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신분
2025년 6월 15일 본문 말씀 : 예레미야 40:1-6
40:1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과 유다 포로를 바벨론으로 옮기는 중에 예레미야도 잡혀 사슬로 결박되어 가다가 라마에서 해방된 후에 말씀이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40:2 시위대장이 예레미야를 불러다가 이르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곳에 재앙을 선포하시더니
40:3 여호와께서 그 말씀하신 대로 행하셨으니 이는 너희가 여호와께 범죄하고 그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므로 이 일이 너희에게 임한 것이니라
40:4 보라 내가 오늘 네 손의 사슬을 풀어 너를 해방하노니 만일 네가 나와 함께 바벨론으로 가는 것을 선히 여기거든 오라 내가 너를 선대하리라 만일 나와 함께 바벨론으로 가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거든 그만 두라 보라 온 땅이 네 앞에 있나니 네가 선히 여기는 대로 가하게 여기는 곳으로 갈지니라
40:5 예레미야가 아직 돌이키기 전에 그가 다시 이르되 너는 바벨론 왕이 유다 성읍들의 총독으로 세우신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로 돌아가서 그와 함께 백성 중에 거하거나 너의 가하게 여기는 곳으로 가거나 할지니라 하고 그 시위대장이 그에게 양식과 선물을 주어 보내매
40:6 예레미야가 미스바로 가서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로 나아가서 그 땅에 남아 있는 백성 중에서 그와 함께 거하니라
선지자는 침략한 바벨론 군대로부터 우호적인 대우를 받게 됩니다. 그것은 바벨론이 유다 나라를 침공하는 목표에 합치된다고 바벨론쪽에서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쪽의 시위장군이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말씀하신 대로 행하셨으니 이는 너희가 여호와께 범죄하고 그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므로 이 일이 너희에게 임한 것이니라”(렘 40:3)
과연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이방민족이 거론할 말일까요? 이들은 자신들이 정복자 입장에서 느긋하다는 겁니다. 굳이 여호와 하나님 믿지 않더라도 여호와 믿는 유다 민족보다 우월하고 낫다는 겁니다. 정복자 입장에서 예레미야 선지자의 공로를 치하한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선지자 당신은 우리편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민족인 유다 민족이 바벨론에게 항복하도록 강력하게 권했으니 자신들이 하는 일에 협조한 셈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느부사라단 시위대장은 자진해서 예레미야의 처신에 대해서 보호책을 간구했다는 겁니다. 자기를 따라 바벨론 나라에 살아도 좋고, 그다랴라는 주재 총독 밑에서 지내든지 마음대로 선택하라고 합니다.
바로 이런 안목이 역사적 안목입니다. 역사적 안목은 제한적인 대책만 내어놓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역사 속에 놓여 있는 자신의 성격과 본질에 대해서 종합적으로 알 수 있는 방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과 연락을 하고 계신 분입니다. 역사적 존재 뿐만 아니라 초역사적 관계를 성립되어 있는 분입니다.
즉 예레미야 입장에서 보면 느부사라단은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 18:35-36에 보면,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나라가 따로 있고 바로 그 나라를 위해서 선지자가 활동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인간들이 이해하는 역사는 무엇이 되나요? 그것은 언약이 길게 누워있는 양상입니다. 언약이 적용된 것이 역사입니다.
언약이 역사를 만든다는 말은 곧 인간이 제대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안다는 말입니다. 요나 1:12에 보면,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난 선지자가 탄 배가 바다에 침몰 위기를 겪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말해서 그 배에 동승한 사람들은 제대로 자기 자신을 아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요나 선지자는 죄인일까요 아니면 희생물일까요? 선지자가 비록 하나님의 명을 어겨 도망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선지자의 효용성을 발휘토록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원성이 선지자의 지상 활동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대기업에 취업을 해도 대단하게 여깁니다. 하물며 영원한 천국에 영원히 취업되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여기서 우리 보통 인간들의 역사 안의 삶이 얼마나 제한된 안목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미다스 왕이 등장합니다. 그가 손대면 모조리 황금이 되는 신기한 능력이 있는 왕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한 가지 약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귀가 당나귀 귀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이 약점은 자기만 알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약점을 알고 있는 자가 또 있었으니 그것은 왕을 이발해주는 이발사였습니다.
당연히 이발사는 발설하지 못합니다. 그랬다가는 당장 죽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음으로 왕의 비밀을 간직하는 것을 견딜 수 없어 어느날 산에 가서 몰래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말입니다. 그랬더니만 비로소 속이 시원하고 뚫렸습니다. 하지만 지숲의 나무들이 이 이야기를 들었고 바람이 나무들을 살랑살앙 불어주니 온 나라가 불어오는 바람에 섞여 들여오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우리네 인생이란 것은 역사적으로 인식이 제한됩니다. 하지만 언약적으로 봐서는 우리네 인생이란, 왜 우리가 굳이 죽어야만 하는지 그 이유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입니다. 아무리 요리조리 피해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자신을 산 자가 살아남아야 할 그 어떤 정당성과 이유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언약적으로 봐서 인간은 근원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민수기 21:5-6에 보면,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고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성립됩니다. 인간들이 뱀에서 물린 겁니까 아니면 뱀이 인간은 물은 겁니까? 뱀이 인간들을 물은 겁니다. 죽어 마땅한 존재들인 인간들을 그동안 하나님께서 꾸준히 먹이시고 입히시면서 광야의, 척박한 환경을 이끄셨던 겁니다. 진즉에 죽어도 할 말이 없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뱀을 똑바로 쳐다보게 하셨습니다. 놋뱀을 만들어 그들 가운데 세우게 하셨습니다. 즉 놋뱀의 존재를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다루어왔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처럼 언약의 세상, 즉 말씀의 세계에 대해서 인간들은 빠져 나갈 수가 없습니다. 유다 나라를 정복했다고 승리를 도취되어 있는 바벨론 민족은 자신의 앞길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전혀 알 지를 못합니다.
예레미야는 일반인들이 선택하는 길, 편안하게 여유로운 정복자의 삶 속에서 평안을 누리는 것을 거절합니다. 지속적으로 실시되는 하나님의 언약이 여전히 유다 땅에서 실시되는 한 그는 약속의 땅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대상영속성’ 즉, 하나님은 인간들이 일시적으로 써먹을 대상이 아니라 사라버려도 여전히 계신 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의 건방짐과 교만함을 놓치지 않고 목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58강-예레미야 40장 1~6절(영원한 신분)250615-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40장 1~6절입니다. 구약성경 1119페이지입니다.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과 유다 포로를 바벨론으로 옮기는 중에 예레미야도 잡혀 사슬로 결박되어 가다가 라마에서 해방된 후에 말씀이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시위대장이 예레미야를 불러다가 이르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곳에 이 재앙을 선포하시더니, 여호와께서 그 말씀하신대로 행하셨으니 이는 너희가 여호와께 범죄하고 그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므로 이 일이 너희에게 임한 것이니라, 보라 내가 오늘 네 손의 사슬을 풀어 너를 해방하노니 만일 네가 나와 함께 바벨론으로 가는 것을 선히 여기거든 오라 내가 너를 선대하리라 만일 나와 함께 바벨론으로 가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거든 그만 두라 보라 온 땅이 네 앞에 있나니 네가 선히 여기는대로 가하게 여기는 곳으로 갈찌니라, 예레미야가 아직 돌이키기 전에 그가 다시 이르되 너는 바벨론 왕이 유다 성읍들의 총독으로 세우신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로 돌아가서 그와 함께 백성 중에 거하거나 너의 가하게 여기는 곳으로 가거나 할찌니라 하고 그 시위대장이 그에게 양식과 선물을 주어 보내매, 예레미야가 미스바로 가서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로 나아가서 그 땅에 남아 있는 백성 중에서 그와 함께 거하니라”
예레미야에게는 수직적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떨어지는데,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은 바벨론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수직적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내려오는 것보다, 수평적으로 인간 대 인간의 관계로써 통할 수 있는 말만 하면 설득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평소에 자기가 남들에게 듣고 싶은 말, 자기가 남들과의 관계 맺음을, 그대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도 적용 가능하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선지자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에요. 선지자는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신분’ 영원한 신분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한 직장에 취직한 거, 천국에 취직한 거예요. 대단하지 않습니까? 편의점에 취직해도 보통이 아닌데, 영원한 천국에 취직이 되었다는 말은, 어떻게 표현할까요. 자식이 대기업 가도 난리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천국에 합격했다는 거, 이 기쁨을 이루 말할 수가 없지요. 어떻게,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 어떻게 영원한 신분으로 취업이 가능하냐. 바로 그런 점에서, 이 이방 민족의 사람은 거기에 대해서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껏 자기에게 잘해주는 대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이방 민족은 모르고, 선지자는 아는 거, 그 차이가 뭐냐 하면, 선지자 입장에서는 이렇습니다.
모든 역사는 언약이 적용되는 것이다. 언약의 자기 적용이 바로, 역사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눕혀져 있는 거, 이 지상에 땅처럼 평평하게 누워있으면 그게 역사예요. 역사에서 언약을 끄집어내는 자가 선지자, 오늘날 같으면 성도, 그런데 역사 속에서 언약을 꺼내지 못한다면 그건 불신자, 언약 바깥에 있는 존재, 그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느부사라단의 입을 통해서 이야기하면서, 예레미야가 이야기하는 것과 시위 대장 느부사라단이 이야기하는 것과의 차이점을 보시기 바랍니다. 2절부터 나오지요. “사령관이 예레미야를 불러다가 이르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곳에 이 재난을 선포하시더니”라고 여기서 하나님을 거론합니다. 참, 불신자가 하나님 거론할 때, 참 듣는 입장에서 가슴이 아파요. ‘네가 하나님도 모르면서, 믿지도 않으면서...’ 자꾸 하나님, 하나님 거론하는 겁니다.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너희 민족들이 하나님 말씀을 안 들어서 하나님에게 벌 받았다’라고 하는 거예요. 어디서 들은 풍월은 있는 모양이죠. “너희가 너희 하나님에게 범죄 해서, 청종치 아니함으로, 우리 바벨론 나라가 너희를 치게 되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얼른 보면, 다 맞는 소리 같은데, 이 이방 민족, 이 사람이 하는 이야기에 틀린 거, 잘못된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 언약을 해석할 때는, 반드시 ‘그래서 내가 죄인이다’라는 이 요소가 나와줘야 해요. 말씀을 거론할 때.
‘너 하나님께 벌 받았어.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진작에 말씀대로 살지’라고 이렇게 말해버리면, 본인 자신의 잘못은 거기에서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정보가 아니에요. 이런 내용을 전한다는 것이 아니고, 나를 통해서, 나의 죄와 더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전도죠.
사도행전 10장에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전도할 때, ‘고넬료야 이리 와. 내가 복음 전할게’라고 이러지 않았어요.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먼저 언급합니다. 베드로에게 천사가 가서 “여기 보자기에 있는 것들을 먹어라”라고 하니까,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거절합니다. “율법에 위반되는 것은 안 먹습니다” 베드로도 굉장히 억울한 것이, ‘이방 민족에게 전도해라’라고 이렇게 딱 나오면, ‘전도해야지요. 전도할게요’라고 하는데, 이방 민족에게 하라는 것은 전혀 언급 없이, 천사가 보자기에 있는 걸 먹으라고 하는 거예요.
보자기에 있는 걸 보니까, 율법에서는 먹지 말라고 하는 것들이에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율법에서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은 평소부터 지켜왔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시험하시는군요. 저는 안 먹습니다’라고 했어요. 세 번씩이나 먹으라고 했는데, 안 먹었어요. 나중에 보니까, 그 더러운 거, 율법에 의해서 먹지 못하는 것이, 그게 이방 민족이었습니다.
그냥 이방 민족에게 전하라고 하면 되는데, 왜 율법을 가지고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기 뜻과 위배 되는 말씀을 주시면서 먹으라고 하는 이유가, ‘내가 복음 전한다’라는 것을 주께서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이 나를 사용하는 것은 맞는데, 내가 전한다는, 괜찮은 나, 복음에 대해서 얼추 아는 나, 복음에 대해서 잘 정립된 내가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항상 시작과 끝이,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하게 하셔서, 나를 사용하셔서 한다는 그런 내용이 늘 우리 안에 남아 있어야 해요. 내가 세상 사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하실 일이 있어서, 아직도 나에게 목숨이 있게 하시는 구나를, 항상 이런 모습으로 이 땅에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지상에 살아가는 영원한 신분, 선지자의 모습입니다.
선지자에 대해서 바로, 느부사라단 이방 민족은 어떤 한계를 드러내요. 한계는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방 민족은 역사를 그 역사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안목을 가지고 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시 말씀드리면, 코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을 느부사라단은 전혀 모르고 있어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면 예레미야는 다 아냐?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맡긴 것이기 때문에, 몰라도 되죠. 그것은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굳이 알 필요가 없지요. 그냥 알아서 하실 거죠. 그런데 역사 속에 있는 이 사람들은 내가 모르게 되면 불안하고 초조하기 그지없어요. 항상 바들바들 떨고 있는 거예요. 역사의 한계에서, 그들은 벗어나지 못합니다.
한 가지 더 예를 들면, 요한복음 18장에 나오는 본디오빌라도가 예수님 붙들고 하는 대화 가운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33절) 라고 물어요. 본디오빌라도 하는 이야기는 ‘내가 왕이다’라는 거죠. 그런데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그렇게 한 겁니다. 자기가 총독의 자리에 있으니까, 일종에 유대에서는 왕 같은 역할을 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물어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께서는 “그렇다”라고 하시죠. ‘그런데 어떻게, 유대인들이 유대인의 왕인 너를 고발했지? 뭐가 틀어졌나? 왕이면서 왕 대접을 못 받는 거, 당신은 이것을 어떻게 참을 수 있겠어?’라고 빈정대고 비아냥거리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왕이라고 하면서 백성들에게 인기도 없고 환영도 받지 못하는 그게 무슨 왕이냐.
그러니까 예수님의 하시는 말씀이 명쾌합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빌라도야, 너는 나를 재판할 권한이 없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자기 주제도 모르고 나를 재판한다. 자기 분수도 모르고 나를 재판한다. 그래서 이방 민족, 빌라도도 마찬가지고 느부사라단도 마찬가지고,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몰라요.
선지자가 있는 이유는, 바로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 어떻게 됩니까?’라고 자꾸 이런 것을, 기독교에서 보면 예수님 재림에 대해서도 그렇고, 궁금해서 묻는 사람들이 많은데, ‘네 주제나 파악하세요. 네 주제나. 그런 거 하지 말고. 네가 어떤 인간인지를 파악하라고. 네가’ 자꾸 하나님 스케줄 파악해서 천당 갈 생각만 하고 있단 말이죠.
상당히 어려운 말인데요, 요한계시록 17장 3절에 보면,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상당히 어려운 말인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역사만 알고, 미래만 자꾸 궁금해하고, 이란 전쟁은 언제 끝나는지, 맨날 관심사가 우크라이나 전쟁 언제 끝날 것인가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무식한지 뭘 모르느냐 하면, 자기 몸에 덕지덕지 하나님에 대해서 모독하는 걸로 낙서 되어 있다는 사실을 몰라요.
사람이 점잖고 곱게 살아가면, 본인이 깨끗하게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고, 선지자에게 관심 없고, 예수님에게 관심 없으면, 자신의 온 몸 전체가 주님에 대한 조롱과 모독과 멸시와 같은 걸로, 살아온 세월만큼 거기에 낙서를, 꼼꼼하게 낙서를 한 몸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걸 요한계시록 17장에서는 더러운 음녀라고 해요. 더러운 여자라고 했어요. 예를 들면 이런 거죠. ‘뉴진스가 어떻게 되겠느냐?’ 뉴진스(NewJeans)라고 여자 아이돌 가수 그룹인데, 지금 소송을 하고 있는 모양이에요. ‘뉴진스 노래해도 되는가?’라고 할 때, 방금 그 말을 본디오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질문합니다. ‘예수님, 뉴진스가 계속 활동할 수 있겠습니까? 방탄소년단 제대했는데, 같이 연합체로 할까요, 개인으로 할까요?’라고 물으면 주님께서 뭐라고 할까요?
“이 낙서 봐. 낙서. 이 모습 좀 봐. 이게 하나님 조롱하는 거잖아. 봐. 네 인생이 좀 봐. 뉴진스인지 뉴진즈인지 걱정하지 말고 네 인생이나 걱정해. 네 인생이나. 이거 가만히 보니 지금 배가 부르고만. 이런 거 묻는 거 보니 배불러”
지난 강남강의에서 제가 언급했던 선지자 한 사람 나옵니다. 요나 선지자입니다. 그 강의 가운데 이런 게 있었어요. ‘여러분, 두 배가 있는데, 하나는 침몰하는 배, 다른 하나는 침몰 안 하는 배, 여러분 어느 것을 타고 싶습니까?’라고 하면, 물어보나 마나, 침몰 안 하는 배를 타고 싶지요. 그런데 침몰 안 하는 배는 선지자가 안 타고 있고, 침몰하는 배는 요나 선지자가 탔는데, 여러분 어느 배에 타시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나라는 것이 누군지, 진짜 내 인생이 뭔지를 한순간이라도, 사도바울처럼 한순간이라도 내가 근원적으로 누구인지를 아는 순간, 선지자에 탄 배를 타고 ‘나 죽었다. 이제 나 죽었어’라는 이런 경험이 맞닥뜨려져야 해요. 뉴진스인가 그런 거 신경쓰지 말고, 이란 이스라엘 전쟁, 지금 그게 심각한 게 아니에요. 석유값 오르는 그게 심각한 게 아니에요.
네 주제나 하세요. 네 주제나. 네가 얼마나 심각한지 모르고 있잖아. 선지자가 왜 있습니까? 선지자는 영원한 신분이에요. 그런데 인간은 역사 속에 자기 신분을 유지하면서, ‘뭐, 이 정도 해도 인생 괜찮다’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정답은 이겁니다. 과연 요나 선지자가 나쁜 사람이냐, 아니면 희생물이냐는 겁니다. 여러분, 요나 선지자는 희생물입니다.
희생물을 선지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주신 겁니다. 요나 선지자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걱정할 거 없습니다. 나를 잡아다가 물속으로 던지면, 여러분이 편안히 가실 수 있습니다”라고 해서 거기 사람들이 요나 선지자를 물속에 던졌더니, 그다음 이야기는 풍랑이 잔잔해지고 그들은 평안히 갔지요. 그렇다면, 요나 선지자와 함께 배를 탔던 사람들이 뭘 느끼겠습니까?
‘하나님에게 까불면 당한다. 된통 당한다’라는 것을 잠시나마, 그들은 느꼈겠지요. 정말 하나님이 다루시는 분이, 실제로 영원한 신분자가, 실제로 이 땅에 출현하고 있다는 그게, 그들에게는 심각하게 다가와야 합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이건 옛날 신화 이야기인데, ‘마이다스’ 또는 ‘미다스’라는 왕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왕관을 깊숙이 쓰고 있어요.
그 사람이 유명한 것은 얼마나 그 사람 손에 능력이 있는지, 손만 대면 다 금으로 변하는, 마이다스의 손이라고도 하잖아요, 미다스라는 임금이 있었는데, 그 사람에게 약점이 있었던 거예요. 이건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뭐든지 황금으로 만드는, 진짜 존경하고 부러워할 만한 신의 능력으로 가득 차 있을 듯한 느낌을 가진 그런 사람인데, 그 약점을 본인만 알고 있어요. 본인의 약점이 뭐냐. 귀가 당나귀 귀예요.
이 세상에 그 약점을 아는 사람은 본인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임금이 이발을 해야하기 때문에, 이발사가 그 약점을 알고 있었어요. 왕관을 벗어야 이발을 하지요. 그래서 왕이, ‘네가 이걸 발설하면 너 죽어!’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죽지요’ 그렇게 이발을 계속 하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거예요. 본인이. 참을 수가 없어서, 도저히 못 참겠다 싶어서, 정신병 걸릴 것 같아서, 숲속으로 가서 혼자 외칩니다.
그게 주일날 오후 4시 30분에 KBS에서 방영하는 ‘임금님(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프로가 있어요. 임금님 귀는 당나귀라고 해놓고, 속이 다 시원한 거죠. 그런데 임금님과 이발사 둘 다 몰랐던 점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말했더니만, 숲에 바람이 불어서, 살랑살랑 바람이 부니까 숲에 나무가 흔들리면서, 그 소리가 임금님 살고 있는 궁궐까지 바람 소리로 전파가 된 거예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것을 온 사람이 다 알게 되어버렸어요. 이게 뭐냐 하면, ‘그러니까 사람은 약점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라는 것이 아니고, 선지자가 하는 이야기, 하나님의 언약이 하는 이야기는 이런 겁니다. 인생이라 하는 것은, 내가 죽어야 할 이유와 이유들을 끌어모을 기간이 우리 인생 기간이에요. 그걸 미리 알면 안 됩니까? ‘이건 약점이야. 이건 들키면 안 돼. 바들바들. 이건 장점이니까 마음껏 발설해도 괜찮아’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나만 알면 되지, 너만 알아야 해, 이렇게 하지 말고, 근원적으로 내가 죽어야 할 이유를 언약의 바람이 불어서 이미 말씀 안에 그게 다 들어있다는 거예요. 시간 관계상 한 가지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민수기 21장에서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원망했지요.
원망했을 때, 불 뱀이 나타나서 백성들을 물었습니다. 이제 제가 여러분에게 물을 차례입니다. 백성들이 뱀에게 물렸습니까? 아니면 뱀이 인간을 물었습니까? 이게 중요해요. 왜냐 하면, 뱀이 물고 그 현장을 떠난 게 아니에요. 오롯이 그 가운데에 놋뱀이 딱 고정되었어요. 이걸 대상 영속성(object permanence)이라고 하는데, 대상이 사라져도, 그 대상이 살아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 대상 영속성이라고 합니다.
뱀이 여기 있으니까, 이건 인간이 잘못해서 뱀에게 물린 것이 아니고 원래 뱀에게 물린 그 본성을 가진 너희들을 그동안 하나님의 은혜로 먹여주시고, 입히시고, 반석에서 물 주시고, 그렇게 끌고 온 거예요. 그러다가 그들이 더 이상 참지 못해서 본성이 드러난 겁니다. 우리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죽잖아요. 요양병원에 가든, 어떠하든 결국 죽는단 말이죠.
죽을 때, ‘하나님, 왜 죽이십니까?’라고 하지 마세요. 태어날 때부터, 원래 죽을 때까지, 죽는 이유가 언약적으로 차곡차곡, 말씀적으로 차곡차곡 채워놓고 죽이시는 겁니다. 그럴 때, 이렇게 하면 됩니다. 죄지어서 죽었다고 하지 말고 언약에 의해서, 언약을 드러내려고, 언약을 실현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죄 용서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지금껏 죄 많은 우리를 끌고 오셨다고 이야기하세요. 그게 바로 오늘날 영원한 신분자, 선지자인 성도입니다. 그런 자만이 천국 가서 영원히 일찍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을 찬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보는 거, 이제는 바꾸게 하옵소서. 역사적으로 나를 평가하거나 판단하지 말고, 십자가 앞에서 언약적으로 내가 어떤 식으로 은혜를 받고 있고 어떤 식으로 죄를 짓고 있느냐를 양쪽 다 파악할 수 있는 그런 성령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