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수의 세계
2025년 6월 22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40:7-12
40:7 들에 있는 군대장관들과 그들의 사람들이 바벨론 왕이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를 이 땅 총독으로 세우고 남녀와 유아와 바벨론으로 옮기지 아니한 빈민을 그에게 위임하였다 함을 듣고
40:8 그들 곧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과 가레아의 두 아들 요하난과 요나단과 단후멧의 아들 스라야와 느도바 사람 에배의 아들들과 마아가 사람의 아들 여사냐와 그들의 사람들이 미스바로 가서 그다랴에게 이르니
40:9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가 그들과 그들의 사람들에게 맹세하며 가로되 너희는 갈대아인 섬기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이 땅에 거하여 바벨론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유익하리라
40:10 나는 미스바에 거하여 우리에게로 오는 갈대아인을 섬기리니 너희는 포도주와 여름 실과와 기름을 모아 그릇에 저축하고 너희의 얻은 성읍들에 거하라 하니라
40:11 모압과 암몬 자손 중과 에돔과 모든 지방에 있는 유다인도 바벨론 왕이 유다에 사람을 남겨 둔 것과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를 그들의 위에 세웠다 함을 듣고
40:12 그 모든 유다인이 쫓겨났던 각처에서 돌아와 유다 땅 미스바 그다랴에게 이르러 포도주와 여름 실과를 심히 많이 모으니라
이스라엘이 살던 땅이 과연 이스라엘의 땅일까요 아니면 하나님 땅일까요? 사람들은 자신들이 오랫동안 대대로 점유하면 자기 땅이라고 간주합니다. 강력한 소유의식이 발동해서 기어이 이 땅을 지켜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포로 잡혀가지 않고 남아 있는 자들의 의식이 ‘당연히 이 땅은 이스라엘 땅이다’고 경향을 보입니다.
따라서 새로 부임해 온 바벨론의 행정관에 해당되는 총독은 이스라엘 땅의 현지민을 이해하고 그들을 포섭하려는 노력을 시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주장합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군사력에 밀려서 바벨론 제국에 점령당했지만 하지만 정서적으로 어디까지나 이 땅은 이스라엘 땅이라는 겁니다.
여기에 대한 바벨론 당국의 회유책은 경제부흥입니다. “잘 살게 해줄게.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는가”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종교가 삶의 필수적이라고 하지만 잘 사는 것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정복자 바벨론의 입장이면서 이스라엘의 입장인 겁니다. 그러면서 바벨론은 하나의 조건을 더 제시합니다.
그것은 친 바벨론 정책입니다. 즉 바벨론 제국에 전적으로 협조하고 신앙도 정복자의 종교로 일원화해야 한다는 겁니다. 마치 일제 시대 때, 일본정부가 조선 사람에게 자기들이 믿은 왕 제도에 굴복해서 황국신민이 되기를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정복이라는 것이 단순히 물리적이고 신체적인 정복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적인 복속도 포함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생각은 이 바벨론 정책에 동의하는 겁니까? 아니면 민족 해방운동을 펼치는 이스라엘 편일까요? 어느 편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입니다. “이 땅에서 살 생각하지 말고 과연 너희들이 이 땅에서 살 수 있는 존재인가를 생각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은 늘 일관성을 유지합니다.
인간은 평소에 자신에게 쏟아지는 하나님의 변수가 얼마나 많은 지를 모릅니다. 그저 자신이 고대하고 기대하는 목적 달성에만 정신을 쏟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햇빛과 공기와 단비와 목숨과 죄 사함에 대한 전적인 고마움을 잊고 삽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땅에 바벨론이라는 이방민족으로 점령케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바로 변수의 확대입니다. 변수가 늘어나면 날수록 인간들의 속 좁은 생각의 한계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사사기 2:20-23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 열조와 세운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은즉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둔 열국을 다시는 그들의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그 열국을 머물러두사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시며 여호수아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셨음이 이를 인함이었더라” 즉 우리네 인생사에서 일어나고 벌어지는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시험하시는 일입니다.
이것은 우리들보고 ‘제대로 살라’는 차원이 아니라 ‘숱한 변수를 고려하지 않는 태도가 수시로 많은 죄를 범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이는 마치 시멘트 양생 과정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네 골목에서 집 외부를 단장하는데 있어 시멘트가 부어지게 되는데, “들어가지 마세요”라고 앞에 팻말이 붙이게 됩니다.
그런데 며칠 후, 시멘트가 다 굳어서 합판을 떼보면 거기에 개 발자국이 여러 개 남아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들어가지 마세요’라는 글씨를 개들이 읽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말씀을 보면,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 속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개같은 자들의 발자국이 그대로 양생되어 굳어져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의 근본 뜻에 대해서 무지해서 그저 “나는 이 땅에 살 자격을 갖추었다”고 함부로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 자세로는 아무리 여호와 하나님을 찾아도 그것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같이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독자적인 자기 의도와 삶의 기대와 목적을 따로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주기도문에 잘 함축되어 있습니다. 주기도문의 취지는 이러합니다. ‘인간들이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 아무런 소용도 없고 의미도 없다. 모든 의미있는 것은 예수님의 일방적 업적이다’는 겁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주님에 대해 결코 독자적이지 않는 태도를 보여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3:36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얼마나 비-종속적 태도입니까! 즉 “죽으면 죽었지 주님 없이는 살기 싫습니다”라는 마음가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듯 주님에 대한 자발적 예속을 보여주는 베드로이지만 예수님께서 잡혔을 때, 그 근처에서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배신의 발언한 것도 여과없이 성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 전체가 바로 인간들의 호작질을 구성 요소로 집어넣고 있다는 겁니다. 이는 성경을 통해서 성도 자신들의 생각이 얼마나 자기 중심적으로 걸려지고 있느냐를 보여주는 겁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데 거기에는 세 가지 원칙이 작용합니다.
하나는 주저없이 전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남김없이 전한다는 겁니다.
세째는 아무리 전해도 알아먹지 못하는 말을 전한다는 겁니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행 28:26-28)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성도로 하여금 그동안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모든 변수들을 알려주신다는 겁니다. 복수는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하십니다. 인간은 자기 복수할 권한이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에게는 애초에 이 세상에 살 자격이 자동적으로 부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정복자는 이스라엘 현지 주민들이나 그동안 죄인에게 퍼부어주신 은혜를 전제로 자기자신의 죄를 알아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이 자기를 위한 복수를 할 수 없듯이 자기를 위한 변명도 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59강-예레미야 40장 7~12절(변수의 세계)250622-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40장 7~12절입니다. 구약성경 1119페이지입니다.
“들에 있는 군대장관들과 그들의 사람들이 바벨론 왕이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를 이 땅 총독으로 세우고 남녀와 유아와 바벨론으로 옮기지 아니한 빈민을 그에게 위임하였다 함을 듣고, 그들 곧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과 가레아의 두 아들 요하난과 요나단과 단후멧의 아들 스라야와 느도바 사람 에배의 아들들과 마아가 사람의 아들 여사냐와 그들의 사람들이 미스바로 가서 그다랴에게 이르니,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가 그들과 그들의 사람들에게 맹세하며 가로되 너희는 갈대아인 섬기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이 땅에 거하여 바벨론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유익하리라, 나는 미스바에 거하여 우리에게로 오는 갈대아인을 섬기리니 너희는 포도주와 여름 실과와 기름을 모아 그릇에 저축하고 너희의 얻은 성읍들에 거하라 하니라, 모압과 암몬 자손 중과 에돔과 모든 지방에 있는 유다인도 바벨론 왕이 유다에 사람을 남겨 둔 것과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를 그들의 위에 세웠다 함을 듣고, 그 모든 유다인이 쫓겨났던 각처에서 돌아와 유다 땅 미스바 그다랴에게 이르러 포도주와 여름 실과를 심히 많이 모으니라”
여기 명칭들이 많이 나와 있는데, 그 명칭들은 그 당시 포로 잡혀가지 아니하고, 포로 간 것이 아니라 강제조치 당하지 아니하고 그냥 고향에서 살던 유력한 사람들의 명단이 여기 나와 있습니다. 이들은 나중에 총독으로 온 한 사람을 암살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일제 초반에 안중근이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을 암살했잖아요.
그처럼, 이걸 국수주의라고 하는데, 이 땅은 우리 땅이고 이 땅에서 우리를 통치할 사람은 남의 민족이 아니고 우리가 선출한, 또는 우리가 왕으로 인정한 사람에게만 우리가 합당하게 복종할 마음이 있는 것이지, 힘 좀 있다고, 군사력 좀 있다고 해서, 함부로 이 땅을 점령한 그들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은 거예요. 복수할 것만 찾고 있습니다.
여기서 복수라는 것은, 대대로 이스라엘 이 땅은 우리 것이고, 바벨론 너희들은 침범했다고 해서, 너희 땅이라고 할 수 없다는 그러한 복수심이 그들 자신에게는 상당히 신앙적인 복수심처럼 이해가 될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신앙적인 자존심도 자존심으로 간주해서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복수는 어떻게 하느냐. 성령을 통해서 복수해요.
성령으로 외에 다른 방식으로는 하나님께서 복수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이 인간에게 잘못했다고 복수해 주는 분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복수는 ‘내 아들에 대해서 너희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라는 그것만이 절대적 기준입니다. 내 아들에 대해서. 심지어 교회 열심히 다니고, 신학박사고, 목사까지 됐으면서도, 여전히 자기 안에 자기 자존심이 있다면, 그 자존심을 가진 교회 오래 다닌 그들이 하나님의 복수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성경 말씀 자체가 너에게 무슨 문제가 있느냐를, 이것부터 출발하라는 겁니다.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느냐. 오늘 설교 결론을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미리 말씀드리면, 지금 오늘 예레미야 본문에 나온 사람은, ‘우리가 사는 땅인데, 왜 다른 민족이 와서 여기서 대장질하고, 떵떵거리면서 자기에게 복종하라고 하느냐? 나가라! 우리의 독립은 멈추지 않을 거다. 독립투사가 한둘이 아니야. 의병이 일어나고 반발할 거야. 물론 고관대작 지도층들은 다 와해 되고 포로 잡혀갔지만, 우리 남아 있는 사람끼리라도 모아서 독립운동을 계속할 거야’라고 생각해서 그들은 거룩한 하나님 보시기에도 올바른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들의 관심사는 뭐냐.
우리가 이 땅에 계속 살아야 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 독립투사로 나서는 이러한 사람들, 유력한 인사들은 나중에 총독에 대해서 반발하게 되는데요, 이들은, 특히 이스마엘 같은 사람이 대표적인데, 이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뭐냐. 우리가 살 곳은 여기라는 겁니다. 여러분이 생각해 보세요.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과 관련해서 뭐가 잘못된 겁니까? 꼭 일제가 와서 우리를 압박하고 수탈하고 모든 것을 빼앗아 가야, 그게 정의롭고 속이 시원한 일입니까?
우리 민족이 사는 땅, 대대로 오천 년 유구한 역사를 우리가 지키는 것이 우리 민족 입장에서는 이게 정당한 것이지, 이게 잘못되었다고 누가 이야기하겠어요? 윤봉길, 이봉창, 안중근은 유명한 세 명의 의사(義士)잖아요. 목숨도 가차 없이 버리고 도시락(벤또) 던지고 했던 사람들, 총독부를 공격한 사람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이겁니다. ‘이 땅에 내가 살 수 없구나’가 아니라 ‘내가 살아서는 안 되는 존재인 것을 내가 과연 아느냐’라는 겁니다.
우리가 계속 이 땅에서 ‘하나님이여, 살기 힘듭니다’라고 하는데, 살기 힘들게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잖아요. 네가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네가 언제부터 너의 주장을 했느냐는 겁니다. 우리가 베드로에 대해서 그렇게 비난하는데, 진짜 베드로의 마음가짐만 되어도 대단한 신앙입니다. 요한복음 13장 36절에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이건 애도 아니고 참.
그냥 ‘주님 없이는 못 살겠습니다’라는 말을 달리하면 이렇게 돼요. ‘나는 내가 사는 것이 의미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하지 않으면 그냥 사는 것은 의미 없습니다. 나 혼자 살면, 나는 안 살 겁니다’라는 이런 태도. 그런 태도가 달리 표현하면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마치 아이가 엄마가 장에 가도, ‘어머니, 어디로 가십니까?’라는 태도. 요새로 하면, ‘어머니, 코스트코에 가십니까? 어머니, 다이소에 가십니까?’라고 이렇게 바뀔 거예요.
‘너는 이제 너대로 혼자 살아. 다 큰 아이가 엄마를 찾고 있어’라고 이렇게 나무라겠지만, 우리 주님은 바로 이런 자세를 귀하게 보십니다. 반대로 이런 마음 자세가 언제 날아갈까 싶어서, 주님께서 늘 말씀으로 주시는 겁니다. 자, 성경 말씀은 뭐냐. 성경 말씀은 우리 인간들이 어떤 호작질을 했는지를 그대로 남겨두어서, 이걸 그대로 굳힌 것이 성경이에요.
어릴 때부터, 길을 지나가다 보면, 가게나 집에서 집을 수리하잖아요. 할 때, 시멘트를 발라놓고, 시멘트 양생(養生)하기 위해서 ‘들어가지 마세요’라고 푯말을 붙여놓는다고요. 그걸 보면서 ‘저거 다 굳을 때까지 아무도 들어가면 안 되는데...’라는 생각에 괜히 내가 조마조마했는데, 나중에 시멘트 다 굳어서 뜯어보면요, 누가 들어갔어요. 그게 누구냐 하면, 개가 들어갔어요.
개 발자국이 남아 있어요. 우리 현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양생하는 곳을 개가 턱턱 밟아서 발자국이 남아 있더란 말이죠. 들어가지 말라는 말을 못 알아듣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성경 말씀이 그래요. 성경 말씀은, ‘구원받고 싶습니다. 천국 가고 싶습니다’라는 그런 말씀이 아니라, ‘네 주제 파악부터 먼저 하세요’라는 이 말을 사람들은 못 알아들어요.
사도행전 전체에서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사도에게 부탁한 세 가지 전도 원칙이 있습니다. 세 가지 전도 원칙. 간단합니다. 여러분도 들으면 기억할 겁니다. 첫째, 주저 없이 전해라. 둘째, 남김없이 전해라. 셋째, 들어도 알 수 없는 말을 전해라. 사도행전 4장에는 베드로가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을 전하니까, 그들이 전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너희들 한번 생각해 봐라. 하나님의 말 듣는 것이 좋으냐, 사람의 말 듣는 것이 좋으냐. 내가 너희들 말 듣는 사람 아니잖아. 하나님의 말을 듣고 전하는데, 너희들은 왜 같은 인간 대 인간으로 처리할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느냐.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다”(행4:19) 이렇게 주저 없이 전했어요.
‘이건 다음에 전해야지’라는 이런 거 없습니다. 다음이 어디 있어요. 오늘 저녁에 죽으면 끝나는데. 남김없이 전했어요. 주저 없이, 남김없이, 눈치코치 안 보고, 사람들 평가 고려하지 않고, 남김없이 그대로 전했어요. ‘이거 전하면 교인들 하나도 안 나올 건데...’ 오든 안 오든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남김없이 전했습니다. 특히 사도행전 28장 마지막에,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말을, 지금껏 성령께서 나에게 전하라고 했다. 따라서 너희 중에 혹시나 믿는 자가 있다면, 이건 내가 말빨 좋아서 믿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직접 너희를 찾아온 결과다”
고린도전서에도 이게 나와요. “내가 전한 것은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과 그 능력으로 인해 이걸 믿게 되었다”(고전2:4) 그러면 이 세 가지 원칙이 되려면, 특히 세 번째, 들어도 알 수 없는 내용이 되려면, 이 계시 내용에 뭐가 삽입되어야 하냐면, 인간이 인간적으로 까불다가 망해버린 내용이, 마치 시멘트 양생과정에서 개가 함부로 들어간 것처럼, 인간의 약점이 성경에 구석구석 박혀있게 되는 거예요.
그 성경을 보면서, 철딱서니 없이, 허락 없이 들어가서 호작질한 그 개의 발자국이 바로 나의 발자국이고, 더 중요한 것은 내 발자국이 찍혀야 이게 계시가 된다는 겁니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하던 그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배신했잖아요. 주께서 원하는 마음도 적혀 있고, 주님을 배신하는 그것도 그대로 성경에 적혀 있어요. 그러니까 그걸 합치면 뭐냐.
인간 존재의 의미는 하나님의 계시 형성 과정에 들어간다. 그러면 첫 번째로 생각해 봅시다. 인간은 자신을 알아야 한다. 인간은 자신을 어떻게 아느냐. 성경을 통해서 보게 되면, 인간이 자신을 아는 데 있어서 많은 변수, 많은 원인을 여기에 막 집어넣어요. 집어넣게 되면 인간들의 공통된 반응이 뭐냐. ‘그것까지는 알았지만, 이런 게 거기에 개입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라는 식으로 반응해요.
예를 들어 사사기 같은 경우에는 여러 차례 나오는데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은 여호와를 믿어요. 믿는데, 어떻게 믿느냐 하면, ‘야, 여기 살기 좋네’라고 좋은 땅에 사는 걸 목적으로, 그것을 고대하고 기대하면서 이스라엘 땅에 살았습니다. 뭐를 빠뜨렸느냐. ‘과연 내가 여기 살만한 가치가 있느냐. 나는 살아도 되는 존재냐’라는 이걸 자기에게 되묻지 않았어요.
‘야, 땅 좋다. 이건 그냥 주신 것이니, 우리에게 살라고 준 땅이다. 왜? 우리는 살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라고 일방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사기 2장 21~23절에 보면, 하나님의 뜻은 그 뜻이 아니었습니다.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둔 열국을 다시는 그들의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지킨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행하나 아니 행하나 시험하기 위해서. 이게 변수거든요. 이게 오늘날 삶 속에도 이 말씀이 똑같은 차원에서 우리에게 제공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우리가 원해서 내가 선택했다고 하는데, 그건 아닙니다. 신랑감이나 신부감이나 심지어 자식들까지, 그 모든 일어난 일은 주께서 그의 도를 행하나 아니 행하나 테스트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붙여준 거예요.
어떤 경상도 가정에, 딸아이가 있는데, 딸이 어릴 때 할머니에게서 자라서 사투리를 많이 배웠던 모양이에요. 다시 부모에게 돌아가는데, 딸이 40개월 되었어요. 이름이 도아예요. 그 아이가 부모 말을 잘 듣겠다고 마음에 작심해요. 그런데 부모는 그 아이를 지켜보고 테스트 하는 거죠. 도아가 있는 식구 중에 먼저 살았던 10년 된 선배가 있어요. 개입니다.
그 개 이름이 성탄이에요. 상당히 은혜롭죠. 이 둘이 맛있는 케이크를 앞에 두고 40개월 된 아이에게도 ‘먹지 마!’라고 했고, 성탄이라는 개에게도 ‘먹지 마!’라고 했어요. 개는 그 맛있는 빵의 냄새를 다 느끼면서, 이제 열 살이니까, 개 나이 열 살이면 노인네거든요, 벌써 눈치코치 다 있어서 먹지 말라고 하니까 가만히 있는데, 이 40개월 된 아이가 참지를 못하는 거예요.
참다 참다 못 참아서, 자기 인생 선배 되는 성탄이에게 이렇게 하는 거예요. ‘핥아~핥아~’ 왜 그것을 시켰느냐 하면, 둘 다 참다가 케이크가 무너져서, 무너지고 나니까 먹을 타이밍이 왔다고 생각한 겁니다. 무너져도 개는 이무기처럼 도사가 되어서 가만히 있는데, 옆에서 자꾸 부추기는 거예요. ‘핥아라’ 그렇게 해서 개가 핥으면, 자기는 참았는데 개가 먼저 핥아서 자기는 먹어도 정당이 보장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40개월 아이는 10년 된 성탄이라는 개보다 변수 확보가 좁아요. 변수를 제대로 확보를 못 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죄인으로 만드는 변수를 어떻게 정리하느냐 하면, 이 세상 전체를 동원해서 인간을 죄인 만드시는 일을 하십니다. 가만히 있어도 우리는 이 땅에 살 수 없는 존재인 거예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왜 꿈을 꾸는가.
꿈꾸는 이유는 지구의 자전 때문에 꿈을 꿔요. 지난 겨울 수련회에서 제가 설명했습니다. 지구가 자전하게 되면, 인간 속에 있는 대뇌 세포가, 뇌는 아는데 인간은 모르는 자전의 변수에 적응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운동을 관측하는 세포와 그것을 이미지, 그림으로, 동영상으로 뽑아내는 기능을 하는 뇌 부위가 달라요.
잠을 자면 운동이 멈추고, 멈추고 나면 뇌의 가소성(뇌 부위가 유동적으로 변하는 것)으로, 옆에 이미지를 뽑아내는 부위의 그것이 운동하는 기억을 가져가서 두뇌에 밸런스를 맞추는 거예요. 꿈 속에서 자기가 날아다니고,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난리도 아니에요. 이것이 뭐냐. 지구 자전의 영향력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인간들은 자기 한계에 갇혀서 자기가 고대하고 계획하고 기획한 거, 그것에만 꽂혀서, 거기에 필요한 변수들만 고려하고 나머지는 전부 다 놓쳐버리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정답은 이미 성경에 그것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지 나와 있습니다. 그 정답 중에 주기도문입니다.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 주기도문의 내용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해도 아무 소용없고 무의미하다. 일어나는 모든 일은 주기도문대로 주께서 일방적으로 일으키지, 우리가 애쓴다고 주기도문을 지키는 것이 아니에요. 그리고 이 변수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인간의 미래는 이미 존재합니다. 미래가 존재해요.
그러나 자기 목표와 계획이 있는 사람은 자기 목표를 미래에 남겨둬요.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고 존재 과정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인간이 얼마나 자기에게 너무 빠져있어서, 자기 의로움과 자기 정당성 챙기는 것에 급급하다 보니까, 이건 봉사(맹인) 이상으로 눈이 완전히 감겼어요. 눈이 조금이라도 뜬 사람 같으면요, 다른 세계를 이야기합니다.
그중에 한 예를 들고 제가 마치겠습니다. 뉴턴(Isaac Newton, 1642년 12월 25일~1726년/1727년 3월 20일, 영국의 수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이라는 사람은 페스트(흑사병)라는 병 때문에 고향으로 왔는데, 뭘 봤느냐 하면, 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모든 세계는 서로 당기는 힘이 있다고 했어요. 서로(만유)가 당긴다(인력)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독일태생, 1879년 3월 14일~1955년 4월 18일, 이론물리학자)은 그것보다 더해요. 자기가 특허청에 일반 평사원으로 근무하면서 계속 물리적 법칙을 연구하고 있는데, 가만히 창문을 내다보는데, 맞은편 건물에서 어떤 청소부가 청소하다가 발을 헛디뎌서 건물 위층에서 떨어졌어요. 다른 사람 같으면 신고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바로 저거다!’
거기에서 발견한 것이 뭐냐 하면, 인간은 중력 가속도에서는 자기 질량을 느끼지 못한다는 그것을 발견해서 노벨상 탔어요. 그래서 상대성 원리를 발견한 겁니다. 숨어 있는 변수를 어떻게 포집하느냐에 따라서, 나의 그동안 몰랐던 죄가 주께서 준비하신 변수를 통해서, 나는 전적으로 무지몽매하고 내가 하는 일은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이것이 우리한테 행하시는 성령을 통한 복수예요.
이미 구원 시켜놓고 복수하는 거예요. “내 일 방해 좀 하지 마. 네가 알 긴 뭘 알아. 내가 다 했는데. 미래는 이미 존재해.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하면 천국 간다고? 이미 천국은 존재해”라고 하시는 거죠. 천국에 존재하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이제부터 왜 죄인을 부르지 않고 의인을 부르러 왔느냐를 주께서 양생한 말씀의 양생 과정에서 우리가 저질러놓은 엉뚱한 개 호작질 발자국을 우리의 발자국으로 찾아보는 일을 주께서 하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바벨론 총독이 두 가지 정책을 했는데, 하나는 친바벨론 정책, ‘바벨론 사람에게 복종하세요’, 그리고 두 번째는 경제부흥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여러분 아직은 가난하지만 언젠가는 부흥됩니다’ 얼마나 국가적으로 좋은 정책입니까. 그런데 그 정책의 잘못은 뭐냐. ‘당신들은 왜 이 땅에 살다가 쫓겨났습니까?’라는 그걸 바벨론 총독은 말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지도자를 원합니까? ‘앞으로 못하기만 해봐라. 태극기부대 동원한다’라고 이러지 마시고, ‘과연 우리가 왜 아직도 살고 있는지, 그럴만한 인간인지’라는 이걸 일깨워 주는 것은 성령이 친히 우리가 투표하지 않은 지도자로서 우리에게 함께 있다는 거,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절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말씀을 통해 알려 주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너무 소견이 좁고 아집적이고 나 중심적이었습니다. 그래 놓고도 자기 잘못은 모르고, 항상 이거 내놔라, 저것 내놔라, 우리의 못 된 습관, 이 자체가 말씀을 통해서 죄로 규명되는 즐거움과 감사가 이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