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
2025년 7월 6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1:22
11: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요셉이 임종 시에 자기 뼈를 거론하는 이유는 자기 뼈 중심으로 새로운 장(場)이 열릴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원래 흙애서 시작해서 흙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여자에게는 뼈부터 시작합니다. 그것은 아담과 분리되어서 말입니다. 여자가 선악과를 따먹을 때에는 남편인 남자가 없을 때문입니다.
뼈에서 시작한 여자는 선악과 나무 과실을 따먹음으로서 여기에 두 이질적인 마음의 요소가 달라붙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나는 신이다”는 악마의 마음이 붙어있고 다른 하나는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마음이 달라붙었습니다. 뼈+마음의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뼈에서 마음을 발라내십니다.
마치 칼치 조림 요리를 대하듯이 하나 둘씩 마음을 발라내면 남는 것은 뼈입니다. 남자가 옆에 없이 여자 단독으로 있을 때, 벌어진 일은 결국, 여자의 이름이 하와, 즉 ‘생명 현상’을 나타내게 됩니다. 생명 현상은 뼈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뼈 위에 묻어있는 인간들의 정신과 마음을 발라내는 작업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언약입니다. 언약이란 곧 하나님의 맹세, 혹은 하나님의 계약과 관련 있습니다. 요셉은 이점을 알았습니다. 창세기 50:24-25에 보면,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란 원래 살아 있을 때,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 성과를 냅니다. 죽고 나면 더 이상 활동이 멈춥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활동이 본격화된다는 겁니다. 이는 아버지 야곱에게 주어진 계약이 효력을 발휘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효력에 입지 아니하면 하나님 백성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처럼 언약은 살아 있는 자를 죽이고, 있는 자를 없애버리는 식으로 효력이 제공됩니다. 하나의 뼈로서 산다는 것은, 그동안 내가 사는 것은 내 뼈 위에 발린 정신의 부작용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는 자신이 살아 있고 여기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우리의 관찰로 인한 결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20:4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인간이 어떤 형상을 만든다는 것은 자신이 생각한 것을 보이는 형태로 만들어내게 되어 있고 찾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을 뼈로 간주해버립니다. 인간이 뼈라는 것은 이미 인간은 살아 있음이 아니라 죽어 있음이요 ‘그냥 있음’이 아니라 ‘그냥 없음’의 존재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고 난 뒤에 비로서 세상에 모든 일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진행됨이 드러납니다.
그 예가 요한복음 19:31-34에 보면, “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뼈와 뼈 사이에 차이를 두십니다. 하나는 그냥 일반인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 분은 말씀에 입각한 뼈이십니다. 곧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시 34:19-20)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모든 말씀이 성취를 위하여 대기했다가 결국 다 이루게 되십니다. 이는 말씀을 통해서 뼈에 발린 인간들의 정신 구조를 다 벗겨내는 작업은 오직 말씀으로만 가능함을 나타냅니다.
요셉이 죽을 때 뼈를 거론하는 것은 선조이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의 일관성 있는 일에 대해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인간 대 인간들 끼리 계약을 맺더라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개입을 위한 계약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창창세기 31:19-20에서 야곱의 외삼촌과 다음과 같은 계약을 합니다.
“이제 오라 너와 내가 언약을 세워 그것으로 너와 나 사이에 증거를 삼을 것이니라 이에 야곱이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또 그 형제들에게 돌을 모으라 하니 그들이 돌을 취하여 무더기를 이루매 무리가 거기 무더기 곁에서 먹고 라반은 그것을 여갈사하두다라 칭하였고 야곱은 그것을 갈르엣이라 칭하였으니 라반의 말에 오늘날 이 무더기가 너와 나 사이에 증거가 된다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갈르엣이라 칭하였으며 또 미스바라 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에 우리 피차 떠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너와 나 사이에 감찰하옵소서 함이라”(창 31:44-49)
아브라함이 아비멜렉 추장과는 계약에도 역시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개입시킵니다.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치 않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너의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맹세하리라 하고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늑탈한 일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 아비멜렉이 가로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이야 들었노라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취하여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창 21:23-27)
이렇게 하므로서 언약의 사람들은 철저하게 지독하게 하나님께서 개입된 맹세만이 인정하십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계약 외에는 일체 다른 계약이나 맹세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아예 맹세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 5:34) 이렇게 볼 때에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능력은 인간을 죽은 자로 간주될 경우에만 성도는 증거자로 쓰여집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의미가 나로부터 떼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74강-히브리서 11장 22절(뼈)250706-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1장 22절입니다.
히브리서 11: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요셉이 죽을 때에 요셉이 할 일은 다 끝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 일하는 것도 살아 있을 때 일을 하지 죽고 난 뒤에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요셉에게는 자기의 몸뚱이 말고 추가된 게 있어요. 아버지 야곱에게 준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야곱이 죽었잖아요. 이제는 요셉 본인이 죽습니다. 야곱이 죽고 난 뒤에 야곱은 할 게 없고, 요셉 본인 죽고 난 뒤에 할 게 없고, 오늘날 우리도 죽고 난 뒤에 할 게 없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 관계, 하나님의 언약에 이미 들어온 사람은 그 사람의 개인적인 죽음과 무관하게 하나님의 약속은 계속 살아서 활동하고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보통은 인간들이 살아있을 때 일을 한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 사람이 살아있을 때도 하나님의 언약은 일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오해하기를 ‘살아있는 그 사람이 일했다.’ 이렇게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인간들이 개인을 주목하면서 쏟아놓고 있습니다. ‘요셉이 훌륭했다, 야곱이 훌륭했다, 아브라함이 훌륭했다, 이삭이 훌륭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돼요. ‘내가 주의 일 했다.’ 내가 뭘 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피해자 입장이 되죠. 일은 하나님이 했는데 공로와 영광은 눈에 보이는 인간들이 가져가니까 하나님만 완전히 그냥 변두리 신세가 되고 말죠.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양보하는 거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신 것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언약을 방해하고 있었다.’라는 겁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구원받았다면 그 구원 받은 사람이 평생 한 것은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을 본인이 방해한 것만 나중에 남을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내가 이렇게 방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아, 하나님은 참 지독하게 일하셔서 방해한 나를 천국에다가 집어넣는다니 세상에 하나님 고집도 보통 고집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하는 일은 일체 받지않는다, 라는 것을 수시로 이야기해도 인간은 본인이 살아있는 것으로 평생 자기 인생을 살다 보니까 그 말을 이해 못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언약의 말씀, 이 성경 말씀은 아주 독하게 나갑니다. “아무리 내가 이야기를 해도 너는 알아먹지를 못한다.” 지독하게 이것으로 밀어붙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내 말을 알아들어서 너희가 구원받는 경우는 너희에게 성립되지 않는다.”
못 알아듣는 이야기만 한 거예요. 그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요셉이 임종 시에 유언으로 남겼습니다. 요셉이 죽으면서 같이 있던 사람이 알아듣는 이야기를 해야 할 텐데 진짜 때려죽여도 못 알아듣는 이야기가 창세기 50장에 나옵니다. 천지창조로부터 시작했던,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그 이야기부터 시작했던 창세기가 어떻게 끝나는가?
요셉의 예언으로 끝납니다. 창세기 마지막 부분입니다. 창세기 50장 24-25절에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해골을 매고 올라간다.’ 오늘 본문 히브리서에 보면 ‘뼈’로 되어 있잖아요? 창세기에는 그냥 ‘해골’로 되어 있습니다. 해골을 매고 올라간다는 거예요. 그 당시 사람들은 이게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독하게 몰라요. 아무리 연구해도 몰라요.
왜냐하면 여기 살아있는 내가 하나님 말씀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에요. ‘이 예언은 너희들이 어떤 의지를 갖고 있든지, 어떤 결심을 갖고 있든지 어떤 선택을 갖고 있든지 전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너희를 이끌고 갈 것이다.’
가는데, 너희에게 실제로 벌어질 이 일이 그냥 우연인지 아니면 하나님 활동의 핵심에 있는지, 그 핵심이 담고 있는 의미가 확대되면서 적용되는 일인지, 그 하나님 운동의 중심을 뭐로 보느냐 하면, 요셉은 자신의 해골로 봤습니다.
“요셉의 해골과 하나님의 일을 논하라.” 이렇게 문제가 나온다면 여러분, 이 문제 풀어보시겠습니까? ‘요셉의 해골과 하나님이 하는 일과 무슨 관련이 있느냐?’ 이 문제를 제가 살짝 한 번 바꿔보겠습니다. ‘여러분의 뼈다귀와 하나님 일과의 관련성을 논해보세요. 내 뼈와 하나님 일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 똑같은 문제입니다.
똑같은 문제인데 제가 문제를 제시할 때 여러분은 의아할 거예요. 문제 같지도 않은 문제를 왜 내느냐고 할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뼈로 보고…, 이것은 성도한테만 해당되는 거예요. 뼈가 하나님의 운동의 중심이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야 돼요.
“내가 뼈다귀가 아니라면 지금 하나님의 운동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는 그런 뜻입니까?” 물으면 예, 그런 뜻입니다. 본인이 뼈다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세상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일인 것을, 뭐 지식으로는 알겠지만 실감나지는 않는 거예요. 왜? 우리가 뼈라는 인식이 없기 때문에, 빠져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튼튼한 육신을 갖고 있습니다. 튼튼한 육신을 가지고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튼튼한 육신과 활동이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계약의 중심은, 우리가 항상 뼈라는 사실에 두고 하나님께서는 일을 하는데 우리가 만약에 뼈라고 해보세요. 뼈에서 나올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안 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방적으로 천국에 보내줍니다. 듣기엔 살짝 기분이 좋게 들리겠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굉장히 기분 나쁜 이야기예요. “그러면 우리는 도대체 뭡니까? 뭔데 우리가 뼈밖에 안 됩니까?” 하나님께서는 ‘네가 원래 뼈였다.’라는 거예요, 원래.
원래 뼈인데 뼈 아닌 것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중간에 악마의 조작이 있었다는 겁니다. 창세기 2장 21절에 보면 여자가 출생할 때 뼈에서 나왔습니다. 아담이 잠들어 있을 때 하나님께서 뼈를 딱 취했어요. 하나님께서 잠든 아담에게서 뼈를 취할 때 거기서 “스톱! 잠깐 스톱! 그 뼈로 뭐 하실 겁니까?” 하나님께 중간에 되바라지게 질문을 한다면 하나님은 이렇게 할 겁니다. “나는 이 뼈로 사람을 만들 거야. 여자를 만들 거야.”라고 이야기하실 겁니다.
아담의 뼈에서 여자가 되었다는 말은 이것이 무엇과 관련되어 있는가? 원래 남자 여자 만들고 나서 같이 붙어있어야 하는데 선악과나무 앞에서 남편과 아내가 잠시 헤어질 때가 있었어요. 잠시 분리됐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뼈에 해당되는 그 여자에게 비로소 마음이 생긴 거예요.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하고 보암직도 한 새로운 마음이 등장했습니다.
그 마음을 뱀이 부추겨서 남편이 없을 때, 여자 혼자 있을 때 여자는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따먹었을 때 무슨 요소, 어떤 마음이 여자 속에 들어왔는가? 두 개 요소가 들어 왔어요. 하나는, 나는 신이 될 수 있다는 것, 악마의 마음, 인간의 뼈에 그 마음이 들러붙었어요.
또 하나 들러붙은 것은 뭐냐? ‘이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가 딱 들러붙어 있습니다. 따라서 뼈로 된 여자에게 두 개의 이질적인 마음이 담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들으면 ‘여자 쪽에서 좀 손해가 아닙니까?’ 이런 생각이 드는데 이게 손해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창세기 3장에 보게 되면 남자는 흙으로 돌아갑니다. 뼈가 가루가 되면 흙이 되죠. 창세기 3장 19절에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남자가 흙으로 돌아가게 되면 과연 여자도 같이 흙으로 돌아가게 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여자도 아담에게 속했으니까 당연히 남자가 흙 같으면 여자도 흙으로 돌아가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남자부터 먼저 만들어 놓고 나중에 여자를 만들었던 하나님의 그 취지는 어떻게 됩니까?
그 취지는 흙으로 안 돌아가요. 남자부터 먼저 만들어 놓고 남자의 갈빗대에서 여자를 취했던 여성을 만든 그 취지는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생명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이름이 하와니까 곧 ‘생명’,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창 3:19).
생명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이 땅에 등장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친히 뼈로 창조했다는 것, 하나님이 손수 하신 자기 작업, 자기 작업만큼은 취소를 안 시킵니다. 뼈에서 생명 나오게 하는 거예요. 그다음부터는 그러면 남자의 취지가 뭐냐? 여자 쳐다봐야죠. 남자는 흙이에요, 여자는 생명이고.
“여자도 죽으면 흙 되는데요?” 하는데 흙 되는 거 맞아요. 여자가 남자한테 속해서 흙이 돼요. 여자가 죽는 것은 남자에 복속되어 있기 때문에, 남편의 것이기 때문에 죽습니다. 남편 흙 되니까 남편의 것인 여자도 같이 흙이 되는 거예요. 그러나 남편과 아내가 분리되었을 때…, 그러니까 아담이 여자를 만들 때 “제 배필은 이런 식으로 해서 이렇게 만들어 주세요. 컨셉을이렇게 잡아주세요.”라고 간섭한 적 없어요.
그때 아담은 잠들어 있었습니다. 아담이 여자 만들 때 개입한 적 없습니다. 잠들어 있었을 때 아담의 뼈를 떼어 여자를 만들었어요. 따라서 여자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그다음의 취지에 대해 남편은 입을 다물어야 해요. “입 다물어. 이건 네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야.” 친히 여자를 뼈로 만든 그 취지에는 전적으로 하나님만 관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뭐냐? 뼈로 된 여자에게 몸이 생기게 돼요. 뼈로 만들었는데 여자의 몸이 되었잖아요. 그때 남자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이 살이라”(창 2:23) 이렇게 됩니다. 그러면 여자의 이름이 하와, 생명이잖아요. 그 생명의 생명 됨은 어디서 나타나는가?
뼈에 붙어있던 살점이 발립니다, 발려요. 여러분, 땡볕에 아이스크림 들고 이야기 몇 마디 하다 보면 소매 밑으로 아이스크림이 흘러내리죠. 아이스크림이 발리면 없어지잖아요. 따라서 막대기만 나타나서 달랑 남아있죠. 하나님께서 여성을 만든 취지입니다. 여자가 아닙니다. 여자는 남자에 속해 죽어요. 여성을 만든 취지, 그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붙어있던 살과 마음가짐을 발라 버려요.
적당한 예가 바로 제주산 갈치거든요. 갈치조림. 갈치조림 맛있잖아요? 식당에서 1인분에 만 이천원정도 해요. 그것도 둘이 같이 시켜야 나옵니다. 처음에는 뼈가 안 보여요. 갈치 살을 발라내야 뼈가 나옵니다. 그러면 그 뼈와 발라진 살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그걸 잘 보여주는 예가 바로 감자탕이에요.
돼지 척추의 그 등뼈, 여기는 ‘감자’라는 것은 땅에 심는 감자가 아니고 뼈의 이름입니다. 감자를 넣었다고 해서 감자탕인 줄 알았지요. 그래서 뼈 탕이에요. 그 뼈 탕, 우려내고 또 우려 내면 그 발린 그것들이 탕을 형성해요. 탕을 형성하는데 이 탕을 형성하는 이것을 과학자들은 탕이라고 하지 않고 필드, 장(場)이라고 해요.
패러데이(Michael Faraday, 1791-1861)와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1831-1879)이 발견한 겁니다. 뉴턴(Isaac Newton, 1643-1727)은 달과 지구, 해와 지구가 서로 당기는 만유인력, 원격 이론을 주장했잖아요. 그런데 현대 과학은 원격 이론이 아니고 필드에요. 장(場)을 형성합니다. 자석 놔두고 쇳가루를 뿌리면 거기에 선이 나타나죠. 명령하지도 않았는데 쇳가루가 자기가 알아서 정렬해 있어요. 힘의 선이 나타나요. 보이지 않는 힘이 어떤 공간을 형성하는 것을 장(場)이라고 하는 겁니다.
요셉의 뼈, 그냥 뼈다귀에요. 요셉의 뼈다귀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장(場)을 형성하게 되면 요셉의 뼈가 진격하면서 가는 데마다 이스라엘이라는 아주 특이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없는 데서 생기고 죽은 데서 살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셉의 뼈 중심으로 살아나기 시작해요.
이거, 여러분은 알아듣겠습니까? 알아들어요? 이걸 특이 현상이라고 합니다. 특이 현상이라는 것은, 어떤 공간에 들어가면 어떤 특이한 현상으로서 일체 기존의 다른 공간에 있던 법칙들은 소용이 없는 것 그걸 특이점, 특이 현상, 블랙홀 안의 공간이에요.
이 우주에 블랙홀이 한 5만 개 된다고 하는데 과학자들이 새어보지도 않고 대략 짐작해서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모든 것을 빨아 당기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데 모든 것을 빨아 당긴다. 성경 본문을 한 번 읽어드릴까요? 그런 대목이 있는지?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모든 힘의 중심이 되고 빨아 당겨요.
골로새서 1장 16-17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지난 낮 설교하면서, 그분이 보입니까? 그분 안 보이잖아요. 없잖아요, 지금 예수님이 안 보인다고요. 예수님의 장(長)을 형성하는데 보이지 않아요. 보이지 않으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보이는 인간들을 상대하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보이는 인간은 뼈가 아니에요. 뼈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 뼈냐? 그 사람이 죽었을 때 뼈가 돼요. 이 세상은 죽은 시체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산 사람하고 이야기해요. 그래야 말이 통하니까요. 그런데 성경 오늘 히브리서는 아주 독하게 고집해요.
“산 사람들아.” “예.” “이 말이 이해되나 봐라.” “뭐요?” “요셉이 뼈를 들고, 뼈를 앞장세워 나가라고 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 오늘 본문 히브리서 11장 22절의 말씀입니다. “네가 뼈를 들고 나가라. 그러면 거기에 새로운 공간이 열릴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양보 없습니다. 같이 뼈가 되지 않으면 못 알아듣는 이야기에요. 뼈에 대해서 무릎을 치면서 동의하는 사람 “바로 그거지! 바로 이거야!” 하면서 기쁘게 동의하는 사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장(長), 하나님 언약이 완성될 때 생기는 인간이 모르는 영역장(長)이에요. 공간입니다.
과연 예수님이 남긴 것은 뭐냐? 뼈지요. 예수님이 남긴 뼈에 대해서 요한복음 19장에 나옵니다. 19장 32절에서 34절에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십자가에 세 명이 달렸습니다. 중간에 예수님이 달렸어요. 남들 보기에는 예수님이나 그 옆에 있는 강도나 인간이 만든 똑같은 공간에 속했다고 생각했어요. 인간의 눈으로 보면, 성령이 없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공간이 동일 공간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동일 공간으로 보지 않고, 서로 다른 두 개 공간으로 나눠진 것으로 해석하라고 우리에게 촉구합니다.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면 해석이 돼요. 뭐냐? 두 사람은 뼈가 꺾여졌어요. 그러면 그 십자가의 죄수를 처리하는 로마 군인 그 사람은 두 사람 뼈부터 꺾고 남은 사람인 예수님 뼈도 꺾어야 해요.
그렇게 꺾어야 예수님이든 뭐든 간에 우리가 알고 있는 같은 공간인 인간들의 공간에 예수님이 분명히 속하고 거기서 탈피하지 못한다,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게 확정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9장 33절에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라고 했어요.
다리 꺾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 다리를 꺾고 또 뼈를 꺾는 것이 그냥 일상의 일이고, 다리를 꺾는 것은 사람이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확인차 하는 보통 인간의 일이에요. 그런데 시편 34편 19-20절에 보면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이게 하나님의 말씀이고 이것이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고, 하나님의 계약이에요. 하나님의 계약은 인간이 끼어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 성취합니다. 지금 제가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요셉이 왜 ‘내 뼈를 들고 나가라’라고 이야기했느냐?
하나의 질문을 던지면 이렇습니다. ‘홍해가 갈라졌을 때 모세의 지팡이 때문에 갈라졌습니까, 요셉의 뼈 때문에 갈라졌습니까?’ 이 질문과 똑같은 질문이에요. 그러면 질문을 바꿔보겠습니다. ‘홍해가 갈라졌을 때 살아있는 모세가 지팡이 들고 설쳐서 그렇게 됐습니까, 아니면 모세가 살아있기 400년 전에 죽은 요셉의 뼈가 홍해를 갈라지게 했습니까?’
질문을 다시 한번 추가하면 이렇습니다. ‘죽은 자가 산자를 이끕니까, 살아있는 자가 산 자를 이끌어 갑니까?’ 같은 질문이에요. 정답은, 죽은 자가 산 자를 이끌어 갑니다. 왜? 하나님의 계약은, 죽음이 없으면 계약 당사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에요, 죽은 자가 아니면.
창세기 마지막에 요셉이 내 해골을 들고 나가라, 이 말이거든요? 여러분 실험적으로 해골이라고 생각하고 한 십 미터 한 번 걸어보세요. 뒤뚱뒤뚱해서 못 걷습니다. 인간이 해골은 아니지만 해골 비슷한 걸 만들어내요. 그게 차 사고 모의실험 할 때 로봇 인간을 만들어 놓고 동영상을 촬영합니다.
차를 자동으로 시속 60킬로 속도로 벽에 출동시키고, 또 70킬로의 속도로 충돌시키고, 100킬로로 충돌시킵니다. 그때 운전석에 인형처럼 로봇이 앉아 있어요. 앞에는 에어백을 설치 해놓고 충돌실험을 합니다. 그때 그 에어백이 몇 퍼센트로 방어하는지 조사합니다. 그때 그 동영상 보고 아무도 눈물 흘리지 않습니다. 그 로봇이 불쌍하다고 아무도 눈물 흘리지 않아요, 실험 도구니까.
주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요. 우리는 실험 도구입니다. 뭘 위해서? 예수님의 뼈와 우리의 뼈가 어떤 차이를 보여주는지? 충돌하면서 모가지가 날아가고 깨지고 죽지요. 그러나 주님이 사는 공간, 필드, 그 영역과 보통 인간들이 인간들과 소통하고 대화하는 동네하고 얼마나 차이 나는지 주님께서는 예수님의 언약을 완성시켜 놓고 실험 도구로 인간들을 거기다 투입시킵니다, 뼈와 뼈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시편 34편 19-20절 말씀은 바로 ‘예수님의 뼈는 다른 뼈와 다른 공간에 속한다, 다른 현실에 속한다.’ 오늘 본문 히브리서 11장 22절에서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 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여기 해골이라고 되어 있네요.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라고 되어 있죠.
히브리서 11장 1절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요셉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그걸 추척해야 해요. 그걸 요셉이 알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죽을 때 다른 유언이 아니고 “내 뼈가, 이 세상눈에 보이는 모든 강력한 권세를 뚫고 그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 이 세상에 막혀있는 천국 가는 길을 내 뼈가 열어줄 수 있을 것이다.”
왜? 그게 바로 공간, 공간의 힘이기 때문에요. 현대 물리학자들이 공간의 힘을 찾아냈습니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 같은 사람은 일반 상대성 원리에 의해서, 이 세상에 달과 지구 해가 서로 당기는데 조석 간만의 차가 보통 10미터 차이 나요. 자전과 공전의 당기는 힘 때문에 그렇습니다.
달이 지구를 당긴다고 볼 수 있지만 지구가 달에 딸려 간다고 보면 돼요. 딸려 가는 그것이 서해안 바닷물이 빠지는 거예요, 혓바닥 내밀듯이요. 물 빠지면 사람들이 조개나 고기 잡는다고 달려들잖아요. 아인슈타인은 그렇게 보지 않고 우주 곡면이 휘어져 있다는 거예요. 서로 당기는 것이 아니고 곡면이 휘어져서 휘어진 그 자체가 힘으로 작용해서 어쩔 수 없이 질량으로 중력장이 굽어진 대로 너는 그대로 있고 나도 그대로 있다는 거예요.
고무판에 쇠공을 놔두면 큰 것은 푹 빠지고 작은 것은 약간만 빠지는 것과 같은 형식이 오늘날 우주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이게 ‘장이론’ ‘곡면 이론’이라는 겁니다. 지금 요셉은 뭘 아느냐? 하나님의 계약, 언약의 무기로 인하여 언약에 반대하는 기존의 반 언약, 악마죠, 악마가 형성한 이 꽉 막힌 세계에서 유일하게 탈출이 가능한 것은 하나님의 계약이 주는 효력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 효력이 인간 앞에서는 “너희 아직 살아있니?” “예. 살아있습니다.” “살아있을 땐 소용없어.” 내가 죽고 난 뒤에 비로소 계약은 효과를 주는 거예요. 사망 보험금이에요. 내가 죽었을 때야 비로소 효력을 발휘하는 것, 이게 바로 십자가의 효과잖아요.
예수님 안 죽으면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천국에서 당기는 힘도 없어요. 그 죽으심이, 꺾이지 않는 특이한 인물로서 죽으심의 피가 꺾일 수밖에 없는 뼈, 언약 상대자가 아닌 인간들의 뼈, ‘의인의 뼈는 꺾이지 않는다’라는 시편 34편의 그 말씀은 이 세상 아무 누구에게도 해당되지 않고 꼭 한 사람 예수님에게 해당되고, 예수님에게 주어진 그 말씀이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라고 성취가 될 때의 그 효과가 죽은 데서 부활하는 효과를 줬다, 이 말이죠.
그 죽음이라는 것이 뭐로 형성되어있는가? 보이는 인간들로 형성되어있어요. 보이는 인간들로 형성되어있다는 말은 ‘나 안 죽었다’라는 거예요. ‘나 여기 있다’라는 겁니다. 여자를 두고 뼈에서 살을 입힐 때 처음에, 선악과 따먹기 전에는 “내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창 2:23)라고 했잖아요.
그다음에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하나님께서 살아있는 남자와 여자보고 이야기하죠. “정녕 죽으리라.” 남자와 여자는 그걸 믿지를 못했어요, 남자와 여자 둘 다 죽었으니까. 그런데 그 여자에게 붙어있는 생명이라는 이름, 죽은 여자 쪽에서 자손이 나와요. 남편과 여자가 자식을 낳지만 그 자식은 육이기 때문에 제껴야 해요. 그건 아니에요. 후보에서 제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여자에게 주어진 생명은, 여자에게 말씀이 주어지게 되면 여자에게 주어졌던 생명이라는 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4)라고 해서 비로소 그 실체가 드러나는 겁니다. 여자의 자손이 누굽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으로 그 실체가 드러나죠. ‘이름에 합당한 생명이 바로 여자의 자손에서, 남자 없이 잉태한 분에 의해서 성취가 되는구나.’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가짜가 되고 우상이 되는 겁니다.
출애굽기 20장 4-5절에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왜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느냐 하면, 인간은 자기가 눈에 보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을 만들 수밖에 없어요. 눈에 보이는 게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나 자신이 되기 위해서 자기의 확장, 보이는 것의 구체적인 어떤 나의 결과물 이런 것을 바깥에 보이는 형식으로 만들기 마련입니다. 이게 바로 우상입니다.
‘내 안에 있는 신은 이렇게 황소 모양으로 나와야 해.’ 이게 출애굽기 32장에서 이스라엘이 만든 우상이에요. 그거 가짭니다. 왜? 본인이 살아있고 본인이 눈에 보이기 때문에 이런 사달이 나는 거예요. 여기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할 필요가 있어요. 그냥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오늘 아침에 방송을 보는 데, 서아프리카에 펜타닐보다 25배 강한 마약이 있다는 거예요. 그걸 보면서 ‘도대체 당국에서 마약을 근절하지 못하고 조치도 안 하고 있느냐?’ 서아프리카의 아주 못사는 나라에요. 그런데 그 현지 통신원이 뭐라고 하느냐?
마약 만드는 사람에게 찾아가서 왜 마약을 만드는지 “해로운데 그걸 왜 만듭니까?”라고 질문을 해보는 거예요. 그에 대한 답을 듣고 싶어서 계속 보고 있었어요. “마약이 이렇게 해로운데 그 해로운 것을 왜 만드십니까?” 마약 만드는 그 당사자의 말을 저도 듣고 싶었던 거예요.
그래서 그 현지 통신원이 마약 제조자를 만났어요. 방송에 뭐가 나오느냐? “마약은 이렇게 만들고요, 이렇게 만들면 사는 사람이 많이 있어요” 이러는 거예요. 정작 듣고 싶은 것, 마약을 왜 만드는가, 그 말은 끝내 안 하는 거예요. 방송이 그대로 끝났어요.
마약을 왜 만들어요? 이유를 제가 말씀드릴게요. 사는 게 마약이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사는 게 고통스러운 거예요. 왜? 내가 살아있으니까. 내가 죽었다는 생각을 하면 되는데 내가 살아있고, 내가 없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내가 눈에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계약은 있는 것을 다시 없음으로 바꾸고, 살아있는 것을 다시 죽음으로 바꾸는 그 능력이 하나님의 언약의 능력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내 안에 사는 것은 이제 그리스도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사도바울이 왜 이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내가 사는 것은 이 공간이 아니다. 믿음으로 산다.” 믿음은 바로 보이지 않는 것의 실상이에요. 이 세상 공간이 아닙니다. 다른 공간에 있는 힘이 지금 나한테 주어졌을 때 그게 믿음이 되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내가 살아야 하니까…, 그 마약 만드는 사람이 아저씬 줄 알았어요. 보니까 아줌마예요.
흑인 아줌마가 마약을 만들고 있단 말이죠. 그 사람들에게 물은들 무슨 소용이 있어요. “왜 마약을 만듭니까?” “찾는 사람이 많다.” “왜?” “돈벌이가 되니까.” 그다음 질문을 하고 싶은 거예요. “왜 살고자 합니까?” “살고 싶어서.” “왜요?” “몰라요.” 몰라요.
마약 만드는 인간이나 직장 생활하는 인간이나 똑같아요. 농사짓는 사람도 다를 바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하고 똑같아요. 남한테 얼마나 해가 되느냐, 그건 나중 문제에요. 진짜 다급한 문제는 내가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내가 살아야 된다는 겁니다.
부부간에 살면서 제일 심각한 대화가 뭔지 알아요? 이겁니다. 특히 65세 이상의 부부간에 제일 심각한 문제가 이겁니다. 나중에 65세 되거든 이런 말 나오면 안 돼요. “우리 돈 다 날린 거야?” 인간의 모든 관심은요, 돈이에요. “우리 돈 다 날린 거야?” 무슨 뜻입니까?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내 것 내가 지키는 데 성공했다는 거예요. 내 것 내가 지키는 거예요.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런데 여러분이 들어보면 다 알아요. 유명한 말씀 마태복음 11장 28-30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이 문장이 사도바울의 편지에 보면 “나랑 죽자” 이렇게 돼요. 간단해요. “내가 죽여줄게. 내가 발라낼게. 내가 발라내서 네 안에 뼈만 남게 해줄게.” 이게 보통 혜택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예수님처럼 죽었다가 천국 갈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히브리어로 헤세드(חֶסֶד)라 하고 우리말로 번역하면 ‘은혜, 자비’인데 다른 말로 하면 이게 ‘계약’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해서 이게 맹세에요, 맹세.
자, 이제 남은 문제는 딱 하나입니다. 요셉은 도대체 아버지 야곱에게서 뭘 알았기에 죽을 때 “내 뼈가 새로운 환경을 창조해 나가면서 너희로 하여금 이 죽음의 세력에서 길을 낼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했느냐 하는 겁니다. 죽은 뼈가 무슨 효험이 있다고, “내 뼈만 들고 나가면…” 뭐가 나온다? “…약속의 땅이 나올 것이다.”
요셉이 400년 후를 예언했어요, 400년 후를. 야~, 4백 년이 말이 4백 년이지요. 현재 2025년이잖아요. 우리나라의 1625년이면 임진왜란이 1592년이니까 선조 때쯤 됩니까? 그때 말한 예언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그대로 된다고 해보세요. 시간의 간격을 훌쩍 뛰어넘어서 이것은 놀라운 일이잖아요.
이렇게 보시면 좋아요. 이렇게 생각하시면 제일 쉽습니다. 요셉이 죽어가면서 “내가 깃발 들게. 내 뼈만 따라와. 천국이다. 내가 앞장설게.” 곧 죽어가면서 “내가 앞장설게.” 지금 죽어가는 자가 앞장선다는 거예요. “내 죽음만 따라오면 너는 천국에 도착한다.”
이게 사람과 사람이 사는 세계에서 할 소리예요, 이게? 이게 할 소리입니까? 착하게 사세요, 바르게 사세요, 성경에서 이런 것을 찾아내서는 ‘우리 교회 생활 잘하고 있다’라는 이런 것을 교회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알아듣잖아요. 독하게 못 알아듣는 이야기만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독하게, 지독하게! 성령 받지 않으면 좀 아는 척하지 말라는 거예요, 성령 받지 않으면!
이 말을 어떻게 알아들어요? 문제는 뭐냐? 요셉 저는 어떻게 알아들었어요? 저나 우리나 똑같은 인간인데 어떻게 아느냐 그 말입니다. 그걸 요셉은 어떻게 알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자기 선조입니다, 자기 선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공통점을 알았어요. 그 공통점에서 요셉은 빠집니다.
요셉 언약이라는 것은 없어요. 요셉 언약은 없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이 있고, 이삭 언약이 있고, 야곱 언약은 있는데 요셉 언약은 없습니다. 그러면 요셉은 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일관된 헤세드, 하나님의 은혜가 말로만이 아니고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증거물을 남기고 있었다는 거예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서.
아버지 야곱이 하나님과 계약했던 그 계약의 효과를 본 것이 자기의 인생이었고 심지어 자기의 죽음까지 해당 사항이 된다는 겁니다. 거기에 들어 있다는 거예요. 그게 맹세에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맹세를 굳히기 위해서 뭐가 빠져야 하는가? 인간이 인간끼리 하는 맹세는 빠져야 합니다.
그 빠지는 대목이 마태복음 5장 33-36절에 나옵니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예수님 말씀을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하나님께 맹세할 때 헛되이 맹세하지 말고 맹세한 것은 지켜야 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야.’라고 인간들의 아이디어, 인간들의 수준에서 그렇게 끄집어내지만 나는 분명히 이야기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 “내 아들 신학교에 바치겠습니다.” 아예 맹세하지 마세요. “십일조 하겠습니다.” 맹세하지 마세요. “내가 요양병원에 가도 예수 믿겠습니다.” 맹세하지 마세요. 인간은 맹세할 수가 없어요. 왜? 계약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계약 당사자의 효과만 보면 되지 계약 당사자에 인간이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왜? 우상 숭배자기 때문이에요. 자기가 살아있다고 느끼고, 자기가 있다고 느끼는데 그래서는 언약, 계약 당사자가 안 됩니다. 될 수가 없어요.
그러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 사람들은 별나냐? 별나요. 특이성을 갖고 있습니다. 먼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의 이야기를 해보면 이렇습니다. 마태복음 17장에서 분명히 예수님께서 실상을 보여줬어요.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났습니다(마 17:2). 모세와 엘리야도 같이 해같이 빛났잖아요.
적어도 인간적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인 것을 경험했으면 적어도 배신은 하지 말아야 해요. 봤으니까, 관찰했으니까. 그러나 인간들에게 관찰한 그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관찰했다는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된 거예요. 예수님이 하나님인 것을 아무리 봤어도 막상 내가 죽을 지경에서는 내가 주님을 거뜬히 배신하고 살아보겠다는 이것이 살아있는 자의 한계고 이것이 골칫거리예요. 문제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주님의 뜻은 맹세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특이점이 뭐냐? 그 특이점은 창세기의 맹세 부분에 나옵니다. 창세기 31장 47-50절에 “라반은 그것을 여갈사하두다라 칭하였고…” 발음하기도 힘들어요.
“…야곱은 그것을 갈르엣이라 칭하였으니 라반의 말에 오늘날 이 무더기가 너와 나 사이에 증거가 된다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갈르엣이라 칭하였으며 또 미스바라 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에 우리 피차 떠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너와 나 사이에 감찰하옵소서 함이라 네가 내 딸을 박대하거나 내 딸들 외에 다른 아내들을 취하면 사람은 우리와 함께할 자가 없어도 보라 하나님이 너와 나 사이에 증거하시느니라 하였더라.”
관찰자를 따로 개입시켜서 만들어진 것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들러리죠. 거기에 동원된 눈에 띄고 살아 있다고 여기는 인간과 인간들은 그냥 들러리에 지나지 않아요. 보이지 않는 분, 형상이 없는 분이 맹세를 만들고 그것을 나중에 효과 있게 성취하는 작업에 나섭니다.
방금 읽은 대목은 야곱과 그의 외삼촌 라반과의 계약이었잖아요. 창세기 21장 21-31절을 보면 아브라함과 블레셋 족장 아비멜렉과의 계약이 나옵니다. 29-30절에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음은 어찜이뇨 아브라함이 가로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31-32절에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우매”라고 되어 있어요. 그리고 33절에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특징이 뭐냐? 세 사람 다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누가 살려주는 여정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장차 오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와서 가야 할 그 여정과 과정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미리 당겨서 샘플로서, 모의시험의 로봇으로서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습니다.
동행하면서 뭘 이야기하느냐? 히브리서 6장과 7장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하고 맹세한다.”(히 6:13/7:21). 끝난 이야기예요. “하나님은 나하고 맹세한다.” 달리 이야기해 볼까요? “하나님 아버지는 오직 아들하고만 맹세한다.” 이걸 받아들이는 사람이 믿는 자입니다.
그 맹세, 야곱이 하나님한테 맹세하면서 야곱이 죽었잖아요. 야곱이 죽고 난 뒤에 이름이 뭐로 바뀌었어요? 이스라엘로 바뀌었지요. 이스라엘로 바뀐 그 효과를 요셉이 알고 “나는 그 맹세 앞에서 이 뼈가 그냥 뼈가 아니고 아버지 야곱이 받았던 언약의 맹세의 효과와 더불어 움직이는 맹세의 증거, 언약의 증거물로서 내 뼈가 있다.” 이렇게 고백하잖아요.
그것이 나중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뼈라고 다 뼈가 아니고 말씀에 입각해서 사람이 손대지 못하는 뼈, 그 뼈로 주께서는 무덤에 가서 죽음의 권세, 인간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죽음의 권세를 깨부수시고 맹세, 아버지의 뜻대로 부활하셨습니다. 영원히 살았어요.
‘왜 인간은 못 빠져나옵니까?’라고 묻는다면 물리적으로 인간의 뼈는 입자고 그 공간은 파동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 개별자는 ‘입자 의식’을 갖고 있어요. 그러나 계약의 입자는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 입자가 어떻게 예수님께 합류할 수 있는가?
원래 입자라는 것은 파동이 압축되면 입자가 돼요. 양자물리학에서. 이 세상에는 주님의 힘의 장(場)이 있어요. 예수님이 장, 아까 골로새서 1장 16절을 봤지요. 예수님의 장(場) 속에 하나의 입자로 나타나는 분이 예수님이고 그 입자는 우리의 입자하고 차등성을 드러내면서 여기서 특이성을 드러내요.
아무리 납득하려고 해도 납득되지 않는 거예요. 그걸 제가 어제 느꼈습니다. 여러분이 앉은 그 위에 달린 전등, 이게 수요일에 와보니 툭 떨어져 있었어요. 성함은 제가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만 어떤 집사님이 그걸 보고 집으로 가져갔어요. 전등이 한 개만이 아니고 이것저것 해서 세 개나 아슬아슬하게 떨어져 있었습니다.
예배 중에 만나를 받는 것이 아니고 떨어지는 전등을 받아서 박살이 날 참인데 토요일 오후에 기온이 36도나 올라가는데 두 시간 동안이나 땀 뻘뻘 흘리면서 봉사했어요. 뭐가 특이했느냐? 사람은요 자기가 우상이잖아요. 봉사하면 티를 내게 되어 있어요. 티 안 내는 것이 이상해요. 그런데 …, 이 이야기를 해버리면 집사님이 시험에 들어서 또 티를 내겠다.
티를 안 내요.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어요? 교회에서 봉사를 했는데 티가 안 나요. 뭐 이상해요. 아무리 봐도 이상해요. 어떤 분이 말하기를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라고도 하는데요. 왜 봉사하는데 티를, 생색을 안 내느냐 그 말입니다, 왜! 아~, 달리 다른 설명을 할 길이 없어요. 주께서 그분을 로봇으로 사용했다는 그런 이론 외에는 다른 이론이 없어요.
집사님이 삐져서 다음에 교회도 안 나오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실은요 여러분이 몰라서 그래요. 여러분이 밥 먹고 사는 것도 주님 일에 봉사입니다. 왜? 맨날 살면서 이런저런 티를 내는데 그 티가 우리가 죽어 마땅한 김 뼈다귀, 박 뼈다귀, 이 뼈다귀, 그 뼈다귀, 저 뼈다귀 들이거든요.
요셉은 알아요. 내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자라는 것을요. 나 같은 것은 계약 상대자가 아닌데 효과만 받아요. 하나님의 언약의 효과, 정죄함이 없느니라,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친히 우리의 변호사가 되어 주십니다. 이게 여러분이 잘해서 그렇습니까? 주께서 봉사했기 때문에, 주의 봉사가 오늘날 어떤 장(場)을 형성합니다.
모든 일에 어찌 말씀 때문에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늘 이 감사가 있는 말씀을 여러분이 멀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한 것도 없이, 정말 한 것도 없는 죄인들과 동행하시면서 기어이, 예수님 하신 일이 무슨 뜻인지를 기어이 알게 하시니 하나님의 그 고집과 하나님의 열심과 하나님의 성실함에 저희들 아멘의 일관성으로 화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늘 특이성을 드러내는 특수한 사람이 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