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와 변호
2025년 7월 2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14:1-5
14:1 그 때에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병든지라
14:2 여로보암이 그 아내에게 이르되 청컨대 일어나 변장하여 사람으로 그대가 여로보암의 아내임을 알지 못하게 하고 실로로 가라 거기 선지자 아히야가 있나니 저는 이전에 내가 이 백성의 왕이 될 것을 내게 고한 사람이니라
14:3 그대의 손에 떡 열과 과자와 꿀 한병을 가지고 그에게로 가라 저가 그대에게 이 아이의 어떻게 될 것을 알게 하리라
14:4 여로보암의 아내가 그대로 하여 일어나 실로로 가서 아히야의 집에 이르니 아히야는 나이로 인하여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더라
14:5 여호와께서 아히야에게 이르시되 여로보암의 아내가 그 아들이 병듦을 인하여 네게 물으러 오나니 너는 이리이리 대답하라 저가 들어올 때에 다른 사람인 체 함이니라
여로보암 집안에 여로보암 입장에서 생기지 말아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자기 아들 아비야가 아플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현재 우리 인간의 입장이 이런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자신이 예견하는 일을 상상하면서 거기에 맞추어 살아가는 데 최선을 노력을 다 합니다. 이럴 경우에는 이렇게 해결하겠다고 마음 먹고 삽니다.
문제는 그렇게 철저함을 기우려서 얻고자 하는 게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이 자신의 예상 범위 안에서 일어나야 마땅하다는 터무니없는 오기 같은 것이 자기 삶의 범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아들이 병이 난 것이 아버지 여로보암의 태만일까요 아니면 저주일까요?
만약에 자신이 일어나 각가지 일이 자기가 나서서 처리할 수 있다고 마음 먹는다면 이는 인간이 지닌 연약함이나 완벽하지 못한 인간들의 당연한 한계라고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보지 않고 ‘저주’라고 선언하십니다. 저주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자손을 통해서 나타내고 싶은 하나님 자신의 업무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2-3)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결정한 복과 저주를 아브라함과 그 자손을 통해서 드러내시고자 합니다.
따라서 어느 누가 실수해서, 혹은 범죄해서 저주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입장에서는 필히 저주가 무엇인지 이스라엘을 통해서 나타내셔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현상(現像)’입니다. 이스라엘의 존재 이유가 이처럼 하나님이 친히 결정해놓으신 복의 현상과 저주의 현상을 보여주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우리 입장에서 성경을 볼 하등의 권한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출애굽기 20:4-6에서 나오는 말씀은 이런 겁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이 대목을 보면서 사람들은 자기 것 제대로 지켜내기 위해서 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자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위함이 아니라 이미 ‘자기 것’ 자체가 하나님보시기에 우상이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마치 오늘 본문에서 여로보암 왕이 자기 아들이 걱정되어서 아히야 선지자를 찾는 심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로보암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아히야 선지자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여로보암은 선지자 자체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저 세상 사람들이 인간 대 인간 관계를 나누는 것처럼 선지자를 다룰 수 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에게 소유란 하나님 말씀 뿐입니다. 즉 인간들은 자신이 평생 일구어놓은 자기 것을 사수하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 하지만 선지자는 그저 하나님 말씀을 전달할 뿐입니다. 자기 것이 따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상에서 엘리 제사장 가문 자체가 뭉개버리십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실질적으로 저주를 행사하시는 분으로 분명히 드러내십니다. “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판결하시려니와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
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지라
이스라엘에게 모든 복을 베푸는 중에 너는 내 처소의 환난을 볼 것이요 네 집에 영영토록 노인이 없을 것이며 내 단에서 내가 끊어 버리지 아니할 너의 사람이 네 눈을 쇠잔케 하고 네 마음을 슬프게 할 것이요 네 집에 생산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리라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으리니 그 둘의 당할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삼상 2:25, 31-34)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누구든지 하나님 말씀대로 완벽하게 지키지 아니하면 누구나 저주받습니다. “아휴 나는 다행이다”라고 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는 여로보암의 처가 선지자 만나고 집으로 들어가는 순간, 죽습니다.
하지만 그 아들의 죽음은 다른 여로보암의 집안의 처참한 저주의 죽음에서 면제되어 홀로 정상적인 묘실에 묻힙니다. 그렇다면 다른 여로보암 집안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아히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됩니다.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가 성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으리니 이는 여호와가 말하였음이니라 하셨나니 너는 일어나 네 집으로 가라 네 발이 성에 들어갈 때에 그 아이가 죽을지라 온 이스라엘이 저를 위하여 슬퍼하며 장사하려니와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는 오직 이 아이만 묘실에 들어가리니 이는 여로보암의 집 가운데서 저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선한 뜻을 품었음이니라”(왕상 14:11-13)
즉 복은 저주 안에서만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제대로 저주받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저주는 ‘대신 받으신 저주’입니다. 그 ‘저주의 효력’이 로마서 8:32-34에 나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2-34)
예수님께서 자신을 버린 제자들에게 다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요 14:28) 그것이 보혜사, 곧 변호사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즉 복된 사람은 주님께서 성령으로 다시 오셔서 친히 변호사되셔서 그 누구도 정죄하지 못하도록 해주심을 받은 바로 그들입니다. 성도만이 저주에서 나온 복된 자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것은 없고 모든 것은 저주와 복이 무엇인지를 증거하기 위해 주님이 주신 바로 주님의 것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7강-열왕기상 14장 1-5절(저주와 변호) 250701-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14장 1-5절입니다.
열왕기상 14:1-5
“그 때에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병든지라 여로보암이 그 아내에게 이르되 청컨대 일어나 변장하여 사람으로 그대가 여로보암의 아내임을 알지 못하게 하고 실로로 가라 거기 선지자 아히야가 있나니 저는 이전에 내가 이 백성의 왕이 될 것을 내게 고한 사람이니라 그대의 손에 떡 열과 과자와 꿀 한 병을 가지고 그에게로 가라 저가 그대에게 이 아이의 어떻게 될 것을 알게 하리라 여로보암의 아내가 그대로 하여 일어나 실로로 가서 아히야의 집에 이르니 아히야는 나이로 인하여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더라 여호와께서 아히야에게 이르시되 여로보암의 아내가 그 아들이 병듦을 인하여 네게 물으러 오나니 너는 이리이리 대답하라 저가 들어올 때에 다른 사람인체 함이니라.”
성경을 보면서 여러 가지 입장을 생각할 수 있는데, 오늘 우리는 여로보암의 입장이 한번 되어봅시다. 여로보암이 아히야 선지자를 굳이 찾겠다는 의도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찾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지 않는 상태에서 선지자를 찾으면 그냥 백 프로 하나님의 저주입니다.
다른 의도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선지자를 방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가 아니라 ‘내가 구성하고 있는 나의 세계, 이 나만의 현실 세계에 일이 터졌습니다. 내게 속한 상황 속에서 어떤 해결점이 없겠습니까?’라고 찾는 거예요. 선지자가 하나님 편에 속했다는 것을 까마득하게 잊었습니다.
같은 인간 편에 서서 인간끼리 서로 잘해보자는 것처럼 선지자에게도 잘해주게 되면 선지자도 나에게 유리하게 좋은 계획과 비법, 해결책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벌써 이 사고방식 자체가 선지자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그 자체조차도 여로보암이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여로보암 가정에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굳이 하나님을 찾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에게 일이 생겼어요. 아들 이름이 ‘아비야’인데 그 아비야가 병들었습니다. 여기서 여로보암은 생각합니다. 우리가 여로보암 입장이 되어보자고 했습니다.
여로보암의 마음이라면 이런 생각이 들게 됩니다. 생기지 말아야 할 것이 생겨났습니다. 생기지 말아야 할 일이 벌어진 거예요. 자, 여기서 여로보암은 이것을 병이라고 봤어요. ‘아이가 병이 들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로보암이 저주받았다.’라고 평합니다. 평가를 그렇게 해요.
병든 것이나 저주받은 것이나 두 가지 경우에 공통점이 있는데요, 그것은 생기지 말아야 할 것이 생겨난 거예요. 인간들이 도저히 예상 못 한 일이 생겨버린 겁니다. 없어야 하는데, 없어야 되는데…, 자녀가 건강해야 해요. ‘우리 자식은 병이 없는 것이 마땅해’ 이렇게 없어야 하는데 생겨버렸어요.
여기서 인간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아이가 아픈 것은 내가 뭔가 부족하기 때문에, 내가 뭔가 내 애에 대해서 조치를 잘못했기에 병이 생겼다. 따라서 이 병이 생기기 이 전으로 돌리려면 내 쪽에서 어떤 처방을 내리고 내가 어떻게 마음가짐을 바꾸면 아의 병이 고쳐진다.’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여전히 자기 아이를 자기 소유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 말씀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집안의 아이가 병이 났을 때, 또는 가정의 누군가에게 변고가 생긴다면 그것은 그 원천이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왔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사람들이 관심이 없거든요. 관심이 없는 이유가, 내 인생은 내가 꾸려가는 거예요. ‘내가 차근차근 뭘 하는 것이 모이고 모여서 내가 만족할 만한 내 인생이 형성된다.’ 이게 인간의 생각입니다. 그렇게 해서 조심에 조심을 더하고, 잘못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오류가 없도록, 실수가 없도록 철저에 철저를 기하는 것이 인간들이 자기 인생을 자기 소유로 간주했을 때 관리하는 방법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인생의 관리는 인간 본인에게 맡긴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지?’ 그렇게 생각하는 발상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왜냐하면 모든 생겨나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거예요.
예를 들면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복이 있고 저주가 있다고 했어요.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3). 그러면 이것은 그냥 단순하게 생각해도 정답이에요.
‘아브라함의 인생을 통해서 많은 후손이 나올 텐데 그 후손을 통해서 무엇이 복이며 무엇이 저주라는 것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필히 등장하고야 만다. 반드시 나타나고야 만다.’ 이렇게 생각하면 굉장히 쉬운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집사님 가정에 무슨 문제가 있다. 주위 사람들이 “집사님이 무슨 죄를 지어서, 무슨 실수를 해서 그렇습니까? 반성을 좀 해보세요. 뭐가 잘못되었는지요.”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집사님이 정말 성경 말씀을 안다면 “이것은 성경 말씀의 진척에 의해서 반드시 일어나야 할 일이 우리 가정을 사용해서 일어나게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정에 일어난 일이 나에게 이익이냐 손해이냐를 따져서 손해되면 저주받은 것이고 이익이 되면 복 받은 것이고? 그게 아니에요. 그것을 두 자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현상’이에요, 현상.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고 이 세상 바닥은 뭐냐? 말씀의 내용이 현상적으로 쑥쑥, 그때그때 마다 일어나야 할 일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마태복음 13장의 씨뿌리는 비유가 그건데요.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립니다. 씨는 작기 때문에 씨를 뿌릴 때 밭의 풍경은 맨 그 밭의 풍경이에요. 그런데 나중에 가을 되어서 돌아보면 분명히 같은 밭인데 각종 식물과 열매가 자라나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현상이에요. ‘이게 뭐지? 식물들이 왜 등장했지?’ 말씀을 뿌려놨잖아요, 말씀을!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말씀을 뿌려놨다고요. 그 말씀을 뿌려놓는 담당자가 누구냐 하면, 선지자입니다. 일반인들은 자기 것 간수 하기 위해서 선지자를 찾지만 선지자의 특징은 내 것이 없어요. 자기 것이 없고, 자기 것 대신 뭐가 있느냐?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지자는 충분합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는 하나님과 소통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 세상에 그 말씀이 뿌려지게 되면 그 현상이 일어나게 되고, 그 일어난 현상에 대해서 선지자가 “야, 그것은 복이야.” 혹은 “야, 그것은 저주야.” 그러니까 복과 저주가 말씀 안에 들어 있는데 말씀이 떨어지니까 어떤 때는 그것이 저주의 열매로 나오고, 어떤 때는 복의 열매로도 나오는 겁니다.
이것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인데 여로보암 같이 ‘이것은 내 가정의 일’이라는 식으로 ‘내 것이 있다’라고 생각했을 때 우리 애가 병들었을 때는 어떻게 하는가? 선지자에게 쪼르르 쫓아가서 “선지자님, 나에게 이러한 불상사가 생겼습니다. 어떻게 해결 좀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사람이 자기 소유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뭐라고 해석하느냐 하면, 이것을 불행한 일로 여기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불행하지 않으면 만사가 불행하지 않아요. 왜? 세상 모든 만물은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너무나 합당하고 당연하기 때문에.
인간들은 불행이라는 그 생각을 왜 갖습니까? 본인이 하나님 소유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본인이 하나님 소유가 아니고, 여기서 여기까지는 철저하게 내 것이라고 여기고 자기 것 관리하다 보니까, 그런데 자기 뜻대로 안 되니까 ‘아, 이거 불행하다.’ 자기가 하나님이 일으킨 일에 대해서 맘대로 해석하고 불만을 터트리고 있습니다.
자,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과연 성경적으로 옳은가를 성경을 통해서 보겠습니다. 출애굽기 20장 5-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똑같은 말씀을 우리가 봅니다. 방금 읽었던 이 말씀을 다시 안 읽어도 무슨 뜻인지는 다 아시겠지요. 똑같은 말씀을 우리가 보는데 내 것으로 소유된 것을 갖고 있는 그 나, 나의 입장에서, 그 내 것을 포기하지 않는 입장에서 이 성경을 보게 되면 어떻게 보느냐? ‘말씀 지켜야 해. 십계명 지켜야 해. 만약에 이 십계명을 우리가 안 지키면 3, 4대(아버지-나-아들-손자)에 이르기까지 저주를 받는대. 그러니 이 저주를 끊기 위해서라도 나부터 똑바로 살면서 말씀을 지켜야 해.’ 이렇게 해석하는 거예요.
내 것이 있다면, 나의 것이 있다면, 내 자존심과 내 가치와 내 의미의 바탕이 내 것에 있다고 여긴다면 그렇게 해석합니다. 여러분, 그렇게 해석합니까? 그런데 하나님 입장이 되어봅시다. 내가 소유할 것이 따로 있다는 관점, 곧‘하나님은 하나님 것이나 소유하세요. 내 것은 내 것이니 손대지 마세요.’ 이런 관점 말고, 나마저도 하나님 소유라면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3, 4대까지의 죄의 결과에 대해서 나에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이것은 하나님의 합당한 조치로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이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왜? 내 것이 없으니까. 비소유, 또는 무소유니까. 내 것이 없으니까. 나마저 하나님 소유니까 하나님이 자기 소유인 나를 마음대로 사용해서 ‘말씀을 안지켰을 때 저주받고, 말씀을 지키면 복을 받는다.’의 그 말씀을 현상적으로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 마음껏 사용할 권한은 우리 하나님께 있잖아요. 하나님께 그 권한이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 대해서 왜 우리가 불만을 갖고 있습니까? 아까 제가 아브라함 자손을 이야기했지요. 아브라함 자손에게는 복과 저주의 두 가지 현상을 다 드러낸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아브라함 자손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실제로 사무엘상을 통해서 보겠습니다.
사무엘상 2장, 3장, 4장에서 한 집안이 작살나요. 2장 29절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찌게 하느냐”
이게 지금 누가 누구보고 하는 이야기냐 하면, 하나님께서 엘리 제사장에게 나타나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방금 읽었던 구절 이전의 사무엘상 2장 25절 끝에 보면, “그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설명이 필요한데요. 엘리 제사장은 일반인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제사를 드리는 자예요. 제사를 드린다 할 때 우리가 이런 생각은 좀 버리세요. ‘제사를 잘 드리면 복 받는다.’ 이런 생각을 하지 마시고요, 그들의 역할은 ‘제사를 드림으로써 제사를 드리라는 하나님의 그 말씀이 실효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 집안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증명하고자 한다.’라는 뜻이에요.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맡기고 그 일을 통해서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개무시해도 되는 말씀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을 때 어떤 실효적인, 실증적인 현상이 일어나는지를 제사장을 통해서 보여주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제사장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그 제사를 아주 영망으로 여겼지요. 제물 고기를 갈고리로 건져서 자기부터 챙기는 그런 이야기가 죽 나옵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그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습관은 이러하니 곧 아무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그것으로 남비에나 솥에나 큰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서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취하되 실로에서 무릇 그곳에 온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뿐 아니라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 드리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제사장에게 구워 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치 아니하고 날것을 원하신다”(삼상 12:12-15).
자기가 먼저 예물로 드리는 고기를 건져 먹고 “내 맘대로다, 왜? 내가 먹고 싶은데! 제사 이거 뭔데? 아무것도 아닌데!” 엘리 제사장 아들들이 그렇게 했어요. 아버지가 그것을 보고 아들들에게 나무랐습니다. 그렇게 나무랐는데 하나님의 뜻은 이거예요.
나무라봤자 아들들이 안 고쳐졌어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죽이기로 작정했기 때문에요. 그러니까 엘리 제사장의 자기 아들이 죽는다면 이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내 자식을 죽이기로 작정을 하셨는데 죽는 이유는 뭐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아주 우습게 보는 그것과 연계시켜 버리는 거예요.
여러분, 이것을 두고 개인적인 입장에서 저주받았다고 하는데, 개인적인 입장에서 저주받은 것은 맞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입장에서 지금 하나님께서 일 처리를 제대로 못 하고 있는 겁니까? 제대로 안 하고 있는 거예요?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이 일을 제대로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집안의 아들들이 저주받는 것을 보고 우리는 찬양해야 하고, 더 중요한 사실은 제사장의 그 아들들을 죽이는 하나님의 말씀은 제사장 아들들에게만 준 것이 아니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줬다는 거예요.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까?
성경 보면서 ‘하나님 멸시할 때부터 알아봤어.’ 자꾸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러면 우리는요? 우리는 하나님 멸시 안 했어요? 안 합니까? 사무엘상 3장 13-14절에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이나 예물로나 영영히 속함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노라.”라고 되어 있어요.
이 엘리 제사장이 누구 자손이냐? 아브라함 자손입니다. 아브라함 자손에게는 뭐가 있다? 복도 있고 저주도 있다는 거예요. 지금 제가 복이 뭐냐를 이야기를 안 해요. 왜냐하면 저주가 뭐냐부터 출발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는 하나님이 내리는 거예요. 인간이 다른 사람보고 “너 그러면 저주받는다.” 같은 인간이 같은 인간보고 저주할 권한이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우리가 지어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주신 것이지 어느 인간도 거기 끼어들거나 거들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대로, 말씀을 위배한 어떤 사람을 작살내고 그 집안을 풍비박산 만들 때 우리는 주의해야 해요.
‘휴, 다행이다. 나는 살았다.’ 이러면 안 된다고요. 지금 저주받는 그 엘리 제사장 집안의 태도가 보편적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이런 요소가 다 있어요. ‘어휴, 난 다행이다.’ 이러면 주께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다음 차례는 너야. 그다음 차례는 너라고!” 너무나 간 떨리는 이야기거든요.
성경에서 이렇게 저주받는 이야기가 왜 나옵니까?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거죠. 사람이 살아있는 것 같지만 진짜 살아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말씀대로 현실화시키는 그 점이 살아있는 거예요. 계속 엘리 제사장이 박살 나는 것을 보신다면 바로 사무엘상 4장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며느리가 임신해서 아기를 낳는데 임신했을 때는 살아있었어요. 아이 낳을 때도 살아있었습니다. 드디어 아이를 해산하면서 그 며느리가 서서히 죽어갑니다. 죽는 이유가, 남편이 블레셋 전쟁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어요.
그리고 든든한 백, 최고의 권세자 아닙니까, 그 시아버지가 아들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받아서 앉아 있던 의자에서 자빠져서 죽었습니다. 시아버지 죽었어요. 남편 죽었어요. 그럴 때 하필 아이는 안 죽었어요. 아이를 해산하고 죽어갈 때 곁에 선 여인들이 그에게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네가 아들을 낳았다”(삼상 4:20) 하니까 그 며느리가 하는 말이 있어요.
‘아들을 낳은 게 나에게 무슨 영광이냐? 이가봇,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시부와 남편이 죽음으로 인하여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지금 며느리가 예언하는 거예요.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 시부와 남편이 죽었음을 인함이며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삼상 4:20-21).
한 집안이 완전히 박살 났습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한번 돌아와 봅시다. 오늘 본문 열왕기상 14장 1절에서 “여로보암 아들 아비야가 병든지라”라고 되어 있어요. 병 들었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아히야 선지자한테 자기 아내를 보냈는데 그냥 보내지 않고 변장시켜 보냅니다. 일반인으로 간주해서 보내요.
왕 같으면 선물이 많을 텐데 일반인들에게서는 별로 선물이 없잖아요? 그래서 열왕기상 14장 3절에 보니까 선지자한테 떡 10개하고 과자와 꿀 한 병 들고 갑니다. 일반인들이 선지자한테 부탁할 때 요 정도 선물 들고 가는 거예요. 그때 아히야가 눈이 어두워서 전혀 보질 못했어요.
아까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선지자는 누구하고 소통하는 사람이냐? 하나님으로부터 연락을 받는 사람이에요. 연락을 받는데 눈이 어둡단 말이에요. 눈이 어두운 데다가 자기 처가 변장을 했으니까 여로보암 생각에 ‘설마 이 선지자가 내 아내인지 알아볼 리 없다.’라고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열왕기상 14장 6절에 보니까 “저가 문으로 들어올 때에 아히야가 그 발소리를 듣고 말하되 여로보암의 처여 들어오라 네가 어찌하여 다른 사람인체 하느뇨.” 어찌하여 다른 사람인 체하느냐. 진짜 도사예요. 마치 무슨 상황이냐?
집안에 문제가 있어서 무당을 찾아갔는데 “여기가 용한 부채 도사 집입니까?”하고 문 열자마자 그 사람 신상을 무당 쪽에서 다 아는 거예요. “이게 어디서…” 그것도 이 무당이 눈이 어둡다면, 사람을 분간 못할 정도로 눈이 어두운 데 그 사람의 신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다 해버리는 거예요. “이게 어디서 정체를 감추고 고민거리를 나한테 가져왔느냐?”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면 무당 찾아온 그 사람, 할 말이 없겠죠.
자, 아히야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이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해서 열왕기상 15장 27-30절 이 부분부터 먼저 봐야 합니다. 그러면 앞의 본문이 이해가 돼요. “이에 잇사갈 족속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가 저를 모반하여 블레셋 사람에게 속한 깁브돈에서 저를 죽였으니 이는 나답과 온 이스라엘이 깁브돈을 에워싸고 있었음이더라 유다 왕 아사 제 삼년에 바아사가 나답을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고 왕이 될 때에 여로보암의 온 집을 쳐서 생명 있는 자를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다 멸하였는데 여호와께서 그 종 실로 사람 아히야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으니 이는 여로보암이 범죄하고 또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죄로 인함이며 또 저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동시킨 일을 인함이었더라.”
지금 여로보암 집안의 아들이 아파요. 아픈데 걔가 죽죠. 그다음에 나답이 여로보암의 아들이 돼요. 그래서 여로보암이 죽고 난 뒤에 나답이 차기 왕이 되는데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가? 아히야가 예언하기를 ‘바아사라는 사람이 등장해서 너희 집안 자체를 다 죽여서 그 후손이 왕이 되지 못하도록 그렇게 조치를 한다.’라고 그렇게 예언을 해버립니다.
그 예언이 열왕기상 14장 10절부터 쭉 나와 있습니다. 11절에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가 성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으리니 이는 여호와가 말하였음이니라 하셨나니” 12절, “너는 일어나 네 집으로 가라 네 발이 성에 들어갈 때에 그 아이가 죽을찌라.” 네 발이 성에 들어갈 때 아이는 이미 죽어버린다고요.
자, 이 예언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이 아히야가 누구냐 하면 열왕기상 11장 29절에, 선지자가 입고 왔던 옷을 찢으면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가운데 열 지파를 여로보암에게 넘겼던 그 선지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번 정리를 할 필요가 있어요.
죽는 아들의 이름이 아비야에요. 여로보암 집안 가운데 이 아이만은 무덤에 제대로 묻혀요. 그리고 나머지 어른들과 다른 자식들은 완전히 개한테 먹잇감이 되도록 해서 다 엉망이 되어버려요. 그러니까 같은 여로보암의 아들 가운데 몸이 먼저 아팠던 아비야는 어떤 증거로 남느냐?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실 때 저주 가운데서, 저주 속에서 어떻게 인간이 구원받는가의 증거로서 저주받을 집안의 아이 아비야를 하나님께서 따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한 점이에요. “너희 집안은 다 저주받아라.” 이래야 하는데 그 저주받는 자기 집안의 죄를 짊어지는 것처럼 아버지의 잘못을 짊어지고 자기가 미리 병들어 일찍 아이로서 죽어버린 그 아이만큼은 제대로 된 무덤에 들어가고 나머지는 못 들어갑니다.
이것이 뭘 이야기하느냐? 복이요? 인간에게 복은 없습니다. 복은 없는데 저주 가운데서만, 저주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가운데서만 복이 나와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묻고 싶을 거예요. “저주 가운데서 어떻게 복이 됩니까?” 그게 신약에 나옵니다.
바로 주님께서 우리의 일상을 변호해 줘요. 해석을 해줍니다. 변호, 주님이 친히 우리의 변호사가 돼 줘요. 로마서 8장 34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이 말씀을 한 번 새겨보세요.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라는 말은 우리한테 죄가 없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저주 안 받아도 될 정도로 괜찮게 살아간다는 이야기에요?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이 세상에 천국 갈 만 할 정도로 착한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주와 복을 줄 때는 모든 인간은 일단 다 저주의 대상이에요. 왜? 어떤 누구도 십계명을 지킨 사람이 없기 때문에요. 그러면 여러분이 생각하기로는 ‘그러면 복은 어디서 나옵니까?’ 맨날 복 타령. 복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그 저주로 인하여 저주 속에서 분명히 우리는 저주받아 합당하다는 증거를 저주 안에 남겨요.
뭐 이렇게 말을 어렵게 할 게 아니고 쉽게 가겠습니다. 여러분들이 고깃집에서 돼지갈비 먹고 나올 때 뭘 뿌리죠? 페브리즈 뿌리죠. 이거 왜 뿌리죠? 나로 인하여 타인이 피해받지 않도록 나에다가 뭔가…, 페브리즈 뿌리는 그것이 폭력은 아니지만, 그냥 쉽게 말해서 나로 인하여 남들이 피해 입지 않도록 나에게 폭력을 가해야 해요. 이게 주의 방식입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아비야는 잘못 없어요. 아버지가 우상 섬겼어요. 그런데 우상 섬긴 아버지 때문에 자식이 죽어요. 그 죽는 자식만이 제대로 묘실에 들어가요. 기념할 만한 묘실에 들어간다고요. 아까 중요한 거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의 저주받는 사람이 벌받는다고 하니까 ‘휴, 다행이다. 아, 나는 저만한 죄는 안 지었기에 복 받을 만한 자격이라든지 아직 그런 요소가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렇게 생각하게 되면 뭐가 누락이 되느냐?
그렇게 되면 로마서 8장 34절이 빠져버립니다. 로마서 8장 34절은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라고 되어 있어요.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여러분들 이거 이해 못 하면 오늘 설교 헛방이에요.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롬 8:33-34)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신 그분에 의해서…, 내가 나를 변호하면 안 돼요. 그분이 친히 변호해 주면 “죄 없어. 내가 죄 씻었어.” 주께서 변호해 준 사람을 누가 죄 있다고 합니까? 여러분, 죄가 뭐냐 하면 주님의 십자가에서 눈 돌리는 게 죄에요. 주님의 십자가가 뭐냐 하면, 천하 죄인인 우리를 변호해 주기 위해서 주께서 흘리신 피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눈 돌리면 누가 누구를 변호하는지 알아요? 내가 나를 변호해요. “내가 너한테 잘못한 게 뭐가 있어? 내가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데? 벌을 받아도 네가 받아야지. 난 잘못한 거 없다.” 그러면 뭐가 빠집니까?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이게 빠지잖아요.
요한복음 14장 25-28절을 보게 되면…, 길어서 제가 그냥 압축해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내가 가면 다시 올게.” 여기 14장 25절에 “내가 가면 너희에게 다시 올게.” 어떻게 오느냐? “보혜사로 올게.”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남기고 그냥 떠나요. 떠나는 이유가, 제자들이 제대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도 못하고, 추종도 못하고, 따라다니지도 못했어요. 제자들은 그냥 최선을 다해 주님 따라다니면 하늘나라 얻어걸릴까, 해서 따라다닌 겁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는요, 제자들이고 누구도 인간들이 낄 자리가 아니에요. 오직 예수님 혼자 그 저주를 담당했어야 했어요. 양이 흩어질 땐 목자만 담당해야 하고 양은 흩어져서 제 갈 길을 가야 돼요. 제 갈 길로 간 그 양 중에서 주님께서 “나 다시 올게!”라고 한 거예요.
다시 오는 이유가 뭐냐? 성령을 주시기 위해서 다시 오는 거예요. 성령은 우리의 변호사예요, 변호사. 여기 ‘보혜사’라고 되어 있는데 이게 변호사입니다. 변호사 없는 성도는 성도가 아닙니다. 저주받아 마땅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 누가 정죄하리요”(롬 8:32-34).
누가 죄 있다고 하리요? 이것은 뭐냐 하면,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복을 얻을 자격이 없어요. 그런데 저주받아야 합당한 인간에게 저주에서 복으로 옮겨지기 위해 중간에 누가 끼어드는가? 친히 주님께서 변호사로 끼어들어서 “저 사람이 죄 있는 거 맞는데 내가 다 제거했어.”라고 하는 그 사람이 바로 복 받은 사람이에요. 그게 바로 복음이고, 이게 기쁜 소식이고, 이게 진리입니다.
따라서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우상 섬겼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다. 이것은 하나님이 저주받을 짓을 한 자에 대해서는 반드시 저주로 갚는다.’ 이게 말씀의 기능이기 때문에 그래요. 끝으로 한 경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이미 저주 안에 있는,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닌 사람 같으면 하나님이 율법으로 다루지도 않는데, 그렇게 다루지 않기 때문에 내버려두는 그런 이방 민족에게도 과연 복이 있을 수 있느냐?
이스라엘에게는 저주받는 사태를 일으켜서 그 저주받는 사태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적용이 된다. 선지자를 통해서 모든 것을 말씀대로 적용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일관성이 있는 일이라는 것이 드러났다고 칩시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 우리가 저주받아 마땅하구나.’하고 안다면 그러면 이방인들은 어떻게 되는가?
여호수아 2장 11-12절에 보면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 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
이게 기생 라합이 이야기한 거예요. 기생 라합 본인의 고백으로 몇 명을 건지느냐? 부모부터 해서 남녀 형제, 거기에 속한 모든 자를 다 살려달라고 합니다. 살려 달라고 이야기를 해요. 기생 라합이! 누구를 붙들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스라엘 정탐꾼을 붙들고 그 이야기를 한다고요.
기생 라합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자기의 민족을 배신한 거예요. 자기 민족을 배신한다는 것은 자기 혈육을 배신한 겁니다. 갈아 타기 하는 거예요. ‘우리 대대로 내려왔던 혈육을 완전히 버리고, 이제는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하나님과 결부되어 있는 그 민족 사람을 내가 선대 했으니까 나도 당신 민족의 일원으로 끼워주세요.’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기생 라합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이미 뭘 아는 것인가? ‘여호와 하나님은 이방 민족을 심판하기로 작심을 했다.’라는 사실을 진실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뭐 심판 되겠나, 안 되겠나?’ 이게 아니고, 이것은 확실하니까!
사도행전 26장 18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그 만난 것에 대한 해석을 이렇게 합니다. “그 눈을 뜨게 하여…” 눈을 뜨게 한다는 겁니다. ‘아 우리한테 변호사가 있구나. 난 내 인생 혼자 꾸리고 혼자 열심히 살면 되는 줄 알았더니 변호사 없이는 천국에 못 가는구나.’ 눈을 뜨게 하는 거예요.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우리 손녀를 어디 갔다가 데리고 오는데 손녀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성경에는 ‘하나님’인데 왜 세상 사람들은 전부다, 책에 봐도 ‘하느님’, 여기저기서 ‘하느님’ 왜 그렇습니까?” 하고 나에게 질문을 했어요.
그리고 “왜 사람들은 저렇게 절에 가고 부처를 왜 믿느냐?” 이렇게 할 때 제 답변은 간단했어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하기 때문에 그렇다.”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고 알아서 하는 이유가 뭐냐? 다 내 것이기 때문에, 내가 평생토록 일궈온 내 소유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나 선지자, 그리고 기생 라합은 여호와 앞에서 자기 소유를, 혈육이고 뭐고 다 버리고 몽땅 내 소유를 주님 소유로 바꿔 주시기를 바란다고 했어요. 왜? 우리는 심판 받아 마땅하기 때문에요. 유대인들이 이 기생 라합보다 못해요. 자기가 하나님 백성인 줄 알고 있어요.
오늘날 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변호사고 성령이 변호사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서 이만큼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나 잘났다, 나 믿음 좋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고 ‘정죄함이 없나니, 누가 너를 고소하리요’, 주님이 이 작업을, 나 같은 인간을 통해 드러내기 위해 우리 인생이 있는 겁니다. 말씀이 말씀대로 실행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불행이라는 말을 하지 마세요. 어떤 변고가 있다, 하지 마세요. 주께서 일으킨 일입니다. 우리는 그냥 쓰임 받는 것뿐입니다. 이게 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괜히 쫄았고, 괜히 무서워하고, 괜히 내 인생 망가졌다고 얼마나 악마에게 두려워했는지 이제 눈을 뜨게 하여 주시옵소서. 악마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소유로 바뀌는 그것이 얼마나 큰 복이고, 예수님이 변호사임을 알리는 기능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것이 제일 중요한 기능인 것을 마음껏 기쁨으로 알리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