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표준말
2025년 7월 9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14:25-28
14:25 르호보암 왕 제오년에 애굽 왕 시삭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치고
14:26 여호와의 전의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몰수히 빼앗고 또 솔로몬의 만든 금방패를 다 빼앗은지라
14:27 르호보암 왕이 그 대신 놋으로 방패를 만들어 왕궁 문을 지키는 시위대 장관의 손에 맡기매
14:28 왕이 여호와의 전에 들어갈 때마다 시위하는 자가 그 방패를 들고 갔다가 시위소로 도로 가져갔더라
신약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개인적인 사항에 관심을 둡니다. 내가 죽으면 천국 갈거냐 지옥 갈거냐에 마음 깊숙이 번민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구약 시대에서는 천국이냐 지옥이냐가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이냐 이방민족 사람이냐로 분류가 지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었으면 이는 하나님 백성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지 못하면 저주받은 민족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개인별로 구분될 문제가 아니라 집단별로 구분되는 문제입니다. 소속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그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없는 이방민족으로부터 침노를 당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참으로 제대로 된 이스라엘인가에 대한 규정이 모호해지게 됩니다.
특히 예루살렘이나 성전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 성전에 있는 금이나 각종 보석들이 이방민족인 애굽의 시삭에게 당하게 만 겁니다. 과연 무엇을 두고 참된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명백하고 확실하고 명쾌하게 드러내시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중단하신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방민족인 애굽을 통해서 하나님의 소유된 이스라엘을 침공토록 하신 것은 이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분명하게 밝히 드러내시는 작업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에 오면 최종적인 천국 백성의 모습이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로마서 14:7의 말씀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즉 제대로 된 이스라엘은 이런 모습을 보이는 자들의 집단이요 소속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천국에 들어오지 못하는 자들은 ‘자기를 위해서 살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의 천국과 지옥은 구약에서는 이스라엘과 이방민족으로 구분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르호보암 왕 시절에 애굽 나라가 침공한 것은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만큼 그들이 제대로 된 하나님 나라 백성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즉 하나님을 거론하면서 실은 ‘자기를 위한 하나님, 자기를 위한 이스라엘’로 이해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점을 지적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애굽나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침공토록 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르호보암 왕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배신하고자 했을까요? 아닙니다. 역대하 11:16-17에 보면,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 마음을 오로지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이 레위 사람을 따라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고자 한지라 그러므로 삼 년 동안 유다 나라를 도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을 강성하게 하였으니 이는 무리가 삼 년을 다윗과 솔로몬의 길로 행하였음이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딱 삼년 동안입니다. 그런데 그랬던 왕이 열왕기상 14:22-25에 보면, “유다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열조의 행한 모든 일보다 뛰어나게 하여 그 범한 죄로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으니 이는 저희도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 산당과 우상과 아세라 목상을 세웠음이라
그 땅에 또 남색하는 자가 있었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국민의 모든 가증한 일을 무리가 본받아 행하였더라 르호보암 왕 제오년에 애굽 왕 시삭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르호보암은 처음 삼년 동안에는 자신의 존재보다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먼저였습니다.
하지만 삼 년 지나고 난 뒤부터는 이스라엘의 막강한 부를 자신과 이스라엘의 소유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즉 예언의 존재보다 자신의 존재가 우선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을 두고 로마서 14:7에서는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라고 규정한 겁니다. 즉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 할지라도 인간내부에는 이방민족적 의식이 자리잡고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예언 해석은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이 나타나야 합니다. 신약에 와서야 하나님 관점이 인간의 관점을 얼마나 다른지가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신명기 21:22-23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자칭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이스라엘은 이 예언에 대해서 자신들이 명쾌하게 해석이 가능하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갈라디아서 3:13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안목으로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즉 율법은 인간 전체에 대해서 ‘저주의 대상’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안목으로 자신을 보라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을 가지고 세상을 제대로 보라고 합니다. “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
역대하 12:7에 보면, 하나님의 예언의 다음 절차를 보여주십니다. “여호와께서 저희의 스스로 겸비함을 보신지라 여호와의 말씀이 스마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저희가 스스로 겸비하였으니 내가 멸하지 아니하고 대강 구원하여 나의 노를 시삭의 손으로 예루살렘에 쏟지 아니하리라”(대하 12:7)
즉 진정한 천국 백성은 자기 내부에 자신의 실패를 담고 있는 자입니다. 마치 총알 안에 폭약이 장착되어 있어 그 폭탄이 터지면서 그 추진적으로 목적지를 향하여 날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건성으로 자신이 아버지의 자식으로 여겼던 둘째 아들이 일찍 아버지의 유산을 빼내어 타국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다 써버리고서는 거지꼴로 아버지 집에 들어올 때, 비로소, 아버지로부터 “너는 내 아들”이라는 사랑의 음성이 그토록 감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진정한 왕이란 이처럼 천국 백성들이 통해서 말을 창조하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과 백성들이 상호 통하는 언어입니다. 즉 자신의 실패를 품고 살아가는 성도 자체가 유일하게 천국에서 통하는 천국의 표준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후 3:3)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우리 안에 있는 구원 실패가 곧 하나님의 손길임을 느끼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8강-열왕기상 14장 25-28절(천국표준말) 250709-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14장 25-28절입니다.
열왕기상 14:25-28
“르호보암왕 제 오년에 애굽 왕 시삭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치고 여호와의 전의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몰수히 빼앗고 또 솔로몬의 만든 금방패를 다 빼앗은지라 르호보암왕이 그 대신 놋으로 방패를 만들어 왕궁 문을 지키는 시위대 장관의 손에 맡기매 왕이 여호와의 전에 들어갈 때마다 시위하는 자가 그 방패를 들고 갔다가 시위소로 도로 가져갔더라.”
예루살렘은, 다윗의 고백에 의하면 하나님이 차지하게 했던 겁니다. 솔로몬 성전은, 솔로몬의 고백에 의하면 하나님에 의해서 지어진 집입니다. 애굽 왕 시삭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치고 하나님의 성전에 있는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가져갔다는 것은,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면 빼앗긴 것이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하나님, 하나님 입장에서는 ‘그 성전과 예루살렘이라는 도성, 이스라엘 나라 전체가 누구 소유인가?’라는 그 점을 다시 한번 환기시키는, 그것을 깨우치는 계기가 된 겁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빼앗겼다’인데, ‘빼앗겼다’라는 그 말이 좀 문제가 있지요. 원래 자기 것도 아닌데 뭘 빼앗겨요?
예루살렘이 자기 것 아니잖아요. 성전이 자기 것 아니잖아요. 왕궁의 보물이 자기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마치 자기 것인 양 여기는 이스라엘을 깨우치기 위한,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식은 뭐냐? 하나님의 방식은, 전혀 하나님 모르는 이방 민족이 와서 이스라엘의 것을 몽땅 빼앗아 가고 가져가는 거예요.
전쟁을 통해서 빼앗기게 하는 것, 그것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아하, 처음부터 우리 쪽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뭔가 잘못 생각했다’라는 것을 알게 하지요. 오늘 본문 보면서 이렇게 정리하시면 쉽습니다. 애굽 왕 시삭, 이방 민족이지요. 그리고 빼앗겼다고 여기는 솔로몬왕의 금, 성전, 예루살렘 이것은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 두 부류를 통해서 세상 전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모든 인간은 두 부류로 나뉘어서 살아집니다. 보통 신약의 사람들은 ‘천국 가는 사람들이 한쪽 부류이고, 지옥 가는 사람들이 또 한쪽의 부류다.’ 그렇게 이야기들 하잖아요.
그런데 구약적으로 이야기하면 이렇게 됩니다. “한쪽은 이스라엘 쪽이고 나머지 한쪽은 이방 민족이다. 너희는 둘 중 어디에 속할 것이냐?” 이렇게 묻습니다. ‘천국이냐 지옥이냐?’ 하는 것은 너무 개인적인 입장이지만 하나님께서 구약 때부터 ‘이스라엘이냐, 이방 민족이냐?’ 하는 것은 집단 단위로 하나님이 다루시는 거예요.
“저는 죽으면 어디에 갑니까?”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저 원래 소속이 어디입니까?”라는 질문을 해주는 것이 구약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일관된 일하심과 부합되는 거예요. “나 죽으면 천국 갑니까, 지옥 갑니까?”라는 자기의 사적인 구원에 성급해서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일단은 구약을 거쳐오너라.” 하는 겁니다.
구약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함께 있으니까 구원된 민족이다. 반면에 이방인은 뭐냐? 하나님이 함께 있지 않기에 저주받은 백성이다.’ 그렇게 되지요. 그렇게 구분을 딱 짓는데 분명히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어요. ‘이방 민족은 저주받고 우리는 복 받는다’라고 했는데 오늘 본문의 경우에 ‘어? 도리어 이방 민족이 이스라엘에 쳐들어와서 이스라엘에 있는 하나님의 것들을 빼앗아 갔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우리는 뭐지? 우리 소속은 뭐지? 진정 우리가 이스라엘 소속이냐?’라고 스스로 물을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한 겁니다. 맞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니었어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라고 스스로 여겼던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이방 민족, 같은 인간인 이방 민족과 본인들을 비교해서 그래요.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과 이스라엘을 비교하는 기준 같은 것은 없고, ‘우리는 태생이 아브라함 자손, 이스라엘 자손이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이고 저쪽은 저주다’라고 일방적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을 지금 하나님께서 교정하지요. 수정하는 겁니다.
설교의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릴게요. 복잡한 것이 있기 때문에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립니다. 천국 갈 사람이 그렇게 많이 필요가 없어요. 천국 갈 사람의 그 숫자가 많이 필요가 없고 중요한 것은 천국이 어떤 나라인지, 천국의 본질과 성격만 드러내면 그걸로 몇 명이 되었든 충분합니다. 두 명이든 세 명이든 ‘천국은 이렇다’고 명쾌하게, 명확하게 성질을 딱 드러내면 그것으로 하나님 입장에서는 기뻐하는 거지요.
노아 때 방주에 들어간 사람이 여덟 명밖에 없었습니다. 한 식구 여덟 명.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그다지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여덟 명이 천국이 뭐냐, 하나님의 뜻이 뭐냐, 언약이 뭐냐를 명확하게, 아주 명백하게 제대로 드러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성공작이다, 성공한 것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따라서 결론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켜 보시기 바랍니다. 내 친구가 몇 명이니, 내가 아는 사람이 몇 명이니, 나를 보호해 줄 사람이 여러 명이 된다는 그런 것 좀 자랑하지 말고, ‘내가 보여줄 명백한 천국의 모습은, 나를 통해서 나타난 천국의 모습은 확실하게 어떤 천국이냐?’를 보여줘야 합니다.
보여주는 방법은 뭐냐? 소속이 어디냐를 분명히 알면 되지요. 그러면 내 소속이 어디냐를 분명히 아는 방법은 어떤 것이냐? 그게 오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루는 방법입니다. 내 소속을 어떻게, 어떻게 천국의 본질을 드러내느냐?
■1일단 실패하세요. 구원에 실패하세요. 구원에 성공하면 안 돼요. 구원에 실패하시고, 그 실패한 그것을 여러분 안에 내장하세요. 내가 천국 간다고 까불다가 실패했다는 그것이 분명히 있어야 하고, 그 실패한 것을 그냥 버리지 마시고 내 안에 그것을 딱 담아두신다면 그 사람이 진짜 이스라엘입니다.
진짜 이스라엘은 엉터리 이스라엘로부터 시작해서 엉터리 이스라엘이, ‘저 이방 민족은 지옥 가.’라고 으스대는 그 엉터리 이스라엘이 되려 이방 민족한테 된통으로 당할 때 …, ‘내가 이스라엘이다. 어? 그런데 이방 민족한테 져버렸다? 그러면 난 뭐지?’라고 실패했을 때 그 실패한 경우를 버리지 마시고 그걸 우리 안에 삽입을 시켜놓는 거예요.
삽입을 시켜놓으면 사람이 어떻게 변하느냐? 가짜 이스라엘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이여, 저는 어떻게 하면 성도가 될 수 있고, 어떻게 하면 창세 전부터 택한 백성이 될 수 있고, 어떻게 하면 천국 백성 될 수 있습니까?” 질문을 처음에는 그렇게 해요. 요거 백 프로 가짜입니다. 이게 가짜인데 어떤 인간도 이 가짜부터 시작해요, 가짜부터!
진짜는 모호해요. 몰라요. 그렇게 가짜부터 시작하는데, 그래서 ‘나는 진짜 성도 맞고 천국 간다.’라고 했는데 오히려 지옥 가는 사람에게 된통으로 당하지요. 지옥 가는 사람에게 우세를 다 당하는 겁니다. 배후에서 누가 그렇게 하는가? 배후에서 주님께서 그렇게 해요. 천국의 주인 되시는 주님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2그렇게 해 놓고 ‘아하, 나는 내가 천국 가는 백성인 줄 알았는데 저 지옥 가는 인간들보다 더 못하네. 저들하고 나하고 차이점이 없네. 생각이나 사고방식이나 살아가는 모습이 똑같네. 저들이 추구하는 것이나 내가 추구하는 것이 다를 바가 없네. 노골적으로 하나님 안 믿고, 노골적으로 나는 천국이니 지옥이니 인정하지 않는다, 성경의 어떤 내용도 무시한다는 사람들과 내가 같은 소속이 아닌가, 같은 유가 아닌가?’라는 것을 파악해 줘야 해요.
주일 낮에도 이야기했지만, 특이성이 하나도 없어요. 똑같아요. 다른 점이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른 점을 주시는데 ‘내가 이방 사람하고 똑같아. 천국의 모습이 아니고 지옥의 본질을 드러내.’라는 것을 알았으면 그 알게 된 것을 버리지 마시고 딱 여러분 안에 딱 장착하라고요.
■3그렇게 집어넣게 되면 그 사람은 뭐가 되느냐? 예언이 됩니다, 예언이 돼요. 하나님의 말씀 덩어리가 되는 거예요. 이것을 제가 그냥 말로 하기보다는 성경을 찾아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로마서 14장 7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이 말씀이지요.
한 번 더 읽을게요.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지금 사도바울이 천국 백성은 천국의 본질을 드러내야 한다는 거지요. 명백하게 천국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해요. 천국 갈 사람이 몇 명이 모였느냐, ‘몇 명이 모였으냐?’를 생각하지 말고 너부터 잘해요.
너부터 천국의 본질을 드러내는데 천국의 본질을 드러내는 그것이 뭐냐? 나는 잘했습니다, 나는 믿었습니다, 가 아니라 천국의 본질은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드러냈습니다.’가 천국의 본질이 되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로마서 14장 7절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그리고 “이것이 천국 가는 사람의 본질이다.”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이 본문을 프린트해서 교인들에게 앞앞에 나눠주는 거예요. 그냥 종이로 주면 찢을 수가 있기 때문에 액자로 만들든지 아니면 코팅해서 각자에게 주는 거예요. 주면서 “당신은 이 말씀에 부합됩니까, 아니면 이 말씀과 어깃장 났습니까? 일상생활에서, 아침에 눈 뜨면서부터, 아니 꿈속에서까지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이 말씀과 같습니까, 다릅니까?”를 제시해 보는 거예요.
제시해 보면…, 결과를 여러분에게 굳이 제가 말을 해야 하겠지요? 이 땅에 출생해서 죽을 때까지 단 1분이라도, 단 1초라도 자기 빼놓고 생각하는 것이 없어요. 예수든, 하나님이든, 또 교회에서 남을 위해서 뭘 하든 전부 다 자기를 위해서 하는 일이에요. 그리고 죽는 것도, ‘죽으면 안 되지, 나 죽으면 안 되지….’ 자기를 위한 것과 결부해서 죽음을 생각합니다.
■4그러니까 로마서 14장 7절의 말씀을 코팅하거나 액자로 한 것을 날마다 쳐다보게 되면 전혀 이것은 천국 가는 모습이 아니고, 오히려 천국이 쏙 빠져 있어서 백 프로 지옥 가는 모습으로 우리가 나타나는 겁니다. 어떻게 말씀이 시원하지 않습니까?
이 시원한 말씀을, ‘모르겠어. 나는 말씀 더는 안보겠어!’ 이렇게 하지 말고, 로마서 14장 7절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그때부터 이 말씀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 죄인으로, ‘전혀 이 말씀을 내 힘으로 달성할 수 없었다’를 규정 받은 자로 초청을 받아요.
이게 뭐냐? 진짜 이스라엘이에요, 진짜 이스라엘! 진짜 이스라엘입니다. 이 세상에 진짜 이스라엘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조리 가짜 이스라엘이고 저쪽은 아예 이스라엘도 모르는 이방 민족이고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주니까 가짜 이스라엘이 이렇게 오해한 거예요.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이 말씀을 줬다.’ 이렇게 그들은 오해를 했던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것이 아니고 말씀을 위하여 이스라엘이 뽑힌 거예요. 그걸 ‘택함받았다’라고 하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예요. 인생을 살면서 평생동안 나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제대로 된 하나님의 말씀, 예언이 내 속에 파고들어 오니까 이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위해서 말씀 지키지 못하는, 그것도 제대로 못 지키는, 정말 못 지키는 우리를 말씀이 초청해서 말씀의 사람으로 만든 거예요.
지금 이야기한 것을 하나의 세상 예로 드는데 제가 생각해도 딱 안 맞는, 좀 적절하지는 않은 듯하지만 억지처럼, 막 억지로 집어넣는 것처럼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5‘천국을 향하여 정신없이 날아가는 사람은 마치 폭발하는 폭약을 지닌 총알과 같다.’ 들어보니 별로지요?
총알이 날아가는데 그냥 날아가는 것이 아니고, 안에 폭약이 폭발하면서 그 폭발의 추진력으로 인하여 정신없이 앞뒤 안 보고 그냥 천국으로 날아가는 거예요. 왜? 안에서 폭약이 터지기 때문에. 그 폭약이 뭐냐 하면, ‘너는 말씀을 한 번도 지킨 적이 없다.’라는 폭약이에요. 그게 추진력이 돼요.
그게 되지 않으면 천국 쪽으로 못 가요. 실컷 말씀 지키고 지옥 가고 있다고요. 자, 이것이 과연 성경에서 일관된 하나님의 뜻인가? 그 본문이 오늘 우리가 봤던 열왕기상 14장의 르호보암 이야기입니다. 과연 르보호암 이 사람이 일종의 총알에 해당하는지 그것을 따져봐야 하겠지요.
역대하 11장 16-17절에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 마음을 오로지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이 레위 사람을 따라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고자 한지라 그러므로 삼 년 동안 유다 나라를 도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을 강성하게 하였으니 이는 무리가 삼 년을 다윗과 솔로몬의 길로 행하였음이더라.”
이게 무슨 뜻입니까? 솔로몬의 후계자인 르호보암 왕은 3년 동안 다윗과 솔로몬의 길,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예언이 자기 존재보다 더 우선이다, 먼저 있었다.’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봐야 하지요.
열왕기상 14장 22-24절에 “유다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열조의 행한 모든 일보다 뛰어나게 하여 그 범한 죄로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으니 이는 저희도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 산당과 우상과 아세라 목상을 세웠음이라 그 땅에 또 남색하는 자가 있었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국민의 모든 가증한 일을 무리가 본받아 행하였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르호보암 왕이 앞장서서 우상을 섬겼고 모든 백성들은 왕이 하는 대로 본받아서 같이 우상을 섬겼더라.’ 그러고 난 뒤에 오늘 본문 25-26절에 “르호보암왕 제 오년에 애굽 왕 시삭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치고 여호와의 전의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몰수히 빼앗고 또 솔로몬의 만든 금방패를 다 빼앗은지라.” 이야기가 이렇게 되거든요.
그러면 뭡니까? 3년 동안은 뭐예요? 3년 동안은 무엇이 우선이었다? 내 존재보다 무엇이 우선이었어요? 하나님의 예언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 했잖아요. 자, 한번 생각해 봅시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변해요? 원래 변해야 사람이에요. 변하는 게 사람입니다.
분명히 3년 동안 하나님만 생각했어요. 뭐, 자기도 생각했겠지만 우선적으로 하나님 말씀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3년이 딱 지나니까 나라가 태평이에요. 나라가 부강했습니다. 그럴 때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느냐 하면, ‘내가 빡세게, 아주 악착같이 여호와 말씀을 지켰더니만 하나님께서 나에게 복을 주었구나.’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서울 대학 들어가려고 중학교 때부터 열심히 빡세게 해서 서울 대학 들어갔습니다. 들어가고 나서 공부를 더 세게 해야 되는데 서울 대학 뱃지 달았다고…, 옛날 우리 클 때는 서울대학교 뱃지가 있었어요. 서울 대학 교복도 따로 있었어요. 변별성을 더한다고. 그래서 촌에 내려올 때 서울 대학 교복 입고들 내려왔어요. 서울 대학 되고 난 뒤에는 이제 됐으니까, 뱃지 달았으니까 미팅이나 하고 돌아다니고 학점 날리고 제때 졸업도 못 하는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은 본인을 몰라요.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만 잘 섬긴다고 생각하지, 하나님 섬기는 것이 나의 잘남과 의로서 축적이 되고 누적이 된다는 걸 인간은 몰랐던 겁니다, 자기 자신을요. 하나님 잘 섬기면 그냥 잘 섬기는 걸로 생각했지, 그 잘 섬기는 것에 대해서 은근히 자기가 보상을 기대하는 그런 인간인 것을 본인이 몰랐어요.
본인이 몰랐다는 말은 뭐냐? 본인이 선악 지식을 이미 장착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던 거예요. ‘선하면 상 받고 나쁜 짓을 하면 벌받는다. 선하면 천국 가고 나쁜 짓 하면 지옥 간다.’ 복음 듣고 난 뒤에는 이걸 청산했다고 생각했는데 복음 듣는 것이 또 하나의 선행처럼 간주 되어서, 착한 일로 간주 되어서 ‘내가 예수를 믿으니까 천국 간다.’ 이런 생각을 하는데 이게 가짜 이스라엘이에요. 이게 가짜 이스라엘입니다.
제가 지금 이야기하면서 빠진 게 있어요. 진짜 이스라엘이 뭐냐? 그게 빠졌어요. 진짜 이스라엘 알려드릴 차례죠. 역대하 12장 7-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6절부터 보면 “이에 이스라엘 방백들과 왕이 스스로 겸비하여 가로되…”
애굽의 시삭이 쳐들어오고 난 그 사건 뒤에 7절에 “…여호와는 의로우시다 하매 여호와께서 저희의 스스로 겸비함을 보신지라 여호와의 말씀이 스마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저희가 스스로 겸비하였으니 내가 멸하지 아니하고 대강 구원하여 나의 노를 시삭의 손으로 예루살렘에 쏟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저희가 시삭의 종이 되어 나를 섬기는 것과 열국을 섬기는 것이 어떠한지 알게 되리라 하셨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제 진짜 이스라엘은 어떤 이스라엘이냐? 하나님이 내 인생을 망쳐놓은 것에 대해서 “하나님, 참 잘하셨습니다. 저희에게 참 잘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내 인생이 망쳐져도 당연한 존재입니다.”라고 자기 자신을 제대로 인정할 때 그게 뭉텅이로 천국의 본질이 나오는 거예요. 면류관도 그냥 주님 앞에 던져버려요. “내 까짓 게 면류관을 왜 써? 저 쓸 군번이 못 됩니다. 주님이 쓰셔야 하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 보여주는 세 번째에요.
첫 번째는 뭐냐? 하나님이 함께 있기 때문에 진짜 이스라엘이라고 착각하는 것. 두 번째는 뭐냐? 자기가 개무시했던, 하나님을 안 믿는 이방 민족이 내 인생을 완전히 우습게 보고 아주 작살내는 것. 그런데 그걸 누가 하셨느냐?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
아까 본 로마서 14장 7절처럼 하나님 믿는다고, 하나님 믿는다고 했지만 사실은 속으로는 ‘살아도 나를 위해 살고, 죽어도 나를 위해 죽는 것’ 그 생각으로 가득 찬 채 매일 매일을 살아갔잖아요. 하나님 예언과 전혀 안 맞는 생활을 했다, 이 말이죠. 그게 두 번째에요.
세 번째는 뭐냐? ‘아하, 내가 하나님의 예언을 내 힘으로 지킬 능력이 아예 메말랐구나. 그런 게 아예 전혀 없구나.’ 그것을 알게 된 거예요. 알게 된 사람의 특징은 그 안에 뭘 집어넣느냐? 하나님 예언의 말씀이 그 사람 속에 들어와 있어요.
들어와 있으면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예언이, 총알 안에 장착된 폭약이 터지는 것처럼 안에서 말씀이 계속 터지면 터지는 그 추진력으로 매일 같이 한 걸음 두 걸음, 지옥 쪽이 아니고 천국 쪽으로 가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방향을 천국 쪽으로 갈 때 내가 하는 모든 게 죄뿐이라는 고백을 아주 너무나 가볍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는 겁니다.
자, 이렇게 제가 오늘 본문을 설명했는데요. 여러분들은 이렇게 생각해요. “목사님, 르호보암은 구원받았습니까? 이스라엘은 구원받았습니까?” 또 이런 질문이 나오죠. 질문을 그렇게 하면 안 돼요. “하나님의 예언이 말씀이, 다윗까지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 르호보암을 이렇게 사용했듯이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사용했습니까?” 이렇게 질문해야 해요.
또 질문을 “르호보암에게 찾아왔던 그 말씀이 말씀대로 효력을 나타낸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도 말씀이 어떤 효력을 내고 있습니까? 르호보암 같은 효력을 지금도 내고 있습니까?” 질문을 이렇게 해야 하죠.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답변을 어떻게 하느냐? 르호보암은 어떻고, 우리는 어떻고 이런 식으로 답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답변하는가? “예수님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항상 질문의 핵심은 예수님이지 “우리가 어떤 걸 챙겨야 합니까?” 이거부터 성급하게 챙길 생각 하면 안 돼요.
예수님에게 예언은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신명기 21장 22-23절을 보겠습니다.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나무 위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서 저주받을 짓을 했으면 나무에 매달고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고 그다음에 내려놔라. 왜? 만약에 밤새도록 나무에 달려있으면 하나님 나라의 땅이 지저분해지고 추잡하고 더러워지니까, 율법을 어기면 저주받는다는 그것만 하고, 다시 나무에서 내려놔라.’ 이 대목이에요.
이 대목을 가짜 이스라엘, ‘여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라고 여겼던 가짜 이스라엘 사람들이 신명기 21장 22-23절을 보면서 여러분 뭘 생각했겠습니까? 이방인들에게는 뭐가 없느냐? 율법이 없어요. 그러나 이스라엘에게는, 우리가 진짜기 때문에 하나님이 진짜 율법을 줬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율법에는 명백한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고, 그 율법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역량이 우리한테 있어서 하나님이 말씀을 줬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들이 이걸 보면서 하나를 딱 끄집어냈을 거예요. 뭐냐? ‘누구든지 나무에 달려 사형당한 사람은 백 프로 하나님께 저주받아서 인생 끝장났다.’ 그렇게 평하겠죠.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는 사도바울이 그 대목을 이렇게 가져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에요. 죄가 없으신 분이면 ‘죄가 없다’라는 식으로 인간에게 찾아오면 되는데, 인간들 자체가 본인이 가짜인 줄 몰라요. 이방인은 기본이고 이스라엘도 가짜인 줄 몰라요. 그래서 우리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뭘 거치게 하느냐 하면, 가짜 이스라엘이 성경 말씀을 해석할 때 가짜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가짜로 해석하는 인간 성경 해석의 한계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 한계를 보여주기 위해서 죄도 없으신 분이 아버지한테 저주받기 위해서 하필이면 나무 위에 달린다는, 나무 위에 달려서 사형당하는 그 코스대로 우리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에게는 몸이 우선이 아니고 뭐가 우선이냐?
하나님의 예언이 우선이에요. 신명기 21장 22-23절의 말씀이 우선입니다. 그 말씀을 자신의 몸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사실 이스라엘 왕이 해야 할 일이 이런 일을 했어야 했어요. 다윗도 솔로몬도 그 일을 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솔로몬에게 칭찬을 한 것은, 왕이라는 것이 “예언이 먼저 있고 그다음에 우리 몸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로만 할 것이 아니고 실제로 “하나님의 권세가 먼저 있고 그 권세에 의해서 내가 왕의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에 이 왕 자리는 ‘하나님의 권세가 이렇습니다.’를 보여주는 자리”인 거예요.
하나님의 권세가 먼저가 아니면…, 하나님의 권세가 빠져 있는 민족이 이방 민족이거든요. 자, 이걸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목사님, 참된 이스라엘이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고 물으면 전 이렇게 답변하고 싶어요.
“참된 이방 민족이 뭐인지를 먼저 생각하세요.” 진짜 이방 민족은 율법이 없어서 이방 민족이라고 생각하겠죠. 아닙니다. 율법을 줘도 이방 민족화된 유대인과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현대의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율법이 있는데도 이방 민족이었어요. 왜 그럴까요?
그건 제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있고 말씀이 우리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백날 그 이야기를 백번 천번 이야기해 봤자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말씀보다 내가 더 소중하다’라는 것을 도대체 부정할 수가 없어요. 부인할 수가 없다고요. 타고난 이방 민족이에요.
“말씀이 그렇게 되니까 내가 했습니다.” 이게 이론상 돼요. 이론은 되는데 필링, 느낌상은 이상하게 말씀이 어떻다는 기쁨보다도 내가 잘됐을 때의 기쁨이 더 큰데 어떡합니까? 이걸 느낌 같은 느낌이라고, 이것은 못 속이는 느낌이에요 이게. 이론 따지지 말고 끓어오르는 솔직한 감정 자체는 내 중심이에요.
그래서 이방 민족 아닌 사람이 없어요. 율법을 가졌던 이들도 마찬가지고요. 이건 뭐가 잘못됐는가? 하나님의 예언에 대해서 제대로 된 해석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한테는 애초부터 없었다는 겁니다. 아버지하고 같이 살던 둘째 아들이 아버지와 살 때 “넌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몇 번을 이야기했어요.
“아이고, 아버지 고맙죠. 저도 아버지 사랑합니다.” 하지만 느낌 같은 느낌은 아니에요. 빨리 아버지 유산 빼내서 독립하고 싶은 거예요, 탕자. 그런데 탕자가 언제 아버지의 사랑을 알고, 언제 내가 아들인 것을 알았느냐?
자기가 갖고 있던 아버지 유산을 다 말아먹었을 때, 다 털어먹고 생 거지가 돼서 도저히 누가 쳐다보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내세울 만한 어떤 것도 없이 다 털려 빈손으로 왔을 때 그 빈 공간에, 그 빈 터에……오후 설교 제목이 “텅 빈 마음”이잖아요, 비어 있을 때 아버지의 잉크 한 방울 툭 떨어뜨린 것처럼 “넌 내 아들이야. 누가 뭐라 해도 넌 내 아들이라고 내가 정했어.”라고 그 한 방울을 떨어뜨릴 때 비로소 그게 바로 해석의 시작점이다, 이 말이죠.
지금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예수님이 저주받기 위해서 나무에 올라갔다는 그 해석은요, 사도바울이 사랑을 받고 난 뒤에 눈이 뜨여졌을 때 나온 해석이에요, 사도바울이 공부 많이 해서 나온 해석이 아니고.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사도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곧 “너희들 십자가 해석 제대로 하고 있는 거야? 해석 못 하고 있는 거 아니야?” 이렇게 아주 격앙 섞인 발언을 사도바울이 하고 있습니다.
이 격양 섞인 발언이 왕이 하는 역할이에요. 왕은 백성들로 하여금 예언을 예언대로 풀 수 있는 제대로 된 언어를 창조하는 것, 언어를 개발하는 것이 왕의 역할이에요. 하나님의 언어, 인간과 하나님이 통하는 언어를 개발하는 것이 왕의 역할입니다.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할쎄 이런 젼차로 어린 백셩이 니르고져 홀빼이셔도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참내 제 뜨들 시러펴디 몯할 노미 하니라 내 이랄위하야 어엿비너겨 새로 스믈 여듧자랄 맹가노니 사람마다 수비니겨 날로 쑤메 뼌한킈 하고저 할 따라미니라.”
최초의 문자를 개발한 세종대왕이 한글을 개발했을 때 그 취지가 뭐냐? ‘조선말이 중국과 너무 달라서 서로 맞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제 뜻을 제대로 펼치지를 못 하니 내가 이것을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잘 간직했다가 수월케 편하게 사용하고자 함이라.’ 이게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서문입니다.
결론이 이거에요. 천국 백성의 숫자가 몇 명이냐, 우리 교회가 몇 명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라도 제대로 명쾌하게 천국 본질을 드러내면 되죠. 그 천국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 고린도후서 3장 3절에 나왔습니다. 얼마 전에도 이 본문을 언급했는데 다시 한번 읽어봅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따라서 우리 성도 하나하나가 천국의 말씀, 스물여덟자 기초 글자에요. 우리가 예언 덩어리에요.
예언 덩어리인데 제대로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요, 십자가를 모르면 ‘그래, 성경을 공부했으니까 우리가 말씀 사람이지.’ 그게 아니고, 망가진 모습이에요. 실패한 모습, 천국 가려고 그렇게 애를 썼지만 내 힘으로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백날 해도 나는 지옥 가는 언어, 지옥 가는 개념을 사용하는데 그 이유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나를 위해 살기 위한 개념들을 우리는 품고 교육받아 왔어요.
심지어 교회 와서 성경 공부해도 ‘목사님, 이게 나한테 도움이 됩니까?’ 맨날 자기 생각을 떨치지 못하는…, 그래서 ‘이게 나에게 행복을 줍니까? 내 행복을 보장합니까?’ 그런데 그걸 씁쓸하게 여기지 마시고 탕자처럼 원래 우리가 그렇다고 하면 되잖아요.
“나는 원래 천국 못 가, 지옥 가야 돼. 왜? 너나 나나 다 이방 민족이니까.” 율법 줘도 율법 해석도 못 하는 이방 민족, 그 이방 민족 요소를 귀하게 여러분 속에 담으세요. 담으면 그 죄인에게서 진짜 해석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 못난이를 가지고 주께서 제대로 왕 노릇해요.
저주받은 왕 되신 분이 예수님이고 사흘 만에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악마의 권세를 이기신 그 권세로서 “너는 이것밖에 해석 못 하지? 하지만 이게 바로 해석이고 이게 바로 한 방울의 사랑이다. 네가 못나도 그거 신경 쓰지 마라. 난 널 사랑한다. 네가 죄, 죄 그러는데 네가 죄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죄야. 맞아. 죄 맞는데 죄는 반드시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제대로 드러나는 거야.”
우리가 아는 죄는 죄도 아닙니다. 십자가 믿지 않는 게 죄고, 십자가가 빠져 있는 게 죄에요. 이것보다 더 명백한 천국의 본질, 천국의 백성은 없습니다. 가짜 왕 르호보암, 앞으로 가짜 왕이 계속 등장할 거예요. 가짜 왕이 왜 계속 등장하느냐?
진짜 왕을 우리가 알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의 <킹 오브 킹스>(The King of Kings, 2025), 16일에 개봉합니다. 만화 영화지만. 예수님이 진짜 왕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우리가 백성으로서 진짜 백성을 보여줍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실패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이제는 기쁨과 감사로 받아들이게 하셔서 또 한 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자꾸만 나 자신을 위해 사는 이 못난 모습이지만 주님의 사랑이 이 못난 나를 위함과 어떻게 결부해서 천국 백성 되게 했는가를, 그것만 자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수요설교(250709) 보충 열왕기상 14장 25-28절(천국 표준말)
수요 말씀 단순한 반복보다도 미처 설명하지 못했던 논리성을 보겠습니다. 아까도 언급했지만, 언어를 창조한다는 것이 왜 그리 중요한 이야기인가? 언어 창조에 대해서, 기존의 인간의 언어창조가 인간의 자기 합리성, 자기 존재에 대한 변명으로 작동을 해요.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말들은, 내가 한 것과 내가 아는 모든 것은, 이것이 나의 정당화로 작용해서, 내가 존재하는데 마땅히 존재할 이유로 쌓이게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남들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서 변명조로 나옵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은 예언이거든요. 이 예언은 인간이 관여를 못해요.
인간은 저지레만 하지, 예언을 예언답게,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이게 로마서 3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인간은 죄를 범했기 때문에 주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는데(롬3:23), 심지어 율법을 줘도 똑같은 결과예요. 율법을 줘도 율법이 갖고 있는 율법의 장벽을 뚫어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올 수가 없어요.
바느질 할 때, 천을 뚫고 바늘이 반대편으로 나와야되는데, 안 뚫리는 천을 줬기 때문에 바늘이 나올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르호보암은 3년 동안 잘했다 했거든요. 본인이 3년 동안 잘한 게 아니고, 그때까지 이것은 다윗과 솔로몬의 은혜라는 생각이 들었고, 3년밖에 안되었으니까 르호보암 본인이 정치를 잘하고 치적을 쌓은 효과는 아니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냥 선배 왕들이 했던 것을 얻어먹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3년쯤 지나고 난 뒤에 이제는 공치사는 다 했단 말이죠. “아이고, 할아버지 대단하시고, 아버지 대단하시다.”할 거 다하고, 이제부터는 이미 돌아가신 선조들 생각할 것 없이 내 나라, 내 정치를 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해서, 그때부터는 관심사가 내가 하는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고, 그것이 백성들로 하여금 나를 더욱 더 신뢰하게 만들고 내게 복종하게 만들고 결국 이 나라가 르호보암 내가 왕이 되는데 얼마나 보탬이 되느냐 이 계산을 한 겁니다.
그때부터 백성들의 눈치를 보는 거예요.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에 관심이 없어요. 선지자들도 마찬가지고요. 잘 살게만 해준다면, 대통령이 과거에 무슨 짓을 했든지 그것은 다 눈감아줄 용의가 되어 있다는 거예요. 우리만 잘 살게 해준다면, 일등 국가 되게 해준다면. 대통령이 누구든 전혀 문제 삼지 않는 거예요.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을 아직도 그리워하는 이유가 단지 하나밖에 없어요. 박정희 같은 경우에 잘 살게 해줬다, 3선, 4선, 독재를 하든 말든 문젯거리가 안 되고, 그냥 잘 살게만 해주면 되는 거예요. 백성들이 뭘 보느냐? 자기를 봐요. 오직 자기를 위해서 살아요.
그래서 초반부터 제가 로마서 14장 7절을 거론한 이유가, 마지막에 천국에서는 사도바울이 이런 소리 하는 거랑 똑같아요.“여러분, 혹시 여러분 가운데서 자기를 위해서 살고, 자기를 위해서 죽는 사람은 우리 모임에 참석 안했지요, 그렇죠?”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 모임에. 천국 모임이 그런 모임이에요.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은 일절 못 들어오는 세계라는 그것을 먼저 확실히 하고 있는 거예요. 그걸 본다는 말은, 신약에서 그렇게 이야기한다면, 구약에서 얼마나 왕들이 백성들의 편에 서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해줄 때 백성들도 왕을 신뢰한다는, 인간과 인간끼리의 의견이 조율되어서, 딱 들어맞아서 이제는 그 가운데 인간만 있을 뿐이지, 진리, 언약, 하나님의 예언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나라가 부강하게 되니까 자만심이 생겼죠. 그런데 갑자기 애굽의 시삭이라는 왕이 와서 그렇게 자랑스러웠던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성전의 금덩어리, 보물도 다 빼앗겼죠. 수요설교에서는 이걸 빼앗겼다는 입장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 입장에서 보게 되면, 이게 원래 누구 것이냐? 하나님 것이란 말이죠.
하나님 것인데, 왜 하나님 것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나라한테 훼손당하도록 그렇게 의도적으로 하셨는가? 그것은 소위 이방민족과는 다른 우리만이 이스라엘이라는 그 개념 자체가 틀려먹었다는 거예요. 그게 가짜라는 겁니다. 진짜 이스라엘은 따로 있다는 거예요.
그럼 진짜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계속해서 백성들이 항상 자기만을 생각하니까, 백성들이 자기만을 생각하듯이 왕도 백성들이 모여 있는 그 나라를 내 나라로 생각하니까 둘 다 똑같아서 죽이 맞는 거예요. 그 나라가 망하고 난 뒤에, 하나님의 뜻에 맞는 진짜 왕은 신명기 21장에 나오는 그 율법을 자기한테, 죄도 없으면서 죄인의 입장에서 그것을 받아들여요.
그러면 죄인이 아닌데, 백성의 죄를 짊어졌기 때문에 율법은 가차 없이 그 죄에 대해서 공격하겠죠. 그게 어느 정도로 저주를 퍼붓는가? 나무에 매달리게 만들면서 저주를 퍼붓는 거예요.“나무에 매달린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는다.(신21:22-23)
이 저주 받는다는 것,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을 자기에게 그대로 연결시켰고,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그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소개시켜 줌으로써 효과가 뭐냐? 어떤 자든 말씀과 상관없이 오직 자기를 위해서 말씀을 거론하는 것은 전부 다 가짜 이스라엘이다, 이것은 백성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 빼놓고 그것을 확정시키는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에요.
그런데 성경을 더 찾아보니까, 그런데 르호보암이 그렇게 해놓고는 끝에 마음을 낮추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대처로서 망하되 아주 망하지는 않는다(대하12:7) 라고 유언을 남겨준 거예요. 그렇다면 그 말씀도 누구한테 해당됩니까? 예수님에게 해당되는 거죠.
예수님의 저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가짜가 되었는데, 그러나 가짜 되게 하신 예수님 안에 진짜 백성이 따로 담겨 있다는 겁니다. 그 진짜 백성이 따로 담겨있는 자의, 따로 있다는 그 모습을 르호보암을 통해서 아주 망하지는 않았다는 표현으로 르호보암에게 이야기했다면, 그 르호보암에게 남아있는 잔재된 은혜가 오늘날 우리에게 남아있는 자가 바로 오늘날 성도입니다.
그걸 총알이 날아가는 것으로 설명하죠. 실패를 기쁘게 여기고, 실패가 추진력을 얻는 에너지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실패라는 것은 일부러 죄 짓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고, 말씀이 오니까 나 좋으라고 하는 것이고, 내 식구 좋으라고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다른 사람이 다 기뻐하던데? 이러면서도 이렇게 하는 게 뭐냐 하면, 결국은 자기가 편하게 살고, 자기가 힘들지 않게 살기 위해서는 본능적으로 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자기를 위해서 사는 거죠.
자기를 위해서 살았던 자를 자기를 위해서는 살지 않는 자가 가는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방법은, 예수님께서 자기를 위해 사는 인간과 의도적으로 결부해서 그들을 통해서 예수님만이 돋보일 때, 돋보이는 하나의 재료가 될 때, 그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에너지, 구원받는 에너지가 된다. 그 이야기입니다.
그거하고 언어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가? 실제로 예수님이 그렇게 왔는지 안 믿잖아요. 진짜 믿는 사람은 바로 왕 되신 예수님이 창안한 그 언어, 성령이라는 언어가 그 사람에게는 하나의 예언 덩어리가 되고,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는 거예요. 성도끼리 아는 언어가 따로 있고, 지옥 가는 사람끼리 아는 언어가 따로 있어요.
그런데, 천국 가는 사람은 지옥 가는 사람 언어도 다 알지요. 왜? 자기가 그 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다 알면서 그들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아, 나를 위해서 산다는 이 본성은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없어지지 않는 그것 때문에 추진력이 생기는 거예요. ”나 아니고,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입니다.“ 이것이 계속 수시로 올라오는 것, 이것이 바로 천국 가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