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남쪽 선지자

아빠와 함께 2025. 6. 25. 23:17

남쪽 선지자

2025년 6월 25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13:6-10

(13:6)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말하여 가로되 청컨대 너는 나를 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손으로 다시 성하게 기도하라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니 왕의 손이 다시 성하여 전과 같이 되니라
(13:7)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에 가서 몸을 쉬라 내가 네게 예물을 주리라
(13:8) 하나님의 사람이 왕께 대답하되 왕께서 왕의 집 절반으로 내게 준다 할지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이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13:9)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13:10) 이에 다른 길로 가고 자기가 벧엘에 오던 길로 좇아 돌아가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이 차단된 상태에서 주어지게 때문에 말씀은 심판의 기능을 시행하게 됩니다. 창세기 3:24에서 다음과 같이 단언을 내리십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그런데 이 말씀이 오늘 본문에 선지자에게 임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평소에 인간들이 말씀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느냐가 드러납니다. 오늘 본문에 세 명의 사람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여로보암 왕이며 또 한 사람은 북쪽 늙은 선지자이며 또 한 사람은 남쪽 선지자입니다. 우선 북 여로보암 왕부터 보겠습니다. 이 사람은 말씀과 함께 있는 참 선지자와의 만남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신의 팔이 꼼짝 못하게 접히지 않는 것을 선지자의 놀라운 능력으로 고치게 되자 이 여로보암 왕은 자신의 예물을 기꺼이 선지자에게 드리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를 하나님께서 미리 알아 채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정립할 수가 있습니다. 말씀은 그 내용을 인간이 파악하는 것이 다가 아니라 그 말씀이 전파되는 현상에서 인간은 예상도 못할 일들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이런 현상까지 인간이 미리 알 수가 없는 겁니다. 이 사실을 모르게 되면 인간은 자신의 정당함을 어떤 식으로도 포기하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의도적으로 나쁜 짓을 하지를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남쪽 선지자의 입장이 되어보고 그리고 북쪽 선지자의 입장도 되어봐야 합니다.

우선 남쪽 선지자의 입장이 되어 봅시다. 그는 하나님께서 당부하신 주의사항을 똑똑히 기억하고 준수하고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그는 죽었습니다. 그것도 자연사가 아니라 난데없이 사자가 나타나서 사자에게 물려죽었습니다. 그는 떡도 마시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는 당부를 사람하고 ‘엮기지 말라’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왜 하나님께서 ‘왔던 길이 아니라 다른 길로 가야 한다’고 당부하신 뜻이 무엇인지는 몰랐습니다. 남쪽 선지자는 같은 선지자에 해당되는 북쪽 선지자를 만났을 때도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당부를 분명히 전달했습니다. 즉 “나는 당신이 선지자라고 할지라도 떡도 마시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돌아가지 말라는 당부는 결코 위배할 수 없습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담긴 내용에 대해서는 본인이 알 길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내용은 말씀 자체로 채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선지자가 단단히 말씀대로 수행한다고 해서 말씀 성취에 선지자가 성취자로 끼어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북쪽 선지자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거짓말을 하게 하십니다.

“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우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왕상 13:18) 바로 남쪽 선지자는 북쪽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말에 대해서 동의하고 맙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남쪽 선지자에게, “행여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하면서 너와 함께 하기를 청하더라도 거절하라”는 명을 사전에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상대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거론할 때에, 평소에 남쪽 선지자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음을 드러냅니다.

이렇게 되면 평소에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숭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 말씀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닌 겁니다. 상대방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을 걸어왔을 때, 그게 진실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는 그 한계성을 이 남쪽 선지자는 갖고 있지 않았던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저 인간은 엉터리야”라는 지시는 남쪽 선지자에게 내려주면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이 엉터리 계시라는 사실을 남쪽 선지자를 속였던 북쪽 선지자 당사자에게 내려주신 겁니다. 그렇게 해서 북쪽 선지자는 자신의 과오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죽음을 당한 자에게 하나님의 처벌을 전달한 바가 된 겁니다.

하나님께서 왜 일을 이렇게 하실까요? 그것은 말씀을 전달만 잘 한다고 해서 훌륭한 선지자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 말씀의 원칙, 즉 누구라도 ‘말씀 완성에 접근할 수 없다’라는 원칙에 충실히 이행되어야 하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누구보다도 말씀을 충실하려는 선지자를 북이스라엘과 연류된 인물을 통해 죽임을 당하게 하시므로서 북 이스라엘에게 있어 여호와 하나님은 전혀 본질에 가까이 될 수 없는 자들임을 들춰내십니다.

그렇다면 왜 북쪽 늙은 선지자는 왜 남쪽 선지자를 속이기까지 하면서 모실려고 했을까요? 그것은 사람과 사람이 엮이면서 여전히 하나님편에 서 있는 자로 자신을 설정하고 싶었던 겁니다. 인간에게는 공허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누구나 다 그러합니다. 원래 인간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과 결속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과 끊어지면서 말씀이 담겨야 할 그 자리에 같은 공허감을 갖는 인간들을 불러모아 채우려고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인간들을 끌어모아봤자 타인이 가진 공허감까지 떠안게 되어 결코 온전한 인간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은 동생을 죽여놓고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게 되는데 그 받은 징벌에 대해서 가인이 너무 가혹하다는 겁니다.

도대체 무슨 벌이기에 가혹하게 느껴집니까? 그것은 이 땅에서 유리하게 된다는 겁니다. 즉 사람으로 인해 자신의 존재성을 채울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북쪽 선지자에게도 이게  해당됩니다. 하나님께서 ‘왔던 길로 되돌아 가지 말라’는 당부하신 것은 인간의 자기 가치를 지니고 다시 남쪽, 곧 말씀주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은 이 땅에 빈 공터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마 8:20) 이 공터는 인간이 채우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 자신만이 채울 수 있으며 바로 이 방식은 말씀과 인간이 만났을 때, 인간은 ‘결코 나는 말씀을 성취 못해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로 채워져야 합니다.

바로 이 죽음, ‘말씀을 말씀으로 드러내기 위해 죽은 죽음’만이 천국에 들어서는 선지자가 되고 성도가 되는 겁니다. “가로되 그대로 두고 그 뼈를 옮기지 말라 하매 무리가 그 뼈와 사마리아에서 온 선지자의 뼈는 그대로 두었더라”(왕하 23:18)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온전한 현실은 말씀이 말씀대로 성취되는 현실뿐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6강-열왕기상 13장 6-10절(남쪽 선지자) 250625-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13장 6-10절입니다.

열왕기상 13:6-10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말하여 가로되 청컨대 너는 나를 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손으로 다시 성하게 기도하라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니 왕의 손이 다시 성하여 전과 같이 되니라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에 가서 몸을 쉬라 내가 네게 예물을 주리라 하나님의 사람이 왕께 대답하되 왕께서 왕의 집 절반으로 내게 준다 할찌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이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이에 다른 길로 가고 자기가 벧엘에 오던 길로 좇아 돌아가지 아니하니라.”

남쪽에서 온 선지자가 어디 가서 활동하느냐? 북쪽에 가서 활동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선지자가 갈 때 그냥 빈손으로 가는 게 아니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서 북쪽으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에게 주된 내용이 되고, 그냥 선지자는 말씀이 이끄는 대로 전달할 뿐입니다.

그런데 전달하는 그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열왕기상 13장 9절에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고 이야기했어요. 선지자가 말씀을 가지고 북쪽으로 갈 때 하나님께서 이미 어떠한 상황이 일어날지를 다 알고 계셔요.

그런데 북쪽으로 갔던 이 남쪽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왜 미리 그걸 당부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본인이 모르고 있습니다. 나중에 나타나지만,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인간 대 인간의 관계를 성립하지 말라. 사람 대 사람의 관계로 섞이지 말라.’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아니라면 그러면 뭐냐? ‘네가 사람을 만난다고 생각하지 말고 네게 담겨 있는 말씀이 그 말씀에 합당한 어떤 사람을 만난다고 하라.’는 말이지요. 그 당부를 하실 때 그냥 “사람과 엮이지 말고 내가 준 말씀만 잘 전하고 오너라.” 이러면 되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고, 그리고 다른 길로 빠져서 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그 말씀을 받는 그 공간, 그 인간들, 그 세계가 얼마나 평소에 말씀을 무시했는가를 말씀을 전하는 동시에 노출될 것임을 주께서 미리 알고 계십니다.

그들은 말씀에는 관심이 없어요.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인간 대 인간의 관계를 더 돈독히 하고 싶어 하는 그것이 북이스라엘, 말씀이 빠져 있는 이스라엘의 특징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로보암왕의 편 팔이 뻣뻣해져서 다시 오므라들지 못했을 때 선지자가 고쳐줬잖아요.

고쳐주니까 여로보암 왕의 입에서 단박에 나오는 말이 뭐냐? 열왕기상 13장 7절에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에 가서 몸을 쉬라 내가 네게 예물을 주리라.” ‘당신이 나에게 이렇게 큰 은혜를 베풀었으니 우리 집에 가서 쉬라. 나는 네게 예물을 주겠다.’라고 나와요.

그러니 여로보암 왕은 무엇을 착각하고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한테 유리하게 작동하고 작용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예요.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말씀이 오게 되면 나에게 유리하다’라고 여기는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의 지적을 받을 대상자가 된다는 것,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자기 삶에 보탬이 되도록 하는 식으로 성경해석을 한다는 그 자체가 말씀에 의해서 버림받아야 할 전형적인 인물이 되는 겁니다. 북쪽 이스라엘의 특징이에요.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은 13장 끝까지 가봐야 해요. 오늘 설교는 13장 끝까지 갑니다. 과연 무슨 일이 있는지? 여로보암 왕의 제안에 대해서 남쪽 선지자가 하는 말이 8-9절에 “하나님의 사람이 왕께 대답하되 왕께서 왕의 집 절반으로 내게 준다 할찌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이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니이다.”

곧 ‘당신 나라의 절반을 준다 해도 나는 당신과 엮이지 않겠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래요. ‘말씀이라 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엮임이 성립하기 위해서 준 말씀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께서 말씀을 전달하는 것뿐입니다.’ 이걸 통해서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엮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는다는 그것을 분명히 했어요.

그렇게 했는데 11절에 “벧엘에 한 늙은 선지자가 살더니”라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아들들이 와서 이 날에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을 저에게 고하고 또 그가 왕에게 고한 말씀도 저희가 그 아비에게 고한지라.” ‘남쪽에서 선지자가 와서 이런 놀라운 기적을 베풀었다 합니다.’라고 아버지 선지자에게 이야기한 겁니다.

그러니까 그 늙은 선지자가 하는 말이 “야! 진짜 하나님의 선지자가 나타났다. 그렇다면 내가 그 사람을 만나서 그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하겠다.” 쉽게 말해서 ‘내가 하나님의 좋은 기를 받아서 선지자 노릇 제대로 해봐야겠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쫓아갔어요. 그리고 남쪽 선지자를 만났어요.

“하나님의 사람의 뒤를 좇아가서 상수리나무 아래 앉은 것을 보고 이르되 그대가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뇨 대답하되 그러하다 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으로 가서 떡을 먹으라”(왕상 13:14-15).

곧 ‘나와 함께 떡을 먹으며 이야기하고 좋은 관계 맺어봅시다. 나도 선지자입니다. 대단한 일을 하셨다면서요? 소문 들었습니다.’라고 한 겁니다. 이렇게 했을 때 남쪽 선지자가 하나님께 지시받은 대로 16-17절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대답하되 나는 그대와 함께 돌아가지도 못하겠고 그대와 함께 들어가지도 못하겠으며 내가 이곳에서 그대와 함께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이르시기를 네가 거기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또 네가 오던 길로 돌아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로라.”

이렇게 분명히 하나님께 받은 내용대로 이야기했어요. 이러면 ‘야, 남쪽 선지자는 씨도 안 먹히는구나. 진짜 선지자 맞는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할 것 아니겠습니까? ‘진짜 하나님의 선지자라서 하나님의 지시대로만 움직이는구나.’

그런데 열왕기상 13장 18절에서 북쪽의 늙은 선지자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우라 하였느니라.”

자 여기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이 계시고 나는 선지자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임하니 나는 아무 생각 말고 하나님의 말씀만 생각하면 된다.’ 이게 남쪽 선지자가 정리했던 거예요. 딱 그렇게 마음 정리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마음 정리 가운데 어떤 대목이 빠져 있었는가? 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를 모시려 할 때, 같은 선지자가 나를 초청할 때 나는 거부해야 한다는 것은 남쪽 선지자로서는 예측을 못 한 거예요. 미리 예측을 못 했습니다.

왜 예측 못 했느냐? 일반 사람과 선지자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일반 사람들은 하나님의 천사를 통한 말씀이나 하나님의 말씀이 안 오지만 선지자는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이 오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이 생각으로 인하여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는가? 남쪽 선지자는 죽습니다. 그런데 그냥 죽지 않아요. 길 가다가 사자에게 물려 죽어요. 어흥, 하는 사자 있잖아요. 사자(lion)한테 물려 죽습니다. 오늘 설교 결론은 이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말씀 전하는 선지자가 시키는 대로 말씀만 전하면 된다.’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선지자는 자기가 전하는 말씀이 어느 정도로 대단한 말씀인지를 알기 위해서 본인이 그 말씀으로 인하여…, 말씀을 안 받았으면 몰랐는데 말씀을 받은 그것으로 인하여 본인이 말씀에 위배 된 자로서 규정 받아서 죽음으로써 ‘말씀은 말씀 전하는 인간을 살린다’라는 이러한 상식적인 것을 하나님께서는 제거합니다.

상식적인 것을 제거해요. 그래서 우리는 이해가 안 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잘되고, 말썽 없고, 뭔가 훌륭하다’라는 소리를 들어줘야 말씀을 계속 전할 수 있는데…, 지금 선지자가 말씀을 위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에요. 말씀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대로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를 죽이시는 그 이유가 뭐냐?

그 이유에 대해서 남쪽 선지자를 속였던 북쪽 선지자의 의식을 통해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북쪽 선지자의 의식을 통해서입니다. 북쪽 선지자는 자칭 선지자 맞아요. 맞는데 열왕기상 13장 18절에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우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라고 되어 있어요.

선지자가 선지자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은 있고,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요청한다고 해서 말씀이 오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북쪽의 늙은 선지자가 남쪽 선지자에 대한 소문을 들어보니 그 선지자는 진짜 하나님의 말씀이 와서 움직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렇다면 그 사람과 내가 친하게 지내면, 연락하고 지내면 나는 졸지에 영력이 있는 선지자와 엮이게 되어서 나도 그 사람 덕분에 선지자 대우를 받는 선지자라는 것을 대외적으로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사람과 엮이지 말라고 했잖아요.

사람하고 엮이지 말라고 하는 것이 대원칙인데 우리가 여기서 창세기 3장 24절을 다시 볼 필요가 있어요.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사람을 쫓아낸 거예요. 하나님께서 누굴 쫓아냈다고요? 사람을 쫓아낸 거예요. 안일하게 들으시면 안 됩니다. 말씀의 역할은 뭐라고요? 사람을 말씀에서 쫓아내는 그것이 말씀 자체의 역할입니다.

그다음에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쫓아내신 다음에 주님께서 차단해 버렸어요. 그러면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상식입니다. 선지자라 하는 것은 ‘말씀이 왔다’라고 할 때 사람들은 어디를 보느냐 하면, 말씀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고 ‘야, 다른 사람에게는 오지 않는 그 귀한 말씀이 선지자에게 왔기 때문에 그 선지자는 보통 사람이 아니고 특별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갖게 될 것이 분명하지요.

그러면 제가 아까 이야기한 대원칙, 말씀은 누구를 찬다? 선지자라 할지라도 말씀 자체가 그 인간을 죽이고 내친다는 그 원칙을 우리는 깜박 그 순간 잊어버린 거예요. ‘야, 말씀을 전하다니 대단하다. 말씀과 함께 사니 보통 사람이 아니야.’ 이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지금 남쪽 선지자가 그렇다는 말이 아니에요. ‘말씀을 전하니까 나는 대단한 사람이다. 무조건 나는 다른 사람과는 달라.’ 남쪽 선지자가 자기를 상당히 대견하게 보고, 남과 차이 나는 대단한 사람으로 간주한 것은 아니에요. 여기서 우리가 놀라야 하는 점은, 남쪽 선지자가 나쁜 짓을 한 것이 아니에요.

나쁜 짓을 한 것이 아닌데 하나님이 말씀의 그 가치, 진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나쁜 짓을 한 적도 없는, 말씀을 실어 나르는 그 역할만 한 그 선지자를 그 말씀에 의해서 기어이 죽였다는 거예요. 그것도 그냥 자연사한 것이 아니고 사자가 와서 물어 죽였다는 겁니다.

그러니 말씀을 전했다는 그 핑계로, 또는 말씀을 잘 전하고 있다는 그걸 대가로 ‘그러니 나는 하나님께 보호받아야 한다’라는 생각은 오늘 말씀에 의해서는 ‘이것이 바로 북쪽 선지자의 태만한 마음 자세’인 거예요. 아직 놀라기는 이릅니다. 더 놀라운 것이 있어요. 이제 그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북쪽 선지자가 자기의 공허함, 선지자로서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서 말씀을 잘 전한 남쪽 선지자를 잘 대우해서 서로 인간 대 인간으로 섞여 보려고 시도하는 데 그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누구한테 들어왔는가?

스스로 신실한 거지요. 신실하다고 자부했던 남쪽 선지자를 대접하는 북쪽의 늙은 선지자에게 천사가 와서 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먼저 열왕기상 13장 19절에 보면 “이에 그 사람이 저와 함께 돌아가서 그 집에서 떡을 먹으며 물을 마시니라.” 지금 여기서는 남쪽 선지자나 북쪽 선지자나 자기 잘못을 전혀 몰라요.

남쪽 선지자는 같은 선지자인데 하나님의 천사가 와서 시켰다고 하니까 나에게만 천사가 와야 해요? 상대방에게 천사가 오면 안 됩니까? 나에게만 천사가 와야 하고 상대방에게는 안 온다는 것은 교만한 마음이잖아요. 그 정도는 남쪽 선지자가 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북쪽 선지자가 ‘하나님의 천사가 나에게도 왔다’라고 하니 그것을 존중해 주는 거예요. ‘나만 선지자가 아니야. 저 사람도 얼마든지 선지자가 될 수 있어. 하나님의 뜻이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서 충돌을 일으키지 않으니까 내가 그냥 함께해야겠다.’ 그렇게 해서 간 겁니다.

그런데 열왕기상 13장 20절에 “저희가 상 앞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 사람을 데려온 선지자에게 임하니” 이게 중요한 거예요. 이게 중요한 겁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남쪽 선지자에게 내려오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상식이잖아요.

“남쪽 선지자야!” “예” “내가 누구하고라도 떡이든 물이든 먹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예, 뭐든 다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너는 그렇게 했어? 앞으로 주의해. 그러면 안 돼. 북쪽 선지자가 거짓말한 거야. 지금이라도 정신 차려서 빨리 자리 털고 집으로 가! 안 그러면 나는 너 죽일 거야. 빨리 집으로 가”

하나님께서 계시를 남쪽 선지자에게 줬으면 그다음에 추궁하는 계시도 남쪽 선지자에게 줘야 해요, 남쪽 선지자에게! 이게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에 맞아요. 그런데 그 계시를 누구에게 주느냐 하면, 남쪽 선지자에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말하고 꾀어서 순수하고 아무 죄도 없는 그 남쪽 선지자를 데려온 그 북쪽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천사가 임하여 가라사대…, 이렇게 이야기해요.

열왕기상 13장 21절에 “저가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자를 향하여 외쳐 가로되” 여러분, 이 상황을 다시 설명해 드릴게요. 둘이 앉아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유다 선지자, 저 남쪽의 착한 사람에게 온 것이 아니고 못돼 먹은 북쪽 선지자에게 온 거예요. 그래서 뭐냐? 하나님이 책망하는 그 역할을 그 못돼 먹은 북쪽 선지자가 남쪽 선지자에게 한다고요, 북쪽 선지자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지금 지적하고 있는 거예요.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며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한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돌아와서 여호와가 너더러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한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네 시체가 네 열조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자기가 데리고 온 선지자가 떡을 먹고 물을 마신 후에 그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니라”(왕상 13:21-23).

이걸 보고, 그러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이 북쪽 선지자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잘못은 누가 했어요? 잘못은 본인이 했다고요. 본인이 악한 역할을 했잖아요. 그러니까 본인이 식겁한 거예요. 남쪽 선지자는 죄가 없는데 자기가 꼬셨잖아요. 꼬셔놓고는 하는 말이…, 말도 더듬어야 해요.

“당신 이제 하나님이 죽인대.” 말씀을 전하는 당사자인 북쪽 선지자가 놀라서 “어서 집에 가세요.” 해서 집으로 가는데 열왕기상 13장 24절에 보니까 “이에 그 사람이 가더니 사자가 길에서 저를 만나 죽이매 그 시체가 길에 버린 바 되니 나귀는 그 곁에 섰고 사자도 그 시체 곁에 섰더라.” 죽었습니다. 죽었어요.

굳이 하나님께서 죽일 것까지 뭐가 있어요? “주의하라고 했지?” 그 정도로 될 것을. 그리고 그 남쪽 선지자가 그렇게 죽을죄를 지었습니까? 자기는 시킨 대로 했어요. 우리 보기에 인간적으로 하면 그렇게 안 했겠지요. 북쪽 선지자가 하나님의 천사의 말을 들었다고 했으니까 남쪽 선지자가 억울하게 속아 넘어간 것이지, 나쁜 짓을 한 건 아니잖아요. 남쪽 선지자가 나쁜 짓을 한 게 아니에요. 북쪽 선지자도 우리 인간들이 보기에 그다지 나쁜 짓을 한 건 아니에요.

지금 성경을 보면서 우리가 납득이 안 되는 것은 ‘왜 하나님은 인간을 죽이려고 하느냐?’ 하는 그 점입니다. ‘인간을 왜 죽이는가? 좋게좋게 달래서 말씀 믿게 하면 되는데 왜 죽이려고 하는가?’ 그것은, 인간 자체가 말씀과 엮일 수 있는 어떠한 연결 지점이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다시 되새겨 주는 겁니다.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나 말씀을 받는 인간이나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말씀과 동떨어진 존재라는 사실, 이걸 아셔야 해요.

인간이 하나님과 동떨어졌다면 하나님과 동떨어진 인간은 그동안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뭘 하고 사느냐? 하나님과 동떨어져서,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는 없는데 뭐 어떻게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인간이 일상생활을 통해 뭘 하고 사는지 말씀드릴게요.

인간은 인간과의 만남에서 자기 허함을 채우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북쪽 선지자가 평소 일상에서 했던 그 행동을 남쪽 선지자에게 한 겁니다. ‘당신은 훌륭한 선지자인데 나도 선지자니까 우리 좋은 관계 한 번 해봅시다.’ 이것이 나쁜 짓이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고 그냥 평소에 하던 대로 한 것이, 인간 대 인간의 관계를 맺을 권한과 자격이 있다고 한 겁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자격과 권한, 과연 있을까요? 인간에겐 없습니다.

왜 인간은 사람을 만나도 그게 소용이 없느냐? 창세기 4장에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창세기 4장에 가인 이야기가 나오는데 가인이 동생을 죽였잖아요? 하나님은 가인을 죽이지 않아요. 살려둬요. 살려주는 대신 가인에게 벌을 줍니다. 그 벌이 무엇인가?

창세기 4장 12-13절에 나오는데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하나님께서 벌을 내렸는데 그 벌을 듣고 난 뒤 13절에 가인이 하는 반응이 뭐냐? “저한테 너무 가한 심한 벌을 주셨습니다.” 했어요. 우리가 볼 때 그게 그렇게 심한 벌로 느껴지지 않죠.

그러면 도대체 가인은 어떤 점에서 그게 심한 벌이라고 했느냐? 이겁니다. 창세기 4장 14절에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찌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네가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네가 떠도는 사람이 된다는 이 점, ‘네가 떠도는 사람이 되리라.’ 하는 이것이 가인에게는 중벌로 여겨지는 거예요. 왜 떠도는 것이 가인에게 그렇게 심한 아픔으로, 마음의 상처로 다가오느냐 하면, 자기의 허한 마음을 채워줄 수 있는 방법이 사람 외에는 없었기 때문에 그래요.

가인이 하나님을 믿었거든요? 가인이 하나님을 믿었던 이유가, 자기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서 믿었어요.

원래 인간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딱 들러붙으면서 살도록 되어 있는 게 인간이에요. 그런데 아까

창세기 3장 24절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말씀으로부터 떼어내 버렸어요. 떼어 내버렸으니까 인간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야 할 자리가 붕 뜬 거예요. 허하게 비어 있는 거예요.

그 비어 있는 것을 인간은 뭘로 채우느냐 하면 같은 인간의 마음으로 채우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사람들의 일상생활이 뭐냐? 마음 맞는 사람과 사귀기 위해서, 사람들을 자기한테 끌어당기기 위해 일상생활을 살아가요. 혼자 사는 것이 외로우니까, 고독하니까 그렇게 죽 당겨 본다고요.

특히 튀르키예 영화(Uzak/Distant, 2002)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먼 친척 간인데 남자 둘이 살아요. 그런데 그 동생 되는 사람은 금융인이었는데 직장이 폐쇄되어 쫓겨나 할 것도 없고, 고향에 엄마는 아파서 누워 있어요. 약값이 들어간다고요. 튀르키예의 서울 같은 곳이 이스탄불입니다.

직장 폐쇄된 그 사람이 이스탄불에 있는 먼 친척뻘 되는 사람 집으로 취직할 겸 가요. 자기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으니까 선원이라도 해볼까 하면서 일자리를 찾으러 가는데 그 선박 회사에서 “우리는 사람을 뽑지 않습니다.” 이렇게 된 거예요.

그 영화에서 낯선 남자 두 사람이 먼 친척인데 한집에 살아요. 한집에 둘이 살면 혼자 사는 것보다 서로 반갑고 그래야 하는데, 그 공허함에 고독감에 둘 다 미쳐나가는 거예요. “신발 나란히 해놓으라고 했지? … 화장실에 볼일 보고 물 내리라고 했어, 안 했어?”

촌에서 온 사람은 그런 것은 모르고 그냥 자기 식대로 사는 거예요. 그런데 원래 좀 사는 나이 많은 형님은 자기 방식이 있는 거예요. 자기 방식이 있고, 그 자기 방식대로 자기 아는 사람으로 채웠고, 동생은 동생 방식으로 아는 사람을 채웠는데 둘 다 구멍이 뚫려 있어요.

형뻘 되는 그 사람은 전에 부인이 있었지만 부인에게 다른 남자가 생겨버렸어요. 그래서 이혼하고 캐나다로 이민 가버리고 자기는 구멍이 뻥 뚫려 버렸어요. 둘 다 구멍이 뚫려 있는 거예요. 그 영화가 지루해요. 구멍 뚫린 두 사람이 한집에 살면서 그 공허함을 뭘로 메꿉니까? 메꿀 방법이 없어요.

그 감독(Nuri Bilge Ceylan)이 상을 받았는데요. 그 감독이 하는 이야기가, 현대인들은 도대체 나한테 뭐가 문제인지를 모르고 자꾸 마음 맞는 사람만 찾아다닌다는 거예요. 예를 들면 부부도 마찬가지고 친구도 마찬가지예요. 같은 교인들도 마찬가지고요.

교회 왔잖아요. 와서 이야기를 나눈다고요. 나누게 되면…, 여러분이 이걸 아셔야 해요, 어떤 사람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을 통해서 내 공허함을 채우려고 잘 해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만 무엇도 받아들여야 하느냐? 그 사람이 갖고 있던 공허감도 같이 받아줌으로써 전에 있는 공허함보다 그 직경이, 그 구멍이 더 커져요. 아무리 채우려고 해도 채울 수가 없어요.

지금 북이스라엘이 이런 거예요. 북이스라엘의 사마리아 땅이, 오늘 본문에서 읽지는 않았지만, 열왕기상 13장 32절에 보면 사마리아 땅이 완전히 산당으로 되어 있습니다. 신을 섬기는 우상 숭배로 되어 있어요. 그런데 북이스라엘이 우상 섬기는 사마리아 땅부터 해서 북쪽 이스라엘의 대표자가 누구냐?

여로보암이에요, 여로보암 왕이에요. 여로보암 왕이 하나님을 안 믿는 게 아니에요. 여호와를 안 믿는 것이 아니고 믿기는 믿는데 자기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은 겁니다. 말씀이 없는 거짓 선지자나 말씀이 없는 가짜 제사장 만날 때는 그게 그냥 통했어요. 얼추 그런 식으로 넘어갔어요.

그러나 진짜 말씀만 생각하는 사람을 딱 만나니까 ‘당신 나라의 절반을 준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과 엮이지 말라고 분명히 당부했다. 빠이빠이! 난 당신의 운명이 이렇다고 말씀을 전했고 당신과는 엮일 생각이 없습니다.’라고 해서 가버린 거예요.

이게 북쪽의 사정입니다. 남쪽 유다 나라의 제사장을 얼른 누가 잡았느냐 하면, 북쪽 선지자가 잡았어요. 북쪽 선지자도 북쪽 사람들의 사고방식처럼 말은 하나님의 선지자이지만 자기의 허한 공허감을 사람으로 채우려 했지 말씀으로 채울 방법을 몰랐어요. 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러 남쪽에서 선지자가 오니까 넙죽 받아가지고 자기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당신은 말씀이 있으니까 우리 좋은 관계로 한번 잘해봅시다.” 한 거예요. 그때 하나님께서 남쪽 선지자 보고 “야, 내가 그러지 말라고 했지? 빨리 북쪽에서 떠나라고 했지? 그냥 놔두고 빨리 남쪽으로 귀환해.”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게 아니고 북쪽 선지자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당신 죽이겠대.”라는 말, 남쪽 선지자를 속였던 그 북쪽 선지자에게 그 이야기를 하게 한 이유가 뭐냐? 인간은 그 공허함 자체에다가 아무리 예수님, 하나님, 성령님을 다 동원해 갖다 넣어도 인간은 뭘 감당 못 하느냐? 예수님이 이 땅에 가져왔던 예수님 자체의 공허감을 인간은 감당 하질 못합니다.

그게 마태복음 8장 20절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너 이거 감당할 수 있겠어? 네 공허함 채우기 위해 예수 믿는데 정작 예수님은 우리의 공허함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 자신의 공허감을 주님의 공허감으로 그 구멍을 더 넓히고 찢어 놓는데 이거 감당할 수 있겠어?

여러분, 태풍 중앙에 뭐가 있습니까? 눈이 있죠. 태풍의 눈은 비어 있기 때문에 움직이는 거예요. 내 비어 있는 것을 저쪽 상대방이 꽉 채워줄 거라고 생각하면 그건 인간과 인간이 엮여서 이익될 것이 하나도 없다는 하나님의 창세기 3장 24절의 말씀을 몰라서 그래요.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요…, 지금 세 식구가 여기 왔잖아요? 어떻게, 같이 있어 보니 공허함이 채워지던가요? 인간은 절대로 다른 사람이 내 공허함을 채워줄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를 알려 드릴게요. 그 이유가 뭐냐? 사람은, 타인의 공허함을 통해 다시 나를 정립하기 때문에 그래요. 남을 통해서 나의 완전함을 늘 채워 놓고 그걸 나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꾸 사람을 통해서 나의 충족을 노려요. 나의 외로움을 달래고 고독을 달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은 이 땅에 올 때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무엇보다 못하냐? 공중의 새보다 못하고 여우보다 못한 그런 모습으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왔습니다. 태풍의 눈으로 왔어요. 따라서 오늘 내리는 결론은 이렇습니다. 남쪽 선지자가, 자기가 말씀을 전한다고 생각하면 큰 착오고 오산입니다.

남쪽 선지자가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남쪽 선지자로 하여금 북쪽으로 갔다가 이제는 남쪽 자기 집으로 귀환하는 그 노정에 있어요. 그 노정에 있는데 하나님께서 남쪽 선지자에게 당부한 세 번째 당부를 유념해 보세요.

세 번째가 뭐냐? 왔던 길로 가지 말라는 것, 왔던 길로 다시 가지 말라. 다시 말해서 만약에 선지자가 올라갔던 길로 다시 그대로 내려와 버리면 남쪽 선지자는 ‘내가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충실하게 무사히 성공리에 마치고 나는 성공한 선지자’로서 귀환하는 셈이 돼요.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전하는 자 자체도, ‘말씀 전하는 일을 성공리에 마쳤다’라는 것을 그 말씀에 넣어주지 않습니다.

말씀의 공허함은 누가 채우느냐? 그것은 어떤 인간도 채우지 못하고 말씀 자체가 말씀의 공허함을 채웁니다. 그러면 남쪽 선지자는 말씀 전하고 그냥 죽어버렸으니 북쪽의 죄를 드러냈다는 것은 성과로 보지만 그런 성과에 대한 보상은 없잖아요. ‘본인이 사자에 물려 죽었으니 아무런 보상도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남쪽 선지자가 사자에 물려 죽는데 그게 그 사람에게 보상이었어요. 말씀의 보상은 말씀대로 죽임을 당하는 그거보다 더한 다른 보상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남쪽 선지자의 속에 있는 상처, 공허함, 고독, 외로움은 말씀에 이끌려서 말씀 자체가 그걸 채워줘야 하는 거예요.

채워주는 그것이 열왕기하 23장 18절에 나옵니다. 1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했는데 다시 한번 17절부터 보면 “요시야가 이르되 내게 보이는 저것은 무슨 비석이냐 성읍 사람들이 고하되…” 300년 후의 요시야 왕 때 이야기입니다. “…왕께서 벧엘의 단에 향하여 행하신 이 일을 전하러 유다에서 왔던 하나님의 사람의 묘실이니이다.” 18절에 “가로되 그대로 두고 그 뼈를 옮기지 말라.”

이겁니다. ‘그대로 두고 그 뼈를 옮기지 말라.’ 다시 말해서 남쪽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말씀에 의해서!” 본인이 죽고 싶은 게 아니고, 말씀에 의해서 죽었다는 그 자체로서 남쪽 선지자는 구원받은 겁니다. 그 선지자의 죽음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에 포함되니까요.

자, 이렇습니다. 말씀을 잘 전함으로써 말씀 세계에 포함되는 게 아니고, 말씀에 이끌려서 전한 사람이 말씀에 온전하지 못하다는 점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까발려져서 ‘어떤 인간도 말씀 성취에 끼어들 수 있는 자격이 없다’라는 그런 평가를 받은 채로 죽은 사람, 그 죽은 사람이 말씀속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문장이 좀 길었습니다만, 여러분이 딱 들어보면 아실 거예요. 말씀을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말씀 스스로 지키는데 그 말씀 스스로 지킨다는 것은, 내가 잘 지킨 사람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입각하게 되면 나는 말씀의 성취에 내가 낄 인간이 아닙니다’라는 것을 살아생전에 깨우치면서 죽는 사람은 그냥 죽는 게 아니고 말씀에 의해서 죽는 사람이에요.

이것이 바로 남쪽 선지자입니다. ‘말씀은 말씀에 의해서 스스로 이루어진다.’ 남쪽 선지자와 북쪽 선지자의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조짐으로써 ‘말씀에 의한 이스라엘을, 따로 죽음 형식으로 이스라엘을 성취한다.’라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려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우리 자신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옵소서. 생명나무에서 떨어진 상태로 있으면서도 아직도 우리가 주장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는 것처럼, 어떤 권리가 있는 것처럼 곡해했습니다. 이제는 말씀을 지킴으로써 어떤 이익을 얻을 생각 하지 말고, 말씀에 의해서 죽는다면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그 자체가 성도의 고백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수요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국 표준말  (10) 2025.07.10
저주와 변호  (2) 2025.07.03
중심부  (3) 2025.06.18
제사장 없애기  (5) 2025.06.12
치료냐 구원이냐  (0) 2025.0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