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야곱의 지팡이

아빠와 함께 2025. 6. 29. 17:38

야곱의 지팡이

2025년 6월 29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1:21

11: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야곱은 아들에게 축복하기 전에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합니다. 자신에 손자가 됩니다. 그런데 그 축복 방식에 있어 아들들의 아버지가 되는 요셉과 의견 충돌이 있습니다. 그 대목이 이러합니다. “요셉이 그 아비가 우수를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 아니하여 아비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그 아비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니 우수를 그 머리에 얹으소서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여 가로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창 48:17-19)

즉 야곱은 아이들의 위치를 바꾸어서 그냥 오른손이 오른쪽으로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왼쪽과 오른쪽이 의도적으로 바꾸어진다는 사실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겁니다. 누가 복을 받은 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뭔가 전면으로 바꾸어져야 하고 그 과정을 드러내는 것이 언약적으로 중요한 겁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창세기 48장에 야곱은 두 손자에게 축복을 하면서 ‘침상’에서 합니다.(창 48:2) 하지만 오늘 본문 히브리서에서는 지팡이 머리에 의지해서 축복을 내립니다. 이는 손자들의 위치를 바꾸지 않고 야곱 자신의 팔을 어긋맞게 아이들 머리에 두는 그 몸짓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야곱의 130년 인간이 야곱 본인의 만들어낸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지배와 통제를 받으면서 험악하게 살아온 과정의 핵심을 말해주는 겁니다. (창 47:9) 자 야곱은 왜 팔을 어긋맞게 하면서 축복을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모든 육을 가진 인간들의 생각과 발상이 자기에게 의미를 두는 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현실이란 ‘다들 자신만의 현실’입니다. 자기를 포함하지 않는 현실은 현실이 아니라고 보는 겁니다. 무의미하게 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은 그렇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인간의 뜻을 배제하고 하나님 자신의 뜻으로만 구성되는 세계를 건설하게 됩니다. 야곱은 평생을 통해서 자신의 의미를 언약의 의미로 바꾸게 되는 과정을 보이게 됩니다.

지팡이가 거론되는 것도 다 이런 이유입니다. 지팡이는 다리를 제 힘으로 걷지 못하게 됨을 나타냅니다. 야곱에게 있어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던 그 일은 단순히 씨름하다가 자기 몸이 다쳤다는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때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확정하는 상황이었던 겁니다.

그 전에 야곱은 자신을 통해 ‘외계로 통하는 유일한 문’으로서 자기 자신을 규명했습니다. 야곱의 꿈을 통해서 그것이 실제 현실로 인정했습니다. 문제는 야곱 자신이 신기한 꿈이 있다는 그 자체로서 자신이 긍정적 존재인줄 알았던 겁니다. 그러나 막상 밤에 하나님의 천사를 만나고 난 뒤, 비로소 자신은 아무런 의미없이 죽어야 될 자임을 압니다.

즉 언약은 언약 스스로 이루어지게 되는데 인간들의 존재는 자꾸만 자신이 그 언약 달성과 자신의 구원에 자신이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 겁니다. 그러다가 천사에 의해서 한 방 크게 먹고 그때부터 야곱은 지팡이를 짚고 살아야 했습니다. 바로 그 지팡이 머리에서 두 손자에게 축복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두 가지로 이해될 수 있을 겁니다. ‘I am as I am’즉 ‘나는 생긴 그래도, 혹은 있는 그대로의 나’라는 뜻입니다. 나? 나 여기 있잖아? 라는 겁니다. 또 하나는 ‘I am what I am’‘나는 나이다’라는 겁니다. ‘〜이다’는 겁니다.

인간은 자신의 여기 있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내가 누구냐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하나님의 압박이 왔을 때 비로소 인간은 자기 자신이 누구냐에 관심 두게 됩니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유방이 나로 빨게 하였던가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욥 3:11-13)

선지자로서 욥은 하나님의, 압박에 의해서 비로소 자신이 ‘여기 있음’을 문제 삼았습니다. “이렇게 힘들고 아프게 살 것이라면 왜 저를 이 땅에 살게 하십니까? 차라리 태어날 때 그때 죽었으면 저를 좋을뻔 했습니다”인간들은 그저 ‘살아 있다’를 근거로 자기 의미의 현실을 꾸미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을 달리 말씀하십니다. “사망아!”(고전 15: 55) 즉 인간은 이 세상에 나올 때부터 죽어서 나온 겁니다. 성장하면서 사망입니다. 그래놓고도 진정 이 사망으로 불리워지는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이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사건은 유일하게 ‘사망’과 ‘생명’ 모두를 누가 완성했는지가 나타나는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이 유일한 사망이요 예수님의 유일한 생명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아버지와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 사망임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아버지와의 관계성이 곧 생명임을 드러냅니다.

이 사망과 생명의 확장을 위해 인간 세계를 십자가 사건 중심으로 퍼지게 됩니다. 마치 온돌 장만 바닥에 숨어 있는 전선들이 터져 노출되듯이 말입니다. 인간이 사망에 해당되는 것은 십자가 사건 그 현장에서 목격자들의 말을 들어봐야 합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마 27:39-44)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다는 말은(요 5:24) 사망의 도약대에 설 때만 비로소 아는 겁니다. 인간이 사망에 속하는 것은 상식과 양심으로 ‘나는 이런 자’로 규정하면서 자기 의미세계를 쳘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바로 요셉의 형들이었습니다. 요셉을 죽이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에 의해서 요셉은 자기 인생이 아니라 꿈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불신자로 태어났기에 철저한 불신자일 수밖에 없는 우리는 언약의 바꾸치기로 성도가 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이 불신자임을 발굴하면서 십자가의 능력 안에 사는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73강-히브리서 11장 21절(야곱의 지팡이)250629-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1장 21절입니다.

히브리서 11: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지팡이’라는 말이 여기에 처음 나옵니다.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할 때 침상에서 축복을 한 걸로 되어 있어요(창 48:2). 그래서 창세기의 그 대목을 주보 뒤에 <이번 주 설교 요약>에 실어 놓았습니다. 본문이 아주 긴데요, 거기에 어떤 이야기의 내용이 나옵니다.

할아버지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두고 축복을 하는데 오른쪽 손이 가는 쪽이 장자예요. 맏이가 되는 겁니다. 아버지 야곱이 요셉 자신의 두 아들에게 손을 얹는 것을 딱 봅니다. “요셉이 그 아비가 우수를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 아니하여 아비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창세기 48:17).

그때 아버지가 눈이 안 좋았어요. 눈이 안 좋으니까 아들 요셉이 생각하기를 ‘어느 쪽에 맏이가 있는지를 몰랐구나.’ 하고 친절하게 아버지를 돕기 위해서 이렇게 말해요. “그 아비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니 우수를 그 머리에 얹으소서”(창 48:18) 할 때 그때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여 가로되…” 다음에 나오는 말이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창 48:19). 곧 ‘너는 지금 내가 모른다고 생각했지? 나도 안다.’

여기서 ‘나도 안다’라는 말은, 인간들이 알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다 바꿔야 한다는 거예요. ‘내가 지금 하는 이 행위는 네 눈에는 사람의 행위로 보이겠지? 그냥 눈에 보이는 아버지의 행위로 보이겠지? 아니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바꾸는 거예요. 둘째와 첫째를 축복하는데 요셉이 생각하기를 “위치가 바뀌었습니다. 둘의 위치를 바꿔놓고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라고 할 때 아버지가 “나도 안다. 그러면 자리 바꿔.” 그렇게 자리를 바꾸는 게 아닙니다.

그 자리는 그대로 두고 “너희들 인간들이 생각하기엔 이렇게 축복한다고 생각하지? 그러나 내가 평생 살아오면서, 147년을 살면서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이렇게 어긋남이다.” 어긋남입니다, 어긋남, 어긋맞게 하는 거예요. 이 ‘어긋맞게’를 모르면 너희는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다는 겁니다. ‘어긋맞게’ 하는 거예요.

요셉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끄집어냈고, 언약의 주체자인 아버지 야곱은 인간이 할 수 있고 알고 있는 것을 전제로 해서 그걸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창세기 48장에서는 그렇게 되어 있는데 오늘 히브리서에는 ‘침상에서 어긋맞게 바꿔치기한다.’라는 게 아니고 ‘지팡이에다가 그렇게 한다’라는 거예요.

난데없이 지팡이가 왜 나오죠? 이 지팡이라는 것이 왜 등장하는지? 야곱도 마찬가지로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은 다 해봤어요. 다 해봤는데 야곱이 밤중에 하나님과 만났을 때 하나님이 나한테 한 게 뭐냐 하면,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네가 아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뀌어야 해.”

‘하나님도 모르면서 너희들은 그동안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 믿는다.’라고 한 거예요. 자연적으로 하나님 믿는 것도 다 엉터리가 되죠. 하나님이 와서 수정해 주시는 겁니다. “그게 아니야.”라고 수정해 주시면서 야곱은 야곱대로 본색을 다 드러냈고, 하나님은 그 야곱의 본색을 다 받았어요.

그러면 야곱은 가해자가 되고, 졸지에 야곱에게 힘에서 밀리고 어려움을 당하는 하나님의 사자(使者)는 피해자가 되는 겁니다. 인간들은 본인을 가해자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인간들이 자기를 가해자로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요, 현실이라는 것은 자기만의 현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를 포함하지 않는 그런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믿어 버려요. 그렇게 믿고 살아온 거예요.

이 말은 뭐냐? ‘나만 의미 있으면 돼 나만!’ 그런 식으로 평생을 살아온 겁니다. 야곱이 하나님 믿는 것도 ‘하나님이여, 나 잘 되게 해달라’라고 믿은 거예요. 왜? 나의 의미만 있으면 되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서 온 하나님의 사자는 야곱을 쳐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칠 때 야곱은 그걸 뭐로 이해했느냐? 나는 이제 죽었다고 이해했어요, 죽었다고! 너무 오버 아닌가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 32장 30-31절에 보면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이건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봤다는 거예요.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는데 그렇게 저는 가운데 계속 걸어갈 수가 없으니까 여기서 뭐가 필요하냐? 지팡이가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 그때부터 지팡이를 짚었다는 말은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에 나는 죽었어요.” 하는 고백이에요.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은 죽은 채로 살아가고 있다.’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도달되면 우리는 ‘하나님, 잘해 봅시다. 믿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뭐 어떻게 봉사하겠습니다…’ 이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 죽은 자야.” 하고 지적하는 쪽으로 찾아오게 되어 있어요.

고린도 전서 15장에 보면, 거기에서 사도 바울이 아주 특이한 표현을 했는데요. 55절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렇게 ‘사망아’라고 불렀어요. 사망이 이렇게 부를 대상입니까? 보통 사람 부를 때, 자기 아들 이름 부르고 친구 이름 부를 때 ‘누구야’ 하고 부르잖아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사망을 마치 어떤 인물로 간주해서 부릅니다. “사망아, 어이! 사망아!” 야, 이거 참.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죠? ‘사람’이라고 쓰고 ‘사망’이라고 부릅니다. ‘세상’이라고 쓰고 ‘지옥’이라고 부릅니다. 지옥은 뭐냐? 지옥은 요셉의 꿈이 없는 곳이 지옥이죠.

오늘 본문에서 ‘어긋맞는’, 주의해서 잘 보셔야 해요. 어긋맞는 그 대상이 열두 아들이 아닙니다. 요셉의 두 아들이에요. 요셉도 아니에요. 요셉의 두 아들이에요.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함으로써 요셉의 두 아들 이전에 있었던 열한 형제가 구성하는 층, 인간들의 그 층이 있고요, 그 위에 하나님의 언약이 없으면 생겨나지 않는 아들, 그 두 아들에게 축복하는 층, 이러면 복층이 돼요.

다중 층이 된다고요. 현실이 층이 두 개가 된다고요. 아래층은 뭐냐? 나에게만 의미가 있는 층. 위층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의 의미만 존재하는 층, 두 층으로 나누는 거예요. 이렇게 두 층으로 나누는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층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야곱에게 언약을 주었고, 야곱은 그때부터 지팡이 짚고 살았고, 그다음부터는 야곱의 일대기가 하나님의 언약의 확장이 전개되는 층이 된다 이 말이죠.

야곱의 일대기 가운데서 야곱이 유독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아들 가운데서도 특히 유난히 너무 좋아해서 채색옷을 입힌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요셉이었습니다. 야곱은 요셉을 너무 사랑했어요. 왜? 엄마가 없으니까요. 사랑했던 자기 여인 라헬이 죽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유난히 사랑했던 여인을 생각해서 그 아들인 요셉을 특히 사랑했는데 그 요셉이 어떻게 되는가? 죽었어요. 요셉이 죽었습니다. 환장할 일이에요 정말.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어요. 하나님의 언약에서 아브라함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뭐냐?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었습니다.

이삭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뭐냐? 자기 취향과 딱 들어맞는, 사냥하는 고기부터 활동성까지 ‘정말 이것은 내 아들답다.’ 해서 누구? 에서. 그런데 이삭은 그 에서를 잃었어요. 자기 손으로 저주했습니다. 자기 손으로 저주했어요. 아버지 아브라함은 이삭을 자기 손으로 죽이려고 했어요.

이제 그다음 차례가 야곱입니다. 야곱에게는 사랑하는 자기 아들, 특별히 사랑하는 아들이죠, 요셉이 있는데 그 요셉이 죽었어요. 요셉이 죽을 때 야곱은 요셉을 누가 죽인 걸로 알고 있느냐? 짐승이 와서 죽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창세기 37장에 보면, 야곱의 아들들이 아버지가 요셉에게 특별한 사랑을 주니까 요셉이 너무 미운 거예요.

엄마가 다르니까 특히 더 미워했죠. 그런데 미움받을 짓을 또 만드네요? 어린 요셉에게 꿈이 주어졌고, 요셉이 어리다 보니까 그 꿈을 자랑질하는 거예요. “아빠, 엄마, 형들도 다 나한테 절하게 되어 있어.” 이렇게 자랑하니까 그 요셉의 형들이 딱 벼르고 있었던 거예요.

그 벼르고 있었던 대목이 창세기 37장 18-19절입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서로 이르되 꿈꾸는 자가 오는 도다.” ‘꿈꾸는 자가 오는 도다.’ 그러니까 요셉에게는 꿈이 실려 있다는 그 말이죠. 요셉을 죽이면 꿈도 같이 날아가니까.

창세기 37장 20절에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다음이 중요해요.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이것은 뭐냐? 꿈을 받은 적도 없고, 신기한 꿈을 꾼 적도 없는 그 사람들의 본심이 꿈을 꾼 자에 의해서 여지없이 들통나는 거예요.

제가 설교할 때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바꿔치기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거예요. 교회 몇십 년을 다녀도 소용없어요. 바꿔치기해야 하는데 뭘 바꿔치기 하는가? 내 생각을 바꿔치기해야 해요. 그러면 내 생각을 어디다 바꿔치기하느냐?

요셉의 형들의 마음, 그 심정을 이해하면서 그 바꿔치기의 준비 단계에 들어가는 거예요. 형들의 생각은 뭐냐? ‘우리는 꿈이 없는데 쟤한테는 꿈이 있네? 꿈이 있다는 쟤를 죽여 버리고 어디 한번 보자. 꿈 없는 우리가 옳은지, 꿈 있는 너의 그 꿈의 의미라는 것, 그 새로운 꿈이 가치가 있을지 한 번 보자니까?’ 이런 식이에요.

광주 강의에서 제가 마태복음 27장 39-40절을 언급했습니다. 다시 한번 제가 언급하면 이렇습니다. 39-40절에 보면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다른 사람들도 조롱하고 같이 십자가 달린 강도 둘 다 예수님을 조롱했어요.

이게 십자가 사건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십자가를 이해하려면요, 십자가라는 지식을 안고 있는 나부터 출발해서는 십자가를 전혀 이해 못 해요. 뭔가 바꿔치기가 일어나려면 우리가 어느 쪽에 속해야 하느냐? 그 십자가의 현장에 있던 사람들…, 재판 같으면 목격자예요. 재판에서 목격자의 증언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 십자가 현장에 있는 목격자들의 증언을 한번 들어보자는 거예요. “당신들은 저 예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십자가 달린 것은 개그에요. 코미디입니다. 참 웃기지도 않은 일을 하고 있어요, 지금! 진짜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 달린 예수님 보고 뭐라고 생각했어요?

‘당신도 이제 할 만큼 했다. 이 중에 당신한테 속아 넘어갈 사람 아무도 없어. 고마해라, 고마. 그만해! 메시아도 아닌 게 어디서 메시아 코스프레를 하면서 우리 앞에서 나를 믿어라? 구원을 얻으리라? 아이고 참 기가 차서. 예수 당신도 참 웃기지만 당신 믿고 따른 인간들도 같잖아서 말이 안 나온다.’ 이게 지혜로운 유대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제일 공부 많이 한 사람들이에요. 서울 대학 출신들이에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그런 행동을 하면서도 신중에 신중을 기합니다. 많이 똑똑해요. 그래서 자기들끼리 그래요. “메시아라면 아마 하나님께서 죽기 전에 살려 줄 것이다. 우리는 저 사람을 안 믿어. 과대망상증이니까, 안 믿는 건 맞는데…” 추종자가 몇 명 되니까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 일단 십자가에 달리게 하자. 그렇게 했을 때 과연 하나님이, 그동안 자기가 말하던 그 아버지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하는지 한 번 지켜보자.”

옆에 있는 강도에게도 그런 생각이 있었어요. ‘한번 지켜보자.’ 지금 죽어가고 있거든요. 하나님이 도와줬어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끝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끝까지. 그걸 누가 주시했는가? 예수님의 제자들도 주시했어요. 세상에 아무 일도 없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이 유대인들과 로마 군병들이 “거 봐, 우리가 조치를 잘했잖아. 아무것도 아닌 걸 가지고.” 조치를 너무 잘한 거예요. 왜? 가짜니까요. 잘 죽인 거예요. 십자가 이야기가 왜 있나 하면요, 우리가 자꾸 십자가를 믿으려고 하고 예수를 믿으려고 하니까 이게 바로 주님 보시기에 역겨운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불신자가 되어야 해요. 하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성경 주신 이유는 “제발 네가 언제까지 신자 코스프레 할래?” 인간 가운데 무슨 신자가 있습니까? 인간은 신자라는 것은 성립이 안 됩니다. 왜? 자기 의미를 믿으니까요.

이 세상에 소중한 게 뭐가 있어요? 이 세상에 뭐가 소중합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한테는 자기 자식이 소중한데, 성경이 진척되면서 진짜 소중한 것은 욥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여러분, 소중한 게 있어요? 답변 들을 필요 없어요.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요.

성경의 답변을 하기 전에 이미 이 세상에 학문적으로 인간들에게 뭐가 소중한지 정립이 되어 있습니다. ‘I am as I am’ 갑자기 영어 방언을 해서 죄송합니다. ‘나 생긴 대로 나 여기 있음.’ 이게 소중하냐, ‘I am what I am’ 즉 ‘나는 ~이다.’ 이게 소중하냐?

이 둘 사이가 인간들의 지혜로 정리가 되어 있어요. 나는 나대로 여기에 있다는 거예요. ‘있다’에요. ‘I am as I am’은 ‘내가 여기 있다’라는 거예요. 이 공간을 차지하고 점령하고 있다는 거예요. ‘I am what I am’은 ‘나는 누구냐?’에요. ‘Who are you?’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는 누구이다’에요.

둘 중에 어느 게 중요하냐? ‘내가 있다’라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나 이런 사람이에요.’ 하는 거예요. “당신은 있습니까?” 아니면 “당신은 누구십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누구냐고 물으면 나는 누구의 아내입니다, 누구의 남편입니다, 누구의 자식입니다, 교회의 집사입니다, 장로입니다, 목사입니다, 하잖아요.

그건 아니에요. 그것은 틀린 답변이에요. ‘본인이 누구십니까?’를 아느냐는 말이죠. 남을 자꾸 끌어당기지 말고, ‘나는 누구하고 잘 아는 사이다’ 그런 것을 당기지 말고, 본인이 누구인지를 아냐는 말입니다, 본인이! 아무도 몰라요. 아무도 모릅니다.

남들이 나를 아버지라고 하니까 내가 아버지인 줄 알고 있어요. 남들이 집사라고 하니까 집사인 줄 알고 있어요. 남들이 성도라고 하니까 성도라고 알고 있다고요. 아무도 나를 몰라요. 그런데 성경은 말합니다. “사망아!” 우리보고 사망이래요.

이건 신약의 이야기고 구약의 욥기 3장 11-12절에 보면 인간에게 소중한 것이 욥을 통해 고백되고 있습니다. 그 대목을 읽어보겠습니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유방이 나로 빨게 하였던가”

즉 ‘하나님이여, 왜 저를 이 땅에 죽은 채로 태어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왜 산 채로 태어나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라고 욥이 하나님께 원망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뭐냐? 바로 자기 자신이 살겠다는 것, 살아있는 내가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특별히 선지자로 간주해서 압박을 가해요. 마귀를 통해서 압박을 가하니까 이번에는 욥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이렇게 상처받을 것 같으면 이런 상처받을 나를 왜 태어나게 했습니까? 이렇게 아플 것 같으면 차라리 죽여주옵소서. 내 소원입니다. 사는 게 이렇게 힘들 것이라면 제발 죽여주옵소서.”

욥은 아직도 자기가 누군지를 몰라요. 하나님이 나한테 압박을 가했다? 그 압박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 외부, 타자에 의해 압박당할 때 나는 외부에 의해 이런 반응이 나타나는 것뿐이지 그 반응으로 내가 누구인지는 모르는 거예요. 그러면 정답은 뭐냐? 하나님께선 “사망아!” 라고 불러요.

그렇게 ‘사망아’라고 불러줄 때 그 사망은 어디서 아느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욕 얻어먹고, 핍박받고, 오해받고, 조롱받을 때 예수님의 그 모습 자체 안에 사망이 들어있었던 거예요. 육으로 오신 예수님이 사망이었던 겁니다. 그 사망에서는 사망이 튀어나와야 하고, 사망의 모든 할 소리가 다 나와야 해요.

예수님이 죽어 마땅한 그 이유가, 예수님이 죽으면서 다 터져 나오고, 그것이 모든 인간들에게 퍼져있었던 거예요. 전기온돌에는 전선이 깔려 있잖아요. 공사하는 사람이 기존에 깔려 있는 그 전선을 강하게 잡아당기면 두두둑 다 터져 나오죠.

십자가에서 사건을 일으켜버리면 그동안 숨어 있던 인간의 그 ‘내가 누구냐?’가 다 터져 나온다고요. 모든 시대에 두두둑 하고 다 터져 나와요. 그동안 인간이 사망이면서도 ‘I am as I am’ 여기 존재할 때, 살아있다는 것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게 나인 줄 알았어요.

생긴 그대로, ‘나 여기 있잖아. 여기 있는 나를 왜 그런 식으로 대우해. 나 여기 있다니까?’ 그러니까 인간의 세계에서 의미는 어떤 의미라도 내가 사망이라는 의미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나 자체가, 죽음이 살아있다는 것 다시 말해서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죽은 채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인간은 어떤 식으로도 수용할 방법이 없습니다.

‘살아있네? 살아있으면 어디 가지? 천국이 있다니까 나중에 죽고 난 뒤에 구원받기 위해 교회 가야지. 교회 가면 뭐하지? 예수 믿으면 되지.’ 그게 예수님 조롱하는 거 아닙니까? 모독하는 거잖아요. 마치 신자 되면 구원받으니까 신자가 되려고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원하는 것은, 우리가 사망인 것을 알리기 위해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으로도 결국 생각 못 하는 불신자의 그 자리에다가 우리를 데려가는 거예요. 우리가 생각할 수도 없는 불신자의 자리까지 끌고 가시는 겁니다.

그래야 바꿔치기가 돼요. 그래야 ‘어긋맞기’가 되는 거예요. 불신자의 끝장을 보게 해요. 불신의 끝은 어디인가? ‘내가 너를 데리고 불신자의 끝을 보게 해 줄게.’ 그게 십자가 사건입니다. 제자들 도망갔죠. 그동안 ‘행여나’ 했는데 ‘역시나’로 끝났어요.

3년 동안 뭐라도 있을까 싶어서 주님 따라다녔는데 다 떠났습니다. 주님 곁에 아무도 없습니다. 목자를 치니 양들이 다 흩어지게 되어 있어요. 주님 곁에 아무도 남기지 않겠다는 것이 주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따르던 여자들, 그 막달라 마리아도 예수님 말을 이해 못 했어요. 하여튼 주님 주변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없어요.

오늘 본문 다시 보게 되면 주보 뒤에 창세기 48장 18절이지요,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그런데 아버지가 하는 말이 19절에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여기서 아버지와 요셉의 의견이 틀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다른 말로 하면, 성경에 그런 말은 없지만 집어넣어 보면 “아들아” “예” “너 지팡이 한 번 짚고 갈래?” “아버지, 여기서 갑자기 왜 지팡이를 언급하십니까?” “나 지팡이 짚은 거 보이냐, 안 보이냐?” “보입니다.” “왜 짚은 줄 알아?” “다리가 불편하니까요.” “내 다리가 왜 불편한데?” “아버지 말로는 뭐 천사와 싸우다가 당해서 그랬다면서요.”

“천사와 싸워서 다리가 절며 살아남은 것이 아니고, 그 순간에 나는 이미 죽었어.” “아니 천사가 아버지를 왜 죽입니까?” “내가 불신자거든! 불신자를 죽이는 것은 마땅한 거지.” “그러면 아버지는 불신자인데 왜 살아났습니까?” “그건 하나님 마음대로지. 그건 하나님 마음대로야.” “어쨌든 아버지는 살았잖아요.”

지금 내가 살았다, 안 살았다는 그게 문제가 아니고, 또 내가 지금 네가 아는 식으로 팔을 바꿔서 애들에게 맞추는 것도 아니고, 내 팔의 ‘어긋맞음’ 그 ‘어긋맞음’의 취지를 모르고 있는 거예요. 지금 ‘어긋맞음’의 그 과정이 중요한 거예요.

‘아, 십자가 피 흘리면 그 피로 우리는 죄 사함을 받는구나. 그러면 나도 예수님 피 믿으니까 구원받았네. 그러면 됐네. 얻을 것 다 얻었네.’ 지금 이게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을 조롱하는데 그 미진한 조롱이 아직도 우리 인생에 남아있는 거예요. 주님을 모독하는 그 모독감이 우리 안에 남아있단 말이죠, 우리 안에! 자꾸 신자 되려고 하지 마세요. 불신자의 자리에 가야 돼요.

여러분, 선수들이 다이빙하잖아요. 다이빙할 때 그냥 옷 갈아입고 풍덩, 하고 풀장에 빠진다고 점수가 나오는 게 아니에요. 다이빙 도약대에 올라가야 해요. 도약대에 가기 전에 준비 운동하는 거 점수에 안 들어가요. 도약대에서 풀장으로 떨어질 때 그 사이에서 두 바퀴 세 바퀴 비틀면서 떨어지는 그 동작, 그걸 보고 점수를 매기는 거예요.

요한복음 5장 24절에 주께서 마련한 도약대가 뭐냐? 사망이에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여기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다’라고 할 때 사망이 우리가 마지막 도달해야 할 도약대에요. 죽는 내가 아니고 그냥 사망이라니까요. ‘내가 죽는 것’이라는 그 개념 자체가 틀렸어요. 내가 죽는 게 아니고 사망 덩어리에요. 태어날 때부터 사망으로 왔고, 지금도 사망이고 이 사망의 내용을 어떻게 풀이하는지 우리는 몰라요.

모르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모든 개념을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딱 달릴 때 주님 주위의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자신이 갖고 있던 본인의 신중한 의견들을 제시할 게 아니겠습니까. 그 의견들, 그것들이 모든 우리 인간 세계 의견들의 대변자들이에요. 우리들의 대변자입니다. 주님을 조롱하고 모독하는 것.

우리는 십자가 현장에도 안 가봤으면서 상상해서 ‘아마 십자가가 이럴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현장에 있던 사람들한테 물어보세요.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바보가 아닙니다. 우리보다 공부 못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들이 심사숙고하고 예수님 말을 다 곱씹어 가면서, 구약 성경과 대조하면서, 그때는 그냥 성경이죠, 성경과 대조하면서 ‘저 사람이 진짜 메시아냐? 메시아라면 큰일 나지.’ 그런데 메시아인지 아닌지를 신중에 신중을 기하면서 내린 결론이 뭐냐? “구라다.” 구라에요.

교회가 가짜 예수를 상품으로, 하나의 컨셉으로 내세우니까 누구나 다 믿어버려요. 교회는 장사를 해야 하니까요. 사람들은 이래요. 잘 들어보세요. 사람들은 자꾸 상식, 상식, 상식, 상식, 양심, 양심, 양심, 양심…, 이렇게 살아가요. 그런데 소위 교회 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엉터리냐 하면, 살아가는 것은 상식이에요. 상식, 상식, 상식….

그런데 십자가는 ‘믿는다’ 비상식. 이게 구역질 나는 모습이에요, 제가 보기에.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나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그러고는 주일 날 와서는 “주님을 위해 삽시다.” 토요일과 일요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어요? 왜 갑자기 거짓말을 해요? 왜 기만행위를 합니까?

평소대로 하세요, 평소대로. ‘예수를 통해 나의 의미를 추구한다. 그런데 그것도 한 3-4년 믿어보니까 못 믿겠다. 역시 나의 성실과 나의 양심에 준해서 부합되면 난 그걸 믿겠다. 내가 믿을 것은 내 의미에 부합되는 것뿐이다.’ 이게 요셉을 죽인 형들의 본심이었어요.

요셉을 형들이 죽이지 아니하면 요셉이 국무총리 되는 법도 없고, 야곱이 어긋맞는 일도 없어요, 없습니다. 요셉의 형들의 생각? 십자가 달릴 때 원 없이 예수님을 조롱했던 그 주위 사람들의 그러한 심정을 여러분들이 하찮게 보지 마세요. 정말 우리의 본심입니다. 우리의 본심을 그들이 대변해 주고 있는 거예요.

아무리 당신을 믿고자 해도, 참 엔간히 노력을 많이 했는데…, 물론 겉으로 믿는 척을 해야죠. 교회 나오니까. 하지만 제발 나는 그냥 상식으로 살았으면 좋겠어요. ‘늘 착한 일을 하는 내 양심도 있고, 그래서 그냥 상식선에서 좀 살고 싶다.’ 이걸 가지고 성경에서는 꿈이 없는 아래층 세계, 꿈이 없는 사람들의 공통점으로 보는 거예요.

그래서 이 어긋맞게 축복하는 하나님의 결정적 언약 행위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형들로 하여금 요셉을 죽이도록 조치하신 겁니다. 사랑했던 아들 요셉이 형한테 도시락 갖다주고 무사히 집에 올 줄 알았는데 돌아온 소식은 “아버지,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 죽었습니다.”

그때부터 야곱은 ‘짐승이 죽였구나.’ 이게 창세기 본문에 나와요. “아비가 그것을 알아보고 가로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먹었도다 요셉이 정녕 찢겼도다”(창 37:33). 옷에 알리바이가 있어요. 짐승이 물었다는 표식인 피가 있으니까요. 야곱은 아버지 이삭을 속였고, 야곱은 또 외삼촌 라반을 속였잖아요.

그 야곱은 아들들에게 속임을 당합니다. 속고 속는 세상, 아들이 아버지를 왜 속입니까? 아들들이 아버지 야곱을 왜 속여요? 그것은 꿈을 꾼 요셉의 그 꿈 때문에 형들의 자기중심의 세계, 자기 의미의 세계가 무시를 당하잖아요. 마음의 상처가 된다니까요.

아버지가 자꾸 요셉만 오냐, 오냐 하고 요셉은 철없이 꿈 이야기를 하니까 남들 앞에서는 나도 어엿한 인간인데 졸지에 요셉 앞에서는 사랑받지 못하는 아들로 대우받으니 이게 울분이 되고 분노가 돼서 오기만 하면 죽여 버리겠다고 한 거예요.

꿈이 없으니까 남아있는 것이 뭐냐? 내 양심과 성실함과 내 상식선이에요. 그리고 이 상식선이 다른 모든 사람과 생각을 하나로 공유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인간 세계 아닙니까? 또 하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성경에서 그리고 목사님들이 죄 사함을 이야기해요.

교인들이 세상 살면서 너무 힘들고, 또 양다리 걸치기 힘드니까 교회 와서 위로라도 받으라고 목사들이 “여러분들의 어떤 죄도 주께서 다 죄를 사해주십니다.” 그러면 교인들이 ‘우리 목사님은 우리 마음을, 심정을 이해해서 이렇게 위로를 주는구나. 맞아.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아야지. 역시 우리 목사님은 성경에 있는 이야기만 해.’ 이렇게 안심하면서 집에 가잖아요.

그런데 성경에 ‘죄 사함 없다’라는 이야기를 보신 적 있어요? 죄 사함 없다는 이야기를 들으신 적 있습니까? 마태복음 12장 32절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아까 본대로 아버지 야곱 같으면 “나도 안다.” 곧 ‘맞바꿔지기가 없으면 죄 사함도 없다.’ 그러면 ‘죄 사함 없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죄 사함 있다’라는 생각이 어디서 나왔는지,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죄 사함을 얻기 위한 도구로서 예수님을 활용하고 철저하게 이용해 먹겠다는 내 의미를 안 바꿔치고, 있는 내 의미를 그대로 존속하려는 이러한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을 이용했다면 그것은 바로 성령 오기 전에 예수님 제자들의 마음 자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제자들마저 예수님 곁을 다 떠나게 만들었어요. 다 떠났습니다. 쉽게 말해서 없는 거예요. 구원받는 자가 없어야 해요. 이게 주의 뜻입니다. 있으면 안 돼요. 고린도 전서 15장 50절은 이렇습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없다’에요, 없다! ‘구원받습니다.’가 아니라 없어요. 혈과 육은 하늘나라에 못 갑니다. 없어요. 사람은 없습니다. 마태복음 7장 6절에 보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이렇게 되어 있다고요.

성도가 여러 가지 말씀이 다 지키기 힘들고도 어렵지만 그중에 특히 어려운 것은 내 사랑하는 자녀, 내가 사랑하는 식구, 그리고 나한테 잘해주는 그런 분들에게 거룩한 것을 안 던지기기 힘들어요, 안 던지기가. 아버지 요양병원에 갔을 때 “왔나? 나 이제 죽을 때 다 됐다.”

그러면 교회 다니는 자식으로서 아버지에게 할 것이 더 뭐가 있습니까? 없잖아요. “아버지, 마지막으로 아버지께 당부할게요. 믿든지 말든지 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당부합니다.” 예수님이 어떻고, 십자가가 어떻고… “……이렇게 해서 구원받습니다.”

천사가 마태복음 7장 6절의 말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를 동원해서 “개돼지한테 왜 복음 전합니까?” 할 때 우리가 왜 전해요? “내 식구잖아요!” 식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내 식구’가 무슨 말이에요? 다른 사람은 안 들어가도 되고 내 나와바리, 내 의미의 현실 세계에서 서로 친하게 지내는 사이기 때문에 특별히 복음을 전하겠다는 그 의도는 결국 나의 세계, 나의 의미 세계를 내가 포기 못 하겠다, 맞바꿔치기를 못 하겠다는 거예요.

그렇게 따져보면 모든 것이 뭐냐? ‘I am what I am’ 곧 ‘나 누구?’라는 것을 본인이 정하지 못해서 아무나 붙들고 행동하면서 ‘내가 이런 행동을 하는데 당신 보기에 나 어떤 사람으로 보여?’ 이런 내 의미를 소환하기 위해서 평생토록 노력한 거예요. ‘아빠, 나 어떻게 보여? … 엄마, 나 어떻게 보여? 나 공부 잘하지? 또 백 점 맞았는데 어떻게 보여? … 여보, 내가 이렇게 당신에게 잘하는데 나 어떻게 생각해?’

주님의 말씀은 한 방에 쳐냅니다. “불신자면 불신자답게 제발 좀 묻지 마. 내가 말하잖아. 너 사망아, 너는 사망이야.” 내가 사망인 것을 어떻게 압니까? 사망인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성령께서 우리를 십자가 그 현장으로 데려갑니다. 현장으로 데려가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께 욕하는 그 무리의 일원으로 꽂아 줘요. “같이 욕해라. 같이 욕해!”

주님은 완전히 개그를 해요, 개그를. 웃기지도 않아요. “당신을 뭘 보고 우리가 믿어? 믿을만해?” 그래서 십자가 옆의 강도가 이렇게 말했어요. “당신이 지금 나를 십자가에서 내려주면 믿어줄게”(눅 24:39). 십자가 옆에 있는 강도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그 강도가 모든 우리의 심정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겁니다.

야곱이 언약받을 때 이런 고백을 했어요.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창 28:12)했다고. 그래서 야곱은 외계로 통하는 유일한 문으로 봤습니다. 창세기 28장 17-18절에 그게 나와요.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야곱이 하나님의 문을 알게 된 것은 꿈이었습니다. 야곱이 꿈을 꾼 것이 아니고 꿈이 꿈속에 야곱을 집어넣은 거예요. 그다음부터는 주도권이 야곱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꿈에게 주도권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꿈의 통제를 받고, 본인의 인생이 아니고 꿈의 인생길을 밟았던 그 요셉도 그 꿈대로 되었더니만, 그 꿈에 의해서 실현체가 되어서 나온 그 결과가 뭐냐?

예상도 못 한 두 아들이 생긴 거예요. 두 아들이 생겼으니 그 두 아들을 가지고 야곱은 하나의 체인으로 만듭니다. 하나는 지상에 있고 또 하나는 위에, 층이 두 층이니까 위에 있는 층을 만들어서 위에 있는 층에 둘째 아들 에브라임을 보내고 아래층, 땅에 있는 층에 첫째 아들 므낫세를 두는 식으로 구조조정을 해버립니다.

양쪽이 묶인 사슬의 끝을 쳐들면 쳐든 쪽은 위쪽에, 하늘 층에 있고 딸려 나오는 반대쪽은 땅에 있는 거예요. 왜 둘째 아들을 하늘로 보내고 첫째 아들을 땅으로 보내는가? 이게 누구 인생이냐 하면 바로 야곱의 자기 인생이잖아요. 두 번째로 태어났는데 하나님의 언약이 개입하니까 둘째로 태어난 나에게 복이 오고 먼저 태어난 형 에서는 저주받잖아요.

그 원리의 일반성이 계속해서 반복되는데 그 반복해서 되어지는 특징이 뭐냐?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는 현상을 동반하면서 언약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여러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여러분 자신! 내가 구원받겠다는 그 자신, 바로 이걸 잃어버려야 해요. 이게 나의 의미니까요.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을 내가 정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면 안 돼요. 그러면 성경은 있으나 마나에요. 성경이 얼마나 고마운지, 꿈이 요셉에게 얼마나 고마운 일을 했는지 요셉은 그때부터 꿈대로 이루어가는 데 꿈에 팔려서 노예가 되었고, 꿈에 팔려서 교도소에 갔고, 그리고 캄캄한 미래, 늘 반복적인 절망이었습니다.

다만 요셉은 절망인데 꿈은 살아있어요. 꿈은 살아있는데 요셉은 사망이에요. 사망이 사망으로 다가오는 것,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내가 사망인 것을 몰라요. 그러니까 성령을 훼방하지 않는 자만이 사함을 받지요. 내가 성령을 소유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하나님의 하늘에 있는 본래의 개념으로 우리를 마음껏 다루시는 겁니다.

꿈이, 인간 세계에서 생산되지 않는 그 꿈이 나로 하여금 꿈에 종속되는 자로 다루어주시는 거예요. 그렇게 다루어주시면 우리는 뭐냐? 이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하나의 불신자로 거듭나는 거예요. 신자로 거듭난다는 말은 많이 들어봤어도 이런 말은 처음 들어보지요. 불신자로 거듭난다, 불신자로 거듭나지요.

그러면 우리의 매일의 일상은 뭐냐? 예수님의 성경 전체에 대해서 불신의 태도로 모든 것을 폭파하고 박살 내는 거예요. ‘성경은 하나님의 책이라고 구라를 치는데 이것은 인간들의 옛날 신화들을 종합한 책이고 온통 오류투성이다.’

십자가 사건 이후에 유대인들이 얼마나 신중하게 활동했는지는 이걸 생각하시면 됩니다. 예수님 죽고 난 뒤에 제자들이 예수님이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해서 이제는 좀 정신 차려야 하는데 그것을 모르고 ‘아직도 예수님 말씀은 유효하다.’ 해서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소식을 듣고…, 인간이 무슨 부활이 돼요?

예수님이 부활 되지도 않았는데 그 시체를 몰래 훔쳐서 숨겨놓고 부활 되었다고 구라를 쳐서 자기들 종교를 따로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을 로마인들 그리고 유대인들이 했던 거예요. 그래서 그것까지 대비해서 로마인들은 군인들로 보초를 세웠어요(마 27:65). 얼마나 철저합니까?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예수가 말하는 그 구라 이야기는 더 이상 유포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철저에 철저를 기한 거예요.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불신자들이 그런 터무니없는 행동을 했다.’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그 생각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여러분이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부활 안 했을 수도 있잖아. 시체를 훔쳐 가서 거짓말할 수도 있잖아.’ 또 제자들이 3년 동안 갖다 부은 자기들의 돈과 청춘이 아까워서 ‘죽으신 분은 죽은 것이고 우리끼리 예수 종교 만들자. 예수의 말씀대로 다 되었다고 유포를 시키자. 그래야 약간의 자존심이라도 회복되니까.’

이런 발상으로 신약성경을 썼고, 또 ‘예수님 믿는 사람을 너무 많이 잡아 죽이다 보니 양심의 가책이 되어서 오지도 않은 예수가 찾아왔다고 구라를 떨어서 예수한테 반성문을 쓰다 보니 그것이 고린도 전후서, 이런 사도 바울의 편지가 되었다.’라는 그런 발상은 왜 안 해보는 겁니까?

그걸 해봐야 해요. 그걸 해봐야…, 아니 성령께서 그걸 시킨다니까요. 그걸 시켜서 내가 믿어서 구원받는다는 이것이 얼마나 가짜인 것을 성령께서 들춰낸다고요. 내가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믿음이 없어요. 오히려 믿음을 반대해요. 예수님한테 욕 못 해서 환장한 사람들입니다.

평신도들은 ‘아니야, 아니지. 평신도들이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되지.’ 그런데 용감한 사람들이 있어요. 용감한 사람들이 이것을 발설해요. ‘예수는 죽고 나서 부활 된 적이 없다. 성령이 온 적도 없고 그런 것은 다 인간의 광기에 불과하다. 그 모든 것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것들이다.’라고 용감하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누구냐? 바로 신학교 교수들입니다.

이거 몰랐지요? 여러분이 신학교 안 가봤으니 알 리가 있나요? 왜 교수들이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 하면, 그들은 성경을 많이 연구했기 때문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돈 벌기에 바빠서 자기 직장 일 한다고 바빠서 성경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모르잖아요.

성경을 많이 연구한 사람들, 성경 연구에 올인한 사람들, 온 청춘을 바쳐서 ‘주님이 누구신가, 성경은 어떤 내용인가?’ 그걸 연구하고 전하는 것으로 밥벌이하려고 온 생각을 다 하는 사람들의 마지막 고백은 뭐냐? 모든 것이 조작이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러면 “교수님 당신의 대책은 뭡니까?” “자기 자신의 존재를 믿으시면 됩니다. 착하게 살면 (하늘나라 없지만, 하늘나라 혹 있다면) 구원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걸 누가 아느냐? 130년 동안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고백하는 야곱이 있습니다. 창세기 47장 9절에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이 험악한 세월, 야곱이 온갖 자기 생각을 했는데 그것을 주께서 험악하게 만들었어요. 언약이, 하나님의 꿈이 야곱을 이겼습니다. 그렇게 이겨서 야곱이 마지막 내세우는 것은, ‘내 다리는 이미 작살났고, 하나님의 언약의 결실물이 된 이 요셉의 두 아들에게 내가 마지막 할 수 있는 것은 어긋맞게 하는 것’, 이게 축복이에요.

내가 아는 모든 것을 싹쓸이해서 어긋맞게 하는 것, 이것이 무슨 뜻이냐? ‘내가 구원할 자에 대해서 구원받을 너의 어떤 생각도 거기에 끼어들면 안 된다.’라는 거예요. 그 어떤 생각도. “죄 사해주세요.” 그런 것 없습니다. 주께서 사해주십니다.

사망의 도약대에 섰을 때 비로소 주의 성령이 와서 사망한 자를 생명으로 들어가게 해줘요. 아래층에서 위층으로, 맏아들 쪽으로 갑니다. 가면서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몰랐던 것, ‘내가 신자라고 했으나 사실은 불신자라는 사실’, 성령에 이끌림을 받아서 ‘모든 것이 불신행위였다.’라는 것을 기쁨과 감사함과 환희로 되새기게 되는 거예요.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 사두개인? 이게 내 모습이었어요. 가룟 유다? 내 모습이었습니다.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인다? 그거 내 모습이었어요.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내가 하나님의 원수요, 내가 죄인 중에 괴수인 것’을 몰랐어요.

성경에 그런 대목이 나와 있으니까 윤리적으로 무슨 잘못을 했거나 죄를 지었을 때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라고 했지 실제적으로, 실제적으로 ‘주님 앞에 내가 사망이고 저주받아 마땅하고 지옥 가야 마땅하다.’라는 사실을 성령을 통해서 되새겨주면서 알게 되는 겁니다.

내 안에 숨어 있던 내 모습을 전선 뜯어내듯이 우두둑 뜯어내는 거예요. 성령께서 뜯어내면 우리는 매일 같이 불신자라는 내막을 뜯기면서 ‘이런 불신자를 생명의 나라에 넣어 준 것’에 대해서 주께 감사하지요. 그래서 성도가 할 일은 매일같이 발굴하는 거예요.

뭘 발굴하느냐? 내가 내 육체에 남아있는 주에 대한 불신적인 생각이 또 뭐가 있는가를 매일같이 발굴하는 겁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십니다. 오른손이 한 것을 염치없이 왼손이 알게 하는 것, 다 성경에 위배 되지요? 모든 것이 성경 말씀에 위배 안 되는 것이 없어요. 아, 그게 얼마나 가볍고, 고맙고, 감사한지요.

끝으로 이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두 개인데요. 이 대목 두 개를 보시면서 여러분이 놀라셔야 합니다. 놀랄 준비 되어 있어야 해요. 고린도후서 4장 5절,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여기에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다.’

끝으로 하나 더,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무슨 이런 기적이 다 있습니까? ‘네가 했잖아. 네가 신자인척하면서 네가 설교했잖아. 언제까지 속아 넘어갈 줄 알아? 안 속아.’라는 것이, 우리가 본래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던 본심인 것을. ‘I am what I am.’ 이것을 발견하는 기쁨, 이것이 바로 성령이 주는 기쁨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날마다 어긋맞게 해 주옵소서. “하나님이 일을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아버지가 일을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아는 체하며 잔소리하다가 아버지에게 “나도 안다”라는 소리를 듣는 것처럼 “주님이 일을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할 때 주께서 하시는 말씀 “나도 안다”하고 어긋맞게 해 주시는 이 은혜, 이 십자가가 이제는 죽은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살아있는 현장이 우리의 현장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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