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팅된 사람
2025년 6월 29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41:1-3
41:1 칠월에 왕의 종친 엘리사마의 손자 느다냐의 아들 왕의 장관 이스마엘이 열 사람과 함께 미스바로 가서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이르러 미스바에서 함께 떡을 먹다가
41:2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과 그와 함께 한 열 사람이 일어나서 바벨론 왕의 그 땅 총독으로 세운 바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를 칼로 쳐죽였고
41:3 이스마엘이 또 미스바에서 그다랴와 함께한 모든 유다인과 거기 있는 갈대아 군사를 죽였더라
약속의 땅에서 살던 사람으로서 자기 땅에 타인이 침입했다는 것은 엄청나게 자존심이 상한 상태입니다. 따라서 분노가 가라앉지 않습니다. 뭐라도 해야되겠지요. 그리고 자신의 이 분노를 거룩한 자존심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이스마엘이라는 사람은 이스라엘과 바벨론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고 여깁니다.
비록 대규모적으로 전쟁은 이스라엘이 패배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잡혀 갔지만 자신들이 그냥 약속의 땅, 곧 가나안 땅에 남아서 테러라든지 소규모 전쟁으로 자신의 땅을 접수한 바벨론의 점령군과 전쟁을 이어나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어진 하나님의 뜻은 명확합니다.
그냥 바벨론 사람이 되라는 겁니다. 그들의 땅에서 장사하고 농사짓고 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에 잡혀가는 세월이 오랫동안 진행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굴욕적인 하나님의 예언을 이스마엘을 못받아들이는 겁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뭘까요?
이사야 53:5에 나옵니다.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주님의 찾아오심은 우리를 근원적으로 가망성 없는 하나님의 원수라고 지목하고 찾아오십니다.
어떤 멋진 신기로움으로 우리를 현혹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조차도 미처 모르는 우리의 참된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비참한 몰골로 나타내시므로서 알려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마엘은 이러한 방식의 하나님의 조치를 못받아들이는 겁니다. 즉 이스라엘의 잘못한 것이 얼마나 크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자신들의 처지가 한없이 낮아진 것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억지로 극복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잘못된 시도는 출애굽기 2장에서 철없는 생속의 모세가 이미 시도한 적이 있습니다.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고역함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에 감추니라”(출 2:11-12)
왜 하나님께서는 거룩함을 표방하고 자진해서 하나님편에 서서 살려는 자를 도와주지 않는 겁니까? 그것은 모세의 방식과 하나님 방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힘으로 쓰는 자는 힘, 칼로 쓰는 자는 칼로 망하는데 그 이유는, 이 땅에 그 누구도 정의롭다고 규정받은 위인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인간적으로 타인이나 권력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갈 뿐입니다. 신약에 오게 되면 성령받은 자가 등장합니다. 스데반 집사입니다. 사도행전 7장은 스데반 집사의 긴 설교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 설교 끝에 스데반집사님은 화난 군중들에게 사정없는 돌을 맞아서 참혹하게 죽게 되는데 여기서 우리는 이점을 알아야 합니다.
도대체 스데반의 어떤 내용이 이스라엘 군중을 화나게 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구약 이스라엘 역사를 거론하면서 선지자의 존재 의의에 대해서 기존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즉 어떤 의미를 파악하는 데 있는 ‘나의 정당함’을 중심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신 사건‘을 중심으로 해서 파악해야 하는 겁니다.
모세가 예언한 그 한 선지자가 바로 유대인들이 맞아죽인 의인, 곧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행 7:37, 52)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시는 이유가 인간들 마음 속에 하나님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을 들추어내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바로 이런 식의 성경과 이스라엘 역사 이해가 성령님의 이해입니다. 성령을 설교한 스데반 집사를 그 당시 성령 받지 않는 유대인들이 돌로 처참하게 죽였겁니다.
죽어도 싸다는 심정으로 그들은 스데반집사를 죽였습니다. 그들 유대인들은 소위 하나님 믿는 자로서 비천하게 살기 싫다는 겁니다. 그저 의롭고 바르게 살고 싶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알고 복음을 믿어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자들은 결코 자신의 우수함과 자신의 대단함으로 이 세상을 성과를 남기를 것을 고대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일반인이었다가 성도가 된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구성해놓으신 두 개의 상반된 세계의 차이를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이를 때 구원받은 자들은 지옥가는 자들과 어떤 차이나는 실존을 갖추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인물의 계시화‘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홀로 두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코팅하시는 겁니다.
말씀으로 코팅이 되면 이는 더 이상 개인의 행함이나 활동이 그 사람의 것으로 되돌아가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 16:22에,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에게 있어 ’죽음‘이라는 제일 심각한 일이 잖아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별 중요하지도 않는 일입니다. 마치 방과 방 사이에 턱을 넘는 식으로 후딱 넘어가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살아 있을 때와 죽고 난 뒤의 세상과의 대칭성입니다. 바로 예레미야에게 당부한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냥 바벨론 치하에 살아있는 것과 고마워하며 살아라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는 거지 나사로처럼 살아도 상관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천국이라는 대칭성 있는 세계가 죽음 이후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의미를 가지지 않고 예수님과 함께 죽는 그 죽음에 중심을 둔 계시로 인해 종속된 숫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 7:5에 나옵니다. “ 유다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이라는 표현같은 겁니다. 요한계시록 21:16-17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
이 숫자나 단위에서 성도는 예수님과 동일한 본질을 공유하게 될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에서 굴욕적인 삶을 서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기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60강-예레미야 41장 1~3절(코팅된 사람)250629-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41장 1~3절입니다. 구약성경 1119페이지입니다.
“칠월에 왕의 종친 엘리사마의 손자 느다냐의 아들 왕의 장관 이스마엘이 열 사람과 함께 미스바로 가서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이르러 미스바에서 함께 떡을 먹다가,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과 그와 함께한 열 사람이 일어나서 바벨론 왕의 그 땅 총독으로 세운바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를 칼로 쳐죽였고, 이스마엘이 또 미스바에서 그다랴와 함께한 모든 유다인과 거기 있는 갈대아 군사를 죽였더라”
독립운동한 겁니다. 네가 뭔데, 이 땅을 차지할 권한이 없는 이방 민족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에 왜, 네가 함부로 들어오는가.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당신들을 당신들의 나라로 되돌려보내고, 이 나라의 땅을 우리들의 것으로 차지할 의무와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따라서 지금 이스마엘이라는 이 사람은 정당성, 하나님 보시기에 정당한 권리를 행사한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준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 따라서 몸 바쳐서, 논개 비슷하죠, 몸 바쳐서 약속 성취를 위해서 한 겁니다. 이거는 이미 모세가 애굽에 있을 때, 실패했다는 것이 이미 드러났잖아요. 애굽종족인 네가 히브리 종족을 왜 협박하느냐. 너 내 손에 한번죽어 볼래? 그렇게 죽여놓고 모세는 현상금 걸리니까 도망쳤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솔직하게 인간적으로 하나님에게 잘해보려는 사람을 왜 이렇게 일이 잘 안 풀리도록 그렇게 조치하시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땅을 점유할 자격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는 대목이 나오는데요, 돌에 맞는 대목만 생각하지 말고, 우리는 스데반 집사가 어떤 설교를 했기에 그들의 분노를 유발시키는가, 도대체 스데반 집사의 어느 대목이 그들로 하여금 짱돌을 쥘 수밖에 없는 그런 설교를 했는가 하는 거기에 주목해야 합니다.
스데반 집사가 하는 설교 내용을 쭉 보게 되면, 딱 하나로 요약됩니다. 이스라엘이 너희를 해방할 선지자를 기다렸는데, 그거는 잘못된 선지자다. 진짜 선지자는 너희들을 책망하는 선지자다. 딱 요 이야기했어요. 다른 이야기 안 하고 딱 그 이야기했어요. 하나님이 너희를 책망하니까, 너희 조상들은 그 선지자를 족족 죽여버렸다.
마지막 때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인 예수님을 보냈다. 그런데 너희가 예수님을 어떻게 했는가. 죽였잖아. 그런데 그 예수님이 누구인가. 모세가 예언한 그 선지자다. 이야기가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 유대인들이 뭐라고 반발하겠어요? 우리가 뭐? 우리가 뭐 사적인 것을 챙겼어? 우리가 하나님을 버렸어? 우리가 하나님을 잊었느냔 이 말이야.
아니야. 하나님이 주신 땅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데, 그런 우리를 옹호할 생각은 안 하고 우리를 오히려 선지자를 죽였다고 하며, 우리 반대편에 섰다. 그러면 당신 같은 존재는 우리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하는데, 전혀 도움 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당신은 우리 손에 죽어 마땅하다. 이렇게 분노가 일어난 거예요.
적어도 스데반 집사 설교 듣고 분노할 거 같으면요, 신앙이 보통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냥 왔다 갔다, 믿든 안 믿든, 나는 내 일만 챙긴다는 사람들은 스데반 집사를 왜 죽이겠어요. 그냥 너는 너대로 놀고 나는 나대로 놀자고 끝나면 될 문제인데, ‘우리는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였다’라는 그 이야기했다고, 그거 종교적인 이야기 아닙니까.
돈 문제가 아니잖아요. 여러분, 요즘 종교적인 문제 때문에 그렇게 신경을 씁니까? 아니잖아요. 제가 언젠가 그런 설교 했잖아요. 인간을 가장 화나게 할 때는 내 돈을 가져갔을 때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뭐 몇 마디 종교 이야기한 것이 그렇게 화가 나던가요? 알았어요~알았어요~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 예요~너나 잘 하세요~
그런데 그 스데반 집사에 대해서 호응하는 본문이 나와 있어요. 그게 뭐냐. 스데반 집사는 성령에 충만해서 설교했다. 야~~스데반 집사는 성령에 충만했고, 이로 인하여 스데반 집사를 때리는 사람은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이라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러면 다시 오늘 본문 예레미야로 돌아옵시다. 예레미야에 있어서 그 이스마엘 사람은 성령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주가 시키지도 않았어요. 선지자도 아닙니다. 그러면 뭐냐. 자기 자존심이죠. 자기 열성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 저 사람 저격시키고 나는 잡혀서 죽을래’라고 하면 그 사람은 안중근 정도는 됩니다. 이미 죽기 전에 손가락 끊고 나서 나 죽었다 치고 이토히로부미를 총으로 쏴서 죽였잖아요. 그런데, 이스마엘 이 사람은 그게 아니에요.
어떤 집단을 형성하려고 한 겁니다. ‘나를 따르라. 내가 이렇게 의로운 일 할 때, 하나님이 우리 편에 섰으니까, 여러분은 나를 따르시길 바랍니다. 나처럼 정의롭게’라고 하며 몇 명을 모았느냐. 뭐 많이 모으지는 않았어요. 10명 모았어요. 10명을 모았는데, 그들이 무장했지요. 무장을 하고 드디어 그 시대 총독, 일본인 총독 같은 거죠. 요새 말하면 점령부대의 총독을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재미있게 풀리는 거예요. 이게 총독을 살해했으면, 이스마엘이 그런 행동을 했으면, 뭔가 궐기할 줄 알았어요. ‘우리가 압제당하는데, 그 우두머리를 처단했지만, 아직은 바벨론과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우리 민족의 저력을 한번 보여줍시다’라고 궐기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에요.
오히려 그 이스마엘을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이라는 사람이 체포에 나섰습니다. 총독은 죽고, 같은 민족이 와서 이스마엘과 싸워서 그를 죽였어요. 그리고 같이 있던 사람도 데려왔어요. 그렇게 데려왔는데, 요하난이라는 사람이 또 어떤 사람이냐 하면, ‘야, 망나니 같은 이상한 게 있어서, 총독을 건드리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 줄 모르고, 이걸 어쩌냐’
바벨론 제국과 유대 나라와 게임이 됩니까? 게임이 안 되죠. 어디 미국을 건드려요. 이건 게임이 안 되잖아요. 게임이 안 될 때는 사는 방법이 뭡니까? 바로 미국과 이란이 싸울 때, 싸움이 안 되잖아요. 핵시설은 완전히 박살 났고.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이란 가운데서 미국 편에 서면 됩니다. 이야기가 이렇게 하면 굉장히 간단한데, 복잡해요.
미국 편에 딱 서려고 하니까, 문제는 미국이 내가 이스마엘 죽이고, 내가 이런 공로를 세웠다고 할 때, 미국이 나를 내칠 것 같아요. 바벨론이 나를 칠 거 같아요. ‘너도 마찬가지야’라고 칠 거 같아요. 그래서 요하난은 사람들을 모아서 어디로 도망가느냐. 애굽으로 도망가요. 그러니까 여기서 몇 명 죽었어요? 이스마엘 죽었지요, 총독 죽었지요, 요하난은 애굽으로 도망갔지요.
약속의 땅에서 일어나는 죽음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면, 율법에 위반했기 때문에 죽는 죽음이라는 겁니다. 율법을 어기면 죽는다고 했으니까. 하나님의 뜻은 이겁니다. 정의롭고 혁명적인 발상 하지 말고, 나라 구할 생각하지 말고, 자기 죄를 안 다면 그냥 지배자에게 아무 소리 하지 말고, ‘아이고, 고맙습니다. 살려주니 고맙습니다’라고 이렇게 빌빌 기면서 살라는 겁니다.
여러분은 그걸 굴욕적이다, 비굴하다고 이렇게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그걸 복인 줄 알라고 하시는 겁니다. 복인 줄 알아라, 이것들아! 이게 왜 복이라고 이해를 못 합니까? 도대체 뭐가 그렇게 대차서, 본인이 뭐가 그렇게 대단해서 빌빌거리면서 불신자에게 굴복하고 사는 것이 왜 복이 아닙니까. 불신자가 살려준다고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살려줬잖아요.
해석을 그렇게 하면 되잖아요. 이해를 그렇게 하면 되잖아요. 신앙적 양심을 거기서 왜 찾아요. 여러분 분명히 아셔야 해요. 내가 살고 싶다고 더 사는 것이 아니에요. 죽고 싶다고 죽는 것도 아닙니다. 주께서 살려주니까 사는 겁니다. 왜 살려주는지 이유는 몰라요. 그냥 살려주는 것이 주님의 작품이니까 사는 거예요.
이제부터 살려주시는 이유에 대해서, 이제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뜻은, “그냥 아무 소리 말고 그냥 살아” 뭐 점령지이고 이스라엘은 우리 땅이고 그런 소리 하지 말고 살아. 그냥 하나님의 뜻대로 ‘고맙습니다’라고 하면서 그냥 살면 됩니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특히. 자, 그러면 왜 살려주시는가.
얼마 전에 유튜브를 보니까, 성당미사를 드리고 밖에 나오니까 예수님의 구름이 뜬 거예요. 어떤 남자 형상처럼 구름이 딱 있더란 말이죠. 그러니까 사람들은 ‘와~성당 위에 예수님이 떴다’라고 해서 유튜브에 소식들이 많이 올라와 있어요. 제가 그 구름을 보니까 진짜 예수님 같아요. 저는 예수님을 본 적이 없지만, 그런 거 같아요. 자, 여기서 한번 봅시다.
예수님이 그런 식으로 나타나던가요. 첫째, 누굴 위해서 주님께서 그런 식으로 나타나던가. 구름이라도 보여줄 테니, 이거 믿고 성당에 다니라고 나타난 것은 아니거든요. 그러면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이사야 53장 5절에 나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이 방식 외에 주님이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지를 않습니다. 고난입니다. 억울한 고난. 핍박이에요. 낮에 이야기한 것처럼 아무도 못 알아봐요. 예수 당신은 죽을만해서 죽었다는 겁니다. 성령이 온다는 것은 그냥 ‘예수님이구나’라고 이게 아니고, 성령이 온다는 것은 인간의 한도를 넘어서 버리는 겁니다. 인간의 예상을 넘어서서 이미 오셨다.
‘오신다’가 아니라, 이미 ‘오셨다’라는 것을 한도를 넘어서 버리는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다시 지난날을 다시 이해하게 하는 것이 성령입니다. ‘아, 일이 잘못되었구나. 죽이지 말아야 할 것을 죽였네’라는 이게 성령이 온 겁니다. 그런데 아까 스데반 집사도 성령이 충만했죠. 성령 받은 스데반 집사도 이미 그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데 그 시대에 스데반 집사를 죽였습니다.
죽이고 난 뒤에 사도바울에게, ‘하아, 건들지 말아야 할 자를 건들었구나’라고 하면서 등장한 인물이 누구냐 하면 사울이고, 그 사람이 사도가 된 거예요. 여기서, 왜 하나님께서는 일을 왜 꼭 그렇게, 지나가서 후회하면서 믿어지는 그 믿음만 허락하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내가 구원받는데, 내가 애시당초 기여할 게 없다는 사실을 우리 몸에 담는 거예요.
그러면 이야기가 이렇게 되면, 뭐 간단하네. 내가 예수님을 잘 몰랐는데, 성령 받고 난 뒤에 예수님을 알았으니까, 나는 이제 살았으니까, 앞으로는 주님만 증거하겠습니다. 이러면 되겠다고 생각하잖아요. 이게 그렇게 말 같이 쉬운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는 작업을 합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잖아요. 옮긴 사람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계시로 바꿔요. 계시.
쉽게 말해서 냉동 동결시키는 거예요. 꽁꽁 얼음이 얼게 만들어요. 사람을 얼게 만들려면 얼음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방법은 말씀이 우리의 새로 구원받은 자를 새로 코팅해 버립니다. 그것도 낱개로 코팅해 버려요. 낱개로 코팅해버리면 성도는 뭐가 되느냐 하면, 숫자가 됩니다. 단위가 되어요. 단위가 되고 숫자로 되면, 하나하나 하나님의 성전에 벽돌로 투입되면서 말씀으로 코팅되기 때문에, 성전을 구성하는 집사든, 장로든, 목사든, 평신도든, 성전을 구성하도록 모이게 되면, 코팅과 코팅의 연접에 의한 하나님의 성전으로 구성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으로 코팅할 때, 안에 코팅되는 본 내용이 어떤 것이냐 하면, “너는 네 구원에 아무것도 한 게 없어. 너는 육적인 오해와 분란만 일으켰어”라는 내용을 고스란히 담은 채, 말씀으로 코팅해 버립니다. 제가 이렇게 하면, ‘그러면 저는 숫자로 뭐가 됩니까?’라는 것이 궁금해질 수가 있어요. 지금 나만 궁금한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인간이 계시 화 되고 낱개로 숫자 화 될 때, 비로소 요한계시록이 이제야 풀리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이. 요한계시록 7장 5절에 보면, 유다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1만 2천이라고 나옵니다. “유다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사람에게 할 때, ‘똑바로 해. 잘해. 제대로 하란 말이야’라고 이렇게 명령조로 이야기하게 되면, 우리는 코팅되지 않은 채, 괜찮은 나로 전환되잖아요.
그런데 요한계시록 특징 중 하나가, 성도를 어떻게 표현했느냐 하면, 어린양을 따라가는 자라고 했어요. 지상에서는 ‘어린양을 따라가는 자’, 하늘나라에서는 ‘피로써 흰옷을 입고 오는 자’ 그냥 하나의 명사로 말해요. 명사로. 그러니까 이 말은 코팅된 게, 확정된 내용으로 코팅된 거예요. 과연 요한계시록이 그러한지, 요한계시록 10장 끝부분과 11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거기에 성도가 안 죽는다는 말이 아니에요. 거기 10장 끝에 보면, 9절에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버리라” 책은 말씀이죠, 그걸 먹었어요. 먹고 나니,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입에는 달죠. 코팅이 되어 있으니까. 속에서는 쓰죠. 내 육적인 본성과 섞이니까 아프지요.
그런데 단순히 ‘써. 쓰기는 쓴데, 나중에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천국 갈 때까지 견디면 되지’라고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11장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뭘 하라는 것이 아니에요. 뭘 하라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복음을 전하니까, 누가 이기느냐 하면, 복음 전하는 자가 패배하고 복음을 받았던 자가 두 감람나무를 죽여버려요.
죽이니까 누가 승리하는가. 이 세상이 승리해요. 승리하고 난 뒤에 그 시체가 있는데, 그곳이 어디냐 하면, 11장 8절에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그러면 간단해요.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건져놓고, 그것을 딱딱한 벽돌, 주께서 가지고 놀 수 있는 명사로 만들어 놓고, 그 명사로 하여금 그 사람이 가는 곳이 어느 곳에 가든지 십자가 사건, 십자가 사건, 십자가 사건, 미국 가도 십자가 사건, 캐나다 가도 십자가 사건, 미국에서 여기까지 와도 십자가 사건, 교회 와도 십자가, 교회 밖으로 나가도 십자가, 직장에서도 십자가, 십자가 사건이 되게 하는데, 특징이 뭐냐. 세상의 자본주의에 패배하고 있다는 거.
그러니까 오늘 말씀이 뭐냐. 그냥 자본주의 주는 대로, 그냥 고맙게 여기고 먹으세요. 이미 끝난 상태예요. 구원은 이미 완료가 되어버렸어요. 바르게 산다고 세상 구원되는 게 아니고, 누가 주든 ‘고맙습니다’라고 받아먹으면 돼요. 왜냐 하면 내 자존심? 이미 동결되었는데 무슨 자존심이 있어요. 내 위신? 말씀이 코팅해 버렸는데요.
어떤 이는 말할 겁니다. ‘아, 그렇게 말로만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만은, 살면서 내가 죽을까 봐 두렵습니다’라는 사람도 가끔 있어요. 그런 사람에게 저는 누가복음 16장 22절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여러분 찾아볼 필요 없어요. 다 알아요. 부자가 살고, 맞은편에 거지가 있어요. 그런데 그 대목에서 참 재미있는 게 있어요.
부자와 거지 이야기를 할 때, 죽는 이야기가 그냥 넘어가요. 22절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몇 자 되지도 않아요. 우리에게 가장 두렵고 떨리는 내가 죽는 이야기가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냥 문턱 넘는 것 정도도 안 돼요. 그냥 훅 지나가요. 인간은 원래 죽게 되어 있어.
지금 죽는 게 문제가 아니야. 인간은 죽고 나면, 대칭성이 발생해요. 죽고 난 뒤에 본래 모습과 대칭되는 살아있을 때의 거지 모습. 그러니까 죽는다는 것은, 말씀에 코팅된 성도의 죽는 것은, 성도가 죽고 난 뒤에 천국 가는 그 모습과 성도가 죽기 전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빌빌거리면서, ‘거지도 아니고 저건 배알도 없어. 저거 좋다고 받아먹는 거 봐. 아이고, 나 같으면 정말 화낼 만한데, 저건 거지도 아니고 저거 뭐야’
거지와 떵떵거리며 천국에 사는 그것에 죽음이라는 것은 그냥 칸막이고 거울이에요. 거울. 투명 거울. 그냥 대조가 된다는 겁니다. 이건 뭐냐? 천국 가서 살 생각하면, 자본주의에서 빌빌거리는 것이 그게 뭐가 그렇게 화가 나느냔 말이죠. 그게 뭐 그렇게 속상한 이야기냐는 말이죠. 누구에게? 말씀에 의해서 이미 코팅된 사람에게.
그러니까 성도는 뭐냐. 2중성이에요. 이중성. 왔다갔다해요. 애매모호해요. 부산 KBS 정재희 아나운서가 노래를 부르는데, 이런 노래를 불러요. 제가 보기에는 상당히 모호성을 잘 묘사한 노래인데, ‘동쪽에서 바라보면 여섯 개로 보이고, 서쪽에서 쳐다보면 다섯 개로 보이는, 오륙도 돌고 돌며 나래 치는 내가 바로 기장 갈매기~’ (제목-기장 갈매기, 가수-나훈아)
오륙도가 이렇게 되어 있어요. 만조 때는 섬이 5개예요. 그런데 물이 빠지면 섬이 6개입니다. 그래서 오도(五島)라고 해도 애매하고 육도(六島)라고 해도 애매한데, 성도가 그래요. 성령이 들어오고 사랑이 들어오면 주님과 하나 되가, ‘세상에 아이고 더러워라. 뭐 어차피 내 살 세상도 아닌데...’라고 이렇게 되다가, 갑자기 성령이 약간 빠져버리면, ‘안 돼. 내가 저거 손 봐야 해. 내가 너에게 당할 줄 아느냐. 내가 게임에서 질 줄 아느냐’라고 나오는 이거.
정재희 아나운서에게 좀 배우세요. 사랑? 해운대에서 사랑하고 영도에서 이별하고, 남천동의 밤을 꼬신다고 그렇게 나와요. 기장 갈매기가 이렇게 애매하듯이, 애매함, 모호함을 주시는 이유가, 다시 ‘나 성도야. 나 코팅되었어. 나 구원받았어. 그러니 내가 하는 독립운동은 의미 있는 거야’라고 이렇게 자화상을 또 굳히지 말란 말이죠. 이미 하나님의 숫자 화 된 거예요.
숫자 화 된 거에서 더 나가면, 단위 화 되었어요. 킬로그램(kg), 센티미터(cm), 이렇게 앞에 어떤 숫자가 붙더라도 5cm든 6cm든 그 ‘센티미터’가 갖고 있는 본질성은 변함이 없다. 예수님 자체가 이 땅에 단위니까, 단위의 동일한 본질을 공유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주의 성령 받은 생명의 사람을 주께서 그렇게 말씀으로 코팅화시켜 주는 겁니다. 이게 신약의 세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되고 싶은 나 자체가 주께서 애초부터 허락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에 갇혀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제목-기장 갈매기, 가수-나훈아)
동쪽에서 바라보면 여섯 개로 보이고
서쪽에서 쳐다보면 다섯 개로 보이는
오륙도 돌고 돌며 나래 치는 내가 바로
내가 바로 기장 갈매기다
사랑 따윈 누가 뭐래도 믿지 않는다
이별 따윈 상관없다 떠나든 말든
어차피 사랑이란 왔다가는 파도처럼
가버리면 그만인 거야
오늘은 해운대서 사랑을 하고
내일은 영도에서 이별을 하고
또다시 남천동의 밤을 꼬신다
내가 바로 기장 갈매기다
내 청춘은 누가 뭐래도 의리 하나다
빈 주머닌 상관없다 없어도 그만
어차피 인생이란 밀물처럼 왔다가
썰물처럼 가버리는 것
오늘은 다대포에서 낙조에 취하고
내일은 송도에서 일출에 잠 깨고
내친김에 광안대교도 접수를 한다
내가 바로 기장 갈매기다