
밤하늘의 별들이 반딧불이 돼 버렸지
내가 널 만난 것처럼 마치 약속한 것처럼
나는 다시 태어났지 나는 다시 태어났지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난 눈부시니까
하늘에서 떨어진 별인 줄 알았어요
소원을 들어주는 작은 별
몰랐어요 난 내가 개똥벌레란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나는 빛날 테니까

반딧불은 어떤 특정 시대에 특정 분을 만나서 우연적 존재로 신체를 가지고 나타나다가 나중에 구십 넘으면 요양병원에서 그냥 사라지고 부조금 얼마 받았는지 그것 계산하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우연적 존재입니다. 주께서 그 우연적 존재로 처리하는 이유는, 필연적 존재가 자아로서 이미 따로 등장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분이 누구냐?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 인정하는 유일하게 인간, 두 번째 인간, 두 번째 아담, 마지막 아담, 누구죠?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아담이고 우리는 육체적인 아담의 몸의 자손들이라면 천국 백성은 두 번째 예수님의 부활한 몸과 동일성에서 번성된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의 집단, 그게 바로 천국 백성입니다.

방금 제가 아담, 두 번째 아담 이렇게 고린도전서, 로마서 이야기했지만 골로새서에서는 이걸 이렇게 이야기해요. 형상, 첫 번째 형상 아니고 진짜 형상은 숨어있는 형상이 가짜 형상 뒤에서 활동하다가 이제는 가짜 형상이 마귀 형상으로 드러난 이상 그걸 제치고 진짜 보이지 않는 형상이 진짜 세상의 모든 것에 하나님의 계획에 유일하게 인정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골로새서 1장에서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우리가 필요한 게 뭐냐 하면 자아가 흩뿌려져 있으니까 지금 내가 어느 자아가 돌아다니는지 나는 몰라요. 어떤 사건 하나 일어나면 또 신경 확 쓴다고요. 지금 삼성 라이온즈가 지난 번엔 2등하다가 거의 바닥을 헤매거든요. 그걸 길 가는 아주머니 보고, “요새 삼성 라이온즈가 성적이 좋지 않습니다.” “그게 뭔데요?” 본인 자아는 그것에 관심이 없어요. 그거는 당신 자아가 관심이 있지 내 자아는 관심이 없어요. 그러니까 각자가 흩뿌려진 자아에요.

그런데 아무 관심 없는 아주머니께서 자기가 며느리를 맞이하는데 삼성구단의 이사장이라면 그다음부턴 삼성구단을 연구해야 돼. 프로야구의 구조가 어떻게 돼 있는지, 중요한 것은 한 달 수입이 얼만지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연구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거기에 맞춰야 혼사가 성공리에 성사되기 때문에. 어떤 계기가 오게 되면 관심 없던 자아가 관심을 쏟게 되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악마는 이 세상을 자신의 자아지요. 그것을 흩뿌려서 기존의 존재 세계에 일을 벌여놓고 그것으로 완전히 이 세상을 굳히기에 들어갔지요. 거기에 뭐가 들어오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 들어옵니다. 예수님은 로마서 8장 3절에 보면,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제가 질문을 하는데 이 질문은 어려워서 15초 드립니다. 15초짜리 질문 들어갑니다.

‘불신자가 예수님을 안 믿는 이유는?’ 일단 제가 이야기할게요. 불신자가 예수님을 안 믿는 이유는 예수님이 거짓말쟁이기 때문에. 왜냐하면 재림한다는 것도 불확실하고, 분명히 감람산에 내려온다는 것도 그거하고, 그리고 부활했다는 것도 모호하고. 더구나 지금 성령이 왔다는 그것도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하지 이게 보편적인 현상으로 믿기 곤란하고. 불신자가 예수님을 안 믿는 이유는 예수님이 아무리 봐도 믿을만한 구라만 떠는 그러한 과대망상증 같은 그런 거짓말쟁이기 때문에 불신자는 예수님께서 등 돌리고 안 믿어요.

그러면 문제 나갑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빨리 답변해요. 크게 이야기해보세요. (신자니까) 땡. 예수님을 신자가 믿는 이유는, 예수님이 거짓말쟁이기 때문에 그래요. 똑같은 이유인데 예수님의 거짓말로 내 거짓이 폭로되게 하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똑같은 예수님을 죄 있는 육신으로 왔는데 그 죄 있는 육신의 몸과 자기가 캐내지 못하고 밝히지 못한 자기의 헛것, 그 죄인 된 것을 주님께서 저렇게 죄 있는 육신으로 오지 않았다면 나는 내 자신에 대해서 도대체 이제까지 안 적이 전혀 없었던 것을 비로소 나의 죄를 밝혀주는 분으로 이제는 더 이상 헤어질 수 없어요.

지난 시간에 한 걸 잠깐 다시 해보겠습니다. 사회구성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 되는데 인간의 만남에서 관계가 어떻게 되는가? 행위자, ‘게 섰거라. 당신 좀 봅시다.’ 타인, 생산물, 그다음에 생산물은 어디에 도달하지 못한다? 진실에 도달하지 못한다. 이렇게 해서 모든 인간은 그냥 종잡을 수 없다 했어요.

평생을 살아도 구십, 백세를 살아도 인간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인 이유는 이 내부 욕망의 순환이 계속 아무리 바뀌어도 시간 따라 가도 끊임없이 내가 아는 것은 손쉽게 식상해서 그거는 조금 전까진 몰랐는데 이미 알아버린 이상은 나는 너에게, 또는 너를 통해서 내가 무엇을 더 알아야 하는지 네가 알려줘.

사람들이 평소에 살아가는 모든 인간 마음의 내부에 이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안다는 것. 안다는 것이 뭐냐 하면 죄고, 안다는 것이 이게 창세기 2장 17절에 의하면, 또는 3장에 의하면 추잡스러운 거예요. 아니까 내가 말을 하는데, 내가 말한다는 이 자체가 엉터리입니다. 나를 통해서 말이 나오지요. 말이 나를 갖고 노는 사회에요. 왜냐하면 이 사회에서는 이미 확정된 개념과 그 의미들이 날아다니니까 조각난 자아가 아무거나 건져서 아무거나 자기를 표현하고 싶은 거예요.

그걸 문해력이라고 합니다. 어떤 문장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능력. 많은 어휘를 사용하고 많이 알게 되면 유식하게 보이는 이유가 그게 세밀해져서 그래요. 세밀해진 거예요, 분류가. 분류를 하게 되면 분류된 하나하나에 뭐가 붙어요? 관찰자가 붙지요. 그 관찰자를 뭐라 했습니까? 자아라 했지요. 자아가 붙어서 전부 다 한 마디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거기서는.

너는 나를 통해서 무엇을 몰고 있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네가 나에게 알려달라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사람 만나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부부생활을 하고 있는 겁니다. 계속해서. “당신은 내가 힘든 걸 모르느냐?” “힘든 게 뭔데?” “그건 당신이 알아내야지.” 나도 나를 모르는 입장에서. “부부는 한 몸이잖아요. 한 몸의 입장에서 나 아픈 걸 당신이 알아내.” “뭔데? 말을 해.” 말을 하게 되면 이게 진실한 게 아니에요.

사회는 어떻게 구성돼 있는지를 보겠습니다. 아까 했지만 다시 정돈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담론이라 하는 것은 여론, 어떤 누구와의 관계, 대화, 환경 이런 걸 담론이라 합니다. 주인담론, 어떤 관계냐? S₁ → S₂ → a, 그다음에 들어가고(↑) 접근 차단되고(↛) $. 이 자리 S₁(실행자), S₂(남 붙들고 ‘어이’ 부르는 타인), a(타인을 통해서 내가 얻고자하는 것), 그다음에 뭘 얻고자하느냐? 이게 진실인데 진실에 대해서 영 성이 안 차는 거예요.
S₁ → S₂
↑ ↓
$ ↚ a

그다음에 대학담론, 또는 지식담론. 꼭 대학에만 나오는 게 아니에요. 모든 가르치는 자, 교회도 마찬가지고요.
S₂ → a
↑ ↓
S₁ ↚ $

그다음에 히스테리담론. 발작하는 것. 걸핏하면 화내는 것, 이런 거죠. 분노 터트리는 것.
$ → S₁
↑ ↓
a ↚ S₂

a라 하는 것은 생산, 분열된 $, 이거는 항상 진리를 배고파하지만 접근이 안 되는 나 자신의 모습이죠. 깨진 것. 끝으로 하나가 분석가담론. 히스테리는 환자가 의사한테 요구한다면 분석가담론은 의사가 환자에게 다가가는 거예요. 나 뭐 안다. 그다음에 분열된 자야 나한테 오라. 내가 당신을 주인으로 만들어주겠다. 그런데 주인은 아니고 뭐냐 하면 일반사람으로 이렇게 되는 거예요.
a → $
↑ ↓
S₂ ↚ S₁

지금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 자리에요. 이 자리, 이런 자리가 무슨 자리라 했습니까? 아까 행위자, 타자, 생산, 그다음에 진실. 주님은 그 진실의 자리를 없애버린 거예요. 행위자, 그다음에 타자, 그다음에 뭘 기대하는 거예요. 생산. 예상하고 기대하고 고대하는 희망, 목표, 생산. 그다음에 뭘 원하느냐? 진실.

정신분석학에선 인간은 진실을 접근하지 못한다 하는데 주님은 이 진실은 아예 없고 이 세상은 거짓뿐인. 진실은 없는데 있다고 치니까 모든 인간이 정신병자가 돼버린 거예요. 문제는 굉장히 간단한 문제에요. 이미 선악과 따먹고 정녕 죽으리라 했으면 이 세상은 거짓만 유통되는 겁니다. 본인이 거짓적인 존재가 싫어요. 싫으니까 항의를 누구한테 하느냐? 신에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 조져놨다는 거예요. 이제 문제 나가야 되죠. 여러분들이 이 문제에 익숙해져야 됩니다. 적어보겠습니다.

조졌다는 말은 나쁜 말이니까 ‘하나님께서 내 인생은 망쳐놓았다.’ 문제 나갑니다. 이게 불신자의 고백입니까, 신자의 고백입니까? 이건 둘 다 해당돼요. 하나님께서 내 인생 조져놨잖아, 분노하면 불신자.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천사 같이 구원해놨잖아요’ 기쁨, 이건 뭡니까? 신자의 고백이죠. 하나님이 내 인생을 조져놓지 않았으면 나는 구원이 없었습니다, 이런 고백이죠. 그러니까 언어라는 기표라는 자체에서 어떤 아무런 능력이 없고, 그 말씀을 성령께서 주께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이미 우리 운명은 확정되는 겁니다.

다시 말씀을 이야기하면 이 거짓된 것으로 인간은 진짜 보물인줄 알고 그것 차지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 거예요. 요한복음 14장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나는 길이요, 나는 진리요, 나는 생명이다, 라는 말을 제자들부터 모든 인간이 이 말을 뭐로 봤습니까? 구라로 본 거예요. 모든 인간이 자기를 믿지 않는 걸 알고 죄 있는 육신으로 오셔서 이 말을 던질 때 비로소 모든 인간은 안에 뭐가 있었다? 인간 말고 인간을 조종하는 말씀이 처음 등장했을 때 하나의 처벌 대상되는 악마가 거기에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어서 가담함으로서 악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저주받는 것은 빼도 박고 못하게 되었어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여기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놀고 있네, 그따위 이야기 나도 할 수 있겠다, 이런 사람이 있고. 베드로 같고 제자들은, ‘주님 죄송합니다. 일단 제 몸은 살려야 되겠습니다.’ 주님이 무슨 이야기를 했든 내 장모를 병에서 낫게 했든 물에 빠진 나를 건졌든 변화산에서 주님께서 해 같이 빛났든 그때는 그때고 지금 내 사정은 인간 세상의 권력에서 나는 이겨낼 자신이 전혀 없습니다. 주님, 제가 배신하는 걸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베드로는 도망쳤지요.

그런데 이 사실을 누가 아느냐 하면 주님이 알았어요. 내가 모든 걸 버릴지언정 저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했을 때에 주님께서 베드로를 문제 삼은 게 아니에요. 지금 사탄이 수제자인 너를 자기편으로 끌어당기기 위해서 용을 쓰는데 그 악마에게 사로잡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내가 기도했다. 따라서 너의 기도, 너의 믿음으로 네가 구원받는 건 아니다. 내 기도와 내 믿음으로 너는 내 관리 하에 구원받는 거다. 이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너는 네 자아에 대해서 절망하는 기회를 가져야 된다. 너는 닭보다도 못해. 닭 세 번 울 거야.

그때 그 순간, 그 타이밍에 바로 그 순간이 뭐냐?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이 되겠습니다. 나는 무능력한 자라는 사실을. 무능한 자가 말씀을 펴놓고 하늘나라 유업을 받기 위해서 나는 이런 짓도 안 하고, 이런 짓도 안 하고, 이런 짓도 안 하겠다는 그것이 흠뻑 악마한테 속아 넘어간 짓이에요. 이걸 안 하면 나는 진리를 획득하고 그 진리가 나를 구원한다고요? 인간에게는 진리가 감당되지 않습니다. 감당할 필요도 없고.

주께선 우리의 믿음을 일체 받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을 받지 않습니다. 받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 주께서 우리를 고맙게도 죽여주시는 겁니다. 뭐로? 말씀으로 죽여주셔요. 말씀으로 죽이게 되면 흙에 속한 우리는 흙과 함께 운명을 다 끝내고 그다음부터는 주님의 십자가, 다 이루었던 주님의 죽음에서 어떤 능력이 나오는데 말씀과 동반해서 그 능력이 오게 되면 예수님의 죽음의 능력으로 예수님의 부활에 합류가 되는 그러한 능력을 우리에게 부어주십니다.

또 이 말하면 예수님 구라…. ‘우리가 확인이 돼야 믿지 확인되지 않은 구호만 남발하면 누가 믿겠어?’ 주님께선 지금 아무도 안 믿는 이야기를 하셔요. 왜? 모두 다 내가 납득되는 진리 찾기, 진리 확보에 눈이 벌겋게 사는 그 세계에서 주님께서 그 자체를 전적으로 다른 체제로 바꾸기 위해서는 주님은 거짓으로 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 땅에서.

이 말은 주님이 거짓됐다는 말이 아니고 우리는 나 자신 빼놓고 모조리 다 내 판단에 의해서 유보될 문제라는 그 사고방식이 주님 보시기에는 죄에 해당되는 겁니다. 죄 짓지 않으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죄만 나오도록 기능화시키는 그 작업이 예수님의 말씀에 담겨있는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그것이 고린도전서 전체에 다 깔려있어요.

자, 그렇다면 이 문제를 가지고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이제 아시겠지요. 진실은 없습니다. 거짓밖에 없습니다. 그 거짓이 뭐라 합니까? 내 중심으로 내가 관찰자로 내가 평해서 나로 하여금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천국에 이르겠다는 그러한 탐욕, 그게 바로 뒤에서 마귀가 부추겼지요.

간음 문제에요. 간음했다. 이거는 고린도전서 15장 봅시다. 이 문제가 여러분들에게 그렇게 어려운 문제는 아닌 걸 알 수 있겠습니다. 15장 50절,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지요. 사도 바울의 편지 보세요. 다양했던 여러 가지 죄 항목에 고린도전서 15장 50절에서는 뭐로 딱 굳혀졌습니까? ‘혈과 육’으로 굳혀졌지요.

이걸 고린도전서 2장에선 딱 하나로 이야기해요. 뭐냐 하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 하면서 요한복음 3장의 말씀처럼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을 나눠버려요. 나누는 이유가 나눔을 당하는 인간에게 묻는 게 아니에요. 이거는 외부에서 성령이 오게 되면 은혜가 오게 되면 반드시 그렇게 육의 세계와 영의 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티 나게 돼 있다는 겁니다. 이 또한 우리가 감당할 진리 문제가 아니라고요. 진리에 대해서 손을 떼세요. 손을 떼야 돼요, 우리는. ‘낄끼빠빠’라 하죠.

주님 하는 일에 우리가 낄 자리가 아닙니다. 마귀는 자꾸 끼어들라 하고 천국 가는 것은 네 손에 달렸다고 자꾸 끼어들고. 주님께선 좀 빠지라고 이야기하고. 요한복음 3장에 의하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는 거예요.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못 간다고 아예 선언을 해버렸지요.

그렇다면 이 혈과 육에 대해서 뭐가 오느냐 하면 아까 죄의 리스트, 십계명. 십계명, 죄의 리스트뿐이겠습니까? 성경 전체가 다 그런 거예요. 마태복음 5장이요. 마음속으로 간음한 자는 뭐다? 이미 간음을 범했지요. 이걸 오자성어로 이야기하면 모든 인간은 ‘간음대기자’에요. 문제는 대기만 하는 게 아니고 언젠가는 이게 폭발한다는 거예요. 산상설교에 이래요. 오른팔이 범죄하거든 그다음에 뭡니까? 잘라버려라. 그래서 항상 휴대할 게 뭐냐 하면 맥가이버칼, 이런 걸 항상 휴대해야 되고. 펜치 같은 것 준비해서 오른 눈이 범죄하면 빼버려라.

주님께서 이렇게 극한으로 몰아넣는 이유는, 인간은 간음도 마찬가지고 육에 대해서 육의 신비주의로 벗어나지 못하고 벽에서 되돌아옵니다. 육에서 어떻게 나를 처단하고 육에서 어떻게 나의 욕심을 끊어내면 그 깨끗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그러면 간음을 이미 한 사람, 그리고 간음을 안 한 사람 차이점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차이점이 없어요.

차이점이 없는 이유가, 항상 간음이다, 선 넘었다, 선 안 넘었다는 평가하는 평가자로 누가 계속 살아 있어요? 이 자아가 계속 살아 있어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추잡하다. 간음하면 안 돼, 또는 간음하면 나쁜 거야, 간음 안 했으니까 잘한 거야, 라고 간음이란 단어를 자기가 생각하는 선악체제와 연결시키는 그 자체가 주님 보시기에 추잡고 더러운 짓이에요. 죄를 죄라고 하니까 더러운 짓이에요. 아직도 나의 평가를 내가 지니고 있다는 것이 추잡고 더러운 짓이에요.

왜냐하면 간음은 나쁘다, 이게 아까 행위자, 타인, 그다음에 생산물, 진리, 아직도 이 진리에 대해서 기대를 걸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신부가 간음을 했어요. 자기가 그 죄책을 알고 남수단에 가서 어려운 고아들 돕고 자기의 의료기술로 수만 명을 살렸습니다. 문제 나갑니다.

수만 명의 병든 아이들 살린 것과 자기가 옛날에 간음한 것이 교환 가능합니까? 그게 상쇄가 될까요, 안 될까요? 당연히 안 되지요. 누가 박혀있기 때문에? 평가자, 내가 나를 평가해서 내 힘으로, 믿는다는 힘, 성령 받았다는 힘, 다 내 힘이에요. 축적된 나의 힘으로 하늘나라를 들어가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 십자가 지신 것은, 이제 십자가 나옵니다. 십자가란 딴 게 아니고 모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 그걸 어디다 짊어지고 있습니까? 자아가 짊어지고 있지요. 그 자아를 죽여 버리는 거예요. 어떻게? 물귀신 작전, 함께 죽어버려요. 껴안고 죽어버려요. 진주에 가면 뭐 있지요? 논개. 몸 바쳐서, 몸 바쳐서, 노래 나오지요. 함께 껴안고 죽어버립니다.

그래서 어떤 강의인지 기억 안 나는데 이야기했어요. 여러분, 십자가가 대신 죽음이 맞습니까, 아니면 함께 죽는 것이 맞느냐고 질문한 적이 있어요. 출발은 대신 죽음이죠. 마지막은 뭡니까? 대신 죽었다고 헤헤거리면서 남아 있으면 안 되지요. 대신 죽으심을 가지고 함께 죽으심으로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겁니다. 물냉면 시켰거든 어떻게 먹어야 돼요? 물까지 깔끔하게 다 마셔줘야 냉면 먹었다 할 수 있잖아요.

만약에 주님이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어디에 계속 머물러 있습니까? 육의 끝은 어디인가? 육의 끝은 십자가에요. 그러나 십자가를 인정 안 하잖아요. 그럼 육의 끝은 어딥니까? 나의 육의 신비는 어디까지 있느냐? 그것 본인이 본인을 연구하는 거예요. 끝까지. 육의 신비는. 육은 쓰레기인데 무슨 신비가 있어요. 육의 신비는 끝났어요. 흙이니까 어디로 돌아가야 됩니까? 흙으로 돌아간단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이 못하는 것을 주님이 알아서 흙으로 돌아가게 해주시니 도대체 이 친절하고 고마운 주님을 몇 분을 쉬고 또 다시 생각해야 되겠지요.

다시 정리한다면 모든 문제는 이거에요. 성경말씀에 대해서 우리가 그걸 평가자로 손을 떼면 그만인데 떼면 거룩이에요. 이걸 주제넘게 성경 해석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그 행위 자체가 주님이 대신할 일을 자기가 한다는 자체가 추잡고 더러운 짓이란 말이죠. 이미 네 인생은 네 것이 아닌데 아직까지 자기 것이라고 고집부리면서 계속 관여하느냐? 흥분을 멈추시고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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