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2강 타인의 위치

아빠와 함께 2025. 8. 2. 07:13

2025 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2강-고린도전서: 타인의 위치
(강의:이근호 목사)


‘설명되어지는 것과 그렇게 된 것은 별개의 문제다.’ 설명하는 것과 그래서 그렇게 세상이 되어가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그리고 많은 인간들은 어떤 진리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자 해요. 이건 이렇다, 저건 저렇다,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나 설명을 하게 되면 여기서 반드시 이게 정의가 나와요. 의가 나온다고요.

그러면 의가 나온다면 의가 나오도록 실제로 세상을 그렇게 운영해 나가는 것, 미지의 것도 계속 만들고 생산하고 운영해 나가는 것은 이 정의를 뭐로 보느냐 하면 죄의 궁극적 모습으로 보는 거예요. 의라는 게, 정의롭다는 게. 정의를 외친다면 이건 백 프로 죄가 드디어 자기의 마지막 정체를 들춰낼 때 정의를 외치게 돼 있어요, 의를 외치게 돼 있어요.

그러면 성경은 뭘 이야기하느냐?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사랑은 예수님에 의해서만 사랑과 의가 이게 일치가 되지 그 외는 일치가 안 되는 겁니다. 예수님한테만 사랑과 의가 일치가 돼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천국은 지옥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래요. 천국은 없어요. 뭐만 있느냐? 지옥이 있는데, 보통 뭐라 합니까? 싸우다가 ‘지옥에나 가라’ 그러잖아요.

지옥은 갈 것도 없어요. 이 세상 자체가 지옥이기 때문에 어딜 가는 게 아니에요. 지옥은 이미 개시되었기 때문에 시작되었기 때문에 지옥이 충분하게 지옥다워야 돼요. 왜냐하면 이 지옥의 특징은 선악체계의 구현입니다. 다시 말해서 윤리, 도덕의 구현이에요. 윤리, 도덕에서 의가 나오기 때문에. 자기 의가. “너 어느 정도 분량의 정의를 갖고 있어?” “나 이 정도의 정의를 갖고 있어. 그러니까 나는 너보다 더 착해.” 착하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착한 사람들끼리 집합돼 있는 곳이 이게 바로 지옥입니다. 착한 게 아니고 착하다고 여겼던 자기 자신을 평가할 때 나는 얼추 이 정도하면 착하다고 여기는 자들이 한 곳에 모인 그곳이 바로 지옥이에요. 난리도 아니에요. 자기가 더 착하다고. 양보 없습니다. 죽을 둥 살 둥 내가 더 착하다고 하는 거예요. 세리와 창기가 가는 곳이 아니죠. 악마의 자식 바리새인들이 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다시 다른 말로 하면, ‘인위적 공동체의를 생산하고 그 의로 소통하는 곳’이 바로 인위적 공동체에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에게 어떤 하자가 있으면 나가고 더 건실한 사람을 뽑는 거예요. 이게 의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성령의 공동체는 반대입니다. 의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고 죄를 생산하는 거예요. 죄로 말미암아 어느 누구도 나는 너보다 낫다는 말을 못하는 것, 그게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나와요.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몸은 아름답지 못하게 보이는 것이 아름답다고 돼 있고, 고린도전서 1장 끝에 27절에 보면,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여러분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려면 수능 몇 점 나와야 돼요? 도대체 아이큐가 얼마 돼야 돼요? 얼마나 고아원 방문, 봉사, 수해 날 때 봉사, 바다에 기름띠 있을 때 멀어도 찾아가서 천을 던지면서 기름을 닦아내는 그런 봉사, 그것도 성에 안 차서 우물 파러 아프리카까지 가고. ‘울지 마, 톤즈’ 해서 남수단에 가서 의사의 모든 소득을 버린 천주교 신부 있잖아요(이태석 신부, 1962~2010). 그런 사람처럼 도대체 어디까지 해야 돼요, 착한 일을.

착한 일의 문제가 계량화된다는 거예요. 수치로 나온다는. 계량이라는 것은 측정이 되는, 물량으로 계량이 된다는 게 문제에요. 애 네 명 키우는 것과 한 명 키우는 것, 어느 게 착합니까? 네 배에요, 네 배. 애 세 명보다 네 명이 더 착하지요. 왜? 더 힘드니까. 건강한 남편을 집에서 빨래해주고 잘 섬겼다. 이게 착합니까, 아니면 말기 암 환자 남편을 밑반찬 천 가지해서 갖다 바친 그 주부가 착해요?

인간에게 대차대조표, 선과 악 장부를 만들어놓고 선한 것을 여기다 기재하고 악한 것을 기재해서 단기순이익 계산하는 것, 이런 것을 계산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시스템, 프레임을 고집하느냐 하면 선악체계는 때려죽여도 포기 못한다는 거예요. 선악체계 안에 잠식돼 있는 자아, 선악체제의 노예가 돼 있는 자아. ‘선악체제대로 나는 그 안에 살리라 그 안에 영원히 살고 싶어’ 당연히 그건 지옥 가야 되지요.

그래서 이 정의를 이게 정의냐, 불의냐 따지는 것은 인간세계지만 주님께선 뭐냐 하면 사랑이냐, 사랑이 아니냐로 따지는 거예요. 그게 고린도전서 제일 마지막에 나옵니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럼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러면 그 사랑을 내가 획득해야 되겠다. 이게 대학담론이죠. 주인이 갖고 있는 사랑을 이제는 나는 주님의 학생으로서 내 것 만들어야 되겠다고 대학담론이 가동되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사랑이란 이름의 또 자기 의가 축적되는 겁니다. 그럼 우리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그냥 자기 자신을 유한락스, 진짜 유한락스 확 뿌리고 싶다. 모든 경황들이 일어난 상황들이 너 쫌 입 다물고 있으면 된다는 그런 것을 알려주는 시그널들이에요.

착하지도 말고 악하지도 말고 착하다, 악하다는 그 개념 자체에서 벗어나는 쪽으로 사랑이 우리에게 덮치는 거예요. 나는 선하냐, 악하냐 따질 때 사랑이 그것을 덮쳐버립니다. 덮치면 우리는 졸지에 뭐가 되느냐 하면, 선도 악도 아니고 죄가 돼요. 죄의 값은 뭐라 돼 있습니까? 죄 값은 사망이죠. 주님께서 우릴 친히 죽여주시는 고마움이 있을 때 우리를 죽여주시는 죽임에 뭐가 옆에 뒤에 붙어 있느냐 하면, 여기에 플러스 부활이 붙어 있어요.

주님이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한 것처럼 아버지께서 아들을 죽였잖아요. 그러면 아버지와 아들 자리, 오늘 첫째 제목을 저는 ‘자아의 위치’라 했는데 이번에 두 번째 제목을 ‘타자의 위치’라 하겠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사랑의 관계에요. 그런데 여기 아들이 자기 사랑의 관계에 독점적인 위치를 갖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뭐냐 하면 아들에 비해서 타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과의 사랑의 관계를 우리에게 줘요. 주게 되면 넓은 치마폭이 나를 감싸게 되면 그 사랑의 관계 안에 우리가 들어오게 됩니다. 들어오는 것은 뭐냐 하면 죄인으로서 반드시 들어와야 돼요. 죄인이 아니면 들어올 수 없어요. 죄인인 것은 우리의 선악체제로선 선악체제 자체가 죄기 때문에 안 되고요.

죄인인 것은 뭐냐 하면 말씀이 와서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고 우리를 어디로 끌어당기느냐 하면 아버지와 아들 관계 속에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이 말씀이 들어올 때 우리가 어떻게 말씀을 이해됩니까? 이해하지 마세요. 말씀은 이해하는 게 아니에요. 아까 뭡니까? 설명되어지는 것과 만들어진 것은 별개라 했지요.

주께서 친히 만드는데 왜 우리가 설명을 해야 되죠? 설명해서 뭘 얻겠다고 설명을 하지요? 자기변명을 왜 합니까? 그냥 만들어진 자체가 이게 고린도전서 1장 봅시다. 그게 천하게 만들어지고 미련하게 만들어졌데요. 그러나 여기 MBC, KBS 기자 동원해서 물어봅시다.

여기에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오는,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26~28절)

이것은 그렇게 만들어진 거예요. 설명되어지는 게 아니라고. 그런데 이것을 구원받은 사람에게 가서 “당신은 미련하십니까? 당신 미련하지요?” 하면 그 기자가 묻는 질문에, “예. 나는 미련합니다.”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어요. 나는 똑똑합니다. 미련하지 않아요. 미련하다는 것은 내가 미련하다고 설명해서가 아니라 주께서 미련하다는 말씀의 규정에 맞춰서 찍어낸 거예요. 미련한데 아이큐가 150이라, 미련한데 서울대학교 수석졸업이라. 그래도 이건 뭐냐? 성경말씀에 입각해서 사울대학 졸업해도 그건 뭡니까? 미련한 거예요.

세상이 약한 것들과 강한 것들, 자꾸 계량적으로 이걸 설명을 하려하니까 리스트가 짜여지는 거예요. 어느 선까지 소득 10% 안 되는 사람은 십만 원 더 추가적인 것 없어요. 지원금 이십오만 원으로 끝났어. 그걸 의료보험료로 하거든요. 모든 게 계량이 된다고요. 계량해서 법적체제에서 어긋난 걸 불의라 하고, 법 안에 들어오면 그걸 뭐라 하는 줄 알아요? 정의라고 하는 겁니다. 이런 지옥 같은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주님을 계량해봅시다. 어떻게 돼요? 주님을 계량하면 뭐 나옵니까? 나오지요. 죽어 마땅한 존재지요. 주님처럼 미련하고 천하고 약한 분이 어디 있습니까? 따라서 아버지께서 아들을 미련하고 천하게 만들었고,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뭐라 합니까? 사람들이 처형할 때 예수님을 뭐라 합니까? 죄인이었지요. 죄인 되고 미련하고 천하고. 그런데 그것이 주님 안에서는 뭐냐 하면 사랑이라는 범주 안에 들어가는 거예요. 사랑이란 독특한 요소들 안에 이게 들어가는 거예요.

문제는 이것을 부러워할 사람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구원은 나중 문제고, 천국은 나중 문제고 일단 예수님처럼 미련하고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는 이걸 부러워할 사람 아무도 없어요. 일찍 사십도 못 넘기고 사형당하고 이런 걸 원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물론 서른세 살에 죽었던 많은 사람들 있어요. 가수 김광석도 그렇고, 그리고 <하얀 나비> 부른 김정호도 서른세 살에 죽고 하잖아요. 죽으니까 사람들이 영웅으로 만들어버렸잖아요.

어떤 인간의 견해도 주님의 사랑에 들어올 수 없다. 이것을 고린도전서 2장에서 뭐라고 하느냐? 성령의 은혜라고 이야기합니다. 성령은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하나님의 깊숙한 곳,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만이 아는 감추어진 것, 이것을 고린도전서 2장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여러분 익히 아는 단어가 나옵니다. ‘비밀’이에요. 이게 비밀이라는 거예요.

2장 4절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 돼 있지요. 사람, 존재지요. 능력, 활동력이죠. 존재가 아니고 활동성, 기능이죠. 뿐만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4장 20절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고린도전서 시작하면서 사도 바울이 뭘 이야기하려고 전체적인 개략을 여러분들이 생각을 해야. 어떤 프레임으로, 어떤 체제로 이야기하려고 하느냐? 사람은 일체 믿지 말라. 너 자신도 믿지 말고 남도 믿지 말라. 다만 믿을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십자가에서만 나오는 능력의 활동성을 믿어라, 이런 이야기에요. 사도 바울이. 그리고 활동성을 내 것으로 여기려고 하지 마라. 누구의 것도 아니고 그냥 활동에 사로잡힌 자만 그때그때 출몰하고 우연적으로 등장할 뿐이에요. 출몰되는 거예요. 필연이 아니고 우연적이에요.

왜 내가 내 잘남을 별로 원하지 않지? 그건 주님의 성령의 역사지요. 남이 나에게 뭐라고 이야기하는데 왜 관심이 없지? 그게 성령의 역사이에요. 성령의 일입니다. 성령의 일은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감추어진 거예요. 감추어져 있다는 건 2장 7절에 보면 나와요. 여기 비밀 나오네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하나님의 지혜는 어디 있습니까? 비밀이죠.

‘그것 어디 있는데?’ ‘비밀이야.’ 그냥 비밀이에요. 비밀은 캐낼 수 있는 게 아니고 비밀이 알아서 본인이 노출시킬 때 능력으로 나올 때만 캐치가 되는 포착이 되는 게 비밀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고린도전서 이 말은 뭐냐 하면 구원? 없어요. 천국도 없어요. 지옥도 없습니다. 말씀도 없습니다. 예수님도 물론 없고요. 옛날 사람이기 때문에. 이순신 장군이 어디 있습니까? 없잖아요. 예수님도 지난 과거 인물로 없어요. 그냥 없어요.

있는 것은 뭐냐? 현재 내가 있다는 그 사실만 있어요. 그게 끝이에요. 그것부터 출발하자는 거예요. 자꾸 교회 가면 천당 간다, 그런 소리 말고. 항상 중요한 것은, 내가 여기 있고 나는 뭔가를 알아서 내가 안 것으로 하여금 내가 더 정의롭고, 내가 남들 보기에 우수한 존재로 전환하고 싶다. 내가 아는 것은 이것뿐이다. 그걸로 끝이에요. 그 외에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그게 전부라니까요.

그러면 사람들은 교회 왜 다닙니까? 여가활동이죠. 배 좀 부르다 이 말이죠. 먹을 것, 입을 건 챙겼으니까 남는 시간, 교양 있잖아요. 마음적인 교양을 위해서 교회 다니고, 또는 호기심, 성경에 도대체 뭐가 들어있어서 전 세계 십일 억 인구가 듣고 있는지, 성경에 뭐가 있는지 성경 모르고 내가 남과 대화가 안 되지. 성경을 뭔가 아는 체, 홍해가 어떠니, 출애굽이 어떠니, 십자가를 좀 알아야, 고린도전서를 좀 알아야 남들 이야기에 얼추 끼지 않겠나.

그런 것 때문에 하는 건데 그런 것들로 해서 교회 다니면 교회가 붙들어요. 돈 빼먹을 것, 무노동 할 것, 이런 것 빼먹고. ‘충성하십니다. 하늘나라 상급 받습니다.’ 빼먹고 일단 진급 막 시켜서 집사, 장로 막 시키면 이거는 교회 자체가 자기 자존심이 되어 빼도 박도 못해요. 돈 다 날리게 돼 있습니다. 지 돈은 부동산에 묶여있겠지요. 주식 샀으니까. 나중에 장로 되어 목사도 내 뜻대로 바꾸고 하는 그 재미있잖아요. 교주가 되는 재미.

아까 무슨 담론? 그게 주인담론. 내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 타인을 노예로 삼고, 너는 노예야. 나는 주인이고. ‘너는 학생이고, 나는 선생이야.’ 유명한 대사. 적어도 사람이 인생을 살았으면 그 정도 주인의식을 갖고 살아야 한 평생 사는 보람이 있지. 이런 욕망이 세상에 없는 인간이 어디 있어요. 그런 욕망이 다 있잖아요. 종교도 마찬가지로 그 동네입니다. 그런 활동하는 동네에요.

사도 바울 입장에서는 자꾸 이상한 말을 하는 거예요. ‘감추었다, 비밀이다, 안 알려줘, 네가 뭔데 알려줘.’ 그냥 나타난 것은 인간으로선 설명 불가, 설명되지 않는다, 라는 이야기만 말씀은 말씀으로 되지 인간으론 안 된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죠.

제가 <킹 오브 킹스>란 영화를 보고 평을 달았습니다. 근데 그 영화에 보면 익히 아는 예수님 스토리가 쭉 나오잖아요. 예수님이 이런 일을 했다, 이런 일을 했다는. 그러면 성경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으로 끝내야 됩니다. 이게 두껍지 않아야 돼요. 얇아야 돼요. 왜? 예수님 이야기로 끝나니까, 끝이니까. 끝나고 부활했다, 끝이어야 되니까. 근데 왜 신약성경이 두껍냐 말이냐? 27권이 왜 있느냐?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하는 모든 것이 비밀이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이 누구시고 어떤 활동을 했다는 것 때문에 인간은 속아 넘어가는 거예요. 제가 언젠가 미카엘이 모세 시체를 놓고 논쟁한다는 그 대목을 몇 주 전에 설교에서 이야기했지요. 마귀가 모세의 시체를 왜 원합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세계에서 위대한 영웅은 오래오래 기념하면서 그 후속조치로서 모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단체가 결속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하나의 아이템이 되기 때문에, 상징물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근데 이러한 성경이야기, 성경에 나오는 모든 문제성 있는 이야기, 구원에 실패하고 하나님 뜻에 어긋나던 그 이야기, 그 기능들 그게 왜 그렇게 있느냐 하면 바로 그러한 자질, 그렇게 잘못되게 생각한 자질을 이미 아담의 자손들은 공통적으로 다 지니고 있기 때문에 말씀이 우리한테 들락날락하면서 어떤 때는 창세기로 지적하고 어떤 때는 사사기로 지적하고 고린도전서로 지적하면서 들락날락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체가 성경말씀에서 확장된 하나의 말씀의 기능역할 하라고 우리를 마네킹으로 사용하시는 거예요. 주의 일의 마네킹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여러분들이 영광스럽고 감사한 일인지 몰라요. 나한테 일절 책임이 없으니까.

자, 2장 4절 봅시다. 아까부터 2장 4절 하는데 2장 4절이 어떤 내용이냐 하면,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이렇게 돼 있어요. 적어볼게요. 이 말이 얼마나 세상을 속이는 말인지. 성경은 하여튼 악마에 속한 세상을 철저하게 속이는 말이에요.

“내 말과 내 전도함이” 그다음에 뭐라고 돼 있지요?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이게 지혜가 아니다. 아니면 뭡니까? “다만 성령의 나타남”이라. 그러면 사도 바울은 내 말과 내 전도할 때 누구와 함께 있다는 말입니까? 성령님이 함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님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지요. 성령이 안 보이니까 인간세계에선 없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건 없는 겁니다.

여러분, 보이지 않는 건 없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걸 있다고 하니까 이미 사도 바울은 세상을 뭐하고 있습니까? 철저하게 지금 속이고 있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 관점으로 봐서. 다시 이야기해요. 세상은 세상의 소통은 의미 소통이에요. 의미 소통은 서로 납득이 되는 그러한 컨셉, 개념들의 교환입니다. 이 개념들은 뭐냐? 있음에서 출발해요. 여기 사람이 있다. 있음에서 개념이 나오고, 그 개념들 소통하면서 있음을 더 공고히 하는데 이 세상은 그렇게 운영되고 있습니다.

근데 거기다가 사도 바울이 불쑥 뭐냐? 있지도 않은, 없는 성령, 있지도 않은 예수님 이 이야기를 섞어 이야기해버리면 이거는 뭡니까? 사람과 소통하겠다는 겁니까, 말겠다는 겁니까? 나는 너희들에게 진리를 전해서, 쉽게 말해서 진리로 꽤서 너로 하여금 예수 믿는 사람 만드는 그런 의도는 나한테는 전혀 없습니다.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거는 보이지 않는 나와 함께 계신 분이 할 일입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나와 함께 계신 성령님이 하신다. 이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한 적이 있어요. 마태복음 10장 20절에,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그러니까 인간이 진리를 소유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성령이 사도 바울을 지금 갖고 노시는 거예요.

어떻게 노시는가?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말을 한 것처럼 이제는 네 차례야. 너도 세상 사람들에게 너는 말하는 족족 거짓말이란 말을 실컷 들어보라는. 네 말은 도무지 도대체 인간에 동원되는 모든 논리로서는 분석이 불가한 거예요. 설명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설명이 안 되도 고린도전서 3장에서 봅시다. 21~23절,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 돼 있잖아요.

여러분 지금까지 강의 들었으면 이 말이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아시겠지요. 뭐가 깨졌습니까? 너는 너고, 나는 나다가 깨져버린 거예요. ‘나, 너한테 속했는데’ 이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말이야, 막걸리야, 진짜. 쉽게 말해서 사도 바울이 있는 것은, 네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봉사하기 위해서 내가 너한테 봉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네 것이라고 해도 괜찮아. 근데 좋아하지 마. 너도 네 것은 누구냐? 그리스도의 거야.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고. 이런 연차로 연결돼 있는 겁니다.

이 말은 왜 여기서 하느냐? 인간들의 모든 불행은 내 것은 어디까지나 내 것이고, 네 것은 어디까지나 네 것이라는 그 구분이 인간세계를 지옥으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자기 걸 남한테 피해입지 않기 위해서 철저하게 지키는 것. 지키다, 지키다 안 되면 법에 호소하는 것. 법에 호소 안 되면 그때부터는 영화가 등장하지요. 나라 법이, 경찰이 못하는 것 허용된 킬러들이 그냥 나쁜 짓하는 사람들만 골라서 죽이는 것,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것에 카타르시스를 느끼지요. ‘그렇지. 역시 정의는 살아 있어.’

여러분, 정의가 살아 있다고 하지 마세요. 솔직하게 말해서 내가 살아 있다고 이야기해야지요. 마지막은 결국 나에요. 내가 살아 있는 거예요, 내가. 잘난 내가. 나부터 더 올라가자. 그럼 주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누가 살아 있다고 했어, 누가?” 하면 “저요.” “거짓말하지 마. 내가 살아 있잖아, 내가.”

오늘 낮에 한 후딱 지나간 말을 해볼게요. ‘세상은 주님의 자아다.’ 주일 낮 설교에. 0.5초 내에 지나갔어요. 세상은 주님의 자아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 의해서. 세상 모든 것은 그게 사탄이 됐든, 지옥이 됐든, 어떤 인간이든 피조물도 해와 달과 별들도 다 주님의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주님의 것이란 말은, 주님 잘났다고 비아냥거리라고 한 말이 아니고 나는 나의 위치, 또는 타인의 위치가 이미 확정돼 있다는 사실, 소속이 이미 정해져있다는 사실이에요.

소속이 정해져있다면 주님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할 때 가지가 가지 걱정하면 안 돼요. 포도나무가 걱정해야지 가지가 걱정하면 안 됩니다. 자기 걱정했던 사람 있어요.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제가 그냥 이야기해드릴게요. 아는 이야기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겨줬습니다.

이 말은 뭐냐? ‘베드로야, 네 것은 없어. 너는 내 거야.’ 이런 뜻으로 발 씻겨주니까 베드로가 알지 못하고, ‘주님 감히 스승님께서 제자의 발을 씻기십니까? 스승은 스승이고 나는 납니다’ 그렇게 구획, 칸막이를 졌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네 발 못 씻기도록 막는 거야? 내가 네 발 안 씻기면 너와 내가 상관없는 거야.” 세게 나왔지요. “발 씻기지 말까? 안 씻기고 그냥 가? 그럼 너는 끝났어” 이렇게 하니까 갑자기 또 베드로가 그렇다면 전신을 다 마사지 해달라는, 전신을 다 씻겨 달라 했어요.

그럴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 결정은 네가 할 권리가 없고 내가 하는 거야. 어떻게? 발만 씻어도 전체야. 이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랑이란 부분이 없는 거야. 사랑은 부분이 성립되지 않고 항상 작은 조각도 전체가 된다는 그 내용을 이렇게 표현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제자와 이야기한 그러한 내용, 그걸 영적으로 아주 더 확장을 시킨 책이 바로 사도 바울의 편지에요. <킹 오브 킹스> 영화 보고 나 예수님 다 알았다고 한다면 참 쉬워요. 풍랑이 일 때 그 영화 보면 파도치는 게 나와요. 파도칠 때 양탄자를 깔아놨는지 베드로와 예수님 사이가 팽팽하니 파도가 안 쳐요. 그 영화 보고 나는 그랬으면 싶어요. 그런데 갑자기 파도가 넘치니까 풍랑을 보고 이러면 내가 못 걷는데, 하는 순간 빠져버렸거든요.

그처럼 그 영화에 나오는 일화, 에피소드들로 예수님을 묘사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거짓된 예수님의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상세한 것은 그런 흔적이 드러난 예수님이 지금 무슨 일을 하셨는가? 그거는 고린도전서나 사도 바울의 편지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일단은 마태복음, 마가복음에 나오는 그 내용들, 기본은 아셔야 되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은 고린도전서에서 우리가 생각을 해보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그 구조를 이젠 우리의 구조와 일치시키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의 구조는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를 확장된 것이 사도 바울의 구조라는 겁니다.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의 사랑이 성령을 통해서 그 사랑관계에 주저 없이 끼어들었다는 것. 끼어들고 난 뒤에 모든 것을 뭐로 설명한다? 사랑으로 설명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랑이 뭐냐? 고린도전서 8장 3절 보겠습니다. 야아 중요한 것 진짜, 첫째 시간하면서 제일 중요한 게 튀어나옵니다. 8장 3절에 보면,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 그렇게 돼 있지요. 우리 인간 쪽에서 접근하게 되면 하나님이 아는 자에게는 특별히 하나님께서 사랑을 부여한다. 아까 제가 설명한 것처럼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초청하게 되면 그 사람은 뭘 안다? 사랑을 안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랑을 안다는 이 내용, 고린도전서를 한방으로 딱 정리할 수 있는 그런 내용은 없습니까, 물으시면 없을 리가 있어요. 있습니다. 요한일서 5장에 나옵니다. 18절 누가 크게 읽어보세요. 처음입니다. 자주 요구하신 않겠어요. 요한일서 5장 18절, 다 같이 합시다. 중요하니까. 시작.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스톱, 스톱!

죄가 뭐야? 죄라는 우리를 죄인으로 기능적으로 사용할 때 죄만 나와요. 죄만 나오기 때문에 죄 지을 수가 없어요. 이게 무슨 망나니 같은. 죄만 나오기 때문에 우리가 주도적으로 죄를 지을 수가 없어요. 죄가 나오도록 조치하신 분이 따로 있기 때문에. 죄를 짓는데 죄는 아니에요. 이게 복음입니다. (아멘) 아멘 처음 나왔습니다.

사랑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본 적이 없는 게 와야 사랑이에요. 우리는 우리가 죄 지을 때 죄인이라 규정을 합니다. 어떤 기준에 의해서? 선악체계, 윤리, 도덕체계에서는 죄 지을 때만 악한 사람이 돼요. 그리고 판사, 검사는 죄를 지으면 안 돼요. 왜냐하면 죄인을 응징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죄 없는 자가 돼야 우리는 죄 있는 자에게 돌을 던질 수 있다는 거예요. 이게 인간세계의 정의로움입니다. 선악체제에 준한 정의로움이에요.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만이 이 죄를 완성하셨어요. 악마는 죄를 끌고 왔습니다. 그 죄의 규정은 선악체제, 이게 로마서 8장에 나와요. 누가 고소하는 자에요. 자꾸 고소를 해요. 우리 마음속에서 우릴 고발한다고요. 악마의 생각은 이겁니다. 죄가 있으면 이건 고발돼야 되고, 고발되면 죄인이 된다는 거예요. 주님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주의 사람을 죄를 드러냄으로써 이 죄에 대해서 예수님이 이미 처리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죄를 짓게 만들어버려요.

죄를 짓는다는 말은, 내가 알아서 짓는다는 말이 아니고 죄가 나타나게 하시는 거예요. 왜? 이런저런 것들을 내가 처리했다는 거예요. 자기 아들 장가보내는데 며느리가 너무 예뻐서 재벌 집 마나님 시어머니가 백화점을 데려갑니다. 그런데 며느리가 보통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자꾸 백화점 옷의 가격표를 보는 거예요. “가격표 보지 말고 너 원하는 것 다 사. 계산은 내가 해. 네가 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네 돈으로 할 것 같으면 내가 널 데려오지 않아.”

아버지와 아들 관계 속에 들어왔다는 말은, 아버지와 아들만이 아는 죄가 있어요. 인간은 죄를 몰라요. 인간은 멍청하기 때문에 죄가 뭔지 몰라요. 인간은 아는 게 없어요, 하여튼 아는 게. 왜? 모든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깊은 지혜에서, 십자가의 지혜에서 알기 때문에 인간이 안다는 것은 자기 잘난 맛에 지식 쪼가리 주워 모아서 아는 것이지 인간은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리고 아무리 공부해도 다 몰라요. 백 년 동안 공부해도 몰라요. 안 까먹으면 다행이다. 아는 것도 다 까먹어요. 도대체 평소에 안다는 것은 나중에 보면 아무것도 없어요. 치매 환자가 되어 있는 것도 누구세요, 이렇게 되어 일이 되질 않아요. 엉망이 돼요, 이제.

주님께서는 주님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드러나게 하고, 그 죄 드러나는 것과 그것을 처리하는 것이 전부 다 사랑에 포함된 사랑의 내용이 해당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에 뭐라고 돼 있습니까? 하나님에 속한 자는, 이게 오늘 제목이에요. 위치. 첫째 시간, 나의 위치. 두 번째는 타인의 위치. 우리는 주님 앞에 타인이었어요. 타인의 위치가 비로소 아버지 앞에 나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과 합체가 됩니다.

방금 이야기한 걸 하게 되면, 나는 누구뿐이냐? 나는 예수님만 나에요. 누가 인간이냐? 예수님만인간이에요. 그래서 예수님 자신을 뭐라 합니까? 나는 사람의 아들이다. 사람으로 나타난 아들이다. 여자의 후손이다. 인자. 인자란 말을 쓴 이유가, 인자 안에 모든 구약 모형, 신약, 구약이 인자를 겨냥해서 인자가 완성할 책임자가 인자에요.

시편 8편에,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4절) 그 인자란 게 다윗 속에 있는 예수님이 미리 이야기한 거예요. 에스겔보고 인자라 한 것은 바로 에스겔 속에 있는 예수님 자신 자기가 자기 기능을 한 거예요. 에스겔, 다윗은 그냥 그 시대에 필요해서 다루는 하나의 기계에 불과한 거죠.

그래서 이렇게 되게 되면 여러분들이 정리해야 될 것은 이런 걸 정리해야 돼요. ‘내가 말씀을 보니 나는 죄인이었다. 이 죄인을 내가 처리할 수 없어서 십자가의 피를 믿음으로서 나는 이 죄에서 벗어났다.’ 이것 사탄의 구라입니다. 이거는 성립되지 않아요. 일단 이 나가 다른 나에요. 이건 마귀가 설정한 나고 진짜 나는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내가 말씀을 보니(말씀이 뭔지도 모르지요) 죄인이다. 지가 죄를 지어봤어. 뭐 어떤 죄를 지었는데 죄인이에요? 기생 라합이 거짓말했잖아요. 그게 죄입니까?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바쳤지요. 죄입니까? 심지어 제자들은 뭐 했습니까? 부모자식을 버리고 형제를 버리고 예수님 따라다녔습니다. 그런 호로 자식이 어디 있어요?

도대체 성경에 제자들이 하는 행동이 정상이 아닙니다. 정상이 아니에요. 정상적인 인간사회에서 말하는 정의, 법이죠. 법의 테두리에서 볼 때는 전부 다 인간답지 못한 너무나 무책임한 행위들이에요. 성경에 나오는 게. 도대체 성경을 보고 은혜 받았다고 하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 인간 같지도 않은 행동들이 나오는데 예수님 자신도 마찬가지고, 그 제자들도 마찬가지고.

제자들이 국가 발전에 무슨 기여를 했습니까? 지가 어디 인공지능을 개발했습니까? 로봇을 개발했어요? 전기차를 개발했습니까? 무슨 도움이 됐습니까, 제자들이 어떤 도움을 줬어요? 미국에 한 오천 억 투자했어요? 그거는 엘지나 삼성에서 하는 거예요.

내가 말씀을 보고 죄를 깨달았다는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용하사 성경 속에 박혀있는 비밀, 감추어진 죄를 나를 통해서 들춰냈는데 그 일은 뭐냐?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진 그 결과에 대해서 현상적으로 증명하는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라고 그렇게 한 거예요. 그렇게 돼야지요.

사도 바울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제가 오늘 몇 번이나 이 본문을 들추는데 들출 때마다 내가 참 감격스러워요. 사도행전 19장, 벌써 눈치 빠른 사람은 그 본문이구나, 하는데 19장 15절, 도대체 사도 바울이 이 우주에서 어떤 식의 평가를 받는지 나와요.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여기 예수님도 알고, 이거는 우리가 예수님이 대단한 존재기 때문에 마귀가 예수님 당연히 알지, 이렇게 되는데 거기에 누가 끼어들어있습니까? 바울도 내가 알고. 마귀가 하는 말이에요. 바울이란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안다는 거예요. 그리고 고린도전서에 그 대목에 보면, 이제 지금 사도 바울에게만 해당되면 안 되겠지요.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되지요.

고린도전서 7장 40절, 이것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누가 읽어보세요.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 무슨 말이냐 하면 나도 또한 영을 받았다는 거예요. 그러면 사도 바울이 나도 영을 받았다는 말은,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받은 사람이 있단 말이에요, 없단 말입니까? 있다는 말이죠. 우리 영과 영 받은 사람끼리 대화하자, 그 이야기잖아요. 성령으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주님으로부터 뭔가 받은 사람끼리 대화하자.

그런데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귀신이 누굴 안다 했어요? 예수도 알고, 또 누구도 알고?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성령 받았지요. 사도 바울도 성령 받았지요. 그러면 사도 바울이 나도 성령 받았다는 말은, 내 말보다도 누가 있다? 성령 받은 사람이 있다. 그 있다는 것을 고린도 지역에서 나처럼 성령 받은 사람을 한 번 뽑아보자. 어떻게? 내가 편지 보낼게. 그게 바로 고린도전서입니다.

그러다 안 될 때 편지 하나 더 보내요. 그 편지가 이번에 겨울수련회에 할 두 번째 편지 고린도후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첫째 시간 마치면서 결론적으로 뭐냐? 이건 완전히 똥배짱이에요. 완전히 배짱장사에요. ‘사고 싶으면 사고, 안 사려면 저리 가. 복음 못 팔아서 환장한 사람 아니야. 이건 성령이 줘야 받는 거야’라는 이러한 대담성.

뭐 사도 바울보고 율법에 위반했느니, 어떤 사람은 너무 율법 말고 자유롭게 사니, 하는데 내가 율법 있는 사람한테는 율법대로, 율법 없는 사람한테는 없는 대로 한다. 왜? 내 자유다. 그게 바로 주님의 자유고 그게 성령 안에서 연결된 나의 자유가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그렇게 살 거죠?’ 이게 강요할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강요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말을 그렇게 ‘여러분, 그렇게 살 거죠’로 묻는 것은 제가 어떤 뜻에서 묻느냐 하면, ‘여러분, 나만 붙들고 살 거죠’와 같은 뜻에서 묻는 거예요. 주님의 사랑 없이 지독하게 치열하게 나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그런 식으로 교회를 가든, 뭘 받든 아무 짝도 소용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거는 비밀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비밀은 성령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전달될 때 우리는 내가 더 이상 내 자체가 유한락스, 제목을 유한락스로 하고 싶다. 자꾸 말씀이 순간순간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라고 우리를 탈색시키는 거예요. 색깔을 없애는 나라는 그것이 너무 무거운 것을 계속해서 없애버리는 그 작용이 강의 마치고 주무실 때도 여러분을 탈색시키는 유한락스의 기능이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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