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2025여름수련회 1강 자아의 위치

아빠와 함께 2025. 8. 2. 07:12

2025 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1강-고린도전서: 자아의 위치
(강의:이근호 목사)


강의 전에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인간들을 위함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해서 만들어진 상황인 것을 가면 갈수록 우리가 느끼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고린도교회에서 18개월 동안 사도 바울이 서기 50~52년에 설교를 했다는데 고린도교회에서 설교를 했다기보다는 설교를 하면서 교회가 생겼지요. 교회가 있고 설교를 한 것이 아니고 설교를 하게 되면 저절로 거기서 교회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설교가 만약에 끝난다면 교회도 같이 끝나는 거죠.

그래서 설교 끝나고 난 뒤에 에베소에 가면서 고린도교회에서 설교했던 그 내용을 편지로 보내면서 말씀이 없으면 교회가 아닌데 편지 때문에 계속해서 교회가 유지가 되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씀은 항상 어떻게 인간에게 들어오느냐 하면 없는데서 생기는 식으로, 그런 방식으로 말씀이 생성됩니다.

그래서 ‘있다’와 말씀이 결합이 되면(말씀+있다), 있다가 뭐로 빠지느냐 하면, 없음으로 빠지면서 말씀은 작동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내가 있고 말씀을 지키는 이런 것은 없습니다. ‘말씀이 주도를 갖느냐, 내가 주도를 갖느냐’에서 말씀이 주도를 가지려면 내가 없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 ‘내가 있다’는 말은 ‘내게 의미가 있다’는 거예요. 말씀이 없으면 인간은 뭐냐? 항상 자기에게 의미가 있어요. 그런데 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내가 없다’가 돼요. 말씀이 갖고 있는 의미가 나를 덮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성도와 비성도가 구분되는데 비성도는 뭐냐 하면 콩고물, 성도는 유한락스, 이렇게 보면 돼요. 비성도는 콩고물이라서 여기 떡이 있잖아요. 찹쌀떡이 있으면 콩고물을 얹진 다고요. 얹으면 나중에 예배 마치고 나오면서 콩고물이 중력에 의해서 다 떨어집니다. 밑에 말씀을 들었는데 말씀이 우두둑 다 떨어져요. 마치 가을의 낙엽처럼 다 떨어져서 맨송맨송 다시 나로 돌아오지요. 다시 돌아옵니다.

유한락스의 특징은 말씀이 성도를 유한락스가 그 흔적을 나를 때처럼 여겨서 없애버려요. 아주 세요. 세정력이 세서 나를 없애버린다고. 내가 만약에 있는데 말씀이 유한락스처럼, ‘유한’이란 우리나라 락스 만드는 회사 이름이에요. 유한락스가 내게 오게 되면 심하면 살점이 터져나가겠지요. 그런데 이게 바로 뭐냐 하면 성도입니다.

그런데 비성도는 툭툭 털어버리면 ‘내가 언제 말씀을 봤어?’ 다 털어버리면 다시 내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지요. 이게 콩고물 같은 기능입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집에 가서 다시 콩고물 한 바가지 뒤집어쓰지만 소용없어요. 돌아서면 다 떨어져나가니까. 그래서 말씀은 세척 기능이 있어서 계속 우리에게 상처를 줘요. 우리 몸에 상처를 자꾸 주는 겁니다.

그래서 말씀이 계속해서 우리 몸에 침투해버리면, 이렇게 말씀이 나한테 덮치면, ‘나의 의미란 조금씩 삭제 당한다.’ 세상에서 제일 편한 게 ‘내가 없다’입니다. 이것처럼 편한 게 없어, 내가 없다는 것. 내가 없다, 그러면 뭐도 없느냐? 걱정할 것도 없습니다. 내가 없는데 걱정의 주체가 있을 리 없잖아요. 내가 없으면 걱정할 필요도 없지요.

그래서 어떤 뜻에서 걱정을 하기 위해서는 절대로 내가 없어지면 안 된다는 이러한 등식(=), 방정식이 성립이 되지요. 걱정을 해야 살맛이 난다는 사람도 있잖아요. 이러면 절대 내가 없어지면 안 되고 내가 있어야 돼요. 당신의 취미는 뭡니까? 걱정하기. 제가 어릴 때 학교에서 설문지 보면, 너의 취미는 뭐냐? 고독, 외로움. 그걸 취미로 여기는 사람도 있어요. 그래서 걱정하기가 취미인 사람 같으면 내가 없어지면 안 되겠지요. 내가 더 공고하게 돼야 되니까.

그래서 지금까지 이야기하기를 말씀은 유한락스다. 자꾸 우리의 의미를 항상 삭제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이사야 40장 말씀처럼 우리는 풀이고 꽃에 불과한데,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8절)는 그것을 그대로 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첫째 시간부터 제가 나열하는 것은 고린도교회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가? 고린도교회에 아홉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①내부파벌, ②근친상간, ③결혼과 독신에 대한 혼란(독신이 좋으냐, 결혼하는 게 좋으냐는 이런 문제), ④우상제물을 먹을 수 있느냐, 못 먹느냐? 먹는다, 못 먹는다. ⑤예수님의 살과 피, 이것이 과연 떡이나 포도주를 대체할 수 있느냐? ⑥여성의 교회 내 위치 문제(여성이 남성과 동등하냐는 그 문제), ⑦사랑의 결여(사랑이 없는 행동들), ⑧죽은 자의 부활을 굳이 믿어야 되는가? ⑨왜 신자들인데 세상 세속 재판에 의존하느냐? 이 아홉 가지 문제가 교회에서 발생되었어요. 사도 바울이 가고 난 뒤에.

그래서 고린도전서를 보는 사람들의 해석이 이렇게 됩니다. 내부파벌이 있으니까 나는 베드로파, 바울파 이렇게 하니까 파벌하지 말자. 우리 교회는 파벌 없는 교회되자. 근친상간, 이런 추잡한 일은 하지 말자. 그다음에 결혼과 독신에 대해서 하고 싶은 사람은 하고, 못한 사람을 흉보지 말자. 우상제물은 혼자서는 먹고 공개적으론 먹지 말자. 예수님의 살과 피가 떡이고 포도주 맞는데 예수님의 살과 피로 그렇게 간주하고 먹자.

여성의 교회 내 위치 문제는, 여성이 좀 나대지 말고 어떤 위계질서를 갖추어서 여성이 권위 앞에서 대중들에게 소리 지르지 말고, 남편에게나 교회 내 남성 중직자를 거쳐서 자기 의견을 피력하면 된다. 사랑의 결여, 이건 노력하면 되고. 죽은 자의 부활은 필수적이니까 이건 믿자. 그다음에 세상 재판, 세상 재판에 아예 의존하지 말자. 이런 식으로 고린도전서를 지금까지 해석해왔습니다.

자, 이렇게 하게 되면 이게 교회입니까? 성경에서 이걸 고린도교회의 문제점으로 지적했는데 그 문제점을 수정하면 그게 교회에요? 이게 문제되는 거예요. 고린도전서를 전혀 이해를 못하고 있는 거예요. 뭔가 이런 게 문제가 된다고 확인이 된다면 우린 안 하면 되잖아, 이런 식이에요. 이런 경우의 해석이 또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2장, 3장 일곱 교회 있잖아요. 설교하면서 일곱 교회가 이런, 이런 문제점이 있으니까 그런 문제를 우리 교회에선 하지 말고, 장점만 살리면 우리는 바른 교회가 된다는 거예요. 올바른 교회.

이건 잘못입니다. 이런 생각은 성경 자체가 일종에 우리를 시험하는 테스트하는 그렇게 되는 거예요. 가장 문제되는 것이 뭐냐 하면 고린도교회란 없습니다. 성경에는 어느 교회는 없고 교회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생기는 것이 그게 바로 교회에요.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을 믿어야지 교회를 믿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그래요. 교회는 믿음이 대상이 될 수가 없어요. 교회는 결과물이지 믿음의 대상이 안 됩니다.

교회가 만약에 상주해 있다면 그 교회를 지킴이 교회제도, 조직 이것이 정당한 것이 돼버려요. 인간에게 무슨 정당한 게 있습니까? 인간에겐 정당한 게 없습니다. 여러분 다 아시는 이야기할게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에요. 이 그리스도의 몸은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없는 거예요. 없는데 언제 있느냐 하면 기능적으로 나타날 때 교회가 여기 있다, 교회가 저기 있다가 성립되는 거예요.

그런데 교회가 있다가 그리스도의 기능이 사라지면 교회 없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이 교회라는 인식, 이게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오는데요. 다시 말해서 성도가 아닌 불신자, 콩고물이라 했지요. 불신자 입장에서는 교회라는 것이 하나의 사회조직체로서 여기 버젓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 교회가 어디 있는데? 교회가 있다는 것이 전부 다 뭐냐 하면 부동산이에요. 교회가 아니고 그냥 부동산에 해당되는 겁니다.

부동산은 모아놓은 돈의 집결의 모습, 돈을 모아서 토지를 사고 건물을 짓고 하는 그 부동산을 사람들은 교회라고 규정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부동산이 어떤 장소를 점유하고 있으니까 교회 온다, 그다음에 교회 간다가 불신자 입장에서 이렇게 정리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불신자의 개념은 콩고물 개념이에요. 유한락스가 아니고. 불신자 개념에 신자 개념이 따라 갈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불신자 개념이란 게 뭐냐 하면 이런 거예요. 불신자가 주장하는 개념은 방금 이야기했지만 불신자는 ‘내가 여기 있다’로부터 노는 의식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내가 여기 있다는 게 거짓말이에요. 왜냐하면 인간은 의식과 무의식으로 되어서 무의식 입장에서 의식은 항상 뭐냐? 거짓말해야 돼요. 그럼 무의식은 진짜냐? 무의식은 진짜가 뭔지 몰라요. 무의식은 진짜가 뭔지 모르는데 의식은 모르지만 일단은 내질러보니까 이게 전부 다 거짓말로 의식이 나오는 겁니다. 이 의식 차원이 뭐냐 하면 이게 개념 차원이고 언어의 의미 차원이에요.

‘인간은 남을 속이면서 산다’ 할 때 이 문장이 잘못됐어요. 인간이 남을 속이는 게 아니고, 인간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겁니다. 왜? 내가 뭔지 모르기 때문에. 그냥 상황 따라서 내질러보는 겁니다. ‘이게 나 일거야, 이게 나 일거야.’ 내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말씀이 선재하고 그 말씀 활동으로 나의 무의식이 발생되고, 이 무의식을 받아서 거짓말하는 것이 바로 의식이라는.

그러니까 인간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왜냐하면 의식적이기 때문에 전부 다 거짓말하기 때문에. 물론 남을 속이지요. 그러나 본의 아니게 아는 게 있어야 뭐 안 속이는데 본인이 모르기 때문에 그냥 말해보니까 ‘그것 아니네. 미안하다. 다음에 잘할게.’ 이럴 수밖에 없어요. 자체적인 한계밖에 있을 수 없어요. 남을 속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본인의 무의식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기 때문에 무의식을 감추는 식으로 의식적 활동을 한다 이 말이죠. 따라서 인간에서 나오는 것은, 진실이 아니고 전부 다 거짓말만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두 사람이 만났다. 거짓말쟁이 두 명이 만난 거죠. 백 명이 만났다. 백 명이 만나서 전부 다 나누는 언어와 개념이 거짓말이죠. “저기 교회 있네.” “어떤 교회?” “고딕식 건물의 교회 있다.” 그건 교회 아니지요. 본인도 상호 소통되는 날아다니는 개념 하나를 뽑아서 저걸 교회라 하자, 해서 저희끼리 통하는 교회라 했을 뿐이지 교회의 진실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모릅니다. 교회 진실은 모릅니다.

여러분 모른다는 말을 섭섭하게 여기지 마세요. 세상 편한 게 이거에요. 왜냐? 아무 책임을 안 져도 되니까. 짧은 인생 살면서 자꾸 진실을 찾지 마세요. 본인이 힘들어요, 본인이. 남들이 진실을 원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나한테 진실을 원하지 않아요. ‘내게 좀 진실을 이야기하지 마!’ 이것 노래 가사 같다. 노래 제목 같기도. ‘너는 왜 자꾸 나한테 진실을 이야기 해? 차라리 나한테 거짓말을 해. 그게 내가 듣기 좋아.’

자꾸 진실을 이야기하니까 사람이 모든 정신적으로 긴장이 되어 거짓에다가 거짓이 아닌 것처럼 초를 치게 되니까 이중 삼중으로 거짓말을 지어내려하니까 본인만 힘든 거예요. 어차피 인생은 몰라요. 왜? 인생이라 하는 것은 말씀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인간은 말씀에서 나왔어요. 그래서 어지간하거든 말씀으로 미뤄버리세요, 책임을. 내 인생 이렇게 조진 것이 다 말씀 때문에 생긴 거지 나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고 미뤄버리세요.

다시 이야기하지만 고린도전서에서 이런 문제가 발생되게 되면 그거는 말씀 활동입니다. 말씀 활동이 뭐냐? 말씀은 진리거든요. 말씀만이 진리기 때문에 거짓들, 말씀에서 진리가 나오는 현장에서 발생되는 현상이, 진리 때문에 파급되어 폭발하는 이 거짓들이 대표적으로 고린도교회다. 고린도교회니까 사도 바울이 진리에 입각해서 고린도교회를 지적하고 있는 거예요. 아홉 가지 지적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고린도교회는 진리입니까, 진리 아닙니까? 진리 아니죠. 이 진리 아님이 어디서 나왔는가? 진리에서 나왔지요. 그게 바로 고린도교회의 복음입니다. 복음을 전하니까 어느 것 하나 진리 된 게 없어요. 아까 아홉 가지 있지요. 아홉 가지 누가 지킵니까? 아홉 가질 무슨 수로 지켜요? 한 가지도 못 지키는데. 아홉 가지 지키려면 일단 여덟 가지 지키고 난 뒤에 한 가지 안 되는 부분을 열심히 매진해야 되거든요.

만약에 수능에 여러 가지 과목이 있다. 영어, 수학 다 되는데 과학이 안 된다. 그러면 나머지는 된다고 치고 과학을 열중하게 되면 그 과학에 열중하는 순간 수학이 남보다 뒤떨어져요. 이걸 하나 메우려면 저게 터지고, 저걸 메우면 다른 게 터지고. 아홉 가질 언제 무슨 수로 다 지킵니까?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판에, 어떻게 다 지켜요? ‘우리는 이런 고린도교회를 지적하는 말씀에 순종해서 바른 교회가 됩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해석을…. 그것으로 교인들을 주눅 들게 만들고요.

고린도전서 해석을 처음부터 뒤엎어야, 처음부터 해석을 다시 해야 됩니다. 그런 식으로 해석하면 안 돼요. 주의 말씀은 우리의 죄를 지적하기 위해 주신 것이다. ‘죄를 지적하려준 게 아니고 진리가 나오려면 네가 필히 죄인이 돼야 돼. 너의 죄를 고발하는 방식으로 진리가 너한테 출현되는 거야.’ 이게 고린도전서에서 말한 복음입니다.

나는 바르게 사는, 바르게 사는 그게 없어요. 없는데 무슨 바르게 살아요. 우린 바르게 살면 안 돼요. 말씀만 바르게 그 현장에 능력 있게 나타나면 우리 역할은 끝났습니다. 말씀 앞에서 우리는 거짓으로 드러났으면 그거는 제 역할, 제 배역을 제대로 한 거예요.

그래서 첫 번째 시간에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이 아홉 가지 이야기가 어디서 발생되는가? 그 이야기합니다. 진리는 모른다. 근데 진리를 전하게 되게 되면 인간 대 인간 사이에서 진리 작용 때문에 겉으로 거짓과 거짓이 같이 등장하게 돼 있어요. 그러면 인간 대 인간에 있어서 이것은 사람들이 진리는 모르지만 인간에 대해서는 인간세계 속에 살기 때문에 익히 잘 알고 있어요. 익히 잘 아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선 진리의 값어치와 그 능력을 들춰내주는 겁니다.

그럼 인간과 인간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 지금부터 그걸 여러분들이 첫째 시간 아직 정신 좀 있을 때 이 어려운 걸 하겠습니다. ‘인간은 인간 때문에 (힘들어) 못 살겠다.’ 세상에 예수님 때문에 못 살겠다는 그런 인간은 없어요. 인간이 힘든 것은 인간 대 인간 때문에 못 살겠다는 거예요. 못 살면 지리산에 박혀 살든지. 그것도 싫어요. 힘들지만 타인이, 또 남들이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인간 때문에 힘들다는 것은 의식으로서는 ‘잘해보자. 항상 잘해보자’에요. 그런데 의식은 거짓말이잖아요. 무의식은 잘해보자는 게 아니고 다른 말로 종잡을 수 없다. 그래서 두 인간이 등장한다면 이쪽에는 표면적으로는 의식이지만 밑에서는 무의식이에요. 종잡을 수 없는 무의식과 종잡을 수 없는 무의식이 만납니다.

무의식이란 말이 어려우면 쉽게 말씀 드리면 이 사람의 내부는 정신병자거든요. (정신병자)와 (정신병자)의 만남. 정신병자와 정신병자의 만남이 뭘 이루느냐 하면 사회를 이룹니다. 둘 다 종잡을 수 없거든요. 둘 다 정신 나갔어요. 정신 나갔는데 둘 다 아닌 척하고 있어요.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인간 대 인간의 문제에서 나온 거예요. 파벌부터 시작해서 모든 부활도 마찬가지고.

다 문제 생기니까 이것을 정신병자와 정신병자의 만남에서 사회가 어떤 식으로 구성돼 있는가를 이것을 밝힌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바로 라캉(Jacques Marie Émile Lacan, 1901~1981)이란 사람입니다. 라캉이 했던 것을 이 시간에 짧게 해보겠습니다. ‘나는 타인을 원한다.’ 말벗이 되던 뭐가 됐든 난 타인을 원한다. 그다음은 ‘게 섰거라’ 되겠지요. 있는 사람보고 게 섰거라, 이렇게 하는 겁니다.

나는 타인을 원한다(나 → 타인). 그래서 왜 원하는가? 내가 되고 싶은, 타인을 만나서 내가 얻고자하는 것, 정신적 생산물이에요(타인 → 생산물).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얻으려한다. 이것도 정신병자에요. 둘 다 종잡을 수 없어요. 나는 타인을 원한다. 얻고자하는 것을 얻었다(나 → 타인 → 생산물). 얻고자 하는 것을 다시 나한테 돌아와야 되는데 여기서 라캉이란 사람이 그걸 발견했죠. 내가 얻고자하는 것은 나와 합치되지 않는다. 이게 정신병자를 더 심하게 만드는. 이 생산된 것이 진실, 나(주체, 행위자), 타인(타자), 생산, 진실 이게 막혀있는 거예요(생산 ↛ 진실).

나 → 타인
↑ ↓
진실 ↚ 생산

막혀있으니까 나는 너 말고 다른 사람 또 찾아요. 또 찾아서 “게 섰거라. 이야기 좀 들어봐. 내가 이런 일이 있거든.” “아 그런 뜻이었어? 나 안 만났으면 큰일 날 뻔했어. 이게 정답이었구나. 나 왜 몰랐지. 참 고맙다, 친구야.” 그런데 이게 합치가 되지 않아요. 이게 끊어져있어요. 왜 끊어졌느냐? 이미 ‘나’가 남과 만나서 얻고자하는 것은 26분 전의 나에요. 내가 이미 궁금했던 나였다는. 궁금한 것을 해소하고 난 뒤에는 이미 궁금한 것을 아는 상태에서는 더 이상 내가 아는 것은 내 욕망, 그것 말고 새로운 것 가져와야지. 그거는 이미 26분의 구닥다리야. 나 새로움 없으면 못 살아. 내 무의식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은 이제는 시시하다고 차버린다고요.

이런 경우는 티비 예능프로그램에 있어요. <나는 solo>라는 여자 여섯 명, 남자 여섯 명 모여서 선보는 프로그램인데 여자들 힘들게 낑낑거리며 캐리어 몰고 오니까 남자들이 나서서 받아주고 하지요.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정숙입니다.” “나는 광수입니다.” 그때 첫 인상이 그렇거든요. 그런데 그게 이틀, 사흘 쯤 지나면 이제는 식상했어요. 뭐 새로운 것 없나? 역시 정숙이가 낫더라. 결국 여섯 명씩 끝날 때쯤 해서 당신을 선택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끝나요.

그다음에 솔로는 계속된다 해서 다시 26기해서 또 나와요. 나중에 자기가 끊임없이 방송에 나옴으로써 현재 있는 후보자 여섯 명 말고 어느 다른 자리에서 나를 고지하고 어떤 사람을 원했어요, 하면 또 다른 미친 사람이 있을 수가 있기 때문에 그걸 예상해서 연예인처럼 자꾸 나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무의식은 아무리 내가 무의식을 실체를 알려고 해도 접근이 안 됩니다. 욕망이 폭발하기 때문에.

정신과의사들은 그 욕망이 왜 폭발하는지를 이유도 몰라요. 그냥 현상만 다룰 뿐이에요. 모든 인간은 거짓말쟁이고 지 욕망에 미쳐서 그저 남들과 계속 ‘게 섰거라’하고 나쁜 의미에서 남을 이용하는 거죠. 그 사람을 이용해서 자기가 얻고자한 것을 얻어놓고는 그것도 식상해다해서 프랑스 말로 클리셰cliché라 하죠. ‘아이고, 아무것도 아니었네.’ 시시하다 이러면서도 시간은 26분 지나고 며칠 지나서 자꾸 시간을 흘러가고 있는 거예요.

방금 한 이것을 ‘주인담론’ 담론이란 인간 대 인간이 형성하는 사회적 소통채널, 이것을 담론이라 하는 거예요, 여론. 주인이 스스로 주인 되어서 이런 관계로 해서 주인이니까 타인을 뭐로 봅니까? 종으로 삼는 거예요. 그러면 주인담론에서 내가 그 사람을 붙들고 얻고자하는 건 뭐냐? ‘너는 나의 노예가 되어다오, 제발.’

여기 있는 것을 S₁(주인기표) 의미가 담긴 대표. 주인기표의 타인을 S₂, 나의 종의 후보감, a는 내가 원했던 그 무엇. 그런데 그걸 알고부터 나는 다시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고 다시 내가 분열돼 있다는 걸 깨닫는 것, 나는 정상이라 아니란 걸 깨닫는 것($). 이 관계 S₁에서 S₂, a 그다음에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진리로서 치료될 수 없는 것 $, 달러란 뜻이 아니고요. S가 주체가 중간에 쪼개졌다는 뜻이에요. 쪼개졌으니까 이게 무의식이잖아요. 의식에서 다시 나는 안 쪼개진 것처럼 나는 나의 종으로 타인을 구하기 위해서 또 이렇게 되는 거예요.

S₁ → S₂
↑ ↓
$ ↚ a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대학교 캠퍼스에서 기독교단체에서 전도할 때 이 회로가 작동하는 거예요. 누가 내가 아는 성경지식에 뿅 가는 그러한 어떤 타인이 있으면 좋겠다. 여자 같으면 이왕이면 멋진 남자, 남자는 멋진 여자한테 전도하고 싶다. 시시한 것들 니들은 천국 가지 마라. 마음에 드는, 나는 니가 천국 가면 좋겠다. 이러한 주인의식은 뭡니까? 당연히 조작된 거죠. 그러면 이것만 있느냐? 이것만 있는 게 아니에요.

첫 번째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지금 고린도교회 문제가 뭐냐 하는 것을 제가 압축해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이 S₁ 자리에 S₂가 나와요. S₂가 나오면서 미지의 지식을 요구합니다. 미지의 지식을 요구하면서 얻고자하는 것이 뭐냐 하면 분열된 것을 처리, 어떻게 해결해보려고 하는데 S₁에서 끊어집니다.

이게 뭐냐 하면 학생이 대학교 갔어요. 대학교 가서 뭘 원하느냐? 지식을 원합니다. 지식을 원하면 나는 분열된 나를 해소할 것이라는 생각을 기대를 가지고 박사학위를 딴다든지 나는 대학교 졸업하면 지식인이 된다. 그렇게 되면 뭐가 되느냐? 나는 비로소 내가 스스로 지식전문가로 독립할 수 있는 S₁된다 했는데 이 회로에서 뭐가 끊어졌습니까? 내가 아는 분열된 인식으로선 내가 어디 가서 주인 노릇할 수 없다는 사실, 이것을 발견하지요.

(학생)S₂ → a(지식)
↑ ↓
S₁ ↚ $

그래서 이걸 ‘대학담론’이라 합니다. 대학교 내에서 학생들이 교수를 바라볼 때 나한테 새로운 지식을 줄 수 있는 교수를 찾아다니면서 내가 언젠가 네 자리 뺏고야 말리라. 나도 너처럼 전문가가 되고 말겠다는 그 의식을 여기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다음에 재미나는 게 뭐냐 하면 분열된 자아부터 출발하는 게 있어요. 히스테리환자입니다.

히스테리는 자기가 조절하지 않는 어떤 현상, 신체적인데 이건 아무 병도 없는데 신체가 이상하게 조절이 안 되고 멈출 줄 몰라요. 그만큼 그 사람 몸에서 정신이 더 강렬해서, 여러분 히스테리라 하는 것은 그냥 뭡니까? 발작하는 거죠. 그냥 팍 터져버리는, 발작하는 것. 이 히스테리가 누굴 만나느냐 하면 S₁, 다시 말해서 든든한 믿음직한 사람을 찾아요.

히스테리 환자가 내 병을 고쳐서 내가 남 보기 우사스러운 신체적인 불구의 모습을 안정시켜서 ‘저 사람 정상이야. 이제는 정신병 아니야’ 해줄 수 있는 멀쩡한 사람을 찾습니다. 환자가 의사를 찾아요. 그 사람이 내가 원하는 것은 어디 가도 내가 독자적으로 문제없는 깨끗한 주인 같은 행세를 하고 싶어서 이렇게 하는데 그것이 어디서 막히느냐? S₂로 가는데 이게 차단되게 돼 있어요.

아까와 비슷해요. S₁이 되고자 했는데 나 혼자는 고쳤는데 남들이 나를, ‘너 똑같아. 너 안 고쳐졌어’ 이런 거예요. 병원에 가서 환자를 고쳤는데 친구들이 보니까 “너 똑같아.” “아니 나 똑같은 게 아니야. 분명히 그걸 감정을 느껴. 나 벌써 고침 받았어. 나는 정상이야.” “너 정상 아니야.” “진짜 정상이야.” “너 의사한테 속았어.” 이게 히스테리. 내가 진정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전문 의사를 찾아가고 고치려했는데 이것이 막혀있다. 이게 ‘히스테리담론’이에요. 정신병자가 병원을 찾는 심리의 순환구조.

(히스테리 환자) $ → S₁
발작 ↑ ↓
a ↚ S₂

마지막으로 하는 것은 ‘분석가담론’이란 게 있어요. 분석가담론은 정신과 의사가 환자를 찾아다니는 거예요. 정신과 의사가,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심리에 대해서 난 도사입니다. 정신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어요.’ 분석가 전문가가 정신병 걸린 분열된 자아를 찾습니다. 찾아서 얻고자하는 것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당당한 주체 인간으로 되고자 원하지요. 하지만 이 사람은 하나의 주체, 인간이 되질 못합니다. 주체로 심어져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어디 나가도 남들이 나를 원하는 타자다운 타자가 되기를 원하지만 이것은 실패합니다.

a → $
↑ ↓
S₂ ↚ S₁

결국 이 네 가지 담론의 공통적 주제가 뭡니까? 실패다. 실패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실패한 이유는, 본인이 이렇고 남들이 이렇다는 것을 딱딱 지적이 돼야 이게 실패했는지, 성공했는지 여부가 되는데 처음부터 돌아가는 모든 자료가 전부 다 거짓말로 돌아가는 사회기 때문에 성공한다는 자체도 뭐가 돼요? 이게 실패의 다른 모습에 불과한 거예요.

자, 이 네 가지를 가지고 고린도전서에 적용을 해봅시다. 첫 번째, 내부 파벌.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오지요. 아볼로파, 게바파 나옵니다. 여기 1장 12절에 보면,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이렇게 돼 있어요.

그럴 때 사도 바울이 그들을 치료합니까? 치료를 안 해요. 치료라는 것은 성립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남한테 타인이잖아요. 분석가담론 돼요. 사도님이 나를 치료하기를 바라는 이 자체는 교회가 아니고 정신병동이에요. 사도 바울은 절대로 치료를 안 해줘요. 사도 바울의 특징은 뭐냐? 남을 구원을 안 합니다. 자기 자신이 기능인이 남을 구원할 수가 없어요. 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만약에 자기가 남을 구원해버리면 자기가 메시아 돼버려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1장 13절에서 뭐라고 하냐 하면, “나는 십자가를 지지 않았다”고 이야기해요. 오늘 오후 설교했던 것 보충 설명할 게 하나 있어요. 오후 설교 때 이런 이야기했어요. 원탁에 마주 앉을 경우의 수는 몇 가지냐, 수학적으로? 딱 한 가지밖에 없어요. 그걸 대칭성이 깨졌다고 이야기하는 건데. 한 가지밖에 없다는 말은, 인간이 신을 믿을 때 골라잡아 믿어요. 골라먹는 재미있잖아요. 다수가 돼요.

신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일본은 신들이 백만이 넘는다는데 인도에는 더 많고요. 그렇게 많이 있더라도 오직 하나님은 한 분이란 것을 어떻게 나타내느냐? 나와 마주할 수 있는 자만이 나의 백성이 된다는. 여호와가 골라잡을 신 중의 하나가 아니고 하나님 자기와 마주할 수 있는 사람, 조건이 뭐냐? 마주하면 다 죽어요. 출애굽기 33장에서.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20절)

그래서 하나님 쪽에서 자기 얼굴을 사람들이 봐도 안 죽을 수 있는 정도까지 자기 얼굴을 낮춰버렸어요. 빌립보서 2장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8절). 자기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을 감춰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감췄다는 말은, 이것은 뭐가 돼요? 주님이 자기 영광, 하늘의 영광을 감췄다. 이게 고린도전서에 계속 나오고 다른 데 골로새서도 나와요.

감췄다는 말은 뭐냐? 주님은 뭐다? 이것 아는 사람 있어요? 주님은 뭐다, 뒤에? 기대하는 제가 나빠요. 주님은 거짓말쟁이에요. 모조리 거짓말이니까 주님도 거짓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를 믿는 것은 진짜라 하는 것은 거짓말이에요. 쉽게 말해서 ‘네가 구라 떠는 것보다 내 구라가 더 셀 걸’ 이거에요. 어디서 내 거짓말 앞에서 네 구라를 떨어, 이런 거예요.

신천지가 이단이라 하잖아요. 그것 어설픈 이단이에요. 진짜 이단은 주님뿐입니다. 아무도 그 구라를 따라올 수가 없어요, 거짓말을. 그래서 누가 주님 앞에 다 엎어지느냐 하면 진리를 원하는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 이런 사람들은 예수의 말이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진실을 찾기 때문에 그들은 십자가 앞에서 전부 다 자빠지게 만들었어요. 엎어지게 만들었어요. 진리를 어디 쨉도 못 되면서 주제파악도 안 되면서 거짓말쟁이가 무슨 진리를 그게 왜 필요합니까?

그거는 주인담론, 대학담론 그렇지요. 그걸 획득해서 내가 지금보다 발전하고 완전하게 된다는 그러한 노림수, 도대체 우리의 욕망이 완전이 그게 성에 안 찹니다. 이미 완전하다 하는 그것도 식상해요. 다 지나간 거예요. 이 세상에 진리를 말하는 자는 오직 사탄, 악마밖에 없습니다. 마귀가 자기가 진리에요. 그러니까 성경에서 사탄을 뭐라고 합니까? 거짓말쟁이지. 이 땅에서 주님마저 거짓말을 이야기했는데 사탄은 이 땅에서 진실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왜 예수님이 거짓말이냐 하면 땅의 의미는 말씀이 아니고 말이에요. 인간의 말은 소통에 목적이 있습니다. 소통하기 위해서. 소통이 될 때 인간은 단합이 되고 결합이 돼요. 결속이 됩니다. 이게 사회에요. 인간사회는 인간의 공동체는 의를 생산하는 것으로 단합된다. 샌델(Michael J. Sandel, 1953~ )이 지은 책, <정의란 무엇인가>에 나오지요.

인간이 왕을 뒤엎고 근대국가가 되면서 모든 헌법에서 모든 단체에서 정부에서 외치는 게 뭐냐? 이 사회는 justice 정의로워야 된다는 거예요. 도대체 이런 거짓말이? 이런 사탄적인 것. 지금 1분 초과됐습니다. 10분 쉽시다. 중요한 대목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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